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봉구, 기절하지마.” “蔡奉九,别昏过去。”
“우읍…!“ “呜…!”
뒤를 마구 헤집고 압박해대는 탓에 채봉구가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이 초점이 흐릿해지자 한노아가 그런 채봉구의 뺨을 톡톡 두들기고는 단번에 제 것을 목구멍에 확 찔러넣었다. 꽈아아악. 고통에 아래쪽이 잔뜩 조여들자 유하민이 뜨거운 신음을 채봉구의 등 위로 뱉고는 그의 뒷머리를 잡아 휙 당겨빼내며 으르렁 거렸다.
当蔡奉九因后方粗暴的搅动与压迫而视线模糊、几近昏厥时,韩诺亚拍打着他的脸颊,猛然将自己的器物捅入咽喉深处。咕呃呃。随着痛苦收缩的下身,柳河民将滚烫的喘息喷在蔡奉九背上,揪住他的后脑勺拽离自己,喉间发出低吼。
”다치겠습니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会受伤的…别这么急。”
“네가 할말은 아닌 것 같은데? 벌써 세번째 아니신가.”
“这话不该由你来说吧?都已经是第三次了不是吗。”
후들후들 맞물려있는 구멍 사이로 미처 전부 담아내지못한 정액이 부르르 흘러나와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것이 배에 가득 들어 차 아래가 묵직했다.
黏稠的精液从紧密交合的缝隙间溢出,未能全部承接的液体颤抖着沿大腿流下。不知是谁的体液在腹部积满,使得下身沉甸甸的。
”이제 그만…. 하읏… 나 배 고장나……“
“够了….哈啊…肚子要坏掉了……”
”쉬이, 착하지.“ “嘘,乖。”
울음을 터트리려는 얼굴을 어르고 달래 아직 가라앉지않은 제것을 뺨에 문지르자 착하게도 다시 혀를 내어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미 눈물 콧물에 정액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다정히도 닦아주자 예쁜 눈이 저를 올려다봤다. 퍽퍽 유하민이 허리를 쳐올릴때마다 안에 담긴 흔적들이 출렁거리며 새어나왔다. 벌써 몇번째 사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잘 녹아내린 안쪽 깊은 곳까지 콱 밀어넣자 어딘가 침범해서는 안될 곳 까지 닿아버린 기분이었다. 순간 채봉구가 욱욱 헛구역질을 하더니 허벅지를 달달 떨어대며 무언가를 요란스럽게 싸댔다. 줄줄 맑은 물이 쏟아져 지저분한 바닥 위로 잔뜩 고였다. 동시에 유하민과 한노아가 채봉구의 안에 절정을 쏟았다. 또 한번 속수무책으로 쏟아져들어오는 적당한 체온을 위 아래로 잔뜩 머금은 채, 힘이 풀린 채봉구의 몸이 웅덩이 위로 철퍽 무너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깜짝 놀란 유하민이 고요하게 잠든 채봉구의 얼굴을 들어 색색 잠든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땀에 젖어 잔뜩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정히 쓸어넘겼다.
”결국 한심하게 휘말려버려서는, 못할 짓을 했습니다."
“그래, 그런 눈.”
철컥- 여태 수없이 들어왔던 쇳덩이의 소리에 축축한 채봉구 몸을 실험복으로 닦아내던 유하민의 손이 딱 멈추었다. 아직도 숨을 들썩이던 한노아가 유하민을 향해 총구를 들이민 채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를 올려다보던 유하민의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공포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어.”
“现在你的任务已经完成了。”
“대체 목적이 뭡니까? 채봉구를 망가트리는게 당신 목적입니까?”
“你的目的到底是什么?搞垮蔡奉九就是你的目的吗?”
새근새근 죽은 듯이 정신을 잃은 몸뚱이에는 힘조절을 하지못해 거세게 움켜쥔 손자국과 잇자국이 자욱했다. 힘없이 풀려 벌어진 허벅지 안쪽에는 수없이 자행된 실험에 방수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벗겨진 조그만 발바닥은 피투성이였다.
那具失去意识、气息微弱的躯体上布满了因失控力道留下的青紫掐痕与牙印。无力张开的双腿内侧贴满防水胶布,掩盖着无数次实验的痕迹,而那双脱皮的小脚掌早已血迹斑斑。
“뭘 착각하는 것 같은데 망가진건 채봉구가 아니야. 지금 네 모습을 봐.”
