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
#####공금###########
1)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몸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야는 온통 하얬고, 머리가 느리게 굴러가는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我觉得我的身体漂浮在一个安静的空间里,我什么都感觉不到。我的视线一片白茫茫,我真的无法思考我的头是否在缓慢转动。尽管如此,我并不认为我现在的感觉还不错。
<너의 이름은 아르펠이다.>
<你的名字是雅宝>
다시 한번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고,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여전했지만.
再一次,一个在消退的意识中的未知生物这么说。我仍然不知道声音的主人是谁,也不知道他为什么这么说。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이름이 ‘아르펠’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였다.
重要的是,“it”变成了“Arpel”。
***
이상한 곳에서 눈을 뜬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我已经五天没有在一个陌生的地方醒来了。
사실 정확하지도 않다. 중간에 한 번 잠이 들기도 했고, 창을 통해 들이치는 햇빛이 강해지고 사그라지는 것을 기준으로 날을 가늠해 본 것이었던 탓이다.
事实上,它甚至不准确。我中间睡着了一次,我用从窗户射进来然后逐渐消失的阳光来衡量白天。
아르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공간은 아주 협소했으나 내부에는 있을 건 다 있었다. 날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목검부터 시작해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장난감, 청소할 때 쓰는 비품…… 한 마디로 잡동사니 창고였다는 뜻이다.
当 Arpel 再次睁开眼睛时,他看到了一个类似仓库的地方。空间很小,但里面什么都有。从一把带有未抛光刀片的木剑开始,一个看起来像儿童的旧玩具,以及用于清洁的固定装置......一句话,这是一个杂货仓。
‘평화롭다.’
“平静。”
동실동실 허공을 떠다니며 생각했다.
我漂浮在空中时想着。
적당히 들이치는 햇볕도 따뜻했고, 비스듬히 비친 햇빛 사이로 작은 먼지들이 눈발처럼 공중을 떠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딱히 더럽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适中的阳光很温暖,透过斜射的阳光,我可以看到小尘埃像一英尺厚的雪一样漂浮在空中。我并不觉得特别脏。
창고가 뭐 창고지.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것으로 보아 깨끗하기를 바라는 건 어려웠다.
什么是仓库?由于堆积了杂物,很难希望它是干净的。
자신이 누구인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의문을 느낄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他甚至没有问过自己是谁,或者为什么在这里。我只是接受了它。我想我确实认为没有必要质疑它。
그리고 아르펠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 사실 중에는 자신의 본체가 ‘검’이라는 것도 있었다.
Arpel 接受的一个事实是,他的身体是一把“剑”。
창고에서 눈을 뜨고 난 이후, 안을 동동 떠다니며 누비다가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의 바깥으로 나가볼까 했다. 물론 시도했다 뿐이지 성공하진 못했다. 무형의 힘이 그의 몸을 끌어당기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在仓库里醒来后,我飘来飘去,想着走出微微开着的窗户。当然,他们尝试了但没有成功。这是因为一股无形的力量拉扯着他的身体,阻止了他向前移动。
그 힘의 끝에는 새까만 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 검을 보자마자 자신이 검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왜 자신이 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김새가 나쁘지 않았기에 만족했다.
在那股力量的末端是一把漆黑的剑。他一看到那把剑,就本能地知道那是一把剑。他不确定自己为什么是一把剑,但他很满意,因为他看起来还不错。
‘졸려.’
“我困了。”
따끈하고 나른한 공기에 아르펠의 시야가 아물거리며 감겼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지 말라고 하는 게 너무한 거 아닌가. 빠르게 합리화한 아르펠은 몰려오는 수마를 막지 않았다.
雅宝的视线被温暖、慵懒的空气扫走了。告诉他们不要在这种气氛中睡觉,是不是太过分了?Arpel 很快就合理化了,并没有阻止即将到来的洪水。
다시 눈을 뜬 건 멀리서 들리는 비명 때문이었다.
他再次睁开眼睛,因为远处传来了一声尖叫。
눈을 붙이기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움이 덕지덕지 묻어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오로지 새빨간 화마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在我睁开眼睛之前,这里是一个充满宁静的地方,但现在我只能看到鲜红的火焰。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아르펠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의 벽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간 불이 머지않아 지붕을 무너뜨렸다.
雅宝愣愣地眨了眨眼,然后转过头来。大火爬上了看起来像仓库的建筑物的墙壁,很快就把屋顶坍塌了。
당연하게도 검인 아르펠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부분에만 해당했다.
自然,这把剑没有对 Arpel 造成打击。但是,它仅适用于外部部分。
불길에 의해 지붕이 무너지자 그 너머로 여러 채의 가옥과 사람들이 보였다. 분명 얼마 전까지 평화로웠을 마을을 화마가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屋顶因火焰而坍塌,在屋顶的另一边可以看到几栋房屋和人。大火贪婪地吞噬着这个村庄,不久前这里一定还是一片平静。
새빨간 시야,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지르다 뜨거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지는 집들.
鲜红的景象,痛苦地扭动着的人们,吱吱作响的房屋尖叫着,房屋在无法克服高温的情况下倒塌了。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내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자꾸만 무언가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만 같은 불쾌한 기분이었다.
在我看着这一切的整个过程中,我的脑子都在跳动。我感到不舒服,好像有什么东西试图悄悄溜进来。
머릿속을 파고드는 알 수 없는 것은 두통마저 일으켰다. 반투명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아르펠은 얽히고설킨 기억들이 휘몰아침을 느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번개 같은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我脑海中闪过的未知事物甚至让我头疼。当他用半透明的手捂住自己的头时,他感觉到一排纠缠在一起的记忆在他周围盘旋。又过了一会儿,我突然意识到了这一点。
‘아, 여기는 소설 속이구나.’
“哦,这是一本小说。”
주인공이 악몽이라고 일축한 과거의 한 장면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재앙의 밤이 지나가면 마을에서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화재로 흔적만 남고 모조리 사라진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마검을 주울 것이다.
被主角视为噩梦的过去的一幕正在他眼前展开。当这个灾难之夜过去时,在村子里孤独幸存下来的主角将回到被大火烧毁的房子,并拿起一把将改变他一生的魔剑。
아르펠은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가던 생각을 뚝 멈췄다. 청명한 밤하늘 아래에서 불길들이 붉은 빛을 그리며 뒤엉켜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있는 지금, 굳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雅宝停止了在脑海中整理这些想法。在晴朗的夜空下,火焰纠缠在红色的光芒中,吞噬着一切,我不想去想这些事情。
아이들의 우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그저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我听着孩子们的哭声和人们的尖叫声,我就蜷缩起来。没有什么是剑不能离开它固定的位置的。
무엇 하나 바꿔 놓을 수 없는 악몽 같은 밤이 그저 빠르게 지나가길 바라는 몸짓이었다.
这是一种姿态,希望那个无法改变的噩梦般的夜晚能快点过去。
***
잠에 들길 바라면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악몽과도 같았던 밤은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날은 밝았고, 주위에 남은 것이라고는 집이 있던 자리임을 증명하는 새까만 목재들과 바닥에 흩어진 재뿐이었다.
当我闭上眼睛睁开,希望能睡着时,噩梦般的夜晚早已消失。天亮了,只剩下那些被证明是房子所在地方的黑色木材和散落在地板上的灰烬。
하루아침에 텅 비어버린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르펠은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一夜之间,Arpel 茫然地盯着空荡荡的地方,努力整理自己的思绪。
어젯밤, 천재지변처럼 갑자기 들이닥친 이유 모를 화재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재로 만들어 버리던 도중 아르펠은 ‘전생’ 같은 것을 기억했다.
昨晚,一场自然灾害突然袭来,将整个村庄化为灰烬,雅宝想起了类似“前世”的事情。
굳이 전생 같은 것이라 하는 이유는…….
为什么说这就像前世一样.......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我不知道我是谁。”
기억 속의 자신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생일은 언제인지, 하물며 왜 죽었는지,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파노라마처럼 휘리릭 지나갔으나 모든 것이 거품처럼 흐릿했다.
他不知道自己在做什么,他叫什么名字,他的生日是什么,他为什么死,甚至不知道他什么时候死的。它像全景一样过去,但一切都像泡沫一样模糊不清。
그저 전에는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짧은 감흥만이 남았다.
我只是有一个短暂的印象,我以前是这样的。
우습게도 선명히 남은 기억이 있긴 했다. 죽기 전 읽었던 소설의 제목과 줄거리가 그러했다. 그게 아르펠이 이곳이 소설 속이라 단정 짓는 이유였다.
奇怪的是,有一个生动的记忆。这就是我死前读到的小说的标题和情节。这就是为什么 Arpel 得出结论,这个地方在小说中。
그 긴 생애 중에 왜 하필 소설의 내용만 뚜렷하게 기억하는지 알 길이 없어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유일하게 소설만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我感到很沮丧,因为我无法知道为什么我在那漫长的一生中只清楚地记住了小说的内容,我想我只记得小说一定是有原因的。
이곳은 ‘신’이 있는 세계였으니까.
这是一个存在“上帝”的世界。
‘일단… 하필 내가 그 마검이라는 건데.’
“首先......我就是那把魔剑。
주인공의 비극적인 서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불길이 꺼진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검 한 자루였다. 문제는 그 검이 아르펠 본인이라는 점이었다.
主角悲剧叙事中不可或缺的一部分是火焰熄灭的废墟中仅存的一把剑。问题是这把剑是 Arpel 本人。
걱정이 밀려들었지만 재가 가라앉은 세상 속에서 그저 멀뚱히 바닥에 꽂혀 있을 뿐인 검 옆을 맴돌며 애써 긍정적으로…… 는 무슨.
他很担心,但他尽力保持积极,悬停在刚刚卡在灰烬覆盖的世界中的剑旁边......什么?
‘나, 봉인 당하는 건가……?’
“我被封印了吗......?”
소설 속에서 마검이 주인공에게 필요한 것이기는 했다. 주인공은 마신에게 축복받은 아이였고, 그가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있게끔 해 주는 것이 신이 내린 권능의 파편을 담고 있는 마검이었다.
在小说中,魔剑是主角需要的。主角是一个受到魔神祝福的孩子,正是那把包含着神灵力量碎片的魔剑,让他能够使用应有的力量。
다만 이 검은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악신을 숭배하는 사이비 교단 놈들에 의해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然而,这把剑的状况并不好。那是因为他被一个崇拜邪神的邪教所腐蚀。
타락한 마검은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그의 잘못이라 속삭였고, 자신을 노린 사람들에 의해 마을이 불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의 정신이 무너지자마자 그를 잠식했다.
腐化的魔剑不断对主角低语,这是他的错,当主角得知村庄被针对他的人烧毁时,他的头脑一崩溃,它就吞噬了他。
결국, 인간성이 결여된 채 피폐한 정신으로 세상을 떠돌던 주인공은 신전에서 파견된 수색대에 의해 반쯤 끌려간다. 이후 마검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안 대신관은 마검을 봉인하고, 주인공의 치료를 위해 성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最后,主角带着没有人性的毁灭性心灵在世界上游荡,被从寺庙派来的搜索队拖走了一半。后来,大祭司知道魔剑已经落下,于是封印了魔剑,向圣人求助,治愈了主角。
한 마디로 이 마검은, 주인공의 서사를 보다 비극적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에 불과했다.
总之,这把魔剑,只是让主角的叙述更加悲惨的元素之一。
만약 아르펠이 소설 속 검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봉인 외에는 없을 것이다.
如果雅宝无法逃脱小说中剑的角色,除了封印,就没有别的结局了。
봉인되고 싶지 않았다. 소설의 내용 외에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전생이었지만 이미 한 번 죽은 건 확실했기에 다시 죽고 싶지 않았다
我不想被印证。除了小说的内容,我什么都记不起来了,但我不想再死一次,因为我很确定我已经死过一次了
‘봉인되더라도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
“就算我被封印了,我也不觉得我会死.......”
검 안에 갇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수십 년을, 운이 안 좋다면 수백 년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권능의 파편을 담고 있는 마검이 쉽게 녹이 슬거나 망가질 리 없으니까.
你可能不得不花几十年或几百年的时间被困在剑中,什么都不做。蕴含力量碎片的法剑,不能轻易生锈或折断。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래, 이건 기회야.’
“就像死了一样。是的,这是一个机会。
아르펠의 최우선 목표가 세워졌다. 봉인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또 행복하게 살자.
Arpel 的首要任务已经确定。让我们平静快乐地生活,不要被封印。
전생의 기억은 그에게 불행한 미래를 벗어날 수 있는 아주 값진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눈을 꾹 감은 채 수도 없이 다짐에 다짐을 반복하던 아르펠은 문득 다가오는 인기척 하나를 느꼈다.
他过去生活的回忆给了他一个无价的机会,让他摆脱不幸的未来。紧闭着眼睛无数次重复着决心的雅宝,突然感觉到附近有声音接近。
“아…….”
“哦.......”
잿더미를 뒤집어쓰기라도 했는지 얼굴과 몸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다리를 다치기라도 한 듯,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했다.
他是个小孩子,脸上和身上沾满了煤灰,仿佛被灰烬覆盖了一样。就像他的腿受伤了一样,他不能朝这个方向走。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눈길로 재밖에 남지 않은 집터를 바라보던 아이의 눈에 금세 빛이 가셨다. 한 줄기 희망마저 놓은 표정이었다.
当孩子难以置信地看着房子的废墟,除了灰烬之外什么都没有时,他的眼睛立刻亮了起来。他甚至还有一丝希望。
곧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르펠은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새까만 땅에서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모습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사람 같았다.
泪水从他的大眼睛里掉下来。雅宝只能盯着这一幕。他一无所有地坐在漆黑的地面上哭泣,就像一个放下了一切的人。
아르펠은 그저 말없이, 이 세계의 주인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雅宝只是默默地盯着这个世界的主角。
한참을 끅끅대며 울던 아이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서야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말없이 주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孩子咕哝着哭了很久,过了一会儿,他才从座位上站起来。然后他开始四处走动,一言不发。
가족을 추억할 만한 것이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애처로운 몸짓이기도 했고, 혹여나 꺼지지 않은 생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한 덩어리이기도 했다.
看看是否还有什么值得纪念他的家人,这是一种可悲的姿态,看到他是否能找到尚未熄灭的生命痕迹,也是一种遗憾。
몇 분을 돌아다니며 집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듯 이쪽을 향해, 정확히는 창고가 있던 자리를 향해 다가왔다.
走了几分钟后,孩子看到屋里什么都没有,脸色阴沉。然而,他似乎并没有放弃,他朝着这个方向走来,准确地说,朝着仓库所在的地方走去。
있지도 않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주책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我的心怦怦直跳,我觉得我做了什么应该责备的事情。
“검……?”
“......剑?”
2
아르펠은 아이에 의해 금방 발견됐다. 그가 있던 창고에서 보관하던 검이라고 해 봤자 목검뿐이었고, 그 외에는 아이가 가지고 놀 법한 투박한 것들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모조리 타버려 무엇 하나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펠은, 정확히 말하면 그의 본체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雅宝很快就被一个孩子找到了。他仓库里唯一存的剑是一把木剑,其他都是孩子会玩的粗糙东西。尽管一切都被烧毁了,但准确地说,雅宝必须脱颖而出,因为他的身体完好无损。
잠시 망설이던 작은 손이 검 손잡이를 쥐었다. 동시에 아르펠은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진득한 감정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犹豫片刻后,小手握住了剑柄。与此同时,Arpel 感觉自己身体的每一个细胞都被那股如霹雳般袭来的压倒性情绪唤醒了。
‘이건….’
“这是......”
이건, ‘절망’이다. 자신을 붙잡은 이 아이가 느끼고 있는 절망. ...
그제야 아르펠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다. 그는 타락한 마검이고,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깨어난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존재였다. ...
주인공의 절망에 감응해 깨어난 뒤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그 자신이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불행한 서사를 위해 설계된 존재 중 하나라는 걸 다시금 자각했다. 로한은 모든 것을 잃어야만 하고, 그의 과거는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노라 온 세상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
로한의 손에 닿고 나서야 그의 과거에 개입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도 어쩌면 이미 정해진 세상의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조금 답답한 듯, 미묘한 기분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한 것도 잠시, 자신이 깨어나 검신이 웅웅거리며 떨리는 바람에 상당히 놀란 기색을 보이는 이 아이부터 달래 주기로 했다. ...
<날 깨워 줘서 고마워.> ...
“……어? 방금 누가….” ...
<네 손에 잡혀 있는 검을 봐.> ...
당연하게도 이 세상에 말을 하는 검 따위는 없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성검이나 마검도 싫다 좋다를 표현할 정도의 단순한 자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대화는 못 한다. ...
그렇다면 자신이 소통할 수 있게 된 이유는 타락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에게 주워진 마검은 그저 아이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똑같은 속삭임만을 반복했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
“거, 검이 말을…!” ...
잠시 패닉에 빠진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
<진정했어?> ...
“으응…….” ...
<난 아르펠이야. 넌?> ...
“…로한.” ...
<그래, 로한.> ...
아이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진정하자 우선 통성명을 했다.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많을 테니 이름을 알려주는 편이 좋을 테지. ...
“검이 어떻게 말을 해…?” ...
<내가 좀 특별한 마검이라서라고 해둘게.> ...
“마검?” ...
<그래, 마검.> ...
사실 마검과 성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세계의 아이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이야기였다. 세상엔 천신과 마신이라는 두 신이 있고, 이 둘을 모시는 신전이 따로 존재했다. ...
각각 성력과 마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대립하기는 하나, 두 신전의 사이는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역사 서적을 살펴보면 세상에 위기가 닥쳤을 때 함께 힘을 합쳤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
두 신은 대개 100년에 한 번 인간 세상에 번갈아 가며 축복을 내리고, 이 축복을 받은 이를 신전 측에 점지해 주었다. ...
그리고 축복을 받은 이들은 성검, 또는 마검과 계약을 맺었다. 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방대한 양의 성력이나 마력에 더해 검에 담겨 있는 신의 권능을 얻는 순간, 비로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에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이다. ...
특이하게도 올해는 천신과 마신 모두 축복받은 아이를 점지해 주었는데, 마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가 바로 로한이었다. ...
<마검은 마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만 사용할 수 있어. 이번에는 너야.> ...
“내가…? 그, 그럴 리가 없는데.” ...
횡설수설하던 로한이 이내 멍하게 눈을 뜬 채 멈춰 섰다. 타버린 집과 마을, 재가 되어 사라진 사람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한 아르펠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
소설 속에서 로한은 상당히 눈치가 빠른 인물로 묘사된다. 세상을 떠돌며 배운 것이라 여겼는데, 그냥 태생적으로 눈치가 빠른 것이었나 보다. 단서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새 상황을 파악해 떨고 있는 것을 보면.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서 과한 떨림이 느껴졌다. ...
“내가…… 내가 축복을 받아서? 나 때문에 죽은 거야?” ...
예상대로 로한은 패닉에 빠졌다. ...
원작에서는 제법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자신이 소통이 가능해진 탓에 변수가 생긴 것 같았다. ...
<실례할게.> ...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
아르펠의 시선이 아마 이 모든 변화의 원인일 터인 로한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이 악몽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에게 짐을 짊어지운 모양이다. ...
전생을 떠올린 후, 이곳은 소설 속이고 자신은 주인공을 따라가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바로 아르펠은 두 가지 능력을 깨우쳤다. ...
뚜렷한 이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과, 사람의 외형을 꾸며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검의 모습을 한 채로 아이를 달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아르펠은 망설임 없이 두 번째 능력을 썼다. ...
검이 빛을 머금는 것도 잠시, 순식간에 크기가 불어나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능력을 쓰고 난 직후, 뒤늦게 ‘알몸이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
“…다행히 알몸은 아니네.” ...
운 좋게 옷은 입고 있었다. 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빌길 잘했다. ...
“어……?” ...
그리고 조금 전까지 눈물을 터뜨리던 로한은 손에 잡혀 있던 검이 눈 깜짝할 새에 사람으로 변해 버리자 우는 것도 잊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
시야에 보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잠시 어색하게 바라보던 아르펠은 이내 느릿하게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르, 펠…?” ...
“그래. 아르펠이야.” ...
“방금 전까진, 검이었는데…….” ...
“내가 좀 특별해서.” ...
아이 달래는 재주는 없는데. ...
방금 전까지 엉엉 우느라 흠씬 젖어 든 볼을 닦아 주고, 발개진 눈 밑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손안에 쥐어지는 볼의 감촉이 너무 말랑말랑해서 조금만 세게 쥐면 망가져 버릴 것만 같다. ...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눈물을 닦아주기를 반복하자 머지않아 표정을 일그러뜨린 로한이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아니, 왜? ...
***
서서 울기만 하는 게 안쓰러워서 어색하게 안아 들고 등을 토닥여 주기를 반복했다. 그랬더니 어느샌가 잠에 들었더라. ...
문제는 한참을 울어서인지 그대로 열이 올라버렸다는 점이었다. ...
열이 오른 볼을 손으로 한 번 쓸어 준 아르펠이 혀를 찼다. 지나가듯 기억하는 전생 덕분에 간호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아르펠에겐 현재 자신의 몸뚱어리와 옷 한 벌밖에 없었다.
Arpel 用手抚摸着他的脸颊,咬着他的舌头。多亏了前世,他对如何照顾自己懂得一点,但遗憾的是,雅宝现在只有自己的身体和衣服。
“근처에 마을이 있으려나.”
“我想知道附近有没有一个村庄。”
아이를 치료하고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지불할 돈이 없으니 마을을 찾는다 해도 진료를 받을 수 있을지 장담 못 하는 게 현실이었지만.
我必须治疗我的孩子并找到一个住处。…由于没有钱付,就算他们去了村子,也不确定自己能不能得到治疗。
작은 몸을 단단히 안고는 재만 남은 집터를 벗어났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몸이 놀라운 속도로 앞을 향해 치고 나갔다.
他紧紧地抱着自己的小身体,离开了房子的现场,只剩下灰烬。每迈出一步,我的身体就以惊人的速度向前冲去。
파편일지라도 마신의 힘을 담은 검이 본체였으니, 강한 게 당연했다. 스쳐 지나가는 주위의 광경들을 잠시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금세 적응해 몸을 움직였다.
就算是碎片,也是一把蕴含着魔神之力的剑,自然而然地很强。我尴尬地看了一会儿周围的风景,但很快就适应了,动了动身体。
로한이 살던 마을은 다른 마을들과 꽤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큰불이 났는데도 도와 줄 사람 하나 오지 않았겠지. 가뜩이나 동떨어져 있는데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까지 했던 탓에 불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렸다.
Rohan 居住的村庄与其他村庄相距甚远。所以即使发生了这么大的火,也没有人会来帮忙。因为它太偏远了,甚至被森林包围,大火将人们隔离开来,烧毁了一切。
“혹시 마을에 의원이 있습니까?”
“村里有议员吗?”
마을의 초입에 들어선 아르펠은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경계하는 것 같던 여인이 품 안에 안겨 있는 로한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놀란 낯이 되어 의원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在村子的开始,雅宝抓住一个人问道。这名女子似乎对这突如其来的接近感到警惕,检查了她怀里 Rohan 的情况,并告诉了他医生的位置。
멀지 않아 도착한 곳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작은 의원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아르펠을 맞아준 사람 역시 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입가와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들로 보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 자리에서 의원을 운영한 것 같았다.
不远处,我们来到了一家小诊所,在那里我们可以感受到时间的痕迹。一开门迎接雅宝的人并不是老人,但他嘴巴和眼睛周围的皱纹让人觉得他在这里经营诊所已经很久了。
“이게 무슨… 어서 침대로 옮겨 주게!”
“这是什么......让他上床睡觉!
로한의 꼴을 보고 당황한 남자가 곧장 누울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아르펠은 순순히 그 자리에 로한을 눕혔다.
那个被罗汗的外表弄得尴尬的男人,立刻给他找个躺下的地方,雅宝乖乖地把他放下。
의사는 빠르게 이것저것 살펴보는 듯했다. 워낙 빠르게 지나가서 뭘 한 건지는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医生似乎很快就看了看事情。它过得太快了,以至于我真的看不到我在做什么。
청진기와 비슷해 보이는 도구를 로한의 몸 위에서 뗀 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医生取下了 Rohan 身上的听诊器状工具,松了一口气。
“다리의 상처와 연기를 조금 들이마신 것 외에 다행히 몸에는 큰 이상이 없군…. 근처에 화재가 있었나?”
“除了我腿上的疮和吸入一点烟雾外,幸运的是我的身体没有任何问题......附近有火吗?
“이 마을의 초입에서 북동쪽을 향해 쭉 걸어가면 나오는 마을에 불이 났습니다. 살아남은 건 이 아이 한명뿐입니다.”
“如果你从这个村子的起点直走到东北方向,村里就有火了。这是唯一一个幸存下来的。
“이런….”
“哦,不......”
당장 화재가 발생한 다음 날에 마을로 내려온 것이니 아직 소문이 퍼지려면 멀었을 것이다. 의사는 친절하게도 로한을 간호하는 방법과 먹을 만한 약초들을 몇 개 쥐여 주었다.
他在火灾发生的第二天就来到了村子里,所以离传播谣言肯定还有很长的路要走。医生好心地给了她如何照顾她和一些草药吃。
돈만 있었다면 좋을 텐데. 아쉬움이 묻어난 얼굴로 아르펠이 손에 쥐고 있던 약초를 다시 건넸다.
我希望我有钱。雅宝脸上露出遗憾的神色,将一直手里拿着的草药递给了他。
“지불할 돈이 없으니 받을 수 없습니다.”
“我买不到,因为我没钱付。”
“쯧, 외상으로 해 줄 테니 가져가게.” ...
“…전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처지라, 돈을 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
눈을 크게 뜬 의사가 허이구,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간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럼 아이가 다 나을 때까지만 위층의 방 하나를 빌려주겠네. 돈은 나갈 때 한꺼번에 지불하는 걸로 하지.” ...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르펠이 멈칫했다. 이런 호의까지 받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
“뭘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아이 옮기지 않고?” ...
뚱하게 묻는 의사의 말만 없었다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
3
그 뒤로 로한이 깨어날 때까지 재로 인해 까맣게 물든 피부를 닦아 주고, 머리를 감겨 주고, 열이 내릴 수 있도록 물과 함께 짓이긴 약초를 삼키게 하며 시간을 보냈다. ...
‘내일부터는 바깥에 나가야겠지.’ ...
의사는 돈이 없는 아르펠의 사정을 고려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알려 주었다. 뒤쪽의 숲에서 약초나 식용 버섯 같은 것을 캐다가 가게에 팔면 썩 나쁘지 않은 대금을 치러줄 거라 조언해 준 것이다. ...
로한이 나으면 마을을 떠날 거라고 하자 어느 정도 경비를 모아 큰 마을로 가서 용병일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답변까지 들었다. 생각보다 얻어가는 것이 많은 곳이었다. ...
“아르펠……?” ...
앞으로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으려니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재어본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열은 많이 내렸네. 어디 잘못되는 줄 알고 걱정했다. ...
“여기는, 어디예요?” ...
“존댓말?” ...
“…어른한테는, 존댓말 써야 한댔어요.” ...
가르침을 잘 받았나 보다. 남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기에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
목이 건조한지 마른기침을 하는 로한을 위해 물을 건네주고 아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는 조그마한 손으로 물컵을 잡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나서야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
“기억은.” ...
“나요…….” ...
“그래. 하지만 알아 둬. 마을이 그렇게 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
“하지만.” ...
“아니. 불을 지른 사람의 잘못이야.” ...
잠시간 입술을 오물거리는가 싶던 아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납득은 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조금이라도 안심한 듯 했다. 복잡해 보일 때마다 계속해서 이 말을 해줄 생각이다. 반복해서 듣다 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
“우린 신전으로 갈 거야.” ...
“신전, 이요…?” ...
“네가 마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니까. 신전에 가면 널 보호해 주겠지.” ...
“…아르펠은요?” ...
그 말에 아르펠이 시선을 돌려 로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옅은 금빛을 머금고 있는 눈망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
누가 봐도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눈이었다. ...
“……일단 신전까진 같이 갈 거야.” ...
‘일단’이라는 말은 그 이후에는 헤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그걸 모를 리는 없다. 한참을 말이 없던 로한은 결국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얼굴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같이 있어 주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신전에 가면 붙잡혀서 봉인 당할 확률이 높을 테니까. ...
로한이 주인공인 것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악몽을 바라만 보았던 것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
미련이 남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죄책감을 가진 것인지. 아르펠은 계속해서 솟아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애써 감내했다. 힘든 일을 겪은 아이이니 웬만하면 큰 고생 없이 신전에 도착하게 해 주고 싶었다. ...
곁에 어른이 있으면 좀 낫겠지. ...
로한은 여전히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
하지만 꾸역꾸역 그 질문들을 삼켜낸 로한은, 하나의 질문만을 입에 담았다. ...
“아르펠은, 어디 안 갈 거죠…?” ...
혼자 남는 걸 두려워하는 걸까. 멈칫한 아르펠이 다시금 손을 뻗어 동그란 갈색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
“그래. 어디 안 가.” ...
적어도, 네가 무사히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는. ...
불안해하는 아이에게 굳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뒷말은 삼켰다. 그제야 안심했는지 숨이 노곤하게 풀어진다. ...
동시에 꼬르륵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
“배고프구나.” ...
“으….” ...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발개졌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펠은 자신의 손이 저지른 참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숯검뎅이는 차마 음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
“참네, 누가 요리를 이렇게 해?” ...
“…죄송합니다.” ...
자신의 이름을 제임스라고 소개한 의사가 대놓고 혀를 쯧쯧 찼다. ...
꾸중을 들을 만도 했기에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
로한이 먹을 음식을 요리해 보려 했으나 참혹하게 실패해 버렸다. 주방을 써도 좋다고 제임스에게 허락을 받았지만, 아마 이런 참상이 벌어질 줄은 그 또한 몰랐을 것이다. ...
자기가 대신 혼나기라도 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로한에 제임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계속 아이와 함께 있을 거라면 요리도 좀 배워라.” ...
“네.” ...
맞는 말이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그 날 저녁은 제임스가 만들어 준 간단한 볶음 요리로 배를 채웠다. ...
반찬의 수가 많지 않았기에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제임스까지 함께 한 저녁이었으나 그는 접시를 비우자마자 의원을 정리한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음식을 대접받았으니 설거지는 아르펠의 몫이 되었다. ...
단순한 노동에 가까웠기에 아까의 참상을 재현하는 일은 없었다. 뽀득한 접시를 한곳에 정리해 두고 손에 맺힌 물기를 털었다. ...
바깥에 떠있던 해가 모습을 감췄고,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다. 울다 지쳐 푹 자다 일어났음에도 잘 시간이 되니 슬슬 잠이 밀려오는지 로한의 눈이 가물가물했다. ...
“들어가서 자.” ...
볼을 살짝 만지작거리다 놓아 주니 가물가물했던 눈가가 다시 또렷하게 떠졌다. ...
…자고 싶지 않은 건가? ...
“잠은 오는 것 같은데. 왜 그럴까.” ...
“같이… 아니에요.” ...
가만히 로한을 내려다보던 아르펠이 말없이 아이의 몸을 껴안아 들어 올렸다. 먼저 자도 상관없다고 제임스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니 지금 로한과 함께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같이 자자. 네가 괜찮다면.” ...
“! 조, 좋아요….” ...
그 말에 아이의 볼이 붉어졌다. 아주 솔직한 반응이었다. ...
이해는 갔다. 당장 어제 무서운 일을 겪었는데 마음껏 잘 수 있을 리가. 방으로 들어와 잠시 고민하던 아르펠은 안쪽에 로한을 눕히고 같이 침대 위에 누웠다. ...
다 큰 어른 둘이었으면 모를까, 한 명은 작은 아이여서 그런지 침대의 공간은 제법 넉넉했다. ...
불을 끄고 이불을 도톰하게 덮어 주니 잠시간 손을 꼼지락거리는가 싶던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
“있죠, 아르펠은… 검인 거죠?” ...
“그래. 마검.”
“是的。魔剑。
“…아르펠이 말해 줬잖아요, 제가 축복을 받았다고. 마검은, 축복받은 사람들만 쓸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럼 저도…….”
“…Arpel 告诉我,我很幸运。他说,这把魔剑只有有福的人才能使用。那我也.......。
“아직은 이르고.”
“现在还为时过早。”
흔들리는 아이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르펠이 작게 속삭였다.
直视着孩子颤动的眼睛,雅宝轻声说。
“나중에 네가 검을 필요로 하면, 내가 네 검이 되어 줄게.”
“以后,如果你需要一把剑,我就成为你的剑。”
잠깐 말이 없던 로한이 방긋 웃었다. 찹쌀떡 같은 볼도 잔뜩 붉어진 채였다.
罗韩沉默了一会儿,然后笑了。他那看起来像糯米糕的脸颊,也都红了起来。
내내 눈치를 보거나 우울해하던 로한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나자 그제야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当一直盯着他看、郁闷的罗韩脸上绽放出笑容时,他的气氛与其他同龄孩子相似。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얻어 버렸지만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소설 속 마검이 아니라 아르펠, 자신이다. 아르펠은 아이가 지금과 같은 환한 미소를 자주 지을 수 있는 일상을 선물해 주고자 마음먹었다.
虽然他受到了刻骨铭心的创伤,但陪伴在他身边的并不是小说中的魔剑,而是雅宝,他自己。Arpel 决定让他的孩子过上像现在一样经常微笑的日常生活。
***
“와아…….”
“哇.......”
어둠이 가시고 햇살이 들이치는 방 안, 로한은 얼굴을 발그레 붉힌 채 반짝거리는 눈으로 제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在房间里,黑暗已经褪去,阳光照进来,Rohan 正用闪闪发光的眼睛盯着他手中的东西,他的脸涨得通红。
아이가 들기에는 무겁지 않을까 걱정되는 크기였음에도 제법 거뜬히 들려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검이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검 손잡이와 빛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는 검날이 아이의 손안에서 이리저리 돌려질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它担心孩子背不起来会太重,但它不是别人,正是一把漆黑的剑。优美弯曲的剑柄和剑刃,仿佛没有一滴光进入,深黑色,每次在孩子的手中旋转时,都会在阳光下闪闪发光。
검을 장식하고 있는 보랏빛의 보석은 그것이 장식용 검인지, 실전용 검인지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적당한 아름다움과 검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분위기는 그것을 신비한 존재로 느껴지게끔 했다.
装饰这把剑的紫色宝石让人看不清它是一把装饰性的剑还是一把实用的剑。然而,那将剑散发出来的适度美感和尖锐的气息,却让人感觉像是一个神秘的存在。
<마음에 들어?>
<你喜欢吗>
“네에.”
“是的。”
어젯밤 긴장이 풀렸는지 푹 잠든 로한은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배꼽시계를 울렸다. 둘만 있는 방 안에서는 선명히 들릴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민망함 때문일까, 고개를 푹 숙이는 아이를 달래며 어제 남은 음식을 꺼내 밥을 먹일 준비를 했다.
昨晚睡得很香的罗韩醒来很晚,按响了肚皮钟。那声音只有在只有两个人的房间里才能听得清楚。也许是因为尴尬,我安抚了那个低头拿出昨天剩饭准备喂他的孩子。
그러던 와중 난데없이 검의 모습을 하고 아이의 손에 잡혀있게 된 것은, 문득 검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아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与此同时,我之所以突然变成一把剑的形态,被孩子拿在手里,是因为孩子要求看到那把剑。
뭐 어려운 거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아르펠이 다시 검으로 변하자마자 눈을 반짝인 로한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嗯,这很困难。雅宝乖乖地点了点头,当他变回一把剑时,罗汗的眼睛闪了闪,捡起了掉在地上的剑。
“저도 이거, 쓸 수 있는 거예요…?”
“我可以使用这个吗......?”
<언젠간.>
<总有一天>
검을 잡게 되는 건 아마 신전에 도착하고 난 이후일 테다.
你可能只有在到达寺庙后才会拿着这把剑。
그러나 신전 근처까지만 함께 갈 생각이다 보니, 과연 자신이 로한의 손에 쥐어지는 날이 있을까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然而,由于他只打算靠近寺庙,他不确定自己是否会落入罗汗的手中。
검이 되어 주겠다고 대뜸 약속해 버렸으니 언젠가 한 번쯤은 잡혀 주어야 할 텐데.
我答应过要成为一把剑,所以总有一天我至少会被抓住一次。
<날카로우니까 조심해.>
<小心,因为它很锐利>
아이의 손이 검신을 훑었다. 이래 봬도 마검이라 날이 무뎌지는 일이 없어 가볍게 만질 때도 조심해야 했다. 잘못 만지면 그대로 베일 거다.
孩子的手扫视着剑身。既然是法剑,刀刃不会变钝,所以轻轻触摸时必须小心。如果你摸错了,它会割伤你。
만지작거리는 손의 촉감이 느껴졌지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닿고 있구나, 하는 느낌만이 다였다. 처음 경험해 보는 거라 신기하기도 했다.
我能感觉到我的手在摆弄,但我并没有多想。我只是觉得有什么东西在触碰我。这也很棒,因为这是我的第一次体验。
“아르펠을 닮았어요.”
“它看起来像雅宝。”
<이게 나니까.>
<因为这就是我>
아르펠이 검신을 울리며 긍정했다.
Arpel 敲响了他的剑,肯定地说。
아무래도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의 외형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로한을 돌봐주느라 정신없이 움직인 탓에 얼굴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我认为他指的是一个人变成人形时的外表。可惜他忙着照顾罗汉,没时间去看他的脸。
나가기 전에 한 번쯤 확인해 둘까.
我想知道我是否会在出门前检查一下。
멍하니 생각하고 있던 찰나 로한이 조곤조곤 말문을 텄다.
就在他思考的时候,罗汉惊呆了。
“검날은 아르펠의 머리색이랑 똑같고, 이 보석은 눈 색이랑 똑같아요.”
“这把刀和雅宝的头发颜色一样,这颗宝石和他的眼睛也是一样的颜色。”
<그래?>
<真的吗>
“네! 예뻐요.”
“是的!太美了。
조잘거리며 이야기하는 입술이 오물거렸다. 꼬물거리는 손으로 검을 조몰락거리는 행동이 마냥 기껍게 다가오는 건 이상한 걸까.
他一边说一边抿着嘴唇。用蠕动的手挤压剑的动作让我感到高兴,是不是很奇怪?
뭐가 되었든 어제보다 기분이 나아 보이니 괜찮았다. ...
원하는 대로 검을 만질 수 있게 잠시간 로한을 내버려 둔 아르펠은 아이가 만족하고 나서야 인간의 모습으로 외형을 바꿨다. ...
원래의 모습으로 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러다가 제임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상황이 번거로워졌다. 당연히 자신이 검으로 변했다고는 상상조차 못하겠지만, 갑자기 웬 검인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어디로 갔는지 꼬치꼬치 캐물을지도 몰랐다. ...
4
“밥부터 먹자.” ...
아이를 데려와 조금 높은 의자 위에 앉힌 후 포크를 쥐여 주었다. 야무지게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운을 뗐다. ...
“오늘은 잠깐 나갔다 올 거야.” ...
“그럼 저도….” ...
“안 돼.” ...
아래를 향해 흘끗 고갯짓했다. 자연히 붕대로 감겨 있는 짤막한 다리가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금세 서글퍼지는 얼굴에 볼을 만지작거리며 위로했다. ...
“나으면 같이 가자.” ...
“정말요…?” ...
“그래.” ...
“오늘, 돌아올 거죠……?” ...
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불안감이 그의 마음 한 곳에 똬리를 틀고 머물러 있는 모양이다. 그저 물을 때마다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해 주는 수밖에 없겠지. ...
아르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그 뒤로는 비슷한 생활이 이어졌다. ...
로한은 회복에 전념했고, 아르펠은 해가 지기 전까지 마을 뒤쪽의 숲을 돌아다니며 제임스가 이야기해 준 약초와 식용 버섯을 캤다. ...
몇 번 독이 있는 것을 캐 버려 어디 문제는 없냐며 소란 아닌 소란이 있었지만…… 아르펠은 멀쩡했다. 그 중에는 만지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수 있는 버섯도 있었는데 말이다. ...
겉모습만 사람일 뿐이지 본체는 검이었으니 당연했다. 마검이 독에 당할 리는 없으니까. ...
그 사이 로한은 밖에 나오고 싶었는지 통증이 남아 있는 데도 꾹 참고 다 나았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눈이 좋은 아르펠에게 발을 구를 때 보이는 미약한 어색함과 움찔거림을 들키는 바람에 계속 거절당했지만. ...
그리고 오늘, 아르펠은 이 마을을 떠나야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
“저 이제 다 나았어요!” ...
말간 얼굴로 소리친 로한이 바닥에 발을 쿵쿵 굴렀다. 기민한 눈으로 그 행동을 살피던 아르펠은 상처가 다 나았음을 인정했다. ...
“됐으니 딱 반만 주게.” ...
그동안 신세를 졌던 값을 치를 겸 인사도 하려고 밑으로 내려가니, 제임스는 내민 돈의 반만 받겠다 주장했다. ...
그간 약초와 버섯을 팔며 돈을 마련했던 아르펠은 이곳의 화폐 가치에 대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
쓰지 않는 방을 내어 줬다고 치더라도 식비와 치료비를 셈해 본다면 제임스가 말한 액수는 정말 터무니없는 푼돈이었다. ...
“넣어 둬. 아이까지 같이 돌봐야 하니 돈은 넉넉할수록 좋지 않나.” ...
“……감사합니다.” ...
다시 돈을 건네려고 하던 아르펠은 그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한이 보였다. ...
이왕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로 한 거,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
“여기서 동쪽으로 하루쯤 가면 경유할 수 있는 마을이 하나 나올 걸세. 작긴 해도 영주 성과 가까워서 용병들이 자주 왔다 갔다 하는 편이지. 도움이 될 거야.” ...
아이를 낀 채 돈을 벌며 이동하기에는 용병만 한 게 없지. ...
제임스가 로한을 흘끗 응시하며 말했다. 아르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르펠의 행동을 통해 제임스는 두 사람이 먼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
“정 그러면,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인사나 하러 와서 나머지 값 치르든지.” ...
아르펠의 얼굴에 야트막한 미소가 고였다. 제임스를 만난 뒤 처음으로 보인 감정적 변화였다. 좋은 인연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
***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하루 정도 열심히 걸어가야 다음 마을이 나온다고 했지만, 그건 일반적인 사람의 속도로 움직이는 경우였다. ...
마을을 완전히 나서기 전까지만 로한과 함께 나란히 서서 걸어가던 아르펠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제임스가 말해준 방향을 향해 뛰었다. ...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금세 훅훅 변하는 주위의 광경이 신기한 건지 로한의 입에서는 작은 감탄사가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
그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쓰다듬어 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표현하는 ‘귀엽다’는 감정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둘은 날이 저물기 전에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나 용병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말은 사실인 듯, 가게 문을 제법 일찍 닫았던 이전 마을과는 다르게 여전히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일부는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 있었다. 딱 봐도 흠집이 많아 보여 새것은 아니었으나 용병들 나름대로 세월이 녹아 있는 장비인 것 같았다. ...
“방 있습니까?” ...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던 아르펠은 여관 중 그나마 질이 좋아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
숙소를 고를 때 첫째로 본 것은 묵고 있는 용병들의 질이 나쁘지 않은가 였고, 둘째는 음식이 괜찮은가 였다. 요리를 배우는 게 좋겠다는 조언은 들었지만… 당장은 힘들 테니 당분간은 사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접수처에 앉아 있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슬쩍 가늘게 뜨는 것이 무언가를 살피는 기색이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
“방은 같이 쓰실 건가요?” ...
“예. 침대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
목욕물도 따로 준비해 달라고 이른 뒤 대금을 치렀다. 열쇠를 받아들고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다시 여관 밖으로 나갔다. ...
“우리 어디 가요?” ...
“옷 사러.” ...
전에 있던 마을에서 여벌 옷을 마련하기는 했으나 영 부족할 것 같았다. ...
상권이 작지 않은 탓인지 깔끔하고 질이 나쁘지 않은 옷을 파는 가게들이 제법 많았다. 자신이 입을 옷은 한 벌 정도만 더 사도 적당할 것이라 생각하며 로한에게 입힐 옷을 먼저 고르기 시작했다. ...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르펠의 손에는 이미 수북하게 옷이 쌓여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한과 시선이 마주친 것은 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입기는 무리다. ...
결국 들고 있던 옷을 몇 벌 내려놓았다. 여러 번 고민을 한 바람에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제법 지난 뒤였다. ...
“아르펠은, 더 안 사요…?” ...
“……살게.” ...
단호하게 이 정도면 됐다고 말하려던 아르펠은 올망거리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왔다. ...
이런 게 사치인 걸까? 잔뜩 불어난 옷을 짐 보따리에 담자 두 손이 가득해졌다. 상당히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짐을 바라보고 있던 것도 잠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로한의 표정을 발견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로한은 데리고 다니기에 어려운 아이는 아니었다. ...
말을 잘 들었고, 어리광도 많이 부리지 않았다. 편식도 하지 않았고, 시끄럽게 구는 일도 없었다. ...
어른스럽고 씩씩한 아이구나, 아르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매일 밤 울면서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
“쉬…….” ...
철든 것 같아 보여도 로한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
마검으로서 깨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생의 기억이 일부 남아 있어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펠마저도 그날 밤의 광경이 가끔 떠오를 정도다. ...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도 잊지 못해 괴로워할 만한 일인데 이 어린아이가 견딜 수 있었을까. 심지어 관계없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가족, 친구, 지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
악몽을 꾸지 않고서는 못 견딜 만한 상황이었다. ...
낮에는 마냥 철든 아이처럼 굴던 로한은 밤이 되고 잠자리에 들면 감정에 솔직해졌다. 악몽에 괴로워하고, 울고,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찾았다. ...
하루는 허우적거리며 손톱으로 목을 긁기도 해서, 그다음 날부터 아르펠은 굳이 눈을 붙이지 않고 자리에 누운 채 로한을 토닥여 주며 밤을 지새웠다. ...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엄마, 흑, 엄마아…….” ...
가만히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옆에서 뒤척거리던 로한이 잠에 들었다. 머지않아 악몽을 꾸는지 칭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처음에는 로한을 깨우기도 해 보고,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등을 토닥여 준 적도 있었다. 문제는 깨우면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잠들더라도 또 악몽을 꾼다는 점이었다. ...
눈물을 닦아주거나 가슴팍을 도닥이는 등, 이런저런 방법으로 아이를 달래 보았으나 효과는 없었다. 밤마다 속이 타는 듯한 나날들이 계속됐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방법을 찾기는 했다. 아이의 몸을 꽉 끌어안고 괜찮다고 속삭이며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이었다. ...
자신을 끌어안는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면 로한은 거짓말같이 눈물을 그쳤다. 젖은 볼과 발개진 눈가만이 눈물을 흘렸다는 걸 알려 줄 뿐이었다. 이 또한 잠시라도 떨어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울기 시작했지만…. ...
“괜찮아.” ...
아르펠은 신경 쓰지 않았다. ...
품에 안고 토닥여 주지 않으면 운다. 그렇다면 밤새 그를 끌어안고 달래 주면 될 일이었다. ...
검이라고 설명했고, 몇 번 검으로 변한 모습까지 봤다. 그러나 사람의 외형을 하고 있으면 사람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지, 로한은 아르펠이 잠을 제대로 자지 않거나 밥을 먹지 않으면 걱정했다. ...
어느 날은 자기 때문에 그런 거냐며 우울해하길래, 그다음부터는 딱히 식욕이 일거나 졸리지 않아도 로한의 생활 양식에 맞추어 사람처럼 행동했다.
有一天,他郁闷,心想是不是因为他,从那以后,他就没有胃口,也没有困倦的感觉,但他表现得像个人一样,融入了罗韩的生活方式。
끌어안고 토닥여 주면 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아르펠은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럴 때면 자신이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이 실감이 나기도 하고,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
오늘따라 쉽게 그치지 않는 울음에 아르펠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고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였다. ...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잠에서 깨는 날도 있었다. ...
“아르펠……?” ...
“응.” ...
그럴 때마다 로한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듯 한참이나 시선을 마주하다 눈을 감았다. 아르펠은 그런 로한을 말없이 쓰다듬으며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
네가 언젠간 이 악몽을 이겨내길 바란다고. ...
5
장소는 바뀌었지만 아침에 하는 일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품에 안겨 있는 로한을 토닥여 주다가 창 바깥에 보이는 해가 어느 정도 위쪽으로 올라갔다 싶으면 잠에서 깨웠다. ...
졸린 기운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칭얼거림 하나 없이 일어난 로한을 씻겨 주고, 아래에 내려가 음식을 시켜 먹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선 나갈 준비를 마저 했다. ...
“정말 같이 가도 돼요?” ...
“그래.” ...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서늘한 감이 조금 있었다. 신전 쪽으로 올라간다면 날씨는 확실히 풀릴 것이다. ...
아이의 옷을 꽉 여며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춥지는 않다지만 혹시나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로한은 작고 하얗기만 해서, 이렇게라도 챙겨 주지 않으면 탈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물씬 들었다. 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
오늘은 용병 길드에 가 볼 예정이었다. 아침에 종업원을 붙잡고 물어본 결과 제법 쏠쏠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정식으로 용병 등록을 하려면 큰 마을로 나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도 가능하다고 했다. 용병들이 자주 묵는 마을이다 보니 그들을 보고 등록하려는 사람도 제법 있어서 얼마 전에 지부가 하나 생겼다고 했다. ...
이전 마을에서 사정을 딱하게 여긴 가게 주인이 약초와 버섯의 대금을 괜찮게 치러준 덕에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편안한 곳에서, 풍족하게 먹으며 생활한다면 금세 돈이 부족해질 것이 분명했다. ...
그런 이유로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돈을 벌 수 있는 의뢰를 하나 받아 볼 생각이었다. 로한을 놓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지킬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불안해하는 아이를 떼놓고 가고 싶진 않았다. ...
준비를 마친 아르펠은 로한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섰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길가는 어제보다 조금 더 생기가 넘쳤고 북적이고 있었다. ...
사람이 많은 길가를 걷고 있어 긴장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맞잡아 온 손의 힘이 평소보다 강했다. 온 신경이 아이의 작은 손에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조그만 손이 미처 제 손을 다 잡지 못하고 손가락 세 개를 꼬옥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 기이한 기분이 느껴졌다. ...
예쁘다. 사랑스럽다? ...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이 아닌 아르펠은 그 감정의 정체를 전생의 기억을 빌려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
“예쁘네.” ...
“저요…?” ...
“응.” ...
“아, 아르펠이 더 예뻐요….” ...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개진 볼을 조몰락거리고 싶었다. 사람 많은 길가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
얼마 전 생겼다는 게 사실인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다른 건물에 비해 크고 신식으로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용병 지부 근처라서 그런지 다른 곳에 비해 용병들의 수가 더 많았다. ...
손을 꼭 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로한을 안아 올렸다. 길드 내부는 사람들로 꽉 들어차 정신없어 보였기에, 손만 잡은 채 들어갔다 놓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
“불편해?” ...
“아뇨….” ...
어깨에 고개를 폭 묻어 버리는 몸짓에 아르펠이 갈색 머리통을 토닥였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
용병 길드의 지부 중 하나기는 하나, 안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용병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의뢰를 넣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
그랬기에 용병들은 길드 안에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돌아다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르펠 역시, 품에 안고 있는 로한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는 드물었는지 소란은 여전했지만 이쪽을 흘끗거리며 살피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품에 안겨 있는 로한의 몸이 흠칫거리는 것이 느껴져 등을 토닥여 주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선들을 신경 쓰기에는 일정이 바빴다. ...
“의뢰할 것이 있으신가요?” ...
“아뇨. 등록하겠습니다.” ...
“……네?” ...
“용병 등록, 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여관의 종업원에게 물었을 때도 상당히 놀란 눈을 하기는 했지만 아마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등급을 정하기 위한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는 말도 해 주었는데, 어차피 통과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았다. ...
“아, 그게. 잠시만요…!” ...
잠시 멍한 눈길을 보내오던 여자가 급하게 안쪽으로 들어가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내민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펠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곧장 종이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
글을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조금 곤란해질 뻔했다. 한편으로는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져 머리를 갸웃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것과 꽤 닮은 글자가 있었다. 알파벳이던가. ...
능숙하게 아이를 한 손으로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주소는 그냥 로한이 살던 마을로 적었다. 딱히 태어난 곳도, 연도와 날짜도 알 수 없으니 제법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
“그, 혹시… 귀족은 아니시죠?” ...
“아닙니다.” ...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여자를 빤히 바라보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어 댔다. ...
“되게, 음. 귀족 같은 분위기가 나서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
“…괜찮습니다.” ...
귀족 같은 분위기가 따로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목덜미를 끌어안고 있는 로한의 힘이 조금 강해졌다. 그 행동에 맞은편의 여성에게 집중하고 있던 아르펠이 로한을 안고 있던 한 손으로 다시 토닥이기 시작했다. 지루한가 보다. ...
“저희는 용병의 등급을 나누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는 등록할 땐 무조건 F급이었는데, 이제는 따로 테스트를 거쳐 실력에 맞는 등급을 처음부터 받을 수 있답니다. 테스트를 받고 싶은 등급이 있으신가요?” ...
“가장 높은 등급이 뭡니까?” ...
“높은… 등급이요? 일단은 S급인데. S급은 조건이 따로 필요해서…… 당일에 테스트를 보고 결정할 수 있는 건 A급이에요.” ...
A급이라…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 셈을 해 보던 아르펠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
“그리고….” ...
가지고 있던 종이를 훑던 여성이 남은 말을 이어 나갔다. ...
“원하는 등급 혹은 그 이상의 등급을 받은 사람이 있어야만 테스트를 볼 수 있는데, 당장 할 수 있는 건 B급이네요. A급은 며칠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
“그럼 B급으로 부탁드립니다.” ...
“그… 이런 말씀은 실례지만. 괜찮으시겠어요?” ...
A급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굳이 등급 하나 높이자고 며칠을 여기서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어 여성을 빤히 바라보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되물으면서까지 납득시킬 이유는 없었다. ...
상당히 말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으나 당사자가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그녀는 아르펠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
올라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고 있던 그녀에게 사람 한 명이 한 사람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의뢰를 받기 위한 용병이나 의뢰를 하러 온 손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 여성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윽고 모자 아래로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바싹 굳어 버렸다. ...
“어, 어. 길…!” ...
“어허.” ...
입 밖으로 빠져나오려던 단어가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대뜸 여성의 입을 막은 남자가 말없이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보인 탓이었다. ...
“아직 시작 안 했겠지?” ...
“네, 아마….” ...
“그럼 나도 거기 참관할게.” ...
“예…….” ...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방금 전 테스트를 보겠다며 남자가 올라간 계단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그녀는 차마 혼란스러운 눈길을 숨기지 못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
안내를 받은 방 안에 들어서고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이 몇 명 들어오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의 등장 때문인지 손을 꼭 잡아 오는 로한에 머리를 쓰다듬어 준 아르펠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용병 하나를 볼 수 있었다. ...
“B급 용병 이올입니다.” ...
“…아르펠입니다.” ...
시작하기 전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
심사는 대개 3번 진행된다. 도전자가 희망한 급수에 해당하는 사람을 불러 대련하는 식이며, 결과가 너무 형편없거나 압도적이지만 않는다면 사람마다 상성이 있을 수 있으니 3번 정도 테스트를 진행해 판단한다고 했다. ...
때문에 방 안에는 방금 전 자신을 소개한 B급 용병을 제외하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 하나, 모자 쓴 사람을 안절부절 바라보고 있는 남자 하나. ...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아르펠이 시선을 뗐다.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
“위험한 건 아니죠…?” ...
“그래.” ...
혹시나 다칠까 심사를 봐줄 용병들이 있는 곳에 잠시 로한을 맡겼다. 와중에 걱정을 한가득 담고 떨리는 눈망울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
방 가운데로 걸어 나가 B급 용병이라던 남자를 마주 보고 서자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
“검은 없으신가요?” ...
“네. 없습니다.” ...
“그럼 연습용 검이라도 하나….” ...
“괜찮습니다.” ...
그러자 용병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그 변화를 빤히 응시하던 아르펠이 고개를 내려 팔의 소매를 접었다. ...
“…검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칠 겁니다.” ...
“괜찮습니다.” ...
“하……!” ...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반복되는 대답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잡고 있는 칼끝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르펠이 너머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심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
“시작하세요.” ...
모자를 쓴 남자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꾹 깨물며 칼끝을 떨고 있던 남자가 "으아아!" 하는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
그 찰나에도 아르펠은 뒤쪽에 앉아 있는 로한을 바라보았다. 불안하기라도 한 건지, 잔뜩 흔들리던 눈동자가 커지는 모습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 것처럼 느리게만 보였다. ...
“아르펠!” ...
날 걱정하고 있구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쨍그랑- ...
곧이어 날카로운 소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어진 것은 정적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소리였고, 검날과 사람이 부딪칠 때 날 만한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
그럼에도 그런 소리가 났다. 휘둘러지는 칼을 향해 무심히 손을 휘저은 아르펠에 의해서. ...
6
“됐습니까?” ...
검을 내려친 이올마저도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검을 잡았다고 하기에는 손에 군살이 하나 없고, 평민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귀족 영식과 같은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런 주제에 검 따윈 필요 없다며 배짱까지 부린 짜증 나는 놈이었다. ...
막상 테스트가 시작되자 검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
분명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올은 그의 손이 휘둘러지는 그 순간 몸이 딱 굳는 것처럼, 발끝부터 시작해 몸을 서서히 잠식해가는 압도적인 힘을 느꼈다. ...
정적 속에서 이올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소음이 난 바닥을 확인했다. 방금까지 잘 붙어 있던 자신의 검이 반 토막 나 그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
그리고 그가 느꼈을 경악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어졌다. ...
내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의미 모를 미소만을 입꼬리에 그리고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
“오러……?” ...
옆쪽에서 줄곧 안절부절못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또 다른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무런 소음 없이 조용했던 탓에 모두가 생생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
“아르펠, 이겼어요? 이긴 거죠?” ...
“응.” ...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리가 없는 로한만이 밝은 얼굴로 아르펠을 향해 뛰어갔다. 올렸던 소매를 다시 정리하려던 아르펠이 하던 것을 멈추고 달려오는 로한의 몸을 안아 들었다. ...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사람들을 흘끗 바라보던 아르펠이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
“다음 대련, 바로 해도 됩니까?” ...
모자로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어 보이는 건 입꼬리뿐이었지만 적어도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잠시 멈칫하는가 싶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
“그냥 A급 줄게요. 마음 같아선 S급도 쥐여 주고 싶은데… 이건 규칙이라서. 몇 가지 의뢰를 하면 S급으로 올릴 수 있을 겁니다.” ...
갑자기 등급을 확 올려버리는 행태가 이해가 가지는 않았으나, 나쁠 건 없었다. 빤히 남자를 응시하던 아르펠이 빠르게 납득하곤 목례했다.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품에 안은 아이를 다시 한번 추슬러 안고 나가는 발걸음이 빠르지는 않았으나,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
***
아르펠을 상대로 일 합에 패배한 이올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멍때리다가 급하게 방을 나섰다. 완전히 반으로 조각나 버린 검을 줍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
“깔끔하게 잘렸군요….” ...
“그래. 썩 나쁘지 않은 친구였는데.” ...
B급 용병 중 최상위권은 아니었으나 나름 중위권의 실력을 자랑하던 이였다. 잘해도 대등하게 싸우는 것이 고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
푹 내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은 남자가 흐트러진 녹빛 머리를 쓸어 넘기며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관심이 가서 뒤따라온 것뿐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
남자가 대련을 신청하는 아르펠을 눈여겨본 것은 가장 높은 등급부터 도전하는 배짱과, 그에 비해 너무 가냘픈 몸 때문이었다. ...
체격이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로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옷 바깥으로 보이는 몸 선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거기다 스쳐 지나가며 바라본 하얀 손에는 검을 쥐며 생긴 굳은살조차 없었다. ...
오히려 뽀얗고 가느다란 게, 고생 한번 해 보지 않은 도련님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
그런데 이런 실력이라니. ...
“조사할까요?” ...
“음…… 대충? 확인은 해 봐야 하니까.” ...
검을 쓰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으면 ‘오러’로 검과 육체를 강화할 수 있다. 오러를 쓰는 것이 무척이나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귀족 가문의 기사들만 뒤져 봐도 대부분 오러를 사용할 수 있을 거다. ...
중요한 점은 실력이 뛰어난 편인 B급 용병이 오러로 강화한 검을 손으로 휘저어 일격에 반 토막 냈다는 사실이었다. ...
오러를 두르고 몸을 강화한 뒤 검을 쳐낸 것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B급 용병의 오러를 두부 썰 듯이 뚫어버리고 검까지 깔끔하게 반 토막을 낸 것을 보면 그보다 몇 수는 더 위였다. ...
그럼에도 실력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외형이라니. 남자, 아니, ‘렉시아’는 아르펠의 실력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
그를 이쪽으로 끌어들일지 말지에 대한 결정은, 그의 행보를 천천히 확인해 본 뒤에 내리면 되니까. 렉시아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서렸다. ...
***
생각대로 돼서 다행이다. 대련을 마치고 방 밖으로 나서며 아르펠은 그런 생각을 했다. ...
오러를 두른 검을 상대로 일격에 말끔히 두 동강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신이 하사한 권능의 파편을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신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신에게 필적할 정도로 격이 높은 상대가 아니라면 오러를 두르든 말든 아르펠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추측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아르펠은 아래로 내려와 곧장 용병의 신분을 증명하는 용병패를 받았다. ...
이름이 한눈에 보이게 새겨진 고동색에 가까운 패였는데, 색에 따라서 등급을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다. ...
아르펠이 B급도 아닌 A급을 승인받아 올 줄은 예상조차 못 했는지, 여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용병패를 건넸다. S급은 검은색이라는, 딱히 궁금하지 않은 정보도 떨리는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
“신전으로 가는 방향에 받을 수 있는 의뢰가 있습니까?” ...
아르펠은 용병패를 받자마자 여성에게 적당한 의뢰가 있는지 물었다. 그 말에 여성이 의뢰서로 보이는 종이 뭉치를 꺼내 들고서는 이리저리 들춰 보았다. ...
“근처 신전 말씀하시는 거 맞죠?” ...
“아뇨. 중앙입니다.” ...
“중앙…? 꽤 머네요.” ...
“갈 일이 있습니다.” ...
아르펠이 로한을 데리고 가야 할 곳은 중앙 신전이었다. 대신관이 있는, 신전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전 말이다. ...
축복을 받은 이에 대한 계시를 받는 곳은 중앙 신전이 유일했다. 다른 신전들은 그저 축복받은 존재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그게 누구인지,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몰랐다. ...
검증할 수 있는 곳 또한, 유일하게 신의 진언을 들을 수 있는 대신관이 있는 중앙 신전이었다. ...
그래서 아무 곳이나 들어가 ‘이 아이가 축복받은 아이입니다’라고 말했다간 사기꾼 취급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까. ...
신탁이 내려오면 곧바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몇 년의 시간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축복받은 존재가 어린아이라면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함이었다. ...
당초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처사였으나, 원작에서 이 행동은 신전 측에 큰 독이 된다. ...
정보가 빠져나가는 상황을 상상조차 못했던 신전은 신관 파견을 미뤘고, 그사이 로한이 있는 마을은 불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이 소식은 신전 내부에 있는 첩자 때문에 한참 나중에야 신전 측에 전해졌다. ...
뒤늦게 로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신관들은 부랴부랴 수색대를 꾸려 로한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
신관들이 소식을 들은 게 한참 뒤라는 설명이 있었으니, 이대로 간다면 수색대가 파견되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그럼 이건 어떠세요? 내용도 어렵지 않고, 의뢰금도 나쁘지 않아요.” ...
아르펠이 내민 종이 안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확인했다. ...
의뢰인은 영주 성 근처의 산을 거점으로 하여 고기를 납품하는 상인이었다. 좋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직접 키워 도축한 뒤 손질까지 깔끔하게 한다고 적혀 있었다. ...
쓸데없이 장황한, 본인의 사업에 관해 나열한 문장을 흘려 넘기며 의뢰의 목적을 확인했다. ...
“이걸로 하겠습니다.” ...
요점만 정리해 보니 몇 주 동안 밤만 되면 사육장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산짐승에게 습격당해 동물들이 떼거리로 몰살당했다는 이야기였다. ...
산짐승을 잡아 처리하면 되는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의뢰를 받았던 용병들이 하나같이 ‘괴물’을 봤다며 의뢰를 포기하는 바람에 날이 갈수록 수행 가능 등급이나 비용이 널뛴 듯했다. ...
