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아무 것도 안 사다 드려도 돼요?"

  ""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일하는 거라니까요."

  ""

  "제 말 듣고 계세요? 아니 도대체 퇴근하고 어디서 뭘 하시길래 점심시간마다 쪽잠을,"


나갈 채비를 마친 계장이 고개를 돌리자 송 수사관은 신발을 갈아신다 말고 부리나케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왼손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남은 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빠르게 두드렸다. 아니 그래도 밥은 먹여야지. 계장은 억울한 표정으로 수사관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수사관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어제도 당직자 빼고 제일 늦게 퇴청했대요. 그냥 자게 두세요."


계장은 미련이 남아 있는 것처럼 연신 뒤를 돌아봤지만, 송 수사관의 손길에는 크게 뻗대지 않고 금방 자리를 비켰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는 刘知珉의 모습이 잠깐 보였다.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올라가 있고, 재킷은 상체 위에 이불처럼 덮여 있었다. 송 수사관은 출입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까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잡이를 최대한 오래 붙잡고 있다가 천천히 놓았다. 먼저 사무실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계장에게 다가간 수사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계장이 우물거렸다. 나도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그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한숨만 길게 내뱉었다. 송 수사관은 그런 계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은 계기판을 바라보며 층수가 하나씩 내려오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다른 부서 직원들과 뒤섞여 도착한 구내식당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끌벅적했다. 7월 말까지 비가 내릴 거라던 기상청의 예상과 달리 장마는 예년보다도 일찍 종료됐다. 그와 함께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어서 그런지 청사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들었다. 12시 땡하자마자 사무실을 나서면 식판을 챙겨 배식 받기까지 십여분이 이상이 걸렸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식당은 입구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 송 수사관과 계장도 몇몇 아는 얼굴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대기줄에 합류했다.


  "인사가 빨리 나든지 해야지, 저러다 사람 잡겠어요."

  "전출이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리 무리를 하시는지 참……"

  "옆동네로 理事 가는 거랑 같나요. 이번에는 무려 대검인데."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지금 며칠째 밥도 안 먹고 저렇게 일만 하잖아."


앞사람을 따라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식판을 집어 든 계장은 배식구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셋이서 점심 먹은 게 언제냐고 물었다. 송 수사관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보다가 저만치 뒤에 있는 양혜솔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속말로 물었다. 유 프로는요? 송 수사관이 눈을 감고 자는 시늉을 해 보이자, 혜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얼굴이었으나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계장과 송 수사관은 빈 테이블을 둘러보다 사무과 직원들 근처에 자리를 잡고 식판을 내려뒀다. 한참 전에 내려왔는지 그들은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샐러드를 뒤적이던 수사관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퍼뜩 고개를 들고 계장을 바라봤다.


  "유 검사님 집에는 들어가시는 거겠죠?"

  "지지난 주부터는 배당받는 사건도 부쩍 줄었잖아."

  "저희 그렇게까지 안 바빠도 되는 거 맞죠? 조만간 또 키보드랑 마우스를 압수해야 하나"


계장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송 수사관이 크게 결심하고 제 몫의 새우튀김을 건너편 식판에 올려뒀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며칠째 점심을 거르는 유 검사에 대한 걱정이 깊어질수록 식욕도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았다. 국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다가도 계장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가 그런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밥상머리에서 자꾸 한숨 쉬면 복 나간다니까요."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니까."

  "장관님 쪽은 요즘 별 얘기 없지 않아요?"

  "이번 추경은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유했지. 어머니네 회사도 주총 잘 마무리 됐다고 들었고."

  "그러면 집안일은 아니라는 건데"


