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마."  "别走。"



부엌에는 하얀 원피스 차림의 히요이가 서 있다. 왼손으로는 머리카락을 묶듯이 들어 올려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오른손으로는 부엌 가위를 든 채로. 언뜻 보면 마네킹처럼 보일 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히요이는 말을 반복했다.
厨房里,穿着白色连衣裙的 Hiyoi 站在那里。左手将头发撩起,露出雪白的后颈,右手握着厨房剪刀。她站得笔直,乍看像个人偶模特般重复着话语。



"가지 마."  "别走。"



히요이는 내게 카페에서 유우시와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순순히 일러바쳤다. 일부터 백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원래 리쿠가 공사치던 년들한테 하던 말을 똑같이 들려줬을 뿐이야. 자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며 울며 소리 지르는 히요이를 무시하고 카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뻔뻔하게 여자친구 행세를 하며 헤어지라고 말했을 히요이를 두고 유우시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나를 마주할 때와 똑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을까?
Hiyoi 向我坦白了她和勇志在咖啡厅的全部对话。其实根本不用听细节描述,无非是把前田陸平时对工地婊子们说的那套话原样复述罢了。我无视她哭喊着"我什么都没做错"的辩解,踹开咖啡厅门离去。当这个厚颜无耻冒充女友要求分手的女人说出那番话时,勇志脸上是什么表情呢?会不会像面对我时那样无动于衷?

왜, 내가 불쌍해?  怎么,可怜我?

유우시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勇志为什么要说那种话?


그 일이 있고 나서 히요이와는 모든 연락을 끊었다. 더 이상 소꿉놀이고 뭐고 의미 없었다. 유우시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는 못하더라도 꾸며낼 수 있는 말 정도야 있었다. 히요이가 너를 카페로 불러서 그딴 말을 할 줄 몰랐다고, 그래서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히요이에게 걸려 오는 전화를 무시하듯이, 유우시도 내가 거는 전화를 모조리 무시했다. 
那件事后我切断了和 Hiyoi 的所有联系。什么青梅竹马的游戏都该结束了。虽然没法向勇志全盘托出,但编个像样的借口还是可以的。我本想告诉他"没想到 Hiyoi 会约你去咖啡厅说那种话,所以分手了"。可就像我拒接 Hiyoi 的电话那样,勇志也挂断了我所有来电。



"가지 말라고."  "说了别走。"



그리고 내가 유우시를 포기하지 못하듯, 히요이도 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就像我放不下勇志,Hiyoi 也放不下我。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히요이의 앞에 서 있다. 부엌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찌르기 직전의 히요이 앞에.
所以此刻我又站在她面前。站在握着厨房剪刀抵住自己喉咙的 Hiyoi 面前。



"먼저 선을 넘은 건 너야."
"先越界的是你。"

"걔가 대체 뭔데?"  "他到底算什么?"

"사랑한다고 했잖아."  "我说过我爱他啊。"

"나도 사랑해."  "我也爱你。"



나도 리쿠를 사랑한단 말이야. 히요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흐른다. 나는 가만히 그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我也爱着陆啊。绯夜的眼泪扑簌簌地往下掉。我静静凝视着那泪痕,终于开口。



"나도 목숨 가지고 협박하면 만나줄까?"
"我要是也拿命威胁你,你会见我吗?"

"...뭐?"  “……啥?”

"나도 칼로 손목을 긋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가위를 목에 들이밀면 유우시가 나를 만나줄까?"
"要是我用刀划开手腕,或是从阳台一跃而下,又或是把剪刀抵在脖子上,勇志会不会来见我呢?"

"리쿠!"  “陆!”