혹여나 아르펠이 거절할 것을 염려했던 건지, 의뢰를 소개해 준 여성이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당히 골칫거리였던 모양이지? ...
“의뢰가 해결되면 의뢰인이 직접 해당 사실을 길드에 알리고 있으니까 그 이후의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네. 그럼.” ...
건네준 종이를 한 손에 쥔 아르펠이 로한을 마저 고쳐 안고 길드를 나섰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 되도록 빠르게 출발할 예정이었다. ...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 ...
길드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똘망똘망한 눈을 한 로한이 씩씩하게 말했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아르펠은 결국 로한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주었다. ...
손에서 떠나가는 온기가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다. 머지않아 꼬물거리는 손이 온기를 채워 주겠다는 듯 파고드는 바람에, 그 생각은 빠르게 가시고 말았지만. ...
“우리 다른 곳 가요?” ...
“응. 영주 성 쪽.” ...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 종이를 옷 주머니에 쑤셔 넣고, 비어 버린 손으로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신전에 도착하면 이런 나날도 끝이 나겠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평화롭다고 느낀 탓일까, 가끔가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하루빨리 로한을 신전에 데려다주겠다 마음먹었던 처음의 다짐은 어느샌가 미묘하게 틀어졌다. 신전에 도착하면 아이와 떨어질 테니,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몸짓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손을 붙잡는 온기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숨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가져본 ‘일상’이라는 것을 잃지 말라고 내면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속삭였다. ...
날이 갈수록 로한을 생각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
그래도 아직은, 그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버리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
7
여관에 돌아와 방으로 올라가기 전, 아르펠은 문득 방의 열쇠를 건네주던 직원이 기묘한 시선을 보냈던 이유를 깨달았다. ...
‘그, 혹시… 귀족은 아니시죠?’ ...
의뢰를 안내해 주었던 여성이 지었던 표정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
새삼 자신을 기웃거리는 시선들과 은근히 눈치를 보는 듯한 태도의 원인을 깨닫게 되었으나, 그러려니 넘어갔다. 어차피 오늘까지만 이 여관에서 묵고 뜰 테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
이 여관에서 묵는 마지막 날이라 제법 값이 나가는 맛있는 음식을 시켜 아이를 배불리 먹였다. 우느라 밤잠을 설쳐 살짝 살이 빠지는가 싶던 얼굴은 밤에는 토닥이며 잠을 재워주고, 낮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을 거듭하자 다시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랐다. ...
‘귀여워.’ ...
어느샌가 그런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게 된 아르펠이었다. ...
잠이 오는지 가물가물 눈을 뜨는 로한의 통통한 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찔러보길 반복했다. 타인을 대할 때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냉한 얼굴이 로한을 보고 있으면 그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 풀어졌다. ...
모로 누워 로한이 잠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악몽을 꾸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몸을 끌어안아 토닥였다. 찡그려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러 펴주는 것은 덤이었다. ...
평화로운 한때에 느슨해졌던 감각이 한순간에 끌어 올려진 것은 계단을 오르는 두어 개의 기척들이 방 앞을 서성거린 탓이었다. ...
발소리를 어설프게 죽이고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이상하게 여겼으나 기어이 일을 칠 모양이었다. 로한을 품에 안은 채로 제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펠이 소리 없이 문으로 다가갔다. ...
덜그럭. 덜그럭. ...
바깥쪽에서 문을 억지로 따려는 것인지 문고리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깨지 않고 넘길 정도로 조용하게 작업하는 걸 보아 한두 번 해 본 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
“…헉!” ...
마침내 자물쇠가 풀리고, 끼이익 거리는 소음을 뱉으며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아래에서 식사할 때 스쳐 지나가듯 본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
유독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 중 일부였지. 찝찝하다 했더니만 돈을 훔쳐 한탕 해 보려는 속셈이라도 있었나 보다. ...
기척도 없이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아르펠을 발견하자 방 안을 조용히 털고 나갈 셈이었던 두 사람이 까무러쳤다. ...
아무런 동요 없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차게 식은 보랏빛 눈동자는 복도에 깔린 어둠을 뚫고도 남을 정도로 선명했고, 두 사람은 그것에 섬뜩함마저 느꼈다. ...
그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
그 소음에, 아르펠의 품 안에 안겨 있던 로한이 뒤척였다. 그러자 아르펠의 눈이 기이한 빛을 머금고 번들거렸다. ...
“깨면 죽인다.” ...
말속에 진득하게 녹아 있는 진심에 남자는 힉, 하는 숨소리마저 숨기려 입을 두 손으로 꽉 막았다. ...
당장 꺼지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겁에 질린 놈들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자 아르펠이 혀를 쯧 찼다. ...
무슨 심보로 방에 찾아왔는지는 알겠다. 외견만 보고 귀족이라고 유추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는 했으니 돈이 될 만한 물건만 몰래 가지고 나온다면 제법 쏠쏠한 이득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겠지. ...
다행히 잠깐 뒤척였을 뿐 다시 푹 잠든 로한의 뒷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아르펠이 고갯짓했다. ...
그와 동시에 그림자가 꿀렁이며 어둠이 내려앉은 바닥을 기어가, 미동조차 없는 두 사람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비명을 내지르려는 입이 꾹 닫혔다. ...
“꺼져.” ...
겁에 질린 표정이 생생했다. 앞쪽에 주저앉았던 남자는 역치 이상의 공포를 느낀 탓인지 눈을 뒤집어 까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두 사람은 몸을 장악한 그림자에 의해 조종당해 계단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
동요 한 점 없이 고요히 그들의 기척을 살피던 아르펠은 두 사람을 여관 바깥으로 내쫓은 뒤에야 그림자를 거두고 문을 닫았다. ...
다음부턴 치안이 더 좋은 곳을 찾아 봐야겠다. ...
***
아침이 되자마자 아르펠과 로한은 아침을 간단하게 때우고 곧장 여관을 나왔다. 영주 성 주변은 이곳보다 치안이 더 좋을 테지만, 한 번 벌어진 일이 다시 안 일어날 거란 확신이 없어 싼값에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로브 하나를 샀다. ...
아르펠은 로한을 품에 안고 평범한 사람에게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를 뛰어서 몇 시간 만에 도착했다. ...
확실히 여관이 있던 마을과 영주 성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두 곳의 거리 자체는 의원이 있던 작은 마을과의 거리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인적이 드물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나다니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
이번 마을은 사람들도 제법 북적하고, 치안의 수준도 훌륭했다. 중간중간 돌아다니는 순찰대를 눈짓으로 확인한 아르펠이 마을의 여기저기를 반짝이는 눈으로 구경하는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사람이 되게 많아요!” ...
“여긴 영주 성 근처니까.” ...
숲속에 있는 마을에서 나고 자란 로한이니 이런 곳은 처음 와 볼 거다. 신이 난 건지 볼이 발개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상권이 꽤 발달해 있는 모양인지 가판대 위에 물건을 놓고 사고파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아이의 손을 놓치기라도 할까, 딱 아픔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꽉 잡은 아르펠은 마침 느껴지는 달콤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看来商业区相当发达,摊位上有很多人买卖商品。Arpel 紧紧地握着他的手,不让自己感到任何疼痛,想知道路人会不会错过他的手,Arpel 把头转向他能感受到的甜美气味。
시선이 닿은 곳은 과일 가게였다. 나열된 과일들이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자연스럽게 아르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로한이 꿀꺽 침을 삼켰다.
引起我注意的地方是一家水果店。列出的水果看起来相当开胃。自然而然地,Rohan 将目光转向 Arpel 的眼睛方向,咽了口口水。
“이거 두 개요.”
“这是两个大纲。”
“1실버만 주십쇼!”
“给我 1 块银子就好!”
가격도 괜찮았다.
价格还可以。
망고를 닮은 노란빛의 과일이 아르펠의 손에 들렸다. 저도 직접 만져 보고 싶어 하는 낌새라 로한의 손에 쥐여 주자 유독 작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질이 좋은 과일이라 그런지 크기가 제법 컸는데, 로한의 머리만 했다.
一个类似芒果的淡黄色水果在雅宝的手中。他也想自己摸摸它,所以当他把它放在 Rohan 的手里时,他看到了一张特别小的脸。它相当大,因为它是优质的水果,但它有 Rohan 的头发那么大。
머리만 한 과일을 보며 반짝이는 눈에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이 선연해 귀여웠다.
看着头大小的水果,闪闪发光的眼睛让我想赶紧吃掉,很可爱。
“여관 잡고 과일 먹을까.”
“我们找个客栈吃点水果好吗?”
“네!”
“是的!”
고개가 위아래로 아주 열정적으로 흔들렸다.
他的头非常热情地上下摆动。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은 여관을 발견했다. 방금 전 순찰대가 지나간 거리에 있는 곳이니, 간이 부은 게 아니라면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도 없을 거다.
不久之后,我找到了一家不错的旅馆。就在巡逻队刚经过的那条街上,所以如果不是因为肝脏肿大,也不会有人闹事。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로 방을 하나 달라고 요구하니 전과 달리 수상하게 보는 시선이 따라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릿속이 손에 들고 있는 과일을 빨리 로한에게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当我要求一个脸上蒙着长袍的房间时,我被怀疑地看着,但我并不在乎。这是因为他的脑海里充满了想法,他必须尽快将手中的水果喂给罗汉。
인심 좋은 요리사에게 과도를 얻어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과일을 자르고 난 뒤에야 과즙을 가득 머금은 과일 한 조각이 로한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直到亲切的厨师将水果切成一口大小的块后,一块装满果汁的水果才滑入 Rohan 的嘴里。
오물오물 과일을 먹는 아이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孩子吃着肮脏的水果,脸上露出幸福的样子。
“아르펠은 안 먹어요…?”
“你不吃雅宝......?”
“나도 먹을 거야.”
“我也要吃。”
조막만 한 손이 먹고 있던 과일 조각을 내려두고 새로운 조각을 건네 왔다. 손으로 집어 먹기엔 팔을 높게 뻗은 모습이었다. 잠시간 멍하니 아이를 내려다보던 아르펠이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一只小手放下他正在吃的那块水果,递给他一块新的。他高高地伸出双臂,用手吃东西。雅宝低头愣愣了一下孩子,然后缓缓低下了头。
“맛있네.”
“好吃。”
“헤헤.”
“呵呵。”
작은 포크에 꽂혀 있던 과일 조각이 금세 아르펠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아르펠의 눈가가 미약한 호선을 그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한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것은 덤이었다.
卡在小叉子里的那块水果很快就消失在雅宝的嘴里。雅宝的眼睛划出一道淡淡的弧线。当 Rohan 睁大眼睛看着它时,他的脸变得通红,这真是个额外的收获。
***
의뢰인이 있다는 산지로 향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마을에 도착했으니 어제 만날 수도 있었지만, 아르펠은 그보다 아이가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第二天,我去了客户所在的山区。由于他们在日落前到达村庄,他们本可以在昨天见面,但 Arpel 允许孩子短暂休息。
신전에 빨리 가면 갈수록 좋은 것은 맞았으나 로한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강행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도 섞였던 것 같다. ...
산속이기는 했으나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목이어서 그런지 길이 험난하지는 않았다. 혹여나 산에 오를 때 힘들어할까 걱정했으나 로한은 이런 길이 익숙한 건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간혹 앞으로 달려 나가선 그를 기다리는 몸짓까지 해 보였다. 로한이 그를 돌아볼 때마다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산속에 있는 사육장은 돈을 꽤 들인 티가 났다. 부지가 넓었고, 언뜻 보기만 했는데도 키우는 동물의 종류와 수가 많았다. ...
“거, 누구십니까?” ...
입구에 달린 종을 가볍게 흔들자 일을 하고 있었는지 땀이 송골송골한 중년의 남자가 급하게 나왔다. 살짝 경계심이 깃들어 있는 눈에 남자에게 의뢰 종이를 건넸다.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은 남자의 눈이 금세 커졌다. ...
“아, 안으로 들어오시죠!” ...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남자가 안으로 안내했다. ...
영주 성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지, 사육장 옆에 딸려 있던 건물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안쪽은 꽤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귀족의 높은 안목을 맞추기 위해 다분히 노력한 결과인 듯했다. ...
다리 아래로 닿는 소파의 감촉이 보들보들하다. 부드러운 느낌이 신기한 건지 옆쪽에 앉은 로한의 손이 연신 소파의 결을 쓸어내렸다. ...
차를 가지고 나와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무언가를 바라는 눈치로 계속 아르펠을 살폈다. 그 시선을 모를 리가 없던 아르펠은 잠시 의아하게 남자를 바라보다가 용병패를 꺼내 들었다. ...
“A, A급……! 귀하신 분을 제가 못 알아뵀군요!” ...
“아이는 데리고 있어도 됩니까?” ...
“아이고, 의뢰만 잘 해결해 주신다면 무엇이든 어렵겠습니까!” ...
그, 혹시 의뢰를 처리하는 데 보통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시는지…. ...
조심스럽게 묻는 남자에게 아르펠은 정확한 기간을 말해 주는 대신 충분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손수건으로 살짝 벗겨진 머리에 맺힌 땀을 톡톡 두드려 닦은 남자가 운을 뗐다. ...
“일단 제 이름은 세이드입니다. 여기서 20년 넘게 동물을 사육하고 있고, 질 좋은 고기를 영주 성으로 납품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죠.” ...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의뢰서에 적혀져 있던 것과 비슷했다. 정확히는 그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한 것과 같았다. ...
기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약 3주 전. ...
평소와 같이 아침에 사육장에 도착해 동물들의 배설물을 치우고 먹이를 주며 하루를 시작하려고 했던 세이드가 처참하게 죽은 동물의 사체를 목격했다고 한다. 야생동물의 공격으로 인한 죽음이라면 어디든 부서진 울타리가 있어야 할 텐데 흔적조차 없어서 상당히 꺼림칙했다고 덧붙였다. ...
8
그리고 이런 일이 격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울타리를 조금 더 높이 보강해 보고, 문의 잠금장치를 보완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
결국 세이드는 이 일을 용병 길드 측에 넘겼다. 의뢰를 넣은 후 많은 용병이 찾아왔고, 하나같이 의뢰를 포기하고 떠났다. ...
“떠난 이유는 ‘괴물’ 때문입니까?” ...
“예……. 저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주로 밤에 공격해 왔으니 오시는 용병분들마다 밤새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런데 날만 바뀌면 괴물을 봤다면서 도망쳐 버리지 뭡니까?” ...
잠시간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아르펠이 물었다. ...
“영주 성에 납품하는 분이라 하셨으니 동물이 죽었다면 운영이 힘들었을 텐데요. 영주 성에 따로 도움은 요청해 보셨습니까?” ...
“아뇨, 그… 아무래도 납품이 워낙 신뢰를 따지는 일이잖습니까? 업체를 바꿔버린다고 할까 봐 이야기해 보지는 않았는데…….” ...
하하. 세이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빤히 그를 바라보니 흐르는 땀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
“…그럼 농장 안을 둘러보고 싶습니다만.” ...
“저야 환영이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느릿하게 화제를 전환하자 점점 시들어가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기묘한 반응에 눈매를 좁히다, 오가는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로한을 안아 올렸다. ...
세이드의 안내에 따라 사육장 깊숙한 곳으로 가니 돼지와 소, 양 등 사업의 주축을 이루는 동물들이 가득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아르펠의 품에서 지나가는 광경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로한의 눈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
“저 이 동물 본 적 있어요. 나중에 우유 짜내는 거죠?” ...
로한이 가리킨 소를 흘끗 바라보았다. 젖소가 아니라 수컷 소였다. 나중이 되면 우유를 짜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세이드가 질 좋은 고기를 영주 성에 납품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아르펠이 말을 아꼈다. ...
“응. 나중에 우유 짜낼 거야.” ...
상당히 귀여워하는 눈치였으니 소의 운명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
사육장 안쪽은 평범했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은 시점에 멈춰 선 아르펠은 자신을 기다리는 동안 소에게 건초를 내밀어 주고 있는 로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크게 특별한 건 없군요.” ...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세이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납품 사업을 꽤 크게 하고 있다는 세이드의 말처럼,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야생동물에 의해 습격을 받아 동물의 개체 수가 상당히 줄었을 텐데도 여전히 사육장 안은 빽빽한 느낌이었다. ...
온기를 담은 눈으로 로한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펠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
“그동안 생긴 동물의 사체는 어디다 뒀습니까?” ...
“사, 사체요? 그게… 납품했습니다, 납품!” ...
“……사체를?” ...
도축과 납품의 과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밤사이 정체 모를 것에게 습격당해 죽은 사체를 납품하는 것은 말이 안 됐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세이드를 쭉 응시하자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
“…좋습니다. 의뢰는 포기하죠.” ...
“네, 네?! 그게 무슨!” ...
“계속 무언가를 숨기는 상대를 위해 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로한에게 다가간 아르펠이 그의 손에서 건초를 조심스럽게 빼내고는 아이를 다시 안아 들었다. ...
“우리 이제 가요?” ...
“응. 갈 거야.” ...
“자, 잠깐!!” ...
아르펠이 정말로 그 자리에서 뒤돌아 가 버리자 안절부절못하던 세이드가 소리쳤다. 그럼에도 걸어가는 발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
결국 후다닥 달려온 세이드가 코앞에 무릎까지 꿇고 나서야 걸음이 멈췄다. 성가신 것을 바라보듯 아르펠이 눈가를 찌푸렸다. ...
“비키십시오.” ...
“미안, 미안해요. 이게 내 생계와 관련이 있어서….” ...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
무감하던 눈에 빛이 돌아온 것은 로한의 손끝이 조심스레 옷자락을 붙잡았을 때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잔뜩 흔들리는 예쁜 눈이 보였다. ...
“우리, 도와 주면 안 돼요…?” ...
로한은 새삼 품에 안겨 있는 이 아이의 천성이 착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방금까지 흔들림 없었던 마음이 뒤바뀌어 버렸다. ...
그 낌새를 눈치챈 듯 세이드의 눈이 유일한 희망인 로한을 열렬하게 응시했다. 자연스레 아르펠의 기분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염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세이드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로한의 눈앞을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모조리 말한다면.” ...
“약속하겠습니다…!” ...
자신을 냉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르펠의 눈치를 슥 살핀 세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춤을 털고 조심스럽게 숨겼던 이야기에 대해 운을 뗐다. ...
아까 전 납품했다고 둘러댔던 동물의 사체에 대한 것이었다. ...
“동물의 사체는…… 납품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묻어 버렸어요.” ...
세이드가 두 사람을 이끌고 사육장의 중심에서 벗어나 외곽의 숲에 들어섰다. 주변이 온통 평평한 데 비해 유일하게 불룩 튀어나와 있는 곳이 있어 시선이 갔다. ...
“뭐 합니까? 안 파고.” ...
“예, 예!” ...
거짓말한 죄가 있는 세이드는 아르펠의 한 마디에 삽을 들고 와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여러 번 파헤치고 덮기를 반복하던 곳이어서인지 생각보다 부드럽게 파이는 흙 사이로 부패한 냄새가 훅 새어나왔다. ...
“로한. 잠시 눈 감고 있어.” ...
“이상한 냄새….” ...
“코도 막고.” ...
로한을 한쪽에 내려주고 신신당부했다. 토를 다는 법이 없던 로한은 곧장 두 눈을 꾹 감고 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 모습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퍽 앙증맞아 일자를 고수하던 아르펠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
“다 팠습니다!” ...
물론 그마저도 세이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
로한을 뒤로하고 구덩이 근처로 다가간 아르펠이 맨 위에 놓인 돼지 사체를 응시했다. 가장 최근에 죽은 사체인 듯 부패도 가장 덜해 죽음의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었다. ...
사체에는 무언가가 파먹은 듯 움푹 팬 상처가 나 있었다. 환부 근처는 붉은빛이 아닌 완전히 새까만 색을 띠었고, 피부 껍질은 쪼그라들어 있었다. ...
상처의 가장자리에 남은 것은 채 터지지 못한 검은색의 기포가 들끓은 적나라한 자국이었다. 사체가 부패한 냄새를 제외하고도, 역겨우면서 한편으로는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
안절부절못한 세이드를 옆에 두고 소리 없이 사체를 살피던 아르펠이 고개를 들었다. ...
“사체를 숨긴 건 이 상처 때문이겠군요.” ...
“크흠…… 맞습니다.” ...
“상처를 숨긴 이유는?” ...
“…….” ...
세이드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아르펠은 아까처럼 재촉하기보다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리를 옮겨도 될까요?” ...
곧장 파냈던 흙을 다시 덮어버린 그들은 조금 전 푹신한 소파가 있었던 그 접견실로 되돌아왔다. ...
코를 막고 있었지만, 냄새가 스며들었는지 로한의 볼은 조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준 아르펠이 이곳에 오기 전 들렸던 가게에서 산 사탕 하나를 로한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달콤한 맛에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풀렸다. ...
“그 상처는… 제가 영주 성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 하도 쉬쉬하는 소문이 있어서요.” ...
“유명한 소문입니까?” ...
“아뇨. 제가 영주 성에 납품하러 자주 들리는 편이라 알고 있는 것이지, 영주 성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모르는 일입니다.” ...
당시를 떠올리기라도 하듯 세이드의 표정이 차게 질렸다. ...
“성안에서 하녀 하나가 실종됐어요. 누군가는 하녀가 도망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영애가 아끼는 하녀이기도 했고, 심부름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오는 흔적까지 남아 있어 도망쳤다는 주장은 금방 묻혔습니다.” ...
“실종으로 처리됐겠군요.” ...
“예. 그리고 한 달 전쯤 실종되었던 하녀가 돌아왔습니다. 상처는 없었고, 본인도 멀쩡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하녀가 자신이 실종되었을 때의 기억을 영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이었죠.” ...
그 뒤로 나흘 동안은 정말 아무런 이상 없이 멀쩡했다고 한다. 꺼림직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조차 그러려니 하고 넘길 때쯤, 일이 터졌다.
在接下来的四天里,一切都很好。就连那些不愿意这样做的人,也正要这样做,然后事情爆发了。
“영애의 시중을 들던 하녀가 갑자기 새까만 거품을 물고선 검은 피를 토했다고 합니다.”
“据说,照顾英爱的女仆突然咬住了黑色的泡沫,吐出了黑色的血。”
“…검은 피?”
“…黑血?
“당연히 그곳은 난장판이 됐고, 하녀는 그 자리에서 발작하다 결국 죽었다고 해요. 문제는 하녀가 토한 검은 핏방울 하나가 영애의 팔에 튀었다는 겁니다.”
“当然,这个地方一团糟,女佣当场癫痫发作,最终死亡。问题是女仆吐出的一滴黑血溅到了英爱的手臂上。
피가 튄 부위부터 시작해 새하얀 피부에는 검은색의 발진이 일어났고, 영애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딸이 이유 모를 사고에 휩쓸려 사경을 헤매는 것을 목격한 부인은 쓰러졌다. 영주는 딸의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이를 수소문하지 않고, 딸을 동떨어진 별관에 격리해 두고 상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从血溅的区域开始,她纯白的皮肤上出现了黑色的皮疹,英爱开始痛苦。当妻子目睹女儿无缘无故地在事故中四处游荡时,她崩溃了。领主没有要求可以治疗他女儿病情的人,只是将她隔离在一个单独的附属建筑中,观察她的状况。
“이상한 일이죠. 영주는 딸을 꽤 아낀다고 했는데.”
“这很奇怪。领主说他很关心他的女儿。
“그럼 당신이 영주 성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상처의 유사함 때문이겠군요.”
“那么你之所以没有向主堡寻求帮助,就是因为伤口的相似性。”
“네…… 하녀의 시신에도 검은색의 기포 자국이 더러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연히 영주 성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그 일을 듣고 흘려 넘겼는데, 제 사육장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니까…. 이 일이 알려진다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是的......女仆的身体上也有一些黑色的气泡痕迹。我碰巧从一个在城堡工作的朋友那里听说了这件事并把它传给了我,但同样的事情也发生在我的狗窝里......我想,如果这件事被知道了,我可能会被冤枉并被带走。
속인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긴 했다.
这并不是欺骗的道理,但这是一个令人信服的理由。
비슷한 상처, 검은색의 반점과 함께 앓기 시작한 영애, 치료할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영애를 꼭꼭 숨긴 영주.
英爱开始遭受类似的伤口和黑点,英爱没有找人治疗她,而是把她藏得严严实实。
세이드의 설명을 듣고 생각을 정리한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听完萨义德的解释并整理了他的思绪后,雅宝点了点头。
“이곳을 습격한 동물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袭击这个地方的动物......我想我大致知道。我会处理的。
“저, 정말입니까?!”
“真的吗?!”
“예. 부탁받았으니까요.”
“是的,因为我被问到了。”
“감사합니다…!”
“谢谢你......!”
연신 고개를 숙이는 세이드를 바라보는 아르펠의 시선이 무감했다. 아르펠이 일을 순순히 처리하기로 한 것은 로한 탓이었다. 저 남자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니까. ...
원래라면 사정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안 즉시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
9
오래전, 이 세상에는 천신과 마신을 제외한 또 다른 신이 존재했다. ...
그는 신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추를 자신에게로 옮기고 싶어 전쟁을 일으켰고, 치열한 전투 끝에 천신과 마신에 의해 세계의 밖으로 추방되었다. ...
이제는 세계로부터 이름이 잊혀 악신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
두 신에 의해 세계의 바깥으로 쫓겨났으나 이 대륙에는 여전히 악신이 남긴 흔적이 존재했다. 그것이 ‘망령’이었다. ...
몇백 년 전, 망령들이 일시에 증식하여 대륙을 침략했고 인간들은 수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끝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
인간들에게 망령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천신과 마신은 각각 성력과 마력을 부여했고, 세대가 지날 때마다 특별히 한 명에게만 축복을 내려 대륙을 지키라는 사명을 부여했다. ...
이때, 축복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각각 ‘성검’과 ‘마검’이었다. ...
이 검들은 파편에 불과하지만 신의 권능을 담고 있는 존재였고, 신들에게 축복을 받은 인간만이 쓸 수 있었다. ...
또한, 무슨 일이 있든 세상을 떠돌던 성검과 마검은 결국 축복을 받은 존재에게 이끌리고, 그들의 손에 쥐어져 왔다. 그게 세상의 규칙이었다. ...
아르펠이 결국 돌고 돌아 로한에게 끌리는 것 또한 당연했다. 정해진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느낀 알 수 없는 답답함, 그리고 이 세계의 주인공이기에 갖게 된 호감을 제외하고도, 아르펠이 ‘마검’이었기에 로한에게 가지는 유한 감정이 존재했다. ...
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반짝이는 금빛 보석 같은 눈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둥실거렸다. ...
“로한. 나랑 가면 위험해.” ...
“그래도…….” ...
아르펠은 지금 당장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주범을 잡으러 갈 생각이었다. 놀란 낯의 세이드가 “지금은 밤이 아닌데 정말 가능합니까?”라며 질문을 해 왔지만, 그보다는 옷자락을 살짝 붙잡은 자그마한 손에 집중했다. ...
누가 봐도 혼자 있기 싫다는 얼굴이었다. 말없이 로한을 내려다보던 아르펠은 결국 아이가 울먹거리며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고 할 때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
“그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았지?” ...
“…네!” ...
짧은 팔이 아르펠의 목을 가로질러 끌어안았다. 따끈한 체온에 아르펠이 표정이 느릿하게 풀어졌다. ...
“저기….” ...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녀석이 잠들어 있는 낮이 사냥하기엔 적기입니다.” ...
아까 했던 질문을 반복하려는 목소리에 아르펠이 뒤늦게 답했다. ...
“하지만 낮에는 아무도 습격한 동물을 찾지 못했는데요….” ...
“그건 그 녀석이 꼭꼭 숨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전 ‘그것’이 가진 힘을 느낄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밖으로 나와 있으면 위험하니 안쪽에 계십시오.” ...
계속해서 따라오려는 낌새인 세이드를 떨쳐낸 아르펠은 로한을 껴안은 팔에 조금 힘을 준 후 건물을 나와 숲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
사체가 묻혀 있는 곳을 지나 조금 더 깊은 숲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슬슬 해가 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서늘해졌다. ...
“추워?” ...
도리도리. 어깨에 고개를 푹 묻고 있는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을 걸기보단 한 번 토닥여 주기를 선택한 아르펠이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다 한 곳에 걸음을 멈췄다. ...
사체에서 맡았던 냄새가 희미하게 땅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
‘망령’의 흔적이었다. ...
“눈 감아, 로한.” ...
나직하게 읊조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바닥에서 어둠을 형상화한 듯한 검은색의 거대한 가시들이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올라왔다. ...
이윽고 동물의 멱을 따는 듯한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하도 새까매 섬뜩함마저 느껴지던 가시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속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멧돼지를 닮았으나 그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랗고, 온몸에 검푸른 혈관들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는 짐승이었다. 검푸른 기운이 짐승의 숨결로부터 새어 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질질 흘리는 침과 새빨갛게 충혈되어 반쯤 돌아간 동공이 녀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했다. ...
“…힉!” ...
바로 그때 귓가에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펠이 당황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고개를 묻고 있던 로한이 짐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당연하게도 아이가 보기엔 꽤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광경이었기에, 여태껏 이런 것들을 목격한 적이 없는 로한은 상당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눈을 계속 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
크르륵…. ...
누가 봐도 이쪽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짐승에 아르펠이 혀를 찼다. 땅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여 버릴 것을. 괜히 아이의 눈만 버렸다. ...
곧바로 짐승이 있는 정면을 향해 들어 올려진 손이 허공을 일직선으로 그었다. ...
그것은 마치 공간이 베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그리고 주위의 광경이 격변하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새까만 획이 아가리를 벌리며 짐승을 집어삼켰다. 타인이 보았다면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외면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느꼈을 순간이었다. ...
처음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본 로한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
순식간에 정리되어 버린 상황은 방금 전까지 끔찍한 외형을 한 짐승이 이 자리에 있었던 것조차 한낱 꿈은 아닐까 의심하게 했다. ...
“바, 방금…….” ...
“끝났어. 돌아가자.” ...
로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
아까와는 다르게 겁에 질린 낯도 아니었고, 돌아간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낯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아르펠은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의뢰금을 받으면 뭘 더 사 먹일지 고민하는 것이 현재 그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의 전부였다. ...
***
그림자가 잡아먹은 짐승의 사체를 꺼내 보여 주자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세이드는 뒤늦게 모든 일이 해결되었음을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감사를 표하며 의뢰금에 추가로 돈을 얹어서 주는 것을 아르펠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
“이 짐승이 다시 나오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
몇 번이고 고개를 꾸벅이던 세이드가 여전히 걱정거리가 남은 얼굴을 하고는 한탄했다. 혼잣말에 가까웠으나 흘끗 그를 바라본 아르펠이 덧붙였다. ...
“다시 나타날 일은 없을 겁니다.” ...
“저, 정말입니까…?” ...
맑게 갠 얼굴을 하는 세이드를 뒤로하고 아르펠은 아까부터 영 말이 없던 로한을 안아 올렸다. 겁을 먹었나… 돌아가서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
“그리고 땅에 묻어놓은 사체는 불태우십시오.” ...
“예,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또다시 감사 인사를 하는 목소리를 대충 흘려 넘기며, 아르펠이 빠르게 산길을 내려왔다. 세이드의 앞에서는 별 티를 내지 않았지만, 흉측한 짐승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멧돼지를 닮은 그 짐승은 '망령'에 의해 변형된 상태였다. 의뢰인에게 말을 해 줄까 했지만 직접 망령을 상대하는 신관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망령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라 여겨 말을 아꼈다. ...
아마 원래 있던 곳에서 탈출해 우연히 이 산맥에 들어왔을 것이다. 망령은 본디 생명체를 탐하는 존재인지라, 그 힘이 녹아 있던 짐승에게 잡아먹을 수 있는 동물들이 많은 이곳은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테고. 그러다 결국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 분명했다. ...
원래라면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망령'이 아닌 존재가 그 힘을 품고 있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 의해 강제로 힘이 주입된다면 아주 낮은 확률로 망령의 힘을 가진 존재가 탄생했다. ...
‘사실 그렇게 낯설어할 일도 아니지.’ ...
처지가 꽤 비슷하지 않나. ...
자신이 원작 속에서 주인공을 망가뜨린 이유, 지금에 와서도 망령의 힘을 익숙하게 느끼는 이유가 모두 그 예외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
망령의 힘을 품고 타락한 마검. ...
그것이 ‘아르펠’이었다. ...
***
상념을 거두고 빠르게 여관으로 되돌아왔다. 의뢰금으로 받은 돈은 제법 쏠쏠했다. 그간 많은 용병들이 의뢰를 받았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해서인지 의뢰금이 꽤 오른 탓이다. ...
돈을 넣은 주머니를 꽉 묶고, 흘끗 시선을 돌려 여전히 말이 없는 로한을 응시했다. 아까 전부터, 정확히는 아르펠이 그 짐승을 잡고 난 이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간혹가다 눈치를 보는 것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지. 계속 이 상황을 지속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아르펠이 돈이 든 주머니를 서랍에 넣어 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로한에게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
“로한.” ...
“……네.” ...
“내가 무섭니?” ...
“네?” ...
눈을 피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로한이 고개를 팩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아르펠은 그저 조용히 로한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
공간을 깨트린 그림자가 짐승을 날름 삼켜버리는 모습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름의 자부심도 있던 터라 기분이 조금 우울했다. ...
그러나 자신의 시각과 어린아이의 시각은 엄연히 다를 것이다. 망령의 힘에 오염된 짐승은 아이가 보기에는 상당히 끔찍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짐승을 아르펠은 한 번의 손짓으로 죽였다. 무서워할 만했다. ...
그냥 데리고 가지 말 걸 그랬나. 아르펠이 천천히 생각을 이어 나가는 때였다. ...
“아니에요!” ...
“…아니야?” ...
“그럴 리가 없잖아요…….” ...
로한이 고개를 세차게 돌려가며 강하게 부정했다. 눈이 커다래진 것이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내내 말이 없었던 이유가 당연히 겁을 먹은 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르펠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 ...
눈치를 보듯 오물거리는 입술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이가 잠깐 들어 올렸던 고개를 금세 푹 숙였다. ...
육아는 아이와의 소통이 중요하다…. ...
이전 생에서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것도 같았다. 그것을 상기하며 로한이 뜸을 들이고 있어도 말없이 그를 기다려 줬다. ...
십 분 정도가 더 흘렀을까. 드디어 로한이 입을 열었다. ...
“제가…… 필요 없을까 봐.” ...
“뭐?” ...
그리고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
10
필요가 없다니? 누가? 웬만해선 표정 변화가 드문 편인 아르펠조차 눈을 크게 뜨고 로한을 내려다볼 만큼 충격적인 이유였다. ...
“아르펠은 강하잖아요. 나는 무섭기만 했는데….” ...
“로한.” ...
“…아르펠은 검이니까, 흑, 나 말고 더 강한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전 약하고, 아르펠을 지켜주지도 못하고. 쓸모가 없잖아요…… 흐엉.” ...
처음에는 느릿하게 말을 꺼내던 목소리에 점점 울음기가 섞여 들어 갔다. 끅끅거리며 말을 하면서도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는 것이 안쓰러웠다. ...
결국 물기가 맺혀 있던 눈가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펠이 급하게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
“흡, 아르페엘…….” ...
“로한. 쉬, 울지 마.” ...
“나, 버릴 거예요…?” ...
옷자락을 꼭 쥐는 손이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음을 피력하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아 상처가 생길까 걱정되어 조심스레 몸을 뒤로 물려 그의 손을 뗐다. 그 몸짓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흔들리다 체념했는지 서서히 내려가는 손을 아르펠이 한 손으로 잡아 주었다. ...
“로한. 나 봐.” ...
우물쭈물하는 고사리 같은 손을 단단하게 잡아 주며 말했다. ...
“네 검이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 네가 약해도 괜찮아.” ...
“그렇지만… 그러면. 왜 약속, 안 해 줘요?” ...
언젠가 한 번, 마검과 마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는 서로 계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계약이라는 말을 어려워해서 '함께하자는 약속'이라고 풀어서 설명해 줬다. ...
로한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무엇 하나 확실해진 것이 없으니 계약은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 하는 사항이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때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줬어야 했다. ...
“검과 계약한 사람은 더 이상 늙지 않아. 정해진 수명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
“…….” ...
“네가 지금 나랑 계약하면, 넌 평생 어린 채로 살아야 해. 로한.” ...
네가 나만큼 크면 계약해 줄게. 선의의 거짓말인지 혹은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진심인지 모를 말을 속삭였다. ...
품에 아이를 가득 안은 채로 깍지 끼고 있던 손을 놓고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계속 어린아이인 채로 살고 싶지는 않은지 어깨에 얼굴을 묻은 로한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숨이 벅찰 정도로 내뱉던 울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
그때까지 아르펠은 로한의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예상조차 못 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린 기억 탓에 매일 밤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티를 내지 않는 아이였으니, 어쩌면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아니었다. 그날 밤의 기억을 무서워하는 것과 별개로, 로한은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있는 아르펠이 자신을 두고 가버리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이제 괜찮아?” ...
“네에….” ...
아이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아르펠은 로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어졌다. ...
이곳까지 오는 내내 아르펠은 로한을 안쓰럽게 여기고 챙겨 주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함께 해 주겠다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신전에 도착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았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할 수 없었다. ...
내가 이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울먹이는 아이를? ...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의지하고 있음을 실감할수록 아르펠은 로한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다. ...
축복받은 사람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마검이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
복잡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
***
로한은 그날 밤 악몽을 꾸지 않았다. ...
당연히 그가 악몽에 괴로워하며 울 거라고 생각해 눈을 감은 채로 아이의 기척만을 살피고 있던 아르펠은 잠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르게 내쉬어지는 숨을 확인하곤 멍하니 로한을 내려다보았다. ...
식은땀도 나지 않고, 눈물이 새어 나오지도 않는다. 뽀송한 머리카락과 통통한 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린 아르펠이 반쯤 일으킨 몸을 다시 침대 위로 뉘었다. ...
…잠을 잘까. ...
제법 긴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더니, 오히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린 아르펠은 바로 잠들기보다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상기해 보기로 했다.
我已经很久没睡了,闭着眼睛睡觉感觉有点奇怪。雅宝缓缓地眨了眨眼,决定回忆一下今天发生的事情,而不是马上睡觉。
그가 알고 있는 소설의 줄거리에는 이번과 같이 망령의 힘에 오염된 존재가 유발하는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他所知道的小说情节,并没有提到被幽灵之力污染的生物所引发的事件。在某种程度上,这是很自然的。
원래대로라면 마을에 있던 모두가 죽고, 타락한 마검만을 지닌 채로 로한은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그러는 동안 그가 인간성을 잃고 마음이 망가져 버렸다는 서술만 있었을 뿐이라, 그가 들렀던 곳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신전에 의해 거둬지기 전까지는 모든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本来,村里的人都死了,罗汉四处游荡,只带着那把腐化的魔剑。在此期间,只有一段描述说他失去了人性,他的心碎了,所以他不知道他停下来的地方发生了什么,也不知道他遇到了谁。所有的步骤都被省略了,直到它们被寺庙收集起来。
그러니 이번 일에 관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오로지 직접 찾은 단서만으로 정황을 파악해야 했다. 세이드가 말했던 영주 성에 대한 소문을 떠올린 아르펠은 깜빡이던 눈의 움직임을 멈추곤 눈꺼풀을 닫았다. ...
그는 마검이고, 로한은 마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다. 모든 게 밝혀진 상태였다면 이상 현상의 원인이 망령의 힘일 가능성을 두고 영주 성에서 조사를 선언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불가능했다. 둘은 그저 신분이 불분명한 용병 하나와 용병이 데리고 다니는 아이일 뿐이었다. ...
게다가 아르펠은 대가 없이 남을 도와주고 다니는 선한 이가 아니었다. 로한을 해치려고 했던 사이비 교단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으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구한답시고 벌집을 들쑤시고 싶지는 않았다. ...
'죽든 말든 상관없기도 하고.' ...
전생과 같이 그가 온전한 인간이었다면 안타까움을 느끼고, 모른 척 넘어가는 일에 죄책감을 느꼈을까? ...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워 보려는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몸속에 깃들어 있는 망령의 힘은 생명체를 탐한다. 그것은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도, 채워도 채워도 가시지 않는 허기에 몸부림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과거의 흔적이다. ...
하지만 아르펠은 생명체를 죽이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생명의 가치에 무감해지는 방향으로 변했다. 어쩌면 갑자기 떠올린 전생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
그에게 중요한 것은 로한 하나뿐이다. 이 아이가 다치지만 않는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
“…잘자. 로한.” ...
정신없이 자고 있는 아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깜빡이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
실로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
***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 없던 로한의 인생은 어느 하룻밤을 기점으로 격변했다. ...
비명, 울음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화마와 함께 했던 악몽 같던 밤. 그날 로한은 모든 것을 잃었고, 그의 곁에 남아 주기로 약속한 단 하나의 존재를 얻었다. ...
로한이 아르펠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검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언젠가 그 모습을 보고 정말 예쁘고 멋진 검이라며 감탄하곤 한참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검 한 자루라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그것은 말을 할 수 있었고, 자신을 아르펠이라 소개했다. ...
<마검은 마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만 사용할 수 있어. 이번에는 너야.> ...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로한은 마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내가 축복을 받아서. 내가 이 마을에 살아서. 내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겨서. ...
자신에게 달려 있던 수십 명의 목숨은 모두 자신의 존재 때문에 스러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눈가가 뜨거워졌고, 숨이 막혔고, 축복을 내려준 신이 원망스러웠다. 원해서 받은 축복이 아닌데도 그 대가로 로한이 잃은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
<실례할게.> ...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우는 로한을 본 아르펠이 그렇게 말했다.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검이 사람으로 변했고,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며 경악하기도 잠시.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따뜻한 체온이 그를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
“마을이 그렇게 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
그 뒤로 아르펠은 계속해서 로한의 곁에 있어 주었다. ...
울다 지쳐 잠든 그를 옆 마을의 의원에 데려다주었으며, 상처가 나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고, 어디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
아르펠은 처음 보았던 그 검을 빼다 박은 사람이었다. 아름답고 우아했으며, 아이가 여태껏 본 어떤 사람들보다도 예뻤다. ...
그를 낯설어하는 것도 잠시,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로한에게는 그 약속이 거대한 파도처럼 다가왔다. ...
아르펠은 잘 웃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만은 다정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모습이 너만이 내 특별한 예외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 텅 비었던 마음에 다시 물결이 차올랐다. ...
“나중에 네가 검을 필요로 하면, 내가 네 검이 되어 줄게.” ...
그날 밤의 일을 악몽으로 꾸는 날도 있었지만, 검이 되어 주겠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와 언제나 그를 끌어안아 주던 따스한 몸 덕분에 악몽을 잊을 수 있었다. ...
어디를 가던 아르펠과 함께했고,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면 아르펠은 기꺼이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로한은 그런 아르펠에게 익숙해졌다. 처음만 해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던 아르펠은 이제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로한의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
하지만 여전히 하룻밤 사이 그가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기도 했다. 함께 있어 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한은 불안함에 떨었다. 어쩌면 예리한 어린아이의 직감이 아르펠의 눈에 남은 일말의 망설임을 읽은 탓일지도 몰랐다. ...
11
아르펠이 느낀 대로 로한은 천성이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마을에서도 착하다는 칭찬을 아주 많이 들으면서 살아왔으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일 테다. ...
그리고, 그 두려움은 아이를 움직였다. 로한은 그가 자신에게 질리는 일이 없도록 착한 아이 행세를 했다. 매번 아르펠의 눈치를 기민하게 살피고, 그가 불편해하는 일이 없도록 착하고 순진한 아이가 되고자 했다. ...
'속여서… 아르펠이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하지?' ...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
아르펠이 들었다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며 단언할 이야기였다. 그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로한은 묘하게 남은 불안감을 무시하지 못했다. ...
언젠가 한 번은 아르펠에게 계약해 달라고 졸랐다. ...
아르펠은 마검이었고, 마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검과 계약할 수 있다고 했다. 신에게서 받은 축복은 그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으나, 지금만큼은 아르펠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
“아직은 일러, 로한.” ...
하지만 아르펠은 계약을 하자는 말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이렇게 선명한 거절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라, 아닌 척했지만 로한은 마음속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
그래도 꾹 참았다. 어째서 계약을 해 주지 않냐고, 날 버리는 거냐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채근하면 아르펠이 인상을 쓸지도 모른다. 여태껏 아르펠이 로한에게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안했다. ...
속을 조금씩 갉아먹던 불안감이 터진 것은 아르펠에게 안긴 채 끔찍하게 생긴 짐승을 목격했을 때였다. ...
흉측한 광경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악몽과도 같은 밤에 느꼈던 공포와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그때는 마음이 뜯겨나간 듯 괴로워 숨이 막혔다면, 짐승을 마주하고 느낀 공포는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
선명한 공포를 느끼는 와중에도 로한은 생각했다. ...
'아르펠이 다치면 안 되는데.' ...
그 짧은 새에 아이의 마음속에는 좌절감 또한 솟아올랐다.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켜 줄 힘이 없었다. ...
여태껏 어려서 힘이 약하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던 로한은 짧은 순간 심한 무력감을 두 번이나 느껴야 했다. ...
다행히 아르펠은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로한은 그 사실에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르펠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도,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묘한 감정을 가지는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끓기도 했다. ...
아직도 그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
무심한 듯 들어 올린 손이 공중에 선을 그렸다. 동시에 그 부분이 깨져 나가더니 그 속에서 새어 나온 넘실거리던 어둠이 짐승을 잡아먹었다. ...
새까만 색이었으나 로한은 순간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압도적인 힘과 경이로움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
그것도 잠시, 머지않아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로한은 조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던 짐승이 아르펠에게는 맥을 못 추고 절명한 것을 보며 우울해졌다. ...
'내가 약해서일까?' ...
그래서 계약해 주지 않은 걸까? ...
아르펠은 검이었고, 아름다우면서도 강했다. 로한의 눈에는 그가 모든 것을 가진 존재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보호 받아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주눅이 들었다. ...
검이라면 강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아르펠도 분명, 강한 사람과 계약하고 싶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
'싫어.' ...
그런 건 싫어. 아르펠이 날 두고 가 버리고, 다시 혼자 남아버리는 건…. 로한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
그 뒤로 로한은 아르펠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약해서 계약해 주지 않는 거냐고 물었을 때 아르펠이 그렇다고 하면 어쩌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으니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건 아르펠이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로한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선명하게 묻어 나오는 염려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最后,是 Arpel 先伸出援手。他看着一直沉默不语的罗韩,一脸担忧。我被明显的担忧所淹没。
“로한.” ...
“……네.” ...
“내가 무섭니?” ...
“네?” ...
그리고 들은 건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다. 예쁘다고, 멋지다고 생각했으면 모를까 로한은 결코 아르펠의 힘이 두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
세차게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아르펠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무섭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겁먹은 사람 같았다. ...
다정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는 아르펠을 향해, 로한은 몇 번이고 입 밖으로 나가려는 말을 붙잡았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두려웠다. ...
하지만 자신을 배려해 준 아르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로한의 세상은 이제 아르펠을 기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슬퍼하는 얼굴은 보기 싫다. ...
“나, 버릴 거예요…?” ...
처음에는 분명 최대한 덤덤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펠의 얼굴을 볼수록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받친 감정이 새어 나와 눈물이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
“네 검이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 네가 약해도 괜찮아.” ...
“검과 계약한 사람은 더 이상 늙지 않아. 정해진 수명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
“네가 지금 나랑 계약하면, 넌 평생 어린 채로 살아야 해. 로한.” ...
네가 나만큼 크면 계약해 줄게. ...
서글프게 우는 로한에 아르펠이 당황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계약해 줄 수 없던 이유, 그리고 크면 계약해 주겠다는 진심 어린 약속까지. ...
자신을 꼭 안아 주는 품을 느끼며 로한은 아르펠의 가슴팍에 고개를 박았다. 어쩐지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르펠과 함께한 이후 내내 마음 한구석에 맴돌았던 불안감이 싹 사라져 버렸다. ...
두려워했던 자신이 우습고, 울었던 것이 부끄러웠지만… 아르펠과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
***
의뢰가 하루 만에 끝나 버렸으니 다음날 곧장 마을을 뜨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아르펠은 이틀 정도 더 이 마을에 묵기로 했다. 중앙 신전까지 가려면 아직 거리가 꽤 남았으니 휴식은 취할 수 있을 때 취하는 게 좋다. 가는 길에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의뢰가 있는지 살펴볼 시간도 필요했다. ...
로한은 어제의 그 대화 이후 낯빛이 더 좋아졌다. 이야기를 걸만한 특별한 주제가 없으면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던 아이가 이제는 곧잘 말을 걸었다. ...
사실 알찬 내용이 있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아르펠은 아이가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누그러졌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꾸도 성실히 해 줬다. ...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아이가 오해하기 전에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걸. ...
말주변도 없고, 아이를 키워 본 적은 더 없다. 소설의 내용 말고는 거의 허울밖에 남지 않은 기억이라, 도움이 될 만한 뚜렷한 기억은 찾을 수 없었다. ...
오해할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하고 내뱉은 말에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 미약한 죄책감이 목 끝에서 감돌았다. 아르펠이 조잘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오늘은 그냥 쉬어요?” ...
“그래.” ...
의뢰야 내일 받으면 된다. 눈을 반짝이며 묻는 로한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발그레해지는 볼이 여실히 그의 기분이 좋음을 보여 주었다. ...
습관처럼 손을 뻗어 말랑거리는 볼살을 만지작거린 아르펠이 다시 아이의 입에 빵 한 조각을 가져다 대었다. 작은 입술이 벌려지고 빵을 오물오물 씹었다. ...
여관 주방의 요리사에게 물어 괜찮은 빵집을 물색한 후 사 온 것이었다. 점심이 되기 전까지 이렇게 여관에서 빈둥거리다가 밥을 먹으러 외출하기로 했다. ...
“아르펠도 먹어요, 네?” ...
“고마워.” ...
이번에는 로한이 손을 내밀어 빵을 건네줬다. 함께 무언가를 사와 간식처럼 먹기 시작한 날 이후로 중간중간 음식을 서로의 입가에 가져다 대는 행동이 익숙해졌다. 로한이 아르펠이 하는 행동을 곧잘 따라 했기 때문이다. ...
로한이 내민 것을 냉큼 입에 넣은 아르펠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나 마음씨가 착한 아이였다. ...
자각하지 못 한 것 같았으나, 남이 보았다면 굉장히 만족스러워한다고 느낄 법한 표정이 아르펠의 입가에 걸쳐졌다. 문득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짐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이냐며 묻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금속음. ...
흘끗 시선이 돌아갔다. 기사인가? ...
“아르펠, 왜 그래요?” ...
“밖이 시끄러워서.” ...
“저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
“내 귀가 좋은 것뿐이야.”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로한의 입가에 빵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그것을 대신 떼어내 준 아르펠이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
금속음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
쿵쿵-,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
“아르펠 경을 찾고 있습니다.” ...
살짝 겁을 먹은 듯하던 로한이 바깥의 목소리를 듣고는 아르펠을 바라보았다. 성가셔하는 티가 확 나는 표정을 지은 아르펠이 가만히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
“안에 계신 거 알고 있습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
다소 강압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말투만큼은 정중했다. 그리고 정중함보다는 절박함에 가까웠다. ...
10분이 더 지났다. 남자는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도, 열어 달라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
결국 인상을 찌푸린 아르펠이 문을 확 열어젖혔다. ...
“뭡니까.” ...
문이 확 열리자마자 맞은편에 있던 덩치 큰 기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리고선 대뜸 무릎을 꿇어버렸다. 코앞에서 무릎을 꿇었음에도 그를 바라보는 아르펠의 시선은 여전히 찼다. ...
“제발 말씀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경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
이 세계에서 기사의 지위는 제법 높다. 신분이 제대로 증명조차 안 된 용병에게 대뜸 찾아와 고개를 숙일 리는 없다는 말이다. ...
그럼에도 저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상당히 급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
12
뒤쪽으로 다가온 로한이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겁을 먹었다기보단 반쯤 호기심인 것 같긴 했지만…. 또 온전한 호기심이라기엔 묘하게 부정적인 시선이었다. 아이를 끌어안은 아르펠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전 이 마을을 떠날 겁니다.” ...
“잠깐,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습니다!” ...
“첫째, 소속도 목적도 밝히지 않은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 난 대가 없이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병 길드에 가서 정식으로 의뢰를 넣으십시오. 그럼 이만.” ...
“세, 세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
문을 반쯤 닫았던 아르펠이 행동을 멈췄다. 의외의 이름이 들려왔다. ...
“세이드?” ...
“예… 그리고, 소속을 먼저 말씀드리지 않은 점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잊었습니다. 에스 백작 부인께서 아르펠 경께 의뢰를 청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 제 이름은 루이고요.” ...
영주 성. 백작 부인. 그리고 세이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달려온 기사. ...
아르펠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육장의 주인은 생각보다 입이 싼 놈이었다. ...
영주 성에서 왔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세이드가 전해주었던 소문 속 검은 반점이 몸을 뒤덮은 영애에 대한 일로 찾아온 것 같았다. 무릎까지 꿇어가며 부탁하는 것이 그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
“…일단 들어오십시오.” ...
결국 아르펠은 자신을 루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그는 아르펠이 대충으로나마 생각해 두었던 앞으로의 계획을 망쳤고, 로한과 단둘이서 보내던 평화로운 시간을 침범했다. ...
그 사실만으로도 당장 이곳에서 꺼지라며 발로 뻥 차고 문을 닫아 버리고 싶었으나, 품에 안겨 눈을 깜빡거리는 로한이 신경 쓰였다. 다 큰 성인 남자를, 거기다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는 이를 매정하게 무시한다면 아이의 정서 교육에 상당히 안 좋을 것 같았다. ...
반기는 손님은 아니었기에 마실 걸 내오지도 않았다.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사실은 인지하는지 상당히 죄책감이 어린 낯을 하던 루이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희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는 아십니까?” ...
“세이드가 말하더군요.” ...
“하, 그 자식…….” ...
루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기세가 심상치 않은 걸 보면 멋대로 이야기를 퍼뜨린 세이드에게 화가 났나 보다. 아르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새를 못 참고 의뢰 내용을 영주 성에 고해바친 놈이니 알아서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
“…일단 그 소문은 사실입니다. 아르펠 경께는 아가씨의 상태 진단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치료도 아닌 진단. 아르펠의 미간이 묘하게 구겨졌다. ...
“백작님께서 용한 신관이라며 얼마 전 한 남자를 데려왔습니다. 아가씨의 치료를 그놈에게 맡겼지요. 그러자 그 신관은 아가씨를 별관의 외딴 방에 가둬 버렸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작 부인께서 항의하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
“…….” ...
“신관의 처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려면 다른 신관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백작님이 계속 반대하시는 바람에…. 그러다가 부인께서 세이드의 의뢰 내용에 관한 소문을 들으셨습니다. 증상이 유사한 동물이 있었다고요. 의뢰를 해결하신 아르펠 경이라면 해답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 ...
신관이라. 말없이 듣던 아르펠은 금방 상황을 판단했다. 신관은 사기꾼일 것이고, 아르펠이 돕는다면 이 기사가 말하는 아가씨는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
신관을 부르려면 신전에 정식으로 방문을 요청해야 했다. 백작이 새로운 신관이 오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으니, 그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입김이 반드시 들어갈 테니까. ...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
아르펠의 시선이 로한에게 향했다. 나름 심각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건지 기사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뒤늦게 시선을 느끼곤 눈을 마주쳐 왔다. ...
예쁜 눈이 자신을 보자마자 곱게 휘어지는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이 아니더라도 신전에서 활동하게 되면 남을 돕기 위해 나서야할 것이다. 망령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아르펠밖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이 기사의 상황처럼, 언젠가 로한이 불가피하게 맡아야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
자식은 부모의 거울. 이전의 세계에서 하나의 섭리처럼 자리 잡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정말 부모-자식의 관계는 아니었으나 로한이 보고 배울 주변의 어른은 아르펠밖에 없었다. ...
그리고 아르펠은 자신이 비정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로한만이 예외일 뿐이다. ...
자신의 행동을 보고 자라 그대로 따라 하며,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로한을 상상하니 조금 괴로워졌다. 아이가 이런 모습으로 자라지 않기를 바랐다. ...
육아는 힘들구나. ...
아르펠에게 이번 백작가의 일은 굳이 무게를 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로한의 성장을 위해 한 선택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눈곱만큼도 모를 루이는 땅에 머리를 박을 듯 절을 하며 “감사합니다!”를 복창하기 바빴다. ...
루이는 내일 낮에 저택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 말했다. 빠르게 일을 끝내려고 했던 아르펠이 이유를 묻자 그가 곤란해 하며 대답했다. ...
“아가씨께서 쓰러지고 난 후, 영주 성은 사실상 폐쇄되었습니다. 생필품을 납품하는 상인들이 아니라면 함부로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르펠 경은 외부 사람이니, 경비병들이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겁니다.” ...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다음날 영주 성에 식자재를 납품하러 오는 상인들의 행렬에 숨어들어 성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
아르펠이 거절할까 두려운 듯 내내 입술을 깨물며 초조한 태도를 보이던 루이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르펠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눈에 띄게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한 루이는 아르펠에 의해 곧장 방에서 쫓겨났다. 거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꽉 차 보였던 방이 다시 여유로워졌다. ...
“저 사람은 기사예요?” ...
“그래.” ...
루이가 나간 자리를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보고 있던 아르펠이 곧장 고개를 돌렸다. 로한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이미 부드럽게 풀어진 상태였다. ...
아이는 루이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
“있죠, 아르펠.” ...
“응.” ...
“저도 저만큼 클 수 있을까요?” ...
조금 전 등을 돌리고 나가던 기사를 떠올렸다. 기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유독 거구의 사내였다. 다시금 아이를 내려다본 아르펠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
“역시 안 될까요…….” ...
“…아냐. 그만큼 클 거야.” ...
로한은 아직 아르펠에게 마냥 작고 귀여운 아이에 불과했다. 크기 차이로 인해 완전히 마주 잡지도 못하고 두 손가락 정도만 꼬옥 쥐는 작은 손과 조막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가 기사만큼 자랐을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
하지만 그가 얼마만큼 자라든, 로한은 언제나 아르펠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신경 쓰이고, 눈길이 가고, 소중하게 아껴 줘야 할 사람일 것이다. ...
“나중에 크면, 내가 꼭 아르펠을 지켜 줄래요.” ...
클 거라는 단 한 마디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로한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주 잠깐 멈칫했던 아르펠이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 좋은 울림이다. ...
배시시 웃으며 손길을 받던 아이가 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짤막한 새끼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
“약속할까요?” ...
“고마워.” ...
조심스럽게 그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감았다.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해 준 약속이었다. ...
***
기사는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기에 아르펠은 남은 시간을 모조리 로한과 보낼 수 있었다. 미리 정해 두었던 대로 점심은 바깥에 나가서 먹었고, 그 후에는 바깥에 늘어선 장을 구경했다. ...
이동이 아닌 구경을 목적으로 돌아다녀 본 바깥은 낯설었다. 왁자지껄하게 소리치며 무언가를 사고파는 사람들의 모습은 영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
복작복작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아르펠은 주변을 구경하기보단 로한을 놓치지 않게 조심했다. 다행히 아이는 이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가판대에서 파는 이런저런 물건에 관심을 가졌다. ...
즐거워 보이는 로한을 위해 아르펠은 길가에서 파는 달콤한 사탕이나 꼬치 등 각종 주전부리를 사다가 로한의 손에 쥐여 주었다. ...
물론 그중의 반은 아르펠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로한이 한 입을 먹고 다른 한 입을 아르펠에게 건네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
먹지 않으면 울상을 지을 것이라는 걸 그동안 함께한 시간으로 인해 충분히 익혔던 아르펠은 군말 없이 아이가 건네는 음식들을 먹었다. ...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드는 건 반기는 일은 아니었지만, 로한과 함께하니 나쁘지 않았다.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얼굴을 구경하면 되니까. ...
제법 알찬 시간이었다. 신전에 바삐 갈 생각만 했던 아르펠도 간혹 이렇게 휴식을 가지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
다음 날, 루이는 그가 예고한 대로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둘이 묵고 있는 방에 찾아왔다.
第二天,正如他所预料的那样,午饭时间过后,Louie 来到了他们住的房间。
“아이와 함께 가실 겁니까?” ...
“예.” ...
“그렇다면 이 로브를 빌려드리겠습니다.” ...
아르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품이 넓은 로브였다. 작은 체구의 아이 정도라면 안에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
상인들의 행렬에 어린아이가 섞여 있으면 괜히 시선을 끌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쁘지 않은 오지랖이었기에 아르펠은 순순히 그것을 건네받았다. 로브를 겉에 두르고 멀뚱히 서 있던 로한을 들어 안았다. ...
“안 불편해?” ...
“괜찮아요.” ...
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로한은 익숙하게 아르펠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여러 번 반복했더니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습관 중 하나였다. ...
손을 들어 등허리를 토닥인 아르펠이 앞서 나가는 루이를 따라 영주 성의 바깥 길을 걸었다. 식자재를 납품한다는 상인들은 앞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멀리에 행렬이 보였다. ...
“로한. 네가 크면 이런 일을 많이 하게 될 거야.” ...
“…제가요?” ...
“그래. 넌 축복을 받았으니까.” ...
“아르펠도 같이요?” ...
싫다, 아니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괜찮은 것 같다. ...
그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던 아르펠은 예상치 못한 답에 로한을 응시했다. 마주 보는 금색의 눈이 선명했다. ...
“……그래. 그때가 되면 난 네 검이 될 테니.” ...
혼란스러운 감정을 배반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 말에 밝게 미소를 짓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아르펠은 잠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
13
머릿속에 훗날 그와 함께 다닐 미래가 떠올랐다. 매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가 된다면 간혹 검이 된 채로 그와 함께하는 나날들이 있겠지. 조금은 벅찬 기분도 들었다. ...
만약 신전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가 로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닥칠 미래는 두 가지였다. ...
소설 속에 서술된 대로 신전에 의해 봉인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망령의 힘을 가졌음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아이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곁에 남거나. ...
후자는 확률이 아주 낮을 것이다. 아르펠도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로한과 헤어져 혼자서 떠도는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
“다 왔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들어가시면 됩니다.”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가던 생각이 뚝 끊겼다. 조금 전까지 멀리서 인영들만 간신히 보였던 상인들이 코앞에 있었다. ...
“저는 안쪽에 들어가 미리 대기하겠습니다. 성의 안쪽에 들어가시면 여기, 이 친구를 따라서 와 주세요. 그가 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줄 겁니다.” ...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아르펠과 시선을 마주하자 흠칫했다. 빤히 응시하자 마주 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색감의 변화가 시선을 끌었다. ...
“…로한?” ...
그리고 아르펠을 껴안고 있던 로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로브를 살짝 들추며 이름을 부르자 부루퉁한 얼굴을 한 로한이 보였다. ...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
대답은 없었지만 뾰로통한 표정이 로한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몇 번 등을 토닥여 주고 나서야 구겨진 미간이 펴졌다. ...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루이는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로한이 머리를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그의 목덜미를 손으로 한 번 쓸어준 아르펠이 맞은편의 소년을 향해 눈짓했다. ...
두 사람의 준비가 마무리 되고 나서야 상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불평불만이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은 백작 부인이 부른 사람일 것이다. 아르펠은 일행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대충 수레를 미는 척했다. ...
뒷문에도 성을 지키는 경비병은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상인의 얼굴을 흘끗 본 경비병은 태연하게 일행을 통과시켜 주었다. 몇 번 거래를 한 적이 있는 상단 같았다. ...
“이제 절 따라오시면 돼요.” ...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곁에 붙어 있던 소년이 옆에서 속삭였다. ...
시선이 떨어진 틈을 타 아르펠은 소년을 따라 상단 무리에서 벗어났다. 잘 관리된 잔디를 밟고 정원의 뒷길을 지났다.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화사하게 핀 꽃들이 보였다. 날씨가 서늘한 편이기는 했으나 동식물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할 만한 날씨는 아니다. ...
얼굴을 파묻고 있는 로한을 톡톡 건드리니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
“꽃이 피었어.” ...
“……와아.” ...
로브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로한이 눈을 반짝였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원은 아니었다. 가꾸는 사람이 상당히 정성을 들였음이 티가 나는 곳이다. ...
“여기예요.” ...
소년이 소개해 준 곳은 자그마한 뒷문이었다. 안쪽이 주방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면 사용인들이 애용하는 뒷길인 듯했다. ...