“你好像搞错了什么,坏掉的不是蔡奉久。看看你现在的样子。”
그리고 그 옆에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를 범하고 상처입힌 주제에 뻔뻔히도 채봉구를 걱정하며 위선떠는 제 자신이 있었다.
而在他身旁,像个疯子般侵犯他、伤害他之后,竟还厚颜无耻地假装关心蔡奉九、满口虚伪言辞的我自己站在那里。
“망가진건 우리야. 원래 희망이란게 그런거거든. 손에 한번 쥐어본 사람이 더 간절한 법이니까. 원래 제 것도 아니었으면서.”
하- 구태여 노력할 필요도 없이 뼈속 깊이 이해되버린 한노아의 말에 유하민은 모든 전의를 잃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포기한 눈으로 잠든 채봉구의 손을 꼭 쥐었다.
”지금 여기서 날 죽인다고해도 영원히 이 사람을 품에 숨겨둘순 없을겁니다. 가만히 안겨있을 인간이 아니잖아요.”
“그걸 모르고 시작하진 않았지. 그래도 시작한 이상 그만 둘순 없어.”
채봉구한테는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다고 해줄테니 안심해, 앞으로는 네 생각도 안나게 해줄테니까. 철컥 방아쇠에 압력이 실리며 유하민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쾅!
그때 땅이 울리며 텐트가 흔들거렸다. 밖이 점차 어수선해지더니 이내 멀리서부터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쏟아졌다. 당장 머리통에 총알이 쑤셔박아질줄 알았던 유하민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채봉구의 몸 앞을 막아섰다. 휙 텐트가 걷히고 총과 붉은 헬멧으로 무장한 반란군 하나가 뛰쳐들어와 다급하게 보고 했다.
“큰일났어! 네이토스군이 기습했어.“
”상황은?“
”안좋아. 이미 본거지를 전부 포위당했어. 무기고를 습격당한 상태라 우선은 도망쳐야해.“
밝은 빛이 텐트 너머로 요란하게 번쩍이더니 쾅쾅 지면이 울렸다. 갑자기 닥쳐온 거대한 혼돈 속에서도 한노아는 조급함 하나 없이 그저 여전히 기절해있는 채봉구를 한번 내려다보며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저벅 저벅 유하민 앞으로 다가서더니 손바닥 위로 권총을 빙글 돌려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런 상황이니 정중한 사과 같은건 넘어가도 되겠지?“
“채봉구를 데리고 도망치란 말입니까?”
“지금 상태에선 이게 최선이야. 네가 네이토스 수트를 입고 있으니 채봉구를 빼돌리는게 가능할거야. 본거지를 빠져나가면 곧장 서쪽으로 가. 곧 뒤 따라갈테니까.“
너무 멀리 도망갈 생각은 말고. 방금전까지 저를 죽이려들던 남자가 내민 권총을 건네잡은 손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는 채봉구를 목숨걸고 지킬 것이라 한노아는 확인했다. 유하민은 한노아가 건네준 커다란 점퍼를 채봉구의 팔에 끼어넣으며 축 늘어진 몸을 등 뒤에 들쳐 업었다. 유하민이 채봉구를 확실하게 안아올린 것을 확인한 한노아는 그와 눈빛을 한번 교환했다. 붉은 헬멧을 주워 쓰고는 반란군에게서 새 총을 건네받았다. 그 좁은 텐트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한노아와 유하민은 서로가 각자 최선을 다해 죽을 각오로 임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제 5장. 면역자 채봉구에 대하여
”허억… 헉……“
발이 땅바닥으로 푹 꺼질 것 같았다. 저항군의 본거지를 겨우 벗어난 유하민은 불바다가 되어 총알이 난사하는 전쟁터를 뒤로 하곤 무작정 앞만 보고 내달렸다. 멈추어섰다간 제 등 뒤에 잠든 작은 몸이 다시 차가운 실험대 위 눕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단 한순간도 숨을 돌릴 틈이 었었다. 찢어진 후두부두피가 벌어지며 흐르는 뜨끈한 피가 뒷덜미에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래도 유하민은 멈추지않고 달렸다.