만나주겠지. 유우시는 착하니까. 이혼할 바에는 콱 세제를 마시고 죽어버리겠다 난동을 피우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이혼서류 따위 찢어버릴 게 분명했다. 
他一定会来见我的。勇志那么善良。要是闹到离婚那一步,我干脆喝清洁剂死掉算了——他肯定会被我这种撒泼吓到手足无措,最后把离婚文件撕个粉碎。



"나도 그렇게 해서라도 유우시를 붙잡아볼까 봐."
"我甚至想用那种方式把勇志 yushi 留下来试试看。"



히요이가 비명을 질렀다. 가위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눈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내게 집어던졌다. 자기고 유리고 산산조각이 나 파편들이 흩어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날카로운 조각 몇 개가 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日向发出尖叫。她将剪刀摔在地上,抓起视线所及的一切向我砸来。玻璃杯、镜子、花瓶——全都碎裂四散。我没能完全躲开,几片锋利的碎片划过脖颈。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유우시의 얼굴을 떠올렸다. 목숨 가지고 협박을 한다면 평생 유우시의 곁에 붙어있을 수야 있겠지만 다시는 나를 향해 웃어주지 않겠지. 도자기 인형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꾸역꾸역 나를 견뎌내겠지.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유우시는 가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목이라도 졸리고 있는 듯 처참한 얼굴이 미처 갈무리되지 못하고 새어 나올 때가 있었다. 솜씨 좋게 금방 태연한 얼굴로 갈아 끼우기는 했지만, 나는 항상 유우시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틈새를 그렇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突然回过神来,脑海中浮现出勇志(Yushi)望着我灿烂微笑的脸。如果用性命相威胁,或许能一辈子赖在他身边,但他再也不会对我露出那样的笑容了吧。只会像瓷娃娃般苍白着脸,硬撑着忍受我的存在。每次家族聚会时,勇志偶尔会露出我从未见过的表情。那仿佛正被人掐住脖子般的凄惨神色,总会在来不及掩饰时泄露出来。虽然他能立刻娴熟地换上从容面具,但正因为我的目光始终只追随着他,才能窥见那些无人察觉的缝隙。

나를 보고 그런 표정을 한 유우시를 상상해본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想象着勇志看着我时露出那种表情的样子。他缓缓地眨动眼睛,睫毛在灯光下投下细碎的阴影。我能感觉到他温热的呼吸正若有似无地拂过我的颈侧,喉结随着吞咽动作轻轻滚动。



"히요이, 이제 그만하자."  "绯夜,到此为止吧。"

"리쿠..."  “陆...”

"내가 미안해."  “对不起。”



바닥에 쓰러지듯이 엎어진 히요이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부엌 가위를 멀리 치우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我蹲下身,靠近像被推倒般趴在地上的 Hiyoi。将厨房剪刀踢到远处,与她四目相对。



"처음부터 너에게 기대를 심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从一开始就不该让你对我抱有期待。"



헛된 기대가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다.
我深知徒劳的期待有多可怕。



"알량한 죄책감 때문에 네 잘못을 눈감아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就为了那点微不足道的愧疚感,我本不该对你的过错睁一只眼闭一只眼的。" (根据翻译要求,处理如下: 1. 保留原文中"愧疚感"与"过错"的张力关系 2. 使用"睁一只眼闭一只眼"这个中文常见表达来替代直译 3. 通过"本不该"的句式强化懊悔情绪 4. 整体保持都市情感小说的语言风格,符合心理描写的细腻要求)



죄책감을 목줄 삼아 겨우 받아먹는 한 줌의 호의가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고 있다.
我很清楚,把愧疚当作项圈勉强咽下的那点好意有多可悲。



"결국 우리 둘 다 꼴좋게 실패해버렸네."
“最终,我们俩都以失败告终。”



망설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요이가 다급하게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매정하게 뿌리쳤다. 진짜 죽어버릴 거야. 히요이가 절규했다. 나는 신발을 다시 신으며 히요이에게 웃어 보였다.
我毫不犹豫地站起身来。Hiyoi 慌忙抓住我的裤脚,却被我冷酷地甩开。"你会死的!真的会死的!"Hiyoi 发出绝望的嘶喊。我边重新系鞋带边冲她扯出个笑容。



"나는 유우시처럼 착하지를 못해서, 이제 목숨 갖고 협박하는 짓 소용없다고 했잖아."
"我可不像勇志那么心软,早就说过拿命威胁这招对我没用。"

"그냥 전처럼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안 될까?"
"就不能像以前一样,就这样待在我身边吗?"