꽤 고급스러운 외견을 자랑하던 영주 성과 비슷하게, 사용인들이 주로 머무는 공간을 벗어나자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는 복도가 보였다. ...
내내 시골 마을에서 자랐고, 멀리까지 나간 것이라고 해 봤자 뒤늦게 아르펠과 돌아다닌 마을이 전부였던 로한은 이 광경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이 다 느껴졌다. ...
인적이 드문 복도를 걷자 얼마 가지 않아 루이가 보였다. 복도의 한 편에 기대어 서 있던 그는 초조한 낯을 하고 있다가 아르펠이 보이자마자 화색을 띠었다.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갑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봐도 별로였다. 아르펠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렸다. ...
잠시 헛기침하며 벌렸던 팔을 내린 루이가 옆의 소년에게 눈짓했다. ...
여태껏 길을 안내해 주던 소년이 사라지고, 그를 대신해 루이가 곧장 둘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미리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도록 조치한 건지 가는 길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
“마님, 아르펠 경을 모셔 왔습니다.” ...
“들어오렴.”
“进来。”
닫혀 있는 문에 노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화려한 옷을 입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문이 열리고 나타난 여성은 단아한 차림새였다. ...
“갑작스러운 요청이 결례인 줄 알면서도, 사정이 급했던지라 루이를 보냈습니다. 베티아 에스입니다.” ...
“…아르펠입니다. 말씀은 낮추십시오.” ...
“딸아이의 목숨을 구해 줄지도 모르는 분인데 제가 어찌 함부로 대하겠나요.” ...
묘한 눈으로 백작 부인을 바라보던 아르펠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내 로한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들춘 뒤 옆자리에 아이를 앉혀 주었다. ...
“어머, 귀여운 아이군요.” ...
“…안녕하세요.” ...
입을 앙다물고 있는 로한은 상당히 경계의 눈길을 보내긴 했으나 인사를 잊지는 않았다. 경계하는 눈초리마저 귀엽게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
루이의 이야기를 듣고 의뢰를 받겠다며 성까지 찾아오긴 했으나, 아르펠은 백작 부인이 신분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행동한다면 당장 자리를 뜰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막아선다면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두를 테지. ...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빤히 바라보기는 했으나, 그건 상대를 평가한다기보단 탐색하는 눈에 가까웠다. ...
로한이 귀엽다고 칭찬하는 목소리에 마음속 평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
“루이 경이 전반적인 이야기는 전해 드렸나요?” ...
“따님과 신관에 대한 이야기라면 들었습니다.” ...
“맞아요. 후… 그 신관에게 단단히 홀렸는지 애지중지하던 딸까지 감금해 버렸다니까요, 그 망할 놈!” ...
옆에 서 있던 루이가 움찔했다. 적나라한 '망할 놈'이라는 표현에 놀란 모양이다. ...
백작 부인에게서는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증오와 미움의 감정이 선명히 묻어 나오기는 했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애정이 남아 있었다. ...
이건 '애증'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说这是“爱与恨”是正确的。
“남편분이 괜찮은 사람이었나 보군요.” ...
“…맞아요. 가정에 헌신적이었고, 영주민들을 잘 돌봤죠. 정략결혼을 했지만 난 그 사람과 결혼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
백작 부인은 잠시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긴 고뇌의 흔적이 엿보였다. ...
“이젠 다 쓸모없어졌지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딸아이가 회복한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이혼할 거예요. 사기꾼한테 휘둘려 딸을 버리다니.” ...
아르펠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고민은 짧았다. 의뢰를 받기로 이미 결정했으니, 치를 값어치만큼 상대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것은 당연했다. ...
연민과 동정의 감정 따위는 없었다. 로한이 아니고서야, 아르펠은 본인이 타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까지 깔끔하게 의뢰의 연장선으로 치부한 아르펠이 입을 열었다. ...
“제가 이번 일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은폐하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
“좋아요. 딸만 살릴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다, 그 행동을 따라 한 로한이 떫은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발견했다. 탁자 위에 따로 놓인 각설탕을 작은 집게로 잡아 따뜻한 찻물 안에 두어 개를 떨어뜨려 주었다. 시선은 철저하게 로한에게 향하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이 일은 망령과 관련이 있습니다.” ...
“……마, 망령. 망령이라고 했나요, 지금?” ...
내내 침착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
일반인들에게 망령은 재앙이다. 그건 저 백작 부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
“제가 받은 의뢰는 동물들을 습격하는 짐승을 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짐승은 분명 망령의 힘을 썼습니다.” ...
“그런… 그런 건 말이 안 돼요. 그럼 그 짐승을 어떻게 죽였다는 건가요?” ...
군말하지 않고 마력을 끌어올려 손에 맺히게 했다. 신관은 아니었지만 마력을 다룰 수 있으면 신관이라 생각할 테니. 역시나 입을 달싹거리며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던 백작 부인이 통한의 한숨을 토했다. ...
“신관… 신관이었군요. 그래서.” ...
“예. 따님에게 나타난 검은 반점은 망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원인은 피를 묻히며 죽은 그 하녀고.” ...
“…정말. 정말 낫게 해 줄 수 있는 거 맞죠?” ...
“네.” ...
백작 부인은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내 방을 지키고 있던 루이가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를 보였을 정도로. ...
그녀는 딸을 많이 아끼고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과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
“신관은 사기꾼입니다. 혼자서 망령의 힘을 벗겨내는 것은 힘들지만 서넛이 함께 한다면 1시간 이내에 망령의 힘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
“그런…!” ...
고개를 팩 들은 그녀의 얼굴에 선명한 분노가 묻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기를 친 놈을 갈아 마셔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
“그리고 남편분은 정신적인 공작에 당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
“그게 무슨!” ...
이번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아까까지 보였던 애증의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이번에는 걱정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묘하게 안심한 것 같기도 했다. 백작 부인은 여전히 백작을 사랑하고 있었다. ...
“그, 썩을!” ...
“마님!” ...
“……후.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
흘끗 로한을 한 번 바라보고 아이가 놀라지 않았음을 확인한 아르펠은 고개를 저었다. 애가 놀라지 않았다면 상관없다. ...
“대체 뭐 하는 놈이죠?” ...
“망령을 신의 뜻이라고 하는 사이비 교단 놈들이 있습니다.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마 이런 일은 다시는 없을 테니.” ...
“……그래요. 그이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은 있는 거죠?” ...
“예.” ...
그제야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한 것인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백작 부인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 주었다. 크게 두 가지였다. 망령의 힘에 오염된 딸을 치료하는 것과 일반인에게 세뇌를 감행한 신관을 처리하는 것. ...
아르펠은 그 신관을 먼저 죽일 셈이었다. 시전자를 죽이지 않고 세뇌를 푸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고 귀찮았다. ...
14
아르펠은 글로 읽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
마검 '아르펠'을 망령의 힘으로 오염시키는 돼먹지도 않은 일을 한 것이 그 사이비 놈들이었다. 자신들을 '구원교'라고 부르는 멍청한 것들. ...
딱히 복수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망령의 힘에 휘둘리지도 않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해 봤자 주변에 있는 망령의 힘을 잘 느낀다는 것과, 원한다면 그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정도였으니까. ...
그런데도 죽여 버리겠다는 결정을 한 것은 오로지 로한 때문이었다. 의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된 이상, 앞으로 로한의 앞길을 여러 번 막을 기생충 같은 사이비 교단 놈들은 한 놈이라도 빨리 죽여 버리는 게 나았다. ...
얼굴도 모르는 신관 놈을 떠올린 아르펠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
“로한.” ...
“싫어요.” ...
여기서 기다리라고 할 셈으로 말을 걸었으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의 답을 들었다. 아이가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한 것은 처음이라 아르펠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
“저 버리고 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
“아니. 버리는 게 아니라.” ...
“저한텐 버리는 거예요.” ...
아르펠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
로한을 함께 데려가도 아르펠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무언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나,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아르펠도 마찬가지였다. ...
그럼에도 로한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 한 것은, 지금 하러 가는 일이 절대로 깨끗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
물론 언젠가는 로한도 해야 할 일이었다. 구원교의 사상이 깊게 박힌 이들은 말로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셀 수 없이 신관들을 죽이고자 했고, 막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나왔다. ...
로한은 마신의 축복을 받았으니 언젠가는 신전과 구원교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설 테고, 또 망설임 없이 악한 이들을 죽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
다 알고 있었지만, 그저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사람의 죽음'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
하지만 시선을 마주해 오는 단단한 눈을 보니 그것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
“아르펠이 그랬잖아요. 언젠간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
“……로한.” ...
“그리고 저도 알아요. 마을을 불태운 게 그 사람들이죠?” ...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누군가가 로한을 목적으로 마을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직접 해 준 적 없지만 상황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 인과관계를 눈치챘던 그때와 비슷했다. ...
당연하게도 아르펠은 부정하지 못했다. ...
“그러니까 갈래요.” ...
잠시간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내내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백작 부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방긋 웃는 낯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는 이만 그이를 만나러 가겠어요. 혹시 모르니 시간을 끌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죠.” ...
문가에 서 있던 루이마저 대동하고 문밖으로 나가자, 이제 접견실에는 아르펠과 로한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르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로한. 난 그 사람을 죽일 거야.” ...
아이에게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던 진실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떼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 번은 흠칫거릴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로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
“상관없어요.” ...
“왜?” ...
“언젠가는 제가 죽였을 테니까.” ...
…맞는 말이다. 소설 속 로한은 신전에 도착한 후 가지고 있던 마검을 봉인한다. 그리고 성녀를 만나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그마저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것이 '구원교'라는 종교 집단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교단을 증오하게 된 로한은 그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을 벌였다. ...
망령에게서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신관의 의무보다는 복수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일까. 그건 말 그대로 잔인한 도륙이었으며,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 행동을 극단적이라고 비판하는 신관들도 몇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
‘죽음’이라는 수단만을 이용해 복수를 이루려 했던 행동이 망가진 인간성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타락하지도 않았고, 그저 살피고 챙겨주기만 한 지금이라면 아예 다른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말의 망설임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넘겨짚었다. ...
하지만 마주하는 시선에는 한 자락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타락한 마검을 쥐는 것과는 별개로, 어쩌면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잃었던 그 날 이 아이의 마음 어딘가는 망가져 버렸다고. ...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르펠에게도, 먼 훗날의 로한에게도 통용되지 않을 이야기였다. 검 끝이 향하는 대상이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 그것이 잊어서는 안 되는 유일한 기준이었으니까. ...
어린아이치고 강직한 눈매는 그가 많은 시간을 고민해 왔음을 보이고 있었다. 로한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강제로 번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그저 아이가 선을 넘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하는 것. 아르펠이 할 일은 그것 외엔 없었다. 결국 아르펠은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
“절 걱정해 준 거죠?” ...
원하는 대답을 들은 로한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응, 짧게 대답해 주며 아이의 몸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어린아이 특유의 따끈한 체온이 몸에 닿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산뜻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
정상적인 어른이었다면 허락해 줬을까? 죽이는 것으로 복수하고 싶다고, 그러니 함께 가게 해달라고 하는 말에도 '그래도 넌 어리니 안 돼'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떼어 놓고 갔을지도 모른다. ...
아르펠은 '일반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었던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어른이라면 사람을 죽여서도, 사람을 죽이러 가는 상황에 어린아이를 데려가서도 안 된다. ...
하지만 아르펠은 로한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보면 가지고 있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아르펠에게 중요한 것은 '로한의 행복'이었으므로. ...
완전히 삐뚤어지지 않는 선에서 로한이 행복하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죽을 만큼 악독한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기준점을 세우기는 했으나, 만약 로한이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아르펠은 기꺼이 그 사람을 죽일 것이다. 로한을 아끼는 마음보다야 얄팍한 기준이었다. ...
“같이 가자.” ...
이 지경이 되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이런 어른이라서 미안해. 미처 말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
죄책감이든, 함께하는 시간 동안 쌓인 소중함이든, 마검으로서 축복받은 자에게 끌리는 운명이든 아르펠은 로한을 놓지 못한다. 그게 명백한 진실이었다. ...
***
약간의 고민 끝에 아르펠은 본인을 신관이라고 사칭하는 사이비 교단의 사기꾼을 만난다면 피가 튀는 일 없이, 최대한 깔끔히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
그 남자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쉽게 만날 방법은 알고 있다. 백작가의 금지옥엽을 별관에 가둬 두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니, 아마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금방 모습을 비출 테다.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고 이런 모습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
동떨어진 별관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사기꾼의 지시에는 기사마저 포함되어 있었던 건지 별관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휑했다. ...
그런 곳에서 남자는 갑자기 튀어나왔다. 이미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던 아르펠은 그저 로한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
하얀색 천으로 된 기다란 옷을 입은 남자는 누가 봐도 자신이 신관임을 피력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남자의 얼굴이 환한 미소를 짓다 못해 황홀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소름이 돋는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
“정말,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황홀한 향이라니……!” ...
구겨진 아르펠의 미간은 보이지도 않는지 남자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다가 대뜸 무릎까지 꿇어 버렸다. ...
“열심히 일해도 일평생 간부님을 뵈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데, 저를 직접 찾아와주시다니. 저 비욜, 제 인생 이렇게 운이 좋은 날은 처음입니다. 아아, 간부님, 부디 손을 한 번만….” ...
생긴 건 멀쩡했으나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붉히며 손을 달라 청하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정신이 나간 놈인 것 같았다.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내내 로브 안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로한이 고개를 팩 내밀어 다가오는 손을 꽉 깨물어 버렸다. ...
“아악!” ...
깨무는 힘에 손속을 두지 않았는지 너덜거리는 남자의 손에 금세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날카로운 시선이 금세 로한에게 쏟아졌다. ...
“망할, 마신의 종자 놈이! 어디서 더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
“그만.” ...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로한을 공격할 것 같던 남자는 아르펠의 한 마디에 고개를 숙이며 멈췄다. 잘게 떨리는 손을 보면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참고 있으니, 봐줄 만한 충성심이었다. ...
처음에는 그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펠도 남자의 태도를 관찰하며 그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깨달았다. ...
구원교는 망령의 힘을 신격화하고 악신을 숭상하는 종교 집단이지만, 정작 내부에 망령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구원교의 시초인 ‘간부’들밖에 없다. 다만 일반 신도들도 집단 내에서 망령에 대한 교육을 받으니 망령의 힘을 구분할 수 있는 ‘눈’ 정도는 있었다. ...
남자는 그 ‘눈’으로 아르펠의 몸 안에 있는 망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를 간부라 착각한 것이다. ...
원래라면 만나자마자 단칼에 베어 죽여 버릴 생각이었던 아르펠은 계획을 수정했다. 알아서 착각해 정보를 나불거리고 있으니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뜯어내고 죽여야겠다. ...
“후… 죄송합니다. 간부님의 소중한 실험체에 해를 입힐 뻔했군요.” ...
마신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로한은 그저 실험체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펠은 로한의 입가에 로브를 대주었다. 꽉 깨물면서 어쩔 수 없이 입안으로 들어간 더러운 놈의 피를 뱉으라는 의미였다. ...
우물쭈물하던 로한이 결국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착해라. ...
15
“경과는.” ...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
피가 흐르는 손을 감춘 남자가 먼저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애의 발병 전에도 별관은 방치된 건물이었는지 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의 모습은 본관과는 정반대였다. ...
바닥에 쌓인 먼지로 걸을 때마다 발치에 뿌연 먼지바람이 일었고, 오랜 시간 닦지 않아 뿌예진 창문으로는 바깥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
“실험을 위해 붙잡은 여자가 영주 성의 하녀였을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랜만에 힘을 주입받고도 죽지 않은 실험체라 경과를 살펴보려 돌려보냈습니다만… 영주 성에서 일하더군요. 뒤늦게 죽는 바람에 아쉬웠지만.” ...
“실험 장소는 어디지.” ...
“아, 그곳까지 둘러보려 하시는 거군요. 영주 성에서 남쪽으로 이틀쯤 마차를 타고 가면 울창한 숲을 끼고 있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마을 너머 숲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면 새 부리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끝부분을 세 번 만지면 길이 열립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제가 곧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남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의뢰가 끝나고 당장 갈 생각은 절대 없었다. 로한이 신전에 갔을 때 이 사실을 알리면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그 외에 또 있나.” ...
“하하, 제가 이래 봬도 신입이라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제가 일하던 곳 외에는 딱히 아는 곳이 없습니다. 아, 이 근처입니다. 힘을 견디느라 몸에 검은 반점이 나긴 했습니다만, 오히려 그 하녀보다 좋은 실험체더군요.” ...
죽은 척 위장해 몰래 빼돌리면 더 괜찮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그 사실을 남자는 아주 태연하게 설명했다. 마치 물건을 파는 상인들같이 가벼운 입담이었다. 파는 물건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
이 일을 벌인 지부는 찾았고, 더 아는 정보는 없다. 가만히 셈해 보던 아르펠은 길을 안내해 주는 남자가 더 이상의 가치가 없다고 결론짓고 제자리에서 멈췄다. ...
“간부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아르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아르펠에게 이유를 묻는 일은 없었다. 발밑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몸을 불려 남자를 한입에 삼켰기 때문이다. ...
비욜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단의 사기꾼은 그렇게 단말마도 내뱉지 못하고 사라졌다. ...
“…죽은 거예요?” ...
“그래.” ...
“그렇구나….” ...
따라가고 싶다고는 했으나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니 나름 긴장한 것 같았다. 묘한 표정을 짓는 로한을 내려다본 아르펠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나중에 네가 죽일 일이 있더라도 손에 피는 묻히지 마.” ...
“왜요?” ...
“손이 더러워지니까.” ...
작고 뽀얀 손이 한 움큼 잡혔다. 이 깨끗하고 예쁜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힐 수는 없지 않은가. ...
언젠가 검을 잡으면 이 손에 딱딱한 굳은살이 배길 텐데. 어쩌면 이렇게 어릴 때만 만끽할 수 있는 촉감이라 생각하니 계속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빤히 잡혀 있는 손을 바라보던 로한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
신관은 처리했으니 이제 안쪽에 있는 이 집의 따님을 보러 갈 차례였다. 죽기 전 위치를 미리 알려 주었던 신관 덕에 그녀가 있는 방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느낀 건 꿉꿉한 공기였다. 갇혀 있는 내내 환기 한 번 해 주지 않은 건지 냄새도 심했다. 안쪽에 놓인 침대에서 끙끙거리는 앓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로한. 잠시만 여기 있어.” ...
먼지를 턴 소파 위에 로한을 앉혀 두고는 일단 방 안의 불을 켜고 커튼을 걷어 모든 창을 열었다. 바람이 솔솔 들어오고 햇볕도 함께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니 공기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본 것은 피골이 상접해 있는 여인이었다. 환기도 해 주지 않은 이가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줄 리가 없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악몽 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 병마와 고생이 적나라한 모습에도 아르펠의 얼굴에는 동요 한 점 없었다. ...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버린 아르펠은 곧장 반점이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 시간이 꽤 지난 바람에 왼쪽 반신에서 전반적으로 망령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가장 짙은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반점은 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마 죽은 하녀가 토한 검은 피를 맞은 부분이겠지. ...
손을 얹고 피부 내에 녹아든 망령의 힘을 느꼈다. 닿은 손끝을 통해 힘을 빨아들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자 머지않아 감응한 힘이 손을 타고 흡수되었다. ...
남은 기운이 한 톨도 없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완전히 뗐다. 여자는 전에 비해 확실히 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
“로한. 나가자.” ...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로한은 아르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곧장 그에게 달려왔다. 아르펠은 아이의 옷자락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익숙하게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
그가 향한 곳은 문이 아닌 창가였다. 살짝 고개를 내밀어 바깥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지 확인한 아르펠이 아이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
“혀 깨물지 말고.” ...
“네? 윽!” ...
가볍게 창틀을 밟은 몸이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놀란 것 같은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들어오기 전 봐 두었던 숲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거예요?” ...
“도망친 걸로 위장하려고.” ...
딱히 죽인 걸 함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과정이 더 복잡해질 거다. 도망친 것으로 처리하는 게 나았다. ...
옆쪽으로 뻗어 나간 그림자가 술렁이더니 하얀 로브를 퉤 뱉어냈다. 아까 전 죽은 자칭 신관이 입고 있던 로브였다. 흐릿한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수풀 안쪽에 던졌다. 상처를 입고 도망갔다고 하면 납득할 것이다. ...
백작 부인에게는 따로 알아서 처리했으니 관심 갖지 말라고 이야기해 놓을 셈이었다. 명목상 조사는 진행하겠지만, 미결인 채로 남게 되겠지. 망령이란 원래 미지의 존재이니만큼, 그들에게는 파고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
남긴 흔적들을 대충 살핀 아르펠은 고개를 들었다. 위쪽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
“…풀렸나 보군.” ...
어렴풋이 남자의 목소리도 섞여 들리고 있었다. 신관을 죽인 직후 이성적인 생각을 가로막던 암시가 풀렸을 테니 급하게 별관으로 달려올 만도 했다. ...
로한을 데리고 별관의 안쪽으로 들어서 조금 전 걸었던 복도를 다시 되짚어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소란이 커지고 있었다. ...
“리사! 정신이 드느냐!” ...
“리사, 눈 좀 떠 보렴…!” ...
“아… 아빠?” ...
방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급하게 따라와 둘을 지키고 있던 루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가족 상봉의 모습을 응시하며, 아르펠은 흘끗 로한을 내려다보았다. ...
아이는 가만히 셋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몹쓸 놈에게 걸려 딸을 방치하기는 했으나 그놈이 죽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이곳으로 달려올 만큼 백작은 가족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백작 부인도 그런 남편을 좋아했으니, 아마 저들은 꽤 이상적인 가족일 것이다. ...
아르펠은 로한이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가족은 행복했을까. 그들의 죽음에 몹시 슬퍼했으니, 부유하지는 않아도 하루하루가 행복한 단란한 가정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
그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로한이 슬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죄어드는 듯했다. 그래서 말없이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전 괜찮아요.” ...
“그래.” ...
“정말이에요. 정말….” ...
정말 괜찮은데……. ...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손을 잡고 서 있던 로한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거절의 의사 없이 품속에 냉큼 안긴 로한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
“……그치만.” ...
“가족의 기억이 나서 슬플 때면 항상 내가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울어도 돼. 목 뒤를 가볍게 쓸어 주자 훌쩍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르펠의 목을 꽉 끌어안은 로한이 물기가 스며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르펠이, 내 가족 해 주면 안 돼요?” ...
“그래. 해 줄게.” ...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답을 들은 로한이 팩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어 더욱 반짝거리는 것만 같은 금안이 휘어지며 곡선을 그렸다. 안타깝게도 울음의 기색이 남아 있어 일그러진, 어딘가 어색한 미소였지만. ...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서 뿔나.” ...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 보는데요…….” ...
“여긴 없군.” ...
언뜻 들어봤던 이야기를 해 줬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인 듯했다. 작게 웃은 아이가 속삭였다. ...
“그래도 괜찮아요. 아르펠이 가족이 되어 준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괜찮아요.” ...
기쁜 기색이 만연한 목소리를 듣는 아르펠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전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웃음이었다. ...
***
저택의 주치의까지 달려와 영양실조와 기력 부족이 심하니 당분간 몸조리를 잘하라는 진단을 내리고 나서야 백작 부부는 숨을 돌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부인이었고, 여전히 미안하다며 딸에게 매달려 사과하는 백작의 등을 손으로 내려쳤다. ...
어쨌든 아르펠은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
“정말… 뭐라고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경은 우리 가문의 은인이오.” ...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몇 마디 말이 더 이어졌지만 내용이 달랐을 뿐이지 결국 다 고맙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상당히 지루한 반복이었으나 아르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흘려 넘기기를 반복했다. ...
“당신도 참, 이제 그만 하세요. 바쁜 분일 텐데.” ...
“아… 그렇지. 미안하오. 정신이 너무 없어서.” ...
“아닙니다.” ...
그가 진정한 낌새를 보이자 이번에는 백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
“혹시 그 사기꾼 놈은….” ...
“상처를 입혔으나 도망쳤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아르펠이 백작 부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마주 봤다. 동요 하나 없이 담담한 보라색의 눈에 부인이 침음을 흘렸다.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들었던 깊게 파고들지 말라는 경고를 떠올린 탓이었다. ...
“…그래요. 간단한 조사는 해 봐야겠군요. 정말로 고마워요.” ...
잠시 창백하게 질려 있던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 두었으니 굳이 놈의 생사에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
16
이야기를 빠르게 끝내고 싶어 하는 아르펠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두 사람은 곧바로 의뢰금 이야기로 넘어갔다. 당장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라며 금액이 쓰인 수표를 받았다. ...
“괜찮군요.” ...
용병 길드에서는 웬만해선 볼 일이 없는 거금이었다. 이 정도면 두세 번의 의뢰를 더 하는 것만으로도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아주 풍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리고…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것도 드리고 싶어요.” ...
“이건?” ...
“원래는 딸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아티팩트입니다. 딸의 목숨값으로는 부족하겠지만 부디 받아 주십시오.” ...
아르펠은 백작이 건네는 팔찌형 아티팩트를 받아 들었다.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어서 그간은 볼 일이 없었다. ...
아티팩트는 신관에서 주관해 만드는 것으로, 성력이나 마력을 장신구에 깃들게 해 착용한 이를 보호해 주는 물건이었다. 만들기가 어려워 1년에 몇 개 풀리지도 않으니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살 만한 사람이라고 해 봤자 귀족 외에는 없을 것이다. ...
흘끗 로한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헐렁하긴 하겠지만 팔찌가 풀리진 않을 거다. ...
“감사히 받겠습니다.” ...
갑작스레 들이닥쳤던 것에 비해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은 의뢰였다. ...
그 뒤로 부부는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했으나 아르펠은 딱 잘라 거절했다. 로한에게 괜찮냐고 속삭여 묻자 그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선명하게 묻어나왔던 탓이다. ...
귀족들이 먹는 음식을 접해 볼 기회가 얼마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이 고급스럽고 맛있어도 분위기가 불편하면 체하기 십상이다. ...
‘정말로 거절을 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굳이 더 묻지 않고 저택을 나왔다. 상대는 상당히 아쉬워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아르펠에게는 로한의 기분이 더 중요했다. ...
“어때. 안 불편해?” ...
“네에, 괜찮아요.” ...
아르펠은 저택을 나오자마자 로한의 손목에 아티팩트를 감아 주었다. 끝을 매듭 형식으로 묶는 독특한 스타일의 팔찌였기에, 백작가 영애의 손목 둘레에 맞춰 제작되었음에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할 수 있었다. ...
보석이 여러 개 박혀 있었기에 장신구라는 느낌이 확 들긴 했지만, 마냥 예쁘기만 했다. ...
“여기, 아르펠 눈 색이랑 똑같은 보석 있어요!” ...
“그렇네.” ...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로한이 신난 낯을 하며 조잘거렸다. 짧고 귀여운 손가락이 팔찌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보라색의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색이 너무 예쁘다며 마음에 들어 하는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갈까.” ...
“옆 마을이 아니라요?” ...
“응. 한 3일쯤 걸리는 곳.” ...
“아르펠이랑 같이 가는 거면 전 다 좋아요.” ...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조막만 한 목소리로 웅얼대는 것에 아르펠은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아이의 몸을 껴안았다. ...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목을 감아 안는 행동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
‘조금만… 더 늦게 컸으면 좋겠다.’ ...
아이가 크면 이렇게 꼭 안아 주기는 힘들 테니까. 그때가 오면 친근하게 닿아오는 아이의 체온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
부디 너와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길. ...
***
영주 성이 있는 마을을 벗어나 꽤 멀리 떨어진 곳에 가기로 한 계획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이행되었다. ...
살짝 잠 기운이 남아 있는 듯한 로한을 안아 들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로한을 데리고 뛰어갈 수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아르펠이더라도 3일씩이나 쉬지 않고 달려가는 일은 번거로웠다. ...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
“하하, 오랜만입니다, 아르펠 경!” ...
“어제 만났습니다.” ...
마을 외곽에 있는 마차 대여소에 도착한 그들을 반긴 이는 어제 하루 동안 지겹도록 본 영주 성의 기사 루이였다. 미간을 찌푸린 아르펠을 보고 루이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
“그, 제가 몰래 엿들은 건 아니고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
“그래서. 온 이유는 뭡니까.” ...
“목적지를 알려 주시면 영주 성의 마차를 빌려드리겠습니다!” ...
“됐습니다.” ...
아주 깔끔한 거절이었다. 아르펠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버리자, 루이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
“하지만 아르펠 경, 일반적인 마차보다 저희 백작가의 마차가 훨씬 내구성과 승차감이 좋습니다. 긴 마차 여행으로 등이 배길 일도 없을 겁니다. 아이에게도 분명히 더 좋을 거예요!” ...
“……음.” ...
내내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 넘기던 아르펠이 자리에 멈추어 섰다. 루이는 그 모습에 소리 없이 감탄했다. ...
아르펠 일행이 3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을에 갈 생각이라는 사실을 경비병에게 전해 듣고는 그대로 백작 부인에게 보고했다. 최대한 도움을 베풀고 싶어 하던 그녀는 마차를 빌려 줄 것을 명했고,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이 말을 남기라고 했다. ...
‘아이에게도 좋을 거라고 전해 주렴.’ ...
‘아이요…?’ ...
‘그래. 아이를 상당히 아끼는 것 같더구나.’ ...
어찌 됐든 도와주려 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피력했으니, 밑져도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백작 부인의 조언대로 말하자 아르펠은 놀랍게도 반응을 보였다. 찬바람이 쌩쌩 불 것 같은 얼굴로 딱딱한 대답만을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
“아르펠, 우리 마차 타요……?” ...
품에 안겨 졸고 있던 로한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눈가를 비비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내려준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
찬바람은 어디 가고, 이제 그의 얼굴에 불고 있는 건 훈풍이었다. 루이는 새삼스럽게 로한을 바라보았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아르펠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워낙 사정이 급했던 나머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뿐이다. ...
아르펠은 결국 루이의 제안을 수락했다. 대가도 받지 않고 좋은 마차를 빌려준다는 것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했으나, 로한의 불편함을 덜 수 있다는 한마디에 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이왕 가는 거 편한 여행길이 좋을 것이다. ...
마부도 한 사람 붙여 준 루이는 활짝 웃는 낯을 하고는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며 멀어졌다. 웃음이 참 묘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폭신폭신… 이거 침대 같아요.” ...
“그러게. 질이 좋네.” ...
미리 들었던 설명대로 백작가에서 빌려준 마차는 상당히 질이 좋았다. 외관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부는 충분히 고급스러웠다. 그동안 묵었던 여관들이 아주 저렴한 편은 아니었는데, 그곳의 침대만큼이나 푹신한 감촉이었다. 오히려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다. ...
어찌 됐든 로한의 마음에 든 것 같았으니, 아르펠로서는 희소식이었다. ...
***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야 느리긴 했으나, 마차 여행은 나쁘지 않았다. 백작가에서 자신했던 만큼 승차감이 제법 안정적인 마차였으니 가는 내내 불편하지 않았다. ...
3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났다. 넓지 않은 장소에 하루의 대부분을 있어야 했던 탓에 아이에게는 심심할 법도 했다. 그러나 마차 안쪽에는 대체 왜 있는 것인지 모를 작은 장난감들이나 그림책 등이 들어 있어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
백작 부인의 짓인가. 아이를 웃으며 바라보던 백작 부인의 시선을 떠올리다가도 소매를 붙잡는 로한에 그림책 몇 권을 읽어 주었다. 이곳의 그림책은 이전에 살던 세계와는 영 다른 내용들이 많았다. ...
가장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이야기였다. 나쁘지는 않았으나 그다지 재미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로한은 만족스러웠던 것 같지만. 책을 읽자고 먼저 말하는 것이 기특해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
“오늘은 밖에서 저녁 먹을까.” ...
“네!” ...
마을에 도착하고 난 뒤로 아르펠은 간단한 의뢰를 하나 더 맡았다. 정말 간단한 나머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고, 의뢰를 끝마쳤을 때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어서 저녁은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
식당을 향해 걸으며 버릇처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다. 쓰다듬을 낌새가 보이기라도 하면 이제는 로한 쪽에서 익숙하게 머리를 손바닥에 가져다 대고는 했다. 비비적거리기는 했으나 요령이 없어서인지 손끝에 걸린 갈색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흩어졌다. ...
그러면서도 눈꼬리를 접어 헤헤 웃고는 하였는데, 아르펠은 간혹가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이전에 살던 세계에 있던 리트리버라는 견종을 떠올렸다. 옅은 갈색 털을 가지고 있는 리트리버가 로한과 꼭 닮은 것도 같았다. 여기에도 비슷한 견종이 있을까. ...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떨쳐낸 아르펠은 제법 평이 괜찮다던 음식점을 찾아 두 개의 메뉴를 주문했다. 감자를 으깨어 동그랗게 뭉친 후 기름에 튀겨 달달한 소스를 곁들인 요리와 약간의 향신료가 가미되어 스테이크 형식으로 구워진 닭고기가 나왔다. 두 가지 모두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는지 로한의 눈이 반짝거렸다. ...
“뜨거울 테니 조심해서 먹어.” ...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감자알 하나를 그대로 입에 넣어 버릴까 봐 주의를 주었다. 멈칫한 것을 보면 상당히 찔린 모양이지. 아이는 바로 감자를 먹기보다는 함께 나온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
얼마 전까지 로한은 편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때야 워낙 ‘싫어한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이 스스로도 노력한 모양이고, 아르펠도 지금처럼 많은 관심을 갖고 로한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
지금에 와서는 로한이 당근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지만. ...
나름 티를 내지 않고 당근을 입에 밀어 넣었으나 아이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빤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
“당근이 맛있네.” ...
“……제 당근 줄까요?” ...
“응. 난 당근 좋아해.” ...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펠의 접시 한쪽에 얇게 채 썬 당근이 소복하게 쌓였다. 약간 상큼하고 달달한 맛이 나는 소스에 버무려진 덕에 당근 특유의 맛이 심하게 나지는 않았다. ...
아르펠은 식사 시간 내내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로한이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직은 입이 작아서인지 작게 뭉친 감자 알맹이를 입 안에 넣는 것만으로도 볼이 빵빵해졌다. 어쩐지 볼을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17
두툼한 닭고기 스테이크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아이의 접시 위에 올려놔 주었다. 냉큼 포크로 닭고기 살을 콕 찍어 입에 넣은 로한이 시선을 마주해 오며 활짝 웃었다. 아르펠의 입가도 덩달아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
이 정도면 꽤 행복한 저녁 식사다, 라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
“혹시 합석해도 됩니까?” ...
불청객의 목소리에 아르펠이 고개를 돌렸다. 옅은 색의 로브를 몸에 걸치듯 두르고 같은 색의 모자를 푹 눌러쓴 태가 제법 익숙했다. ...
“안 됩니다.” ...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 했지만 거절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웃어 버렸다. 과장되게 옷을 매만지는 건 덤이었다. ...
“역시 기억하고 계셨군요? 일부러 같은 옷도 입고 왔는데, 그럴 필요 없었네요. 아, 전 렉시아입니다.” ...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빈 의자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으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미는 행동을 무시했다. 무안하긴 한 모양인지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손을 거두었다. ...
렉시아. 남자를 바라보는 아르펠의 눈이 차가웠다. 용병으로 등록한 날 등급 테스트를 본답시고 의미 없는 대련을 했을 때, 심사를 봐주는 사람들 중 가장 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그 뒤로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해 관심 한 톨 주지 않았던 이다. ...
당장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를 산산이 부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로한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르펠은 흘끗 로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저 멀뚱히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의 표정에 미세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
로한까지 원하지 않는 상황이니 부숴도 되지 않을까. 부순 의자는 물어내면 된다. 일차원적인 생각을 마친 아르펠이 바닥의 그림자를 끌어와 의자를 산산조각 내려던 순간이었다. ...
“여기서 공격하면 그 음식, 다 남기고 나가야 할걸요?” ...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렉시아가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목덜미 정도의 길이까지 기른 짙은 녹빛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르펠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
로한의 얼굴이 못마땅한 빛을 띠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약간의 살기가 새어나갔다. 남자는 그 짧은 순간 감추지 못한 살기를 느낀 듯 움찔했다. 비위를 맞춰주듯 계속해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살기를 느낀 것 하며, 쉽사리 침착함을 가장하는 게 상당한 실력자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
제압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난장판이 만들어질 것은 자명했다. 아르펠은 바닥을 기어가던 그림자를 거뒀다. ...
“의뢰를 부탁하러 찾아왔어요.” ...
“지금은 안 받습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아서.” ...
“흐음. 다른 걸 대가로 치르면요? 용병 등급을 S급으로 올려드린다던가?” ...
당연하게도 아르펠은 영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
“와, 너무하네. 거절당할 건 알고 있었어도 나름 회심의 제안이었는데.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지도 않은 거예요?” ...
“예.” ...
더 이상 들어볼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 잠시간 멈춰 있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로한의 입에 들어갈 닭고기 스테이크를 잘라주느라 분주한 손놀림이었다. ...
어딘가 뚱한 낯을 하고 있던 로한은 아르펠이 고기 한 점을 건네자마자 버릇처럼 미소 지었다. 손을 뻗은 아르펠이 로한의 입가 근처에 묻어 있던 소스를 냅킨으로 훔쳤다. ...
“그럼 이건 어때요?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내가 책임지고 데려다줄게요. 꽤 멀리까지 가는 것 같던데?” ...
“뒷조사를 하셨군요.” ...
“하하. 이해해 주시겠어요? 원래 거래에서 우위를 잡을 때 중요한 건 누가 뭘 더 많이 알고 있냐니까. 상대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유리해지거든요.” ...
차게 식은 눈을 하고 답을 했으나, 아르펠은 렉시아가 건넨 두 번째 제안이 꽤 끌렸다. 애초에 적성에 맞지 않는 의뢰를 찾아다니며 돈을 번 것은 모두 신전에 갈 동안 아이가 풍족하게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
의뢰 하나를 끝내는 것으로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의 모든 번거로움과 경비를 저쪽에서 부담해 준다고 한 것이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돈을 모은 게 아니었으니. 어차피 신전에 도착하고 난 이후에는 다 의미 없는 돈이었다. ...
게다가 렉시아가 제안하는 것이 어떤 의뢰이든 아르펠이 위험할 일은 딱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펠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짧은 시간 동안 아르펠은 로한을 두고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야 신전에 도착하면 당연히 그를 두고 도망쳐야겠다는 결심을 했으나,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결심은 적나라하게 흔들렸다. ...
그리고 지금, 미약하게 남아 있던 생각의 뿌리마저 자취를 감췄다. 로한이 아르펠에게 가족이 되어달라고 말했듯, 아르펠도 로한과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었다. ...
어째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지는 모르겠다. 모든 감정이 아이에게서 기인했다. 전생에도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이 생기는 데 무조건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아르펠은 로한에게 스며들어 있었다. ...
결국 신전에 아이를 놔두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흐지부지됐다. ...
신전에 도착하고 난 이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곧바로 봉인 당할 수도 있고, 원작과 달리 봉인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르펠이 로한에게 해 준 행동이라고는 그를 챙기고 보살펴 준 것밖에 없었으니까. ...
어쩌면, 아주 낮은 확률로… 계속해서 아이와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미래가 어찌 되든 신전에 도착한다면 모든 것이 변할 거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일까? 함께 가기로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를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두려움이 들었다. ...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아르펠에 렉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차게 굳어있기만 하던 눈동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리저리 흔들렸다. ...
중간중간 그의 시선이 스치는 곳에 아이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다년간 수십 번도 넘게 거래를 진행하며 쌓아 온 경험이 직감을 울리고 있었다. ...
“참, 외지에서 오신 분인 것 같으니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유명한 관광지도 함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때요?” ...
움직임을 멈춘 아르펠이 시선을 돌리더니 렉시아를 빤히 노려보았다. 마주한 시선에 오금이 저리는 것 같기도 했으나 렉시아는 웃음을 더 짙게 만들 뿐이었다. ...
결국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
“…하겠습니다. 그 의뢰.” ...
“잘 결정하셨어요.” ...
자세한 건 여관에 가서 이야기할까요? ...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선명했다.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명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악의를 가진 사람조차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
이 남자는 싫다. ...
***
의뢰는 받을 테니 당장 이 자리에서 꺼지라고 내쫓아버린 덕에 아르펠은 로한과 단둘이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아르펠, 또 일하러 가요?” ...
“아마.” ...
미리 여관의 위치와 쓰는 방을 알려 주었으니 렉시아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르펠은 로한과 손을 잡은 채 여관까지 이어진 길을 거닐었다. 잡고 있는 손이 꼼지락거렸다. ...
“……그 아저씨 별로예요.” ...
꽤 뚱한 목소리였다. 입술마저 삐죽이는 것을 발견한 아르펠이 아이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이제는 투정도 곧잘 부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았다. ...
“나도 싫어.” ...
“그럼….” ...
“의뢰하면 그쪽이 돈 다 내준대.” ...
이번 일만 마무리하고, 남은 시간은 같이 놀러 다니자. ...
잡은 손을 놓는 대신 로한을 들어 올려 익숙한 자세로 안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주 보고 있는 로한의 눈이 여러 번 일렁였다. 확실한 건 아이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
이내 로한이 익숙하게 그의 목을 팔로 둘러 껴안았고, 아르펠은 폭 어깨에 기댄 머리를 한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
“아르펠이 계속 나랑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펠은 어느 때보다 로한의 말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충족감이었지만, 어찌 됐든 로한에게서 비롯된 감정이니 달갑게 받아들였다. ...
빵빵한 볼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이런 걸 귀엽다고 하는 것 같다. 손가락으로 살살 누를 때마다 쿡 들어가는 볼살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자꾸만 볼을 건드리자 로한이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홱 들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르펠은 어쩐지 로한의 시선이 ‘아르펠은요?’ 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로한을 따라, 제법 자연스럽게 옅은 미소를 머금을 수 있게 된 아르펠이 답했다. ...
“나도. 너랑만 있었으면 좋겠어, 로한.” ...
내게 의미 있는 존재는 너뿐이야. ...
귀여운 고백을 속삭여 준 보답으로 아르펠 또한 로한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속삭였다. 말없이 눈을 깜빡이고, 잠시 멍을 때리는 것 같던 아이의 볼이 한순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로한?” ...
얼굴을 차지한 붉은 기가 볼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새 귀까지 영역을 넓혔다. 사과처럼 빨개져 버린 귀에 아르펠이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에요오….” ...
기어들어 가는 대답이었다. ...
그래, 그렇구나. 로한이 그렇다고 하니 믿겠다는 듯, 아르펠은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몸을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
아이의 홍조는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뻔뻔하게도 방 안에 들어가 작은 의자 위에 널브러지듯 몸을 걸치고 앉아 둘을 반긴 렉시아는 새빨간 로한의 얼굴을 보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
“부끄러운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꼬마야.” ...
물론 로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펠의 어깨에 고개를 더 깊숙이 묻을 뿐이었다. ...
18
보안이 나쁘지 않은 여관이긴 했으나 아주 값비싼 곳은 또 아니었다. 값어치를 하듯 안쪽의 방은 좁지 않고 청결한 편이다 싶을 뿐이지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침대 하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가구가 없이 단출했다. 의자는 진작 렉시아의 차지가 되어버렸기에 아르펠은 침대 위에 로한을 내려주었다. ...
아이의 앞쪽에 앉은 아르펠이 렉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어서 본론을 이야기하라고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웃음을 터트린 렉시아가 아르펠에게 부탁할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호기심은 미처 막지 못했지만 말이다. ...
“사실 이번 의뢰를 부탁하려고 한 건, 아르펠이 지금껏 해결했던 의뢰 중 흥미로운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길드를 통해 받은 사육장의 짐승 토벌 의뢰와 비공식적으로 부탁받아 진행한 영주 성의 백작 영애에 대한 의뢰. 이 두 가지요.” ...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친절한 목소리를 가장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적어도 렉시아는 그렇게 느꼈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 오는 아르펠의 눈동자가 전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차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
“그렇게 살벌하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되는데.” ...
“교단과 관련이 있나?” ...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도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르펠은 언제나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버렸다. ...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겠는걸. 확 변한 말투와 시시각각 강해지는 살기에 렉시아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
“관련이 없는 건 아니죠. 제 동업자가 그놈들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
채 의심이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펠은 그것만으로도 렉시아를 뚫어버릴 듯 응시하던 시선을 누그러뜨렸다. ...
사이비 교단 놈들답게 교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교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편이라고, 원작 소설 속에서도 몇 번이고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망령을 두려워해 파고들지 않아요. 성력과 마력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해야 하는 존재이지, 평생 본인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망령과 악신의 힘을 숭배하는 '구원교'라면 다르죠.” ...
걸터앉아 있는 의자가 상당히 딱딱한 탓에 허리가 뻐근하기라도 했는지, 렉시아는 늘어뜨렸던 몸을 바로 세우고선 몇 번 허리를 두드렸다. 여전히 말없이 시선만 주고 있는 아르펠을 흘끗하며 사뭇 억울한 목소리를 꾸며내었다. ...
“반응 좀 해 주시겠어요? 신뢰 가는 사람들한테만 말해 주는 정보였는데.” ...
“날 신뢰하지 않잖아.” ...
“아, 이제 완전히 반말 쓰시는 건가요? 좋아요. 음, 근데 들켰네요. 눈썰미 좋으시구나.” ...
헤실헤실하며 대꾸하는 낯은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렉시아가 아르펠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아르펠도 렉시아를 신뢰하지 않았다. 단호한 반응에도 내내 웃는 얼굴이 속을 긁었다. ...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르펠이 강하다는 거랑 의외로 망령에 관심이 많다는 건데.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번 의뢰를 부탁할 사람으로 아르펠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지었어요.” ...
사실대로 말한 거니까 봐주세요? ...
엄청난 비밀이라도 전해 주듯 작게 속삭인 렉시아는 가지고 있던 짐꾸러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읏차, 하며 앉아 있던 의자를 끌어 침대의 근처까지 옮겨놓고선 아르펠의 앞에 종이를 내려놨다. ...
“수상한 정황과 장소를 찾기 위해서 저랑 제 동업자 친구는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요. 그 녀석들이 워낙 꼭꼭 숨는 성격이어야 말이죠. 땅굴까지 파 가면서 숨었을 줄이야. 못된 짓 하는 놈들은 쓸데없이 예민하다니까요.” ...
종이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의뢰의 내용을 서술하는 글귀들이 가지런하게 적혀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도에 가장 먼저 눈이 갔다. 익숙한 지리만 아니었다면 곧장 옆의 글들을 읽었을 것이다. ...
“여긴….” ...
“맞아요, 이 마을 근처예요. 사실 아르펠이 영주 성 근처에 머무르고 있을 때 부탁하려 했는데 그새 홀라당 떠나 버리셨더라고요? 가까운 곳으로 향해서 다행이었죠. 혹시나 멀리 가버린 건 아닐까 가슴도 졸였어요, 저.” ...
“알고 있는 곳이군.” ...
“……네?” ...
여태껏 웃음을 머금고 있던 렉시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선명한 균열이 갔다. 어쩐지 마음에 묵혀 있던 체증이 싹 가시는 듯했다. 이런 걸 보고 쌤통이라고 하는 건가. ...
딱히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놈이 바짓가랑이를 붙들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
차마 걷어찰 수는 없고, 귀찮아 죽겠다는 눈으로 렉시아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결국 영주 성에서 만난 신관 행세를 하던 사기꾼에 대해 대충 말해 주었다. ...
“과연… 백작가의 따님만 치료한 건 아니었군요?” ...
렉시아는 다 안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사기꾼을 처리한 방식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아마 죽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찝찝한 놈이었다. ...
“근데 정보를 알아내는 비결은 뭔가요? 우리가 그렇게 심문해도 입 하나 뻥긋 안 하던데. 혹시 비결 공유해 줄 생각은 없어요?” ...
“말할 의무는 없어.” ...
“너무하다. 정보를 캐낼 수 있다면 우리 쪽에서 교단 지부를 많이 없앨 수도 있는 거잖아요?” ...
장난스럽게 눈이 찡긋거렸다. ...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시원하게 드러난 얼굴에 조화로운 이목구비, 길게 뻗어있는 눈꼬리는 웃을 때마다 여우를 연상시켰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잘난 얼굴이었으나 애초에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는 아르펠에겐 그저 그럴 뿐이었다. ...
어차피 그 비결은 아르펠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혼자 간부로 착각하곤 정보를 나불거렸는데 대체 뭘 비결이랍시고 알려 준단 말인가. ...
“나밖에 못 쓰는 방법이니 신경 꺼.” ...
“흐음. 그거 재밌네요.” ...
그런가 보다 한마디 하면 될 것을 굳이 의뭉스럽게 대답하는 놈이 짜증 났다. 마검으로 눈을 뜨고 난 이후, 로한을 제외하고는 이토록 선명한 감정을 계속해서 느끼게 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
비록 그 감정이 짜증이긴 하지만. 애초에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마검을 상대로 이런 반응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재주라면 재주였다. ...
아르펠은 렉시아에게 대꾸하기보단 그가 건넨 의뢰지를 살피는 것을 택했다. 지도는 아까 봐 두었던 대로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
“귀족과는 달리 평민들은 누구 하나 사라져도 문제가 불거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치안대가 있긴 하지만 빈곤한 사람들이 사는 구석진 골목까지 살펴보지는 않아요. 어딜 가나 이 빈틈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고.” ...
손을 뻗은 렉시아가 의뢰지의 중간에 적혀 있는 내용을 손으로 짚었다. 정확히는 이 근방을 기점으로 늘어나고 있는 실종자의 수였다. ...
빈민가에 사는 이들은 억울한 일을 겪어도 이를 호소할 수 없다. 돈을 구걸하거나 발품을 팔아 푼돈을 벌고 간신히 하루를 연명하는 식이다. ...
배를 곯는 일이 많고, 특히나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는 날이 오면 하루 전 얼굴을 보았던 사람이 다음 날 죽어 사라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
그렇다 보니 치안대도 그들의 안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적나라한 살인 사건이나 눈에 띄는 화재와 같이 누가 봐도 진위 확인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어느 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
손을 대려면 빈민가의 일괄적인 개혁이 필요하고, 개혁은 긴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자연스레 이어져 왔던 무관심이었다. ...
아무리 평화로워 보이는 곳도 들추고 보면 어디 하나는 곪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귀족들이 방치한 빈민가에서 실종이 되었다면 아마…. ...
“전 이게 교단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
한 번은 우연일지 몰라도, 긴 시간 동안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면 원인은 반드시 있다. 렉시아가 방긋 미소 지었다. ...
“우리는 빈민가 사람들의 실종이 자주 일어나는 이곳에 주목했고, 덕분에 운 좋게 지부 하나를 발견했어요. 아르펠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라니 좀 허탈하지만?” ...
“심문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데려오면 되지?” ...
“음… 상관은 없는데. 3명 정도면 넉넉할 것 같네요. 일행을 붙여 줄까요?” ...
“아니. 필요 없어.” ...
아르펠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갈무리했다. 무해한 사람처럼 미소를 잃지 않는 녀석은 역시나 여태껏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험했다. ...
아무리 관심이 없다지만 치안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빈민가의 일을 꿰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지부 하나까지 찾아냈다. 그 말은 제법 쓸만한 정보통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
흘끗 돌아간 시선이 렉시아를 응시했다. ...
“잘 생각해. 나머진 다 죽일 거니까.” ...
“오.”
심문할 사람의 수를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이었다. 3명이면 정말로 충분했기에 렉시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흥미를 끈 점은 오히려 다 죽일 거라는 호기로운 말이었다.
냉정하다 못해 냉혈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인간상을 봐 왔기에 그런 아르펠의 모습에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이런 사람이 저 작은 아이에게는 꼼짝 못 한단 말이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그의 눈은 조금 전 냉한 기운을 풍겼던 것과는 다르게 따뜻함에 노곤히 풀려 있는 상태였다.
제법 흥미로운 관계였다. 렉시아는 정말로 오랜만에, 그의 동업자를 제외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상황에 맞지 않게 들뜨고 말았다.
“그 교단에 속해 있는 놈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아르펠 마음대로 해도 돼요.”
“오늘 시간 있나?”
“애프터 신청하는 거예요, 지금? 좀 설렜다.”
렉시아를 바라보는 아르펠의 눈이 차게 식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빛에 렉시아는 농담이라며 말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장난을 치면 멱을 따버릴 것 같은 살벌함이었다.
“내일 안에 돌아올 테니 내가 없는 동안 아이를 부탁해.”
“하긴, 아이를 데려갈 만한 곳은 아니죠?”
아르펠은 렉시아에게 짜증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실력은 믿고 있었다. 불쾌하지만 로한을 좋게 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음 같아선 당연히 로한을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기꾼 한 명을 죽였던 그때와는 다르게, 몇 시간 뒤 아르펠이 벌일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아르펠에게도 정해 둔 선이 있었고, 그 선이 아이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며 소리쳤다.
거기다 빈민가의 사람들을 데려다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실종되었다가 영주 성에 돌아와 죽었다던 하녀와 다르지 않은 일을 겪을 것이다.
19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 해 봤자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인체 실험뿐일 테다. 또 있는 것이라면 실험을 당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일까.
언젠가는 보게 될 장면이다. 교단을 털고 다녔던 원작 속의 로한도 수없이 보았던 것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조그마한 아이에게 보여 주기에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왜, 안 데려가요…?”
“로한.”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쥐는 손에 아르펠이 상념을 끝냈다. 아이가 처음으로 진심을 토로한 이후 좀처럼 보지 못한 불안한 낯이었다.
그런 로한의 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볼도 조금 만지작거렸다. 손길에 묻어나오는 애정을 느꼈는지 불안해 보이던 로한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풀렸다.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니까.”
“전엔 같이 갔잖아요.”
“그때와는 달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고, 나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일 테니.”
그 말에 아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만지작거리던 볼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뗀 아르펠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무섭니?”
“…아뇨. 안 무서워요.”
아주 또렷한 목소리였다. 로한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도 아르펠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선명한 대답에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나중에, 같이 가는 날도 있는 거죠?”
“네가 더 큰다면.”
“빨리 컸으면 좋겠어요…….”
튀어나온 한 줄기 웅얼거림은 아이의 진심이었다. 작게 웃어 버리고 만 아르펠이 느릿한 손길로 로한을 토닥여 주었다.
“다녀올게.”
애정이 넘실거렸다.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고개를 내린 아르펠이 통통한 볼 위에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잠시간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로한의 볼이 순식간에 화르르 불타올랐다. 제법 충동적으로 한 것치고는 마음에 드는 반응이었다. 앞으론 자주 해 줘야겠다.
렉시아에게 부탁한다는 눈짓을 한 아르펠은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남은 건 얼굴이 새빨개진 로한과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을 때리고 있던 렉시아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르펠과 로한의 관계가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렉시아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저거 누구야?'
그냥 다른 사람이잖아.
***
로한을 맡기기는 했다만 신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과는 별개로 미덥지 않은 녀석이었으니 아르펠은 최대한 일을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귀찮아지는 일이 없도록 인적이 드문 길가를 골라 빠른 속도로 달리며 대충 거리를 셈했다.
그 사기꾼 놈이 말해 주었던 마을은 영주 성에서 이틀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아르펠이 로한과 묵기로 한 마을은 지부가 있는 곳과는 멀지 않았다.
영주 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들은 웬만하면 마차를 타고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건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으니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숙박업이 쏠쏠했기 때문이다. 마차를 타고 하루 동안 이동한 사람들은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 보이는 마을을 건너뛰지 않고 묵는 편이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거리가 멀지 않았으니 아르펠에겐 좋은 이야기였다.
반나절 정도 걸려 도착한 마을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노점이 늘어선 길거리나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선 곧장 마을의 옆쪽에 있는 숲길로 들어섰다.
“지금 저 숲에 들어가려는 건가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말을 걸었다. 염려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아르펠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곧장 자리를 뜨지 않고 여인을 바라본 이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아이 때문이었다.
딱 로한의 또래처럼 보이는 아이였다. 훨씬 커다란 손을 꼬옥 잡고 있는 앙증맞은 손가락이 로한을 닮았다.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어쨌든 로한을 떠올리게 했다는 데에서 아르펠의 표정은 금세 유해지고 말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숲에 들어가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 숲은 위험해요. 숲 안에서 실종된 사람이 꽤 있거든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다 보니 너무 울창해져서, 이제는 현지인도 꺼리는 곳인데…….”
“괜찮습니다.”
“아, 저기…!”
빤히 아이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 등을 돌렸다. 뒤쪽에서 뭐라 말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일찍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원래라면 누군가 붙잡아도 갈 길만 갔을 것이다. 로한과 나이대 말고는 비슷한 점이 없는 아이를 보고 멈칫할 줄은. 그 외에는 정말 닮은 점이 없었다. 로한이 더 귀엽고, 예쁘고, 잘생겼고, 착하고…….
딱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본 아이였으면서 아르펠은 끊임없이 아이와 로한을 비교했다. 누가 봐도 팔불출 같은 생각이었으나 본인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게 당연한 사실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아르펠은 숲의 안쪽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 인적이 끊긴 숲이라는 말이 맞는 듯,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 나 있기는 했으나 덥수룩한 풀이 자라나기 시작해 얼마 안 있으면 길의 윤곽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 것 같았다.
가장 높은 곳을 찾기는 쉬웠다. 뚫린 길을 따라 올라왔을 때 한쪽에 사기꾼 놈이 언급한 새 부리 모양의 바위가 보였다. 길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 번이랬나.”
바위의 끝부분을 세 번 문질렀다. 그러자 사람 몸통의 다섯 배쯤은 될 것 같은 바위가 우르릉거리는 소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흔들리던 바위가 기이하게도 옆쪽을 향해 움직였다. 바위가 지키고 있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통로였다. 아래로 향하는 새까만 통로를 응시하다, 방금 전 움직인 바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바위가 움직일 때 느껴졌던 힘은 성력이었다. 천신을 섬기는 신관들이 쓰는 힘 말이다.
신관들은 구원교에 속한 사람들이나 힘을 직접 몸에 담고 있는 아르펠보다 망령의 힘을 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아예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신전과 구원교 측의 갈등이 대대적으로 빚어질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신관들은 구원교의 지부를 속속들이 찾아냈다.
그러나 이 바위는 망령의 힘이 아닌 성력이 묻어 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력의 출처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신전에는 이미 첩자가 심어져 있을 테고 바위에 손을 댄 당사자도 아마 그 본인이겠지. 다른 신관들의 눈을 속이는 데에는 제법 탁월한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생각을 그만두고 아래의 통로로 발을 옮겼다. 아르펠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로한에게 내일 안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슬슬 날이 저물고 있었으니 안쪽을 모조리 털고, 여관으로 다시 돌아갈 시간을 생각하면 시간이 빠듯했다.
깊숙이 이어지는 투박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마침내 평지를 밟았을 때, 아르펠은 앞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간부님을 뵙습니다!”
“간부님을 뵙습니다!!”
옅게 켜져 있는 불빛 사이로 같은 복장을 착용한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망령의 힘에 예민한 작자들이니 바위를 움직일 때부터 진작 아르펠의 기운을 느꼈을 게 분명했다. 영주 성에서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몸 안에 망령의 힘을 품고 있는 데다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당연히 구원교의 간부라고 생각한 것이다. 멀쩡하게 힘을 담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간부들이 유일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죽일까?’
그들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던 아르펠이 그 생각을 접었다. 지부는 아주 넓은 건 아니었지만 좁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하나하나 조사하려면 분명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다.
굳이 돌아다닐 필요가 있나. 찾아 줄 사람이 여기 다 있는데.
“연구 성과를 보겠다. 안내하도록.”
“예!”
가장 앞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나이 든 남자가 냉큼 일어났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길을 안내하는 것에 만족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갑작스레 간부가 등장하는 상황이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려니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안내할수록 피비린내가 심해졌다. 흐릿하게 들리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커졌다. 아르펠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안내하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시끄러우신가 보군요.”
“됐다.”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지저분한 연구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쪽에는 사람을 가두고 있는 철창도 있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꺽꺽거리는 몸은 지독한 고통에 잘게 떨렸다. 옷 하나 없이 헐벗은 채였으나 지속적으로 망령의 힘에 노출된 탓인지 워낙 변형된 곳이 많이 원래의 성별조차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아, 요즘 제가 꽤 아끼는 놈입니다. 이곳저곳 변형되기는 했으나 일단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제법 목숨이 끈질기더군요. 어디 보자, 연구 일지가…….”
텅 빈 동공이 아르펠을 응시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눈빛이었으나, 그럼에도 명백히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다른 자료는 없나?”
“이 지부에서 진행되는 모든 실험에 대한 자료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보여드린 게 가장 최근의 성과이고, 여태껏 해 왔던 실험에 대한 자료는 옆방에 모아놨습니다.”
일단 연구 일지를 받아 들은 아르펠은 문득 거슬리는 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책상 구석에 흐트러져 있는 여러 장신구였다. 이상한 점은, 그것들이 모조리 성력과 마력의 힘을 품고 있는 아티팩트였다는 사실이다.
20
“저건 뭐지?”
“하하… 많이 역겨우시죠? 저도 저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아주 짜증 나지만, 본교에서 아티팩트에 성력과 마력이 저장되는 결을 연구하라고 명령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성과는 있나?”
“아쉽게도 없습니다…. 망령의 힘은 성력과 마력에 비해 훨씬 고귀하여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으니까요. 성과가 있다면 본교에서 연구하는 장치에 힘을 보탤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어떤 장치?”
그야 망령의 힘을 압축시켜 저장하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남자는 드디어 이상함을 느꼈는지 말을 멈췄다. 당황한 얼굴로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그… 이런 건 왜 물으십니까? 본교에서 오셨다면 장치에 대한 건 알고 계실 텐데.”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얻을 건 다 얻었고, 본교에서 연구하는 장치라는 것에 대한 힌트도 들었으니… 이제 이 남자는 쓸모없다.
“고맙군.”
이제 곧 죽을 사람이었으니 인사 한마디는 하기로 했다. 미약하게 감돌고 있던 불안감이 남자의 얼굴에 확 번졌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바깥의 사람을 부르려 입을 크게 벌렸지만,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바닥을 기어 온 그림자가 아가리를 벌려 남자를 한입에 삼켰다. 어렴풋이 들리는 찢기는 소리만이 남자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었다. 망령에 대한 실험을 한답시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 치고는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연구 일지를 대충 훑어본 아르펠이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바닥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그림자가 날름 먹어 치웠다. 옆방에 있다던 이전의 기록들도 함께 가져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와중, 얕게 앓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해방해 줄 상대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죽은 눈을 하곤 떨고 있던 이가 아르펠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희망의 빛이 아롱거렸다. 말없이 남자의 눈을 바라보던 아르펠은 그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머지않아 아르펠과 남자의 사이로 한 줄기의 새까만 선이 그어졌다. 정확히 남자의 가슴팍을 관통한 그것은 끈질겼던 생명을 빠르게 앗아갔다.
“…데려오지 않길 잘했어.”
남자의 시신을 그림자가 먹어 치우게 하지 않은 것은 아르펠로서는 최선을 다한 배려였다. 그럼에도 그 순간 로한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이는 이 남자를 살리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아르펠은 다른 선택을 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굳이 살릴 필요는 없다.
어쩌면 배려가 아닌 냉정함일지도 모르겠다. 선 안의 사람과 선 밖의 사람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뿐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르펠은 로한이 저런 꼴이 되어 죽고 싶다고 애원하더라도 그를 죽이지 않을 셈이었다. 불법적인 일에 손을 뻗고, 마신이 준 권능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해도 살려야 했다.
점차 나아가는 생각에 발맞추어 아르펠은 제 이기심을 알아챘다. 언젠가 한 번 로한이 행복할 수 있다면 뭐든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보니 아니었다. 로한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한이 살아있다는 가정하에서였다. 죽고 싶다고 애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르펠은 자신의 이기심을 내세워 그를 살려낼 게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알면 넌 날 피할까.'
조금은 소름 끼쳐 하려나. 이번에야말로 무서워할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르펠이 옆에 있는 한 로한은 위험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러한 이기심을 아이에게 들킬 일도 없다.
성별도, 나이도 짐작할 수 없지만 사람의 형체만은 유지하며 죽은 이의 시신을 잠시 동안 바라보던 아르펠은 곧장 옆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득 쌓여 있는 종이 뭉치들을 모조리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럴 때마다 그림자가 다가와 종이를 날름 먹어 치우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다 렉시아의 앞에서 뱉어낼 것들이었다. 수년간 쌓아온 기록인 만큼 양이 아주 방대했지만, 굳이 구분해서 줄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약간의 사심도 섞여 있었다. 그림자의 안에 가장 처음 넣었던 최종 연구 일지는 뒤따라 들어온 방대한 양의 문서에 섞였을 것이다. 머리를 싸매며 그것을 찾을 놈을 생각했더니 제법 기분이 괜찮았다.