‘붙잡혔다간 정말로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미끄덩 물에 젖은 돌을 밟은 유하민이 엎어지며 채봉구의 몸이 잔디 위로 튕겨나갔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함께 채봉구가 겨우 정신을 차리자 유하민이 근심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들어 부축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여기 어디….. 노아 형은?”
“반란군 기지가 습격 당했습니다. 정리하고 곧 따라온다고 했으니 우선은 도망쳐야됩니다, 일어나세요.“
탕탕- 이미 한참이나 벗어났음에도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폭음과 총소리에 채봉구의 얼굴이 심란하게 굳어졌다. 채봉구는 제 몸에 입혀진 것이 한노아의 옷임을 눈치채고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일어나세요. 유하민의 명령에 잘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는데 어디선가 바스락 땅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정도의 반사신경으로 유하민은 이미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였다. 수풀을 향해 겨누어진 총구 끝에는 같은 네이토스의 검은 보호구를 쓴 사내가 서있었다.
”수배자는 이미 포획해 인계 중입니다. 전방 지원바랍니다.“
”네이토스 군부소속 7부대 부대장 유하민 하사 맞습니까?”
움찔. 이미 제 정체를 다 알고있는 것 같은 물음에 유하민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에 채봉구도 정신을 붙들고는 여차하면 내달릴 각오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때 그 남자가 총구를 내리더니 씌워진 보호구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헬멧 안쪽에서 드러난 익숙한 얼굴에 채봉구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 얼굴은 채봉구 뿐만 아니라 유하민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예준 박사님?“
당신이 여긴 어떻게!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의 정체에 유하민이 잠시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이내 다시 잔뜩 경계를 세워 총을 고쳐들었다.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여기도 곧 네이토스군이 들이 닥칠거에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여기까진 어떻게 쫒아왔습니까?“
유하민의 겁박에도 남예준은 그저 답답해 신물이 난다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제 허리춤에 매어진 단말기 화면을 내밀었다. 알아보기도 힘든 능선이 복잡하게 늘어진 지도 속 빨간색 점 하나가 깜빡거렸다.
”추적당하고 있으니까요. 조직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채봉구씨 몸 안에 소형추적기를 이식한 모양입니다. 제가 그걸 몰랐다는건 이미 네이토스도 어떤 조짐을 눈치 챘다는거겠죠.“
그 말에 채봉구는 어쩐지 납득이 갔다. 아무리 남예준과 유하민의 도움이 있었다곤해도 현 대한민국 내 보안이 가장 철저한 곳으로 자자한 네이토스의 본부를 너무 손쉽게 탈출했다. 어쩐지 드는 위화감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은 채봉구 뿐 만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분명 제 임무이탈 대해 알아차렸어야 할 네이토스의 추적대 모습이 털끝 하나 보이질 않았다.
”그럼 위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왜 여태 내버려뒀죠?“
”아직 피실험자에 대한 실험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슬쩍 경계 태세를 해제한 유하민이 총구를 내리자 남예준이 다급히 달려와 채봉구 발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등에 짊어진 군장을 벗어 빠르게 짐을 풀기시작했다.
“피실험자에 대한 민간인 접촉 사회 실험을 자행 중입니다. 내부에서 얻은 성과가 없으니 이대로 네이토스 감시 하에 두고 행동 양상과 접촉자에 대해 관찰을 하려는거겠죠. 그러니까 당신들, 아직 그 네이토스 본부 안에 있는거나 마찬가지인겁니다.”
“그럼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친건 뭐에요?“
채봉구의 물음에 남예준은 오랜만에 조우한 그와 애틋한 마음을 공유할 겨를도 없이 그저 허벅지를 붙들고 너덜너덜 붙은 방수패드를 떼내며 답할 뿐이었다. 남예준은 잇자국과 키스마크가 가득한 허벅지 안쪽을 발견하고는 잠시 손을 멈칫했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소독약을 꺼내 들었다.
”모니터링 중에 네가 저항군 본거지에 발을 들인 것 같은 정황이 포착됐어. 아무리 관찰 단계라고는 해도 폭동분자를 내버려둘 순 없었겠지. 좀 아플거야.“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알코올이 통째로 들이부어졌다. 미간이 잠깐 구겨지긴했어도 그 외에 별다른 신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남예준은 제 손과 손가락만한 작은 메스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채봉구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마취는 못해. 그러니까...“
“괜찮아요, 얼른 해요.”
