박제가는 당시 청대 문예사조에 큰 관심을 가졌다.그는 전통적인 기존사고에 구속받지 않고 비록 夷狄의 것이라도 좋은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3)){ }^{3)} 특히 박제가는 사물이 각기 나름대로의 모양과 특징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서로가 이해하고 존중해야 하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대하지 말기를 바랬다.
청대 문학은 이미 명대 중반부터 많은 발전이 있었다.청대가 되어서도 문학 사조는 여전히 발전해 갔다.청대 소설은 통속성과 시민계층의 의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평민 독자들의 큰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며,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 들은 당시 성장하는 시민층을 대변하는 청대소설을 직접적으로 수용하고,자신들 의 문체에 반영했다.박제가는 奎章閣 檢書官에 있을 때부터 당시 청대 白話小說과 그 비평문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박제가가 청대 소설에 심취하고 있을 때 이 덕무는 일찍이 이러한 박제가의 문체에 대해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그대는 병의 빌미를 아시오.金人瑞 4 )(명말 金聖嘆의 별명)는 나쁜 사림이며《西廂記》는 나쁜 책이오.그대는 병석에 누워 심기를 안정시켜 담박하고 조 용함으로 걱정과 병을 막아내는 방패로 삼지 않고 붓으로 쓰고 눈으로 살피고
마음을 씀에 그 어느 것이나 김인서가 아닌 것이 없으면서 도리어 의원 을 맞 아 약을 의논하려 한다니 그대는 어찌하여 깊이 깨닫지 못하시오?바라건대 그대는 人瑞를 붓끌으로 討誅하고 손수 2 책을 불살라버린 다음에 다시 나와 같은 사림을 맞아다가 날로『논어』를 강독하여야 병이 나을 것이오.내일 雀館•物軒•西郭의 유생들과 東郊에 나아가 단풍 속에서 술을 마시며 하루 동 안 묵어서 돌아오기로 약속했는데 그대는 나쁜 사림(김인서를 가리킨다)의 피 해를 입어 이 좋은 모임에 갈이 놀지 못하게 되었으니 몹시 가증하오.5)
소설은 우초신지 이어받았고, 小説續虞初
방언 은 揚雄으로 보충했네. 方言補揚氏.
그네 들 삶 모두 다 그림 같으며, 生涯總畫圖.
속된 언어 모두들 문리에 맞네. 俚語皆文理 ^(7))| 소설은 우초신지 이어받았고, | 小説續虞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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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 은 揚雄으로 보충했네. | 方言補揚氏. |
| 그네 들 삶 모두 다 그림 같으며, | 生涯總畫圖. |
| 속된 언어 모두들 문리에 맞네. | 俚語皆文理 ${ }^{7)}$ |
이 시에서"虞初"는 본래 인명인데 西漢 河南(지금은 하남성 洛陽)사람으로『漢書•藝文志』에는 소설가로 기록되어 있다.후세 사람들은 늘 이 사람의 이름을 필기체 소설의 별칭으로 불렀다.박제가는 소설은 『우초신지』를 계승했고,방언은 양웅으로 더했으며,우리들의 삶은 모두 그림 같고,속된 말들도 모두 이치에 맞다고 한다.그리고"오늘날엔 이른바 무당들의 노래 가사나 배우들의 욕지거리,서장거리나 여항에서 늘 하는 말 또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바른길로 나아가게 하기에 충분하고"8),"속된 말 가히 잘 감응한다"9)고도 했다.
박제가와 북학파 인사들의 문체는"檢書體"10)로 불리우는 독특한 문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정조의 文体反正이 일어나자 이덕무 등은 自訟文을 지어 바치도록 명을 받았고,이에 이덕무는 박제가에게 순정한 고문으로 지어 바칠 것을 권고했다.