'소설 속에서도 이 장소를 발견했으려나.'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렉시아라는 사람은 딱히 언급된 적이 없었다. 미래에도 로한과 만날 일이 없다는 소리다.
구원교를 견제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그는 좀처럼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었다. 하다못해 신전에 도움을 청하고 로한의 조력자라도 됐다면 일이 더 수월했을 텐데.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구원교의 지부 하나를 털 계획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정보통을 가진 놈이었으니, 신전에 첩자가 심어져 있던 사실을 어림짐작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신전에 손을 뻗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까.
방을 모조리 털고 있을 때 방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아까 전 무릎을 꿇고 우러러보던 놈들인 듯했다.
“젠장, 실험체가 죽었잖아!”
“수석님은 어디 가셨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지.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위기감이 들지는 않았다. 설령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위기감을 느낄 일은 없었을 테지만.
더 떨어지는 종이 더미는 없나 바닥에서 기웃거리던 그림자가 아르펠의 손짓을 따라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삽시간에 바깥이 고요해졌다.
핏방울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 인기척을 느끼며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이제 다른 곳을 청소할 시간이었다.
아르펠은 렉시아가 말한 세 명의 사람을 빼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실험을 당하는 사람도 예외는 없었다.
그는 망령의 힘을 빼낼 수 있었으나, 몸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이미 가차 없는 실험에 의해 실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은 망가져 있었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사람의 외형조차 갖추지 못하고 울부짖는 이들도 몇 보았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원했다.
처음 발을 들일 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꽤 북적했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무엇 하나 남지 않은 빈 공간이었다. 사람의 숨소리,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 덕분에 이질감이 드는 곳이기도 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아르펠은 아무런 감흥 없이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딱히 둘러보지도 않았다. 생명체 하나 남지 않은 공간에 더 이상의 목적은 없었다.
“…로한 보고 싶다.”
이제는 약속을 지키러 갈 시간이었다.
***
렉시아는 좀처럼 움직임이 없는 로한을 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아르펠이 돌아와서 자신을 달달 볶을 미래가 벌써부터 훤히 그려졌다. 누가 봐도 로한을 끼고 도는 놈이었으니 단번에 멱살을 잡힐지도.
볼 뽀뽀의 효과가 컸는지 아르펠을 제대로 배웅해 주지도 못하고 혼자 남겨진 로한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문제는 그때부터 아이가 이상해졌다는 점이었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쓴 채 아이는 침대에 틀어박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없어 무지한 렉시아에게도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지켜 달라고만 했지, 성심성의껏 돌보라고 요구하지는 않았기에 그저 내버려 뒀다.
“꼬맹아, 밥 안 먹냐?”
저녁 시간이 되어 아래층에서 아이가 먹을 만한 음식을 싸 들고 온 렉시아는 꿈쩍도 안 하는 로한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안 먹으면 아르펠한테 이른다?”
머지않아 방법을 찾긴 했다. 로한이 아이치고는 살벌한 눈으로 째려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 미움 받고 있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미움받을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렉시아로서는 꽤 억울한 상황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관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치고는 제법 질도 좋고 맛도 좋은 수프와 돼지고기 스테이크였으나 로한은 몇 번 깨작거리다가 손을 놓았다.
“그만 먹게?”
“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로한이 자리를 떴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잘 먹었다고 인사를 남긴 것에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딱 한 번이었지만 렉시아는 로한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르펠에게 의뢰도 할 겸, 그를 시험해 볼 겸 접근한 식당에서였다. 비록 공격당할 뻔하긴 했지만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는 했다. 과정이 어찌 됐든 아르펠은 지금 렉시아가 요청한 의뢰를 하러 떠났으니까.
거기서 분명 로한은 입안에 음식을 빵빵하게 넣고 있었다. 평소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렉시아도 그 모습이 퍽 앙증맞다 느꼈었다. 그래서 음식을 주면 상태가 좀 나아지겠다 싶었건만.
정작 그가 먹은 음식들은 반 그릇도 채 비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얘가 왜 이러지……?”
밥을 잘 안 먹긴 했으나 조용한 편이었으니 크게 우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걷어차듯, 밤이 되자마자 렉시아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대충 의자에 구겨져서 선잠을 청하고 있던 렉시아가 눈을 뜬 것은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잠기운이 남아 있는 눈을 대충 비비곤 침대 위에 있을 로한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렉시아는 순간 크게 당황해 버렸다.
“으으…… 흐.”
악몽을 꾸는지 양 볼이 흠뻑 젖어 들 정도로 울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급기야는 손을 들어 목을 연신 긁으려고 하기에 급하게 양손을 붙들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도 진정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깨웠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린 로한은 몸을 비틀어 렉시아의 손안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훌쩍이며 다시 잠을 청했다.
황당한 일이었으나 악몽에서 깨웠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밤새 세 번 정도 더 일어났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쯤 되니 렉시아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말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열까지 오르는 듯했는데, 약을 먹이자니 손을 놓은 사이 목을 긁어대는 바람에 꼼짝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밤새 로한의 양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하고 있어야 했다. 한숨도 자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21
밤을 새운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했다. 밤새 렉시아가 목을 긁지 못하도록 손을 붙잡아 줬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로한은 잠에서 깨자마자 후다닥 그에게서 멀어졌다. 고되긴 했으나 밤사이 로한과 반쯤 붙어있느라 내적 친밀감이 올랐던 렉시아는 허망한 기분마저 느끼고 말았다.
아르펠에게는 세상 순하게 굴기에 잠시 맡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줄 알았다. 처음 그가 나간 뒤로는 단순한 경계심 때문에 피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그냥 선을 그어 놓은 거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진짜 미움받는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미움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미움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상당히 억울하고 속이 답답했으나, 그와 별개로 로한의 상태가 퍽 걱정되기는 했다.
밤새 우느라 기력이 상당히 떨어졌을 텐데도 로한은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그쯤 되니 렉시아도 반쯤 포기 상태가 되어선 빨리 아르펠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르펠이 떠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아이의 얼굴은 이미 수척해져 있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밤에는 그렇게 앓았으니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자세히 로한을 들여다보던 렉시아는 그가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도 저렇게 맹목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흥미로운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더, 서로에게 강하게 묶여 있었다. 장난으로라도 들쑤시면 사달이 날 테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해가 하늘의 정가운데에 들어섰을 때쯤, 그제야 들리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파헤치지 않기로 했다.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해야겠군.’
은근히 이곳저곳을 다 찌르고 다니는 제 동업자를 떠올린 렉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로한!”
아르펠은 모든 일을 끝마치자마자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여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망설임 없이 벌컥 연 문틈 사이로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금세 환해지는 얼굴에 기분이 들뜨기도 잠시, 수척한 얼굴을 눈치챈 살벌한 시선이 렉시아에게 닿았다.
“너…….”
“전 억울해요! 분명 밥도 제대로 줬는데 애가 안 먹더라니까요?! 밤에 계속 악몽을 꿔서 그거 달래느라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불퉁한 표정으로 입술까지 삐죽이는 렉시아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상당히 짙게 배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악몽’이라는 단어에 아르펠의 시선이 다시 로한에게로 돌아갔다.
“악몽 꿨어?”
“…네에.”
순하게 대답한 로한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르펠에게 다가가고 싶은지 급하게 걸음을 옮겼으나 밤새 악몽에 앓았던 탓이었을까, 발이 꼬여 그대로 넘어지려는 아이의 몸을 아르펠이 다급하게 안아 들었다.
물론 그 모습을 렉시아는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자신과 있었을 때는 내내 표정도 없이 숨만 죽이고 있었으면서, 아르펠이 보이자마자 저 꼬맹이는 아주 순하게 웃었다.
타인을 대할 때 한 놈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상대도 똑같았다.
왠지 고구마를 잔뜩 먹은 기분이었다.
“아르펠이 없어서….”
물론 그런 렉시아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던 로한은, 익숙하게 아르펠의 품에 안긴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아르펠의 얼굴이 죄책감에 물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미안해. 많이 힘들었지.”
“이제 놓고 가지 마요…… 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아르펠은 그 말에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조금의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언제나 반짝이던 금빛 보석 같은 눈동자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신이 없던 탓에 악몽을 꾸고 앓은 아이는 작은 칭얼거림 한 번에도 아르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줄로만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여전히 불안할 것이 당연했지만, 그저 그 모든 것을 아르펠이 곁에 있어 주는 것으로 누르고 있던 모양이다.
가족이 되어 주기로 했으면서 이것 하나 알지 못했다. 아르펠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로한이 조그마한 손을 들어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이제는 놓고 가지 않을게.”
다시는 아이가 아픈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또다시 이번 의뢰와 비슷한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며 이성이 소리쳤지만, 아르펠은 철저하게 본능에 따랐다.
그는 이렇게 슬픈 눈을 하고, 온몸으로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로한에게 차마 거절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로 활짝 웃어 보이는 것에 식은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손에 닿는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밤에 흠뻑 울어버린 탓인지 미열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로한에게 먹일 약이 필요했고,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 같으니 속에 부담을 주지 않을 만한 음식도 요청해야 할 것 같았다. 이번 의뢰로 앞으로의 경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 넉넉하게 팁을 준다면 흔쾌히 음식을 내올 것이다.
아이를 껴안은 채 아르펠이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렉시아는 순식간에 혼자 남겨졌다.
“허…… 나 참.”
렉시아가 뒤늦게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본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버린 탓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나름 날고 기는 사람들의 축에 속했던 렉시아로서는 정말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여태껏 그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또 화는 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워낙 애절했어야지. 한 편의 신파극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그의 동업자가 이 장면을 보았더라면 '너 언젠간 그럴 줄 알았다!'며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렉시아가 아르펠과 의뢰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있었던 건 로한에게 밥을 먹이고 돌아온 아르펠이 약까지 손수 먹여주고 토닥거리며 아이를 잠재운 뒤였다.
아이를 저렇게 수척하게 만든 죄로 재우자마자 멱살이라도 잡힐 줄 알았건만, 의외로 아르펠은 평온하게 그의 앞에 다가왔다. 항상 차게 식어 있던 눈동자도 아주 미약하게나마 온기를 품고 있었다.
“…고마워.”
“네? 잠시만요. 다시 말씀해 주실래요? 귀가 이상한 것 같아서.”
살벌한 눈빛을 한 번 받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렉시아는 생경한 표정을 하고 말았다. 아르펠과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해 본 사람이라면 느낄 만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한편, 아르펠은 진심이었다. 애초에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다. 음식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화가 치밀었으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로한을 살펴보면서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로한은 악몽을 꿀 때 손으로 목을 긁는 습관이 있었다. 손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행동을 반복했다. 결코 약하지 않은 힘이었으니, 밤새 그를 내버려 두었다면 목에 생채기가 잔뜩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로한의 목은 깨끗했다. 아르펠이 렉시아에게 감사 인사를 한 건 그 때문이었다. 로한이 잠에서 깰 때까지 그가 아이의 손을 꽉 붙들어 주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퍽 억울해 보였던 얼굴이 생각났다. 로한만큼은 아니었지만 밤을 새운 탓인지 어제보다 상당히 피로해 보였다.
“…뭐.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대화할 때면 내내 능글맞은 미소를 띠고 있던 렉시아가 흘끗 시선을 돌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펠에게 감사 인사를 들으니 상당히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를 알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인 탓에 행동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자료와 요구한 3명 넘길 테니 사람들 불러.”
“손이 비었는데요?”
때마침 바닥에서 일렁거리던 그림자가 툭 튀어나왔다. 마치 손을 내밀어 흔드는 것처럼, 기묘한 모양의 검은 덩어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나마 대화를 이어가던 렉시아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어 버린 탓이었다.
“뱉어.”
당연히 아르펠은 그런 렉시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튀어나온 그림자를 톡톡 두드리며 딱 두 음절을 말했을 뿐이다.
그림자의 반경이 넓어지더니 그대로 종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종이의 물결에 당연하게도 렉시아는 넋이 나갔고, 아르펠은 로한이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우려해 종이를 다시 집어넣었다. 분명 산처럼 쌓여 있던 종이들이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자 렉시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미간을 잡고 말았다.
“…많이 불러야겠네요.”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라야 할 짐이 많다는 건 확실했다. 렉시아가 기묘한 눈을 하고 아르펠을 바라보았다.
“설마 사람도…?”
“글쎄.”
더 이상 파고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알 수 없는 새까만 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도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렉시아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건 손에 들고 가.”
“아까 그거랑 다른 거네요?”
“그게 최종본.”
원래라면 수많은 종이 사이에 넣어 놓고 알아서 찾게 할 생각이었던 아르펠은 순순히 최종 연구 일지를 건네주었다. 로한을 보살펴 준 빚을 청산한 셈 쳤다.
냉큼 종이를 받아 들은 렉시아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하곤 종이를 넘기며 안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용무를 끝낸 아르펠이 로한에게 시선을 돌린 채 입을 다문 탓에 방 안에는 종이를 넘기는 작은 소음만이 유독 크게 들렸다.
22
“……하아.”
뒤이어 들린 것은 착잡한 한숨이었다. 아르펠의 시선이 흘끗 그를 향했다.
아르펠 또한 방금 전 건네준 연구 일지를 읽어 보았다. 그동안 수도 없이 실험을 자행하며 얻은 성과들을 묶어놓은 연구 일지는 실험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서술했다.
어떻게 실험에 필요한 인원을 충당했는지는 물론, 충당한 사람들의 나이대를 분류한 자료도 있었다. 어린아이의 수가 유독 많았다. '성장하는 아이에게 주기적으로 망령의 힘을 주입할 경우 적응이 빠르다'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가설이 증명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루에 몇 번 힘을 투여했는지, 힘을 투여한 직후 반응이 어떤지, 살았다면 그 외에 변한 점은 무엇인지. 심지어는 죽은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이점의 여부를 기술한 부분도 있었다.
“쓰레기 같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렉시아가 쓰게 미소 지었다. 구원교가 없어져야 하는 존재임은 확실했다. 안타까움이나 동정 같은 감정은 희미한 편인 아르펠조차도 인정하는 바였다.
아까 먹였던 약이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미열이 느껴지던 로한의 이마는 적당히 따뜻한 정도로 변했다. 아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깃털처럼 가벼운 손길로 볼을 만지작거린 아르펠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로한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 문양, 알고 있나?”
“이건….”
스르륵 올라온 그림자가 종이 하나를 퉤 뱉어 냈다. 렉시아의 눈이 묘해졌다. 정말 ‘뱉어 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애써 그 위화감을 무시한 렉시아가 종이의 아래에 찍혀 있는 직인을 확인했다.
난생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투박하게 비틀어져 있는 선으로 그려진 문양은 툭툭 끊긴 듯 선의 모양이 이상했고, 그 탓에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까 받았던 연구 일지에는 이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일부에만 찍혀 있었어. 한 3할 정도.”
한참을 그것을 들여다보던 렉시아는 결국 더 조사해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인처럼 사용되는 문양들에는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처음 보는 모양이라고 하더라도 여태껏 봐왔던 것들과 일말의 공통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떠오르는 것이 없을까 종이에 머리를 처박고 집중하던 렉시아는 눈이 뻐근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비슷한 점을 찾으려 애쓰는 행동을 멈췄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보들만으로는 알아낼 만한 것이 없었다.
당분간 야근은 확정이었다.
***
다음 날 로한은 곧장 몸 상태를 회복했다. 밤 내내 아르펠이 곁에 있어 준 탓인지 악몽을 꾸지도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반짝 뜨자마자 아르펠의 얼굴을 보고선 활짝 미소를 지어 주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으니, 아르펠은 앞으로 아이를 떼어 놔야 할 만한 일은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한이 자신에게 매여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끔찍한 사건을 겪은 뒤 모든 것을 잃은 아이의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탓일 테다. 아르펠은 그 사실에 약간의 기쁨도, 그에게 맹목적으로 구는 아이와 함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미안함도 느꼈다.
만에 하나 로한과 떨어지게 된다면.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으나 충분히 처할 수 있는 미래였다. 그럼에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 주어야 할지 하나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 다시 봐도 너무 많아.”
생각하는 와중에도 아르펠은 렉시아가 데려온 사람들 앞에 구원교의 지부를 털며 모아 온 모든 서류를 떨어뜨렸다. 옆에 서 있던 렉시아는 방대한 양에 한탄하며 다시 머리를 짚고 말았다.
이전에 한 번, 렉시아와 함께 아르펠의 대련 심사를 봐 주었던 남자도 그 일행에 끼어 있었다. ‘조사해야 할 자료가 아주 많을 테니 각오하고 와라’라는 상사의 말을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많은 양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주변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도 남자와 비슷하게 질린 낯을 하고 있었다.
종이만 쏟아져 내렸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기절한 장정 셋이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대체 무엇을 봤는지 창백한 얼굴로 살려 달라 중얼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난장판이기는 했으나 어찌저찌 정리됐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확실히 피곤해 보이는 렉시아가 아르펠을 향해 손짓했다.
“약속은 지켜야겠죠. 아래 준비해 둔 마차가 있으니 타고 가면 돼요. 믿을 만한 수행인과 마부를 붙여줄 테니 관광은 여유롭게 하고, 혹시나 무슨 일이 있다면 저들에게 말해 주세요.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최우선으로 해결해 드릴게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것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흘끗 창문 밖을 내려다본 아르펠은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마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에 타고 왔던 백작가의 마차보다도 더 외관이 화려했다.
“아, 그리고 이거.”
이만 말을 줄이는가 싶던 렉시아가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내 건넸다. 아르펠이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색이 다른 용병패였다. 손에 잡힌 새까만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펠은 이것을 건네준 의미를 묻듯 렉시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딱히 이상한 의미는 아니고. 처음 제안한 대가이기도 했잖아요? 일단 가지고 있으면 제법 쓸모가 있을 거예요.”
“…그래.”
A급 용병패는 반납해 줄래요?
살랑살랑 손을 내민 렉시아는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녹인 뒤 다른 이름으로 각인을 새기면 재활용할 수 있다’는 쓸모없는 정보까지 알려 주었다.
패를 받아 들은 렉시아는 직인에 대해 알게 된다면 따로 연락하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떻게 연락을 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딱히 관심이 가지 않았던 터라 붙잡지 않았다. 그보다는 손을 꼬옥 잡고 있는 작은 아이가 중요했으니.
“우리 이제 여행해요?”
“응. 여행할 거야.”
“언제까지요?”
“글쎄…….”
이제는 앓았던 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로한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살짝 살이 빠진 것 같은 볼을 꾹 누르는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따라붙었다, 전보다 통통함이 덜했지만, 여전히 말랑거리는 감촉이었다.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린 아르펠은 아이의 물음에 잠시 말을 아꼈다.
원작의 로한은 마을이 다 타 버리고도 3년이 지나서야 신전에 의해 거둬진다. 로한의 실종을 알고 파견된 조사대가 반년 만에 아이를 찾아낸 것이다.
즉, 신전 측에서 조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고 2년 반 뒤. 여러 마을을 거쳐 오며 의뢰를 받기도 하였으나, 바삐 달려온 탓에 사건 이후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다. 최대한 빠르게 신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는 이미 잊힌 뒤였다. 원래도 반짝이는 눈망울이 이제는 한가득 끌어안고 있는 기대감에 환히 빛나는 태양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2년. 어때?”
“…좋아요!”
조금 더 짧은 기간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르펠의 대답에 잠시 눈이 휘둥그레진 로한은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이기심으로 여행 기간을 최대한 길게 잡은 주제에, 로한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냥 기분이 붕 떴다. 끝내 신전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네게 더 좋은 일일 거라는 사실은 알려 주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아르펠의 욕심이었다. 신전에 도착하면 반강제로 아이와 떨어질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의 곁에 붙어 있고 싶다는 하나뿐인 욕심.
“출발하겠습니다.”
로한을 안아 든 아르펠은 여관에서 나와 따라붙는 이들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머지않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깥의 풍경을 보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인지 곧장 눈을 마주쳐 온 로한이 예쁜 웃음을 그려 보였다. 아르펠의 얼굴에도 조그마한 미소가 감돌았다.
둘이 함께하는 첫 번째 여행이었다.
***
마냥 길어 보이기만 했던 2년이라는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흘렀다.
신전을 향해 가는 데 2년이나 걸릴 리 없었으니, 아르펠과 로한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제국을 한 바퀴 빙 돌아가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황도도, 한적한 시골 마을도, 때마침 축제가 열린 영지에도 들렸다. 날씨가 서늘해져 가는 탓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바닷가에서도 며칠 밤을 묵었다.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들으며 청한 잠은 제법 감미로웠다.
유일하게 두 사람이 가지 않은 곳은 산이었다. 중간에 울창한 삼림 덕분에 휴양지로 제법 명성이 자자한 마을이 있었으나, 그곳에는 가지 않았다.
로한의 고향이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음을 기억한 아르펠이 내린 결정이었다. 굳이 그 마을은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르펠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한은 그저 가만히 웃었다. 슬픔 한 자락 묻어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아르펠은 그럼에도 로한이 슬퍼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제 신전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
2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은 신전에 도착할 날도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아이와 헤어질 날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여 키가 훨씬 커 버린 로한을, 아르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의 손바닥 크기만큼이나 컸다. 원래 이맘때 애들은 쑥쑥 크는 걸까?
덕분에 로한을 품에 안으면 아주 애매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몸을 숙이기도, 그렇다고 펴기에도 이상했다. 아이를 들어 올려서 안으려고 하면 다리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키가 컸다며 좋아하는 로한을 보니 저도 기쁘기야 했지만, 아르펠은 영 아쉬운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르펠, 안아 주면 안 돼요?”
그럼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건 스스로 안겨 오는 아이 덕분이었다. 미묘하게 커져 버린 몸이었지만 로한은 그런 몸을 잘도 구겨 기어코 아르펠의 품속을 파고들고는 했다.
남이 보았을 때는 우스꽝스러울 만한 모습이긴 했으나, 적어도 로한과 아르펠은 그것에 만족했다. 두 사람 모두 만족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23
2년 사이 로한은 어리광이 늘었다. 투정을 부린다던가 떼를 쓰는 건 아니었지만, 아르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대부분은 스킨십에 관한 요구였다. 지금처럼 안아 달라고 할 때도 있었고, 전에 한 번 볼 뽀뽀를 해준 게 좋았는지 자기 전마다 볼 뽀뽀를 해달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볼 뽀뽀가 굿나잇 인사처럼 변질된 언젠가의 밤 이후, 로한도 아르펠의 볼에 입을 맞췄다. 당연하게도 잘 자라는 의미였지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곤 이불을 뒤집어쓴 로한을 바라보는 것도 잊고 아르펠은 멍하니 볼을 만지작거리며 밤을 새우고 말았다.
‘…귀여워.’
분명 몸은 컸는데 더 귀여워졌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로한의 귀여움이라 단정 짓게 된 아르펠은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로한을 안아 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2년 동안 제국을 떠돌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던 마부와 수행인들이었으나, 어느샌가 그들도 이것을 휴가로 여기기 시작했다. 아르펠이 딱히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는 날에는 알아서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대충 들어보니 렉시아의 아래에서 상당히 굴려진 모양이었다. 타인에 별 관심이 없는 아르펠이 봐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신수가 훤해졌다.
“신전 방향으로 쭉 갑니까?”
“네.”
마차의 바깥쪽에 있던 마부가 목적지를 물었다. 바로 신전으로 향한다면 대충 하루쯤 걸릴 것이라는 말을 함께 남겼다.
2년의 여정은 이제 단 하루를 앞두고 있었다. 내일이면 신전에 도착한다.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거리던 아르펠은 자연스럽게 로한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는 하나의 버릇처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미소 짓는 예쁜 얼굴이었다.
“…로한. 신전에 가고 싶어?”
그런 질문을 왜 했는지는 모르겠다. 가기 싫다고 답하기를 원했을까?
“음… 딱히 별생각 없어요. 어차피 신전에 가도 아르펠이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며 아르펠은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난 네 가족을 죽인 교단놈들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어쩌면 너와 함께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신관들에 의해 봉인 당할지도 모른다고.
아르펠은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가 로한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두려움을 느낄 리 만무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래. 맞아.”
이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배운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갑작스레 다가온 깨달음은 그를 망설이게 했다. 결국 아르펠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
“하하, 덕분에 휴가 잘 즐겼습니다.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네요.”
“네.”
둘을 신전 앞에 내려준 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동안 아르펠과 로한의 곁에서 이것저것 도와주었던 마부와 수행인들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유일한 어린아이여서 그런지 세 사람은 로한을 꽤 아꼈다. 귀엽게 봐주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비록 부끄럼을 타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경계하는 것인지 로한이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긴 시간 동안 함께 있던 탓에 나름 친숙해지기는 했는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로한의 눈에는 미약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제국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일반적인 신전이라면 모를까, 단 두 개만이 존재하는 중앙 신전은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시간을 따로 정해두었다. 그때가 아니라면 신전으로의 출입을 제한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서 있는 신전의 앞은 아주 휑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풀숲을 뒤흔드는 소리가 전부인 탓일까, 유독 로한에게 붙잡혀 있는 손끝의 감각이 선명했다.
“…로한. 있잖아.”
가만히 서 있던 아르펠이 눈을 내리깔며 망설임 끝에 로한을 불렀다. 아이의 빤한 시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곧바로 다음 말의 운을 떼지 못했다. 잠시간 말이 없는 아르펠을 기다리던 로한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일그러졌다.
“나, 버리려고요?”
“…어?”
“두고 가려고… 신전에 두고 가려고 그러는 거예요?”
마주 잡고 있는 로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을 당기는 힘이 강해진 것도 같았다. 그제야 로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한 아르펠은 아이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리지 마요. 계속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내 가족이 돼 주겠다고….”
신전에 로한을 두고 떠나자고 마음먹었던 것도 한 때에 불과했다. 이제는 그런 상황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신전에 하루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로한과 함께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아르펠은 로한을 두고 떠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아르펠의 본질은 마검이고, 로한은 마검과 계약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였기에 더 눈이 갔다는 건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 함께하는 동안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로한이 어떤 아이인지를 알아가면서 마음 한구석에 스며들고 만 것이다.
“그게 아니야.”
자신의 망설임이 또 아이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채, 잡고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아이의 볼을 쓸었다.
어쩌면 로한은 다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원래부터 눈치가 빠른 아이였으니, 함께 해 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언젠가는 헤어질 미래를 그리고 있던 속내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다 괜찮아진 듯 굴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을 품고 있었을 로한이 안쓰러워, 아르펠은 끓어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내리눌렀다.
“내가…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말하지 못한 거요?”
잘근 물었던 입술에 힘을 풀며 뒷말을 끝맺으려던 찰나였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인기척을 느꼈다. 갑옷이 부딪히는 금속음, 발맞추어 달리며 땅을 박차는 소리, 어서 빨리 아이를 보호하라며 소리치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르펠은 입을 다물고 로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 소음을 들어 보니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긴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로 아이의 머릿결을 정리해 주었다.
“……아르펠?”
“신전에서 널 보호해 줄 거야.”
로한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짐과 동시에, 누군가의 노호가 들렸다.
“로한 님을 보호하라!”
순식간에 다가와 어깨를 억세게 내리누르는 힘을 거부하지 않으며 아르펠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
“아르펠!”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로한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아르펠이 누군가에게 눌려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그것을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다른 손에 붙들려 아르펠에게서 멀어졌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꿈속 한 장면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가던 행동들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잡혀 있는 몸을 비틀며 비명처럼 아르펠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몹쓸 짓을 당하셨을지…….”
“놔요, 놓으라고! 아르펠!”
그들은 일반적인 기사와는 다르게 검은 바탕에 은빛으로 장식되어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마신을 모시는 신전의 기사임을 증명하는 갑옷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로한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양손이 결박당한 채 바닥에 무릎 꿇고 미동도 하지 않는 아르펠이 미친 듯이 걱정되기만 했다.
대열을 맞추어 서 있는 기사들 틈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눈에 띄는 잿빛 머리와 새까만 흑요석 같은 눈을 가진 남자는 로한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한 님. 전 마신을 모시는 중앙 신전의 대신관, 디오넬이라고 합니다.”
“아르펠을… 아르펠을 놔줘.”
“안타깝게도 그건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로한 님의 안전이 염려되어 몸에 손을 댄 것을 용서해 주시길.”
본능적으로 그가 가장 높은 사람임을 눈치챈 로한이 아르펠을 놓아 달라 요구했으나, 디오넬은 대번에 거절했다. 놓아 주기는커녕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두 눈에 담고 아르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왜? 아르펠은 내 가족이야.”
“하하. 그가 당신을 가족이라 하였나요? 아이를 상대로 잘도 기만하셨군요.”
기만.
그 말에 로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디오넬이 아르펠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로한 님의 마을에서 일어난 변고는… 저희의 실책입니다. 마을을 습격한 건 '구원교'이고, 그들은 망령을 숭배하지요. 그리고 이 자는, 그들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아르펠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로한은 아르펠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상관없어.”
“……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로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제야 아르펠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살짝 들린 얼굴에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일렁이는 눈이 그가 제법 혼란스러운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로한은 뚫어져라 그 눈을 마주하며 아르펠의 시선을 제게서 돌리지 않게 하려 애썼다. 동시에 몸을 잡고 있는 손들에게서 벗어나려 팔을 비틀었다.
로한은 어리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눈치가 유독 빠르다는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어봤다. 그런 아이에게 있어서 아르펠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근 2년 사이 덜해지긴 했지만, 로한은 언제나 아르펠이 떠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신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은연중 말을 아끼는 아르펠의 태도 때문에 더욱 그랬다.
24
그러다 그가 ‘망령’이라는 것과 깊이 관계되었음을 알아챘다. 앞서 보았던 구원교의 남자도 아르펠을 ‘간부님’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으나, 로한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르펠이 곤란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아르펠이 망령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곁에 남아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다 그는 명백하게 구원교를 싫어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을에서 일어난 화재는 그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설령 관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의가 아니었겠지.
오히려 로한이 원망하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아르펠은, 아르펠은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줬어. 그런데 당신들은?”
“…로한 님.”
“아르펠이 말해 줬어. 내가 마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우리 마을이 불타고 내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죽은 건 내가 축복받은 아이라는 걸 알게 된 구원교가 벌인 짓인 거잖아…. 당신들은 뭘 했는데?”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목소리에 떨림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담담한 어조였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기사들에 비하여 몸집이 현저하게 작은 아이에 불과했으나, 형형하게 그들을 노려보는 시선은 기가 죽지 않았다. 디오넬은 그 시선에서 선명한 원망을 느끼고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로한의 마을에서 벌어진 일은 신전 측에서도 얼마 전에 알았다. 그것도 마신의 진언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 동의하는 게 아니었어.’
축복받은 이가 유독 어렸기에 가족들과 함께 있을 시간을 조금 더 주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디오넬도 그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그 배려가 그대로 범의 아가리가 되어 아이를 위험에 몰아넣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축복받은 아이의 신상에 대한 정보는 중앙 신전에 있는 신관들만이 안다. 그래서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중앙 신전은 외부와의 소통이 잘 안 되는 편인 바람에 정보를 접하는 것도 늦었다.
디오넬은 신관들이 마신에게 가지는 절대적인 믿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으나, 그 확신이 이번 일의 가장 큰 패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사실은 신전의 역린이 되었다. 어떤 존재가 그를 데려오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 들은 이후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로한이 직접 당신들의 탓이노라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아르펠을 놔줘.”
“…그럴 수 없습니다. 신전의 의무는 망령을 없애는 것. 불순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를 악물은 아이의 발버둥이 거세졌다. 이러다간 로한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어 걱정되었는지, 아이를 붙잡고 있던 기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르펠!”
“…….”
“같이 가요. 빠져나올 수 있잖아요!”
전 여기 있기 싫어요……. 네?
미동도 하지 않는 아르펠을 보며 마침내 아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뱄다. 입술을 잘근 깨문 아르펠은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널 곤란하게 할 거야.”
“아르펠…….”
망연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끊기기 무섭게, 디오넬은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해야겠다 싶었는지 주변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검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아르펠! 안 돼요, 아르펠!!”
지독한 망령의 힘을 몸에 품고 있는 자는 구원교 중에서도 간부밖에 없다. 대개 흉측한 외관을 하고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이도 한 사람쯤 있는 법이다. 아르펠을 내부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구원교를 배신한 간부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디오넬은 그를 즉결 처분할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로한의 반항이 강해졌다. 곤란한 낯을 하던 디오넬은 로한을 잡고 있는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빤히 응시하는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 아이의 몸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뒤를 딱 기절만 시킬 정도의 힘으로 내리쳤다. 일단 격렬하게 반항하는 로한을 기절시키고 빠르게 처분을 진행할 셈이었다.
“윽!”
동시에 시야가 번쩍했다. 로한의 손에 매달려 숨을 죽이고 있던 팔찌형 아티팩트가 발동한 것이다.
효과를 발하기 전까지는 기운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평범한 장신구와 다를 바가 없는 아티팩트다. 단연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고, 디오넬마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기사들의 억누름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던 아르펠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보호용 아티팩트가 발동했다는 건 공격을 받았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눈치채는 순간, 아르펠은 정말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자신의 존재가 아이를 곤란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마신의 축복을 받아버린 이상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신전에 몸을 의탁해야 했다. 로한은 정보가 바깥으로 새어 나간 상황이었으니 그들의 보호 없이 움직였다간 습격받기 십상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야 신전과 정면충돌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로한에게 접근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신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든 신전과의 충돌이 있었다는 뜻이고, 그런 상황을 들킨다면 아이의 목숨이 노려지기 딱 좋았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르펠로선 그저 이 상황을 감내하는 게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아르펠!”
그런데 감히 공격을 해?
눈앞이 새빨갛게 변하는 기분을 만끽한 아르펠은 간신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까딱하면 바닥을 세차게 맴돌고 있는 그림자가 날카롭게 튀어나와 모든 이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기사들의 몸을 제치고 로한에게 다가간 아르펠이 자신의 움직임에 반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기사를 발로 걷어찼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건지, 멍하니 서 있던 로한이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드디어 자신의 곁으로 와 준 아르펠에게 안겨든 것이다.
익숙하게 로한을 안아 든 아르펠은 곧장 주위에 서 있는 모든 기사들의 몸을 그림자로 묶어 버렸다. 아직은 피 칠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몸을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이건…… 마력?”
혼란스러움이 한가득 어린 목소리였으나 아르펠의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자길 버리지 말라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로한을 달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아르펠, 아르페엘…….”
“쉬이. 미안해. 울지 마, 로한.”
아르펠이 붙잡혀 있는 내내 의연하게 굴었던 로한은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아르펠은 자신의 행동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만약 처음으로 되돌아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기사들의 손길에 순응할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로한이 피해를 입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허겁지겁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적대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살벌한 시선이 신관들을 향했다. 정확히는 한가운데에 서 있는 디오넬이라는 신관을 향해서였다.
“당신이, 어떻게 마력을…….”
“말해 줄 의무는 없을 것 같은데.”
성력과 마력은 양립할 수 없다. 그건 망령의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궤가 다른 힘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것이 통용되는 상식이었다.
아르펠에게서는 망령의 힘이 더 강하게 느껴졌고, 미묘한 마력의 기운 또한 감지했으나 마신의 축복을 받은 로한이 내내 곁에 머물러 있었을 테니 그로 인한 흔적이라고 여겼다.
애초에 두 힘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았으니 아르펠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힘을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 전, 아르펠은 마력을 썼다. 기사들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묶고 있는 그림자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한 마력의 향이 풍겼다.
세상의 진리처럼 여기던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의 훌쩍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혼란과 정적이 사방에 가득 내려앉았다.
“…저희의 결례를 사과드립니다. 제 아집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온 이들이니 부디 힘을 거둬 주십시오.”
“디오넬 님!”
“마신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잠시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디오넬이 고개를 숙였다. 비록 그림자에 묶이기는 했으나 옆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를 말리려 들던 이들이 하나같이 행동을 멈춘 것은 살짝 고개를 들은 디오넬의 눈 색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뒤따른 말은 신관들에게 경악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마신’은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거룩하고,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 존재가 저들을 부른다는 말은… 수많은 시선이 아르펠과 로한을 향해 쏟아졌다.
“지, 진언이 내려온 겁니까?”
중앙 신전의 대신관은 특별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축복받은 이를 제외하고는 성력이나 마력의 양이 가장 많은 자여야 했으며, 동시에 신실해야 했고, 대신관이 되기 위한 의식을 치르며 신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신의 인정을 받고 대신관의 자리에 오르면 신의 진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신의 인정이라는 과정이 중요했다. 삿된 마음을 품거나 사리사욕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판단되면 신은 가차 없이 의식을 중단했다. 역사 속에서도 그렇게 자리에서 박탈된 대신관 후보들이 제법 있었다.
이번 세대의 대신관인 디오넬은 조금 더 특이한 경우였다. 역대 대신관 중에서도 마력이 가장 많았으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신실했고 청렴했다.
그 노고를 알아주었던 것일까? 그는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뒤 신의 진언을 들을 때마다 검은색이었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 색은 보라색이었다.
25
“아이에게 제대로 사과한다면.”
아르펠과 색이 비슷해진 눈이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적의를 보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물론, 아르펠은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도 별 내색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로한 님께는 계속해서 결례만 저지르는 것 같군요.”
“…아르펠한테 손대지 마.”
“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로한은 울음이 다 그치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르펠의 목을 더 꼭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그런 로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디오넬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디오넬이 자신의 이름을 건다고 하자 낯이 창백해지고 말았으나,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 중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아르펠이 그림자를 풀었다. 얇고 긴 그림자들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흔들리다가 바닥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럴, 이럴 수는 없습니다. 망령의 힘을 가진 자를 어찌 신전에 들일 생각을 하십니까!”
“장로.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마신께서 저분을 부르고 계시다고.”
그분의 목소리를 무시할 셈입니까?
상당히 못마땅하고 억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던 노인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림자를 풀었으나 아까와 같이 아르펠의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몇몇 날카로운 시선이 머물기는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그럼 절 따라와 주시길.”
“그, 로한 님이라도 제가….”
“아르펠이랑 같이 있을래요…… 네?”
“…그래.”
미련을 놓지 못한 목소리는 반쯤 무시되었다. 분명 말을 꺼낸 건 옆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늙은 장로였음에도 불구하고, 로한은 단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아르펠을 향해 속삭여 물었다.
열이 다시 오르면 어쩌지. 발갛게 물든 눈매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응시하던 아르펠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물론 아르펠도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봉인되거나, 되지 않거나. 딱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신에게서 반응이 나타났다.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존재였다.
이 세계의 신이란 어떤 존재일까. 품에 안긴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 규칙적으로 볼을 쓰다듬어 주고 괜찮다고 속삭이는 것을 반복하다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아르펠이 쥐고 있는 권능도 마신으로부터 파생됐다. 갑자기 대신관이 태도를 바꾼 것도 마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언’이라는 말을 언뜻 들었으니, 신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신은.
'이세계의 영혼이 들어온 것도 알고 있을까.'
마검이든 성검이든 그중 사람과 명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사람으로 변하는 기묘한 능력을 지닌 건 더더욱 없었다. 아르펠 또한 자신의 특별함이 사람이었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영혼이 마검에 깃든 탓이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물론 같이 들어가셔도 무관합니다.
디오넬이 기사들조차 물리고 아르펠과 로한을 데려온 곳은 중앙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기도실이었다. 사람 키의 서너 배는 될 것 같은 커다란 문이 열리고 생각보다 화려하지는 않은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쪽에 있는 것은 검은빛의 신상과 예배를 할 때 사용하는 것 같은 간단한 소도구가 다였다. 그러나 사뭇 경건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알 수 없는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솔솔 피어나는 곳이라, 현실과의 괴리감이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아르펠과 로한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 디오넬은 그대로 문을 닫았다. 바깥쪽에서 지키고 있겠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커다란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아르펠이 쓰러져서. 쓰러져서 검으로 변했어. 어떻게 해야…!”
“……역시.”
문이 열리고 빼꼼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한이었다. 아르펠의 품에 안겨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다시 눈 끝에 매달려 있었다.
작은 몸으로는 문이 무거웠는지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일단 아이가 받치고 있는 문을 잡아 주고 안쪽의 상황을 살핀 디오넬은 아르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바닥에 툭 떨어져 있는 검은색의 칼자루 하나를 확인하곤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아르펠과 대립하고 있을 때 디오넬은 마신의 진언을 받았다.
<걔 내 앞에 데려와 봐.>
딱 용건만을 전달한 짧은 말 한마디였으나, 디오넬은 그 순간 구원교의 간부라 단정 지었던 아르펠의 정체에 의구심을 느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나보겠다 한 적이 없는 분인 데다가, 자신 못지않게 망령을 증오하셨으니 정말로 저 남자가 구원교에 깊이 관여를 했다면 데려오라는 진언을 내리실 리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아르펠이 쓴 마력은 자신의 힘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격이 높았다.
언젠가 딱 한 번 눈앞에서 본 적이 있던 마검의 힘과 비슷했다.
그 생각에 확신이 선 것은 지금 그의 눈 앞에 보이는 상황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전대 대신관을 보필했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마신의 권능 중에서도 강력한 축에 속하는, 그림자의 권능 일부를 담은 마검.
그는 20년 전 어느 날, 연유를 알 수 없는 사고에 휘말려 분실되었던 검이었다.
***
기도실에 들어가 로한을 바닥에 내려주자마자, 아르펠은 의식을 잃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거대한 충격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아프다는 의미의 충격이 아니었다. 마치 정신이 분리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눈앞의 광경이 바뀌기 직전, 허물어지는 시야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눈을 하던 로한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하하! 예상은 했지만 신기하네.>
그리고 들린 것은 경박한 목소리였다.
초점이 뭉개졌다가 되돌아온 시야는 온통 새하얬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새까만 머리를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아르펠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는 보랏빛 눈을 한껏 접어 웃으며 자리에 퍼질러 앉아 있는 이가 있었다.
위엄 있는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제 안에서 감응하는 권능의 힘을 느끼면서, 아르펠은 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가 다름 아닌 마신임을 깨달았다.
“절 만나고 싶어 하셨다 들었습니다.”
<맞아. 이래 봬도 넌 내 아픈 손가락이거든.>
아르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애초에 별다른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마신이 손가락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여기 앉아 봐.>
당연하게도 거부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계속 로한의 표정이 맴돌고 있었지만, 아르펠은 일단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권능의 일부를 담고 있는 탓일까, 특이하게도 마신에게서 미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의외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넌 신들이 뭐라고 생각하냐?>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래? 난 뭐, 전지전능한 세계의 창조자- 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는데. 이런 취급도 참 신선하네.>
마신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공중에서 찻잔이 두 개 튀어나왔다. 그리곤 안쪽에서부터 찻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잔 하나를 건네는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전지전능하다고 착각하지. 나와 천신 나부랭이, 그리고… 미친놈 하나가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맞지만 딱 거기까지야.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차의 맛은 예상외로 달큼했다. 생긴 것과는 달리 달달한 것이 취향인 모양이었다.
아르펠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신은 혼자서 술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새하얀 공간이라서 그런지 그의 모습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세계를 창조한 그 순간부터, 신의 탄생을 주도한 ‘무(無)의 의지’가 세계의 이치를 주관하기 시작하지. 신들은 그것에 손을 댈 수 없어. 그렇게 정해져 있지. 그리고 우리는, 그걸 ‘운명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운명력이요.”
<그래. 많고 많은 마검들 중 하필이면 너를 만들 때 어디서 흘러 들어온지 모를 이세계의 영혼이 섞여 버린 것도 그 운명력 때문 아니겠어?>
역시 알고 있었다.
이세계의 영혼이라고 불린 감회가 남달랐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그보다는 운명력이라는 그 단어의 어감이 계속해서 입안에 맴돌았다.
<어쩌면 그렇게 탄생한 네가 세상을 돌고 돌아, 그 아이의 곁에 서게 된 것도 운명력이 이끈 것일지도 모르지.>
마신은 아르펠이 로한과 만났던 과거를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는 이제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운명이라는 그 단어 하나만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유 모를 만족감이 퐁퐁 솟아올랐다.
<입 찢어지는 거 봐라.>
입꼬리를 매만졌지만 평소와 같았다.
<이 말을 해 주려고 널 부른 건 아닌데… 뭐. 궁금한 것도 풀렸겠다. 선물이라도 줘야 하나?>
“궁금했던 게 뭡니까?”
<아, 난 마검한테 사람으로 변하는 능력은 부여한 적이 없으니까. 이세계의 영혼인 네가 딸려 들어가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킨 건지 궁금했지. 그게 예기치 못한 우연으로 가지게 된 마검의 고유한 능력인가, 그것도 아니면 네 영혼과 공명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인가.>
어딘가를 뒤적거리는 기묘한 손짓을 하며 마신이 중얼거렸다. 그 손짓에 시선을 고정하던 아르펠이 인상을 미묘하게 찌푸리며 물었다.
“…일시적인 겁니까?”
<그래, 일시적. 뭐, 걱정하지는 마. 네 영혼이 마검이 딱 달라붙어 있는 한 그 재미있는 능력은 계속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영혼이 여기 있는 지금에야 검으로 돌아갔겠지만.>
시야가 허물어지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럼 로한은 달랑 검 한 자루만 마주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아이에 대한 걱정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자, 이거 가져. 네 예비 계약자한테 몸에서 떼어놓지 말라고 전해라.>
“로한은 귀 안 뚫었습니다.”
<내 알 바야? 네가 뚫던지.>
마신이 대충 던지듯 건넨 것은 보라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단조로운 귀걸이였다. 딱히 화려한 외관은 아니었으니 남자든 여자든 착용하는 데에 별 부담이 없을 듯했다.
26
말랑하고 작기만 한 아이의 귓불을 떠올린 아르펠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귀걸이의 끝이 날카로워 보였다.
<신의 안배는 함부로 안 뿌려 주니까 그냥 곱게 받아 가.>
물론 딱 인상만 찌푸렸다. 귀걸이는 곱게 주머니 안에 넣어 놓았다. 신의 안배이니 어찌 됐든 로한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오히려 도움이 됐으면 모를까. 아주 조금, 못마땅한 것뿐이었다.
이왕이면 반지로 주지.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작은 아이의 몸에 귀걸이를 걸기 위해 굳이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사실이 별로였다.
아르펠에게서는 거의 관찰할 수 없는 뚱한 얼굴이었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는 마신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 아빠 힘없다.>
귀걸이를 준 것에 대한, 아주 조금의 뚱함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얼굴이 그 말에 역변하고야 말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을 보는 시선이었다. 신을 응시하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상당히 불경한 눈이었으나 정작 신이라는 작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네 아빠지. 내 얼굴도 똑 떼서 가져다 쓰는구만.>
인간 세상에서는 태어나게 해 준 존재를 아빠, 엄마라 부른다며?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는 말이 참 뻔뻔했다. 그보다는 얼굴이 닮았다는 소리에 더 짜증이 났다. 딱히 의식하지 못 했는데 얼마 전 거울로 봤던 자신의 얼굴과 눈앞의 상판이 비슷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표정이 왜 그러지? 나 나름 잘났는데. 천신, 그 영감탱이도 내 얼굴은 인정했는데?>
“어디로 나가야 합니까.”
<그건 저기…… 아니. 야! 말은 하고 가야지!>
“안배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답도 하지 않고 반쯤 도망치다시피 빠져나가 버린 아르펠에 홀로 남겨진 마신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세상 저렇게 불경한 놈은 없을 거라며. 하지만 그런 점이 유독 마음에 든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몇 초간 멍했던 눈이 뒤늦게 돌아왔다.
익숙하게 손을 휘저었다. 온통 새하얗기만 했던 공간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바닥부터 시작해 색색의 꽃이 만개한 정원이 펼쳐졌다.
그 누가 와도 세상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쏟아지는 감동의 물결에 눈물을 흘릴 만한 곳이었으나, 정작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신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흥미로 반짝였던 눈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금세 무감해지고 말았다.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이 가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지켜볼 재미는 있겠어.>
그 아이를 보는 것이라면 제법 유쾌할 것도 같았다.
열심히 나눈 대화를 상기하던 마신이 아, 하는 작은 소리를 흘렸다. 깜빡거리는 눈은 언뜻 보면 냉한 기운을 풍기는 외모와는 다르게 조금 맹해 보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걸 까먹었네.>
하필이면 몹쓸 짓을 당해 강제로 더러운 힘을 품게 되지 않았던가. 당장 그것을 지워 주지는 못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을 내려줄 수는 있을 거다.
당연히 전해 주는 이는 대신관이었다. 제법 착실해 마음에 드는 놈이었던 터라 곧장 말을 들을 것이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망령의 일에 지나치게 눈이 돌아버린다는 거지만… 자신이 중재해 주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꽃이 만개하여 살랑이는 정원의 사이를 산책하듯 느린 발걸음으로 걸었다. 아르펠을 떠올린 마신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감돌았다.
그 고리타분한 의지는 너에게서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오랜만에 기분이 잔뜩 들뜨고 말았다.
***
눈을 떴지만 시야가 이상했다. 한참 생각을 더듬어 보다, 뒤늦게 자신이 검인 채로 정신을 잃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로한이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다는 것도.
<로한.>
“……아르펠? 아르펠이에요?”
<그래. 걱정했니?>
“전, 전 아르펠이 사라진 줄 알고.”
커다란 눈망울에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잠시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다, 아이의 눈물이 툭툭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급하게 모습을 바꿨다. 눈앞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익숙하게 돌아온 모습에 로한이 곧장 아르펠의 몸을 끌어안았다.
“사라지지 마요… 흑. 끄읍. 혼자 남기 싫단 말이에요. 네…?”
“로한. 로한… 울지 마. 응?”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르펠의 표정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발갛게 부은 눈두덩이를 살살 훑어주는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숨이 넘어가게 우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토닥였다. 눈물에 흠뻑 젖고 열까지 오르고 있는 볼에 반복해서 입을 맞췄다. 짭짤한 눈물 내음이 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을 뻔한 것처럼 펑펑 눈물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 이제 어디 가지 마요. 계속 내 옆에 있어요….”
“쉬이. 약속할게. 그만 울자, 이러다 탈 나. 응? 제발.”
“약속해 주면…….”
“그래. 약속할게.”
여전히 크기 차이가 큰 두 새끼손가락이 얽혔다. 그제야 서서히 울음을 그친 로한이 히끅, 딸꾹질하며 아르펠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이를 꼭 끌어안으면서 아르펠이 생각했다.
앞으로의 여생은 이 아이를 위해 살겠다고.
아르펠이 자신의 권능에 대고 한 첫 번째 맹세였다.
***
한참을 달래 주었으나 로한은 아르펠의 품 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내려주려 몸을 움직이면 금세 물기가 서리기 시작하는 눈동자에 어쩔 수 없이 몸을 고쳐 안았다. 아주 조금, 기꺼움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디오넬은 기도실의 앞쪽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일방적인 반말이었던 것이 무색하게, 아르펠은 존댓말로 대답했다.
아르펠의 눈에는 디오넬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그저 길가를 거닐며 수없이 지나치고 어쩌다 잠깐 부딪힐 수도 있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 상대를 보는 눈. 그게 다였다.
그 순간 디오넬은 이 남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본질은 마검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눈에 띄는 감정의 변화를 보인 것은 로한과 관련된 일이 유일했다. 애초에 그가 마력까지 드러내 가며 살기를 내보였던 건 로한이 공격받은 순간, 딱 한 번뿐이었다.
아르펠의 품에 안긴 채로 이쪽으로는 시선 한 점 주지 않는 로한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디오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과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망령의 힘에 눈이 멀어 신실한 이들을 이용한 것은 저이니까요. 거기다, 20년 전 당신을 분실한 일도 온전히 신전의 책임입니다.”
아르펠은 말없이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분실. 사실 그는 마검이 구원교 측에 넘어가 망령의 힘을 주입하는 실험을 당해 타락했다는 것 말고는 딱히 아는 것이 없었다. 어떤 과정으로 구원교에 넘어간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거니와, 자신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작된 건 로한의 마을에서부터였다. 그 전의 일은 단순히 글로만 읽었던 한 줄짜리 과거에 불과했다. 그저 신전에 있을 구원교의 첩자가 벌인 짓이겠거니 넘겨짚을 뿐이었다.
아르펠이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더 원한다고 생각했는지, 디오넬이 죄책감으로 침잠한 눈을 내리깔며 읊조렸다.
“당시 전대 대신관께서는 황실과의 협력을 공고히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외부의 인사들과 귀족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최하고 그 자리에서 새로이 내려온 마검을, 그러니까 당신을 선보이고자 하셨죠. 운반하는 과정에서 사달이 나 결국 마검을 분실했지만 말입니다.”
“이곳에 첩자가 있음을 의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당시 운반을 담당했던 사람과 사고 후 수색을 진행한 책임자를 문책해 보셔야겠군요.”
그래요. 그렇죠.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던 디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이 신전의 어딘가를 좀먹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건 눈치챈 지 오래였다.
당시 마검을 분실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당연하게도 전대 대신관은 마신의 분노를 샀다. 애초에 연회에서 타인의 눈요깃거리를 위하여 마검을 선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많은 신관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던 터라, 그는 일사천리로 대신관의 자리에서 파면되었다.
그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간 것과 더불어 갑작스레 대신관의 자리가 공석이 된 일은 신전에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우연인지 누군가의 모략으로 인한 것인지, 당시의 책임자를 문책하는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디오넬은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신전의 역사상 마검을 분실한 일은 없었고, 당시의 고위 신관과 장로들은 그 사건을 신전의 수치로 여겼다. 그때의 상황을 설명한 웬만한 기록들이 신전 내에서 말소된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뒤늦게 마검을 다시 찾아보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행방을 알 단서가 없었다. 마신께 도움을 청해 봐도 ‘간섭할 수 없다’는 대답만이 내려왔다.
복잡한 심경을 한가득 담은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르펠이 입을 열었다.
“저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거래라니, 무슨…?”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마주본 눈이 마구 떨렸다.
아르펠에게는 이 일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디오넬이 추측한 것이 옳든 틀리든, 신전에 첩자가 남아있다는 것부터가 로한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테니.
“제가 그 일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안했다.
상황이 틀어진다고 하더라도 직접 나선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아르펠은 디오넬의 추측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마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일련의 사건을 벌인 당사자라면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감정적인 동요를 눈여겨 볼 셈이었다.
27
한편, 디오넬은 아르펠이 마검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막중한 죄책감을 느꼈다. 분실한 마검은 다름 아닌 구원교의 수중으로 넘어갔던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 마검의 분실, 기록의 말소, 구원교의 실험, 로한에 대한 정보의 유출과 마을에서의 변고. 모든 것들이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디오넬 또한 첩자의 정체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남아 있는 자료는 거의 없었고, 첩자로 의심되는 상대는 제법 신실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었기에 따르는 신관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움직인다고 해 봤자 대신관의 자리만이 위태로워질 뿐이다. 디오넬 외에 제대로 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자가 없었으니, 만에 하나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일을 파헤칠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게 분명했다.
“대신 당신은 이 아이의 영원한 우군이 되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사실 아르펠에게 도움을 청하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모든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였으니까. 비록 아르펠은 딱히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였으나, 이 사실을 알리 없는 디오넬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신전의 탓이었다. 검의 분실부터 시작해 강제로 망령의 힘을 주입 당한 것, 간신히 빠져나와 로한과 만나 그를 안전하게 신전에 데려왔음에도 무작정 제압한 것까지.
디오넬은 도저히 염치없이 그에게 부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직접 제안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제 이름,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까지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든 로한 님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르펠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로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왜 망령의 끄나풀로 오해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보라색 눈에는 아이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호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디오넬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가 망령의 힘에 감화되어 있든 아니든, 아르펠이 로한에게 해를 입힐 일은 없을 것이다. 디오넬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의 일을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음. 곧바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와중에도 변함없이 아르펠의 품에 파고들어 안겨 있는 로한을 디오넬이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상관없습니다.”
확실한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당장 장로들을 불러 모으겠다며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결국 복도에 남은 건 아르펠과 로한, 단 둘뿐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
“…네에.”
느릿하게 아이의 등을 쓸어 준 아르펠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동 없이 딱 달라붙어 있던 로한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운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에 서서히 온기가 감돌았다.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존귀해서 함부로 만지지 못하는 보석에 손을 대는 것처럼, 아르펠이 솜털 같은 손길로 아이의 얼굴을 보듬었다.
얼굴을 작게 비비적대던 로한이 아르펠의 손에 볼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말했다.
“아르펠, 그 사람들이 아르펠을 괴롭힌 거예요?”
“…그런 셈이지.”
첩자에 관해 묻는 말이었다. 기억조차 없는 먼 옛날이었으나 일단은 맞는 말이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폭 묻은 채로 속눈썹을 내리깔며 소곤거린 로한의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계속해서 그랬을 것이다.
“앞으로 제가 지켜 줄게요.”
잠시 멈칫한 아르펠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우느라 조금 붓긴 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매가 고운 선을 그리며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꽃이 만개하는 듯했다.
결국 아르펠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로한을 꽉 끌어안았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울렁거리는 기분마저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작고 소중한 아이와 계속해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
이 세상에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법이다.
그것은 가족, 친구, 연인이 될 수 있으며, 또는 단순히 누군가와의 관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누군들 이를 잃고 싶어 할까?
그런 의미에서 로한은 아르펠에게 맹목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모조리 잃었다. 그러한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유일하게 곁에 남아 준 존재. 이제는 그가 검이든 사람이든 로한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아르펠’이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잃은 공허와 아직 그의 곁에는 누군가 남아 있다는 희망, 그리고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은 그 대상을 맹목적으로 따르다 못해 자신의 세계로 인지하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 온 지 모를 기묘한 존재여서일까, 혹은 함께 있어 주겠다며 속삭이지만 언제고 떠날 때를 그리는 솔직한 눈동자 때문일까. 로한은 아르펠과의 관계를 위태롭다고 여겼고, 곁에 남아 있으려 애썼다.
그리하여 로한의 모든 행동이 아르펠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세계가 처음으로 부서질 뻔했다. 아니, 반쯤 부서졌다.
‘아르펠!’
로한은 아직도 아르펠이 수많은 손에 억눌려 바닥에 무릎 꿇려지던 순간을, 내가 너를 곤란하게 할 거라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그의 하얀 목에 가져다 댄 날카로운 칼날을 잊지 못했다.
그 순간의 아르펠은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한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날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떠나버린다면, 로한은 또다시 그의 세상을 잃는 것이다.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는 공포였다.
아르펠이 되돌아와 몸을 꽉 끌어안아 주었음에도 그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한 번 결심했는데 다시 결심하는 것이 어려울까?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르펠은 이런 상황에 다시금 처한다면,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날이 다시 온다면, 그때는 아르펠이 제 곁에 돌아와 준다는 보장마저 없다.
‘…강해져야 해.’
아르펠이 자신을 ‘지켜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로한은 그의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영원히 그가 곁에 남아있기를 바랐다.
‘내가 아르펠의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
로한이 아르펠을 그의 세계로 인지하듯, 아르펠도 그랬으면 했다. 차라리 이 세상에 단둘만 남는다면… 실없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르펠은 신전이 그를 보호해 줄 것이라 했다. 그러니 신전으로 가야 한다고. 가든 말든 상관이 없었지만, 로한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에게는 아르펠이 가자고 하는 곳이 곧 그의 목적지였다. 옆에 있어 준다면 어딜 가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신전에 도착하고, 자신을 보호하라 외쳤던 사람들이 모조리 아르펠을 공격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로한은 이젠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보호라는 명목하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려 했던 신전이 그랬고, 끝까지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민 손에 붙잡혀 주지 않은 아르펠이 그랬다.
아르펠은 로한의 세상이다. 온 세상이 그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믿음과는 별개였다. 로한은 더 이상 아르펠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이런 일이 온다면, 아르펠은 또다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을 놓아버릴 테니까.
“로한.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몸을 꽉 끌어안아 주고 있던 아르펠이 고개를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머리가 뜨거운 것 같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걱정만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로한의 마음을 알 리도 없고, 만약 알았어도 걱정을 그만둘 수 있을 리가 없는 아르펠은 그의 몸을 고쳐 안으며 이마에 손바닥을 대어 보았다. 시원한 냉기 때문일까, 로한이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 손이 주는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이 두렵다. 뚝뚝 끊어지는 생각임에도, 로한은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르펠의 몸이 허물어지며 검으로 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 때의 기억이 잔영처럼 남고 말았다. 떨어져 나가려는 손바닥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얼굴을 기댔다. 멈칫하는가 싶던 손가락이 로한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서….”
“응?”
“어서 크고 싶어요… 빨리…….”
눈을 감았다 뜨기만 했는데도 몸이 훌쩍 커버린 상상을 해 보았다. 보잘것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르펠만큼, 어쩌면 아르펠보다 더 커지는 날이 온다면… 로한은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쌔근거리며 잠이 든 아이를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울었으니 열이 오를 것 같다는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일단은 제 낮은 체온으로 머리를 식혀 주고 있었지만 어서 약을 먹이고 침대 위에 눕히는 것이 나았다. 그렇다고 신관 중 아무나 붙잡아 로한을 맡기자니 그건 또 싫었다.
로한과 함께 하는 내내, 정확히는 아이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생각해 버렸던 어느 날의 이후로. 언젠가는 그와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달고 살았던 아르펠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동시에 이기적인 본심이 드러나 버렸다.
아이가 의지하고 따르는 보호자는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했다. 보살펴 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졸졸 따라다닐 로한을 생각하자 괜히 배알이 꼴렸다.
“아르펠님.”
조용한 복도에서 서로만 있는 것처럼 굴던 아르펠과 로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건 고지식하게 생긴 한 남자였다. 한쪽으로 늘어뜨려 묶은 옅은 블론디 계열의 머리카락, 오른쪽 눈에 쓰고 있는 모노클, 창백한 피부색의 남자는 딱딱한 표정 때문인지 상당히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아르펠이었으나 남자는 그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디오넬 님이 찾으십니다.”
“…아이에게 먹일 만한 약이 있습니까?”
“약이요.”
모노클의 끝을 몇 번 만지작거리며 로한을 응시하던 그는 머지않아 손을 가까이 대었다. 아르펠의 표정이 빠르게 굳자 그대로 멈추고선 설명을 덧붙였다.
“짧은 축성을 해드리겠습니다.”
“……축성. 그렇군요.”
신관들에게 주어진 성력과 마력. 두 힘의 주된 목적은 망령을 흙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었으나 보호와 치유에 뛰어난 효과를 보이기도 했다. 죽을병을 단숨에 치료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볍게 앓는 감기 정도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28
남자의 손이 로한의 머리에 닿고, 잠깐 까만빛이 손끝에 매달리는가 싶더니 체온이 빠르게 낮아졌다.
아이의 옷을 만지작거리는 아르펠의 표정이 묘했다. 손을 거두고는 아르펠에게 시선을 돌린 남자에게도 그 속뜻이 훤히 읽힐 정도였다. 뒤따른 시선이 흘끗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마력이 있으시니 축성은 곧잘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아르펠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력이나 마력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발현했다. 다만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그 힘 자체일 뿐이지, 쓰는 방법이나 움직이는 방법은 천천히 배워야 했다.
아르펠 역시 비슷했다. 그림자야 마신의 내려준 권능이니 처음부터 다루는 법을 깨우친 힘이었으나 일반적인 마력을 사용하는 건 손 위에 띄우는 게 고작이었다. 마검답게 마력의 양은 방대했지만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탓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에 죄책감이 살며시 떠올랐다. 알고 있었다면 여태껏 열에 올라 허덕이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가슴 졸이며 지켜만 봐야 했던 일도 없었을 테고, 로한도 아프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역시 신전에 더 빨리 데려왔어야 했나.
자신의 욕심으로 아이의 배울 기회를 앗아가고 멋대로 굴어버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오늘처럼 로한이 아무 말도 않고 끙끙 앓을 때면 그런 후회가 머릿속에 안개처럼 짙게 자리 잡았다.
“…디오넬 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앞서 나가는 남자를 따라 발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자 탁 트인 홀이 드러났다.
수없이 많은 갈림길 중 익숙하게 한쪽 방향으로 들어선 남자가 구석진 곳에 나 있는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디오넬이었다.
“…로한 님이 주무시는군요.”
“눕힐만한 곳이 있습니까.”
“앞쪽의 방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옆쪽은… 지금 모을 수 있는 장로와 고위 신관들을 모두 들여보낸 탓에 소란스럽거든요.”
그가 말한 방으로 가며 로한을 눕히기 직전까지, 디오넬은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첩자가 누구인지 세세하게 말했다.