잠시라도 망설일 틈이 없었다. 위치가 전부 노출된 이 상황에서 채봉구가 남예준과 접선했다는 사실까지 네이토스가 눈치챘다면 이미 이쪽을 향해 수많은 병력들이 들이닥치고 있을게 뻔했다. “어깨 잡아.” 제 어깨 위로 손을 걸치게 하고는 그대로 날카로운 단면으로 아물어가던 흉터를 따라 살갗을 쨌다. 꽈악- 제 어깨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있는 힘껏 수트를 붙들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채봉구의 콧잔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핀셋을 집어넣어 여기저기를 헤집자 힐끔힐끔 내려다보던 유하민이 차마 못보겠다는 듯 고개를 아예 돌려버리고 사주경계에 집중했다.
끙. 제 어깨에 기댄 머리가 고통에 버거운지 파르르 떨어댔다. 뚝뚝 떨어지는 식은땀에도 안타까워할 시간조차 없어 남예준은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소독한 제 손가락을 상처 안에 집어넣어 벌렸다.
”하읏….”
“미안, 좀만 참아. 거의 다 찾았어.”
이리저리 휘적이는 날카로운 핀셋이 그의 허벅지 안쪽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피범벅이 된 그 조그만 소형위치추적기가 깜빡깜빡 빛을 내며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후부터는 상처를 꿰멜 겨를도 없어 간이봉합키트로 벌어진 살을 대충 수습하고는 깨끗한 붕대로 허벅지를 꽉 조아맸다.
“박사님, 당장 이동해야합니다.“
”업혀.“
남예준이 채봉구 앞을 가로막아서며 등을 들이밀자 채봉구가 그의 등에 엎히려 허리를 숙였다가 이내 엉덩이에서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무언가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리 사이 그 흔적을 곁눈질로 발견한 남예준은 지저분하지도 않은지 제 소매로 문질러 닦아주고는 단숨에 그를 등에 업고 일어섰다.
”엄호 부탁합니다.“
”걱정하시마십시오,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 말에 그대로 남예준과 유하민은 솟아오르는 불길과 대낮처럼 번쩍이는 새하얀 섬광을 등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고민할 것도 결정할 것도 없었다. 그저 해야할일은 오로지 제게 닿은 이 소년을 구하기 위해 끝 없이 서쪽을 향해 도망 치는 것 뿐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서쪽으로 목적도 없이 무작정 걷다보니 폐허기 된 작은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오는 도중 유하민은 정확한 저격으로 네이토스의 잔당으로 보여지는 추격자를 셋이나 쏴 죽였다.
”노아형 살아있을까요.“
”첫번째 접촉자를 만났나보네.”
먼지가 그득쌓인 창고문을 열자 끼리릭 듣기싫은 소리가 나며 커다란 철문이 열렸다. 남예준은 한쪽 구석에 채봉구를 내려놓았고 유하민은 열린 문틈 사이로 더 이상 쫒아오는 자가 없는지 밖을 살폈다.
”이거 네거지?“
가방 안에서 꺼낸 지저분한 야구모자를 남예준이 건네자 채봉구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잽싸게 받아들었다. 꾸깃꾸깃 못본 새 많이도 색이 바랬다. 그 모습을 유하민은 그냥 한번 힐끔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산속 깊숙한 곳에 멀리 동떨이진 이 마을은 터치데드 초기, 상황을 전달받지못해 피부병을 치료받겠다고 병원에서 온갖 환자를 입원받아 최악의 케이스로 전멸한 마을 중 하나였다. 정찰을 나간 유하민은 채봉구에게 대충 맞아보이는 청바지와 티셔츠, 그 밖에도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챙겨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슬쩍슬쩍 보이는 거친 정사의 흔적에 남예준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죠?“
”최대한 도망치는게 좋겠죠. 아마도 한국을 벗어나는게 최선일겁니다.“
”그럼 채봉구씨는 제가 맡죠. 박사님은 그만 연구소로 돌아가세요.“
유하민이 분해된 총기를 꼼꼼하게 점검하며 당연하다는 듯 입을 말하자 그 매너좋던 남예준이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죠?”
“저는 훈련받은 군인이니까요. 아무렴 연구소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던 박사님보다는 낫지않겠습니까?”