송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 刘知珉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난주에는 시말서를 썼다. 알람을 오후로 잘못 맞춰둬서, 운전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두어번 지각을 했는데 그 얘기가 하필 13층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보통 때라면 사무실로 불러내 차 한잔 마시며 잔소리하고 끝냈을 텐데, 요즘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차장도 그냥 넘어가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번 주간 회의에서는 후배 검사보다 대답을 엉망으로 해서 부장에게 말 그대로 개털렸다는 소문이 4층 형사부는 물론이고 15층 정보통신계까지 파다했다. 그런 와중에 근태까지 소홀했으니, 어쩌면 시말서 하나로 정리된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요즘 刘知珉 검사는 어딘가 확실히 이상했다. 바쁘고 피곤해 보인다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출근한 뒤에는 자리를 거의 비우지 않고 사건 조서를 읽었다. 정오가 되면 잠깐 눈 좀 붙이겠다며 수사실로 들어가 쪽잠을 잤다. 크지 않은 소파에 몸을 구겨 웅크려 누워 있는 모습은 오히려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였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刘知珉은 다시 책상에 앉아 조서를 검토하거나 기안을 작성하고, 피의자와 참고인을 조사했다. 계장과 송 수사관이 건넨 샌드위치나 삼각김밥은 두 사람이 퇴근할 때까지도 그대로 책상 구석에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보면 주전부리들이 사라져 있었으니, 아마 그것들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야근을 했을 것이었다. 이런 모습만 놓고 보면 업무에 치인 평범한 검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핸드폰을 차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면, 직원증을 잃어버려 새로 발급받지 않았다면, 셔츠 사이에 걸어둔 안경을 찾지 못해 책상 서랍을 몇 번이고 뒤지지 않았다면 송 수사관과 계장도 이렇게까지 刘知珉을 걱정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식사 다 한 거야?"

  "네? 아, 다 먹었어요. 나가시죠."


계장의 말에 송 수사관이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식판이 거의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퇴식구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정리했다. 퇴식구에 식판을 밀어 넣는 손끝에도, 나란히 식당을 빠져나가는 걸음에도 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수사관이 말없이 버튼을 눌렀다. 천장 위에서 울리는 구내 방송 소리에도, 옆에 있는 직원들의 웃음소리에도 그녀와 계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표시등의 숫자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이제는 뭐라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다짐만 거듭 곱씹을 뿐이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시에 퇴근시켜야겠어."

  "아예 모니터를 숨겨버릴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


그 짧은 농담조의 대화가 끝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장난스럽게 말을 해도 마음 한구석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무엇이 刘知珉을 이렇게 만든 건지, 어디부터 상황이 꼬인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했지만 그조차 쉽게 말로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층수가 내려가는 표시등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정이 지났을 무렵 청사를 나선 刘知珉은 익숙한 골목으로 차를 몰았다. 양옆으로 늘어선 빌딩들 사이, 2층 창 너머로 작은 바의 불빛이 간판 틈새로 은은히 새어 나왔다. 몇 개 남지 않은 네온사인이 깜빡이며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생기를 더했다. 주차를 마친 조용히 계단을 올라 출입문을 밀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잔잔한 재즈 선율이 흘렀고, 반쯤 꺼진 조명 아래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은 모두 비어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글라스를 정리하던 여자만이 고개를 들어 刘知珉을 바라봤다.


  "장사 끝났습니다."


그녀는 별다른 인사 없이 작게 숨을 내쉬고 손에 들고 있던 글라스를 선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물기를 닦던 수건을 옆으로 치워두며 刘知珉을 훑어보는 눈빛에는 걱정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刘知珉은 말없이 카운터 끝으로 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치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차례차례 걷었다. 셔츠는 군데군데 구겨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그대로 묻어났다. 여자는 선반에서 꺼낸 맥캘란을 빈 잔에 반쯤 따라주었다. 잔을 앞으로 밀자 호박빛 액체가 조명을 받아 금빛으로 잔잔히 일렁였다. 刘知珉은 잔을 들어 올렸다. 입술에 닿자마자 알코올 특유의 깊고 진한 향이 코끝을 찔렀지만, 망설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독한 술의 쓴맛과 화끈한 열기, 이어지는 뜨거운 여운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고요한 바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적막 속에서는 그 잔음마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잔을 채웠다. 손끝에는 망설임이 묻어있었으나 이내 다른 종류의 싱글몰트 위스키가 얼음을 타고 유리잔 안으로 미끄러졌다. 刘知珉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물을 마시는 듯 아무렇지 않게 술을 넘겼다. 도수 40도를 훌쩍 넘기는 독주였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듯했다. 세 번째 잔까지 거침없이 비운 刘知珉을 빤히 바라보던 친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지갑에서 오만원 두어 장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이내 간절한 목소리가 그 위로 흩어졌다.


  "술값 안 받을 테니까 오늘은 제발 집에 가서 자."