추측이 맞는지 검증받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아르펠은 첩자를 색출할 방법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정체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굳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던 터라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디오넬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된 듯했다.
아이가 깨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피로했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축성을 받은 탓인지 세상모르고 곤히 자기만 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마저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나서야 아르펠이 로한을 등졌다.
신전의 쥐새끼를 잡으러 갈 시간이었다.
***
디오넬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르펠은 여럿의 적의 어린 시선을 느꼈다. 물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태도에 더 열이 나는 이들이 있는 듯도 했다.
“대신관님. 전 아직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고 술렁이던 내부의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는 것 같자, 상석에 앉아 있던 장로 중 하나가 발언권을 얻고 말했다.
반쯤 소리치는 목소리에는 상당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디오넬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주장을 넘겼다.
“물론 그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네? 다른 이야기라뇨?”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그들의 신이 아르펠을 신전 안으로 들였다고는 하나, 아르펠이 마검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디오넬을 제외하면 여전히 그를 경멸하는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디오넬이 장로와 고위 신관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순히 참석한 이들은 이번 회의 주제가 아르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라니? 영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다수의 눈살이 찌푸려졌을 때였다.
“20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20년 전이라면…… 그 분실한 마검 말이군요.”
앞쪽에 앉아 있던 나이든 장로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일을 신전의 수치로 취급하며 기록을 지워나갔지만, 중앙 신전에 소속된 신관들이라면 모두가 그 이야기를 알았다. 단지 눈에 띄지 않게 쉬쉬할 뿐이다.
“장로!”
“다 떠들고 돌아다니더만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굽니까.”
얼굴이 시뻘게져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다른 노인 하나를 보며 마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장로가 혀를 쯧 찼다. 덕분에 내부의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크흠. 큼…… 대신관님.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당시 마검은 분실되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최근, 마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에 대한 정보가 바깥으로 흘러나갔죠. 아이의 마을에서 변고가 일어났음은 모두 들었을 겁니다.”
“거, 저 망측한 힘을 가진 놈이 저질러놓곤 나 몰라라 연기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로한 님이 저 자를 따를 리가……!”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면 말이 되는 줄 아나?”
내내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마치 인형을 연상시키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던 아르펠이 로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불쾌함과 살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에 막말하던 장로 하나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선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일련의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신전 안의 누군가가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아르펠의 표정을 흘끗 살피며 뒤따라 말한 디오넬에 의해, 이미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던 내부의 분위기가 완전히 싸하게 식어 버렸다.
격한 반응이 터진 것은 잠시 뒤였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첩자라뇨!”
“신성한 신전 안에서 그런 무뢰배가 있을 리는…!”
“그럼 이 모든 일을 설명할 방법이 있으십니까?”
당연하게도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는 사실쯤은. 그럴 리가 없다며 대답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기에, 그저 반사적인 행동으로 격하게 부정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대신관님은 누구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저희를 한 곳에 불러 모으신 건 이미 그자의 정체를 어느 정도 유추했다는 뜻일 텐데요.”
아까 전 마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던 여자 장로였다. 걸치고 있는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리며 침착하게 묻긴 했으나, 그녀 역시 얼굴에 혼란의 기색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길버트 장로님.”
“…….”
“장로님은 20년 전 마검의 분실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맡으셨습니다. 그렇지요?”
“…지금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내내 말이 없던 장로 중 하나가 아르펠의 부름에 답했다. 상당히 어이가 없다는 듯 눈매가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대신관님. 길버트 장로님께서 그럴 리는 없으십니다!”
“맞습니다. 항상 저희를 신실하게 이끌어 주시는 분이….”
뒤쪽에 앉아 있던 고위 신관들에게서 여러 말이 터져 나왔다. 디오넬도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은근히 세력을 키워나가던 꼴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못 본 척 넘긴 것에 불과했다. 그들의 신을 향한 마음을 다잡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괜히 알력싸움을 하며 신전 내에서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어쩌면 그 안일한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디오넬의 얼굴에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대신관님. 저도 참 안타깝습니다. 분명 그 일은 제 실책이 맞습니다. 결국 마검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를 의심하시다니요?”
“당시의 기록을 모두 말소한 이유는 뭡니까?”
“…그건 모든 장로들이 동의한 바입니다.”
기록이 말소된 시기는 디오넬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시기이자, 대신관이 선택되지 않아 장로들 간에 여러 갈등이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의견은, 마검을 분실한 사건에 대한 기록을 말소하자는 의견만은 만장일치로 통과했었다.
“분명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장로는 기억할 겁니다. 사건에 대한 기록을 말소하자는 주장을 꺼낸 사람이 누구인지.”
숨도 쉬지 못할 것처럼 꽉 막히는 고요가 그들의 사이에서 흘렀다. 잠시간 말문을 잃었던 길버트가 소리쳤다.
“이건 억측입니다! 더 이상 증거 없이 절 몰아간다면 이 자리에 제가 있을 이유는 없는 것 같군요.”
“전 당시 마검이 분실되었던 사고와 이번 로한 님께 일어난 사건이 같은 인물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관님!”
“목소리를 낮추시죠, 장로님.”
아르펠을 디오넬에게 안내해 주고 난 이후, 그의 곁에 서서는 침묵을 지키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낮게 읊조린 경고에 버럭 소리를 질렀던 길버트가 입을 꾹 다물며 자리에 앉았다.
“억지라고 주장하는 길버트 장로님의 의견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제 말이 그 말이었습니다. 전 억울합니다, 대신관님.”
“증거가 있다면 죄를 인정하실 겁니까?”
“…예. 저를 가리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제 믿음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장로님! 안 됩니다!”
양쪽 눈썹을 늘어뜨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길버트에 숨을 죽이고 있던 고위 신관들이 들고일어났다. 장로님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오고 갔다.
그런 분위기를 당사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을 인정하겠다는 듯 체념 어린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디오넬은 저 모든 것이 그저 가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본인의 손으로 증거를 모두 없애버렸으니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29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해도 괜찮겠군요.”
“본론이라 하심은……?”
“아르펠 님을 이곳에 모시고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모든 관심이 쏠렸던 것도 잠시, 아르펠은 디오넬의 첩자 발언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배제된 채였다.
그런 아르펠에게 다시금 시선이 모였다. 대부분은 불신 어린 표정이었으나, 그중 길버트는 사뭇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이해하셨군요.”
디오넬이 가벼운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길버트는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도 몇 있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 아르펠이 마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디오넬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아르펠 님이 쓰던 힘을 기억하십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아르펠이 기사들을 상대로 마력을 발산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고위 신관들이라면 모를까, 장로들은 애초에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이들이었다. 오늘만 해도 아르펠이 일으킨 소동이 아니었다면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디오넬이 아르펠을 신전으로 들이려 했을 때 가장 먼저 그 앞을 막아섰던 나이가 지긋한 장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력을 쓴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애초에 망령의 힘과 마력은 한데 존재할 수 없는 힘입니다. 어째서 그가 유일한 예외가 되었을까요.”
여전히 제게 머무르는 수십의 시선을 느끼며 아르펠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귀찮음인지 고민했다. 신경전이 오고 가는 대화를 오랫동안 듣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배경음 삼아 듣는 것이 아니라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아이가 곤히 자고 있을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로한이 잠에서 깰 것이다. 눈물을 흠뻑 흘리다 지쳐 잠에 들었으니, 적어도 일어날 때는 로한의 눈앞에서 함께해 주고 싶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더 길어질 것 같은 대화에 아르펠은 자신이 먼저 이 이야기의 끝을 맺기로 했다.
“20년 전, 그 자리에서 봤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펠이 내뱉은 말은 여파가 컸다. 소모성만 짙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신관들이 모조리 아르펠의 말에 집중했다.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가늠하려는 건지 잠시간 정적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 얼굴이 벌게진 길버트가 버럭 소리쳤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아르펠은 자신이 그 사건의 목격자라고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정황을 단번에 뒤집어 버리는 말과도 같았다.
핏대가 서서는 살벌한 눈으로 소리 지르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아르펠은 동요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태연하다 못해 별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태도에 열이 받아 다시금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갑작스레 시야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빛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아르펠이었다. 곁에 서 있던 기사들이 놀라 검을 뽑아 들었으나, 무슨 행동을 할 것인지 짐작하고 있던 디오넬이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막았다.
“이, 이건……!”
조금 전까지 말을 하던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검 한 자루만이 남아 있었다. 검신이 웅웅 떨릴 때마다 주위로 강한 마력이 번져나갔다.
마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갑자기 검으로 변해버린 현실성 없는 상황을 단번에 납득할 만큼 이 마력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다는 사실을. 은은한 마력이 검의 주위를 감싸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막고 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검신은 눈에 띄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보랏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분위기에 고고한 느낌마저 드는 아름다운 검은 금세 신관들의 시선을 앗아가고야 말았다.
“마검…….”
어떤 사람이 탄식처럼 그 말을 토해냈다.
“말도, 말도 안….”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동시에 새까만 검신이 휙 돌아가더니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있는 탁자 위로 큰 소리를 내며 꽂혔다. 이내 고요한 정적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20년 전, 그 자리에서 봤습니다.>
정적을 깨고 목소리 하나가 파고들었다. 조금 전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뱉었던 말과 같았고, 비슷한 목소리였으나 느낌 자체가 달랐다.
머릿속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강한 마력이 신관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압도적인 기운 앞에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못했다.
<내가 망령의 힘을 가지게 된 경위는 간단합니다. 이곳의 누군가가 구원교와 손을 잡고 절 넘겼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실험을 당해 이런 꼴이 됐군요.>
거짓말처럼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졸지에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그러면서도 고요한 시선들을 받게 된 길버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벙긋댔다.
“아… 아닐세. 난 아니야. 저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길버트 장로님. 마검은 마신께서 내려주신 성은의 증거입니다. 정녕 마신님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아르펠은 흘끗 디오넬을 바라보았다. 검인 상태였으니 디오넬이야 아르펠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할 테지만,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아르펠이 더 몰아붙여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계약을 했으니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무덤덤하게 길버트를 응시한 아르펠의 의지에 감응해, 검신이 마력을 한 뭉텅이 내뱉으며 웅웅 떨리기 시작했다.
<난 차갑고 어두운 지하에 갇혀 매번 더러운 망령의 힘을 주입하는 실험을 당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 내겐 삶이라는 게 없었음에도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고통은 끝나고 망령은 내 일부가 되고 말았군요.>
마검이란 마신의 힘을 본뜬 것이다. 신관들에게 숭배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망령의 힘에 더럽혀졌을지라도 그 안에 권능의 파편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끝내 망령에 굴복하지 않고 축복받은 아이를 보호해 신전까지 데리고 왔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신관들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불신의 씨앗을 집어삼켰다.
안타깝게도 그 사실에 눈이 먼 이들은 아르펠의 어조가 감정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책을 읽는 솜씨였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애초에 과거의 기억이 없는 터라 모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감정이랄 게 들어갈 리 없었다.
<길버트 장로라 하셨습니까.>
“나, 난…….”
<날 그들에게 넘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황은 거기서 끝났다.
그를 따르는 신관들이 많든 적든, 당시 분실되었던 마검이 돌아와 자신을 빼돌린 것이 저 사람이라며 지목했는데 그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었다. 기이하게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아르펠이 그때 그 마검이라는 사실은 누구 하나 부정하지 못했다.
강한 마력이 검신을 휘감을 때마다 미약하게 남아있던 망령의 기운은 사라지고, 황홀할 정도로 정순한 권능의 힘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런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르펠이 마검이 아니라 부정할 만한 위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이게… 당시의 그 마검이라고는……!”
진작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와 뻘뻘 흘리는 식은땀은 그가 낭떠러지 끝에 내몰렸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당연했다. 그는 모든 기록을 말소했고, 대신관이 공석이 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묻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겉으로는 신실한 신관을 가장해 칭송받는 나날을 이어 나갔다.
순수하고 신실한 믿음을 증명할 수 없으니 대신관의 자리는 노리지 못할 테지만, 보필하는 척하며 신전을 휘어잡는 지금과 같은 나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망령의 힘을 가지게 된 검이 사람으로 변하고, 축복받은 아이를 보호해 신전으로 데려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일을 까발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사람이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갑작스레 일어난다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 어떤 의심과 추측이 난무하더라도 꼼짝 않고 자연스레 넘길 자신이 있었던 길버트는 자신의 세상이 무너짐을 느꼈다.
한순간 검신이 더 새카맣게 물드는가 싶더니, 바닥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아르펠의 뜻대로 움직이는 그림자가 금세 길버트의 몸을 꽁꽁 에워쌌다.
“으아악!”
“…이 정도면 다들 납득하실 만한 답을 건네 드린 것 같군요.”
말없이 아르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디오넬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연행하세요.”
“예!”
그 한마디에 곁에 있던 기사들이 길버트의 양팔을 붙잡았다. 때마침 풀리는 그림자에 아르펠을 향해 눈인사를 하며 그를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끌려 나가는 내내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며 소리를 지르는 길버트였으나, 그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느낀 아르펠은 곧장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가벼운 빛과 함께 눈 깜짝할 새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많은 이들이 넋을 놓고 응시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정리된 후 찾아뵙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아르펠을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는 로한이 걱정되었다. 그가 잠에서 깨기 전 그의 곁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이야기를 채 마무리 짓기 전에 방 앞에서 기웃거리는 작은 기척을 느낀 탓이다.
30
“로한?”
아이를 눕혀 놓고 나왔던 맞은편 방 안으로 들어간 아르펠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급하게 이불 속에 몸을 감춘 것인지 가지런하게 정리해 주었던 이불보가 잔뜩 주름 잡힌 채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네가 깼을 때 옆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조심스레 아이의 곁으로 다가간 아르펠이 이불의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불 안쪽에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기분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무슨 짓 했어?”
들썩이는 이불의 겉을 붙잡기는 했으나 차마 확 걷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느낀 건 아이의 기척뿐이었는데, 그새 몹쓸 짓이라도 당했나?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야 했다는 후회마저 짙게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르펠.”
이불 틈새로 얼굴이 쏙 삐져나왔다. 그마저도 아주 조금이라, 흠뻑 젖은 눈가만 보이는 것이 다였다. 울음을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새 양 뺨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아무 말 않고 잠시간 울먹이는가 싶던 아이가 이불을 벗어 던지고 품 안으로 안겨 왔다. 혹시나 열이 오르지는 않았을까 이마에 손을 대 보았지만 다행히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눈물을 한 움큼 뱉어내는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표정을 간간이 살폈다.
“제가….”
품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울음기가 잔뜩 묻어나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제가 아르펠 괴롭힌 사람들, 다 없애 줄게요.”
“……응?”
뒤이어 들린 말은 선명했다. 익숙한 손길로 로한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등을 토닥거리고 있던 아르펠이 멈칫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에 고개를 비비적거리는 아이에게서 연신 히끅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짝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그새 감정이 더 북받쳤는지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방금 전 내뱉은 말을 이해할 틈도 없이 급하게 몸을 꽉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아르펠이 아픈 건 싫어요…….”
“…난 괜찮아, 로한.”
“거짓말….”
작은 몸을 한껏 끌어안아 주고는 있었지만 아르펠은 조금 곤란했다. 그제야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아이가 어째서 뜬금없이 울음을 터뜨렸는지, 괴롭힌 사람들을 다 없애 주겠다는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탓이다.
방을 기웃거리던 작은 기척이 결국 아르펠이 했던 말을 모조리 들은 모양이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고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고 말했던 그 목소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거짓말한 거야.”
“…….”
대꾸 하나 없는 로한은 아무리 봐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르펠은 조금 억울했다. 그저 상황을 최대한 간편하게 해결하려고 대뜸 내뱉은 말이 이렇게 발목을 붙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금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할 셈이었던 아르펠은 마주친 로한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길 못 믿느냐는,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아이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오해의 불씨가 짙어져 갔다.
***
디오넬이 찾아온 건 늦은 저녁이었다.
다행히 다시 열이 오르는 일은 없었던 로한을 잘 보듬어 몇 시간이고 끌어안아 주고 있던 아르펠은 문을 살살 두드리고 들어오는 그에게 흘끗 시선만 주고 말았다. 그런 태도가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디오넬이 태연히 다가와 침대 근처에 의자를 두고 걸터앉았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처럼 의자까지 끌어와 앉은 디오넬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렇다고 아르펠이 본론을 묻지도 않았다. 아무런 변화 없이 로한을 토닥이는 손길에 시선을 주던 디오넬은 결국 이어지는 정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운을 뗐다. 내뱉어지는 목소리에 망설임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한 가지를 물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왜 처음부터 마검임을 밝히지 않으신 겁니까?”
맨 처음, 신전에 도착해 제압당했을 때를 말하는 걸까. 디오넬에게로 시선을 던진 아르펠이 조금이지만 고개를 기울였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몸짓이다.
“아르펠 님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저희가 저지른 결례가 워낙 많으니, 말씀해 주시지 못한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디오넬의 표정이 한결 안심에 젖어 들었다.
정말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유가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타락한 마검은 신전에 의해 봉인 당했다’라는 소설 속의 서술에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운 탓이 컸다. 반쯤 반사적으로 한 행동에 가까웠다.
“사실 찾아뵌 이유는 길버트 장로의 처분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일단 오웬에게 맡기고 왔습니다만… 아무래도 배후에 대한 정보를 뱉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구원교와 손을 잡은 것 같기는 하나 그 혼자서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쓰게 웃는 디오넬을 응시하던 아르펠이 문득 물었다.
“오웬이 누구죠.”
“……그놈도 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알지만 통성명까지 안 할 줄이야. 오웬은 아르펠 님을 안내해 드렸던 그 신관입니다.”
유독 사무적으로 보였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마저도 자세히 보지 않아 윤곽이 흐릿했지만 어쨌든 누구인지는 대충 알았다. 꽤 예민한 인상의 남자였던 걸로 기억했다.
“신전의 신관들 중에는 후천적으로 마력이나 성력을 얻은 귀족들이 존재합니다.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개예요. 하나는 신전에 방문해 힘을 버리고 귀족의 지위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을 버리고 신관으로서 신전에 몸담는 겁니다. 신관들에게 성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길버트 장로는 신관이 되기 전 백작의 신분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어 설명하는 목소리에 아르펠은 가만히 원작의 흐름을 되짚었다. 첩자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신분은 어떻게 되는지 설명한 부분은 없었다.
그저 '남자'라고만 지칭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로한에게 발각당한 이후 몇 번의 언급되지 못한 채 단칼에 죽음을 맞이한 게 다였다.
그러니 아르펠이 길버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가 백작이었다는 사실도 방금 전 처음 알았다.
“지금까지의 행동이 다 꾸며진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당당하더군요. 상당한 뒷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당분간은 오웬이 그를 맡는 게 효과적일 겁니다.”
“그도 귀족입니까?”
“오웬 말입니까? 네, 맞아요. 길버트 장로 또한 오웬의 신분을 알고 있던 탓인지 끔뻑 죽더군요. 그가 꽤 이름 있는 집안의 막내라서요.”
아마 상당히 쩔쩔매고 있을 거라고 덧붙이는 디오넬의 표정은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쌕 올라간 눈꼬리는 퍽 유쾌해 보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미약한 걱정이 남아 있었다.
“그 남자, 3일만 빌려 주십시오.”
앞으로 로한이 지낼 곳임을 생각하면 이 일은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는 것이 나았다. 괜히 질질 끌었다가 아이에게 피해가 가면 어쩐단 말인가.
아르펠이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디오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마저도 로한의 탓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지 기쁘지도, 그렇다고 나쁘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미묘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그려졌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디오넬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대화가 이어질 때는 숨을 한껏 죽이고 있던 로한이, 그가 나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걱정되어 곁에 있는 물 잔을 쥐어다 아이의 입에 대어 주었다.
“저 사람이 좋아요…?”
물로 입술을 적시기도 잠시, 왠지 모를 서운함을 담고 있는 눈이 아르펠을 마주 보았다. 물 잔을 든 상태 그대로 굳고 말았다.
요새 들어 로한의 말을 듣고 당황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아르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에서 더 이상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날 지켜주려고요?”
“응. 난 네 보호자니까.”
대답을 들은 로한의 표정이 어쩐지 더 이상해졌다.
…이게 아닌가? 아이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뒤늦게 무언가 잘못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만 아르펠이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가족이기도 하고.”
“맞아요…….”
이것도 답이 아니었나 보다. 안 좋아진 표정이 나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자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조그마한 손이 다가와 단단하게 붙잡아 줄 때까지.
“제가 더 강해질게요. 그러면 되죠?”
“어? 어….”
어느새 뚱한 표정이 한결 가셔 있었다. 활짝 웃어 보이는 아이의 얼굴에 순간 넋을 잃었다. 비록 한참을 운 탓에 두 눈이 붕어처럼 부어 있었지만 말이다. 아르펠에게는 로한이 어떤 모습이든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그 사실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머리를 톡 기대는 아이에 아르펠은 반사적으로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며 기분 좋은 감촉을 남겼다.
뭐가 됐든 제법 평화로운 마무리라고, 홀린 듯 손을 움직이던 아르펠이 생각했다.
31
길버트의 일을 해결해 주기로 했으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르펠은 길을 물어 신전의 지하 감옥에 갔다. 당연히 아이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 로한을 두고 갈까 싶어 내려다봤건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로한은 무언가를 짐작한 건지 다리에 딱 달라붙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아르펠은 로한과 함께 한 기사의 안내를 받아 지하 감옥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보기만 해도 성스러워 보이는 외관을 자랑하는 신전과 음침한 지하 감옥은 당연하게도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꽤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길목은 마치 다른 장소를 똑 떼어 붙여 놓은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안내해 준 기사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서는 아래로 내려가려 하던 참이었다. 계단이 높은 것 같아 로한을 들어 안아 걸음을 옮기려 하니, 안내하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기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르펠의 시선이 우물쭈물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기사에게 닿았다.
“…그때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무슨 일 말입니까.”
“그, 제가…… 아르펠 님을.”
그제야 아르펠은 기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어딘가 익숙했다.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사과를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딱히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잠시간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마주 보고 있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어울리지 않게 붉어진 볼과 초롱초롱한 눈이 거북했다. 하다못해 경외심까지 품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계속 시야에 담고 있기가 꺼려져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감사합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지하 감옥은 당연하게도 조금은 서늘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품 안에서 꼼지락대는 로한을 토닥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추워?”
“괜찮아요.”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씩씩하다. 붓기가 훨씬 가라앉은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 주며, 기특함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막지 않았다.
쇠창살이 한가득한 공간은 유독 차가워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발을 들이고 머지않아 안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너는…!”
끌려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만한 분위기를 풍기며 장로로서 신관들의 위에 군림했을 남자는 이제 차가운 지하 감옥에 주저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초라한 옷과 흐트러진 머리, 그리고 하루 지났다고 지저분해진 얼굴까지.
길버트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 아르펠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무감한 눈동자는 마치 ‘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가 아르펠에 대하여 예측한 것 중에 유일하게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아르펠은 길버트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가 자신을 구원교에 넘겼든, 신전의 첩자로 들어왔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유일한 잘못이라 함은 로한을 괴롭게 한 점이었다.
“배후가 누구지.”
“하,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고귀하신 대신관 나으리에게 들은 게 없나 보지? 모두 나 혼자 벌인 짓이다!”
“그렇군.”
이를 빠득빠득 갈며 소리 지르는 길버트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추했다.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닌지라 로한의 눈을 대신 가려 주었다.
“3일의 시간을 주지. 어떻게 대답할 건지 다시 생각해 보도록.”
용무는 그게 끝이었다. 어느샌가 지하 감옥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던 길버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아르펠이 눈을 가린 손을 치우자마자 안쪽을 흘끗 보았던 로한이 바닥을 헤엄치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포르르 떨리는 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 그 사람은……?”
“가뒀어. 3일 뒤에 꺼내 줄 거야.”
아마 길버트는 오감이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 빠져 몸부림칠 것이다. 3일에 불과했지만, 안쪽에 있는 그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산 채로 그림자 속에 들어갔다 나와 살려달라고 빌었던 구원교의 신도들이 문득 떠올랐다.
지하 감옥의 바깥을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대충 통보해 준 뒤 원래 머물고 있던 곳으로 향했다. 웬만하면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변화에도 민감하지 않은 아르펠이 이상함을 느낀 건 메인 홀을 지날 때쯤이었다.
“아르펠 님, 한 번만 용서를….”
“제가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가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신관마다 후다닥 달려와 용서를 비는 기행이 벌어졌다. 와중에 로한에게도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세 번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아르펠도 차차 상황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둘러 방안에 들어왔다. 로한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 아르펠 님. 오셨군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방 안에는 디오넬이 서 있었다. 어제보다 피로한 느낌이 덜한 얼굴이 미소를 그리며 두 사람을 반겼다.
“…신관들이 이상한 것 같군요.”
“신관들이요? 무슨 일이 있나요?”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합니다.”
“아아.”
혹여나 문제라도 일어난 것은 아닐까, 염려의 빛을 가득 담은 눈이 뒤늦게 풀어졌다. 작게 헛웃음을 지은 것은 덤이었다. 디오넬은 이제라도 아르펠에게 사과하는 신관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은 마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길버트 장로 같은 놈이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마신의 힘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신의 힘을 몸에 담고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직접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아르펠의 존재는 그들에게 말 그대로 기적과 같았다.
비록 망령에 의해 오염되기는 했으나, 그가 로한을 지켜가며 신전에 데려온 것도 모자라 신전을 어지럽히던 첩자를 잡아낸 일화는 이미 하룻밤 새에 신전 내에 퍼졌다.
대부분의 신관들은 그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마신의 뜻을 받고자 하는 의지가 오염을 이겨냈다고 말이다. 어느샌가 많은 신관들이 그를 숭배하며, 처음 저질렀던 무례를 용서받길 원했다.
정작 반쯤 신격화되어 버린 장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디오넬의 예상대로라면,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르펠은 부담스러워하기보단 귀찮아할 것이다.
“…그렇군요.”
역시나 이야기의 전말을 들은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고작 하루 알고 지낸 것에 불과했지만, 아르펠의 행동 양식은 생각보다 단순했기에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모두 로한에게서 비롯된다. 이 상황을 귀찮아하는 것도 둘이서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디오넬은 마음속 깊이 안심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유대감에 끼어들 곳이 없는 만큼, 서로를 의지하는 둘은 절대로 상대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길버트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정보를… 뱉었나요?”
“아뇨. 그림자에 넣어 두었습니다만. 3일 후에 꺼낼 겁니다.”
그렇더라도 사람을 물건 취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감흥 없는 목소리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애써 고개를 끄덕인 디오넬이 속으로 납득했다. 어찌 됐든 신전에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 흐린 눈으로 넘어갔다.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이걸.”
“…이건?”
“마신께서 전해드리라고 부탁한 성물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망령의 힘을 억누를 수 있으니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 하시더군요.”
옅은 보랏빛 보석으로 장식된 단조로운 외관의 반지였다.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던 아르펠은 군말 없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문득 성물이라는 단어에 위화감이 들었다.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아르펠이 흘끗 디오넬을 바라보았다.
“안배와 성물은 다른 겁니까?”
“…안배를 받으셨습니까?”
답을 들은 디오넬이 놀라 되물었다. 내내 신실한 웃음만을 머금던 사람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한 점도 알아낼 겸,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귀걸이를 꺼냈다.
“…허어.”
그는 알 수 없는 탄식을 터뜨리고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 디오넬을 바라보는 아르펠의 시선이 묘해졌다.
“답해 주십시오.”
“아…….”
이대로 가다간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걸이를 보여 주고 있던 손을 거뒀다. 미련 넘치는 눈길로 그 손을 바라보고 있던 디오넬이 흠칫했다. 그의 입가에 상당히 민망해 보이는 웃음이 걸쳐졌다.
“죄송합니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안배와 성물의 차이점에 대해 물으셨지요?” “네.”
“신께서 빚어내셨다는 점은 같지만… 성물과는 다르게 안배를 인세에 내린 일은 정말 드물기에 남겨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저희도 그것이 존재한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죠. 그랬기에 신의 안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아르펠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조금 꺼림칙한 것 같기도 했다. 아르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디오넬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덧붙였다.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로선 안배가 무슨 힘을 지녔는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소유주가 원하는 결말을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로한 님께 해가 될 리는 없습니다.
디오넬이 작게 속삭이며 내뱉은 말에 결국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안배랍시고 준 물건이 해를 끼칠 리는 만무했다.
오후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디오넬에게 시선을 두기도 잠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눈높이를 맞췄다.
“…로한? 기분이 안 좋아?”
아이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묘하게 뚱한 것 같기도, 또 울상인 것 같기도 한 표정이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응?”
“…아니에요.”
기민하게 로한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아르펠은 아이의 시선이 방금 전 손에 끼웠던 반지로 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반지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너 줄까?”
“아르펠한테 필요한 거잖아요….”
“아냐. 필요 없어.”
마신이 들었다면 경을 칠 말이었다.
32
이 반지가 가지고 싶은 게 아니면 뭘까. 여전히 울상인 로한을 바라보면서 아르펠은 말없이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반지 사 줄까?”
“같이… 끼는 거예요?”
“그래. 그러자.”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풀렸다. 눈물이 조금이지만 차올라 있던 탓에 금색 눈이 반짝거렸으나, 금세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동그란 뺨에 홍조가 돌기 시작해서, 아르펠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아이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로한. 혹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이 좋았다. 창을 통해 들이쳐 침대 위를 기웃거리는 햇살도, 빛을 받아 유독 반짝거리는 것 같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눈에 담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분위기에 취해 저절로 부드러워진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가, 귀를 뚫어도 괜찮을까?”
“귀요…?”
“응. 마신이 너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귀걸이를 줬는데… 넌 귀를 안 뚫었으니까.”
다른 한 손이 말랑거리는 귓불을 매만졌다. 상처 하나 없는 하얗고 말랑거리는 귓불에 결국 상처를 내야 한다니, 갑자기 마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르펠이 해 주는 거면 괜찮아요.”
“…그래?”
아이는 오히려 기쁜 듯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파서 무서워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아르펠로서는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손에는 절대로 맡기지 않았을 거다. 상처를 내는 것은 물론, 로한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조차 싫었다.
이제는 조금 더 적나라해진 이기심과 만족스러움이 얽히며 기묘한 감정의 향연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한구석에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차올랐다.
이런 내가 정상일까?
계속해서 곁에 남아있을 수 있을지 모를 때에는 그나마 억눌러지던 것들이 이제는 틈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인간성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딱히 불편함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간혹가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불쑥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언젠가 이런 마음을 알게 된 로한에게 미움 받는 것이 아닌지 두려움이 이는 것이다.
여태껏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전생의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언뜻 보았던 남자의 인생은 그가 제법 다정한 사람이었음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의 생을 이어받은 아르펠은 달랐다. 그 성격이 여전했다면 아이가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걷잡을 수 없는 열등감마저 차올랐다. 어쩌면 몸 안에 있는 망령의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간 별생각을 해 본 적이 없던 대상들이 아주 조금은 원망스러워졌다.
“아르펠?”
로한이 아르펠의 손을 붙잡았다. 크기가 현저히 차이가 나는 자그마한 손의 온기가 손등을 두드렸다.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생각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던 아르펠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로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아니. 아니야.”
조그마한 얼굴에 자리 잡은 커다란 눈이 걱정의 빛을 한 아름 담고 있다.
굳이 생각할 필요 없는 일이다. 느릿한 손길로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빼내어 로한의 귀에 대본 아르펠은 금세 하고 있던 생각들을 휘발시켰다.
“보라색…….”
“마음에 들어?”
“네에.”
로한은 귀걸이의 모양새가 제법 마음에 드는 듯했다. 어떤 면에서 마음에 쏙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만족스러워한다는 점에서 아르펠은 마음 한구석에 아주 조금 남은 걱정마저 덜어 버렸다.
바닥에서 끌어온 그림자를 아주 얇은 실처럼 뽑아 귀를 뚫었다. 도중의 통증을 걱정하긴 했으나 로한은 살짝 미간만 찌푸릴 뿐 씩씩하게 견뎌냈다. 기특함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는 굳이 막지 않은 채였다.
점심시간 때 즈음 찾아온 디오넬은 로한의 귀에 갑자기 생긴 귀걸이를 보며 당황하다가도, 사정을 전해 듣고는 아이에게 축성을 걸어 주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대강 설명해 주는 것은 덤이었다.
천신이든 마신이든 그들의 축복을 받은 이는 다 자란 후에는 망령과의 싸움에서 참전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일방적인 결정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허락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축복을 걸어 강제로 운명을 결정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상성과 성향, 그리고 천성을 고려해 결정되는 것이니 웬만하면 불협화음이 없다고는 하나 로한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강해질 수 있는 거예요?”
“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지도할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듣는 로한은 오히려 기뻐 보였다. 양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서는 두 눈에 깃드는 흥미를 미처 감추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로한은 어서 크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는 말을 유독 많이 했던 것도 같았다. 이유는 빠르게 짐작되었다. 하루빨리 자신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구원교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아직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사정에 얽힌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냥 복수만을 쫓는 생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르펠, 나랑 계약해 줄 거죠……?”
“그래. 네가 성인이 되고 나면.”
그럼에도 아르펠은 로한을 말리지 않았다.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아르펠은 그의 곁에 계속해서 남아있을 테니.
***
로한은 곧바로 검을 쥐고 싶어 했지만, 디오넬이 딱 잘라 거절했다. 일단 몸에 내재되어 있는 마력을 제대로 운용할 줄 아는 게 우선이라 못을 박은 것이다. 못마땅해 보이기는 했지만 로한은 결국 디오넬의 주장에 수긍했다.
대신관이라는 직위에 있어 시간이 잘 나지 않을 텐데도 디오넬은 꼬박꼬박 로한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무엇을 가르쳐 주든 로한은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다. 선생으로서는 정말로 가르칠 맛이 나는 아이라며, 디오넬은 로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틀째 되는 날에는 아르펠에게도 선생이 한 명 붙었다.
“…오웬입니다.”
“아르펠입니다.”
피로한 낯을 감추지 않은 남자는 디오넬에게 한 소리를 들은 건지, 아르펠과 마주하자마자 먼저 이름을 말했다. 아르펠까지 이름을 덧붙이고 난 뒤에는 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색함에 몸부림칠 만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는 마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나치게 무신경한 탓에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낌새였다.
“축성을 먼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르펠도 로한과 마찬가지로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을 몇 가지 배워 두기로 했다.
그는 디오넬처럼 학생을 격려하며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는 않았으나, 본론만은 제대로 짚어 알려 주는 괜찮은 선생이었다. 이미 권능의 힘을 남발하고 다녔던 아르펠로서는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었다.
손바닥 위로 어두운 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동그랗게 뭉친 구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던 전과는 달리 손끝에 화한 느낌이 번졌다. 한 번 감각을 느끼고 나니 다시 끌어내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을 듯했다.
“아르펠!”
기분도 환기할 겸, 조금 더 집중도 해볼 겸 바깥에 나와서 연습을 하고 있던 터라 멀리서 달려온 로한이 품에 안기자마자 아이가 끌고 온 바람이 살랑거리며 볼 위를 스쳤다. 익숙하게 아이를 안아 들자 디오넬이 쓴웃음을 지으며 함께 다가왔다.
“오늘따라 로한이 집중을 못 하네요.”
“그랬어?”
“으응, 조금요….”
로한이 조금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아르펠은 딱히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안은 아이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품 안에 고개를 파묻고 비비적거리는 아이에게서 몽실몽실한 향기가 났다.
“계속해서 아르펠 님을 보던걸요.”
“…그렇습니까.”
자신에게 의지해 주는 아이가 그저 기껍기만 했다. 별다른 말을 얹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르펠을 보며, 디오넬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로한이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는 명백했다. 오웬이 아르펠에게 다가가 마력의 운용 방식을 가르쳐 준 것이 원인이었다.
보면 볼수록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로한은 아르펠에게 지나치게 맹목적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바라봐달라고 외치는 찬란한 눈동자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했다. 가르친 지는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디오넬은 로한이 그토록 강해지고 싶다고 한 이유를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다.
물론 한 가지 이유로 일축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그중 많은 비율을 아르펠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저, 칭찬해 주면 안 돼요?”
“잘했어, 로한.”
서로만을 바라보며 미소를 그리고 있는 두 사람을 그저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오로지 그들의 운명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길버트는 아르펠이 미리 예고한대로 정확히 사흘 후에 꺼내졌다. 무장한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는 차가운 지하 감옥의 바닥에 내던져진 길버트는 땅에 쓰러지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흐어억! 할, 할게! 뭐든 다 말할 테니까 제발!”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짠 얼굴이었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고약한 냄새마저 났다. 고작 3일이라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길버트는 몰라보게 모습이 망가져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이들 중에는 긴 시간 동안 그를 따랐던 이도 있었으나, 그 누구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며 철창의 가까이에 달라붙었다. 당연하게도 그 모든 망가짐을 직접 보게 된 이들의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제 배후를 말하실 생각이 드십니까?”
“예, 예! 뭐든지 다 말하겠습니다! 뭐든지!”
철창의 가장 앞쪽에는 디오넬이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온화하게 풀어져 있던 얼굴이 싸하게 굳어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아르펠은 그저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며 말없이 옆쪽에 서 있었다. 한 손으로는 로한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아이의 눈을 가려준 채였다. 딱히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추한 몰골이었다.
33
한쪽은 상대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다른 쪽은 예외였다. 뭐든 다 말하겠다고 울며불며 이야기하던 길버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중 아르펠이 끼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은은하게 나던 지린내가 고약해졌다.
“윽.”
디오넬의 곁을 지키고 있던 신관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철저하게 망가진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디오넬은 그저 아르펠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아르펠을 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으로 도망치려 하고, 손에 상처가 나는데도 벽을 긁으며 울부짖는 모습은 도저히 그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 같지 않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자,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길버트 장로, 당신은 백작위를 가진 귀족이었죠. 이번 일이 있고 나서 백작으로서의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사해 봤습니다.”
철창 아래에 하얀 종이들이 흩뿌려졌다.
“도박, 사치, 그리고 강탈과 다름없는 높은 세금 징수…. 이렇게 살아오신 분이 잘도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신전에 들어오셨군요.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은 우리의 잘못이 큽니다. 덕분에 앞으로 당신 같은 사람들을 거르기 위한 심의가 강력해질 예정이기는 합니다만.”
신전도 이제 그만 바뀌어야 할 때가 온 거죠.
뒤따른 말이 씁쓸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전은 과거를 답습했다. 디오넬 역시 이전 대신관이 물려준 신전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오며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현실을 외면했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결국 도저히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지가 않자, 아르펠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저 보이지 않게 벽을 등지고 서 있을 뿐이었으나 적어도 시야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심한 건지, 길버트의 비명이 멎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로한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귀를 기울였다.
“화, 황제의.”
“……네?”
“황제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마침내 진실을 토해냈다. 그 순간 서늘한 감옥에 번진 것은 끝도 없는 정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라고?'
소설 속에서 첩자에게 명령을 내린 자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자가 구원교 소속일 거라는 추측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제국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로한과 성녀가 함께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올 때 잠깐 그려진 게 다였다.
갑자기 끊임없는 의심이 휘몰아쳤다. 정말 이 모든 일에 황제가 개입한 것이라면 그가 로한이나 성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아르펠이 기억하는 한, 소설의 마지막은… 구원교를 몰락시킨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았는가?
감히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세, 세금을 횡령한 게, 덜미를 잡혀서….”
“하. 가지가지 하는군요.”
디오넬이 한숨 같은 탄식을 토해냈다. 조금 전 얻어낸 답으로 받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어이가 없었다.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무척이나 드높은 건 사실이다. 제국에 헌납될 세금을 빼돌리는 일은 즉결처분까지는 아니어도 귀족위를 박탈당할 만한 일이었다. 고위 귀족이여도 작위 박탈을 피할 수 없는 마당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에 손을 대다니.
한숨 소리에도 바들거리며 떨던 길버트가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 친척. 끕. 먼 친척, 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디오넬이 침음을 삼키다 덧붙였다.
“결국은 당신은 황제의 먼 친척이었고, 세금을 횡령했으나 친척이라는 점과 갑작스러운 마력의 발현 덕분에 면책을 받았다는 거군요. 그 뒤로 신전에 들어와 그의 수족 노릇을 했고?”
“네, 네…….”
“마검을 빼돌린 것, 구원교에 넘긴 것, 로한에 대한 정보 유출, 그리고 마을에서의 변고 모두 길버트 장로, 당신의 입김이 들어간 겁니까.”
작지만 분명한 고개의 움직임에 디오넬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에 신전은 무너지고 있었고, 외부인에게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이런 신전보다 더 썩어가는 중이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신전에 숨어들어온 길버트가 구원교에게 마검을 넘겼다. 그 말은 이 모든 행동을 황제가 용인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의 주도하에 모든 것이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대체 목적이 뭐기에 악신을 숭배하는 집단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별개로 도저히 황제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제국민들 사이에서 제법 성군이라 불리는 면모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무엇이 부족해서? 신전에게 무엇을 원하기에?
“그의 목적을 알고 있습니까.”
“시, 신전끼리 서로 의심하도록 하라고. 저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정말로……!”
“로한 님을 습격한 것도 같은 이유겠군요.”
“네, 네…. 앞으로 신전의 큰 전력이 될 테니… 아악!”
“아르펠 님.”
아무도 모르는 새에 벽의 틈새를 파고든 그림자 한 줄기가 길버트의 목을 졸라매었다. 발작하듯 몸을 비트는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디오넬이 벽의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대답은 없었지만 디오넬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로한에게 해를 끼쳤으니 당장이라도 이 남자를 죽이고 싶겠지. 아이에게 맹목적으로 구는 이였으니 당연했다.
망설임 끝에 그의 몸에서 스르르 멀어져 가는 그림자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길버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그게 다였다. 그저 염탐과 전달책의 역할을 했을 뿐이지 앞으로의 동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말로만 증언한 탓에 끌어내릴 수 있는 증거마저 없으니, 이 자를 살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쉽게 죽을 가치도 없습니다.”
디오넬의 눈에 살의가 감돌았다. 마력을 발현하고 중앙 신전의 신관으로서 살아오다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달랐다.
그가 저지른 죄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럼에도 한순간에 목숨을 끊어 멋대로 평안한 잠에 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르펠 님.”
“헉, 안, 안 됩니다. 안 돼요! 살려 주십시오! 살려줘…!”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으! 끅, 흐아악!”
감옥의 벽에 개구리처럼 딱 달라붙은 길버트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온갖 힘을 짜내어 비명을 질러댔다. 손끝이 연신 벽을 긁어대는 바람에 묻어나오기 시작한 피가 벽을 더럽혔으나 아무도 그의 처지를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길버트의 비명만이 울려 퍼지는 공간에, 아르펠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뒤따랐다. 내내 길버트가 보지 못하는 곳에 기대어 서 있다가 마침내 그의 앞에 도달한 아르펠은 감정 없는 눈으로 발악하는 남자를 응시했다.
눈 깜짝할 새에 바닥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길버트를 집어삼켰다. 누군가 안쪽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흔적은 그가 벽을 긁어대며 남긴 흐릿한 핏자국이 다였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장로는 그럴만한 죄를 저질렀으니까.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아르펠이었다. 로한을 품에 끌어안은 채로 지하 감옥을 빠르게 빠져나와 정오의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 근처로 다가갔다.
이로써 하나의 명백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그가 읽었던 원작의 소설과 똑같을 리는 없다.
이미 많은 과거들을 바꿔놓은 채였고, 원작에서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적의 정체도 알게 되었으니 무엇이 됐든 그들은 다른 미래를 맞을 것이다.
“로한.”
“네?”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
그리고 그 미래는 로한에게 행복한 미래여야만 했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아르펠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로한은 한동안 말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예쁘게 휘어지고, 아이치고는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거리며 웃음을 그린 것도 금방이었다. 아르펠은 그 모든 변화를 홀린 듯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뜸 눈앞으로 새끼손가락이 내밀어졌다.
“아르펠도 같이 행복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몇 번이고 심호흡하는 것처럼 숨을 가다듬던 아르펠이 느릿하게 손가락을 마주 대었다.
난 이미 행복해.
작은 속삭임이 둘 사이에서 스러졌다.
***
“안녕하세요, 아르펠 님!”
그리고 다음 날, 아르펠과 로한은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았다.
가만히 보기만 해도 반짝거리는 것 같은 화사한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소녀였다. 커다란 분홍색 눈망울이 마치 장인이 공들여 만든 예쁜 인형을 연상시켰다. 눈꼬리를 곱게 휘어 웃고는 배꼽 인사를 하는 것에 아르펠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옆쪽에는 냉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여기사 하나와 곤란한 미소를 머금은 디오넬이 서 있었다. 아르펠은 말없이 디오넬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을 했다.
“첩자가 있다는 것이 완전히 밝혀지고 난 이후 천신 측 신전에도 미리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저희 측에 있다면 그쪽 역시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쪽은 아르펠 님처럼 곧장 첩자의 여부를 밝혀줄 분이 계시질 않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판단하고 그간 이 아이를 보호해 주길 요청했습니다.”
“전 레리아나예요!”
디오넬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레리아나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아이가 입을 열면 열수록 아르펠은 어딘가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예쁘고 반짝거리는 이 아이가 다름 아닌 원작 소설 속의 여주인공인 성녀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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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그녀는 마검으로 인해 인간성이 결여되고 정신이 피폐해진 로한을 보듬어 주기 위하여 디오넬이 천신 측 신전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아르펠이 로한을 돌보며 신전에 직접 데려다주는 것으로 없는 미래가 되었다.
어쩌면 로한과 레리아나의 만남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작과는 다른 이유로 레리아나가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냥 아르펠이라고 불러도 돼.”
“와! 진짜요? 감사해요!”
가까스로 생각을 정리한 아르펠은 조금 전 인사를 한 레리아나에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것이 걸렸는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잠시 시무룩해하던 아이가 금세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온 세상의 햇살을 다 모아놓은 것처럼 빛나는 미소였다.
레리아나가 이제껏 축복받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성녀'라는 이명으로 불린 것도 저 아름다운 미소와 다정다감하고 활달한 성격 탓이었다.
자신 같은 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아이를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로한과 잡고 있던 손에 압박감이 심해졌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신경이 쏠렸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아르펠은 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로한이 내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내비쳐진 표정이 이상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해 보이기도 하고, 끌어안아 달라 어리광을 피우던 얼굴과도 겹치는 것 같기도 했다.
“안녕! 네가 로한이지? 우리 동갑이래!”
로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레리아나는 꿋꿋하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럼에도 로한은 레리아나에게 시선 한 번 주지를 않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아르펠은 그런 로한에게 아무런 쓴소리하지 못했다. 맹목적이기까지 한 시선에 사로잡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한참 아르펠만 바라보던 로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 쟤 싫어요.”
“……응?”
아르펠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로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상황은 단언컨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게, 레리아나는 여주인공이다. 소설 속에서 로한과 사랑을 나눈. 그렇기에 아르펠은 조금 전까지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원작과 같은 흐름은 아닐지라도 아이들 사이에 특별한 분위기가 흐를 거라 생각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로한은 친구가 생겼다는 이유로 아르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줄여버린 지 오래였다.
디오넬조차 로한이 그런 태도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레리아나의 눈망울은 이미 그렁그렁했다.
“무례를 사과해 주십시오, 로한 님.”
그런 와중에 말없이 뒤를 지키고 있던 여기사가 입을 열었다. 냉해 보이는 푸른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왜요? 보호받으러 왔다면서요. 쟤랑 친해져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친해지기 싫은 걸 싫다고 말한 게 무례예요?”
웬만한 아이 하나는 울리고도 남을 것 같은 형형한 눈빛을 마주 보고도 로한은 따박따박 대답했다.
아르펠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아이가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미지의 대상을 경계하는 작은 소동물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잡고 있는 손이 끌렸다. 아주 약한 힘이었음에도 아르펠은 순순히 그 손에 끌려 나갔다. 레리아나를 맞이했던 신전의 입구를 벗어나 옆쪽의 길로 새자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조그마한 정원에 다다랐다.
“로한?”
말없이 걸어가는 아이의 낌새가 이상했다. 내내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기고 있던 아르펠이 뒤늦게 로한을 불러 세웠다.
돌아보는 아이의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아르펠은… 쟤가 좋아요?”
“…레리아나 말하는 거야?”
“벌써, 이름으로 부르고…….”
결국, 일렁이는 눈동자가 눈물을 툭 뱉어냈다. 아르펠은 그 모습을 보고 쩡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쩔 줄 모르는 손이 급하게 아이의 눈 아래를 더듬었다.
“왜 울어. 응? 내가 속상하게 했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똑 부러지게 말하던 아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로한은 아르펠의 물음에도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오히려 초조해지는 것은 아르펠이었다. 레리아나에 대한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같이, 흑. 같이 있는 게 싫어요.”
“…….”
“걔랑 아르펠이… 같이 있는 게 싫어요.”
“…왜?”
“반짝거리고, 예쁘고, 착하니까. 아르펠이, 나보다 걔를 더 좋아하면 어떡해요……?”
난 아르펠밖에 없는데….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흔들리는 목소리, 그것을 하나하나 오감에 담아가고 있던 아르펠은 말없이 로한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봇물 터지듯 훌쩍이는 울음소리에 가슴이 아팠다.
동시에 로한이 어째서 레리아나에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였는지도 이해가 갔다. 로한이 의지하는 대상은 아르펠뿐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그런 대상에게 여러 종류의 소유욕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아마 로한은 자신을 가족이자 부모로 인지하고 있을 테니 어쩌면 레리아나에게 그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럴 일은 없어, 로한.”
“정말요…?”
“응. 내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할 리 없으니까.”
아이를 달래기 위한 장황한 말을 하는 것보다 그저 담담히 진실을 고하는 것을 선택했다. 차츰 로한의 불안함이 가라앉을 수 있게끔 느릿하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르펠은 로한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발긋해진 눈을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은 그로부터 약 십 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
레리아나는 그 뒤로도 로한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로한은 상당히 질린 표정을 하기는 했으나 어제와 같이 싫다며 그녀를 외면하거나 노려보는 일은 없었다.
“…어제는 미안해.”
“괜찮아!”
결국 로한은 레리아나에게 사과했다. 딱히 사과를 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르펠이 내뱉은 진심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덕이었다. 그렇다고 어제와 같은 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는 간혹가다 고개를 홱 돌려 아르펠을 확인했다. 레리아나에게 눈을 두고 있는지 기민하게 살피는 눈치였다. 딴에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싶었으나, 당연하게도 아르펠의 눈에는 행동 하나하나가 아주 잘 보였다.
모른 척했을 뿐이다.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 쓰는 아이의 태도가 귀여웠다. 아르펠은 그때마다 로한을 가만히 마주 봐 주는 것으로 답했다.
그사이 아르펠은 디오넬에게 레리아나와 함께 온 여기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았다. 기사의 이름은 카시아였다.
“어제는 제가 많이 무례했습니다.”
그녀는 로한에게 짤막한 사과를 건넸다. 기실 아이끼리의 다툼은 아예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사과는 그 사이에 끼어들어 무례를 논한 점에 대한 것이었다.
“제가 혼내줬어요. 그치, 시아?”
“예, 레리아나 님.”
카시아의 사과는 로한과 달리 타의가 간섭한 결과로 보였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로한이 괜찮아 보였기에 아르펠은 굳이 일을 크게 벌리지 않기로 했다.
***
레리아나와 로한은 그 뒤로 곧잘 어울렸다. 로한은 여전히 레리아나에게 약간의 거리낌이 남아있는 듯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리아나는 유일하게 동갑인 로한을 친숙하게 대하며 이런저런 말을 조잘대었다.
상당히 귀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도 로한은 레리아나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가 유일하게 말이 끝나든 말든 무시하고 자리를 떠버리는 것은 아르펠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뿐이었다.
“공부는 잘 했어?”
“네에.”
품에 폭 안긴 아이가 순하게 미소 지었다. 양 볼이 발그레해지는 게 사랑스러웠다.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묻을 때면 간지럽다는 듯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날이 갈수록 이 평화로움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단둘이서 여행을 다닐 때도 비슷했지만, 그때는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아이를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고된 시련은 수도 없이 많았고, 황제와 구원교라는 큰 적도 버젓이 남아 있지 않나. 로한이 마음 놓고 온전히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세상으로는 만들어 주지 못했건만, 요즘 들어 하루하루가 주는 달콤함에 푹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아이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변한 것은 그 사실 하나뿐이었는데도 그랬다.
“아르펠, 저도 해 주면 안 돼요?”
그리고 말없이 그 모습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레리아나가 손을 뻗었다. 분홍색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였다.
“안 돼.”
“치.”
몇 번이고 반복된 레퍼토리다. 레리아나가 손을 뻗으면 로한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레리아나를 노려보았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리고는 했다.
물론 아르펠은 레리아나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아주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레리아나가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아마 소설 속에서 로한과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던 당사자였기 때문일 테다.
그러면서도 말 못 할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을 부인하지 못했다. 로한에게 가장 우선시될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증명 받는 것 같아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깃털이 안을 난잡하게 돌아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운 기분도 들었다.
조그마한 아이를 상대로 가지기에는 치졸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르나, 아르펠은 그 사실을 외면해 버렸다.
“시아! 난 시아만 있으면 돼!”
허망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던 레리아나는 항상 뒤늦게 카시아를 찾았다. 몸에 두른 갑옷이 딱딱할 텐데도 와락 달려든 레리아나는 결국 숙원을 이뤘다.
“봤지? 나도 안아 줄 사람 있어!”
로한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이런 상황의 반복이었다. 로한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마력 공부에 몰두하고, 레리아나는 그런 로한을 따라 불타올라 카시아에게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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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마친 이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아르펠의 품은 로한의 차지가 되었다. 야외에서 직접 마력을 발현하는 수업을 들을 때마다 근처의 벤치에 앉아 뚫어져라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아르펠에게도 제법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르펠 님.”
그리고 이 시간만 되면 포옹하는 이들을 사이에 두고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해야 했던 디오넬이 아르펠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르펠은 대답 없이 시선만을 그에게로 돌렸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잠깐 카시아를 향했다. 그마저도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해, 그를 마주 보고 있던 아르펠만이 눈치챈 사실이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앞서 나가는 디오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로한은 여전히 품에 안겨있는 채였다.
야외로 나오느라 밟았던 길들을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갔다. 바깥의 새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일전 기도실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해도 더 깊은 안쪽인 듯했다.
“이곳은 마검들을 보관해 놓는 곳입니다.”
막혀 있는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운 디오넬이 그렇게 말했다. 분명 겉보기에는 막힌 벽이었음에도 안쪽에서 희미하게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이 부분을 꾹 누르면 벽이 열립니다. 혹시 모르니 기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로한 님도요.”
옆에 있는 창틀의 끝을 누르자 안이 움푹 패여 들어갔다. 동시에 벽이 뒤쪽으로 소리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안쪽에 보이는 것은 위층으로 이어지는 듯한 나선형 계단이었다. 유리창이 없는 탓인지 횃불로 밝힌 안쪽은 유독 어두웠다. 셋 말고는 그 누구도 없는 공간인 탓에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걸음 소리만이 기다란 공간을 왱왱 맴돌았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뒤, 디오넬은 가장 근처에 있는 횃불의 밑을 만졌다. 막혀 있던 곳에 소음 하나 없이 길이 만들어졌다.
몇 번 그 행동을 반복했을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길도 끝은 있었다. 마지막 통로를 넘어서자 넓게 드러나는 공간이 시야에 가득 찼다.
안쪽에 나열된 여러 개의 마검을 바라보던 아르펠이 생각했다.
‘…박물관 같네.’
하얀 유리 박스에 하나씩 나누어 들어 있는 모습이 정말로 박물관 같았다. 어디 전시실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신의 힘을 담았다는 마검들만 있는 곳이었지만, 아르펠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만약 아르펠 님이 없으셨다면, 로한 님은 이곳에서 마검을 하나 선택하셨을 겁니다.”
“…난 아르펠 말고 필요 없어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감흥이 없는 것은 로한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아르펠만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디오넬이 으레 그렇듯 미소 지었다.
“이 마검들을 보여드리러 온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레리아나 님이 신전에 오며 함께 들고 온 성검 때문이지요.”
진열된 여러 마검들 사이에 유일하게 혼자서 다른 기운을 풍기는 하얀 검이 있었다. 마검들은 대개 색이 짙은 편이었기에 유독 눈에 띄는 검이기도 했다.
얼마 전 아르펠은 디오넬의 제안을 받아들여 몸 안에 있는 망령의 힘에 대한 가설을 세워보았다.
본래 망령은 성력과 마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받는다. 하지만 아르펠은 그 상극인 힘을 한데 모아 가지고 있었다.
여태 위협을 느낄만한 일을 겪어보지 못한 아르펠이었지만, 구원교에다 황제까지 관여되어 있는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아야 했다.
가장 먼저 해 본 것은 타인의 마력에 노출되는 것이었다.
‘딱히 느낌이 없군요.’
당시 디오넬의 도움을 받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냥 마력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 다였다. 애초에 마력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피해를 미칠 수 없는 힘이었다.
그것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일단 마력을 가지고 있는 아르펠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성력은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로한의 팔을 톡톡 건드리곤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아르펠이 성검에 가까이 가는 순간, 로한이 그를 붙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약점이 뭔지 알고 싶어서.”
“그럼 위험한 거 아니에요?”
“글쎄. 잘 모르겠네.”
아이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안 돼요.”
“……어?”
“아르펠이 위험하면 어떡해요? 다치면요?”
“…손만 대볼게. 약속하자.”
“…….”
“이번에 해 봐야 다음부터 조심할 수 있어. 응?”
정말로 손 한 번만 대볼 생각이었던 아르펠은 로한이 이렇게 격하게 막아 세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에 대한 위기감이 전혀 없는 그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로한의 눈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아르펠을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결국 로한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조금, 조금만이에요. 네?”
“응, 약속할게.”
손은 놓았지만 일렁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어서, 아르펠은 꽤나 힘겹게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아이를 등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냥 빨리 끝내자. 한 번 손을 대고 멀쩡한 모습을 로한에게 보여 줘야 했다. 아르펠이 빠르게 끝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디오넬이 성검을 보관하고 있던 유리관을 들어 올렸다.
망설임 없이 검의 끝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윽!”
손끝을 타고 많은 양의 성력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머릿속이 크게 흔들리는 듯했다. 누군가가 억지로 머릿속을 휘젓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시야를 참아내지 못하고 아르펠이 비틀거리자 디오넬이 놀란 낯을 하고 그를 부축해 주었다.
“아르펠 님! 괜찮습니까?!”
정신을 차리는 건 빨랐다. 그저 벼락처럼 스치고 지나간 충격일 뿐이었다.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이며 디오넬의 손을 밀어냈으나, 처음 보는 모습 때문인지 그는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는 손을 떼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돌린 시선 끝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로한이 보였다.
“……아르펠.”
아이가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는 온갖 두려움이 점철되어 묻어나왔다.
단 한 번도 아르펠이 힘들어 하거나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로한으로서는 그 장면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잠깐 비틀거렸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빠른 걸음으로 로한을 향해 다가간 아르펠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는 로한의 볼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었다. 손끝에 묻어 나오는 온기가 찼다.
“로한. 난 괜찮아.”
살짝 벌려진 입술에서 쌕쌕거리는 숨이 묻어나왔다. 숨소리를 닮은 음성 몇 가닥이 흘러나왔지만 그마저도 단어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르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로한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테니까.”
내내 미동도 않던 로한이 아르펠의 손을 붙잡았다. 방금 전까지 맞잡았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차가웠지만, 붙잡는 힘은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하지 않았다.
“돌아가요. 저 여기 있기 싫어요.”
“……그래.”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말에 아르펠은 순순히 아이의 손을 따랐다.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음에도 그 모든 이유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운을 떼기가 힘들었다.
조금 전까지 비틀거렸던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태연한 낯을 한 아르펠은 되려 로한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 모든 것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디오넬은 착잡한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긴 시간을 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아르펠은 로한만을 중요시한다. 이는 즉, 자기 자신에게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신전에 발을 들였을 때 신관들이 제압하려 들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그 일을 벌인 자신에게 사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통증을 호소하며 비틀거렸는데도 동요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아무런 위기의식이 없었다.
“…하아.”
그러니 로한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그를 위로해 주더라도, 아르펠은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서로에게 맹목적으로 구는 두 사람의 유일한 맹점이었다.
체구 차이가 확연하게 나는 로한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사라지는 아르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디오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검을 다시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고는 주변을 정리했다. 안타깝게도 디오넬이 두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행동은 무엇 하나 없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
로한은 그날의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금세 털어내는 기색을 보이자 아르펠도 굳이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로한이 더 이상 슬퍼하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르펠은 만족했으니까.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그 뒤로부터 쭉 이어져 온 로한의 기행 때문이었다.
“떨어져.”
로한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아르펠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상황에서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돌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그럭저럭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있던 로한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싸하게 얼굴을 굳힌 채 일갈하는 모습을 보고, 레리아나가 놀라 딸꾹질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툴툴거리기만 하던 레리아나도 아르펠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로한의 눈치를 심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이 서너 번을 넘어가자 아르펠도 점차 이상함을 느꼈다. 전과 같이 그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며 행동했던 것들과는 어쩐지 궤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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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한.”
결국 로한의 기행이 지속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밤, 아르펠은 잠자리에 들기 전 로한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네?”
평소와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아이를 마주하고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요즘, 그 두 사람한테 왜 그래?”
“그 둘이요?”
그리고 아르펠은, 처음으로 정면에서 차갑게 굳어 버리는 로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뒤통수를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에 잠시 동안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아르펠.”
멍하게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아르펠을 로한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제야 로한을 바라보는 아르펠의 눈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그 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어?”
“왜요? 그 둘은 성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아르펠이 다치면 어떡해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은 어느새 옅게 울상을 지은 채였다. 그 표정의 변화를 인지하고 나서야, 어영부영 넘어갔던 그날의 일이 아이에게는 짙은 상처로 남아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성력에 고통을 호소했던 아르펠의 모습을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놓고는, 조금이라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강박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아르펠이 또 아파하면, 전…….”
당장이라도 눈물을 뱉어낼 것만 같은 표정을 보니, 도저히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향해 손을 뻗은 아르펠은 걱정이 묻어나오는 눈가는 물론이고, 전에 비해 조금 창백해진 볼을 매만져 주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정말이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위해서 살며, 아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아르펠에게는 로한이 더 중요했기에, 그는 가만히 침묵하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일방적인 편애였다.
품 안을 파고드는 애처로운 몸짓을 받아주며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갔던 레리아나와 카시아에 대한 생각을 거뒀다. 어차피 로한이 없었더라면 신경 쓰지 않을 인연이다.
“내가 걱정되면, 네가 계속 곁에 있어 줘.”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 키가 제법 커진 몸을 끌어안으며 아르펠은 미약한 이기심을 담아 속삭였다.
“응, 그럴게요.”
로한의 얼굴이 말갛게 개었다. 무언가에 환희하는 것처럼 곱게 휘어진 눈꼬리를 마주한 아르펠은, 아이의 미소를 보고선 존재감을 피력하는 가슴의 술렁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무엇이 됐든 로한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좋았다. 아르펠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마주보고 있는 아이의 것을 그대로 따라 그린 듯한 모습이었다.
***
“신전 측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기사들까지 물린 공간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방금 입을 연 이의 목소리와, 그 보고를 듣는 남자가 팔걸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나는 단조로운 음 뿐이었다.
사람 몸의 두어 배는 되는 것 같은 거대한 황좌에 앉아 있음에도 남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게 할 만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화려한 은발에 녹음으로 물든 것만 같은 옥빛 눈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온화한 인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비록 그 얼굴에 걸쳐지는 웃음은 따뜻함과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계산하는 냉철함이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베여있었다.
“그 덜떨어진 놈한테는 연락이 왔니.”
“…받지 못했습니다. 천신 측에서 이런 동향이 관찰되는 이상, 마신 측은 이미 발각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뭐… 그놈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쓸모가 많았으니, 이만하면 됐겠구나.”
보고를 마친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황제가 내뱉는 말을 듣고 있기만 했다. 잠시간 말이 없던 황제가 그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까와 비슷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이번에는 옅은 정이 묻어 있었다.
“아들아. 고개를 들으렴.”
“네, 폐하.”
“안타깝게도 이번 계획은 실패한 것 같지. 이럴 때 너라면 무엇을 하겠느냐?”
“…저라면, 버리겠습니다.”
조금 더 짙어지는 미소가 방금 전의 대답이 정답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자신과 똑 닮은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애정이 서렸다.