”방금전까지 반란군한테 붙잡혀있었던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요. 그래서 채봉구가 저 모양 저꼴인겁니까?“
제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티셔츠에 머리를 끼워넣던 채봉구가 멋쩍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는 서로 총구를 겨누지는 않았지만 첨예하게 서로를 향해 날선 시선을 주고받는 두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와주신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셋이 영원히 함께 갈순 없어요. 우리 둘이 실수로 닿았다간 채봉구씨가 또 혼자가 될겁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이 뭡니까? 평생 무작정 데리고 도망만 다니겠다는겁니까? 내겐 아직 채봉구를 연구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잔인한 짓을 또 하겠다는겁니까?!”
“채봉구를 자유롭게 할 유일한 방법은 이 바이러스를 지구상에서 없애는 것 뿐입니다. 할줄아는거라곤 총을 쐬대는 것 뿐인데 앞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거에요?”
“다른건 몰라도 지금 당장 박사님을 무력화 시킬수는 있겠죠. 채봉구씨, 다 입었으면 그만 이동하시죠.“
유하민이 잔뜩 열뻗친 얼굴로 채봉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자 화를 참지 못한 것은 남예준도 마찬가지인지 벌떡 일어나 그와 마주섰다.
“비키십시오. 서로 자폭이라도 하자는겁니까?“
서로에게 맞서 노려보는 둘의 사이가 무척이나 가까웠다. 아까 채봉구의 살갗을 도려내느라 피범벅이 되어 버리고온 장갑 덕분에 맨손인 남예준과 애초에 반란군 기지서부터 보호구를 잃어버린 유하민. 유하민이 손에 든 총구를 남예준의 가슴팍에 꾸욱 짓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했다.
“좋은 말로 할때 비키십시오. 박사님을 쏘고싶지 않습니다.”
“이제보니 채봉구를 저 꼴로 만든게 당신이네. 유하민.”
“둘 다 그만. 사람 앞에 두고 대체 뭐하는거야?”
서로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두사람 사이를 채봉구가 비집고 들어가더니 양팔로 가슴팍을 밀어 떨어트려놨다. 그리고는 그대로 지나쳐 야구모자를 푹 눌러썼다.
“난 혼자 갈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는데 괜히 힘빼지 마시고.”
”지금 밖엔 온통 널 찾고 있는 사람들 뿐인데 너 혼자 뭘 어쩌겠다고?“
남예준이 채봉구 손을 붙잡아 돌려세우는데 갑자기 굳게 닫혀있던 창고의 철문이 덜커덩거렸다. 팽팽하게 대립하던 유하민이 총구를 돌려 문쪽을 향해 세웠고 남예준은 그대로 채봉구를 끌어당겨 제 뒤로 숨겼다. 끼이이익 녹슨 철문이 열리며 피가 낭자하게 묻은 손 하나가 불쑥 문을 움켜잡았다.
”야, 채봉구. 어쩌자고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
못찾을뻔 했잖아. 얼굴에 튀어 말라붙은 핏자국과 총이라도 스쳤는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움켜쥐며 엉망이 된 한노아가 창고 안쪽으로 절뚝절뚝 들어섰다. 그가 한노아라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유하민의 총 끝은 여전히 그를 향했다. 수틀렸다간 진심으로 쏴죽이겠다는 기세로 총알을 장전하고 조정간을 고쳐잡았다.
“어디가게?”
붙들린 채봉구의 손을 발견한 한노아의 눈이 떨떠름하게 번뜩거렸다. 그를 등 뒤에 숨겨둔 남예준과는 초면이었지만 사이좋게 통성명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그 짧은 시간 내에 서로를 적으로 판단하여 셋 중 하나라도 먼저 움직였다간 곧장 총성이 울려퍼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노아 형, 걱정했잖아. 죽은줄 알았어.”
“이리와, 채봉구.”
피범벅이 된 손을 앞으로 내밀자 옆구리에서 새빨간 피가 울컥 쏟아졌다. 철문에 겨우 기대어 저를 향해 뻗은 그 손을 봉구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한노아와 남예준, 유하민 세 사람의 살기어린 눈동자가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히고 뒤섞였다.
“채봉구씨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두분 다 비켜서세요.”