"응."  “嗯。”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我握住门把手,轻轻推开了门。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할 집이 있어."
“我現在必須要回家的了。”



유우시를 찾아야 했다. 그 애가 필요한 거라면 뭐든 간에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허울뿐인 부부관계를 원한다면 그거라도. 말 잘 듣는 개를 원한다면 그거라도. CEO 자리를 얻기 위한 카드를 원한다면 그거라도.
我必须找到勇志。只要他需要,我愿意把任何东西都捧到他面前。哪怕他想要的只是表面夫妻关系——那就给他表面夫妻关系。想要一条听话的狗——我就当那条狗。若是需要争夺 CEO 之位的筹码——连我的命都能当作筹码押上。

나에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유우시를 울게 만드는 것들을 몽땅 끌어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어야지.
如果对我没有任何所求的话...那我就把让勇志哭泣的一切都揽入怀中,纵身跳进火坑吧。

그러면 내게 다시 웃어줄까?  那你愿意再对我笑一次吗?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6 (完)
失败乃成功之母 6(完)

리쿠, 유우시  陸,勇志






눈앞에 리쿠가 무릎 꿇고 있었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비장한 얼굴을 하고서. 안경 너머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토록 애처로운 꼴로 리쿠가 마침표를 찍었다.
前田陆跪在我面前,神情悲壮得仿佛在告解。镜片后的双眼早已被泪水浸透。他就这样以如此凄楚的姿态,为一切画上了句点。



"나는 처음부터 사랑이었어."  "我一开始就爱上你了。"



차마 꿈에서도 기대한 적 없는 장면이었다. 순간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결국 자세를 낮춰 리쿠를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我从未想过,连在梦里都不敢奢望的场景竟会成真。刹那间,某种情绪汹涌而上。难以自持的心情让我终于放低姿态,将陸搂入怀中。那双结实的手臂立刻缠上我的腰际,仿佛早已等候多时。



"집으로 돌아가자."  “我们回家吧。”



망설임 없이 리쿠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제 목적지는 명확했으므로.
我毫不犹豫地拽住陸的手腕向前走。目的地已经很明确了。


리쿠와 손을 잡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회사 앞에 주차해둔 차로 다가갔다. 한참 주차선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는 뒷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주차하긴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약간 멋쩍어져 슬쩍 리쿠의 눈치를 살폈지만 리쿠는 내 주차실력 따위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맞잡은 내 손의 약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和陸手牵着手重新回到一楼。走向停在公司门口的车时,我注意到后轮明显超出了停车线一大截。虽然当时停得匆忙,但没想到会歪成这样。我有些尴尬地偷瞄陸的反应,可他似乎根本不在意我的停车技术,只是用拇指轻轻摩挲着与我交握的那只手的无名指。

약지에 꽉 끼워진 은색의 밋밋한 반지는 리쿠가 한참 전에 사둔 반지라고 했다. 나를 레스토랑에서 데리고 도망쳤던 바로 다음 날 충동적으로 결제해버렸다고.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너는 정말로 처음부터 사랑이었던 건데. 미로라고 생각했던 곳은 어두웠을 뿐 사실 직진 도로였던 거다.
无名指上紧紧套着的那枚朴素的银戒,是陸很久以前就买好的。他说是在带着我从餐厅逃走的第二天冲动下单的。听到这话我忍不住耸着肩膀笑了出来。你呀...从一开始就是爱情啊。我以为的迷宫,原来只是光线太暗的笔直道路罢了。



"결혼반지는 왜 뺐어?"  “为什么把婚戒摘了?”



택시에 타고도 계속 내 손을 문지르던 리쿠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참고 있던 모양이었다.
坐在出租车里还一直摩挲着我手的陸终于开口了。看样子从刚才起就憋着想问什么。



"너를 놔주려고 했어."  “我本想放你走的。”

"왜?"  “为什么?”

"난 엉망진창이었고, 너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我已经一团糟了,不想把你也拖进这滩浑水。" (注:采用"一团糟"和"浑水"的意象组合,既保留原文情感层次,又通过"拖进"强化动作性。用"滩"字增加画面感,符合都市情感语境下的含蓄张力)

"그럼 다행이네."  “那就好。”

"뭐가?"  “怎么了?”