형은 모름지기 상세히 살퍼보아야 합니다.허물을 반성하고 선하게 하며,성 은에 감사하며 죄의 뜻을 자인하는 뜻으로,한편의 古文이나 2 辭意를 선택 하여서 극히 사용하는 절의 뜻을 명명하고 반드시 온순해야 합니다.절대로 부합하지 말며,사치하지 말며,소위 속된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하물며 명말청초 중에 한가지 비루하고 가벼우며 속된 어투를 쓰면 어쩌린 말일니까? 남씨 이씨 두 학사는 이미 사도와 이단을 물리치는 시문을 지어 올렸다고 하 니,형도 다 지었거든 보첩(보고서)으로 내각에 빨리 보고 하십시오.^(11){ }^{11} )
했는데 오히려 우리와 갈지 않은 천리 먼 나라 중원의 풍속을 마음에 두어 늘 한단스럽세 생각이 들었습니다.마음 씀이 어찌 ユ렇게 변함없이 넓고 크십니 까.더욱이 만주 철 보와 옥보의 무리를 형제처럼 바라보고,서장의 황교,홍교 의 무리를 士友対럼 생각하니,세속에서 소위 말하길 唐癖•唐學•唐漢•唐魁 등 의 말들이 모두 형의 身에 모여 있답니다.^(12){ }^{12} )
이처럼 소위"속된 표현을 쓰지 말며","비루하고 가벼우며 속된 어투를"등은 박제가가 말하는 속어와 비슷한 언어이다.이덕무가 박제가에게 그가 사용하는 어투들을 사용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이처럼 박제가가 사용하는 어투들은 백화소설의 하나의 언어형식이라 할 수 있다.이처럼 그가 청대 백화소설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받았는지를 이덕무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아래 박제가가 지어 올린 자송문에는 그의 사상이 일목요연하게 잘 나타나 있다.
두 가지의 허물이 있습니다.배움이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은 진심으로 신의 허 물이라 하겠습니다.그러나 성이 같지 않은 것은 신의 허물이 아닙니다.이것 을 음식으로 비교하겠습니다.상에 올려진 위치로 말하자면,서직이 앞에 자 리잡고,국과 포는 뒤에 위치합니다.맛[味]으로 말하자면,소금은 짠맛을 들 여오고,매실은 신맛을 들여오고,겨자는 매운맛을 들여오고,찻잎으론 쓴맛을 가져옵니다.금일 부러 짜거나 시거나 맵고 또한 쓰지 않음을 갖고 소금,매실, 겨자,찻잎을 죄주는 것은 마땅합니다.그렇지만 반드시 소금과 매실과 겨자 와 찻잎이 각각 2 특성이 있는 것을 핀잔하시며"너는 무슨 사연으로 서직과 유사 하지 않은가?"라고 말하거나 국과 포에게"너희 들은 무엇 때문에 앞에 자리잡고 있지 않으냐?"라고 물으신다면,지적을 받은 이들은 2 참됨을 잃어 버리게 되고,세상의 맛은 피폐해질 것입니다.13)
이처럼 박제가는 맛을 예로 들면서 변치 않는 그 고유한 특성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각각 그 고유의 개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간언하고 있다.그는 청대 백화소설의 언어형식을 매우 환영했고,또한 청대 인물들의 학술과 시문을 인정하고 옹호하면서 우리 민족의 언어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칠거라 생각했다.한 발짝 나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수용하자는 주장을 펼쳤다.아래의 글은 이런 주장들의 근거이다.