“야, 잠깐 맡아달랬지 누가 훔쳐가랬어. 둘다 네이토스 소속인 것 같은데 채봉구를 가지고 여기저기 실험한 것 치고는 너무 뻔뻔한거 아냐?”
“억지로 감금하고 스토킹했던 사람한테 그런 말 듣는건 좀 거북한데요.“
“아, 그러니까 지금 여기있는 셋 다 저거랑 잤다는거지?”
섹스 한번 했다고 착각은. 광기어린 웃음을 터트리는 한노아의 말에 두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았다. 한노아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러곤 제 뒷춤에서 총을 꺼내 채봉구 머리카락 하나 내어주지 않을 각오로 제 앞을 막아선 남예준을 향해 세웠다.
”채봉구, 거기서 나와. 쏴서 치워버리기전에.“
꽈악. 제 손목을 움켜쥔 남예준의 손바닥에 엄청난 악력이 가해졌다. 나를 뿌리쳤다가는 아무리 너라도 가만 안둬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채봉구는 천천히 제 손목에서 남예준의 손을 떼어냈다.
“알겠어. 마지막으로 인사 한번만 하자.”
채봉구의 말에 저를 돌아본 남예준 얼굴이 그렇게 애가 탈 수가 없었다. 채봉구는 저를 허탈하게 바라보는 남예준의 등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뚝뚝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아쉬움과 쓸모없는 미련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전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선생님.”
“지금 저 남자를 따라가면 나 다신 너를 못 보게 될지도 몰라.“
“말했잖아요, 내가 꼭 구해주겠다고.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 말에 얌전히 채봉구에 끌어안겨 있던 남예준이 답답한 한숨을 내뱉으며 커다란 손으로 채봉구 뒷통수를 감싸 꾸욱 눌렀다. 그 품에 안겨 고개를 빼꼼 빼낸 채봉구가 뒤에 서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총을 세우고 선 유하민에게 손을 뻗었다.
“유하민, 이리와.”
“싫습니다.”
뻗어진 손에 유하민의 눈이 금세 실망으로 물들었다. 빨리. 내밀어진 작은 손 너머 총구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생각을 정리하던 유하민이 결국 두손두발을 다들었다. 탁. 무거운 소총이 바닥에 떨어졌고 1초도 안되어 밀려드는 후회로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뻗어진 그 손을 붙잡자 여전히 따듯하고 말랑한 채봉구의 감촉이 느껴졌다.
“너도 네이토스에서 이제 그만 나와.“
”저더러 거길 나와서 뭘 하란겁니까. 평생 사람을 죽이는 일 외엔 해본게 없는데.“
”날 주웠잖아.”
신발도 신겨주고. 이 세상엔 나 같은 사람이 많거든. 꼭 악수를 하듯 부여잡은 손바닥 사이로 절대로 놔주기 싫다는 마음이 질척이는 형태로 새어나왔다. 순간 채봉구가 유하민의 손을 제쪽으로 휙 잡아당기더니 제 품에 껴안고 있던 남예준을 밀쳤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가만히 팔짱을 낀채 지켜만 보던 한노아가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 고통에 주저앉았다.
”윽, 채봉구!“
쿵. 비틀거리던 남예준과 유하민 뒷목을 채봉구가 한쪽씩 붙잡아 휙 당기자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벌어졌다. 전혀 어울리지않던 두 사람의 뺨이 맞닿자마자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 마냥 펄쩍 뛰며 서로를 밀쳐댔다. 남예준은 불쾌한 얼굴로 채봉구를 향해 벌컥 화를 냈고 유하민은 살갗을 벗길 기세로 벅벅 제 뺨을 문질러 닦았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저리 떨어지십시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충동적인 불쾌함도 잠시, 방금 전 채봉구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타인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예준이 제 뺨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유하민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곧 터치데드가 발현한다. 유하민이 하도 기가막혀 아무런 말도 꺼내질못하고 대체 왜 그랬냐는 듯 원망이 가득 담긴 시선만 던지자 채봉구가 태연스레 유하민이 챙겨온 배낭을 집어들며 제 팔을 꿰어넣었다.
“안죽어. 나랑 접촉한 적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터치데드에 면역이 생기거든.”
“뭐? 너 그 중요한걸 왜….!“
“왜 연구소에서 말 안했냐고요? 당연하죠. 그걸 알면 날 연구소에 평생 가둬놓고 온갖 사람들을 불러 날 만져대게 했을거잖아.”