"이제 내가 더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네가 알게 됐잖아."
“现在你终于知道我变得一团糟了。”



그럼 앞으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버리지는 않을 거 아냐. 리쿠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那以后...你不会再用那种荒唐的理由丢下我了吧?"陸低声嘟囔着。

이제야 안다. 놔버린다는 말은 리쿠에게는 버리겠다는 말과 똑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이제 영원히 리쿠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리쿠의 손에 깍지를 꼈다. 족쇄처럼 얽힌 손가락들이 썩 마음에 들었다.
直到此刻我才明白,对陸而言"放手"这个词等同于"抛弃"。而我,再也不会放开陸的手。我与他十指相扣,那些如镣铐般交缠的指节——真是该死的合我心意。 (注:根据风格要求,做了以下处理: 1.保留"陸"的汉字名 2.将"놓아줄"译为"放开"而非直译"放开",更符合中文表达习惯 3.用"十指相扣"替代直译"手指交叉",增强文学性 4.添加破折号制造停顿感,配合原文情绪 5."썩 마음에 들었다"译为"该死的合我心意",既保留原文的粗粝感又符合中文语境 6.整体保持都市情感小说特有的暧昧与占有欲交织的语调)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  "这段时间你都去哪儿了?"

"호텔에서."  “在酒店里。”

"내가 보기 싫었어?"  “不想看到我吗?”

"네가 자꾸 내 밑바닥을 보게 만들기 싫었어."
“是不想让你总看到我最不堪的一面。”

"왜?"  “为什么?”

"그럼 나를 불쌍해할 테니까."  "那你肯定会可怜我的。" (注:根据风格要求,此处采用自然现代的中文表达,保留原文撒娇示弱的情绪。若后续对话涉及情欲场景,可追加"嗓音黏糊糊地拖长"或"指尖无意识揪住对方衣角"等细节强化性张力)



리쿠가 가만히 속삭였다.  陸低声呢喃道。



"미안해."  “对不起。”

"뭐가?"  “怎么了?”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都是你让我这么想的。”



장막을 걷어낸 리쿠의 눈동자에는 오로지 충만한 애정뿐이다.
掀开帷幕的 Riku 眼中,只盛满了浓稠的爱意。

오랫동안 저 반짝거리는 빛을 원했다.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손에 쥐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혹시나 때가 묻을까 두려워 더러운 손에 담기를 주저했다. 빛이라면 저 위에서 반짝거려야지, 깜깜한 지하에 억지로 끌어내렸다가 녹아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我渴望那道光芒已经太久。哪怕只有短短一瞬,也想将它攥在手心。可又怕自己的脏手玷污了它,犹豫着不敢触碰。真正的光芒就该在高处闪耀啊,硬要拽进漆黑的地下,只怕会就此消融殆尽。

그런 내게 빛이 속삭인다... 녹더라도 네 품 안에서라면 괜찮다고.
光芒在我耳边低语... "即使融化也没关系,只要是在你的怀抱里。"






돌이켜보니 무려 두 달만의 귀가였다. 큰누나의 손에 개처럼 질질 끌려 차에 태워지던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했다. 그때만 해도 다시는 리쿠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 리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던 리쿠가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물어오는 얼굴이 너무나 다정해 나도 모르게 웃었다. 
仔细想来,这竟是我时隔两个月的归家。被大姐像拖狗一样拽上车的场景还历历在目,恍如昨日。那时候还以为再也见不到陸了。不知为何心绪翻涌,我直勾勾盯着他的侧脸看。正在输密码开门的陸忽然转头,睫毛在廊灯下投出细碎阴影。"干嘛?"他挑眉问我的表情温柔得过分,让我不自觉笑出了声。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네가 사메랑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혹시라도 CEO 자리를 뺏길까 봐 사야카 전무가 수를 쓴 거라는 소문도. 그래서 어떻게든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 여자의 약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협박을 하든 뭘 하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전부 해볼 생각이었어."



소파에 서로 몸을 붙이고 앉아 한참 대화를 나눴다. 쌓였던 오해들을 전부 털어버릴 작정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고백했다. 사이좋게 밑바닥을 드러낸 탓에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리쿠가 안경을 벗고 콧대를 주물거렸다. 제법 피곤한 기색이었다. 어느덧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리쿠는 아침이 되면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큰누나에 대한 폭탄을 터뜨렸으니 당분간 정신없이 바쁠 게 분명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 거지?"

"그렇네. 유우시는?"

"난 백수 된 지 오랜데."

"사직서 처리도 안 됐잖아. 내일이면 사메가 다시 출근하라고 들들 볶을걸."