우리나라는 중화와 가까이 접해있고 글자의 음성이 중국의 글자의 음성이 거 의 똑같다.그러므로 우리나라 모든 사림이 원래 이용하는 말을 내버린다고 하여도 못할 이유가 없다.이처럼 원래 이용하는 말을 버린 다음에야 오링캐 라는 치욕스러운 글자로 불리우는 사래에서 모면할 수 있고,수천 리 동국에 저절로 周•漢•唐•宋의 풍속과 기운이 드러날 것입니다.이것이 어찌하여 크게 상쾌하지 않단 말인가?이와 같은 말에 혹 자는 이처럼 반문하기도 한다."중 국의 말이 글자와 똑하다.그래서 말이 변해지면 글자의 소리도 그것에 따라 서 달라진다.우리나라는 말은 말대로 이용하고,글은 글대로 이용한다.이에 가장 처음 받아들여 익힌 한자의 소리를 변함없이 지킬 수 있다.중국의 경우侵운이 眞운과 혼동되어 쓰이나 우리나라는 입성에 여전히 終聲이 남아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어느 누가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그 반문에 나는 이처럼 대답하겠다.내가 전에 말했던 것은 그와 같이 해야만 중 국과 동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다.중국과 동등해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 으면 한자의 소리가 옛날의 소리와 같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따라서 문자와 말을 하나로 통일시키면 충분하다.cdots\cdots 오호리!이제는 한어를 오링캐가 떠들어대는 난잡한 언어로 생각지 않는 이가 거의 없다.14)
19)『孟子』,「公孫丑」,"天下有達等三德 朝廷美山問 仍流支知國 世長民集加德"
20)박제가는「燕京雜絶」발문에서"기공은 이름이 昀,예부상서로 호는 曉嵐이다.일찍이 내 시를 일컬어"書卷氣가 많으니,해외에 있는 큰 인물이로다"라고 했다.매년 반드시 안부를 물으며 시를 부쳐 오는데,나는 외교의 의리가 없는지라 감히 답장은 못하고 있 다.(紀公名昀 禮部向書 號曉嵐 嘗稱余詩 多書卷氣 海外大有人在也 每年必問安否寄詩 余以無外交之義 不敢答)"라 하여 자신의 시를 서권기가 많다고 하여 기윤의 시세계를 서권 기적 견지에서 높이 평가했다.
21)『貞获閣文集』卷1,「炯菴先生詩集序」,p.601,"背前轍而不遵 獨師心法之法."
과 안개,흐리고 맑은 날씨,아침저녁과 네 계절의 변화하는 단서를 그 종류 에 따라 펼칠 수 있다면 필 묵에도 능하게 되며 문장과 그림도 볼만해질 것입 니다.청컨대,이 글을 써서 세상에서 그림에 안목 깊은이에게 묻고자 합니 다.22)
박제가는 네 계절의 변화하는 단서를 그 종류에 따라 펼칠 수 있다는 것은,바로 생동감과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며,그 천연의 대상을 열린 사고로 사실적으로 포현해야 한다는 평소의 시문관이 드러나 있다.
Abstract
그림과 글씨는 진실로 기예 중 작은 것이다.그렇다고 선비가 이를 버려두고 말하지 않는 것 또한 잘못이다.요즘 사람 가운데에는 측면모습을 그려놓은 인물화를 보면서 나머지 한쪽 귀를 찾는 자가 있다.심심찮게 이러고 보니 눈 안에 있는 物의 璧도 보통과 다를 것 없음이 드러난다.鑄菴公23)은 선비이면 서도 기예에 통달한 사림이다.그가 소장한 문징명의 〈間早春水圖〉라는 그림 에는 하나의 절 구가 적혀 있다.비록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정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품은 언덕과 골짜기는 상상해 볼 수가 있다.가을볋이 방 안에 비칠 때 두루마리를 펴고서 상상 속에서 즐긴다.꽃과 나무가 그윽하여 깊은 것, 안개 낀 물이 에 돌아 흐르는 것,신록이 우거진 숲과 아름다운 바위의 그윽한 모습과 술동이를 열고 창을 열어젖힌 사림을 살퍼보라,아!어찌해야 이런 사 림을 얻어 즐거움을 함께 누려 볼까?24)
박제가는 선비들의 기예의 폄하함을 비판하고 반박했다.그리고 서•화는 특수성의 전문적인 예술이라고 본다.이같은 박제가의 인식은 예술미를 한 차원 높은
도인이 대나무를 칠 적에는, 道人畫竹詩
색상 따라 그려낼 뿐이지만, 還從色相起
그대가 대를 친 다음을 본다면, 君看竹成後