난 갇혀있는게 제일 싫어. 그 말에 한노아가 괜히 눈썹을 꿈틀하며 채봉구를 노려봤다. 남예준은 여전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않는 제 뺨을 다시 한번 문지르더니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유하민과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도저히 믿겨지지않는 채봉구의 말. 물론 그의 말이 사실이라하더라도 이 수많은 인류 중 누가 채봉구와 접촉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을테니 터치데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셋이 좀 사이좋게 지내라는 거야. 제발 난 그 사이에서 빼주고.”
남예준은 그제서야 채봉구가 했던 말이 전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첫 접촉실험 때 감염자에게 건넸던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저를 구해주겠다고 했던 말이 얼토당토하지도 않다 생각했는데 방금 전의 일로 머릿 속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떠한 희망을 봤다. 채봉구는 혼자서 이 거대한 비밀을 짊어지고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버텨왔던 걸까. 미쳐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휘둘려지고 망가져가면서도 저 작은 머릿 속에서는 대체 뭘 하고 싶었던걸까.
”그럼 이제 진짜 안녕. 다들 만나서 반가웠어요.”
”채봉구!“
한노아의 간절한 외침에 배낭을 짊어지고 창고를 나서던 채봉구가 뒤를 돌아봤다. 기어이 저를 버리고 가버리는 채봉구를 향한 지독한 원망과 참담함이 그 채도 높은 눈동자에 다 담겨있었다.
“봉구야, 나 너없으면 안돼.”
“이제 아니야, 형. 나 없이도 돼.“
”채봉구, 제발.“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엔 형 사람들이랑 어울리는거 엄청 좋아했잖아. 운동하는 것도 좋아하고 다같이 술도 마시고. 그때 형 엄청나게 반짝반짝 했거든. 내가 꼭 다시 그런 세상을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버텨. 서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제법 어른스러운 채봉구의 말에 한노아는 결국 그를 떠나보내야만하는 끔찍한 결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자마자 감내할 수 없는 절박함이 벅차올라 눈물로 쏟아져나왔다. 그렇게 다정히 바라봐주면서도 울고 있는 저를 끝끝내 달래주지않는 채봉구가 그저 밉다.
”이제부턴 어디로 갈 생각이야?”
영영 떠나가버리려는 뒷모습을 향해 불쑥 물음이 튀어나왔다. 남예준의 질문에 채봉구는 턱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렸다.
“글쎄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게 네 계획이야? 나참, 걱정을 하란거야 말란거야.“
”우선 발이 닿는대로 어디든 떠나야죠. 바다를 보러가는 것도 좋고 눈이 오면 경치가 끝내주는 설산에서 캠핑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온 세상을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전부 악수할거예요.“
이루어지기도 힘든 미래를 조잘조잘 설명하던 채봉구가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 하고 싶은 것도 잔뜩 있고 만나고싶은 사람도 잔뜩 있다. 이 지구상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채봉구 뿐일거다.
”그게 얼마나 오래걸릴지는 모르겠어요. 설령 정말 지구의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게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다시 서로를 믿기까지는 더 오랜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죠.“
참 허황된 소리네. 네 수명이 200살은 되는줄 알아? 남예준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웃어버리자 유하민이 한심하다는 듯 걱정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해볼거에요. 인간은 원래 혼자선 외로우니까, 내가 이 세계를 다시 닿을 수 있게 만들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죠. 활짝 웃는 그 모습 뒤로 어슴푸레 들이치던 새벽이 걷히고 아침 해가 떠올랐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매섭게 동공을 찌르는 그 강렬한 빛 앞에 놓여진 세 사람을 향해, 채봉구는 그저 담백하게 손을 두어번 흔들더니 그 태양 사이로 미련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가 되면 나한테 술이나 한잔 사던가!“
그렇게 채봉구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나 긴 여행을 홀로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지난 몇년간 혼자 애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큰 걱정은 없다. 시원한 바다에 알몸으로 뛰어들거나 한번도 보지못했던 커다란 랜드마크 위에 올라보거나 사막 위 별을 올려다보는 채봉구를 상상하면 어쩐지 마음이 놓이다 못해 조금 즐거워졌다.
“이대로 보내도 돼? 소중한 피실험체잖아.”