“그래. 그들이 알량한 입으로 진실을 이야기한들, 이 상황에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두 신전 사이에 불화를 야기하기 전에 들킨 것이 상당히 아쉽긴 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들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황제는 이번의 일로 상당한 이득을 얻어냈다. 이제 와 발각된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오히려 발각될 거라 예측했던 시점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어쩌면 신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약화된 걸지도 몰랐다.
“우리가 쌓아온 것들을 넘볼 자들을 남겨서는 안 되지.”
수려한 눈매가 지긋이 감겼다. 그의 얼굴은 아주 먼 과거를 추억하고 있는 듯했다. 미동 없이 다음 말을 기다리는 황태자의 모습은 황좌의 주인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외모와 눈빛, 분위기, 그리고 하나뿐인 바람까지. 느릿하게 눈을 뜨곤 아들의 모습을 살피는 황제의 얼굴이 기쁜 기색을 띠었다.
“로한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그 아이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기색을 보이면 내게 알리거라.”
“예, 폐하.”
타락한 마검의 영향을 받았으니 온전한 상태일 리가 없다. 신전에서 숨죽이고 살아갈 그 아이는 언젠가 그들의 근간을 뒤흔들 거대한 균열이 될 것이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의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두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끝이 머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 미하일 렌제스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
그 뒤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로한은 디오넬은 물론이고 그를 가르쳐 본 사람이라면 감탄하며 박수를 칠 정도로 일취월장했다. 어언 3년이 지났음에도 겸손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은 덕분이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든 것이 마냥 달갑지는 않았지만, 아르펠은 로한이 무언가에 매진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온 신경을 집중한 눈이 반짝거릴 때면 옴짝달싹 못 하게 사로잡힌 것처럼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물론 아르펠이 로한의 훈련을 지켜본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과를 끝내고 되돌아와 폭 안기는 순간이야말로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아르펠은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로한은 여전히 밝았고, 열심이었으며, 그 모든 모습이 어여뻤다.
“이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디오넬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무슨 뜻입니까?”
로한이 훈련에 매진하는 틈을 타 옆자리를 차지한 디오넬은 꽤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르펠은 흘끗 로한을 돌아보았다.
그가 이쪽을 살피지 않음을 확인한 뒤에야 디오넬에게로 온전히 시선을 돌렸다. 눈에 띄는 행동에 무심코 웃음을 지어보인 그가 한 박자 늦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난 3년 동안 로한 님이 쉰 날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새삼스러운 물음이었다. 잠시 지나간 기억을 되짚어본 아르펠은 뒤늦은 깨달음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없죠. 없어요, 단 하루도. 매일매일 무언가를 배우고, 습득하려 애쓰십니다. 물론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태도도 없습니다만.”
없다.
그저 로한과 함께 하는 시간 자체가 아르펠에게는 소중했다.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보내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뭐가 됐든, 어떻게 보내든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그저 웃는 얼굴을 바라만 봐도 좋고, 로한과 함께 나란히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모든 것이 마냥 기쁘고 행복하기만 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배우고 연습하기를 반복하는 로한에 크게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실력이 정진해 나갈수록 뛸 듯이 기뻐하며 와락 안겨드는 로한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 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쉬는 날 하나 없이 바쁘게만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모든 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르펠님만 괜찮으시다면… 숨도 돌릴 겸 로한 님과 함께 바깥나들이를 다녀오는 건 어떠십니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슬슬 눈치도 보이니, 이만 가 봐야겠군요.”
긍정적인 답을 듣는다면 부디 다시 찾아와 달라는 부탁을 남긴 디오넬이 자리를 뜨고 난 직후였다. 그새 수업을 끝냈는지 후다닥 달려온 로한이 아르펠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방금 전까지 디오넬이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왜 이렇게 빨리 달려왔어.”
“그냥, 아르펠이 보고 싶어서요….”
살짝 맺힌 땀을 닦아주자,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던 아이의 얼굴이 곱게 펴졌다.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듯한 행동은 아르펠의 시선을 홀라당 앗아갔다. 저 멀리서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선생 하나는 잊힌 지 오래였다.
“무슨 얘기 했어요?”
아직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손이 멈칫했다. 그 기색을 놓치지 않은 로한은 금세 미간 사이를 좁혔다.
“안 좋은 얘기 한 거예요?”
“아냐.”
곧장 묻는 목소리에 누군가를 향한 불신이 깃들어 있었다.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로한은 간혹 디오넬을 안 좋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당사자가 안다면 상당히 슬퍼할 만한 이야기였다.
37
아르펠은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로한의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을 펴고, 박혀 있는 군살을 더듬듯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이 고왔던 모습과 영 다른 지금을 두 눈에 깊이 각인하기라도 할 것처럼.
“간지러워요….”
“아.”
로한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 행동을 멈췄다. 이미 로한의 얼굴은 미묘하게 붉어진 뒤였지만 말이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양새에 그것을 꾹 눌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웠던 어린아이의 손은 이제 기다래졌고, 검을 수도 없이 휘두른 만큼 굳은살도 많이 배겼다. 제대로 쉰 날이 없다는 디오넬의 목소리가 순간 귓가에 맴돌았다.
어쩐지 가슴이 조여 왔다. 답답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아르펠?”
“로한. 우리 어디… 놀러 갈까?”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로한이 이유를 묻기도 전이었다. 반쯤 충동적이었지만 묻는 말에는 진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로한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말을 잘못 꺼냈나 싶어 뒤늦게 아이의 얼굴을 살핀 아르펠은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잔뜩 홍조가 어린 얼굴과 한껏 커다래져서는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온갖 기대를 끌어안고 있던 탓이다.
“갈래요, 저 꼭 갈 거예요. 무르기 없는 거죠?”
“…응, 약속할게.”
조금 더 일찍 말할걸.
무신경한 자신이 어쩐지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쪽이 빠듯하게 차오르는 이 기분은, 이런 자신임에도 계속해서 좋아해 주는 로한에 대한 고마움일 테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겼다.
이러니 내가 널 놓지 못할 수밖에. 움찔 굳었다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모습을 보며, 아르펠은 나지막하게 웃어 보였다.
***
신전의 크기가 무지막지하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따로 사유지가 있을 정도는 되었다.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도 그 사유지 중 하나였다.
“…네가 왜 같이 오는데?”
“소풍 간다며. 나도 가고 싶단 말야!”
그리고, 단둘이서 가기로 계획했던 바깥나들이는 인원이 부쩍 늘고 말았다. 이는 전적으로 디오넬의 탓이었다.
‘또래의 친구와 함께 가면 더 좋지…… 않나요?’
같이 공부를 하거나 훈련을 받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로한과 레리아나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디오넬 또한 그 점을 의식하고 함께 제안한 것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로한의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어차피 신전에 있는 내내 지겹게 봐야 하는 얼굴을 굳이 왜, 나들이까지 가서 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게 따지면 아르펠 또한 매일 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로한은 그런 맹점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르펠은 별개였다.
그제야 로한이 가장 원했던 것이 ‘아르펠과 단둘이서’ 가는 나들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디오넬은 상당히 곤란한 얼굴을 했었다. 이미 레리아나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함께 가고 싶다는 답을 받았다며 머뭇머뭇 내놓은 목소리가 잘게 흔들리기까지 했다.
결국 로한이 한발 양보하는 것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으나, 디오넬이 염려했던 대로 그들은 사유지로 가는 내내 말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아르펠이랑 둘이 다닐 거니까 따라오지 마.”
“싫어! 나도 아르펠이랑 다닐 건데? 그걸 왜 네 마음대로 정해?”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성력 문제 때문에 로한이 레리아나에게 예민하게 군 이후, 의외로 레리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로한을 대했다. 로한도 얼떨결에 평소와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화가 나지 않았냐고 레리아나에게 물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그 대답을 듣고 난 이후 로한은 레리아나에게 마음을 연 것인지, 조금 더 유해졌다. 친한 친구를 대하듯 가벼운 이야기도 나누고, 먼저 장난치는 일도 많아졌다.
여전히 아르펠에 한해서는 예민해지긴 했으나, 정확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성력이 그에게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설명해 레리아나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둘이 친해진 만큼 함께 있으면 조용해질 틈이 없었지만 말이다.
사유지의 정체는 신전의 뒤쪽에 나 있는 커다란 숲이었다. 신전과 숲의 거리는 가까운 편이었으나 숲 자체가 넓었다. 숲의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섰을 무렵에는 초입까지만 하더라도 위쪽에 솟아있던 신전의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빽빽한 나무와 풀 내음, 그리고 수풀이 스치는 소리만 남으니 마치 색다른 곳으로 놀러 온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숲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호수는 탁 트여서 시원하기도 하고, 꽤 아름다우니 나들이를 가기에는 안성맞춤일 거라던 디오넬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호수는 예뻤고, 넓었다.
누군가는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를 보며 감탄할 테지만, 아르펠에게는 ‘크다’라는 감상이 다였다. 아르펠의 시선이 호수가 아닌 로한에게 꽂혀 있었던 탓이었다. 그는 나들이를 떠날 때부터 줄곧 로한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호수가 마음에…….
“에잇!”
“…….”
든 것, 같긴 한데.
광활히 펼쳐진 새파란 호수를 보며 표정이 풀어지려는 찰나, 로한이 물벼락을 맞았다. 곁에 있던 레리아나가 냅다 호수의 물을 손에 퍼담아 로한에게 뿌려버린 탓이었다.
“…하하. 놀랐지?”
“…….”
어색한 웃음이 흩어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줄행랑쳤다. 로한이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쫓아 달렸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뒤쪽에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펠이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기척이 하나 있었다. 레리아나와 함께 나들이에 동행한 카시아였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내 로한에게 향하던 시선이 그제야 옆으로 돌아갔다.
아르펠은 카시아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로한을 제외한 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아르펠은 고사하고, 카시아 역시 누군가와 살갑게 대화를 나눌만한 성격은 아닌 탓이다.
레리아나는 이를 ‘낯가림’이라고 표현하고는 했지만, 글쎄. 누가 됐든 그녀가 말이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둘이었으니 서로 이야기를 나눌 리가 만무했다. 연결점인 로한과 레리아나가 없는 이상 더더욱.
딱히 대답은 없었으나, 이는 무언의 허락이기도 했다.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는 두 사람에게 넌지시 시선을 던지며, 카시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제가 레리아나 님을 처음 본 건 그분께서 신전에 도착한 직후였습니다. 고아였던 탓에 옷은 해졌고 더러웠지만 허름한 차림새가 눈빛만큼은 가리지 못하더군요. 무척이나 다정하고, 또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녀가 늘어놓은 것은 레리아나의 과거였다. 딱히 기억해내려 하지 않았던 터라 떠올리지 못했던, 소설 속에서 묘사되었던 그녀의 과거가 불현듯 윤곽을 그렸다.
레리아나가 아주 어렸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빈민촌에 버리고 도망갔다. 이후 부모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고아로, 어린아이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든 곳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선함을 잃지 않았다. 힘든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고아라는 공통점. 그것이 원작에서 로한이 레리아나에게 마음을 주었던 이유였고, 바래지지 않은 선함은 로한을 차근차근 매료했다.
이야기 속의 로한은 정말이지, 레리아나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과거를 알고 있더라도 갑작스럽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유를 묻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은근히 그녀를 독촉했다.
“레리아나 님이 어째서 마신 측 신전에 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천신 측에서 색출하지 못한 신전 내의 첩자가 해를 끼칠 것을 우려해서, 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분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성정이 착하나, 딱 그뿐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목표도, 신념도, 이유도 찾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신랄한 비판이었다. 레리아나를 소중히 여기는 카시아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안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카시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새삼스러워할 만한 발언이었으나 아르펠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고요히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변화가 없는 그 모습에 위안을 얻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풀어졌다.
“그게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축복을 타고난 이상, 언젠가는 망령과의 전쟁터를 전전해야 합니다. 싸울 이유를 무엇 하나 찾아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차차 마모되다, 꺾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전 레리아나 님이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또래를 만나면 변하실까 싶어 이곳에 온 겁니다. 곁에 로한 님마저 없었다면 지금까지 해온 훈련조차 달가워하지 않으셨을 테니, 좋은 선택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아르펠 님. 당신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말입니까.”
로한이 아니라?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의도만큼은 전해졌을 것이다. 빤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으나 틀린 말이 아니라는 듯 단호한 끄덕임만이 돌아왔다.
“아르펠 님이 두 분이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르펠의 눈썹이 까딱였다. 처음으로 보이는 유의미한 표정의 변화였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은 정답이었다. 아르펠은 로한이 레리아나와 함께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둘이 가까이 붙어있는 날이면 되도 않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이제는 전개가 상당히 틀어져 버렸으니 크게 의미가 없는 원작 소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소설에서 두 사람은 절절한 사랑을 하는 연인이었다. 지금 둘의 사이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펠은 종종 로한이 멀리 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불쾌했다.
“로한 님은 당신을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당신의 허락이 아니었다면 레리아나 님이 곁에 있을 일은 없었겠죠.”
“…….”
“그러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전부터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침잠한 눈이 정확히 카시아를 향했다. 속내를 읽힌 것은 처음이었다.
말이 없고 무뚝뚝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침착하고, 타인의 심리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것에 능한 사람이었다. 신에게 축복받은 이를 지척에서 보필하기에는 안성맞춤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였다. 아르펠은 레리아나를 로한의 곁에서 떼어놓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아르펠. 둘이서 뭐해요?”
타닥 하고 달려오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르펠은 쓸데없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뜬 로한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얘기했어.”
“무슨 얘기?”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이 뭔데요?”
…오랜만에 겪어 보는 물음표 공격이었다. 닦달하는 모습이 사뭇 초조하게까지 보였다.
“감사 인사를 했을 뿐입니다.”
“정말요?”
“응, 정말.”
옆에 서 있던 카시아가 대신 대답해 주었음에도 확인 차 묻는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계속 이어지는 물음에 당황했다는 사실조차 어느새 까맣게 잊었다.
더 이상은 어린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소년의 경계에 자리한 로한이었지만 아르펠의 눈에는 여전히 예쁘고 귀엽기만 했다.
“레리아나는?”
“아르펠은 레리아나가 더 중요해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리아나를 쫓아 달리던 로한을 떠올려 한 질문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아르펠이 잠시 말을 잃었다.
말투는 뚱했으나 로한은 이제는 상당히 커버린 몸을 구겨 아르펠에게 안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제야 멈춰 있던 아르펠의 손이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슬며시 쓸어 넘겨 주었다.
“다친 동물이 있어서 치료해 주고 있어요.”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카시아는 진작 레리아나를 찾아 떠났고, 아르펠 역시 로한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미는 로한에 그의 손을 단단하게 맞잡은 채였다.
38
“으음…… 다 됐다!”
레리아나는 호수의 반대편에 있었다. 로한에게 물을 뿌리고 도망가느라 정반대편까지 달려왔다가 다친 동물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치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였다. 아마 그건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성검과 계약하지 않아 쓸 수 있는 건 축성뿐이었다.
효율이 뛰어나지 않음에도 내내 집중해서 동물을 치료한 모양이었다. 다리에 핏자국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토끼는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흘끗 주변을 돌아본 아르펠은 한구석에 떨어져 있는 덫을 발견했다.
“저건 원래부터 있었어?”
“덫이요? 네, 제가 빼줬어요.”
아르펠이 곧장 몸을 숙였다. 덫을 만졌을 로한의 손에 상처가 남아 있지는 않은지 급하게 확인했다. 꽉 잡혀 있는 로한의 손가락이 짧게 꼼지락거렸다. 로한은 걱정을 숨기지 않는 아르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 사소한 걱정을 받는 것이 싫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검증받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상반된 두 생각이 연신 부딪힌 탓에 결국 가만히 보살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돌아가렴, 토끼야.”
축성을 무사히 마친 레리아나가 토끼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귀를 뒤로 눕히며 잠시간 그 손길을 만끽하는 듯싶던 토끼는 고마움을 표하듯 그녀의 손에 몇 번이고 코를 살짝 부딪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다리가 무사히 나았음을 증명하듯 빠른 속도였다.
토끼가 떠나기 전 부린 애교 아닌 애교에 레리아나가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꺄르르 흩어지는 웃음이 경쾌했다.
그 순간 아르펠은 저도 모르게 로한의 모습을 살폈다.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마자 두 눈이 마주쳤다. 내내, 로한은 아르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시선을 쉽게 사로잡을 만큼 예쁘게 웃는 레리아나를 눈앞에 두고서도.
적나라한 만족감이 가슴을 빠듯하게 채우다 못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이러니.’
이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로한이 레리아나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막지 못한 것은.
아이를 상대로 저열한 만족감이나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언젠간 아이를 망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로한에게 남아 있는 선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막지 못했다.
“악! 왜 때려?!”
“네가 아까 물 뿌리고 도망갔잖아.”
“그거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물에 빠뜨려 줄까?”
“……미안.”
아르펠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나서야 레리아나에게 다가간 로한은 망설임 없이 딱밤을 때렸다. 동그란 이마가 경쾌한 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이고 머지않아 붉게 달아올랐다.
원작만큼은 아니었으나 함께한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로한과 레리아나 사이에도 유대감이 쌓였다. 부모를 잃은 고아이고, 어린 나이에 힘든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원작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연결고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편해 보였다. 로한도 아르펠이 곁에 있을 때만 레리아나에게 예민하게 구는 편이지, 그게 아니라면 친한 친구처럼 그녀를 대하고는 했다.
아르펠은 그 모든 변화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 레리아나의 때 타지 않은 선함, 그리고 원작의 로한을 위로해 주었던 그 다정함이 로한의 선함까지 지켜주고, 바래지 않도록 해주기를 원했으니까.
***
이후 돗자리를 펴고, 싸 온 음식들을 위에 늘어놨다. 내용물이 풍성한 샌드위치부터 입가심하기 좋은 상큼한 과일, 바삭하게 튀겨진 닭튀김과 고소한 내음을 풍기는 빵까지 한가득 차려졌다.
사실 평소에 먹던 음식과 그다지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한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바깥바람을 솔솔 쐬느라 머리카락은 부스스해졌지만 웃고 있는 얼굴만큼은 행복이 듬뿍 묻어나왔다.
‘…조금 더 자주 나오자고 할까.’
아르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활짝 웃는 로한의 얼굴에서 시선이 떠날 줄을 몰랐다. 와중에 로한이 내밀어 주는 한입 크기의 음식들도 군말 없이 받아먹고는 했다.
만족스러운 식사와 시원한 날씨는 사람을 풀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로한이 졸려 하는 것 같아 무릎을 내주었던 아르펠은 어느 순간 두 눈을 감고 쌔근거리며 잠이 든 로한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평화로운 곳이었기에, 이질적인 소음은 더 잘 들리기 마련이었다.
“방금…….”
“쉿.”
로한이 아르펠의 무릎을 베고 자는 모습을 보고는 한껏 놀렸던 레리아나였으나 그녀마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깨어있는 건 아르펠과 카시아뿐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 또한 소리를 들었는지 표정이 변했다. 아르펠은 조용히 검지를 입에 대어 보였다.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았으나 로한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혹여나 방금 전의 목소리로 깬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잠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한쪽으로 눌린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 주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카시아가 미처 붙잡기도 전에 아르펠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달리는데도 기척 하나 없어, 흔들리는 풀만이 그가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로한을 깨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 움직인 것이었으니, 최대한 단시간에 일을 해결해야 한다. 그 강렬한 의지가 아르펠을 소음의 근원지로 데려다주었다.
“…히익! 사, 살려 주십시오!”
“입 다물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아는 모양이지.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비는 행색이 딱 그랬다.
이 숲은 신전의 사유지였다.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거니와, 안에서 동물을 사냥하는 일 따위 허락이 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도축용 칼과 덫들이 그가 사냥꾼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냥을 하고 있었겠지. 찰그랑거리는 덫이 호수 부근에서 보았던 덫의 모양과 비슷했다.
고함이 시끄러워 눈살을 찌푸렸건만, 듣고 싶지 않은 변명이 남자의 입을 타고 줄줄 흘러나왔다.
“하, 하나뿐인 아이가 아픕니다. 약을 살 돈을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어서, 그만 금지된 일에 손을 뻗고 말았습니다. 제, 제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이는 홀로 앓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시끄럽다고 했을 텐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듣지.
눈을 깜빡일 정도의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바닥에서 움튼 그림자가 단숨에 남자를 집어삼켰다.
누군가는 남자의 사정을 듣고 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르펠은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눈물을 떨구며 말하는 내용에 집중하지 않은 탓이다. 사유지에 들어와 금지된 사냥을 하고 있는 사실이 명백해진 순간부터 남자의 말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나들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림자에 갇힌 남자가 바깥으로 다시 나오는 것은 몇 시간 후의 일일 것이다. 오감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갇혀 있으면 미치거나 정신이 망가지고는 했다.
만약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죄에 대한 값을 치르고 난 뒤에도 하나뿐인 아이를 돌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본인의 정신이 망가졌는데 남을 챙길 수 있겠는가.
“…깼으려나.”
하지만 아르펠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남자와 아르펠은 남이고, 아르펠에게 중요한 것은 로한뿐이었으니, 그가 미치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딛는 걸음이 빨랐다. 폭신한 풀밭을 밟으며 가볍게 앞으로 튀어나가는 몸은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발을 딛어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와 로한의 자는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르펠의 표정이 풀렸다. 로한의 머리를 살짝 들어 그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아르펠……?”
“쉬. 더 자.”
그 움직임에 잠에서 깬 것인지 금빛 눈이 느슨하게 떠졌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꺼풀 위로 손을 덮어 주었다. 로한이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숨소리가 다시 고요해지고 나서야 손이 떨어져 나왔다. 은은하게 감각이 남아있는 것 같은 손바닥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풀잎을 헤치고 지나가는 소리, 잠든 두 사람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는 탓일까. 문득 살려 달라 소리쳤던 남자가 떠올랐다.
‘…네가 날 닮지 않기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되돌아가도 아르펠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로한이 자신과 똑같은 선택을 한다면, 조금 슬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복잡해지던 생각이 끊긴 것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던 로한이 두 눈을 불쑥 뜬 때였다.
“아… 저 오래 잤어요?”
“아냐. 별로 안 잤어.”
자신이 잔 시간을 가늠하던 로한은 너무 오래 자버렸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속상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이었다.
“많이 잤는데요… 해도 벌써 저만큼 내려갔고.”
…확실히 그가 자기 전과 비교해서는 높이가 많이 낮아졌다.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르펠의 시야에 문득 파란 호수가 보였다.
“…물놀이할까?”
즉흥적으로 내세운 대안이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아르펠이 말을 꺼내자마자 로한은 신이 나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딱 발목이 잠길 때까지만 들어가 발로 물장구를 쳤다. 장난스럽게 발을 구를 때마다 작게 튀긴 물방울이 옷 위로 진한 자국을 남겼다.
“지금 나만 빼고 물놀이하는 거예요?!”
뒤늦게 잠에서 깬 레리아나와, 그녀가 끌고 나온 카시아까지 가세하며 단순한 물장구에 불과했던 것은 물싸움으로까지 번졌다. 한두 방울 튀긴 흔적만이 남아 있던 옷은 어느새 아랫부분이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흠뻑 젖은 옷이 늘어져 몸에 달라붙는 것은 마냥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흘끗 돌아본 로한의 얼굴에는 직전까지 속상해하던 것도 잊은 듯한 활짝 피어나는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괜찮아졌다.
‘나쁘지 않을지도.’
다시 생각해 보니 재밌는 것도 같았다. 아주 빠른 생각의 전환이었다.
날이 저물고 나서야 그들은 신전으로 되돌아갔다. 온통 젖은 네 사람을 보고 마중을 나와 있던 신관 하나가 입을 떡하니 벌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 탓에 로한과 레리아나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신전에서 지낸 지 3년. 처음으로 나선 바깥나들이는 그렇게, 평화로운 마무리를 지었다.
39
<무게 중심이 너무 오른쪽으로 쏠렸어.>
“…음. 이렇게요?”
<어깨에 너무 힘주지 말고.>
로한은 검에서부터 공명하듯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몸을 움직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똑바로 가로지르는 검이 날카로운 예기를 흘렸다. 웅웅거리며 떨리는 검신에 검은빛의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아, 하지만….”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안 좋아.>
입술을 한 번 삐죽이긴 했지만, 로한은 그의 말을 듣고 자세를 풀었다. 그렇다고 검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정말.>
잠깐 아무 말이 없는 듯하던 목소리가 짧게 탄식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를 사로잡는 짧은 빛이 번지며 로한은 검을 잡고 있는 손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르펠이 로한에게 반쯤 안겨 있던 몸을 뗐다.
로한과 아르펠이 신전에 도착하고 난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로한은 여러 신관들에게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배우고, 기사들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신의 축복이 도움을 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부터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축복을 받은 것인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마신만이 알겠지만, 로한을 가르친 이들이라면 하나같이 그의 재능에 혀를 내둘렀다.
“…무겁지 않아?”
“아르펠은 가벼워요.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먹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로한이 뒷말을 중얼거리며 속상한 얼굴을 했다.
5년 동안 로한은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다. 일주일 동안 바깥에 구호 활동을 하러 갔다 온 디오넬이 그 사이에 불쑥 자란 로한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아르펠이 안고 다녔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아르펠과 주먹 하나 정도의 차이만을 남기고 키를 따라잡았다.
애초에 사람이 아니었으니 무얼 하든 변화가 없는 아르펠의 몸과는 다르게 활동량이 많고 검까지 배우는 로한은 몸집이 커졌다.
로한은 종종 그가 어릴 때와 무엇 하나 달라진 점이 없는 아르펠을 보며 여러 감흥을 느끼는 듯 했고, 아르펠은 완전히 아이의 태를 벗어버린 로한을 보며 조금은 안타까워했다.
“나도 아르펠한테 배우고 싶은데…!”
“꿈 깨.”
“시아, 쟨 어쩜 변한 게 없을까?! 여전히 치사해!”
“레리아나 님도 변한 게 없으십니다.”
“…칭찬이지?”
새삼스럽게 5년간의 시간을 그리고 있던 아르펠은 레리아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몸만 곰같이 커져서는!”
“넌 토끼같이 작네.”
“야! 토끼는 아니거든?!”
그녀는 3년 전과 마찬가지로 마신 측 신전에 남아있었다. 서로가 그만큼 익숙해진 탓인지 티격태격하는 시간이 늘어나기도 했다.
“아르펠! 로한 좀 봐요, 네?”
“아르펠한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진짜!”
물론 변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 로한은 여전히,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아르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꺼리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아르펠에 한해서는 칼같이 구는 로한을 보며 상당히 억울해 했으나, 이를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하나뿐인 동갑내기가 아르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이 돌아가 버린다는 것을 그동안의 학습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울상만 짓는 레리아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펠이 툭 말을 내뱉었다.
“귀엽네. 토끼.”
“진심 좀 담아서 얘기해 주실래요…?”
감정 하나 묻어나오지 않는, 책을 읽는 것 같은 딱딱한 어투에 허탈하게 대답했다. 레리아나는 이미 그것에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귀여워요? 쟤가?”
레리아나는 어릴 때 인형 같았던 그 모습 그대로 자라났다. 키가 조금 작긴 했지만, 살랑이는 금발과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동자는 그녀를 보는 사람이 누구든 한 번씩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매력이 있었다.
눈앞의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로한의 날선 반응을 눈치챘는지 잠시간 눈을 굴리던 아르펠이 뒤늦게 덧붙였다.
“아니. 안 귀여워.”
옆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치켜 뜬 레리아나가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레리아나는 두 사람이 자신들만의 세계에 푹 빠져 사라질 때까지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
아르펠이 로한에게 검을 가르쳐 주는 시간은 정해진 로한의 하루 일과 중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로한은 그와 함께 검술을 연습하고 난 다음, 함께 방으로 돌아오는 것을 꽤 좋아했다.
신전 내에서도 두 사람이 워낙 각별하게 굴다보니 이를 존중해 주는 일이 많았다.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수습 신관들이 방으로 가져다주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니 방 안에서 잠시 기다려야 할 것이다.
테이블 위에 누군가가 놓고 간 간식거리를 발견한 아르펠이 그것을 로한의 앞으로 가져왔다.
“아르펠. 저 이제 많이 크지 않았어요?”
“많이 컸지.”
“그럼 계약…….”
“성인이 되면.”
그리고 요즘은 이런 대화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미 거절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로한은 크게 상처받은 얼굴은 아니었으나, 삐죽거리는 입술이 서운한 티를 팍팍 내었다. 슬쩍 그것을 바라본 아르펠이 로한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이제는 쓰다듬기 편한 위치가 아니었기에, 로한은 아르펠이 손을 뻗을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몸집만 커졌지, 아르펠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던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르펠은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다고 느꼈다.
“…시간이 너무 빠르네.”
“아르펠은 내가 계속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작게 토로한 진심에 호박색 눈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거세게 일렁였다.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그 눈을 올곧이 마주하며 아르펠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쿠키 하나를 집어 로한의 입가에 가까이 대주는 것은 덤이었다.
“아니.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좋아.”
“……그럼 왜 그런 말을 해요?”
“어릴 적은 너무 짧으니까.”
아이였을 때부터 지켜보며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아쉬움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서운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지만, 로한은 아르펠이 내민 과자를 꾸역꾸역 입에 넣기는 했다.
“그래도 멋지게 자라주었으니 괜찮아.”
“멋져요? 내가?”
“응.”
언제 그랬냐는 듯,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배시시 웃는 얼굴에 아르펠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지어졌다.
로한이 어릴 적, 아이가 웃는 얼굴을 보며 하나하나 배워 간 웃음이기에 아르펠이 웃는 모습은 로한과 비슷했다. 끝이 조금 휘어지는 눈가도,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도, 입 옆쪽에 피어있는 조그마한 보조개도.
어느 날인가 로한은 그의 웃음이 자신과 무척 닮았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는 아르펠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보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 그것이 함께했던 그들의 과거를 온전히 증명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선명하게 남은 흔적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정의 내릴 수는 없었지만, 로한은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고마워요.”
어쩐지 열이 오르는 것만 같은 볼을 아르펠의 손에 비비며 로한은 더 짙게 미소 지었다.
***
아르펠보다는 아니었지만, 로한은 스스로가 제법 강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 바람을 들어준 것처럼 쑥쑥 자란 몸은 아르펠과도 키가 비슷해졌고, 그는 이 사실에 굉장히 만족했다.
믿을 수 없는 다른 신관놈들에게 아르펠의 안위를 맡기지 않아도 될 때가 온 것이다.
‘짜증 나.’
다른 신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르펠과는 다르게 로한은 그들을 싫어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르펠을 박해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를 우러러보고 존경한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의 기억은 머릿속에 깊게 뿌리내린 지 오래였다.
로한에게 그들은 여전히 수틀리면 언제든 아르펠을 등질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의 손으로 지켜야 했다.
‘더 빨리.’
시간이 더 빨리 지났으면 좋겠다. 성인이 되고, 계약을 하고, 누군가 그의 손에서 아르펠을 앗아가는 일이 없게.
딱 지금과 같이, 아르펠과 떨어지지 않은 채 하루하루가 평온하게 흘렀으면 좋겠다. 로한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소망했다.
그리고 그 날의 소망은, 채 하루도 가지 않아 엉망이 되고 말았다.
“왕자님 같아요!”
중앙 신전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는 날이 오면 신전의 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만 귀족이건 평민이건 할 것 없이 모여드는 것이 로한에게는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로한의 곁에 아르펠이 서 있지 않은 때는 드물었다. 무슨 일이 있든 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성향만큼은 어릴 적과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마신이 대화를 한답시고 아르펠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오늘도 그랬을 것이다.
못마땅한 기색을 품고 있던 낯은 앳된 목소리 하나에 풀어졌다. 발치에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고마워. 길을 잃었니?”
“으응, 아니요!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지루해서….”
아르펠을 제외한 타인이라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 그였지만, 자신이 아르펠과 처음 만났을 적의 나이대로 보이는 아이들에게만큼은 달랐다. 어쩌면 그가 경험했던 아르펠의 행동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데려다주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찰나, 조그마한 손이 가슴에 꼭 껴안고 있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거, 줄까요?”
어린 나이임에도 제법 두꺼운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책의 표지가 그가 알고 있는 것들과는 달랐다. 두꺼운 이론서나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 말고는 접해 본 것이 없던 로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책인데?”
“여기, 오빠처럼 왕자님 같은 사람 나와요!”
어쩐지 그리로 향하는 관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분홍빛에 몽실몽실한 표지가 이목을 끌었다. 로한이 고민하는 눈치이자, 아이가 그것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전 이거 엄청 많이 읽었어요! 이제 오빠가 읽어도 돼요.”
“하지만 이건 네 책인걸.”
“오늘 돌아가면서 엄마가 하나 더 사 주기로 했으니까 괜찮아요!”
40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는 책을 로한의 품에 밀어 넣고는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눈대중으로나마 살핀 로한은 뒤늦게서야 손에 억지로 쥐여진 책을 바라보았다.
많이 읽었다고 한 말이 사실인 듯 겉표지의 끝이 너덜거렸다. 손때가 묻었는지 색이 조금 바랜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을 가늠해 본 로한은 신전 뒤쪽의 정원에 있는 벤치에서 아르펠을 기다릴 겸,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책은 로한의 마음속에 격변을 일으켰다.
‘…사랑?’
책은 바깥에서 흔히 말하는 통속 소설이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것인지 공주님과 왕자님이 등장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소설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하게 잘 다루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어휘를 사용했으며, 상황과 표현이 상당히 직관적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장면에 다다라서는 몇 번 울기까지 했는지 종이의 끝이 울어 있었다.
로한이 혼란을 느낀 것은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을 읽고 난 후였다. 손을 잡고, 포옹하고, 뽀뽀하고. 책의 마지막에 다다라 ‘어여쁜 딸아이를 낳은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마저 나오자, 로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랑 아르펠은…….’
하필이면 아이용으로 제작된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 유일한 비애였다. 더 나아간 단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과 아르펠이 나누는 행동들이 동화 속에서 말하는 사랑과 똑 닮아있다는 데에만 생각이 닿았다.
“로한. 여기서 뭐 해?”
아무것도 결론짓지 못하고 그저 혼란만을 가져다준 책을 두 손에 꼭 쥔 채 가만히 앉아 있던 로한에게 아르펠이 다가왔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탓에 정확히 태양을 가린 아르펠은 평소보다 더욱 반짝거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그냥요. 날이 좋아서요.”
“이건….”
“아, 지나가던 애가 줬어요.”
아르펠은 로한이 가지고 있는 책에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시선을 한 번 주는 데에서 그쳤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책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 아주 깊은 구석으로 몰려났다. 잠깐 느꼈던 혼란을 금세 잊은 채, 로한은 파란 하늘 아래 아르펠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소설 한 권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의구심이 결국 제 안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킬 줄도 모르고.
***
‘로한.’
로한은 어쩐지 제게 다가오는 아르펠의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가오는 걸음새에, 얼굴에 걸쳐져 있는 옅은 미소도 무언가 달랐다.
목이 탔다. 무슨 기분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 연신 온몸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기분이 되었든 로한이 아르펠의 손을 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게로 뻗은 하얀 손을 보며 두 눈을 꾹 감았다.
손이 닿음과 동시에 아르펠이 몸에 무게를 실어 기대왔다.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로한의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새에 뒤쪽에 있는 침대로 쓰러진 로한이 놀란 낯을 하고 아르펠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해?’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 로한은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쏠리고 말았다.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언제나 곱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기다란 손가락은 로한의 목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때마다, 천천히 선을 따라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 소리가 커졌다. 어쩌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소를 머금어 끝이 올라가 있는 짙은 눈꼬리가, 그를 부르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쿵쾅거리며 존재를 피력하는 심장에 새겨졌다.
홀린 것처럼 그 모든 것을 바라보던 로한의 입에서 마침내 한 줄기 음성이 새었다.
‘…아르펠.’
내내 굳어 있던 손이 움직였다. 제 몸 위에 올라탄 이에게로 천천히 뻗어진 손이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 뽀얀 허벅지의 위에 닿았다. 한순간에 입고 있던 옷이 사라졌으나 그 순간만큼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손안에 닿는 감촉이 너무 부드러웠다. 힘을 주면 힘을 주는 대로, 고스란히 손자국이 남을 것만 같은 감촉과 색에 침음을 삼켰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로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배의 안쪽이 너무 뜨거웠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것들이 한데 뭉쳐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가만히 로한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펠이 몸을 움직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만한 거리에서 멈춰 서자 로한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스치듯 볼에 닿는 새까만 머리도, 애정을 담아 마주쳐 오는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도 모두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었다.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둘만이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한.’
숨이 섞일 것만 같은 거리다. 그 상태에서 아르펠이 다시금 제 이름을 읊조리는 순간, 로한은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말았다.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을 뗐다. 한 손으로는 아르펠의 몸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아르펠은 로한의 힘에 순순히 움직여 주었다.
자연스레 입술이 맞닿았다. 벌려진 입술 새로 숨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이 몸을 부추기는 것을 막지 않은 채, 로한은 서툴게나마 보드라운 입술을 탐했다.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듯했고, 몸은 환희에 떨렸다.
말캉하게 눌리는 입술도, 입술 새로 흩어지는 헐떡이는 숨결도, 몸에 열이 돌기 시작했는지 평소보다 혈색이 도는 얼굴도.
로한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버렸다.
***
두 눈이 번쩍 떠진 것은 새벽녘이었다. 한동안 되돌아오지 않는 정신을 애써 갈무리하고, 옆쪽에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로한은 머릿속을 잠식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저 한낱 꿈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얼굴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열이 올라 붉어진 눈가와, 몇 번이고 문댄 탓에 타액에 흠씬 젖어 촉촉하던 붉은 입술, 그리고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던 보라색 눈동자가 연신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점은 아래에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면서도 꿈에 나왔던 모든 장면들이 떠나가지를 않았다.
몸을 일으킨 로한은 곧장 침대를 벗어났다.
“로한.”
“…아르펠?”
일어나자마자 들린 아르펠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바로 자리를 떴을 것이다. 어색하게 침대로 고개를 돌려 마주한 눈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게?”
“화장실이요.”
아르펠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다른 것을 묻지는 않았다. 그가 다시 눈을 감는 모습을 바라보다, 로한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낯설었던 꿈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야 흐르는 물에 사라졌지만, 기억과 감촉은 뇌리에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로한은 그렇게 물을 틀어놓고 몇 분이나 제자리에 서서 고뇌했다.
“로한. 어디 아파?”
“아니에요. 금방 나갈게요.”
그마저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로한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르펠이 직접 문을 두드린 탓이었다.
다시 입고 자지 못할 것 같은 속옷을 욕실의 한구석에 숨겨놓고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아르펠이 서 있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애정을 담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가 창가를 통해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고요하게 빛났다. 옅은 달빛 말고는 빛 한 점 없는 공간이었음에도 아르펠의 모습은 로한의 시야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박혔다.
여태껏 알 수 없는 기분이라고 치부했던 모든 것들이 뒤늦게 파도처럼 몰려왔다. 가슴이 죄어들었고, 심장은 지나치게 둔중하게 울려댔다.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웠나 봐요.”
“그래?”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도 로한은 익숙하게 아르펠의 손에 고개를 기댔다. 열을 재는 것처럼 볼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금세 떨어져 나갔다.
조금만 더 만져 줬으면. 떨어지는 손끝에 로한의 미련 넘치는 눈길이 달라붙었다.
침대로 향하는 아르펠의 걸음을 로한이 졸졸 따라갔다. 자리에 눕고, 어서 자라는 듯 가슴팍 위로 느껴지는 토닥임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옆자리에 누워 있는 아르펠에게 지나치게 신경이 쏠린 탓이다.
약간의 뒤척임에 이불이 쓸리는 소리, 아르펠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자그마한 숨소리, 그에 맞춰 뛰는 시끄러운 심장 고동까지 무엇 하나 로한이 쉽게 잠에 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흐르지 않는 시간을 견디다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살짝 시선을 돌리자 베개 위에 단정하던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홀린 것처럼 손이 움직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곧장 뻗어진 손이 아르펠의 입술 가까이에 다가갔을 무렵이었다.
“로한?”
거짓말처럼 떠진 눈이 로한을 응시했다. 급하게 손을 뒤로 거둔 로한이 애써 미소 지었다.
“잠이 안 와?”
“…아니에요. 그냥.”
아르펠은 잠시 의아한 눈을 하고 로한을 바라보았으나, 로한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꽉 다물린 입매에서 약간의 고집이 묻어나오는 탓에 아르펠의 입꼬리가 조금이지만 올라갔다.
로한은 어릴 적, 그러니까 아르펠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 잠자리에 들 때면 항상 그와 함께 누워 잠들었다. 그건 7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침대를 바꾸지 않은 탓에 아르펠과 키는 비슷해지고, 덩치는 더 커져 버린 지금에 와서는 나란히 누운 것만으로도 제법 꽉 차게 느껴지는 잠자리였다. 그래도 로한은 단 한 번도 이것을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르펠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예배 참석하기로 했잖아. 어서 자야지.”
“…응, 잘게요.”
하지만 지금만큼은 마냥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팔이 스치듯 닿을 때마다 로한은 몸이 흠칫 튈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무엇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한은 그대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말, 모든 것이 불분명한 밤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그날, 로한은 밤새 잠을 설치고 말았다.
41
“아르펠 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디오넬은 예배당의 뒤쪽에 홀로 앉아 있는 아르펠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그의 곁에 있던 로한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기도 했고, 아르펠의 표정 역시 상당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말을 걸지 못하겠다며 하소연하는 어느 신관의 말을 듣고 아르펠이 앉아 있다던 곳으로 직접 찾아온 차였다. 디오넬은 어째서 신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곁에 로한이 없다면 아르펠은 표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로한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꾸는 해 주지만 집중하는 낌새는 없었다. 그럼에도 매몰차게 굴지는 않으니, 간혹 아르펠에게 안부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 누가 봐도 안 좋은 일이 있음을 피력하고 있었다.
뒤쪽에서 응원하는 신관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묻자, 아르펠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예배는 끝났습니까?”
“네, 한참 전에 끝났습니다만… 로한 님께 듣지 못하신 건가요?”
“…그렇군요.”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로한은 나이가 들면서 여러 공부를 시작했고, 그중에는 마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일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정해진 일과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로한은 군말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은 로한을 존경하고 경외심을 가지는 이유가 되었다.
중앙 신전이 개방되는 날의 아침이 되면 로한은 신관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임을 나타내는 정복을 갖춰 입고 예배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신전의 외부로도 로한의 이름이 퍼져나갔으나, 로한은 단 한 번도 아르펠을 예배에 데려가지 않았다.
디오넬은 그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르펠에게 맹목적으로 굴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아이다. 신관들에게도 그렇게 굴었으니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라면서 그 행동들이 심해지면 심해졌지, 절대로 덜해지지 않았다.
혹여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아르펠에게 쏠릴 것을 걱정한 것이렸다. 디오넬도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로한이 아르펠을 떼어놓고 오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예배당의 뒤쪽, 작은 방에서 아르펠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사라지면 로한은 쪼르르 아르펠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꼭 붙어있고는 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웬만하면 그들도 예배가 끝나고 로한을 붙잡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로한이 없다니?
“혹시… 싸우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미처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아르펠과 로한의 다툼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재앙일 것이다. 다행히도 아르펠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로도 디오넬은 안심했으나, 그렇다면 아르펠은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짙은 망설임이 배어 있는 눈을 하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펠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작은 목소리가 바람처럼 새어 나왔다.
“로한이… 절 피합니다.”
“……네?”
디오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
문제의 시작은 아침 일찍 예배가 있는 날의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더라도 아르펠이 깨워 줄 때까지 잠자리를 지키는 편이었던 로한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잠 못 잤어?”
“아…… 네. 조금.”
로한의 얼굴을 마주 보자마자 아르펠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눈에 실핏줄이 올라와 있고, 눈 아래는 퀭했다. 밤 내내 잠을 설쳤다는 것을 증명해주듯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이 눈에 띄었다.
“악몽 꾼 거야?”
아르펠의 표정이 대번 걱정스럽게 변했다.
둘이 처음 함께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을 제외한다면, 로한은 언제나 아르펠의 곁에서 푹 잠에 들었다. 악몽을 꾸지 않는 건 물론이었다.
내내 없었던 일이지만 갑자기 악몽을 꿀 수도 있지 않은가. 밤사이 손으로 목을 긁으려는 낌새도, 우는 낌새도 느끼지 못했지만 악몽에 잠을 깼다 들었다 반복했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아니에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까.”
“…그래?”
꾸지 않았다면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르펠은 표정을 풀고는 로한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새 수척해진 것만 같은 얼굴이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이었기에 안타까워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아르펠의 손을 본 로한이 살짝 뒤로 물러나지만 않았더라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아.”
로한은 자신이 아르펠을 피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행동을 자각하고 나자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잠시간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르펠은 도리어 본인의 행동에 놀라 시무룩해진 로한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응. 알았어.”
그 정도로만 마무리되었다면 문제가 커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로한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아르펠이 무어라 말하기 전 옷을 빠르게 챙겨 입고는 예배를 하러 빨리 가봐야 한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전과 같이 예배당의 뒤쪽 방에서 기다렸으나,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로한은 오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가 자신의 손길을 피한 것도, 먼저 가버린 것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아르펠은 그 사실을 되뇌며 알 수 없는 기분이 사로잡혔다. 그저 기분이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새벽에도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무언가를 숨기고, 피한다는 사실이 마치 선을 긋는 것만 같았다. 밀어내진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음울한 감정을 삼켰다.
“사춘기가 아닐까요?”
“사춘기?”
퍼뜩 정신이 든 것은 디오넬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로한 님은 올해로 17세시지요. 그 나이 또래들은 어른이 되기 전 감정적으로 격변기를 맞으니, 갑자기 행동이 달라지셨다면 사춘기일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런가.”
그러고 보면 비슷한 말이 이전의 세계에서도 있었다. 기분이 아주 조금이지만 나아졌다. 자신이 싫어서, 껄끄러워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괜찮았다.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아르펠이 로한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는 것일 테다.
“로한 님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라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디오넬이 자신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모른 채, 아르펠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물고 있던 방을 벗어났다. 그의 말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쪽 창에서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르펠!”
“…레리아나.”
바깥의 정원을 걷고 있던 레리아나였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아르펠은 뒤늦게 창문을 열어 달라는 찡얼거림이 들리고 나서야 창을 열어 주었다. 막혀서 잘 들리지 않던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수업은?”
“하하.”
로한이 예배에 참여하는 날이면, 레리아나는 혼자 오전 수업을 듣고는 했다. 딱히 관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반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보니 아르펠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시아가 곁에 없는 것을 보면 높은 확률로 땡땡이였다.
“시아한테는 비밀이에요!”
“그래.”
말갛게 웃은 레리아나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아르펠의 옆을 살폈다.
“근데 로한은요?”
“…오늘은 먼저 갔어.”
“그래요? 웬일이래…….”
갸웃하는 고개에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흐트러졌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은 로한의 눈 색과도 제법 비슷했다. 멍하니 그것에 시선을 주고 있을 때였다.
“아르펠. 쟤랑 같이 있으면 어떡해요.”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창틀에 가까이 대어져 있던 몸이 뒤로 끌어당겨졌다. 눈 깜짝할 새에 건너편에 있던 레리아나와 거리가 멀어졌다.
“…로한.”
급하게 온 것인지 숨을 고르는 소리가 선명했다. 겉옷은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셔츠와 베스트만 걸치고 있는 차림이었다.
“저랑 같이 있을 때만 만나기로 했잖아요. 성력에 닿진 않았어요?”
“내가 무슨 병균이야……?”
레리아나가 아연실색한 얼굴을 했으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던 아르펠조차도 이제는 로한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으니 말이다.
“네가 먼저 가서….”
“죄송해요.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이 너무 복잡해서…….”
어느새 레리아나는 사라진 채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열린 창 틈새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그곳에 남아 있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잘못을 고하는 로한의 얼굴을 보며 아르펠은 디오넬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사춘기인가 봐.’
생각이 복잡하다는 것을 보면, 디오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걱정은 해 주는구나. 평소와 다름없이 성력 때문에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꼼꼼하게 살피는 눈길을 느끼며 이상하게도 지나치게 안심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을 털어내고 손을 움직였다. 마음이 가는 대로 로한을 쓰다듬어 주는 것보단 몸을 붙잡고 있는 그의 팔을 토닥여 주기를 택했다.
민감하다는 사춘기를 위한 배려 아닌 배려였다.
42
로한은 그런 아르펠의 행동을 보고 멈칫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움찔거림 정도야 못 본 척하고 팔을 토닥였다.
그 뒤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침에 아르펠을 피해 다닌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로한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아르펠은 아직까지 디오넬의 ‘사춘기’ 발언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그 탓에 로한을 쓰다듬거나 손을 대는 일이 많지 않도록 애썼다.
그럭저럭 평소처럼 돌아왔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밤이 되자마자 뒤집혔다.
“뭐?”
“저희 각방 써요.”
아르펠은 잠시간 말을 잃고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로한이 내뱉은 말이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7년이다. 처음 만난 10살의 꼬마 시절부터 키를 거의 따라잡아 버린 지금까지, 둘은 함께 자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누구도 먼저 따로 자자는 말을 하지 않은 탓이 컸다.
그래서일까? 일상으로 받아들여 버린 것이 한순간 깨질 위험에 처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사춘기니까.’
알 수 없이 들끓는 감정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로한은 언제나 아르펠을 망설이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것은 로한의 행복이 곧 아르펠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대뜸 각방을 쓰자고 선언해 버린 것이었지만 갈 길 없이 삐죽 솟아나는 생각들을 내리눌렀다. 변할 수 있다고. 이 시기에는 이것저것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래.”
결국 한참을 말없이 로한과 마주 보던 아르펠은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로한의 눈썹이 들썩인 것 같았지만, 아르펠은 들끓는 감정을 정리하기 바빴기에 미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잘 자요, 아르펠.”
“네가 여기서 자야지.”
“전 이미 디오넬한테 말해서 옆 방 준비해 놨는걸요.”
아르펠은 짧게 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갈 곳 없는, 정확히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는 감정들을 로한에게 쏟아낼 것만 같았다. 여러 생각을 감내하는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래. 너도 잘 자.”
허무함? 공허함?
뒤돌아 방을 나가는 로한을 바라보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무언가를 정의 내리려 애썼다.
함께 했던 시간들이 손끝 새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닫힌 문을 응시하던 것을 그만두고 손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로한이 사라졌다고 그새 표정이 사그라든 얼굴에 다시금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럴 줄 알고 있었잖아.’
어린 새들도 다 자라나면 둥지를 벗어나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겠는가.
마냥 어리기만 했던 아이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아르펠은 어쩌면 이러한 미래를 그려왔다.
소설 속에서 로한은 자신을 위로해 주는 레리아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처럼 언젠가는 레리아나와, 혹은 레리아나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하게 되어 차차 멀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근 몇 년간 레리아나보다 우선시 되었다는 데에서 온 기이한 만족감이 무너졌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감정들이 진한 얼룩을 남기며 휘발했다. 애초에 가져서는 안 됐던 생각들이었다.
아르펠은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검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버렸다.
어떤 미래가 닥쳐오든, 로한의 계약자가 될 아르펠은 그의 곁에서 떠날 일이 없을 테니.
***
아르펠을 등지고 방을 나온 로한은 곧장 옆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으나, 한동안 자리에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
어쩐지 억울했다. 모두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이었음에도 그랬다. 로한은 처음으로 아르펠에게 야속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야 말았다.
각방을 쓰자는 이야기를 꺼낸 건 온종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한 결과였다.
‘이유도 묻지 않을 줄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지만 결국 아르펠은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로한의 말에 수긍했다. 설마 그동안 불편했던 걸까. 검증되지 않은 가정들이 머릿속에서 우후죽순 부풀어 올랐다.
터덜터덜 침대를 향해 걸어가 아무렇게나 몸을 뉘었다. 내내 함께 자왔던 탓에 온기 하나가 곁에 없는 것에 불과한데도 방이 지나치게 넓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혼란스럽기만 했던 밤이 지나 오늘의 아침까지, 아르펠의 손을 피하고 혼자 가버리는 등 그에게 미안해할 행동만을 잔뜩 해 버렸다. 하지만 그 당시의 로한으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지럽게 얽히고설키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나서야 로한은 자신의 감정을 결론지었다.
로한은 아르펠을 사랑하고 있었다.
가족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손을 잡고 싶고, 잔뜩 끌어안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은 성애적인 사랑.
한 번 인정을 하고나니 아르펠과 함께한 긴 시간 동안 어째서 이것을 ‘사랑’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아이가 건네 준 낡은 책 한 권이 아닌가. 그럼에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보고 싶다.”
자신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고요한 방 안에 목소리 한 줄기가 흩어졌다. 손 밑에 잡히는 이불보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며 아르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게 이런 감정을 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르펠을 만난 맨 처음에야 그를 조금 경계하기는 했으나, 머지않아 아르펠은 로한이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유일하게 곁에 남아있어 준 이였기에 그를 따랐다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에 ‘아르펠’이라는 존재의 색이 덧입혀졌다.
로한이 아르펠을 좋아하며 따른 이유는 그가 ‘아르펠’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다른 이여서는 안 된다고, 곁에 있는 건 아르펠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향한 절대적인 감정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오직 한 사람만을 다정하게 바라봐 주는 시선을 마주한다면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로한은 어쩌면 지금에서야 자각한 자신의 감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언제 사랑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사랑이 그 시작을 명확하게 따지고, 어째서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이유를 대야 한단 말인가.
로한이 아르펠을 사랑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운명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로써 아르펠이 자신에게 묶인다면, 로한은 뭐든 감내할 수 있었다.
‘…그래. 너도 잘 자.’
방을 나오기 직전 아르펠이 해 주었던 인사말이 떠올랐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매번 요구했던 굿나잇 인사도 잊은 채였다.
로한은 어쩔 수 없이 아르펠에게 각방을 요구했다. 감정을 자각했는데, 그를 상대로 말 못 할 꿈까지 꿔버렸는데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태연하게 잠을 잔단 말인가.
술렁이는 기분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가만히 마주 보고만 있어도 뛰는 심장이, 곁에 누워 있는 아르펠에게 너무 잘 들릴 것 같아서 그랬다.
몸을 벌떡 일으킨 로한은 살짝 열이 오른 볼을 괜히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방 한쪽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무사히 잠을 자기 위해서는 세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를 3일.
떨리는 심장 때문에 아르펠과 같이 잠을 자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로한은 오히려 그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자 밤잠을 설쳤다. 눈 밑이 더욱 짙어진 바람에 아르펠이 그를 심하게 걱정할 정도였다.
“…아르펠.”
“응?”
로한이 각방을 쓰자고 선언하고 난 뒤부터 잠에 들 시간이 되면 아르펠은 항상 그를 배웅해 주었다. 오늘도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는 아르펠을 가만히 바라보며, 로한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같이 자도 돼요……?”
잠자리를 정리하던 아르펠이 손길이 뚝 멎었다. 빤히 시선을 마주해 오는 보랏빛 눈동자에 로한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붉어졌다.
“그래.”
아르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내내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탓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은근한 기쁨이 섞였다는 것쯤은.
로한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여러 감정 중 부끄러움보다는 행복함과 만족감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나치게 존재감을 피력하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모른 체하며 잽싸게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손끝에 닿는 아르펠의 체온을 의식하자 깜빡거리던 눈꺼풀의 속도가 느려졌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제 막 감정을 인정했을 뿐이지, 미래는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니 제 마음을 아르펠이 알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계약이 무사히 진행된 이후여야만 한다.
그래야 아르펠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놓지 못할 테니까. 마검과 축복받은 존재 사이에 오가는 계약은 그런 것이었다. 평생을 얽히고, 서로에게 완전히 묶여 벗어나지 못하는.
“잘 자, 로한.”
처음 따로 자게 된 날과 비슷한 인사가 오갔다. 잠기운이 눌어붙은 얼굴을 하고도 아르펠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로한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고선 옆으로 기울였다.
“오늘은 굿나잇 인사, 안 했으니까요.”
볼에 남겨진 작은 입맞춤이었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기만 하던 아르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로한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43
“키가 더 컸네.”
“진짜요?”
균형이 맞지 않는 브로치를 매만져 주면서 아르펠은 문득 느껴지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마주 보고 있던 로한의 눈이 금세 반짝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짝 차이가 나던 눈높이가 정말로 엇비슷해졌다. 키가 컸다는 말이 마냥 좋았는지 준비하는 내내, 심지어 방을 나가기 직전까지도 로한의 얼굴은 활짝 피어 있었다.
“오늘도 뒤쪽 방에 있을게.”
“네.”
아르펠은 로한이 예배를 하러 가는 날 아침이 되면 정복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한 손으로도 끌어안을 수 있던 작은 아이가 이만큼 컸다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했다.
정말로 어른이 되는 날까지 머지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뒤숭숭해지기도 했다. 아쉬움인지 미련인지.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을 삼켜냈다.
“있잖아요, 아르펠.”
방을 나가는 듯싶던 로한이 걸음을 돌려 아르펠을 응시했다. 시선의 끝이 잘게 흔들렸다.
“왜 요즘… 안 쓰다듬어 줘요?”
“…어?”
로한은 손을 한 번 잡아주기만 하고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던 아르펠의 손길이 못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두 눈에 조금이지만 서운한 기색이 비쳤다.
만지는 걸 싫어하던 게 아니었나?
금방 평소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어찌 됐건 아르펠은 로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의 연유를 사춘기에서 찾았다.
아쉬움, 그리고 미련과는 별개로 로한을 지나치게 만지작거리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말랑한 볼과 부드러운 머리칼로 향하려는 손을 애써 참아낸 게 여러 번이었다.
“네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모른 척 넘어갔지만 로한이 처음으로 제 손을 피하던 순간은 뇌리에 똑똑히 박혔다.
그 일을 계기로, 언젠가 로한이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마음을 주더라도 평생 그의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정작 아르펠의 대답을 들은 로한의 눈은 대번 찌푸려졌지만 말이다.
“내가 그때 피해서 그래요? 그건 정말 실수였는데….”
살짝 찌푸려졌던 눈썹의 사이가 다시 펴지고, 이번에는 울상에 가까운 표정이 됐다. 결 좋고 진한 눈썹이 아래로 휘어지자 고운 인상의 얼굴은 처연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전 아르펠이랑 있는 것도 좋고, 아르펠이 만져 주는 것도 좋아요. 진짜예요. 그니까, 계속… 해 주면 안 돼요?”
로한이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하곤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어릴 때에 비해 확연하게 커진 손은 이제 아르펠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쥘 수 있었다. 손이 마치 틀어쥐듯 잡혔다.
단단하게 얽혀 오는 감촉 사이로 검을 잡느라 손에 배긴 굳은살마저 느껴졌다. 아르펠은 마주 잡아 오는 손이, 손끝 새로 느껴지는 힘은 약했지만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아르펠은 그 손을 벗어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 알았어.”
우습게도 그 한 마디에 다져왔던 다짐들이 무너졌다. 아르펠로서는 이런 그를 도저히 외면할 수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말에 활짝 웃는 로한은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전의 일정에 참여하려 정복을 갖춰 입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손을 잡아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대는 모습만큼은 10살이었던 어린 시절의 로한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러니 아주 어릴 때든, 성인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이든 그를 따라가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서 가야지.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는 차마 만질 수가 없었기에, 여전히 말랑하기만 한 볼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눌러보며 그를 배웅했다.
뒷모습이 완전히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주고 있던 아르펠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간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알 수 없는 답답함도 함께 가신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톡. 토독.
열려 있는 창문을 닫고 옷매무새를 마저 정리했다. 예배가 끝나려면 시간이 꽤 남았으니, 굳이 빠르게 뒤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방금 전 닫은 창가 쪽에서 얇은 것으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건 그때였다.
창 너머에 크기가 제법 큰 매가 있었다. 바깥 창틀에 앉아 부리로 까만 털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닫았던 창을 열었다.
새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영리한 편인지, 열린 창틈으로 다리를 먼저 집어넣고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오기까지 했다.
다리에 묶여 있는 종이를 풀었다. 느껴지는 질감으로는 귀족가에서나 쓸 법한 꽤 고급진 종이 같았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날씨가 서늘해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중앙 신전 쪽이라면 분명 따뜻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을 거라 생각….』
앞에 늘어선 미사여구는 더 읽지도 않고 넘겼다.
애초에 난데없이 매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기도 했으며, 문체에서도 짜증 날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의 뻔뻔한 작태는 주인을 쏙 닮은 게 분명했다.
그사이 매는 아침에 먹다 남긴 빵 쪼가리가 탐이 났는지 방 한쪽에 먹다 남긴 음식들이 늘어서 있는 식탁에 자리 잡고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흘끗 그 행태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신경을 끄고 쪽지의 가장 아랫줄을 살폈다. 본론이 있는 곳이었다.
『다음에 신전이 열리는 날, 예배가 시작하기 전 마중 갈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가만히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날을 셈해 보았다. 로한과 같은 해에 만났으니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7년 전임은 확실했다. 알아낸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던 것치고 생각보다 늦은 연락이었다.
‘다음 예배는…….’
대충 8일 정도 뒤다. 중앙 신전은 한 달에 다섯 번 개방할까 말까 하는 곳이니만큼 어느 예배 날이든 사람이 많이 몰렸다. 누군가에게 접촉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그 날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질릴 때까지 배불리 먹고 나면 알아서 나가라는 뜻에서 창을 활짝 열었다. 아르펠이 로한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방을 나설 때도 쪽지를 전해다 주었던 매는 열심히 접시에 코를 박고 빵을 뜯어 먹는 중이었다.
**
“아르펠!”
매번 예배에 참여하는 탓에 로한은 이번 세대의 축복을 받은 이로 귀족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면 항상 그를 붙잡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로한은 언제나 득달같이 아르펠이 있는 곳에 찾아와 그를 반기고는 했다.
기다리는 내내 문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르펠은 로한이 들어오고 나서야 멍하기만 하던 눈초리를 치웠다.
덩치만 커졌지, 하는 행동은 어릴 때와 비슷한 로한은 주위가 텅 비어있는 넓은 소파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르펠의 곁에 딱 붙어 자리를 잡고는 했다. 그 체온이 달가운 건 매한가지였기에 아르펠은 굳이 로한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저, 로한 님…….”
단란했던 분위기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곱지 못한 로한의 시선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에게 달라붙었다.
“뭡니까.”
“그, 한 분이 로한 님을 뵙고 싶다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이야기를 꺼낸 신관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 로한에,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야 했던 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둘의 시선 교환은 생각보다 오래 이루어졌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어쩔 줄 모르는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방관자로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펠은 손을 뻗어 로한의 눈을 가렸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덮여진 눈가가 당황한 것처럼 잘게 떨렸다. 닿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이 손바닥을 여러 번 간질이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신전이 언제부터 귀족들에게 굽신거렸는지 모르겠는데.”
“죄, 죄송합니다….”
“이만 가 보세요.”
어리숙한 것이 딱 보아도 수습 신관의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였다. 고위 귀족 하나가 거절을 잘 못 할 것 같은 이를 골라 억지로 말을 전하게 한 것이겠지. 조금만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두 사람 중 그 사실에 대해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왜 그래요?”
불청객이 사라지고 나서야 로한은 조심스럽게 제 눈을 덮고 있는 아르펠의 손을 잡았다. 그럼에도 억지로 떼지 않는 게 참 로한답다 싶었다.
“…그냥. 왠지 별로여서.”
“아… 제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별거 아니야. 이제 괜찮아.”
살짝 손을 떼어내니 감고 있던 눈꺼풀이 떠지며 색이 옅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르펠은 그저 가만히, 그 모든 것을 시야에 선명히 담아내기만 했다.
“저도 해 봐도 돼요?”
눈 가리는걸? 아르펠이 되묻고자 하는 것을 눈치챈 듯, 로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로한의 손이 아르펠이 눈을 가렸다. 순식간에 찾아온 어둠에 자연스레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
“왜?”
그러자 너머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가져다 대고 있던 손바닥에서도 짧은 떨림이 느껴졌다.
“…간지러워서요.”
그렇게 대답하는 로한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쩐지 그의 손바닥에서 심장의 고동을 닮은 울림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머지않아 손을 뗀 로한의 표정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옅은 목소리의 떨림마저도 흔적도 없이 증발한 지 오래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로한, 다음 예배 말인데.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어딜요?”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로한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형체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닿는 시선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렉시아가 불러서.”
“아, 그놈…… 이제 와서요?”
“응.”
‘그놈’이라는 폄하된 호칭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왜요? 아르펠은 그놈 싫어하잖아요.”
“부탁한 게 있으니까.”
“…부탁?”