신묘함은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것을. 妙不在形似(下略)26)| 도인이 대나무를 칠 적에는, | 道人畫竹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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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상 따라 그려낼 뿐이지만, | 還從色相起 |
| 그대가 대를 친 다음을 본다면, | 君看竹成後 |
| 신묘함은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것을. | 妙不在形似(下略)26) |
먹물 자국 등 그림자 어지러운 가운데, 墨痕燈影兩迷離
귀취도 완성하곤 한 번 웃음 짓는구나. 鬼趣圖成一笑之
유명(幽明)이치 이르러선 말할 곳이 아예 없어, 理到幽明無處説
애오리지 그 솜씨로 어린아이 놀라키네, 聊將伎倆嚇纖兒27)| 먹물 자국 등 그림자 어지러운 가운데, | 墨痕燈影兩迷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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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취도 완성하곤 한 번 웃음 짓는구나. | 鬼趣圖成一笑之 |
| 유명(幽明)이치 이르러선 말할 곳이 아예 없어, | 理到幽明無處説 |
| 애오리지 그 솜씨로 어린아이 놀라키네, | 聊將伎倆嚇纖兒27) |
나빙이〈鬼趣圖〉그리는 모습을 읋은 광경이다.먹 흔적과 등불 그림자가 둘 다 몽롱하건만 〈귀취도〉를 완성하고 나빙은 한번 웃어보이는데,그 이치로 유명을 말할 수 없고 단지 그의 기량으로 어린아이를 놀라게 한다고 말한다.이 시에서 박제가는 나 빙의 다양한 먹물과 형상의 구애됨이 없는 표현들,즉 市井的 화풍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1790년(정조 14)9월 그믐날에 박제가와 유득공은 나빙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한문학에서의 시문에 대한 비평은 주로 문집의 序跋文과 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그중에서도 발문은 보통 책의 출판 여부 등을 중심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흔하기에 서문보다는 비평의 기능이 많다고 할 수 없다.서문에서는 해당 문집의 저자 본인에 관한 문학적 경향성은 물론이고 가끔은 과거나 같은 시대의 유명한 문사들과의 비교가 성사되어서 뛰어난 비평의 역할을 했다.그러나 이것은 주로 어느 한 개인의 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비평이며 작품 본래에 대한 적극적인 비평은 드물다.각각의 작품에 대한 비평 움직임은 주로 神話라는 형식을 통하여 행해졌다.산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만한 적극적인 비평이 적게 나타났지만 시 비평에 관해서는 신화의 형식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나올 정도로 생기있고 힘찼다.때문에 시화의 내용을 조사하면 그 시대 문인들의 學詩 경향이나 詩學의 면모를 잘 이해할 수 있다.宋의 歐陽隋(1007-1072)는 『六一詩話』를 저술하여
고상한 사람과 재주꾼들이 서로를 뒤따르니, 高人藝士報相隨
화벽에 음린한 글이라 내 스스로 어리석네. 畵癖書淫我自癡| 고상한 사람과 재주꾼들이 서로를 뒤따르니, | 高人藝士報相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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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벽에 음린한 글이라 내 스스로 어리석네. | 畵癖書淫我自癡 |
王漁洋의 시구는 천하에 신묘하여, 漁洋詩句妙天下
붓을 믿고 그저 써도 외운 듯 했다네. 信筆往往成誦憶
잘되고 못 되고는 모두 뒷날 맣겨 두고, 都將奸醜付來日