비꼬듯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끙끙대며 옆구리를 움켜쥔 한노아가 눈가가 벌개져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주저앉아있었다. 남예준과 유하민은 서로 주고받은 말이 딱히 없었지만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무언가 결정을 내린 얼굴을 했다.
“글쎄요. 지난 몇달간 지겹게도 채봉구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젠 전부 소용 없어졌습니다. 말이 안되더라도 언젠간 저 애가 정말로 이 세상을 다시 이어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퍽이나.”
온 세상 사람들이랑 섹스라도 하려나보지. 그 말에 어쩐지 남예준은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총을 챙겨 등에 짊어진 유하민이 다가와 담담한 목소리로 남예준에게 말했다.
“저는 이대로 네이토스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피난지역으로 가서 피난민을 도우려고 합니다.”
“잘 됐네요.”
“박사님은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 뻔한 물음에 남예준은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곧장 대답했다. 남예준 답게 망설임이 없는 확고한 답이었다.
“우선은 연구소로 돌아갈거예요. 거기서 채봉구에 대한 기록을 전부 삭제 할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도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해봐야겠죠.”
그리고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할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게 틀림없는 한노아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저를 올려다보는 두 눈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지만 전에 없던 후련함이 보였다. 남예준은 그런 그에게 불쑥 맨 손을 내밀었다.
”채봉구 말대로라면 곧 이 세상이 발칵 뒤집힐겁니다.“
”뭐, 그럴수도.“
“그럼 이제 우리에게 남은건 이것 뿐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노아씨? 저를 향해 적의 없이 내밀어진 타인의 맨 손. 그 도움의 손을 받아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한노아는 울컥 짜증이 치솟으면서도 한켠으로는 보이지않던 미래에 또렷히 가야할 길이 정해진 기분이었다. 이제 한노아는 무엇을 해야할지 스스로 잘 알았다.
”잘난척은.“
맞잡아진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한노아가 신음을 흘리며 남예준 앞에 바로 섰다. 유하민은 곧장 한노아의 어깨를 부축하며 그저 말없이 깨끗한 물이 담긴 생수병을 내밀었다. 지금 이 순간 맞닿은 손이라고 해봐야 겨우 셋 뿐이었지만, 언젠가는 채봉구의 말대로 이 세상이 새로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로 가득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하며 다시 사랑할 수 있게될지도 모른다. 남예준은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이 악수는 그 날에 다가서기 위한 단 한걸음, 그 뿐에 지나지 않는다.
2년 후.
“우리 얘기는 이제 이쯤 하도록 하죠. 그럼 이제 당신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전 네이토스 연구소 사람이고, 저 남자는 전 네이토스 부대장, 거기다 저건 반란군의 리더였다?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거야?”
경계심이 잔뜩 실린 말에 보초를 서던 한노아가 유하민 어깨에 턱을 기대며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야, 언제까지 수다만 떨거야, 남예준. 귀찮아 죽겠다는 목소리였다. 예준은 제 앞에 앉아 저를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악의 없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한가지만 물어볼게요.
”채봉구라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나요?“
그 말에 텅 비어있던 눈동자가 단숨에 무언가 빛을 되찾았다. 도은호는 몇년째 제 품에 가장 소중히 넣어다니던 것을 저도 모르게 꾸욱 움켜쥐었다. 남예준을 향해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이 여지없이 요동쳤다.
”당신 채봉구를 알아?“
”그 쪽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채봉구가 당신을 꼭 찾아달라고 부탁했거든요, 도은호씨.”
우리랑 함께 가요. 내 밀어진 손이 칼을 치켜든 도은호의 손등을 천천히 감싸쥐었고 저항없이 아래로 이끌려내려갔다. 남예준은 그대로 얼어붙은 도은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들고는 장갑을 벗겨내 손을 맞잡았다. 채봉구에게서 느껴지던 그 온기였다.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며 무너져버리는 도은호를 남예준이 껴안았고, 도은호 또한 간절히 기다리고 바래왔던 타인의 팔을 절실하게 붙잡았다. 그의 발 아래로 몇번이나 꺼내봐 너덜너덜해진 종이 하나가 팔랑팔랑 떨어져내렸다.
- 다음에 만날 때까지 울지말고 살아남아라, 도은호.
지독하게 길었던 혼자만의 시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完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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