로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자신이 모르는 새에 부탁이 오고 간 것에 대해 서운함을 느꼈는지, 마주 보는 시선에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아르펠은 잠시 그에게 해 줄 말을 골라야 했다.
“네가 어릴 때, 나 혼자서 렉시아가 준 의뢰를 하러 간 적 있었지. 그때 발견한 것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했어. 네가 자고 있을 때 말했으니 모를 만도 해.”
“아… 그래서.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요?”
방금 전까지 렉시아의 부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르펠은 오랜만에 로한에게 당황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저 두고 가려고요?”
“예배하는 날이잖아.”
“아르펠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좋아서 하는 일도 아니고……. 입고 있는 옷을 흘긴 로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속삭여 주는 말이 예쁘기만 했으나, 아르펠은 순간 다른 말에 더 이목이 쏠렸다.
“예배하기 싫어?”
“좋은 건 아니죠.”
로한이 처음 예배를 해 보겠다고 했을 때, 사실 아르펠은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가 신전에 묶이는 것만 같아서 싫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 뻔해 싫은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눈을 빛내며 해 보겠다고 말하는 어릴 적의 로한에게 차마 싫다고 하지 못했다. 뭐가 됐든 아르펠은 로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더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예배였으니 로한이 좋아해서,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천성이 착한 아이였으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아르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로한은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대충 안듯 했다. 조금 민망한 웃음이 앳된 티가 미약하게 남아있는 얼굴에 걸쳐졌다.
“몰아서 하는 거예요.”
“…몰아서?”
“네. 그냥…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어릴 때처럼 아르펠이랑 단둘이 지내고 싶어서요. 나중에 더 쉽게 떠날 수 있게요.”
“……아.”
“아르펠은 안 그래요?”
나도 그래.
잠시 로한을 바라보기만 하던 아르펠은 결국 느릿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 차오르는 알 수 없는 충만감은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안 가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전 신 안 믿어요. 아르펠이라면 모를까.”
“신관이면서.”
“그만둘까요?”
그만두라고 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그만둘 기세였다. 손을 뻗어 곧게 뻗은 코를 한 번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같이 가도 되죠?”
“그래. 대신 미리 말은 하고.”
결국 아르펠에게서 마음에 드는 대답을 얻어낸 로한은 활짝 핀 웃음을 머금었다. 안 그래도 색소가 옅어 큰 강아지 한 마리를 연상시키는 이가 해사하게 웃기까지 하니 어쩐지 주변이 환해진 기분마저 드는 것 같았다.
44
디오넬은 로한이 예배를 빠지는 것을 쉽게 허락해 주었다. 애초에 로한의 자유 의지에 맡긴 것이었으니 언제든 빠져도 된다며, 미리 이야기만 해 주면 된다고 덧붙였다.
‘로한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요…. 그가 선을 잘 그으니 다행입니다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디오넬은 상당히 골치가 아파 보였다. 그 말을 들은 아르펠이 인상을 찌푸린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역시 그만둘까요?”
로한이 강아지처럼 곁을 맴돌았다. 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 표정이 금방 풀리고 말았다.
“나중에 같이 해.”
“…그냥 안 할래요.”
몇 년 동안 꾸준히 해 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없는 일이 됐다. 이유를 묻는 눈을 보며 로한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르펠 보는 건 싫어요….”
잠시간 눈을 깜빡이기만 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아르펠은 결국 옅은 미소를 머금고야 말았다. 여전히 자신을 의지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뻤고, 그가 보이는 소유욕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자신이 어딘가 비틀려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 생각에서 그쳤다. 애초에 아르펠은 바뀔 생각이 없었으니까. 손을 뻗어 로한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만하자, 그럼.”
선을 잘 긋는다는 것이 제법 기특하기도 했고 말이다.
두 사람은 곧장 신전의 바깥으로 나갔다. 딱히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었기에 내내 있던 곳을 벗어나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이쪽입니다!”
나란히 서서는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렉시아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기에 군말 없이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오랜만입니다. 이쪽은… 어린아이였던 그……?”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오랜만이라고 인사할 만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딱히 기억에 남는 얼굴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린 로한이 아르펠의 앞을 비스듬하게 막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르펠은 그런 로한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기 바빴다. 어느새 자그마했던 아이의 등은 생각보다 더 듬직해져 있었다.
반쯤 노려보는 것과 다름없는 시선에 당황한 건지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제가 기억이 안 나시는군요…. 아르펠 님이 용병 등급 테스트를 받았을 때랑, 길드장님께서 요청한 의뢰를 마무리하셨을 때 잠깐 만나 뵈었던 데인입니다. 이름을 소개하는 건 처음이네요.”
어렴풋하게 기억 속에 흐릿한 인영이 떠올랐다. 딱히 신경을 쓴 적은 없었기에 기억 속 얼굴은 똑 잘려 있는 상태였다.
어렸던 로한이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르펠은 딱 봐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기에, 데인은 조금 우울한 기색을 풍기고 말았다.
“렉시아 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아가는 발걸음이 터덜거렸다.
그가 안내해 준 곳은 준비한 마차를 타고 30분 정도 걸린 곳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로한은… 안고 가면 되지 않을까? 어릴 때처럼 끌어안는 것은 무리더라도 잘만 하면 공주님 안기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로한이 들었다면 기겁할 생각을 태연하게 한 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작은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오가 되어 햇볕이 창 틈새로 비스듬하게 내리쬐었다. 가게 안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다음번에 로한과 단둘이 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안내해 준 데인은 둘이 안쪽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물러섰다. 곧장 교체하는 것처럼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되게 오랜만이네요? 어서 앉아요, 아르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든 렉시아가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금세 가늘어졌다.
“옆의 그 사람은…….”
머지않아 렉시아의 표정이 여러 번 변했다. 7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났으니 그의 얼굴은 전에 만났을 때에 비해 더욱 성숙해져 있었지만, 행동만큼은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설마 그 꼬맹이가… 요렇게?”
“그래.”
“대체 뭘 먹고 자랐길래 저렇게 됐죠? 좀 짜증 나긴 했지만 그때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당신한테 귀여움 받을 생각 없으니까, 그 눈 치우시죠.”
상당히 심기가 상해 보이는 로한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렉시아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아르펠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달라는 눈이었다.
하지만 아르펠이 그에게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 온전히 로한을 향하는 시선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한 태도에 렉시아가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같이 데려올 줄은 정말 몰랐는데… 나름 비밀 아니었어요?”
“비밀?”
그렇게 되묻는 로한의 얼굴은 기분이 상하다 못해 불쾌해 보였다.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지 못한 렉시아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방금 내뱉은 말은 직접 부인했다.
“비밀이 아니었지, 참. 이번에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오려면 조금 걸릴 테니 그동안 이야기라도 해 줄까.”
못마땅해 보이는 로한은 아르펠과 함께 렉시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가 늘어 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숨겨진 구원교의 지부, 그곳에서 얻은 각종 실험과 연구에 대한 자료들, 그리고 그중 일부에 찍혀 있던 기묘한 직인.
당시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열이 올라 앓아눕느라 이야기를 들을 새가 없었던 로한으로서는 처음 접한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로한이 미간을 미묘하게 찌푸린 채 물었다.
“그 직인을 조사하는 데 7년이 걸렸다는 겁니까?”
“아, 그 정도는 아니야.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대략 2년 전쯤에 끝났지. 빠르게 알아도 별 의미가 없으니 말하지 않은 것뿐이고?”
“5년도 긴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원래 쓰던 걸 16개로 나눠서 재배열했다니까? 어떤 미친놈이 만들었는지 궁금하네.”
로한의 솔직한 발언에 울컥하기라도 한 듯, 렉시아는 억울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빙글거리는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아르펠은 그저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이내 렉시아의 시선이 아르펠을 향해 휙 돌아갔다.
“궁금한 게 풀렸으면 이제 이쪽에서 질문해도 되나요?”
당연하게도 그 물음에 답한 사람은 없었지만, 렉시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아르펠한테 되게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검 한 번 잡아보지 않은 것 같았는데 실력을 가늠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니, 이런 사람 또 없으니까. 그래서 저희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죠.”
그가 종이 하나를 쓱 내밀었다. 7년 전, 용병 길드에 처음으로 등록했을 때 아르펠이 제출했던 서류였다.
“출생, 거주지… 무엇 하나 맞는 게 없어요. 당신을 아는 사람도 없죠. 당신과 처음 만난 건, 당신이 적었던 거주지와 가장 가까웠던 옆 마을에서 의원의 안내를 해주었던 이 여자.”
“…….”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해도 믿겠던데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진 렉시아는 형형한 눈빛을 마주했다. 누가 함께 지낸 것 아니랄까 봐, 형식만 존댓말이었던 것을 금세 던져버린 로한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이 하나를 보호하면서 신전에 데려가고,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마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였다…. 거기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뀐 점 하나 없네요.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딱 그 정도가 한계였다. 로한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지는 것도 잠시, 조금 전 종업원이 내왔던 찻잔이 그의 손안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로한은 눈 깜짝할 새에 날카로운 조각 하나를 렉시아의 목에 겨누었다.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존재를 향해 흘끗 시선을 주던 렉시아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 말려 주실 거예요?”
“…로한. 그만해.”
뜸을 들이다 말을 내뱉었음에도 렉시아를 마주하는 아르펠의 얼굴에는 온기 한 점이 없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인형 같은 얼굴을 앞에 두고 내심 긴장하던 렉시아는 그의 한마디를 듣고 손을 거두는 로한에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떠보긴 했다지만 곧장 위협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반격하자니, 로한에게 작은 상처라도 입혔다간 구원교 지부 하나를 혼자서 털어버린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들 것 같다는 직감 아닌 직감도 들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찻잔을 깨뜨리면 어떡해? 손이 다치잖아.”
“안 다쳤는데…….”
“그래도. 유리 조각이라도 박히면 어쩌려고.”
“마력으로 몸, 강화했으니까 괜찮….”
“손 줘 봐. 다친 곳 없나 보게.”
“…알았어요.”
으레 그렇듯 이야기의 초점은 로한이었다. 자신의 안위는 하나도 고려되지 않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렉시아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허탈함을 느꼈다. 갑자기 심히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아르펠은 로한의 손을 잡아다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 아르펠에게 손을 맡기며 로한은 수줍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찻잔을 깨 사람을 위협하던 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단검이라도 하나 사줄까?”
“아르펠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렉시아는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기로 했다. 심신에 굉장히 좋지 않은 대화였다.
한참을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아르펠이 뒤늦게 렉시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이곳에 계속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듯했다.
“내 정체가 뭐든 더 이상 파고들지 마.”
그리고 내뱉은 건 경고였다. 결국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렉시아는 그 말에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팠다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한 기세였고, 이번 일이 틀어진다면 동업자에게 쪼이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의 계획이 많이 틀어질 게 분명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보증해 줘요. 아르펠은 신전과 관련 있는 거 맞죠? 그들이 신뢰하는 사람인 것도 맞고?”
“신전과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난 로한이 좋아서 곁에 있는 것뿐이야. 로한이 그곳을 뜬다면 내가 남아있을 이유도 없어.”
사람이 아니라 검이라는 사실은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렉시아는 만족했다는 듯 두 손을 뗐다. 그러다 문득 옆 사람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오?”
수줍게 붉히는 것이 다였던 얼굴이 생각보다 색감이 진해져 있었다. 내리깔은 눈 위로 잘게 떨리는 속눈썹이 음영 지며 그늘을 만들었다.
민망해하는 얼굴이라기보단…. 찬찬히 그의 표정을 살피던 렉시아의 입꼬리가 한순간 씰룩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하, 이거 재밌네. 난 그런 거에 편견 없어!”
웃으며 내뱉는 말에 살벌한 시선이 닿았다.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암묵적인 의사를 전하는 금빛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렉시아를 뚫어버리고 싶어 했다. 웃는 낯 그대로, 렉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편견?”
“아, 잘못 말했어요. 잊어 주세요.”
묘한 표정을 지은 아르펠이 물어왔지만 대답할 말은 없었다. 현명하게 말을 돌리는 방법을 선택하니, 곧 흥미가 없다는 듯 아르펠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세월이 진짜 빠르긴 빠르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틈을 타 짧게 한탄했다. 7년 전이긴 해도 머릿속 한구석에는 이불을 둘러싸고 훌쩍이던 로한이 남아 있었다.
머리색과 눈 색, 그리고 아르펠에게 치대는 저 성격만 똑 닮았지 방금 전 살벌한 시선을 보내던 남자와는, 상식적으로 너무 다른 거 아닌가.
심지어는 아르펠에게 보이는 태도마저 달라졌다. 잘하면 보호자에 대한 어린아이의 심한 소유욕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게 진득해져 있었다. 생각보다 더 심상치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뭐가 됐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된다. 그건 전과 다름없는 불문율이었다.
“그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은 언제 오는 거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 지금 오는 것 같은데요?”
찻집의 2층을 전부 빌린 상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기척은 더욱 선명했다. 렉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로브로 얼굴을 꽁꽁 둘러싸고 있는 이였다. 체형과 키를 보면 여성이 분명했다.
“아, 이제 좀 살겠네.”
로브는 너무 답답하다며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고운 태가 나는 손이 후드를 걷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닮은 것도 같은 붉은색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묶고 있는, 제법 화려한 인상의 여자였다.
45
“아, 왔어? 여기.”
여자의 등장을 태연하게 웃으며 반긴 렉시아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번 정리한 여자가 순순히 그의 옆에 앉았다.
보기만 해도 귀티가 나는 얼굴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허름한 옷을 입더라도 그녀의 신분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은 외모였다.
“나 몰라요?”
여자는 자신을 관찰하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는 맞은편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빤히 여자를 바라보던 아르펠이 변함없는 낯으로 되물었다.
“알아야 합니까?”
“와… 나 이런 취급 처음이야.”
아르펠은 당연하게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럭저럭 넘겼지만, 렉시아는 로한마저 그녀를 모른다는 이야기에 놀란 눈치였다. 그가 흘끗 로한을 돌아보며 물었다.
“신전에서 예배도 하는 것 같던데. 한 번쯤 들어 보지 않았어?”
“관심 없어서요.”
로한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렉시아는 그의 한 마디에 쉽게 납득하고야 말았다. 멀뚱히 눈을 깜빡이기만 하던 여성은 그 발언에 호탕하게 웃어 버렸다.
“그동안 렉시아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전 이벨린 렌제스터. 이래 봬도 제국의 황녀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실실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둘 중 그 누구도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멋쩍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자 내밀었던 손을 거두는 행동은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끼리끼리인가.
“음… 왜 경계를 하는지는 알겠는데요. 저까지 싹 묶어서 취급하시면 좀 섭섭해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울상을 짓는 얼굴에 대꾸한 것은 로한이었다. 그의 표정은 경계하는 것보다는 짜게 식어있는 것에 가까웠다.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울상을 지었던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벨린의 얼굴은 금세 활짝 피었다. 실실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것은 덤이었다. 친구라더니, 렉시아와 지나치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르펠과 렉시아의 관계는 모호했다. 그는 렉시아라는 인물을 성가셔하고 달갑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의 능력은 믿는다. 황제가 적이 된 이상 신전 바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렉시아를 동료 삼아 두는 것이 제법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전제도 깔려 있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동업자랍시고 데려온 이다. 황제와 성이 같기는 했지만, 그 사실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미리 알고 계신다니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랑 손잡아요.”
“당신의 목적이 뭔지 말한다면.”
“목적이라… 궁극적으로는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
미묘하게 불편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게 자신의 발언 탓임을 알았는지, 이벨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권력욕이나 야망 때문은 아니고요. 렉시아에게 들어 보니 신전에서도 제법 큰일이 있었다는데. 맞죠? 어떻게 보면 그것들 모두 내 가족이 벌인 일인걸요. 그런 걸 막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황제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현 제국은 황제의 슬하에 현재 황태자의 직위에 오른 황자 하나와 이벨린 렌제스터, 눈앞에 있는 이 황녀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이 일에 황태자까지 관여되어 있습니까?”
“그 자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폐하께 직접 교육받았어요. 그의 이상은 폐하가 말하는 이상론을 꼭 닮았죠. 어떻게 보면 황태자가 후계자로 점 찍혀 있던 덕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겠지만요.”
그녀가 옆에 앉아 있던 렉시아를 향해 눈짓했다. 그가 옆쪽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르펠은 그가 내놓은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먼 과거, 그가 직접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던 기괴한 직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붉은색 선으로 정확히 16등분 된 직인.
“이게 아르펠, 당신이 준 직인이에요. 긴 시간 동안 비슷한 문양을 쓰는 곳이나 규칙을 보이는 곳을 찾으려 했지만 찾아내지 못했죠.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직인을 극도로 변형해 놓았을 가능성을 떠올렸어요.”
그 결과가, 이쪽.
16개로 나누어진 직인이 여러 색으로 덧칠해 놓은 화살표에 얼기설기 뒤섞였다. 기괴하고 투박한 느낌이 사라진 정형화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고 우아한 느낌의 문양에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황실의 직인이죠.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르펠은 소리 없이 한숨을 머금었다. 황제는 신전에 첩자를 심어둔 것뿐만이 아니라, 구원교의 ‘실험’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어쩌면 그 실험이 황궁에서 직접 자행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만으로는 황실을 뒤엎을 수 없어요. 해 봤자 수족 몇 명이 잘리는 데에서 그치겠죠. 조금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해요.”
자조적으로 숨을 내뱉으며 튀어나온 말들은 약간의 한탄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펠의 시선이 그런 이벨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왕위 찬탈, 이런 거창한 걸 도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구원교의 지부를 찾아 무너뜨리고, 황제와 구원교가 결탁한 증거를 찾는 거거든요.”
목소리마저 간드러지고 통통 튀는 것이 무척이나 고대하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기도 했다.
이벨린은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화려한 미인이었다. 그런 이가 짓는 활짝 핀 웃음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르펠은 그런 그녀를 그저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아예 관심거리 바깥으로 밀려날 정도로 강렬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탓도 있었다.
‘비슷해졌다.’
원작의 줄거리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흐름이 비슷해졌다. 가족과 친구,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로한이 신전에서 나와 제국을 떠도는 것, 이것이 정해진 줄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복수’보다는 이벨린의 부탁이 주가 당초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세력 구도에 뛰어들었음에도 신전을 떠난다는 미래는 같아진 것이다.
“알다시피 구원교의 지부는 제국 곳곳에 산개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면서, 이동에 구애 받지 않을 적은 인원으로 움직여야 해요. 동시에 지부 하나를 상대할 수 있어야 하며, 갑작스러운 전투에도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의 무력이 필요하죠.”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의문을 표하는 행동이라 생각했는지, 이벨린은 그 뒤로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했다. 적은 인원으로도 무력행사가 가능하고, 운신이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둘뿐이라며.
“난 황제를 죽일 겁니다.”
순간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직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었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내용이었으나 아르펠의 말에는 그 일을 기필코 해내겠다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자가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해 왔다면 결말은 그것뿐이다. 로한을 불행하게 한 사람을, 앞으로의 미래에도 몇 번이고 방해할 게 분명한 사람을 살려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랬기에 아르펠은 묻고 있는 것이다. 함께 하기로 결정하면 그녀는 먼 미래에 그녀의 아버지를 직접 죽여야 할 수도 있고, 죽이는 상황 자체를 묵인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당신은 견뎌낼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 이벨린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에 약간의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폐하는… 아니. 아버지는 가족에게만큼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나도 내가 사랑받고 자랐다는 것쯤은 알아요.”
“…….”
“하지만요.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고, 황제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상 나는 내 아버지의 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해요. 폐위된 황제의 마지막을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난 이 길을 선택했어요.”
어느샌가 씁쓸하기만 했던 미소는 가셨다. 아르펠은 눈앞의 여인이 생각보다 더 단단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이곳에 찾아오기 전 이미 모든 결심을 했다는 것도.
“제국의 안녕을 위한다는 거창한 이유보다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요. 그게 내 이유예요.”
이벨린은 자신이 내뱉은 이야기가 이곳의 분위기를 상당히 무겁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살짝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올려 아르펠을 마주 보았을 때, 이벨린은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무표정함을 눈치챘다. 단지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를 깨달았을 뿐이지 연민이나 동정 등을 느낀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사람 같아서, 순간 ‘아르펠’이라는 존재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싫습니다.”
“……네?”
머지않아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그랬을 터였다.
“손잡는 것,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왜요?! 방금까지 내 얘기 잘만 들었으면서!”
“듣는 것과 허락은 별개입니다만.”
간절한 시선이 이번엔 로한에게 닿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살짝 유해진 것 같던 반응은 온데간데없이, 아르펠의 답에 의문 한 점 내놓지 않는 태연한 행동뿐이었다. 되려 아르펠의 찻잔에 각설탕 하나를 넣어 주기까지 했다. ‘차 맛이 살짝 씁쓸해요.’라는 말까지 곁들이면서.
“대체 왜 이런 사람들을 데려온 거야?!”
“너도 관심 있었잖아. 그리고 아르펠은 강하다고.”
황당하게 그 행동을 바라보던 이벨린은 목표를 바꿔 렉시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다만 그 역시 태연했다. 먼 기억이기는 하지만 7년 전에 이미 경험해 보았고, 이벨린이 도착하기 전까지 둘 사이에 껴 있으면서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이벨린이 두 눈을 번뜩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찻물에 옅은 파동이 일었다.
“이유! 이유가 뭔데요!”
아르펠은 각설탕을 넣어 준 로한의 손을 칭찬하듯 토닥이며 말을 덧붙였다.
“로한이 아직 어려서요.”
“예?”
“네?”
아르펠의 마지막 행동에 의문을 표한 것은 이벨린뿐만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로한까지 눈을 크게 떴다.
“아르펠은… 쟤가 아직 애 같아요?”
뒤늦게 질문하는 렉시아의 어조에도 황당함이 묻어 나왔다. 그의 눈에 로한은 겉모습으로나 심적으로나 다 큰 놈으로 보였다. 적어도 어리다고 단언할 모습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 저 내년이면 성인인데요….”
그 단언이 불만족스럽기는 매한가지였는지, 찻잔의 손잡이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로한은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평소에도 로한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르펠이 그 말을 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성인?”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일말의 당황이 가득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도 균열이 갔다. 눈에 띄는 변화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마련이다. 어느샌가 이벨린과 렉시아도 아르펠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치만, 너 이제 17살….”
“제국의 성인은 18살이잖아요. 설마 모르고 있던 건가요?”
아주 평범하고도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아르펠이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마검이라는 사실은 눈곱만치도 모를 이벨린은 ‘이런 놈은 또 처음 본다’는 적나라한 표정을 하고는 설명했다.
물론 7살짜리 꼬맹이들도 알 만한 사실이기는 했으나, 아르펠이 이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은 궁금해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알려준 주변인이 없던 탓도 컸다. 애초에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없던 것이다.
“…20살이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상식이었다. 계약할 나이를 가늠하기 위해 기어코 과거의 기억을 열심히 뒤져서 알아내기까지 했다. 그런 노력까지 기울인 탓일까, 여태껏 성인은 20살이라는 사실에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 보지 못한 아르펠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낯을 했다.
46
성인이 되면 계약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성인에 대한 기준이 다를 거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느릿하게 굴러간 시선이 상당히 억울한 얼굴을 한 로한을 살폈다.
‘아직… 어린데.’
덩치가 많이 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르펠은 여전히 20살에 마음이 쏠렸다. 가뜩이나 착하고 마음이 여린 아이인데, 자신과 계약을 하고 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에 뛰어들며 원치 않아도 여러 사건에 휘말릴 것이다.
그런 미래를 그리고 있으니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다. 아르펠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눈치챈 듯, 로한이 간절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약속… 했잖아요. 네?”
얽히듯 붙잡아 오는 손에 아르펠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흔치 않은 모습을 직관하는 탓에 렉시아는 올라갈 것 같은 입꼬리를 애써 손으로 가린 채였다.
옆에 앉아 있는 이벨린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마저 살짝 붉힌 것이 어지간히 기대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앞둔 듯 설렘이 가득했다.
“아무튼, 로한이 다… 아니. 더 크면 협력하겠다는 거죠?”
아르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렉시아는 그것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로한에게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살벌한 시선을 받기는 했다.
“그럼 20살이 더 낫지 않겠어요? 여태껏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고.”
“그 입 다무시죠.”
“…살벌해라.”
아르펠을 등진 시선이 날카로웠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백 번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을 품은 시선이었다. 렉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협력하겠다는 답을 받았겠다, 아까 전 버럭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활짝 웃음꽃을 피운 이벨린이 덧붙였다.
“2년 후면 로한이 아르펠보다 키도 더 크겠네요?”
“…….”
지금도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으니, 2년이 지난다면 성장기인 로한이 아르펠을 내려다보는 위치가 될 것임은 분명했다. 이벨린은 순간 로한의 눈에 스치는 고민의 빛을 느꼈다. 두 사람분의 시선이 웃음기를 참듯 여러 번 일렁였다.
굴러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뭐가 됐든 로한이 아르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은 알겠다. 아르펠을 대하는 태도만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보면 확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금빛 눈이 여러 번 흔들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소원?”
“네, 소원.”
아르펠은 여러모로 로한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내뱉어도 꿋꿋이 계약을 하겠다고 버틸 것 같았던 그가 이벨린의 말 한마디에 고집을 접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로한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자신에게 소원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로한은 안심한 듯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네요! 아무튼, 우리 협력하기로 한 거죠?”
이벨린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뼉을 짝 쳤다. 싱글벙글한 것이, 오늘 이루고자 했던 것을 성취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르펠이 그간 ‘성인’을 계약의 기준으로 한 것은 그래야만 한다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계약하면 몸의 나이가 멈출 테니, 더 이상 크지 않을 확률이 높은 성인이 되었을 시점이 좋을 거라 넘겨짚은 것뿐이다.
그러니 만약 원작처럼 바깥에 나가 싸워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 또한 성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나았다.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노리는 적이 득시글할지도 모르는 밖을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지금, 마냥 어렴풋이 세워 두었던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그래야겠지’라는 막연한 다짐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상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흘끗, 아르펠은 내내 잠자코 있던 로한을 곁눈질로 살폈다. 납득이 가는 이유와는 별개로, 그에게는 로한의 의사가 더 중요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음에도 시선을 돌리자마자 두 눈이 마주쳤다. 마치 내내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할까요?’
로한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숨결이 새어 나왔다. 그것이 시선을 앗아간 바람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빤한 시선을 코앞에 두고서도, 로한은 아르펠에게서 대답을 얻고 난 뒤에야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이벨린의 시선이 묘했다.
결국 다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그녀로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냈으니 잘된 일이었다.
“두 분이 없었다면 일이 힘들었을 거예요. 내 신분이 신분인지라, 신전에 대놓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데다가… 첩자 이야기도 있으니 온전히 신관들을 믿을 수가 없었거든요.”
후련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를 옆에 두고, 렉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걱정거리를 덜은 얼굴은 한껏 발랄하게 피어났다.
차 안에 담겨 있던 찻물이 제법 줄었다. 어느 순간 말이 많아져 조잘거리는 이벨린의 말을 배경음 삼고 있던 로한이 문득 물었다.
“황제는 신전을 싫어하는 겁니까?”
상당히 갑작스러운 물음인 데다가, 화제에 맞지 않았으니 여태 그녀가 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글쎄요…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아주 혐오하는 정도? 폐하가 황태자일 적에 신전과 상당히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더라고요. 정확한 건 알지 못하지만, 신전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아요. 이 외에는 잘 모르겠네요.”
찻잔도 비었고, 궁금했던 답도 들었다. 로한과 시선을 마주친 아르펠은 그가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벌써 가시게요?”
“네.”
미련이 뚝뚝 넘치는 물음과는 다르게 아주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벨린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의 지위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황녀의 품위를 해치는 일이라며 경을 칠 행동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렉시아를 물 흐르듯 무시한 아르펠이 등을 돌리다 덧붙였다.
“구원교의 지부를 찾을 셈이라면, 성력과 마력이 느껴지는 곳도 의심해. 첩자가 남겨놓은 흔적이 몇 있을 테니.”
“흐음… 서로 의심하게끔 만들려던 거려나요. 고마워요.”
마침 신전 측에 몇몇 알고 지내는 친구가 있으니 물어봐야겠다는 말은 덤이었다. 두 사람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문을 열고 밑으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쪽에서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완전히 찻집을 떴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이벨린이 테이블 한쪽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종업원이 익숙하게 티 포트를 기울여 빈 잔에 따뜻한 찻물을 부었다. 맞은편에 있던 잔 두 개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처음 이 자리에 왔을 때와 비슷하게 되돌아갔다.
“어때? 만족스러워?”
“아~주. 까다로워 보이던데, 어떻게 친해진 거야?”
“친한 건 아니지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국의 이곳저곳을 관광시켜 준 것이 빛을 발했나 싶다. 렉시아가 즐거운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 하긴. 너 미움 받는 것 같더라.”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허탈해진 표정을 마주하며 이벨린은 킬킬 웃어 버렸다. 동시에 서로를 아끼다 못해 애틋하게까지 보이던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둘은 원래 그래?”
찻잔의 둥그스름한 손잡이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지르며 물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찻물의 열기가 손끝으로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랬지. 옛날에도 서로 죽고 못 살던데.”
“흐음.”
참 신기하지, 피가 이어진 가족도 그렇게 하기 힘든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한탄을 닮아 있었다. 렉시아의 시선이 흘끗 그녀를 향했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자신으로 인해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이벨린은 뒤늦게 짓궂은 미소를 한껏 띠어 보였다.
“그나저나, 왜 바꾼 거야?”
“뭘.”
“원래 조금 더 지켜볼 계획이었잖아.”
“아… 그거.”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이었지만 둘 사이에서는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말한 것을 곧장 이해한 렉시아는 태연히 찻물을 들이켰다. 입안에 씁쓸한 꽃향기가 남았다.
원래라면 협력만 약속하고 무슨 역할을 맡길지는 조금 더 논의해 보려 했다. 아르펠의 무력은 확신했지만, 함께 온 로한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무리한 일을 맡겼다가 로한이 다치기라도 하면 목이 떨어지는 건 이쪽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직감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많이 컸더라고. 옛날에는 그냥 작은 꼬맹이였는데.”
아르펠과 함께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던 작은 아이는 이제 기억 한편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몰라보게 자란 몸도, 그리고 아르펠을 향한 눈빛도 어린 시절의 모습을 완전히 벗었다.
아까만 하더라도 추궁 한 번 했다고 그렇게 살벌하게 굴지 않았는가. 날카롭게 손을 뻗는 태만 보더라도 그가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될 만한 실력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렉시아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이벨린만이 떨떠름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47
“정말 괜찮겠어?”
“네. 생각해 보면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기도 하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아르펠의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로한은 그의 물음에 웃어 보이며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당장 그 ‘계약’이라는 것에 눈이 멀어 초조해지기는 했으나, 제법 강해진 지금도 여전히 부족했다. 그를 가르친 이들이라면 모두가 세차게 고개를 저을 만한 생각이었는데도 로한 본인은 그렇게 느꼈다. 아르펠의 발목을 잡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로한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르펠이 미안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아니에요. 전 괜찮은걸요.”
태연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찻집에서 간절하게 약속했지 않느냐 묻던 목소리와는 너무나 상반되었다. 아르펠에게는 그것이 애써 감정을 누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마음속에서 두 생각이 부딪혔다. 아이의 기대를 저버릴 셈이냐고 소리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제국을 둘러싼 태풍에 이대로 휩쓸리게 하고 싶냐 반박했다. 가만히 웃고만 있는 순한 얼굴을 보며 아르펠은 조용히 그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따끈한 체온이 손을 덥혔다.
“거기다 아르펠이 소원도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네가 부탁하면 다 들어줄 텐데.”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냥 하나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그렇게 대답하는 얼굴은 사뭇 복잡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로한은 당연한 수순처럼, 아르펠의 손에 얼굴을 기대 가볍게 비비적거리기 바빴다. 어쩐지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무슨 소원이길래.”
“나중에 말할래요.”
웃는 모습이 장난스럽기만 하다. 결국 아르펠도 로한의 미소를 비슷하게 따라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덜커덩거리며 마차가 흔들렸다. 울퉁불퉁한 길을 굴러가는 기색이 훤했다. 불규칙한 진동을 느끼면서도 로한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아르펠이 물었다. 살짝 흐트러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정리해 주는 것은 덤이었다.
“신전에서 나오면, 넌 뭘 하고 싶어?”
아르펠은 구원교의 일이 마무리되면 신전에서 떠나 둘이서 함께 살고 싶다던 로한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잠시 커진 눈으로 깜빡임을 반복하던 로한은 생각에 빠졌다. 아직 구체적으로 뭔가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낌새였다.
“둘이서 살고 싶어요.”
“그건 말했던 건데.”
“…숲처럼, 다른 사람이 없는 곳도 좋아요.”
“숲?”
볼에서 옮겨가, 살짝 곱슬기가 있지만 결은 좋은, 색소 옅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 변화를 고스란히 느낀 로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펠은 여전히 그가 숲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저한텐 여전히 돌아갈 곳 같거든요. 조금 무섭지만, 아르펠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으니까……. 그래서 둘이서 같이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난 네 가족이니까.”
“……맞아요. 가족.”
약간의 뜸을 들인 끝에 대답한 목소리에는 은은한 씁쓸함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마저 아주 잠깐에 불과해서, 아르펠이 의아하게 로한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물음도 건넬 수 없었다.
“약속해 줄 거죠?”
어렸을 때에 비해서 훨씬 커진 새끼손가락이 불쑥 내밀어졌다. 이제는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로한 쪽이 조금 더 큰 느낌이 다분했다. 군살 없이 곱고 가느다란 아르펠의 것과는 다르게 굵직하고, 수도 없이 검을 잡아 투박함이 조금은 새겨져 있는 손끝인 탓이다.
말없이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조금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고 말았다. 지켜 주겠다며, 울음기가 배인 눈으로 조그마한 손가락을 내밀었던 어릴 적의 로한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
“…그렇군요.”
아르펠과 로한은 신전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디오넬을 찾았다. 하고 있던 일을 물려 놓고 두 사람을 맞은 그는 여태 있었던 일 중 필요한 정보만을 꼽은 아르펠의 설명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신전과 황실은 오래도록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서로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웠기에, 그분이 저희에게 협력을 제안하지 못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거기다 큰일을 겪은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으니까요. 충분히 공감하는 듯, 이야기를 하며 고개가 연신 끄덕여졌다.
하지만. 디오넬이 차분한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선을 먼저 넘은 것은 상대이니, 더 이상 불문율 따위는 남아 있지 않겠죠. 저희도 이번 일을 돕고 싶습니다.”
“외부에 드러나면 안 될 텐데요.”
“직접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겠지만, 위장한 신관들을 일부 파견하는 것은 가능할 겁니다. 일반인과 다르게 망령의 힘을 조금이지만 느낄 수 있으니, 구원교의 지부를 파악하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이런 소식이라면 두 사람이 손을 번쩍 들며 반길 게 분명했다. 신전 측에 아는 사람이 있다 한들 중앙신전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과는 명백하게 다를 테니까.
“5년 전부터 준비해 오던 것들이 드디어 빛을 보겠네요.”
살포시 웃는 얼굴이었지만 마냥 긍정적인 의미가 담긴 미소는 아니었다. 신전에 첩자가 있음을 밝힌 것은 5년 전이었지만, 그들이 황제에 의해 휘둘린 것은 20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신전을 온전히 유지하고 신관으로서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려면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두 손 모아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하여 5년 전부터 일반인들에게 신전을 조금 더 자주 개방했다. 그때마다 디오넬은 믿을 만한 자들을 선별해 차림을 바꾸게 하고, 예배가 끝난 뒤 신전을 나서는 일반인들의 행렬 속에 숨어들어 신전 밖에서 세력을 꾸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장로들 중 보수적인 인사가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황실의 행동이 신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해 한 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참. 곧 있으면 신년인데, 계약은 하실 건가요?”
“아니요. 20살에 하기로 했습니다.”
“20살…?”
디오넬은 곧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성인인 18살이라면 모를까, 20살을 기준으로 잡는 것은 꽤 낯설었던 탓이다. 태연하게 답을 준 것은 로한이었다.
“아직은 많이 약하니까요.”
당연한 사실을 읊는 것처럼 담담하게 대답하는 로한의 목소리에 흘끗 아르펠의 눈치를 보기까지 했다.
“약하다니… 음.”
순간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로한은 신전에서도 강한 축에 속했다. 그를 이길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마력을 다루는 재능이 천부적이었고, 축복을 받아 그 양마저 방대했으며, 전투에 대한 감각도 뛰어났다. 그와 몇 번 검을 겨뤄본 기사들이라면 하나같이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은 실력에 혀를 내두르고는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디오넬은 신의 축복이 내려지는 존재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시간이 빠듯한 건 아니니까요. 남은 시간동안 큰 성장을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알 리가 없는 디오넬은 그저 응원만 해 주기로 했다. 로한은 고집이 센 편이었다. 아마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이라면 아르펠이겠으나, 그는 흘끗거리며 로한을 보기만 할 뿐 말릴 의사는 없어 보였다.
짧은 다과회는 거기서 끝이 났다. 찻집을 떠나기 전 렉시아에게서 건네받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디오넬에게 쥐여 준 뒤 빠르게 자리를 떴다
“로한.”
복도를 함께 걷다가 아르펠이 넌지시 로한을 불렀다. 조금 망설임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였다. 잠시간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던 아르펠이 나직하게 물었다.
“계약, 그냥 할까?”
그래도 20살이 되기 전까지는 신전에 남아 있자.
뒤따라 붙는 말은 상당히 진중했다. 신전의 바깥으로 나가 본격적으로 원작에서 서술되었던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힘든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여전히 20살이 되어야 어른이라는 느낌이 강했던 아르펠은 아직 17살에 불과한 로한이 험한 생활을 보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이 목적이었으니, 계약은 바로 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건넨 말이었건만, 정작 로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어요.”
“……왜?”
“더… 크고 싶으니까.”
“응?”
어쩐지 눈가가 발갰다. 부끄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많이 큰 것 같은데……. 로한의 키를 가늠해 보며 든 생각이었지만, 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말간 눈을 보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정도로 크려고?
***
이만큼 크려고 했던 걸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20살이 되는 신년을 앞둔 지금, 로한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게 컸다. 엇비슷했던 눈높이가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쳤다는 뜻이다.
전부터 키에 상당히 예민하게 굴곤 했으니, 만약 그때 계약해 성장이 멈췄다면 상당히 억울해할 만한 정도였다. 아르펠은 새삼스럽게 로한을 바라보았다.
마력이 담긴 검이 날카로운 기세를 흩뿌리며 상대의 검과 맞부딪혔다. 검끼리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커다란 소음이 연달아 나는 것은 덤이었다.
마주하고 있는 검의 무게를 옆으로 흘렸다.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검로 사이에 빈틈이 생기자, 로한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유려하게 몸을 살짝 비틀어 치고 들어가는 것이 한 편의 검무처럼 우아하고 흐트러짐 없었다.
예기 어린 마력을 품은 검 끝이 정확히 목을 겨누자, 결국 그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는 검을 떨어뜨리곤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격한 움직임이 오고 갔으나 한쪽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것과 다르게, 로한은 처음 대련에 임할 때와 달라진 점 하나 없는 얼굴로 아르펠에게 되돌아왔다. 변한 것이라고 해 봤자 살짝 흐트러진 옷차림새뿐이었다.
“저 잘했어요?”
“응. 잘했어.”
꽃망울처럼 피어나는 한 줄기 미소는 언제나 아르펠의 시선을 앗아갔다. 오래도록 기억해 놓으려는 듯 가만히 그 미소를 응시하던 아르펠은 손을 뻗어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를 조심스레 만져 주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로한은 정말 악착같이 검을 연습했다.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모조리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느 순간에는 그를 가르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아르펠이 고정적으로 그의 대련을 맡아줄 정도였다. 본체가 검인 탓인지 자연스레 검에 통달한 아르펠은 로한에게 딱 맞는 상대였다.
그런데 얼마 전, 로한이 처음으로 아르펠을 이겼다.
아르펠은 아직도 그 당시를 기억했다.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는 숨을 갈무리하다, 오랜 숙원을 이룬 사람마냥 환하게 미소를 지었더랬다. 그것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무언가처럼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내일은 계약해 줄 거죠?”
“약속했으니까.”
20살을 하루 앞둔 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였지만 로한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묻어났다.
“…저 내일 소원 써도 돼요?”
“소원? 아.”
2년 전, 계약을 미루면서 로한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로한의 부탁인 이상 웬만하면 다 들어줄 아르펠이었기에 그는 아직도 많고 많은 것 중 ‘소원’을 요구한 로한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약속이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쬐는 햇볕에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오는 로한의 행동은 언제나 아르펠에게 알 수 없는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내일이 찾아오면 주변의 환경이든 제국의 정세든 많은 것이 뒤바뀔 것이다. 아르펠은 조용히, 로한만은 이 모습에서 더 변하는 게 없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48
그날 밤, 로한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아르펠은 신전의 한쪽에 있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사람이 많지 않은 외진 곳인 데다가 시간도 시간이어서인지, 오로지 그 혼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에는 적적한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제국에는 성인이 된 이들에게 꽃다발과 실 팔찌를 전해 주는 문화가 있었다. 대개 가장 가까운 어른에게서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르펠은 당연히 그 역할을 자신이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넌지시 사실을 알려 준 디오넬의 공로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아르펠의 머릿속에서 그 사실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거랑….”
낮에 미리 봐 두었던 꽃들을 조심스레 꺾었다. 손으로 꺾기가 힘든 단단한 줄기들은 권능까지 동원해 말끔하게 잘랐다.
손안에 환한 노란빛과 주홍빛 꽃들이 가득했다. 달빛 아래에서도 그 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옅고 따뜻한 색감들은 언제나 로한을 떠올리게끔 하는 색이기도 했다. 그가 환하게 웃을 때마다 봄볕을 솔솔 흩뿌리는 태양이 떠오르니까.
대충 들은 대로 끈끈한 잎줄기를 이용해 모은 꽃들을 한데 묶고, 장식용 리본으로 그 겉을 감쌌다.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일이었으니 손길은 서툴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꽃잎들에 아르펠의 미간도 함께 구겨졌다.
“아르펠.”
“…아.”
하다 하다 장본인까지 도착해 버렸다. 하도 집중을 한 탓에 감각이 무뎌졌는지, 아르펠은 로한이 지근거리로 다가오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느꼈다. 곤란함을 담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에게로 향했다.
씻자마자 급하게 튀어나온 건지 내뱉어지는 숨결도 벅찼고, 살짝 가라앉은 갈색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졌다.
잠시간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던 눈은 머지않아 환희에 차올랐다.
“저 주려고 했던 거예요?”
“…응. 늦어 버렸네.”
“늦어도 괜찮아요. 전 다 좋아요.”
흐물흐물 풀어진 얼굴로 웃음을 머금은 로한은 아르펠이 서툰 손길로 헐렁하게 리본을 묶어낼 때까지 곁에서 말없이 기다렸다. 살짝 흐트러지고, 어설프긴 했지만 꽃다발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잽싸게 꽃다발을 품에 안은 로한이 말갛게 웃었다. 선명한 행복의 감정에 면역이 없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멋쩍었던 건지 아르펠의 낯에 드물게도 민망함이 서렸다.
“실 팔찌는…… 못 구해서. 같이 나가게 되면 사 줄게.”
“전 이것만으로도 좋아요. 진짜로요.”
아마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일 것이다. 꽃을 안은 채 살짝 발개진 얼굴로, 수줍음을 머금은 표정은 온 세상의 행복을 끌어안은 듯했다.
“대신… 저 소원 들어주세요. 지금요.”
작은 목소리가 근처에서 스러졌다. 아르펠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로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는데. 어렴풋한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살짝 고개를 숙인 탓에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하지만 그보다는 간절한 표정이 조금 더 잘 보였다. 놀아달라고 옷자락을 앙앙 무는 대형견이 문득 떠올랐다.
“들어줄게. 소원이 뭔데?”
“……뽀뽀해 주세요.”
“뽀뽀?”
그건 자주 하는 거 아닌가. 한 자락의 의문이 떠올랐다.
어릴 적 굿나잇 인사를 한답시고 볼에 스치듯 입맞춤을 해 주던 것은 그가 막 20살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날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러니 굳이 저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볼에 말고요.”
“…그럼 어디?”
“……입술에.”
뒤따라 들려오는 말은 반쯤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잘 들리지도 않았을 아주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로한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르펠은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째서인지 로한의 얼굴에서 쉽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대답이 없는 것이 거절의 표시라고 생각했는지, 점차 로한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갔다. 최근에는 좀처럼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고개 숙여 봐.”
“…해 줄 거예요?”
“응. 네가 부탁한 거니까.”
가까워진 얼굴 탓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오고 갔다. 귀가 간지러운 것도 같았고, 이상하게도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로한과 함께 있으면서 드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해 본 적이 드물었기에, 아르펠은 그것을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느꼈다.
손을 뻗어 로한의 목덜미를 그러쥐고 고개를 가까이 당겼다. 순순히 내려온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콧대가 서로 부딪혔다. 그것뿐이었는데도 로한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에게는 이 상황이 그저 꿈만 같았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깜빡거리는 자수정 같은 눈도, 부딪힐 만큼 가까이 있는 탓에 느껴지는 옅은 숨결도, 살짝 고개를 비틀며 자연스럽게 드러난 하얗고 깨끗한 목선도.
보드라운 입술이 도장을 찍듯 말캉거리는 감촉을 선사하고 나서야 떨어졌다. 그 순간마저 느릿해서, 어느 순간 숨을 참고 있던 로한은 뒤늦게 벅찬 숨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됐어?”
아르펠은 빨갛게 달아오른 로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잘게 떨리는 속눈썹 한올 한올까지 시야에 꼼꼼하게 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 속이 둔중하게 차오르는 듯했다.
그는 굳이 이 소원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로한과 닿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도 그저 한없이 좋고, 만족스럽기만 했기 때문이다. 아르펠에게는 모든 감정의 원인이 로한으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처럼 느껴졌다.
의식해서 기억을 뒤지지 않는 한 전생에서의 행동과 비교해 보는 일은 없었다. 로한의 쑥스러운 듯한 반응에 대한 이유도, 의미 모를 감정으로 가슴이 빼곡하게 차오르는 듯한 본인의 변화도 굳이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평화롭기만 한 일상이 마냥 달가워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로한은, 기꺼이 소원을 들어주는 아르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을 아끼는 그에게 애정을 느꼈다. 결국 변하는 것은 없다는 점에 대한 착잡함도 함께였지만 말이다.
“돌아가요, 이제.”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꽃다발을 품에 꼭 안았다. 풀물이 드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채였다.
다른 한 손을 아르펠에게 내밀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잡아 왔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평생의 계약을 앞두고 있는 밤이었으니, 로한은 손에서 느껴지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날 아르펠이 꺾어 꽃다발로 만들어준 색색의 꽃들은 방 안에 있던 작은 화분에 빼곡하게 꽂혀 창가 한쪽에 자리 잡았다. 해가 밝아오면 볕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였다.
화분을 두 손으로 소중히 모아 잡고는, 시들지 말라고 마력까지 샅샅이 뿌려준 로한의 노력은 덤이었다.
***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연신 고개를 까딱이는 풀잎의 소리가 들려왔다. 잎사귀가 흔들릴 때마다 살포시 내리쬐는 햇볕은 그것의 반짝임을 더해 주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 좋은 아침이었지만, 평소와는 명백히 달랐다.
두 사람이 계약을 약속한 20살의 첫날. 로한은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던 아르펠은 온갖 기대로 똘똘 뭉쳐 있는 것만 같은 로한의 표정을 보곤 작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차려입었어.”
잠깐 눈을 뗀 사이 로한은 예배를 참여할 때 입는 단정한 복장을 한 채였다. 살짝 구겨진 옷매무새를 자연스럽게 펴준 아르펠이 물었다. 로한은 그 물음에도 예쁘게 눈꼬리를 접어 보일 뿐이었다.
“그냥, 오늘을 평생 기억하고 싶어서요.”
“…나도 갈아입을까?”
“괜찮아요. 아르펠은 안 그래도 돼요.”
어차피 예쁘니까. 뒷말은 미처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 버렸다.
평생을 묶이게 될 계약을 하는 날이었으니, 훗날 이를 회상할 아르펠에게 조금이나마 말끔한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자그마한 욕심이었다. 로한은 이 마음 또한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새벽과 아침의 사이, 그 어중간한 시간 두 사람은 신관들조차 거의 드나들지 않는 동떨어진 기도실 앞에 섰다. 내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오웬이 그들을 반겼다.
“딱히 필요한 건 없으니 바로 안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혹시 모르니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사무적인 투로 두 사람을 안에 밀어 넣은 오웬은 계약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을 읊었다. 책을 읽는 듯한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머지않아 주의를 마친 그가 문을 덜컥 닫았다.
바람 소리마저 완전히 차단되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두 사람분의 숨소리였다. 바깥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오웬의 기척에는 곧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로한이 아르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잡힌 두 손이 따끈했다.
“…해도 돼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줍음이 배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놓칠세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아르펠을 바라보고 있던 로한이 느릿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손안에서 움트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양해를 구하는 듯도 했고, 쉽게 깨질 무언가를 대하는 듯 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서히 번져간 무형의 힘이 마주 잡은 손으로부터 더 안쪽으로, 느릿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파요?”
“…아니, 괜찮아.”
다름 아닌 로한이 직접 움직이는 마력을, 시작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느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행동인 탓에 걱정이 되는지 조심스레 묻는 말에도 아르펠은 멍하니 대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마력을 주는 주체가 로한이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축복받은 존재에게 이끌리는 마검의 본질 때문인지. 손으로부터 시작된 움직임이 몸의 더 안쪽을 잠식하려 들수록, 아르펠은 고양되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기분… 좋은 것 같아.”
로한은 계약을 함으로써 아르펠과 평생을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건 아르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더 많은 마음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계약을 핑계 삼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단 한 번도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그것이 아르펠의 명백한 진심이었다.
그랬기에 이 순간이 누구보다 만족스러웠다. 로한에 의해 온몸의 그의 일부로 물들여져서, 마치 그의 온전한 소유물로 낙인찍힌 것만 같다. 미처 사라지지 못한 ‘검’ 그 자체의 본능이었다.
‘……표정.’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로한은 시끄럽게 뛰는 심장 소리를 무시하지 못했다. 아르펠의 완전히 풀어진, 이런 부류의 표정을 보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쁘게 굴러가는 눈이 욕심껏 배를 채우듯 그의 모습을 끊임없이 담았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지만 누구 하나 지금 이 순간이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그저 서로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끝났다. 발끝까지 뻗어간 로한의 마력이 욕심껏 눈앞의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물들여 버리고 나서야 거대한 자물쇠가 철컥 채워지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계약… 된 거죠? 이제 계속, 저랑 같이 있어 주는 거죠?”
계약이 무사히 체결되었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으나, 로한은 미세한 울먹임이 배인 목소리로 거듭 아르펠에게 물었다. 그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로한은 끝도 없는 울컥거리는 감정이 몰려왔다. 오랫동안 염원하던 것을 마침내 이뤄낸 기쁨이 사방을 뛰어다녔다.
정신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음에도 아르펠은 익숙하게 로한을 끌어안고 토닥여 주려고 했다.
“……아?”
마치 파도처럼, 저 하나쯤은 간단히 묻어 버릴 수 있겠다는 것 마냥 몰려오는 수많은 감정의 향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놀란 낯의 아르펠을 보고는 의아하게 그를 부르는 로한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차마 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잡고 있는 손이 움찔거릴 때마다, 내뱉어지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울릴 때마다 감히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새파란 바다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49
아르펠은 사람의 ‘긍정적인 감정’을 유추해 본 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직접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당장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은 것만 하더라도 로한이 처음 자신을 쥘 때 전해 주었던 절망에 가까운 감정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순식간에 잠식시켜버린 이것은 달랐다.
설렘, 소중함, 애정, 그리고 사랑.
“…아르펠?”
누군가가 바깥에서 주입하는 것만 같은 감정은 원하지 않아도 그 정체를 깨우칠 수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진득한 감정들이었다. 로한이 몇 번이고 그를 부르고 나서야 아르펠은 그 목소리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아르펠, 어디 아파요? 아르펠!”
“…잠깐. 기다려 봐, 로한.”
눈을 질끈 감기까지 하자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새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로한은 당장이라도 아르펠을 두 손으로 안아 들어 기도실 바깥으로 뛰쳐나갈 것 같이 굴었다. 들어 올리기 직전까지 갔지만 아르펠의 손에 의해 무마되었다.
뒤늦게 떠진 보랏빛 눈동자는 잔뜩 혼란스러움을 끌어안고 있다. 그럼에도 로한은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끝이 로한의 볼 위로 내려앉았다. 그 미약한 진동을 느끼며 숨을 죽이고 있는 로한을 향해, 마침내 아르펠의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계약은 무사히 끝내셨습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린 탓인지 미묘하게 인상을 구긴 오웬이 노크를 하자마자 곧바로 기도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곤 아슬한 자세를 한 채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목격하고 굳어 버렸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무사히, 완료됐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쾅!
이내 문이 세게 닫혀 버렸다.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온 소리는 넓지만 소음 하나 없는 기도실 안을 왱왱 울렸다. 정작 안에 있는 두 사람은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난데없이 오웬이 등장했을 때에도 잠깐 그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 곧바로 시선이 고스란히 서로를 향하기 바빴다.
쏟아져 들어오는 감정은 여전했다. 감정에 동화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놀란 건지 기분이 아득해지고야 말았다.
아르펠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언젠가 로한의 미소를 보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중하고 귀여운 아이를 향한 감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움을 인정하기까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더랬다.
그러니 성애적인 사랑은 더더욱 알 리가 없었다.
“…로한.”
하지만 타인의 감정이라면 달랐다. 가슴을 빠듯하게 채우다 못해 목 끝까지, 그 너머로 치고 올라올 것만 같은 그것은 명백한 사랑이라고, 누군가 직접 주입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아르펠은 그제야 조용히 들리는 로한의 심장 소리를 눈치챘다. 작은 소리였지만 존재감을 열심히 피력하듯 세차게 뛰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박동은 빨라졌다. 볼에 가만히 가져다 댄 손을 떼어내지 않으며 속삭여 물었다.
“날 좋아해?”
“…좋아하죠.”
“아냐. 그 의미가 아니야.”
여름의 햇볕을 닮은 눈이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확실히, 로한은 아르펠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어? 나를?”
충격적인 선고를 받은 것마냥 심장이 쿵, 세게 한 번 뛴다. 커다래진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르펠은 로한이 말을 내뱉지 않았음에도 그 대답을 얻고야 말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낯을 하고 있는 아르펠을 바라보며, 그리고 믿기 힘든 것을 묻는 목소리를 하나하나 귀에 담으며. 로한은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꼈다.
왜? 어째서?
언젠간 아르펠에게 자신이 삼키고 있는 모든 감정이 들킬 것이라 생각했다.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냥 참을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으니, 미래의 어느 때에는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러나 그가 그렸던 그 어떤 미래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없었다.
‘마검이든 성검이든, 축복받은 이와 계약을 마치게 되면 검은 그들의 감정에 감응하기 시작할 겁니다.’
불현듯 목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검과 축복받은 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던 디오넬의 것이었다.
‘그들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자아를 가지고 있죠. 당신이 기뻐하면 그들도 기뻐할 테고, 슬퍼하면 함께 슬퍼해 주는 존재가 되어 줄 겁니다. 물론, 아르펠님은 조금 다를 테지만요.’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당시 디오넬에게 그 말을 들었던 로한은 그것을 특별히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저 이론의 한 결로만 여기고 넘겼다는 뜻이다.
검은 축복받은 이의 감정에 감응한다. 이제 아르펠은 로한과 평생을 건 계약을 성사한 마검이었다. 그러니…… 외면하고 싶은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들켰다.
“……맞아요.”
목이 지나치게 탔고,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내뱉은 목소리는 잔뜩 낮아진 채 약간의 갈라짐마저 보였다.
두근대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너무 둔중하게 들려서, 당장 눈앞에 있는 아르펠을 제외한다면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그에게 집중된 것만 같다. 마냥 아득하기만 한 기분은 꿈속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계속, 계속… 좋아했어요.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아르펠을 좋아해 왔는지도 몰라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감정을 전하는 목소리만큼은 분명했다. 여전히 제 볼에 가져다 댄 아르펠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고 그곳에 고개를 묻으면서 읊조렸다.
과거의 기억들이 한 편의 긴 이야기처럼 지나갔다. 많고 많은 시간에서 그의 시선은 언제나 로한을 향했다. 단순히 물리적인 부분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만큼은 알았다. 아르펠이 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로한, 그를 위한 것이었음을. 그의 다정함은 언제나 제 몫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로한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멍하니, 몇 번이고 그 말을 되새기는 것처럼 아르펠은 말이 없었다. 입술이 달싹거리긴 했으나 새어 나오는 것은 옅은 숨결뿐이었다.
그에게서 나올 답을 알고 있음에도, 로한은 입꼬리를 올려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정말 많이.”
“……로한.”
이름을 내뱉는 목소리는 마치 목이 졸린 사람처럼 가냘팠다. 그럼에도 아르펠은 로한에게 가져다 댄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만 같은 혼란스러움을 애써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지금만 해도 로한의 애정은 끊임없이 아르펠을 향해 쏟아졌다. 어쩐지 몸이 뜨거웠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감정의 물결에 파묻혀 머리의 한 구석이 망가진 것도 같았다.
아르펠은 로한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이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자 그가 종속된 상대였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아르펠의 발을 붙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미안해.”
쌉싸름한 미소는 아르펠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 표정을 보는 내내 마음 한편이 찌릿했다. 그보다는 로한을 안아주고 토닥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한 발 더 앞섰다.
아르펠은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로한만 보면 퐁퐁 솟는 감정들은 웬만하면 ‘기분 좋다’라는 감상에서 멈추곤 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져오고 책에서 접한 글을 연결 짓는 것도 한계가 있는 탓이었다.
이 순간이 오고 나서야 알았다. 아르펠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인간으로서의 선’을 지키고 싶어 했다.
가족이 되겠다고 약속했던 언젠가의 말을 기억했기에, 그리고 로한을 긴 시간 동안 지켜보며 돌봤던 제 행동이 사람들이 말하는 ‘부모’의 행동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차마 긍정의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간 말이 없던 로한은 의외로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낯에 가까웠다.
“버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이제 나랑 계약했으니까. 그래도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잖아요. 그렇죠?”
“…응. 계속 함께 있을 거야.”
“그러면 됐어요. 다 괜찮아요.”
싱그러운 미소가 한가득 그려졌다. 동시에 외면하지 못할 애정이 쏟아졌다. 숨이 덜컥거리며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적나라한 흔들림이었다. 그런 모습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로한은 제 얼굴에 걸쳐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응?”
“아니에요. 저희 이만 나가요.”
움찔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르펠은 결국 로한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그의 행동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잡혀 있는 손에는 언제나와 같이 그를 아끼는 감정이 한 올 한 올 묻어 있었다.
마주 잡은 손에 조금이지만 힘을 주면서 로한은 이 거리감을 지속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쩌면…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
디오넬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계약이 무사히 성사되었다고 보고를 하러 온 오웬은 어딘가 찝찝한 낯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지만 끝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아르펠과 로한의 모습을 직접 본 순간 무언가 달라졌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두 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요. 별일 없었습니다.”
곧장 대답한 것은 로한이었다.
디오넬이 생각한 것만큼 들떠있지는 않았으나, 평소와 같은 어조로 대답한 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희망찬 앞날을 떠올리는 사람 같기도 했다.
반면 아르펠은 어딘가 복잡해 보이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였다. 마주 보고 있는 이는 디오넬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옆자리에 앉은 로한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가느다래진 시선이 서로를 붙잡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아르펠의 손이 움찔거렸으나 누구하나 먼저 손을 떼지는 않았다.
결국 디오넬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평소와 달라 보이긴 했지만, 정작 그 이유에 대해 말할 낌새를 보이지 않으니 당연했다.
50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위태로웠고, 또 한편으로는 기묘하기도 했다. 디오넬은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의 틈에 껴 약간의 숨 막힘을 느끼고 말았다.
“…내일 곧바로 떠나실 건가요?”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가상할 정도였다. 물론 전부터 묻고 싶어 하던 질문이기도 했다. 아르펠은 로한에게 대답을 넘기겠다는 듯 말을 아꼈고, 로한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펠의 손을 꼭 붙잡은 건 여전했다.
확답을 들은 디오넬의 얼굴에 미묘한 아쉬움이 감돌았다. 12살부터 막 20살이 된 지금까지, 그 긴 시간을 신전에서 지내면서 로한의 곁에 가장 오랫동안 있던 건 당연히 아르펠이었다.
그리고 그를 제외하면, 그 다음으로 오랜 시간을 지낸 이는 디오넬일 것이다.
함께한 시간을 통해 쌓은 정과 별개로 그가 가지는 죄책감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첫 만남이 엇나간 이상, 그리고 그들의 불행에 신전이 관여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어쩌면 앞으로 자주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두 분이 처음으로 신전에 발을 들였을 때 제가 결례를 범했었죠.”
“그 일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사실인걸요.”
로한이 디오넬을 불신하고 경계한 것도 아주 어릴 적에 불과했다. 여전히 다른 신관들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디오넬만큼은 달랐다.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로한은 그의 행동이 또 하나의 속죄임을 깨달았다.
품이 넓은 소매에 넣었다가 뺀 손에는 반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보랏빛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 익숙했다.
“그때 저희가 공격한 탓에 가지고 계신 아티팩트가 망가졌었죠. 이건 그때의 사죄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세요.”
오래 전 망가졌던 아티팩트는 팔찌였으나 로한은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고 반지를 받았다. 아르펠이 끼고 있는 성물과 꽤 비슷한 모양을 했기 때문이다. 언뜻 본다면 한 쌍의 반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한때 아르펠에게 반지 하나를 선물 받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의 손가락 둘레에 맞췄으니 나이를 먹어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손가락이 완전히 낄 뻔한 이후로 작은 반지는 로한의 보물상자 안에 첫 번째 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 받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더 이상 그가 클 일은 없을 테니, 이 반지가 상자 안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흘끗 돌린 시선 끝에 보이는 아르펠의 반지에 기분이 꽤 좋아지고 말았다.
“팔찌가 아니라 반지인데다가, 그때와는 다르게 제 마력이 담겼지만… 언젠가 이것이 로한님을 한 번 더 지켜 주었으면 좋겠네요.”
디오넬이 아르펠을 흘끗 바라보며 웃었다. 언젠가 로한이 팔찌를 받는다면 그건 자신이 아닌 그의 몫일 것이다.
“…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힘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던 그때와는 다르게 로한은 어엿한 어른이 되었고, 웬만한 신관들보다 강해졌다. 그랬기에 과거와 같이 위험에 처할 만한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반지는 되돌려 주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신관의 마력이라면 언젠가 한 번, 정말 그를 도와주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고…. 어쩌면 도움이 되고자 하는 온전한 선의를 거절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디오넬과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아침 일찍 언질 없이 신전을 떠나려는 두 사람의 계획을 직감하고 있는 듯, 무운을 빈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두 사람을 배웅해 주었다.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다. 밥을 챙겨 먹고, 내내 묵었던 방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짐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하늘은 어둑해져 버렸다.
“아르펠? 안 자요?”
“…자야지.”
어쩌면 신전에서 마지막으로 보낼지도 모르는 밤이었다. 여태껏 그 많은 밤들을 태연하게 넘겨 왔으면서, 아르펠은 처음으로 로한과 한 침대에 눕기 전 멈칫했다.
침대에 앉아 헤드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로한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분명 눈이 마주치면 애정을 갈구하는 수많은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지는데, 그의 얼굴만은 여전히 고요했다.
단정하게 웃으며 아르펠의 손길을 기다렸다. 마치 예쁨 받고 싶어 하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망설이던 이성과는 달리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상대와 한 침대에 눕는 게.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그 대상이 로한이 되면 머릿속이 다시 엉켜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반사적으로 그를 쓰다듬고 있는 손을 발견했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갈까요?”
“…인사는.”
“안 해도 괜찮아요.”
레리아나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잠깐이었다. 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떨어져 나갈세라, 잽싸게 붙잡고 고개를 기대는 로한의 행동에 뇌리에 머물던 생각이 하얗게 증발해 버린 탓이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애정은 마치 ‘나를 사랑해 주세요’하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것만 아니라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그때의 얼굴이, 잠깐 졸면서 꾼 한낱 꿈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흉내 낼 뿐, 본질은 마검인 아르펠은 졸 일이 없고, 꿈을 꾸는 일도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뜬금없는 생각은 곧바로 덜어냈다.
“아르펠, 있잖아요….”