분 휘 두름 어이하여 일각인 들 허비하리. 揮灑何曾費一刻
쟁 그렁 붓 던지며 때로 한 번씩 웃으니, 鏗然擲筆時一笑
天趣는 노리어 바쁜 중에 얻는 것을. 夭趣還從忙處得
中華와 차츰 가까워서 기뻐지고, 沾沾自喜近中華
입을 오므리고 우쭐해거 자링않네. 掩口不向時人誇
지금 사람 옛것 믿고 지금것 믿지 않아, 時人信古不信今
중화조차 낮게 보니 마땅히 어이하리. 低視中華當奈何34)| 王漁洋의 시구는 천하에 신묘하여, | 漁洋詩句妙天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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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을 믿고 그저 써도 외운 듯 했다네. | 信筆往往成誦憶 |
| 잘되고 못 되고는 모두 뒷날 맣겨 두고, | 都將奸醜付來日 |
| 분 휘 두름 어이하여 일각인 들 허비하리. | 揮灑何曾費一刻 |
| 쟁 그렁 붓 던지며 때로 한 번씩 웃으니, | 鏗然擲筆時一笑 |
| 天趣는 노리어 바쁜 중에 얻는 것을. | 夭趣還從忙處得 |
| 中華와 차츰 가까워서 기뻐지고, | 沾沾自喜近中華 |
| 입을 오므리고 우쭐해거 자링않네. | 掩口不向時人誇 |
| 지금 사람 옛것 믿고 지금것 믿지 않아, | 時人信古不信今 |
| 중화조차 낮게 보니 마땅히 어이하리. | 低視中華當奈何34) |
35)일반적으로 信筆은 서예 용필의 병폐중의 하나다.자신의 뜻에 따라 용필하는 것을 가 리키는 것으로 신필은 먹을 덕지덕지 칠하고 필획은 편봉이 많아 당연히 글씨가 잘되지 않는다.그렇지만 용필이 지나치게 뜻에 매이거나 법의 구속 되도 또한,글씨가 잘되지 않는다.붓털의 특성에 적응하여 붓이 내 뜻을 따르고 세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면,손 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신묘함이 나온다.陶明君 編著,『中國書論辭典』,湖南美術出版社, 2001,424면.
다[獨抒性靈,不拘格套]"동심설을 주장한 명대의 公安派의 이론에서 계승-발전된 것이 다.여기에서 성령이란 성정과 비슷한 말로서,외부 사물에 대한 작가 자신의 독특한 체득을 말하는 것이다.양명학 좌파의 영향을 받아 진실한 감정과 개성의 표현을 강조 하는 그들의 입장은 낭만주의적이며 反 전통적이다.
하늘가의 소식이 수레 라고 돌아오니, 消息天涯返輶軒
앵화두곡41)가락에 넜이 온통 녹는구나. 鶯花杜曲一消魂
그 누가 사훈(司勳)의 므 능히 알아 오르겠나, 何人解上司勳墓
다만 오직 강동 땅 윈매의 영사시(詠史詩)라. 只有江東詠史袁42)| 하늘가의 소식이 수레 라고 돌아오니, | 消息天涯返輶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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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화두곡41)가락에 넜이 온통 녹는구나. | 鶯花杜曲一消魂 |
| 그 누가 사훈(司勳)의 므 능히 알아 오르겠나, | 何人解上司勳墓 |
| 다만 오직 강동 땅 윈매의 영사시(詠史詩)라. | 只有江東詠史袁42) |
박제가의 문학관은 원매의 문학관과 매우 가까웠다.특히 詩情의 진실성을 주장 하는 것에서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원매는"시란 반드시 성정에 근본해야 한다고"43) 생각했다.원매는 眞情은 시인의 창작조건이라 했다.즉"시인은 천진하고 거짓 없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44)라고 했다.두 번째로는 개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시를 창작할 때는 내가 없으면 안된다.남이 있고 내가 없으면 꼭두각시 일 뿐이다[作詩,不可以無我,有人無我,是傀儡也]"라고 했으며,세 번째로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그는"시를 논하는 것은 필의의 성령이 있고,둔함이 있는 것에 구분이 있다고〔筆性灵,筆性笨之分]"한다.박제가 역시 시라는 것은 삶 속에서 생겨남과 같다고 말한다.