하지만 刘知珉은 그녀의 간청을 한 귀로 흘려듣고 빈 잔을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잔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더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자는 팔을 뻗으려다 멈칫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정도면 이미 충분히 취할 만한 양이었고, 무엇보다 내일은 금요일도, 주말도 아닌 평일이었다. 더는 마시게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여자가 잠시 잔을 내려다보다 그것을 카운터 뒤쪽으로 치워버렸다. 위스키 병에 머무르는 刘知珉의 시선도 금방 눈치채고 그마저도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로 올려놓았다. 병이 유리 선반에 닿으며 작고 건조한 소리를 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접시는 처음 내어둔 그대로였다. 정성스럽게 깎은 멜론과 수박, 복숭아는 공기에 닿은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刘知珉은 여전히 과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여자가 조용히 포크를 집어 멜론 조각 하나를 찍고, 어물쩍거리며 刘知珉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 속 다 망가진다. 刘知珉 검사님은 이십 대가 아니시라구요."


刘知珉은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무언가를 내쫓듯, 혹은 굳이 반응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느슨한 동작이었다. 그다음에는 고개를 돌려 위스키 병이 진열된 선반을 바라봤다. 그 시선엔 아쉬움도, 갈망도 없었다. 마치 유리 너머의 풍경을 건성으로 훑는 사람처럼, 그저 그 자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刘知珉의 얼굴을 살펴보던 여자는 결국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집에 무슨 일 있어?"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刘知珉은 시큰둥하게 받아치고서야 비로소 접시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었다. 수박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지만 동작에는 별다른 기운이 없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번져도 무슨 맛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습관처럼 반복될 뿐이었다. 여자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라가며 물었다.


  "한유진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포크를 들고 있던 刘知珉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봤다. 눈빛은 잠시 흐려졌고,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입술은 굳은 듯 다물어졌으며 짧은 숨이 들이켜진 다음엔 한동안 호흡이 멈췄다. 대답은 곧바로 튀어나왔으나 말투는 묘하게 건조했다. 감정이 타고 남은 자리에는 피로와 무기력만 켜켜이 쌓여갔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뭐라고?"

  "한유진한테 일이 생긴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마친 刘知珉은 포크를 들고 과일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구멍 난 복숭아 사이로 과즙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러다가도 금방 흥미를 잃고 포크를 툭 하고 내려놓았다. 금속이 도자기에 닿는 소리가 제법 크게 둘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 너는 왜 그래."

  "내가 뭐."

  "지금이 몇 시인데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이러고 계시냐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의아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억눌러지지 않은 채 터져 나왔고, 공기 중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순간적으로 대화가 끊기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재즈 선율만이 그들 주변을 메웠다. 刘知珉은 말없이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다가 손끝으로 나무 표면의 자잘한 흠집을 천천히 더듬었다. 닳은 결을 따라 무의미하게 동작을 이어가는 그의 얼굴은 더욱 무감각해졌다. 그러다 刘知珉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몰라."

  "뭐?"

  ""

  ""

  "모르겠다고, 나도."


여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네가 모르고 있으면 누가 아는데, 그런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대신 조용히 刘知珉의 얼굴을 바라봤다. 표정은 담담했다. 대답하는 목소리도, 미지근한 침묵도 모두 맥없이 흘러나왔다. 지금의 刘知珉은 화도, 슬픔도, 억울함도, 마치 그 어떤 감정도 느낄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知珉아."

  ""

  "刘知珉."

  ""

  "너 진짜 괜찮은 거야?"


그제야 刘知珉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분명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아무런 초점도 없었다.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고요하고 공허한 눈빛이었다. 방금 전까지 꿈속에 있다가 아직 현실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듯 시선은 한 점에 멈춰 있었다. 


  "응, 괜찮아."

  ""

  "별일은 아니고 그냥맨정신으로는 집에 못 들어가겠어서."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감정을 억지로 억누른 듯한 기색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기색도 없었다. 단어와 문장에는 어떤 의미도 실려 있지 않았고, 소리만 남아 조용히 떨어졌다. 여자는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대화를 이어가는 일조차 부질없게 느껴졌다.


  "적응 중이야.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 그래."