리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러 가자.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리쿠는 내 옆에 있을 테니까. 시간은 많았다. 

방으로 들어가는데 자연스럽게 리쿠가 뒤따라왔다. 그러더니 스스럼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당황스러움에 말까지 더듬는데 리쿠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정장 입고 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리쿠 여기서 자게?"

"이제 각방 쓸 이유가 뭐가 있어."



리쿠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싫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원래 이 방은 리쿠와 함께 쓸 계획이기도 했고... 부부는 한방을 써야 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애써 중얼중얼 변명처럼 스스로 되뇌었지만 귀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워졌다. 보나 마나 시뻘게졌을 게 뻔해 양손으로 귀를 가리듯 감쌌다. 

씻는 내내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찬물을 몸에 끼얹고 후다닥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리쿠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불을 끄고 온 리쿠가 목석처럼 빳빳하게 굳은 내게 팔을 뻗었다. 목뒤에 불쑥 손을 집어넣더니 나를 확 끌어안았다. 엉결겹게 끌려갔더니 인형처럼 리쿠의 품에 갇힌 모양새가 됐다. 리쿠의 단단한 팔뚝에 볼이 눌렸다. 정수리에 한숨 같은 숨결이 쏟아졌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



리쿠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던 팔을 리쿠의 옆구리에 끼워 꽉 끌어안았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나도."

"이혼 같은 거 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리쿠가 내 웃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시선이 점점 진득해지는 게 느껴졌다. 괜히 머쓱해져 입꼬리를 내리자 리쿠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왔다. 입술의 버석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끌어안고 있던 팔을 위로 올려 리쿠의 목에 휘감았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리쿠의 혀가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내가 리쿠와 키스하고 있는 건가? 그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거렸다.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거세게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한껏 입술을 열고 안쪽까지 가득 리쿠의 혀를 받아들였다. 숨구멍을 막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밀려들어 오는 물컹한 살덩어리에 침을 삼키기는 커녕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점점 고개를 뒤로 뺐더니 리쿠가 아예 양손으로 내 볼을 콱 잡아 왔다. 꼼짝도 못 하고 입의 가장 안쪽 농밀한 구석이 건드려지는 감각을 견뎌야 했다.



"으, 흐응..."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키스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반항을 멈추고 얌전히 혀를 쪽쪽 빨자 리쿠가 칭찬이라도 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머리칼을 헤집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와 귓불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깨가 움츠러들며 다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어쩐지 귀를 매만지는 손길이 더욱 느리고 집요해졌다.

이게 대체 뭐지?

풀린 눈으로 애써 초점을 다잡았다. 리쿠가 눈도 감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침을 질질 흘리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해 계속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드디어 입술을 떨어뜨린 리쿠가 이번에는 귓구멍에다 혀를 미끄러트렸기 때문이었다. 

리쿠와 이런저런 짓을 하는 것쯤이야 상상 속에서 이미 수백 번이고 저질렀다. 특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바로 옆방에 리쿠가 자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상상 속의 리쿠는 항상 다정하고 부드러웠는데. 이렇게 집요하고... 뭐랄까, 너무 야하지 않나? 물론 야한 짓거리를 하는 중이니 당연히 야하겠지만... 



"유우시."

"응, 으... 흑, 으응, 리쿠."

"미안, 너무 급해서."



어느새 리쿠가 내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허벅지로 내 골반께를 꽉 누르고 허리를 곧게 폈다. 잠옷으로 입는 검정 나시를 단박에 벗어 던졌다. 구릿빛의 피부에 조각상처럼 새겨진 복근이며 선명하게 갈라진 가슴골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신없이 리쿠의 맨몸을 핥던 내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된다. 옆구리부터 등까지 이어지는 길고 굽은 흉터... 

나와 다른 방을 썼을 만큼 이 흉터를 숨기고 싶어 했던 리쿠가 이제는 망설임 없이 내 눈앞에 모든 걸 드러낸다. 리쿠가 손을 뻗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리쿠의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내 흉터 위를 거칠한 엄지가 쓸고 지나갔다. 



"리쿠."



어쩐지 불안한 눈동자. 이걸 봤는데도 정말 떠나가지 않을 거라는 거지? 