시라는 것은 삼 속에서 생겨나는 것일세.어린아이가 응애응애 울 때 등을 토 닥이면서 노래를 불러주면 노랫소리와 율음소리가 서로 가릭이 맞아 어느새 아이는 잠이 들어버리니,그 소리가 천하의 진짜 시라네.내가 듣건대,시는 본성에서 나와 그른 것과 바른 것이 있으니,그 좋아하고 싫어함과 세속의 오 르너림을 볼 수 있다네.까닭에 화려하게 꾸민 작품은『시경』국풍에 싣지 않 았고,촉급하고 잦아드는 소리는 청묘(淸廟)에 올리지 않았네.그런데 지금 그대는 담박한 맛을 버리고,아로새겨 꾸며 내는 유행의 솜씨만을 좋아하는구 먼,앞선 모범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면서 오직 마음의 법만을 본받으려 하네 그려.45)
로의 일 장담하여 삼만 군대 파견케 했고,양주의 일 논정하고 나니 밤이 二更이었네, 부용화 꺾어 놓고 술 한 잔 올리니,누가 그대의 풍골과 흡사하리."(蕭眼白馬遠從軍 落日樊川甬紫雲 客裏鶯花逢杜曲 唐朝春恨屬司勳 高談澤路三萬 論定揚州月二分 手折芙蓉來酻酒 有人風骨類夫君.)정민 외『정유각집』,상,돌베개,p. 258.
원매는 복고를 반대하면서도 옛것을 학습할 것을 주장했다.그러나 옛것을 배울 때,옛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시에 내가 없으면,안된다는 일종의 모방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46 )박제가 역시 원매의 성령설에 공감하면서 시란 삶 속의 자질구레한 일상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3.翁方綱의 肌理說 긍정을 통한 비평
肌理說은 옹방강이 주장한 시론으로 肌理란 원래 피부에 난 무늬,즉 살결을 뜻하는 말이다.옹방강은 이를 비유로"시는 반드시 살결을 추구하듯이 아름답게 하고, 문장은 반드시 그 실제를 구해야 한다[詩必硏諸肌理,而文必求其實際]"라고 하며, 학문은 반드시 考證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시와 학문의 차이를 부각하기도 했다. 그는 기리를 기준으로 삼아 살결을 좇듯 시를 탐구하여야 한다고 보았다.그는 또한 청대의 대학자로서 실사구시를 제창한 실증학풍의 문인이기도 하다.박제가는 여러 번에 걸쳐 옹방강의 금석학에 대한 식견을 높이 평가하면서 흠모의 정을 나타냈다47) 시에서 금석학 연구에 힘쓰고 소식을 존숭하여 소식의 생일날에 향을 피워 제배했던 것과 자신이 그의 안내로 장서각을 구경했던 일을 읖었다.두 번째 시에서는 옹방강이 소식을 숭배한 나머지 그의 그림을 서재에 걸고 있던 상황과 당시 시대적인 풍조를 이루고 있었던 고증학•금석학에 빠져있는 모습을 묘사했다.48)뿐만 아니라 옹방강과 교유했던 여러 인사들로부터 금석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실이 그의 「회인시」나「연경잡절」에 나타나 있다.옹방강은 碑學과 帖學을 조화시킨 인물로 청나라 첩학의
46)敏澤,유병례 외 역,『中國文學理論批評史』,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2019, pp.388-389\mathrm{pp} .388-389 참조.
47)옹방강은 戴震의 考證學에 매료되어「考證論」9편을 지어 대진과 段玉裁 등의 연구 성 과를 계승한 인물이다.陳寧寧,「朝鮮朝 實學派 文學과 清代文化의 關聯性에 대한 硏究」,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87,105면.
48)"笠楩圖"란,소동파의 존숭했던 옹방강이 자신의 거처에 소식이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笠屐圖〉를 붙여놓았다고 한다.훗날 자하 신위나 추사 김정희 등도 이를 흉내 내서 같은 그림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四大家로 일컬어진다.