刘知珉은 그렇게 말한 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른세수를 하듯 손바닥이 천천히 뺨을 지나갔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가에는 피로의 흔적이 어른거렸고, 어깨는 힘이 빠진 채 아래로 축 늘어졌다. 느릿하게 일어선 刘知珉이 재킷을 들어 팔에 걸쳤다.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은 오늘따라 유독 지쳐 보였다. 여자는 刘知珉을 차마 불러 세우지 못했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앞만 바라보다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올 때에야 참아왔던 숨을 내뱉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올려둔 오만원짜리 지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조명이 닿은 표면이 은근하게 빛나며 그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졌다. 모든 순간의 분위기와 온도, 공기까지 또렷했지만 刘知珉과 나눈 대화만큼은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는지, 아니면 막연한 상상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제 방처럼 부장실을 들락거린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려가 핀잔을 듣는 게 요즘 일상이라고. 기안을 올리면 코멘트가 잔뜩 달려 되돌아왔다. 지적을 반영해 다시 송부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형사1부가 지검장과 단체로 점심 회식을 가졌다는 말도 들렸다. 식사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무난하게 흘러갔지만, 상관의 격려 뒤에 담긴 속뜻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刘知珉을 둘러싼 말들은 지검 곳곳에 조용히 퍼져나갔다. 대검 발령에 불만을 품은 윗기수들이 집단 항의를 해 인사가 잠시 보류됐다는 추측, 원하는 부서가 아니라 본인이 고사했다는 설, 집안 사정 탓에 마음이 산란하다는 이야기까지. 진실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뒤였고, 소문은 이상할 만큼 쉽게 번졌다. 부서 간의 경계는 물론 기관과 기관 사이의 벽조차도 거뜬히 넘어섰다. 형사1부 부장이 직원에게 서류를 던졌다는 이야기는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한세희의 귀를 거쳐 그녀의 조카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다.

한유진은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刘知珉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강 理事에게 연락했다. 함께한 세월이 어언 십수 년이 되었기에 평소에도 서로의 부모님과 스스럼 없이 안부를 주고받았다. 강 理事는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간 여기저기서 떠도는 말 때문에 걱정이 돼서 며칠 전 이미 통화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때도 刘知珉은 별일은 없고 요즘 생각 정리할 게 많아서 그렇다고 답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며, 그 이후로는 괜한 관심으로 스트레스를 줄까 봐 일부러 연락을 자제하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대화 말미에는 오히려 강 理事가 되레 한유진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아직 知珉이랑 어색한 거니. 그녀는 자세한 설명은 피하면서도 곧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한유진은 최근 통화 목록에서 刘知珉의 이름을 찾아 조심스럽게 눌렀다. 긴 연결음 끝에 들려오는 것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가 전부였다. 그래서 싫어할 걸 알면서도 지검으로 향했다. 건너건너서 미리 언질을 주면 피할 게 분명했으니 일부러 평일 낮 시간을 골랐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장과 수사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방문객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刘知珉은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소는 변호사 통해서 진행하세요."

  "혹시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계장과 수사관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유진은 종종 刘知珉과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오곤 했었다. 이따금씩은 청사 로비에서 기다렸다가 퇴근하는 刘知珉의 차를 얻어타고 가기도 했다. 때문에 송 수사관은 편하게 얘기하시라는 말을 남겨두고 계장과 함께 조용히 책상을 벗어났다. 이윽고 사무실 문이 닫혔다. 아주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이었으나, 刘知珉은 모니터에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연신 키보드만 두드렸다. 타건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공간을 채웠다. 


  "혹시 내 번호 차단했니?"

  "응."

  "왜?"

  "그냥. 그러고 싶어져서."


망설임도, 미안함도 없는 대답이었다. 오늘의 날씨나 교통 상황에 대해 말하듯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그 한마디가 오히려 더 비정하게 가슴을 후벼팠다. 한유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언제부터인가는 타건음도 들리지 않았다. 책상 구석에 있던 서류 더미는 가운데로 옮겨졌다.