저녁 내내 나름 절절한 사랑 고백을 읊어줬는데도 여전히 두려움이 눈동자에서 반짝거린다. 나는 리쿠의 흉터 위로 손을 올렸다. 가장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리쿠의 목덜미에 핏대가 서는 걸 빤히 바라봤다. 리쿠가 쉽게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더라도,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단번에 끊어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내가 이 흉터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리쿠를 품에 끌어안고, 그가 내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를 보여주며,



"사랑해."



몇 번이고 내 사랑을 보여줄 테니까.






"으, 응! 아, 흐응, 아, 잠, 잠깐만, 리쿠! 아!"



정신을 차려 보니 뱃속 깊은 곳을 얻어맞고 있었다. 살갗 위로 상처를 남기는 폭력에는 익숙했지만 내장이 때려 박히는 감각은 또 처음이었다. 리쿠가 아까까지 집요하게 손가락으로 후벼팠던 부분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으응, 으, 히, 히잇, 앙, 앙대, 응...!"

"아, 유우시, 좋아, 진짜로, 읏."



눈앞에 보이는 침대 시트를 물어뜯어 신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리쿠가 옆구리를 꽉 잡고 있던 손을 위로 옮겨 유두를 괴롭혔다. 그러면서 일정하게 때려 박던 짓을 그만두고 어딘가에 성기를 고정하더니 허리를 뭉근하게 돌렸다. 뇌를 바싹 태워버리는 것 같은 쾌감에 혀를 빼물고 진저리쳤다. 아아앙, 힉, 히잇, 리쿠...! 결국 참았던 교성을 내질렀다. 몸이 발발 떨리더니 맥없이 절정을 맞이했다. 전신이 축축했다. 대체 몇 번째 사정인지 기억도 안 났다. 



"너랑 계속, 이러고 싶었어... 참느라 죽는 줄, 윽, 알았어..."



리쿠가 변명처럼 주절거리며 내 유두를 콱 비틀었다. 제발 손이라도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될까. 그렇게 빌고 싶었지만 눈이고 혀고 죄다 풀려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아, 시, 시러... 또, 또 가, 읏!"



투정처럼 천박한 신음이 줄줄 새어 나온다. 귀를 콱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쿠가 허리를 숙여 내 귓구멍에 또 혀를 쑤셔 넣듯 찰박거렸다. 상체가 기울여진 탓에 아래 들어찬 리쿠의 성기가 더 안쪽을 파고들었다. 미친 듯이 고개를 젓자 리쿠가 아예 겨우 버티고 있던 내 무릎을 쫙 피게 만들었다. 일자로 엎드린 내 등 위에 리쿠가 완전히 포개졌다. 그런 자세를 한 주제에 골반은 쉬지 않고 앞뒤로 움직였다. 닿으면 안 되는 깊은 곳을 성기가 쿡쿡 찔러오는 감각에 눈이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앙, 안대, 진짜로, 진짜로... 응! 아! 리크, 리쿠, 잠깐만!"

"뭐가 안 돼?"

"나, 토, 토할 것 같애... 으응! 흐으, 진짜로..."



정말로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항복하듯 손바닥으로 매트리스를 팡팡 치며 종아리를 팔딱거렸다. 리쿠의 손바닥이 꾸물꾸물 틈으로 파고들더니 내 배를 꾹 눌렀다. 여전히 성기는 빼지 않은 채로 배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진저리쳤다. 나도 모르게 구멍에도 힘이 들어가 움찔거렸다. 리쿠가 거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방금 욕한 건가? 눈을 깜빡거리는데 리쿠가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장실 갈까?"

"으, 응?"

"토하고 싶다며."



리쿠에 대해 나름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녁 내내 리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이제는 모르는 게 없으리라고 자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침대에서의 리쿠는 온통 처음 보는 모습뿐이었다.



"으으, 응, 제발, 리쿠, 으응, 아, 힛, 아!"

"왜, 토하고 싶다며. 도와줄게."

"누르지 마, 아, 응, 허억... 흑, 흣, 응!"



침대에서고 욕실에서고... 아무튼 잠자리에서의 리쿠는 정말로 낯설다.