담계 선생 홍조와 같은 무리로,
覃溪洪赵流
金石穷锱铢
穷究金石细枝末节
腊月十九日
十九日月
焚香设祭献羊羔
一瓣心香祭髯苏
引我登临清閟阁
引我入清幽之境
邀我参与文士雅集
高會参文殊49)
담계 선생 홍조와 같은 무리로, 覃溪洪趙流
금석의 이모저모 궁구하였네. 金石窮錙銖
섣딜 열아홈째 되는 날에는 교月日十九
향 대우며 염소께 제사 드리네. 瓣香祭髭蘇
날 이끌어 청비각에 오르게 하여, 引我上清悶
문사들의 고회에 참여케 했네. 高會参文殊49)| 담계 선생 홍조와 같은 무리로, | 覃溪洪趙流 |
| :--- | :--- |
| 금석의 이모저모 궁구하였네. | 金石窮錙銖 |
| 섣딜 열아홈째 되는 날에는 | 교月日十九 |
| 향 대우며 염소께 제사 드리네. | 瓣香祭髭蘇 |
| 날 이끌어 청비각에 오르게 하여, | 引我上清悶 |
| 문사들의 고회에 참여케 했네. | 高會参文殊49) |
49)『貞荈閣集』卷3,「仿蔣心餘•枌覃溪方綱」,p. 527.
50)'笠楩圖'란,소동파를 존숭했던 옹방강이 자신의 거처에 소식이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笠屐圖〉를 붙여놓았다고 한다.
51)『貞荈閣集』卷 4, 「續裏人詩十八首•翁覃溪方綱」,p. 540 .
박제가는 옹방강의 금석학이 세상에서 빼어나고 시•서는 구절마다 신묘해서 나도 모르게 맑고 고상한 이야기의 격조가 높아짐을 기뻐하고 소식선생을 흠모하는 옹방강을 높이 칭송했다.옹방강은"옛사람에게서 구하고 경전을 잘 배우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근본이라고 하면서,옛것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자는 매일 수천 수백 명의 시인의 시를 보면 된다고"53)말하고"시는 반드시 살결을 추구하듯이 아름답게 하고, 문장은 반드시 그 실제를 구해야 한다"라고 하며,시와 학문의 차이를 부각하기도 했다.그는 청대의 대학자로서 실사구시를 제창한 실증학풍의 문인이기도 하다. 옹방강의 실사구시 사상은 박제가를 포함한 조선 후기 북학파 문인들의 실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IV.나오는 말
한문학에서 시문에 대한 비평은 주로 문집의 서발문과 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발문은 보통 책의 출판 여부 등을 중심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흔하기에 서문보다는 비평의 기능이 많다고 할 수 없다.서문에서는 해당 문집의 저자 본인에 관한 문학적 경향성은 물론이고 가끔은 과거나 같은 시대의 유명한 문사들과의 비교가 성사되어서 뛰어난 비평의 소임을 했다.그러나 이것은 주로 어느 한 개인의 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비평이며 작품 본래에 대한 적극적인 비평은 드물다.우리나라에는 학문과 이론을 겸비하고,그 이론에 맞는 여러 저서와 시작을 남기고,청대 문학을 비평한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박제가처럼 시•서•화가 능통하고 구체적인 체계성을 가지고 자득적 기예의 정신과 개방적 사고로 청대 문학을 비평하고,청대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유하며,조선 후기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드물다.그는 청대 시민의식과 청대 문단의 새로운 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문화의식과 문학관념 그리고 새로운 비평의식을 드러냈다.특히 북학사상의 가치관의 기초위에 구축한 신문학 사상은 박제가의 문학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또한 청대 문학에 대한 객관적 비평은 그가 다양한 청대 문학의 성취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박제가로 인해 조선 문단에서는 청대 문학사조의 이해와 창작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이상의 논의만으로는 박제가의 청대 시문학비평론이 온전히 규명되었다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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摘要
\title{朴齐家对清代诗歌文学的接受与批评研究
}
Lim,Myung Nam
Bak Jega(朴齊家)was sensitive to Vernacular Sintic novels(白話小說)that were popular in Qing Dynasty at the time,as well as"The theory of di- vinity"(神韻說)of Wang Shizhen(王士禎),"The theory of spirituality"(性靈說)of Yuan Mei(袁枚),and"The theory of texture"(肌理說)of Weng Fanggang(翁方綱)than any other Bukhak school(北學派)members.This paper is a brief review of Park Jega's acceptance and criticism of Qing Dynasty poetry.