  "그거 물어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감이네."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결국 한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을 터뜨리려던 건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이토록 철저한 무관심은 처음 겪어 봤다. 대놓고 성가신 기색을 내비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자신이 공기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刘知珉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으로 페이지 한 귀퉁이를 만지작거릴 뿐 넘기려는 기색은 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저희들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만큼은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 말은 누군가를 몰아붙이기 위한 것도 따져 묻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쳐서 나온, 거의 체념에 가까운 한마디였다. 반면 刘知珉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손을 들어 서류 한 장을 넘겼다. 종이끼리 스치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나지막이 울렸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한 무심한 태도는 한유진에게 묘연한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


  "金旼炡xi한테 사과라도 해? 그거면 되는 거야?"


서류를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가볍게 들어 올린 페이지는 끝내 넘겨지지 않았고, 손끝은 굳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찰나의 정적을 한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걔 때문이야 진짜?"

  ""

  "고작 金旼炡 때문에이러는 거라고?"


刘知珉이 서류철을 덮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다만 한 사람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으며, 그 공백은 다른 한 사람에게 한없이 차갑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한유진은 바짝 힘을 줘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할 말 다 했으면 나가 봐."


애써 눌러왔던 감정은 그 한마디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한유진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를 악물었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께 어딘가가 조여드는 듯한 압박이 느껴졌다. 막연한 불안과 해묵은 자책이 마구잡이로 뒤엉켜서 입 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걔는 다 버리고 너한테 오겠대?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가라고 했어."

  "한번 당해봤으면서 왜 아직까지 미련을 못 놓아."

  ""

  "너야말로 정신 차리고 네 꼴을 좀 봐."


이런 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심은 따로 있었고, 말은 늘 그 진심을 어긋나게 했다. 刘知珉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미움받는 것도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닿지 않는 마음 앞에서 감정은 늘상 왜곡된 채로 흘러나왔다. 입을 열면 상처를 남겼고, 침묵을 택하면 후회했다.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결국 부정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刘知珉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한유진은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게처음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힘드냐 유진아."


감정을 도려낸 듯 텅 빈 목소리였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한유진의 가슴을 더 깊이 찔렀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한유진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자리에서 돌아섰고, 문을 열고 나가 복도를 빠르게 지나쳤다. 간신히 비상계단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명치 한가운데가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셔츠 깃을 잡아당기며 답답한 숨을 틔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며 주먹으로 심장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다가, 결국 그대로 주저앉을 듯 허리를 굽혔다. 

무서웠다. 刘知珉을 저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일까 봐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봐서. 그게 가장 두려웠다. 힘들어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이제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刘知珉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한유진은 피 맛이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런 비참함은 도무지 참아내기 어려웠다.  









야근이 일상이 된 지 오래였지만 오늘따라 사무실 공기가 유독 답답하게 느껴졌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서류와 씨름하던 刘知珉이 볼펜을 내려놓고 목을 좌우로 돌렸다. 누구한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어깨와 목덜미가 뻐근하고, 먼지라도 들어간 듯 눈이 침침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침은 12를 넘어가고 있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刘知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랍을 뒤적여 며칠 전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꺼내 손에 쥐었다. 흡연자도 아니면서 왜 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카페인보다 더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刘知珉은 직원증을 풀어 바지 주머니에 대충 처박아두고 청사를 나섰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변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했다.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아스팔트 위를 스쳐 갔다. 刘知珉은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마냥 걸어가기 시작했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다 보니 흡연 부스가 보였다. 다행히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刘知珉은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값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필터의 거친 촉감이 입술이 닿는 느낌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라이터를 찾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핸드폰과 직원증 뿐이었다. 그제야 刘知珉은 라이터를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편의점에 가서 사 오기도 귀찮고, 사무실로 올라가서 누군가에게 빌리기는 더더욱 번거로웠다.

결국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이 밝아지며 희미한 전광이 얼굴을 비췄다. 잠금을 풀고 무의식적으로 네이버 어플을 눌렀다. 검색창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습관처럼 자판을 두드리고 엔터를 누르자 검색 결과가 쭉 나열됐다. 가장 위에는 프로필이 떠 있었다. 올 초에 새로 찍었다고 했던 그 사진이었다. 깔끔하게 묶은 머리, 자연스러운 미소, 카메라를 바라보는 또렷한 눈빛. 刘知珉은 사진 속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조금씩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다.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면을 쥔 손이 희미하게 떨렸고, 입술 사이로는 탁한 숨이 야트막이 새어 나왔다.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화면을 다시 확인했지만, 그곳에 떠 있는 글자들은 어느 하나 변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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