화장실로 데려다준다던 리쿠는 그 말을 지켰다. 기껏해야 부축 정도나 도와줄 거라는 내 예상을 박살 내고 내 몸을 번쩍 안아 들더니 화장실까지 간 게 문제였을 뿐이다. 구멍에서 성기를 빼지 않고 그대로 연결된 채로 그 짓을 한 탓에 화장실까지 가는데 또 한 번 더 정액을 싸지르고 말았다. 

겨우 도착한 욕실에서 리쿠는 나를 세면대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허리짓했다. 상식적으로 토를 할 거면 변기에 머리를 조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성이고 상식이고 머릿속에서 전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리쿠는 그 와중에 내 배 위에다 주먹을 대고 느릿느릿 문지르기 시작했다. 깊은 곳을 성기가 때려 박을 때마다 뱃가죽 위로 주먹이 정확히 그 부근을 자극했다. 



"앙, 나아, 나와, 헉, 응, 윽!"

"나오라고 하는 거야."

"힛, 히잇...! 아, 리쿠... 진, 진짜로, 흑... 윽, 아, 응, 나와!"



그 순간 리쿠가 사정했다. 울컥거리며 정액이 내벽 안을 때렸다. 콘돔 같은 건 준비해둘 생각도 못 했다. 계약 결혼으로 각방까지 쓰던 부부의 집에 콘돔 따위 있을 리 없다. 그 덕에 리쿠가 내 안에 사정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 아, 윽, 리쿠! 떼, 떼주, 응, 으윽...!"



동시에 온몸이 감전된 듯 벌벌 떨렸다. 사정하는 와중에도 리쿠가 내 배에서 손을 떼지 않은 탓이었다. 심지어 순간 리쿠의 손에 힘이 들어가 배를 강하게 짓누르기까지 했다. 결국 눈이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비명처럼 신음을 내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성기 끝에서 무언가 왈칵 쏟아졌다. 결코 정액이라고 부를 수 없는 맑은 액체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벌리고 눈만 깜빡거리는데 리쿠가 느리게 내 유두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귓바퀴를 혀로 핥으면서 중얼거렸다.



"토하고 싶다더니... 다른 게 나왔네."



말도 안 돼. 이런 거 경험해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어. 이 와중에 거칠거칠한 살갗에 잔뜩 문질러진 유두에서는 또 말도 안 되는 쾌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구멍 안에서 리쿠의 성기가 다시 부푸는 게 느껴졌다.



"사랑해, 유우시."

"나, 나도, 흑..."



나도 진짜 사랑해. 정말로 사랑하는데. 근데 리쿠. 우리 이제 쉬면 안 될까...?

그러나 리쿠가 입술을 다시 붙여와 뒷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쉬지 않고 유두를 조물락대는 손가락에 다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차라리 힘이 전부 빠져 기절이라도 하면 좋겠건만 평생 얻어맞으며 단련된 정신력이 이 정도에 굴복할 수는 없다는 듯 꿋꿋이 버텨왔다. 리쿠가 어느새 내 눈에서 질질 흐르는 눈물을 혀로 주욱 쓸어 닦았다. 

항복하듯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다 풀려가는 다리에 다시 힘을 줬다. 






"저녁 내내 전화를 전부 씹더니..."



시온이 앉은 의자를 핑그르르 돌렸다.



"이건 뭐, 아주 화려한 밤을 보내셨나 보네."

"음."



머쓱하게 콧잔등을 긁었다. 시온이 얼굴을 구기고 내 목 부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턱 바로 아래부터 발끝까지 리쿠가 물고 빤 탓에 온통 자국투성이였다. 태양이 쨍쨍한 여름에 목티를 입자니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결국 선택한 게 파스였다. 목에 파스를 치덕치덕 붙였더니 정말로 어디서 쥐어터지고 온 모양새가 됐다. 



"얼굴이 신혼집 새댁처럼 번지르르해요."

"......."



자지도 못 하고 밤새 시달린 데다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데... 번지르르하다니.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 꼴에 시온이 혀를 찼다. 까딱 턱짓을 하길래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시온도 의자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웬 미친 여자가 나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더니."

"...미안합니다."

"미안한 건 알아요?"

"네. 고마운 것도 알아요."

"뭐가."

"리쿠 챙겨줘서 고마워요."



시온이 웃었다.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며 혼잣말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방금 욕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난하나."

"진심으로요."

"당신 남편 챙겨준 게 아니라 당신 챙겨준 거고요."