In addition to criticism of indiscriminate acceptance of poetry of Qing Dynasty,he was ordered by King Jeongjo,who thought he would look after him at the time,to post a self-written text(自訟文)on his own, and insisted on establishing his worldview,citing everlasting taste as an example.He exchanged with Li Diaoyuan(李調元)•Pan Tingyun(潘庭筠)*\cdot Peng Yuanrui(彭元瑞)*\cdot Hong Liangji(洪亮吉)*\cdot Ji Yun(紀昀)*\cdot Luo Pin(羅聘)• Weng Fanggang(翁方綱)of Qing Dynasty,which were talented in po- etry,writing and painting,he sticked to the stance to move away from traditional Sinocentrism and accept their advanced civilization even if they were from the barbarians.Thus,he praised three high sides of Ji Yun in the first few words of"Nanyang Soharok"(灤陽消夏錄),which he recited his novel.In"Mukjuk"(墨竹)of Luo Pin he recited in painting poetry that he painted the figure and the inner spirit together while with"The Ghost Amusement Scroll"(鬼趣圖)he praised the godlike style adhere to likeness.
At that time,a variety of poetics were prevalent in the Qing Dynasty period,including theory of texture of Wang Shizhen,theory of spiritu- ality of Yuan Mei and theory of texture of Weng Fanggang.All of these influenced the poetry literature of Joseon a lot.He was deeply sympa- thized with the"the soliloquial spirit"(獨抒性靈)and"unrestrainedness"(不
Abstract
拘格套)of Gonganpa(公安派)in the Ming Dynasty which claimed in- nocence of childhood theory,and"Seomunjangjeon"(徐文長傳)by Yuan Hongdao(袁宏道)greatly influenced the formation of literature of Bak Jega.In his"Yeongyeong Japjeol"(燕京雜絶)there is a saying that praises the customs of Xu Wei (徐渭)and exemplifies him who has excellent po- etry,poetry,and painting.Following Wang's"Sixty songs for a man at the end of the year"(歲暮懷人六十首),he created"Six Ships"(戯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saying that phrase of Wang reached the profoundness of the world.Bak Jega was very close to the literary view of Yuan Mei,who claimed the theory of the sprituality,especially in insisting on the truthfulness of poetic sentiments.Weng Fanggang,who argued for the theory of the texture,is also an positivistic style writer who proposed to be practical and realistic.
Although criticism of the previous poetry was mainly based on the fore- word(序跋文),Bak Jega,who embraced various poems of the Qing Dynasty,expressed his critical consciousness through his independent and self-contained poetry world,in the form of a thesis,and a non-poetry.This paper identifies the case,and this part of the research needs to be continuously discussed in the future.
국고전번역원,2015:JIN,LINGMEI,「초정 박제가의 문인교유를 통한 性靈說 수용 과정 고찰」,『우리문학연구』 54. 우리문학회, 2017 등이 있다.
3)朴齊家,『北學議』,「尊周論」,"苟利於民 雖其法之或出於夷 聖人將取之 而況中國之故哉。"
4)김인서는 청초의 저명한 문예평론가이며 문학가였다.『六才子書』에서『水滸傳』『西廂記』『史記』등의 작품을 평론했다.김인서도 그 평론을 통하여 명대소설『水滸傳』과 元雜劇『西廂記』등의 작품의 비평"誨盜""誨㛞"의 비평 글로 이름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