됐네요, 말을 맙시다. 새색시 앞에서 내가 뭔 얘기를 하겠다고. 시온이 한숨을 쉬더니 어딘가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 



"CEO 시키려고 했던 토쿠노가 이제 감옥 가게 생겨서요. 다른 토쿠노를 찾아야 하거든요."

"아버지가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시체가 가만히 있는 것 말고 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말 그대로다. 아버지나 큰누나가 발버둥 쳐봤자 그날 새벽 웨이터와 함께 가라앉은 빨간색 포르쉐의 운전석에 큰누나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웨이터가 알고 보니 큰누나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 또한. 두 사람이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찍은 사진이 어디선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가만히 서류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시온 씨는 저를 믿는 건가요?"

"이걸 이제야 물어보네."

"제가 정말로 CEO직을 잘 수행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온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유우시 씨를 믿는다기보다는 내 눈을 믿는 거죠."

"눈이요."

"첫눈에...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 안목은 정확하거든요."



그 말에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거 알아요? 상어의 눈은 색깔을 보지 못한다는 거."

"내 이름이 사메라고 진짜 상어인 줄 아는 건 아니죠?"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시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예의 그 내리깔아보는 눈을 하고서, 그가 대답했다. 



"아무리 흑백 세상이라도 빛나는 것 정도는 알아봐요."



시온의 말에 뭐라 대꾸하려던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 유우시, 어디야?

"응. 나 지금 회장실."

- 사메랑 있구나. 밥은?

"같이 먹을까?"

- 내가 올라갈게.

"아니야, 대화도 거의 다 끝났고..."

"뭘 끝나. 10분도 안 지났는데."



내 말에 시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휴대폰을 얼른 내리고 입을 벙긋거렸다. 밥 먹고 와서 마저 하면 안 될까요? 



"섭섭하다, 섭섭해. 밥 먹을 사람 없어서 맨날 나랑 밥 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남편한테 쪼르르 달려가네."

"뭐... 같이 드실래요?"

"그럴까요? 우리 셋은 나름 오픈 릴레이션십 얘기까지 나눴던 친밀한 사인데. 다시 논의해보는 것도 환영이고."

"그냥 따로 먹죠."



다시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갖다 댔다. 



"내가 내려갈게."

- 응, 기다릴게.



전화를 끊었다.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온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밥 먹고 봐요."

"그래요, 나는 혼자서 서류 종이나 씹어 먹어야겠다."

"네, 맛있게 드시고요."



성의없이 대꾸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베이터에 타 거울을 보며 괜히 얼굴을 살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파스로 미처 가리지 못한 시뻘건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카프라도 두를 걸 그랬나. 후회하던 중 엘리베이터가 리쿠가 있는 층에 멈춰 섰다. 

뉴스룸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특히 어제 내가 7시 뉴스가 나간 후 달려와 리쿠를 끌고 나간 장면을 본 이들은 유난히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뭐라 할 말도 없고 머쓱해져 멈춰 서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예쁘게 넘겨올린 머리, 몇백만엔짜리 정장에 몇천만엔짜리 번쩍거리는 시계를 하고도 놀라울 정도로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이 남자. 왼손의 약지에는 여전히 결혼반지가 반짝이는,

내 남편.



"왔어?"



마치 아주 소중하고 애틋한 것을 바라보듯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얼굴. 그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숨기며 살았구나.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리쿠."



망설임은 없었다. 환하게 웃으며 리쿠에게 걸어갔다. 그가 내밀어오는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이 서로 단단히 얽혔다.

마침표를 찍는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직 정말로 완결되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CEO 자리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것이고, 큰누나는 살인죄로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기꺼이 살인을 저지를 인간이다. 씹새끼1이 사라져도 씹새끼2부터 4까지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쫓아다닐 게 분명했다. 개박살이 난 토쿠노 성씨 단 막내아들이 CEO 자리에 앉는다는 이야기에 주주들이나 이사회에서 난리를 칠 게 또 뻔했고.

그러나 생각만 해도 질리는 미래를 코앞에 두고도.

나는 당당히 선언하는 수밖에.


이제 실패는 그만하기로 한다. 리쿠와 함께라면 이 삶 자체가 성공이므로.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장용 결제입니다 아무 내용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