방의 불이 꺼진 지 오래였음에도 로한의 눈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해서, 밤하늘의 별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손잡고 자도 돼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은 금세 버려졌다. 여태껏 손을 잡고 자자는 속삭임을 흘린 적은 없었으니까.
여전히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애정의 틈새에서, 아르펠은 작은 간절함을 읽었다. 그것이 아르펠을 움직이게 했다.
“알았어.”
“고마워요.”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움푹 팬 보조개, 고운 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꼬리, 달싹이는 입술. 그 모든 것에는 여전히 견고한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여러 의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따라 흔들리는 기다란 속눈썹이 아르펠을 부추겼다.
“…왜 날 사랑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마주 잡은 손의 힘이 강해졌다. 조용히 눈을 내리깐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그 색이 진해졌음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내 로한이 속살거렸다.
“비밀이에요.”
“……뭐?”
“안 알려 줄래요.”
이번에 지어진 것은 제법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말없이 로한을 흘기던 아르펠은 결국 볼을 한 번 약하게 꼬집는 것으로 남은 미련을 털어 냈다. 굳이 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홱 돌린 아르펠은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잡은 손은 떼지 않은 채였다. 누가 본다면 별 의미를 두지 않았을 만한 행동이지만, 로한은 어째서인지 아르펠이 조금 토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인이야 부정할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날이 오기를 빌며, 로한 역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밤이었다.
***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머리가 둔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싫어하는 음식은….”
“딱히 꺼리는 건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다 잘 드시겠네요! 사실 저희가 얼마 전에 음식이 되게 맛있는 주점 하나를 발견했는데, 아르펠 님도 괜찮으시다면 한번-”
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르펠은 그 말에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는 딱딱한 대답이었음에도 상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손뼉까지 치는 것을 보니 상당히 기뻐 보이는 낌새였다.
어쩐지 생각이 끊겼다. 가라앉으려는 의구심을 애써 깨워내려는데, 누군가가 품에 폭 안겼다. 그 바람에 한 자락의 의구심마저 멀어지고 말았다.
“…로한?”
품에 안긴 것은 로한이었다. 작은 인영이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강한 힘으로 끌어안는 것을 느끼며 아르펠은 그를 안아 들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아, 잠깐….”
뒤에서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아르펠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다 머리를 쓸어 넘겨 주기를 반복하자, 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아저씨들이랑, 갈 거예요……?”
그 물음이 나오고 나서야 아르펠은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신전에 가기 전 2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로한과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이동을 도왔던 수행인들이 분명했다.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마주 봤던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바랜 듯 뿌옇기만 했으나, 그 점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아이를 안아 들고 창가 근처로 다가가니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생생했다. 바다 내음이 담겨 있는 바람결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니. 그럴 리가.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갈까.”
“저, 생선 먹고 싶어요.”
“그래. 이따 같이 나가자.”
저녁 약속이 즉석에서 성사되었다. 음식을 잘하는 주점의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휘발된 지 오래였다.
“있잖아요, 아르펠.”
“응.”
“계속 저랑만 있어 줄 거죠?”
문득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평소와 같이 대답을 하려 했는데, 왜인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한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눈이었다. 조금 더 깊었고,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는… 그 생각에 닿자마자 그간 눈치채지 못했던 위화감이 단숨에 솟아올랐다.
로한은 어리지 않다. 분명 다 컸고, 같이 손까지 잡고 잠들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이 장면은 그저 수없이 많은 과거의 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갑자기 이런 장면을 보게 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끝내 어린 로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만 사랑해 주면 안 돼요?”
이런 적이… 있었나.
멍하니 사태를 파악하던 아르펠이 멈칫했다.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잊고 있던 감정들이 쏟아졌다.
애정을 바라고 사랑을 갈구하는 감정은 사뭇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수많은 감정의 향연에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차올랐다. 숨이 막힌 듯했지만 그 감각마저 기묘했다.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혹은 그 저의를 묻기 위해 살짝 입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시야가 확 뒤집혔다.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였다. 어슴푸레한 새벽인지 잠들었던 때에 비해서는 어둑함이 한결 가셔 있었다.
꿈을 꾼 건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채로 기억을 되짚었다.
아르펠은 단연코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자신의 본질이 검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자아가 있다고 해도 그가 검인 이상 꿈을 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아르펠은 꿈을 꿨다. 로한이 어릴 적, 아이와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 다녔던 나날의 꿈을.
“…아르펠? 잠이 안 와요?”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느낀 건지 잠에서 막 깬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한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는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러다 눈 다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로한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눈이 복잡했다. 처음 꿈을 꾸었다는 사실도, 그게 하필 로한과 계약한 날이라는 사실도 머릿속을 잔뜩 어지럽히기 바빴다.
51
잠을 청했지만 다시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복잡한 생각은 여전히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두 사람이 일어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짐은 미리 싸두었기에 잠자리를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마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을 나서는 둘의 기척마저 희미해서,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고요함만이 복도를 배회했다.
“아르펠. 어디 안 좋아요?”
오묘한 정적을 깨트린 건 로한이었다. 기민하게 아르펠을 살피던 로한이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물었다. 걱정이 선명히 묻어 나오는 표정이 아니었더라도, 공명하는 듯한 몸 안의 울림이 그의 감정을 전해 주어 금세 눈치챘을 게 분명했다.
걱정을 끼쳤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어릴 때의 로한을 보았으니 나쁘지 않았다. 더 이상 고민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냥, 꿈을 꿔서.”
“…꿈이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아르펠의 목소리에 로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함께 지낸 세월이 길었지만, 단 한 번도 아르펠이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꿈인데요?”
“어릴 적의 네가 나오는 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해질 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여러 감정이 다시금 쏟아졌다. 옅은 탄식을 내뱉으며 그것을 감내하다, 문득 부끄러움 한 조각이 새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로한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의 저의를 무어라 느꼈는지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꿈에서도, 내 생각해 준 거예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이 어째서 그리로 튀었는지 모르겠고, 표정에 기묘한 만족감이 서린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내리깔며 묻는 모습이 예쁜 것도 같아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의 바깥으로 나가는 발걸음은 빨랐다. 와중에도 방긋거리며 웃는 얼굴은 아침과 새벽의 경계선과 지독히도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신전이라는 목적지를 두었었으나, 아르펠은 이미 로한과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며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그들이 겪을 일상 또한 굉장히 비슷할 테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가볍게 품에 안을 수 있던 어린아이의 몸은 잔뜩 커버렸다. 크다 못해 제 키까지 완전히 넘어서 버리지 않았나. 과거의 기억이 겹칠수록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아르펠! 쟤 지금 내숭 부리는 거라니까요!”
문득 상념이 깨어진 것은 누군가 빼액 소리를 쳤을 때였다.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씩씩거리는 레리아나가 보였다.
로한과 동갑인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앳된 느낌을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어엿한 성인이 되어 버려서, 전에는 말괄량이 소녀 같은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아가씨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18살이 되던 해에 성검과 계약을 마친 탓에 로한보다 겉모습이 어린 감은 있었으나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든 선남선녀라는 감상을 내놓을 것이다. 미묘하게 속이 불편해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야 나도 갈 거니까?”
“난 허락한 적 없는데.”
“내가 언제부터 네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마주치는 시선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이내 레리아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비틀려 올라갔다. 조소 같기도, 상대를 마냥 놀리는 표정 같기도 했다.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떠날 생각을 해? 시아한테 못 들었으면 계속 몰랐을 거야!”
이내 분홍색 눈망울에 서러움이 그득 담겼다. 어릴 때부터 신전에서 살았고, 또래가 서로밖에 없었으니 그녀의 기분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로한은 귀찮음과 당황이 반반 섞인 눈을 했다.
한편 아르펠은 레리아나의 옆에 서 있는 카시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는 여러 물음이 함축되어 있었다.
레리아나에게 이야기를 해줬다는 건 무슨 말인지, 이미 신전 측과 상의가 된 건지. 그 의문을 느낀 듯 카시아가 대답했다. 물론 시선은 비스듬히 옆을 향한 채였다.
“지나가다 우연히 대신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레리아나 님께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속상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덧붙여지는 말이 없는 걸 보니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거겠지. 다만 빤히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질책은 없었다.
카시아는 오랜 시간 레리아나와 함께 지냈다. 로한이 말없이 신전을 뜨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녀가 심통이 나서 로한을 따라자고 우길 것쯤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쉽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 사실을 알린 것은…….
애초에 함께 신전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결말인 모양이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르펠은 몇 년 전, 레리아나에게는 제대로 된 목표도, 신념도 없다 말했던 카시아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는 이미 다 알고 있어. 내가 같이 가면 도움이 되면 됐지, 피해는 안 볼걸?”
“…….”
“이건 공적인 일이야. 설마 아르펠이랑 둘이서만! 같이 다니고 싶다는 사적인 감정을! 다름 아닌 네가! 더 우선시하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나랑 같이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알았으니까 그만해.”
신경전의 승리는 레리아나가 거머쥐었다. 뿌듯한 얼굴을 한 그녀는 곁을 지키고 있는 카시아에게 승리의 브이자를 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로한에게서는 미약한 짜증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아까 전 정말로 속상해하던 레리아나의 표정이 걸렸는지, 로한은 막무가내식의 주장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건 전말을 대충 유추한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리아나가 자신만의 신념을 찾길 바라는’ 카시아의 목적과는 별개로, 성검과 계약한 레리아나가 함께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레리아나와 동행 한다면 적어도 로한이 내보이는 감정에 크게 휘말리는 일이 덜할 것이라는 조그마한 바람이 곁들여 있었다.
그들이 타고 갈 마차는 신전과 조금 떨어져 있는 숲길의 앞쪽에 세워져 있었다.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마부가 곧장 마차의 옆에 섰다. 입이 무겁다며 디오넬이 직접 선택한 이였다.
가볍게 눈인사한 로한이 가장 먼저 마차에 올랐다. 뒤따라 오르려 하는 아르펠의 앞에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어?”
“쉬잇.”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찰나 옆에서 알 수 없는 몸짓이 오고 갔다. 믿음직스럽게 서 있던 마부가 레리아나와 카시아를 보고서는 맹한 소리를 낸 것이다. 어깨를 움찔 떤 레리아나가 검지를 입에 대었다.
…숨길 생각은 있는 걸까? 행동이 너무 적나라했다.
다만, 이미 마차 위에 올라타 버린 로한에게는 제대로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아르펠은 가만히 입을 다물기를 선택했다.
“손 안 잡아 줄 거예요?”
그보다는 눈썹을 처연하게 내려뜨리는 로한이 더 신경 쓰였다. 빠르게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자, 이번에는 깍지를 껴오기까지 했다. 그 행동에 애정이 선명하게 묻어 나오는 바람에 잡은 손끝을 움찔 떨었다.
“으.”
뒤따라 올라온 레리아나가 수줍게 웃는 로한을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반쯤 질색에 가까웠다.
마부와의 거래를 무사히 마친 듯, 아르펠과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 앉은 레리아나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딱 보니 마부와는 사전 협의가 되지 않은 모양인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를 꼬드겼을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하던 아르펠은 머지않아 레리아나의 손목에 감겨 있던 팔찌 하나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입이 무거운 건 맞을까.’
아주 타당한 의심이었다. 물질적인 것에 혹하는 사람이 비밀을 지킬 리는 만무했으니까. 빤한 시선을 느낀 탓인지 레리아나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아.티.팩.트.’
아마 시선에 배어 있는 의문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입 모양을 내보인 탓에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쉽게 눈치챘다. 레리아나가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티팩트라면 그럴 만도 한가. 남자에 대한 못 미더움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마차에서 잠시 내렸을 때 그와 이야기를 해 본다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르펠.”
“…응?”
“왜 자꾸 쟤만 봐요….”
내내 가만히 있던 로한이 문득 몸을 기울였다. 이미 손을 맞잡고 충분히 가까이 앉아 있었으나, 그 행동 탓에 몸이 더 가까워졌다. 속상한 기분을 폴폴 티 내는 표정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감정은 서운함보다는 질투와 비슷했다.
순순히 레리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짙은 애정은 가끔 그것에 파묻혀 버릴 것 같다는 감상을 주기도 했으나, 지금 느껴지는 이 질투는 조금… 아주 조금, 귀여웠다.
“별 지랄을…….”
“레리아나 님.”
어느 순간 들린 험한 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
두 사람에서 네 사람으로 불어난 일행이 향하는 곳은 미리 렉시아와 편지로 대화를 나누며 점찍어 둔 마을이었다.
모두 몸을 강화할 수 있는 이들이었으니 굳이 마차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신전에서 멀어지기 전까지는 눈에 띄지 않는답시고 허름한 편에 가까운 마차를 이동수단으로 선택했지만 말이다. 그 탓에 당연히 하루 만에 도착하기는 무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 두 끼를 마차 안에서 건조식품으로 때우는 강행군까지 거쳤으나, 반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을에서 그쳤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 했다. 하루의 마지막 식사 정도는 제대로 먹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는지, 세 사람은 이번 마을에서 묵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식욕도, 수면욕도 딱히 일지 않는 아르펠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 좀 살겠다….”
따끈한 수프를 입 안 가득 밀어 넣은 레리아나는 헤실 웃으며 자리에서 녹아내렸다. 성력으로 몸을 강화할 수 있었으니 딱히 근육통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피로함이 가득했던 탓이다.
비록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로브를 두른 채로 음식을 먹어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마찬가지로 갑옷을 벗고 같은 로브를 쓴 카시아도 표정이 빠르게 풀렸다. 하얀 얼굴에 홍조가 어려 있었다.
“이거 더 줄까요?”
“괜찮아. 너 많이 먹어.”
로한은 쌓인 피로를 풀기보다는 아르펠에게 더 붙어 있지 못해 안달이었다. 통통한 생선 살을 발라 입 근처에 대어주는 것을 거절하지 못한 아르펠이 입을 벌릴 때면 행복한 미소가 잔뜩 고이고는 했다.
다른 두 사람의 떨떠름한 시선이 닿기는 했으나, 로한은 아주 꿋꿋했다.
결국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은 레리아나는 식사에 집중했다. 양이 꽤 많았던 수프 그릇이 게 눈 감추듯 비워졌다. 슬슬 식사가 끝나가는 분위기에, 흘끗 카시아의 눈치를 보던 레리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로한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야시장 여는 거 알고 있어?”
“야시장?”
“응. 마을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여는 축제 같은 건가 봐. 이것저것 파는 게 많대.”
“레리아나 님. 내일도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
레리아나가 입술을 삐죽였으나, 카시아의 시선은 단호했다. 야시장이라고는 했지만 로한은 크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시아, 잘 생각해 봐. 앞으로 계속 일만 해야 하잖아? 제대로 못 쉴지도 몰라. 오늘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구.”
툴툴거리는 목소리에도 흔들리는 법이 없다. 로한을 지원군 삼으려고 했던 계획이 처참하게 실패하자 로브 사이로 드러난 얼굴에 심통이 가득했다. 야시장에는 맛있는 것도 팔고, 여러 장신구들도 팔고, 재미있는 것들도 많을 거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미련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리고, 그 말에 의외의 사람이 흔들렸다.
“…장신구?”
드디어 지원군을 찾은 레리아나의 눈이 번뜩거렸다.
52
“설마 지금, 가시겠다는….”
“가요! 같이 가요, 아르펠! 제가 잔뜩 구경시켜 줄게요!”
항상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카시아의 얼굴에 선명하게 당황이 서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펠이 그런 관심을 보일 줄은 상상조차 못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더 말할세라, 레리아나는 테이블을 탁, 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표정이 의기양양했다.
그 말에 답한 것은 아르펠이 아닌 로한이었다.
“아르펠이 너랑 왜 같이 가.”
“넌 야시장 안 간다면서!”
“내가 언제? 나도 갈 거야.”
덧붙여진 말이 아주 태연했다. 레리아나는 순간 이놈이 처음부터 가겠다고 순순히 대답한 것을 자신이 듣지 못한 건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뻔뻔했다는 뜻이다.
“저랑 같이 갈 거죠?”
“그래.”
아르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야시장을 가겠다고 한 목적이 로한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펠에 로한까지 간다고 하자 카시아는 결국 레리아나가 야시장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 대신 자신의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며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물론, 잔뜩 신이 난 레리아나는 고개를 기계적으로 끄덕일 뿐,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자마자 네 사람은 곧장 거리로 나왔다. 사실 아르펠과 로한에게 야시장은 그렇게 새롭지 않았다. 제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야시장 구경도 몇 번 해 본 탓이었다.
날이 저물고 밤에 가까워졌는데도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은 열심히 영업하고, 주위에는 색색의 장식들이 가득했다. 화려한 불빛으로 수 놓인 거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제격이었다.
사실 몇 년 전에 돌아다녔던 야시장과 엇비슷했다. 별다를 것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르펠은 지금의 이 광경이 제법 새롭다고 생각해 버렸다.
자연스럽게 레리아나를 떼어놓은 로한이 아르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살짝 들려진 로브 사이로 결 좋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사고 싶은 거 있어요?”
“…잠시만.”
로한과 함께 가는 대신 그를 한쪽에 세워두고 발을 옮겼다. 야시장을 찾은 건 얼마 전 그에게 선물해 주기로 약속한 실 팔찌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야시장까지 같이 와 버렸으나, 정작 그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어쩐지 깜짝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아까 전 시선으로나마 대강 훑었던 노점상 중 하나로 향했다. 팔찌나 반지, 귀걸이 같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장신구부터 여성들이 애용할 것 같은 화사한 머리핀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아르펠이 원하던 실 팔찌 역시 있었다.
“아, 주변에 성년이 되신 분이 계십니까?”
아르펠이 실 팔찌를 살피는 기색을 보이자 가판대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푸근한 미소를 걸치며 다가왔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피부가 하얀 분이라면 이런 색도 무척 잘 어울릴 겁니다.”
몇 번 남자가 실 팔찌를 꼽아 주었지만 한 귀로 듣고 넘겼다. 직접 골라 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설명하던 남자가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아르펠은 마음에 드는 두 팔찌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몇 분의 고민 끝에 아르펠이 팔찌 하나를 선택했다. 내내 가판대 앞에 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폴폴 흘린 탓에 남자의 얼굴이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그게 본인의 탓일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한 아르펠은 곧장 자리를 떴다.
“로한.”
“왔어요?”
꽤 시간이 걸렸는데도 로한은 처음 기다리라고 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묘한 기분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뒤늦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거… 제 거예요?”
“응. 아직 선물 못 줬으니까.”
아르펠의 손에 쥔 것을 바라보던 로한은 홀린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포장도 없이 그대로 가져온 실 팔찌를 그의 손목에 꼼꼼히 둘러 주었다.
옅은 보라색과 하얀색이 매듭지어져 있는 팔찌는 로한에게 꽤 잘 어울렸다. 검 연습을 하며 햇볕을 수없이 많이 쬐었는데도 의외로 피부가 하얗기 때문일까.
로한은 제 손목에 채워진 실 팔찌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저 얇은 실을 엮었을 뿐이니 객관적으로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하거나 예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시야에서는 그 무엇보다 반짝거렸다.
“……고마워요.”
잠시간 목이 막힌 것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로한은 뒤늦게서야 목소리를 터뜨렸다. 팔찌를 선물해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은 것도, 굳이 야시장까지 찾아온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모든 사실이 그의 심장을 둔중하게 울려대기 바빴다.
몇 분 동안 수도 없이 고민해가며 팔찌를 살피다 조심스레 보라색의 실 팔찌를 집어왔을 아르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르펠은 그 모든 감정을 전해 받았다.
순간 거센 바람이 불었다. 미처 붙잡지 못한 로브가 벗겨지고, 가려져 있던 로한의 얼굴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색색의 조명 아래에서 눈을 곱게 휘고 웃는 모습이 아르펠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만 가자.”
여전히 낯설기만 한 묘한 느낌이 몸을 휩쓸었다. 로한의 눈을 빤히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의 눈을 마주치며, 그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전해 받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브를 다시 씌워 주고는 몸을 돌렸다. 곧장 뒤따라오는 듯하던 로한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아르펠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정말로 숨이 막혀 죽는다 하더라도 나쁜 기분은 아닐 것만 같아서. 로한이 잡아 온 손을 놓지 못한 아르펠은 눈을 내리깔은 채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틈새를 걷는 수밖에 없었다.
***
“그래…… 너 참 잘났다.”
“고마워.”
“아, 진짜!”
다음 날, 일행은 아침 해가 밝자마자 곧바로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레리아나가 열이 받아 소리를 친 것은 어제와 비슷한 구도로 마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오늘 날씨가 꽤 덥네.’
‘소매가 거추장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내뱉으면서 손목에 차고 있는 실 팔찌를 티 내는 로한의 행동 탓이었다.
대놓고 자신에게 자랑하는 것 같은 행동을 몇 번이고 참던 레리아나는 얼마 못 가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제야 로한은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는 듯 뻔뻔하게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아르펠은 처음 로한이 덥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기민하게 그의 상태를 살폈다. 머지않아 그가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때부터는 그저 로한의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다름 아닌 자신이 준 선물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행동이 오랜만에 앳되어 보이기도, 제법 귀여워도 보이기도 했다.
달려가는 마차의 속도는 어제보다 더 빨랐다. 마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몰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 레리아나에게 아티팩트를 받았냐 물어보니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선 용서를 빌었었다. 신전에 돌아간 뒤 디오넬에게 소식만 전해 주면 상관없다 답했건만 상당히 찔린 듯했다.
“굳이 그 마을로 가는 건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지? 누구 만나기로 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대체 왜 따라온 거야….”
“네가 뭘 알려 줬어야지. 맨날 아르펠이랑 쑥덕거렸으면서!”
레리아나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물론 로한은 그런 레리아나를 보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내 울상으로 변한 시선은 정확히 아르펠에게 향했다. 누가 봐도 알려 달라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아르펠을 왜 그렇게 봐?”
“네가 안 알려 준다며!”
“내가 언제.”
“와…… 너 진짜.”
둘 사이에서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투닥거림이 오고 갈 때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레리아나에게 대답해 주고 있던 로한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아르펠.”
“그래.”
“왜? 뭔데? 왜 그래요?”
두 사람은 동시에 마차의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카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간 당황스러워하던 레리아나조차도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난 뒤에는 주변의 변화를 눈치챘다.
눈에 띄는 긴장이 마차 안에 무겁게 가라앉을 무렵, 마차를 이끌던 말들에게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림과 함께 앞쪽에 있던 마부가 비명을 질렀다.
마차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레리아나를 보호하듯 곧장 그녀의 곁에 붙어선 카시아가 검을 꺼내 들었고, 아르펠은 로한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둘은 마차가 제자리에 멈춰 서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 뛰어내렸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한 이상, 이 정도의 충격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마차의 맞은편에 검은색 옷으로 온몸을 무장한 이들이 서 있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얼굴까지 꼼꼼하게 가린 모습은 도저히 좋은 의도를 가진 이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애초에 손에는 대담하게 냉병기를 쥔 채였다.
“서른 명쯤 되는 것 같군요.”
뒤늦게 마차에서 내린 카시아가 레리아나와 함께 다가오며 말했다. 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림짐작해도 적지 않은 수였다.
아르펠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그들의 이야기는 원작의 궤도를 벗어난 지 오래였으나,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내용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작의 로한 또한 이맘때쯤 처음으로 신전을 나선다. 스스로를 나약하다고 생각해 강박적으로 훈련에 몰두하는 로한을 걱정한 디오넬이 떠나는 걸 미루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탓이었다.
복수만을 강렬히 원하며 여행길에 오르는 로한을 레리아나가 뒤따라 갔다. 로한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카시아 때문에 호위기사인 그녀까지 떼어 놓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동하는 초반에 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첩자 때문인가.’
유추되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눈에 띄는 차이점이라면 원작에서의 첩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일 테다. 소설 속에서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디오넬의 심증에 불과했으니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그를 견제하는 것이 한계였다. 아마 황제에게 흘러 들어가는 정보를 원천 차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53
반면 현실은 달랐다. 아르펠의 개입으로 마신전에 있던 첩자는 죽었고, 천신 측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황제는 신전에서 정보를 빼내지 못했을 것이다.
첩자의 죽음에 로한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가 신전 밖으로 나와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을 확률이 높다. 그들이 거쳐 온 마을에 감시자가 있었을 테지.
문득 야시장에서 로브가 벗겨졌던 로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들켰다고 한다면 그 시점일 것이다.
저 뒤에서 말과 함께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부를 제외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서로를 향한 경계심을 끊임없이 곤두세우기만 했다. 와중에 로한은 조심스럽게 아르펠의 손을 잡아 왔다.
“뭐, 뭐야……?”
짧은 반짝임이 시야를 방해했다.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레리아나는 방금 전까지 눈앞에 서 있던 아르펠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어디 갔지? 방금 그 빛은 뭐고?
그 빛이 켜켜이 쌓여가던 긴장감을 무너뜨렸는지, 맞은편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옆의 수풀에서 화살이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정확히 급소를 노리며 쏜살같이 날아오는 화살을 카시아가 검으로 단숨에 베어 버렸다.
레리아나의 손에서 짧게 성력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언뜻 보기만 해도 성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새하얀 검이 손끝에 잡혔다.
그녀의 몸집에 비해 크기가 큰 편이라 대검이라고 여겨질 만했으나, 레리아나는 그 검을 돌려가며 주위에서 쏟아지는 공격들을 손쉽게 막아냈다.
“젠장! 둘이라는 얘기는 없었잖아!”
“반대편을 조심…… 크악!”
“한 놈은 어디 갔지?!”
처음 손발을 맞추는 처지인데도 세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쉽게 찾아갔다.
어느샌가 손에 새까만 검을 든 로한은 곧장 무리의 왼쪽을 치고 들어가 사람을 베어냈다. 몇 번이고 해 본 적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손속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레리아나는 그와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에서 터진 성력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일순간 집중을 잃는 때를 놓치지 않고 레리아나가 휘두르는 성검이 치고 들어갔다.
뒤를 지키고 있던 카시아는 둘에게로 날아가는 화살을 몇 번 막아 주다, 화살이 날아오던 수풀을 향해 땅을 박찼다.
몸을 숨기고 있는 놈들의 멱을 틀어쥐고 바닥에 내리꽂으며 검까지 찔러넣는 일련의 행동은 무척이나 민첩해서, 죄 당황한 이들은 그녀의 손에 의해 절명하고야 말았다.
“……더럽게.”
로한이 휘두른 검이 맞부딪힌 오러를 깨부쉈다. 어려움 하나 없이 산산조각 나 버리는 오러에 당황한 듯한 남자를 베어버리니 피가 튀어 올랐다. 검 끝에 아주 살짝 묻은 피를 발견한 로한이 표정을 굳혔다.
“미안해요, 기분 나빴죠…….”
사방이 시끄러운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검 끝에 묻은 혈흔을 닦았다. 깨지기 쉬운 보물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에 애절한 목소리, 처연한 표정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대상이 검만 아니었더라면 더 괜찮았을 것이다.
“미친놈인가?”
워낙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탓에 ‘아르펠이 사라졌다’라고만 인식했지, 그 검이 바로 아르펠이라는 사실을 곧장 눈치채지 못한 레리아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육성으로 머릿속의 생각을 말해 버린 것은 덤이었다.
그건 로한을 상대하고 있던 이들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얼굴에 피가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기이한 그림자를 다뤄 사람을 한 입에 집어삼키게 하는 모습을 보인 이였다.
그런 상대가 검을 향해 피가 튀어서 미안하다며 처연히 말하는 모습이라니. 와중에 굳어 버린 이들 중 하나가 바닥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가시로 인해 심장을 뚫려 죽자, 기괴함마저 느껴졌다.
<난 괜찮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을 뿐이지 로한의 귀에는 선명히 아르펠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계약하고 난 뒤 처음으로 아르펠과 합을 맞춰보는 것이었으나, 로한은 이상하리만치 능숙하게 힘을 다뤘다. 어쩌면 그가 자신의 검이 되어줄 날을 끊임없이 바라며 몇 번이고 아르펠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싸울 수 있는 전력이 로한,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뿐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배로 불어난 일행의 협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실력의 차이도 이유이긴 했으나 오러와 성력, 그리고 마력의 상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몸을 강화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세 힘은 비슷했으나, 실력이 비등한 사람들끼리의 싸움이라면 마력이나 성력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오러는 인간이 피워낸 힘이고, 마력과 성력은 신에게서 받은 힘이라는 데에서부터 애초에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칫!”
로한의 반대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레리아나는 매섭게 내리치는 검격을 받아쳐 낸 누군가에 인상을 찌푸렸다. 맞붙은 오러 역시 흔들림이 없었다. 상대가 뛰어난 실력자임을 직감한 그녀는 빠르게 상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것이 실책이었다. 레리아나가 발을 빼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눈 깜짝할 새에 그녀의 앞까지 따라붙은 이가 빈틈을 파고들며 검을 찔러넣은 탓이다. 바람 같은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검에 뒤늦게 반응해 몸을 틀었다.
“레리아나 님!”
외곽에 숨어 있던 자객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나온 카시아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레리아나의 어깨를 긁고 갈 궤도에 있던 검이 카시아의 검에 의해 쳐내 졌다.
“누구냐. 누가 보냈지?”
“…….”
“순순히 답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카시아는 레리아나를 뒤로 당겨 보호했다. 원래도 냉랭한 편인 얼굴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표정해졌다.
서로의 검이 기울었다. 카시아가 당장이라도 눈앞의 놈과 맞붙을 기색을 보이자, 레리아나는 검을 위로 드는 대신 그대로 땅에 꽂아 버렸다. 머지않아 그녀의 검으로부터 규칙적인 파동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파동은 근처에 있는 카시아에게 닿자마자 그녀의 몸에 흡수되었다. 몸에서 옅은 빛무리가 몽글거리고, 쥐고 있는 검이 반짝였다.
로한은 ‘그림자’라는 공격적인 권능을 가진 아르펠과 계약했다. 그렇기에 망령을 사냥하고 누군가와 검을 겨루는 것에 손색이 없었다. 이에 비해 레리아나는 ‘치유’의 권능을 가진 성검과 함께하기를 선택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직접 싸움판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권능을 이용해 상대를 붙잡고 한 단계 더 강화해 주는 일에 능통한 편이었다. 레리아나의 권능을 한껏 받아들인 카시아에게서 옅은 금빛의 숨결이 터졌다.
“하압!”
기세가 만만치 않게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맞은편에 서 있던 이는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치고 들어간 것은 카시아였다.
빠르게 내질러진 검이 남자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카시아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몸을 뒤로 젖힌 탓에 옷이 얕게 베이는 것에 그쳤다.
그것을 기점으로 숨이 막힐 듯한 공방이 오고 갔다. 검격이 몰아쳤지만 남자는 꿋꿋하게 그 모든 것들을 받아쳤다. 아까와는 달리 맞붙는 검에서 얕은 떨림이 느껴지고는 했으나, 권능의 힘을 빌렸는데도 이 정도라면 검에 있어서 손에 꼽을 실력자라는 뜻과도 같았다.
“황제에게 명령을 받았나?”
홧김에 내뱉은 말에도 동요가 없었다. 그녀 또한 신전과 황실 사이의 갈등을 알고 있었기에 습격을 할 만한 위인이라면 황제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 남자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오히려 그것이 더없이 부자연스러웠다. 타인의 뜻에 따라 마음껏 주물러진 인형 같은 모양새였다.
남자가 몇 발자국 물러났으나 카시아는 곧장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뒤쪽에서 여전히 권능의 힘을 쓰고 있는 레리아나가 신경 쓰인 탓이다. 그녀와 거리를 지나치게 벌렸다간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공격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그 일말의 망설임을 눈치챘다. 그녀가 신경 쓰는 상대가 다름 아닌 뒤쪽에 있는 레리아나라는 사실도.
다시 한 번 검이 맞붙는 그 순간, 검에 가해지는 힘을 흘려보낸 남자는 비어있는 옆구리 부분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변칙적인 공격의 일부라고 생각한 카시아가 곧장 검을 내려찍었으나 검 끝에는 찢어진 로브의 자락만이 걸렸다. 분명 약하게 베이는 느낌이 손에 남았으나, 남자가 베인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
카시아를 지나친 남자는 곧장 레리아나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하게도 레리아나는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 정도의 빠른 속도였고, 눈치챘다 하더라도 권능의 사용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바닥에 꽂힌 검을 빼내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레리아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카시아!”
두 눈을 완전히 감기 직전, 시야에 핏방울이 번졌다. 놀라 눈꺼풀을 번쩍 뜨자마자 보인 것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카시아의 등이었다.
방금 본 핏방울은……? 뒤늦게 돌린 시선은 뚝뚝 떨어져 바닥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색의 핏방울에 고정되었다. 카시아가 다쳤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레리아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레리아나 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안 돼.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카시아에게 전해 주고 있는 권능이 크게 흔들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카시아는… 상상하기 싫은 미래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카시아의 뒤에 가만히 숨은 채, 그녀의 몸에 권능을 쏟아내는 것밖에 없었다. 몽글몽글한 금빛 기운이 카시아의 몸에 남아 있는 자상을 빠르게 치유했다.
레리아나에게서 전해지는 힘을 느끼며 카시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약점까지 간파된 이상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온 힘을 쥐어짜내 맹공을 퍼부어, 시간을 끄는 것.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판단을 마친 검이 매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돌적이기까지 한 공격에 남자는 다시 레리아나를 노릴 틈을 찾지 못했다. 둘의 사이에 꽤 많은 공방이 오고 갔을 무렵.
“크윽!”
카시아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남자가 신음성을 터트렸다. 뒤쪽에서 기척 없이 솟아오른 검은색의 가시가 그의 어깨를 꿰뚫은 탓이었다. 가시의 진원지는 땅이었다.
“로한!”
내내 초조하게 카시아를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던 레리아나는 화색을 띠며 로한을 불렀다. 그새 남은 잔당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온 로한은 곧장 권능을 일으켜 남자를 공격했다.
어깨를 하나 내줌과 동시에 카시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성력으로 강화한 채 도약한 몸이 섬광처럼 남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남자는 카시아의 공격을 간신히 피했지만, 다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로한의 검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유려하게 그어진 검이 반대쪽 어깨를 갈랐다. 어깨 한쪽을 완전히 잘라낼 셈으로 검의 속도를 늦추지 않은 로한이었으나, 갑자기 남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새하얀 연기에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연막인가.”
연기가 가셨을 때 남자의 기척은 사라진 뒤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남자가 사라진 너머를 바라본 로한이 작게 혀를 찼다.
“카시아, 괜찮아?! 다친 곳은…!”
“네. 레리아나 님 덕분에 괜찮습니다.”
연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마자 레리아나는 득달같이 카시아에게로 달려갔다. 피가 뚝뚝 떨어지던 모습이 유난히 선명한 탓일까,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그녀의 손은 분주히 상처를 입은 자국을 찾아 나섰다.
“……미안해.”
“레리아나 님.”
“나 때문에, 카시아가….”
결국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던 부분이 들통났다. 드러난 피부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바깥쪽의 옷은 검에 의해 잘린 자국이 선명했다.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도 흥건히 남아 있었다.
54
카시아가 곤란한 표정을 짓기가 무섭게, 레리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연신 미안하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갈 듯 작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카시아가 손을 들어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원래라면 신분의 차이가 있으니 절대 그럴 수 없다며 해주지 않을 행동이었다. 울고 있던 것도 잊고, 레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카시아를 올려다 보았다.
온기가 어려 있는 눈으로 레리아나를 내려다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레리아나 님이 없었다면 전 그 남자를 상대로 길게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뛰어난 실력자였어요.”
“…카시아.”
“그러니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레리아나 님이 치료해 주셔서 멀쩡하게 나았는걸요. 다친 것도… 그저 제가 수련을 게을리 한 탓입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레리아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마저 쓴웃음에 가깝고, 눈은 붉게 달아오른 채라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는 카시아를 옆에 두고, 레리아나는 로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하는 낌새였다.
“뭘 봐.”
말없이 둘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한은 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에 레리아나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주는 로한에게 고마움이라도 느꼈는지 눈가가 일렁였다.
동시에 그의 차림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베었는지 얼굴에 피가 튄 핏방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괜찮아 보이네.”
아무리 봐도 본인의 피는 아닌 것 같았다. 이를 확신한 레리아나는 로한에게 향하던 약간의 걱정을 망설임 없이 거둬버릴 수 있었다.
“아르펠은 어디 간 거야?!”
뚱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레리아나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버렸다. 아르펠이 검으로 변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음에도, 그때 터진 빛 때문인지, 혹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인 탓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녀의 눈에는 순수한 걱정만이 담겨 있었다.
“여기 있잖아.”
“어디!”
“네 눈앞에.”
그런 레리아나를 보는 로한은 태연하기만 했다. 살짝 검을 들어 보이며 말한 로한은 곧장 눈을 내리깔곤 중얼거렸다.
“피 튀기는 건 최대한 마력으로 쳐냈는데, 아직 제가 익숙하지가 않아서… 죄송해요. 다음엔 더 잘할게요.”
“……뭐라니?”
미쳤나? 미친 건가? 검에 대고 중얼거리는 사람이라니.
레리아나도 그녀의 검이 어느 정도의 이지가 있어 좋고 싫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되는 정도는 아니다. 단 한 번도 로한처럼 검과 대화를 해 보려고 한 적은… 아주 어릴 적 말고는 없었다. 가슴에 대고 맹세할 수 있다.
상당히 괴상한 표정을 하고 말았으나 그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까부터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눈앞에 빛이 반짝였다.
“……어?”
“이게 무슨….”
투덜거리고 있던 레리아나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비슷한 심경인 듯해 보이던 카시아도 뒤이어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검이 한순간에 사람으로 변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너부터 닦자.”
“그치만….”
“내가 닦아 줄게.”
“알았어요.”
충격에 젖어 있는 두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로한과 아르펠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로한이 쥐고 있던 손수건을 대신 잡은 아르펠이 그의 볼에 묻어 있는 핏자국들을 닦아냈다.
“…아니. 잠깐, 잠깐. 뭐예요?! 이게 뭐야!”
생각해 보니 이런 장면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르펠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로한의 검이 된 것이다. 헛것을 봤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성이 있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니, 머릿속에서 그것을 그냥 도려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은 여전했다. 어떻게 사람이 검이 된단 말인가? 로한이 쥐고 있던 건 그냥 검도 아닌 마검이었다. 폴폴 새어 나오는 마력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패닉에 빠져 소리 지르는 레리아나를 로한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한 취급 하지 마. 갑자기 왜 유난이야.”
“너야말로 미친 소리 하지 마! 네가 언제 알려 줬는데!”
“……안 알려 줬나?”
고개를 갸웃하는 로한은 진심으로 자신이 알려 준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레리아나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뒷골을 잡았다. 이놈은 여전히 짜증 나는 놈이었다.
결국 로한은 그 자리에서 아르펠에 대한 사실을 모조리 알려 줘야 했다. 다만 마검이 사람이 되는 기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그가 망령의 힘 또한 가지고 있다는 걸 설명하지 않으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로한을 대신해 아르펠이 마저 설명해 주었다.
“망령…… 말입니까.”
“로한이 성력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그 탓입니다. 성력에 닿으면 상태가 꽤 안 좋아져서요.”
카시아는 물론이고 레리아나의 얼굴까지 상당히 복잡해졌다. 동요 한 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펠이 덧붙였다.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따로 이동해도 괜찮-”
“제가 그렇게 쓰레기 같아 보여요…?”
곧장 따라붙는 레리아나의 말은 사뭇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아르펠은 눈망울에 어려 있는 물기를 보고 멈칫하고 말았다.
“왜 말을 안 해 줬는지는 알겠어요…. 그래도 전 여전히 아르펠이 좋은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데. 검?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물론 미리 얘기해 줬다면 성력 쓰는 걸 더 조심했을 테지만….”
횡설수설이었지만 뒤쪽에는 소심한 불만도 덧붙였다. 가만히 레리아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이어가는 말을 들을수록 아르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쩌면, 정말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카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시선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니 원작의 로한도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거다. 끝내 아르펠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요.”
로한의 곁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르펠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감사 인사를 전해 받을 줄 몰랐는지 눈을 크게 뜬 레리아나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물론, 아르펠은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다. 옆에서 솔솔 풍겨오는 불온한 감정 탓이었다.
질투였다.
“로한. 기분은 괜찮아?”
“아.”
감정을 읽어내면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아르펠은 언제나 로한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이고, 그랬기에 로한이 그를 원하는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르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예쁘게 웃어 보인 로한은 여러 감정을 쏟아냈다. 애정, 사랑, 기쁨, 환희, 충족감, 뿌듯함……. 몰아치기 바쁜 감정들은 여전히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어느샌가 아르펠은 그것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았다.
아마 그는 평생토록 로한을 외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받아 주지 못하는 사랑을 억지로 강요하는 날이 오더라도.
“음…… 아르펠이 계속 같이 있어 주면 괜찮아요.”
말간 미소에는 고민이나 죄책감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습격을 감행한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생명을 베고 죽였으니 내색하지 않더라도 힘들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흔들렸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개운하게까지 보였다.
“…정말로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미처 숨기지 못한 레리아나와는 달랐다. 갸웃거리며 흐트러지는 결 좋은 머리카락에 아르펠은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다 나쁜 놈들이잖아요. 아르펠을 괴롭히고, 내 가족도 죽인.”
“…맞아. 그랬지.”
네 기분이 나쁘면 안 돼.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답했다. 아주 조금 쌓여 있던 묘한 위화감을 덜어 냈다.
“근데 정말 다 죽인 거야?”
카시아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튄 피를 닦아낸 레리아나가 로한을 향해 물었다.
로한이 만들어낸 광경은 참상에 가까웠다. 손속 없이 베어 버린 탓에 평범한 사람들이 본다면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속이 좋지 않은 것은 레리아나도 매한가지였는지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더 질렸다.
“아. 한 놈 남겼어.”
바닥에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아가리를 벌렸다. 힉.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시 몸을 떤 레리아나는 불쑥 튀어나온 까만 것이 마치 사람의 손 모양을 하려는 듯 꾸물꾸물 움직이자 흥미로워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귀엽네.”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삐뚤빼뚤한 선을 가진 것은 사람의 손과 비슷하긴 했다. 엉성함이 조금 티가 났을 뿐.
인사를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어 보인 그림자는 곁에 있던 로한이 끝부분을 발로 톡톡 건드리고 나서야 반응했다. 벌려진 아가리 사이로 사람이 튀어나왔다.
“와…… 이거 좀 탐난다.”
“물건도 수납할 수 있는 건가요?”
“네.”
“넌 왜 이런 거 없어, 응?!”
그림자가 사람을 뱉고, 그 사람이 멀쩡하지 않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시아마저 관심을 보이는 눈치이자 레리아나는 자신의 성검을 꺼내 탈탈 흔들었다. 간간이 웅웅거릴 뿐,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막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와 정신이 없어 보이는 놈의 앞으로 카시아가 다가갔다. 복면을 억지로 벗겨내자 눈물 콧물을 질질 짠 얼굴이 드러났다. 오래전 그림자에 들어갔다 나온 몇몇 사람들과 아주 유사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앞으로 10분씩, 저 그림자 안에 먹혀 있어야 할 겁니다.”
“히익!”
그녀는 효율적인 협박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얼굴은 이제 새파란 색감이 뚜렷해졌다.
남자는 고개를 마구잡이로 끄덕였다. 입에 자결을 위한 독약이 없는지를 마저 확인한 카시아는 놈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며 옆으로 이동했다. 이것저것 물어볼 심산인 것 같았다.
그사이 레리아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마부에게로 향했다. 아르펠은 쫄래쫄래 따라오는 로한을 굳이 막지 않으며, 발밑에 너저분하게 남아 있는 토사물을 밟지 않도록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을 맞잡은 로한에게서 몽실거리는 감정이 맴돌았다.
“괜찮으세요?”
“예, 예……!”
도륙과 다름이 없던 현장을 목격한 것이 컸는지, 겁과 공포가 마부의 얼굴에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상대가 나쁜 놈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한 그가 익숙할 리는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은 그의 태도를 낯설게 바라보지 않았다.
“말은 멀쩡합니까.”
“아… 날카로운 날 같은 것을 밟는 바람에 발굽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습니다. 당장 이동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 아, 죄송,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마부는 아르펠이 묻는 것에 땀까지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과한 두려움에 군기가 잡힌 것처럼 얼어 있었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주위를 기웃거리던 레리아나는 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마차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절뚝거리는 말의 다리 밑쪽에 피가 흥건했다. 로한이 아르펠을 보호하듯 가까이 끌어당김과 동시에, 상처를 살피던 그녀의 손끝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축성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손끝에서 힘이 화하게 퍼지는 것이 축성이라면, 레리아나가 쓰는 치유의 권능은 말 그대로 빛이 터지는 느낌에 가까웠다.
당연하게도 말은 금세 회복했다. 자신을 치료해 준 사람을 아는 것처럼 레리아나에게 머리를 숙여 가볍게 비비기도 했다. 동물을 꽤 좋아하는 성격인지, 피하지 않고 갈기를 쓰다듬어 주는 레리아나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피어 있었다.
“어디 아픈 곳 있어요?”
“…난 괜찮아, 로한.”
그러거나 말거나 로한의 시선은 여전히 아르펠을 향했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성력이 사용될 때 근처에 있었던 것이 신경 쓰였는지, 얼굴에서 걱정이 한가득 읽혔다. 그에게서 흘러들어오는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55
괜찮다는 답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로한은 한동안 아르펠의 몸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빴다. 레리아나가 말의 상태를 마저 살피고 되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아… 혹시 닿았어요?”
로한의 반응을 무엇이라 해석한 건지 그녀는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낯이 되었다. 로한과 달리 레리아나의 감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낯에도 비슷한 감정이 서려 있는 듯했다.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받는 상황이 어쩐지 낯설었다. 아르펠이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리아나 님.”
“시아, 다 끝냈어?”
“그렇긴 합니다만… 어떻게 처리할까요.”
마차의 뒤쪽에 홀로 떨어져 있던 카시아가 용건을 끝냈는지 빠르게 다가왔다. 한쪽 손에 반쯤 실신한 남자의 옷 끄트머리를 잡아 땅바닥에 질질 끌고 있는 채였다.
당연하게도 멀끔한 낯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어서, 내내 숨을 죽이고 서 있던 마부가 숨을 힉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카시아의 시선이 정확히 로한에게 향했다. 남자를 사로잡은 건 로한이었으니, 그에게 처분을 넘길 셈인 듯싶었다.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이던 로한이 마차를 눈짓했다.
“같이 데려가도록 하죠.”
“마차에 태우게?”
“저딴 놈이랑 아르펠을 같이 태우자고?”
로한의 미간이 파삭 구겨졌다. 당연히 ‘같이 타기 싫다’라는 의미로 물은 것이었던 레리아나는 어이없게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도 멀쩡하지 않은 놈이었지만 아르펠과 관련되면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로한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것에 감응한 그림자가 바닥을 기어가더니, 남자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기어코 몸을 집어삼켰다.
“가자.”
“아, 저게 있었지.”
네 사람은 남은 길을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
이미 달려온 거리가 제법 되었기에 목적지로 했던 마을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점심이라고 하기엔 제법 늦은 시간이었으나 해가 질 때는 멀었으니 시간도 넉넉했다.
마을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마부는 부리나케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반쯤 도망가는 것에 가까웠다.
“대신관께는 그가 이야기를 전해 줄 겁니다. 이만 가죠.”
그의 뒤를 쫓던 시선들은 아르펠의 말에 의해 거둬졌다.
그들이 도착한 마을은 신전과는 제법 동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마차로 이틀 정도 달려 이동한 거리였으니 이 마을에까지 황제의 눈이 심어져 있을 확률은 낮았지만, 주의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가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했다. 한 사람도 아닌 네 사람이 단체로 얼굴을 가리고 마을 한복판에 등장했으니 많은 사람의 시선을 앗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네 사람은 수군대는 사람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이 이 먼 마을까지 찾아온 이유는 지금부터 만날 사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거리가 엄청나게 멀지도 않고, 마을도 적당히 동떨어져 있는 편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으며, 의외로 용병의 발걸음은 자주 닿는 곳.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얼마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무슨 볼일인데?”
“가 보면 알아.”
목적지에 대해서는 들었어도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 듣지 못한 레리아나는 굳이 이 마을에 찾아온 이유를 잘 모르겠는 눈치였다. 카시아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이 마을에는 얼마 전 새롭게 용병 길드의 지부가 세워졌다. 그 덕에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음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네 사람의 목적지는 얼마 전 지어진 바로 그 용병 길드의 지부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당연하게도 체형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을 꽁꽁 가리고 있는 로브 탓이었다. 접수처에 있던 남자가 어색하게 일어났다.
“그……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살짝 긴장한 듯한 남자를 향해 아르펠이 패를 하나 내밀었다.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든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것은 당연했다.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후다닥 안쪽으로 들어가는 몸이 웬만한 기사 못지않게 빨랐다. 레리아나는 그사이 아르펠이 옷 안으로 집어넣은 패에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뭐길래요?”
“S급 용병패야.”
“……S급? 아르펠 S급 용병이에요?”
“받을 일이 있었어서.”
“와…….”
대접 받을 만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녀도 자라면서 용병 길드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왔었다. S급 용병이 제국에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았다.
알면 알수록 아르펠이라는 사람은, 아니 검은. 정말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바로 몇 시간 전에서야 아르펠이 검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레리아나는 도저히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움에 그냥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다시 돌아온 남자는 공손하게 고개까지 숙이며 네 사람을 안내했다. 안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몇 걸음 걷고 나서야 웅성거리는 소음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남자는 복도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걸어가 앞에 있는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느릿하게 열린 문 안쪽으로 방 안의 광경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널브러져 있는 온갖 책들과 서류였다. 종이 냄새가 짙게 밴 방이었다.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누군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 비해 피로함이 잔뜩 껴 있는 얼굴이었으나, 금세 빙글거리며 퍼지는 웃음은 아르펠이 기억하고 있는 예전의 모습과 비슷했다.
“처음 보는 손님을 데려오셨네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반쯤 내팽개친 렉시아가 말간 얼굴로 제 방에 들어온 손님들을 안내했다.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는 자리였다. 즉석에서 차를 우려 마신 적이 많았는지 티포트와 찻잔, 그리고 몇 가지나 되는 종류의 찻잎들이 밀봉되어 있었다.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봐주세요. 요즘 아주 바쁘거든요.”
로한과 아르펠은 태연하게 찻잔을 받았지만, 다른 둘은 어색함을 미처 떨쳐내지 못했다. “과일 차 좋아하세요?”라 묻는 렉시아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분은?”
“레리아나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호위기사인 카시아예요.”
찻잔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카시아는 진작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상당히 낯을 가리는 듯했으나, 렉시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군요. 전 용병 길드장 렉시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길드장……?”
홱. 내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로한을 향해 휙 돌아갔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레리아나 또한 용병 길드의 위상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용병 길드의 길드장이라니?
의문을 가득 담은 시선이 꽂혔지만 로한은 그녀의 의문에 아무런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이벨린은 바빠서 못 왔어요. 신분이 그러니 마음껏 돌아다니기가 어려워서요. 저번엔 운 좋게 잠행을 했을 때였고……. 다음에 황궁 근처로 갈 일이 있다면 안부는 전할 수 있겠네요.”
“…….”
레리아나의 입이 꾹 다물렸으나 로한을 흘끗거리는 시선은 한층 더 강렬해졌다. 아무리 쳐다봐도 시선조차 주지 않으니 결국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퍽 치는 것을 선택했다.
“뭐 하는 거야.”
“서,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니지?”
“뭐가.”
“방금 말한 그 사람 말이야!”
다 들리는 속닥거림이었다. 당연하게도 로한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한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실제로 아르펠이 로한에게서 느끼는 감정도 그랬다. 그의 감정에 감응할 수 있는 아르펠이었으니, 로한이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였다. 나름 렉시아에게 안 들리게 하고 싶었는지 로한에게 가까이 붙어 속닥거리는 레리아나와, 그런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 로한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는 여전히 로한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옅게 침잠한 보랏빛 눈에는 수많은 생각이 혼잡하게 얽혀 있었다.
한편, 두 사람의 행태를 제법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던 렉시아는 문득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 아르펠을 향해서였다.
“하하.”
미처 숨기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르펠과 로한은 여전했지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렉시아는 그들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정말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사람들이야.’
비록 얼마 가지 않아 아르펠의 불순한 시선에 웃음을 멈춰야 했지만 말이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화제를 바꾸려는 노력이 다분했다.
“아마 아가씨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을 겁니다.”
“맞다고요? 그럼 정말, 제국의……?”
“네. 풀네임은 이벨린 렌제스터, 제국의 황녀죠.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황제와 황태자의 이상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왔고, 그 탓에 저와 손을 잡았습니다.”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되는 것 아닙니까.”
내내 말이 없던 카시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렉시아를 바라보는 푸른색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선 속에서 한기가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레리아나의 손을 잡고 방을 뛰쳐나갈 기세였다.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달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시죠.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언젠가는 황제를 끌어내리는 일에 도움을 청하는 일도 있을 겁니다. 그것마저도 정치에 관여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저희와 뜻이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서로를 응시하는 눈빛이 결코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레리아나가 말리듯 카시아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그녀가 시선을 치우는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만약 협력하는 중에 레리아나 님을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곧바로 그만두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숨 막히듯 이어지는 정적은 카시아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레리아나는 그제야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주 긴 시간을 함께하고 있었지만 정색하는 카시아는 여전히 무서웠다.
56
“습격이라고요?”
둘의 신경전이 끝난 뒤에야 렉시아는 오던 길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였던 그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 심각한 기운을 풍겼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신전의 근처에 사람을 심어둔 모양이군요. 그가 주목하는 건 아마-”
“저겠죠.”
대신 대답하는 로한의 목소리는 지극히 덤덤했다. 그가 자신에게 주목하든 말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덩달아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한 놈을 포획해 왔으니 처리 부탁합니다.”
“뭐, 좋아.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를 않네. 렉시아는 로한을 향해 가볍게 눈을 찡긋하며 생각했다. 물론 그의 표정이 싸해지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곧장 발밑에 일렁거리기 시작하는 그림자를 발견한 렉시아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만신창이가 된 인영 하나가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온통 피로 뒤덮여 이목구비마저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태연한 낯으로 남자의 상태를 파악하던 렉시아가 흘끗 아르펠을 보았다. 당연히 아르펠이 손속을 봤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실제로 그를 벤 사람은 로한이었으나, 아무도 그의 오해에 관심이 없었고, 정정해 주지도 않았다.
잠시 테이블 아래쪽을 만지작거리는가 싶던 렉시아가 줄 하나를 당겼다. 곧이어 벌컥 문이 열리고 신경질이 가득 묻은 발걸음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또 왜 부르셨습니까? 예?”
“어라, 뭐지 그 말투?”
조금 익숙한 낯이었다. 렉시아의 연락으로 그를 만나러 갔을 때 안내해 주었던 남자였다. 그때에 비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얼굴이 된 걸 보면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듯했다.
“이번엔 잔심부름 아니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손님도 계시잖아?”
“하아……. 알겠습니다.”
“이 남자 데려가. 아래 감옥에 가둬 놓고.”
바닥을 구르는 피투성이의 남자를 보고 움찔한 것도 잠깐이었다. 결국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데인은 실신한 남자를 질질 끌고는 다시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평소 제가 장난을 많이 쳐서요. 저래 봬도 아주 귀여운 친구입니다.”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리아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상사로서는 굉장히 안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에서 시선을 떼어낸 카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미 한 번 심문했으나 크게 알아낸 정보는 없습니다. 황제가 개입한 건 확실해 보입니다만… 딱 한 명, 기묘한 사람이 있었다더군요.”
“기묘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조직적으로 암살이나 살인 청부 의뢰를 받는 비밀 단체라고 했습니다. 이번 의뢰를 맡기 얼마 전 신입이 하나 들어왔는데, 말을 못 하는 벙어리인 탓에 유독 교류가 적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이 줄줄이 이어졌다.
“전투 중 딱 한 명, 도망친 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미숙하여… 레리아나 님의 힘을 등에 업고도 그를 당해내지 못해 놓쳤습니다.”
“기묘한 사람이 그 사람인가 보네요? 확인은 확실히 하셨습니까?”
“죽은 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붙잡아 가까이 보여 주었으니 확실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 때문인지 곁에 있던 레리아나는 움찔했지만, 아르펠이나 로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대비에 잠시 헛웃음을 짓던 렉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실력자였군요, 그 사람.”
“다른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전 상대가 안 됐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맞붙는 내내 벽을 느꼈다. 만약 그 자리에 로한이 없어 도움을 바랄 수 없었더라면, 레리아나의 힘이 떨어져 권능을 전해 주지 못했더라면 이어질 결과는 뻔했다.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라면 빠르게 조사에 착수해 최대한 정보를 선점하는 게 맞았다. 렉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총 두 가지입니다.”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펴 보인 렉시아가 하나씩 접어가며 말을 이었다.
“첫째는 구원교의 몰락, 둘째는 황제와 구원교가 손을 잡았다는 정황에 대한 증거 확보. 원래라면 구원교의 지부를 찾는 일은 아주 힘들 예정이었는데, 두 분의 도움 덕에 손쉽게 알아냈어요.”
로한과 아르펠이 디오넬에게 소식을 전해 준 덕분에 햇수로는 3년 전부터 용병 길드와 파견된 신관들이 본격적으로 협력을 시작했다. 아주 일부만이 지부 색출에 참여했으나, 일반인들보다 망령의 힘을 빠르게 발견할 수 있는 신관의 도움을 받아 일의 진척이 빨라졌다.
“대비할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고 한 번에 몰아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여태껏 정보수집과 탐색을 위주로 진행했거든요. 이 자료를 보면…….”
수없이 많은 서류가 놓여 있는 탁자로 돌아가 안을 뒤적이던 렉시아는 이내 종이 몇 장을 든 채 돌아왔다. 하나 같이 지부가 있는 장소, 주변 마을의 특징이나 주의해야 할 점 등 세세한 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였다.
“워낙 거대한 집단인 만큼 여러분의 도움만으로는 어려움이 클 거예요. 여러분께는 중요해 보이는 거점을 위주로 부탁드려볼까 하는데. 괜찮으시죠?”
그의 손이 톡톡, 하나의 서류를 가리켰다. 수공업으로 제법 유명한 영지에 가기 위해 꼭 거쳐 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번성했다는 설명도 이 때문에 적힌 듯했다.
“아, 가는 길에 경비는 이걸 쓰세요.”
방긋 웃은 렉시아가 그들의 앞에 돈이 든 주머니를 얹어 주었다. 아르펠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그것을 챙겨 들었으나, 이런 일을 처음 겪어 보는 레리아나는 달랐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주머니를 풀어헤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직후,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신전에서 생활할 때는 항상 풍족한 편이었으니 돈을 만져볼 일이 없었다. 신전에 가기 전이라고 해 봤자 빈민가에서 산 그녀였기에 이런 액수의 돈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넣어드릴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레리아나가 홀린 듯이 주머니를 내밀었다.
***
“얼마 전부터 신관의 수가 조금 줄은 것 같았는데,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군요.”
마을을 나서면서 카시아는 그런 말을 했다. 더 이상 용무가 없는 마을이었기에 간단히 점심만을 해결하고 마차를 하나 빌려 이동하는 길이었다.
그녀처럼 신전에서 계속 지내며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를 이야기였다. 은근히 수가 줄고 있다는 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모양인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습니다.”
그새 로한이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아르펠은 작게 답했다. 맞닿은 손끝이 움찔 떨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디마디를 소중히 어루만지는 손길은 여전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렉시아와의 만남은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정신없이 흘러갔고, 굳이 긴 시간을 들여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했다.
뻔뻔하고, 능글맞고, 짜증 나는 인간. 그는 아르펠이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감정을 느끼게 한 장본인이었다. 비록 그 감정이 짜증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상과 별개로 그놈에게 일을 맡기면 어련히 잘할 거라는 감상도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신뢰일지도 모른다.
아르펠은 몇 번 렉시아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 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뢰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뿐이었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뚜렷한 ‘신뢰’를 느끼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명백하게 달랐다. 새삼스러운 자각이었다.
“무슨 생각 해요?”
그리고 로한은 귀신같이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가 로한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미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꽤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아서.”
순종적인 얼굴을 하고 그의 말을 기다리던 로한은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방금의 평가가 렉시아의 능력이 아닌,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는 것쯤은 금방 깨달았다. 이내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신뢰할 만한 사람임은 로한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같은 표현을 입에 담는 아르펠에게 수긍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열한 욕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도 전 별로예요.”
잠시간 변화가 없던 아르펠은 끝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은, 로한 자신의 미소와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
로한은 간혹 두려움을 느꼈다. 계약을 통해 평생을 묶여 있게 된 둘이지만, 유일하게 걸리는 점이라면 아르펠이 그의 감정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열하고, 비틀리고, 또 추잡한 욕심을 선명하게 읽어낼까 무서웠다. 놓아 주지 않을 테지만 싫다며 피하는 그를 본다면 생각보다 더 많이 슬플 것 같았다. 애써 떠오르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로한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투정 같은 한마디에도 아르펠은 착실히 대답했다. 고운 손가락이 로한의 볼 위를 더듬듯 쓸어내렸다.
아르펠은 그 감정을 완전히 읽지 못했다. 그가 느끼는 건 감정의 큰 결일 뿐이지, 어째서 그런 감정을 가지는가 따위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감정에 감응하는 것일 뿐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게 쏟아지는 애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투정을 부리면서도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표정이 과거의 어느 때를 닮은 탓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제는 기억의 한쪽에 묻혀 있는,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어릴 적 몇 번이고 그런 아이에게 혼자 두지 않겠다고 속삭였던 것처럼, 아르펠은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읊조렸다.
로한이 그를 먼저 버리지 않는 이상, 아니, 버린다고 해도. 아르펠이 로한의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는 절대적이며 변하지 않는 섭리였다.
버리길 원한다고 해서 순순히 떨어져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마음속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이기심이 흩어져 모습을 감췄다.
57
두 번째로 향하는 마을은 비교적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문제는 그들이 애매한 시각에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바깥을 바라보던 카시아가 앞쪽에 있는 마부에게 물었다.
“근처에 눈을 붙였다 갈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근처에 괜찮은 곳이 하나 있으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마차로 여행길에 나설 때는 늦은 밤 야영을 하는 일이 제법 많았다. 카시아의 질문이 꽤 익숙했는지 마부는 곧장 대답하곤 능숙하게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가 마차를 멈춰 세운 곳은 삼면이 나무로 둘러싸인 넓은 터였다. 마차를 세울만한 공간도 충분하고, 바깥에 나와 야영을 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장소였기에 넷은 군말하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레리아나 님, 마차에서 주무시겠습니까?”
“나도 밖에서 잘래.”
나만 그러기 싫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결국 마차는 그 누구의 취침 장소도 되지 못한 채 공터의 한구석에 세워졌다.
마부에게 야영에 필요한 간단한 물건들을 빌리자 그럭저럭 괜찮은 잠자리가 되었다.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시간이 늦자 하나둘씩 눈을 붙였다. 보초를 번갈아 가며 서는 게 어떻겠느냐 카시아가 제안했지만 아르펠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주 작은 기척에도 눈을 뜰 수 있었으니, 자지 않으면 피로감을 느끼는 셋은 잠을 청하는 게 나을 거라 말했다. 그 의견에 굳이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편안하지는 못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잠자리에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르펠의 눈이 번쩍 뜨였다.
“…….”
아주 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상 쉽게 놓칠 만한 울음소리.
뒤이어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났다. 주섬주섬 옷을 챙긴 누군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누워있던 탓에 부스스한 금색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못할 정도로 급한 기색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펠은 이내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다른 이들이 자고 있나 확인하기 위함인 듯, 레리아나가 고개를 홱 돌린 탓이었다. 떨림 하나 없이 안정적인 숨결을 내뱉는 것에 잠을 자고 있다고 판단한 건지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아르펠은 눈을 떴다.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키고, 옆에 꼭 붙어 잠을 자고 있던 로한을 내려다보았다.
“로한.”
“……들켰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로한은 곧장 반응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레리아나의 움직임에 잠에서 깬 듯 졸린 기운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아르펠을 따라 몸을 일으킨 그가 레리아나가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자코 있는 로한을 향해 아르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에 담긴 미묘한 걱정을 읽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가 보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일 테지. 아르펠은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 레리아나가 향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내내, 카시아는 절대로 눈을 뜨지 않았다.
‘…맡기는 건가.’
뛰어난 기사인 그녀가 레리아나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는 것은, 레리아나의 상태가 이상한 이유가 카시아, 그녀에게서 비롯된 문제임을 유추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지금 레리아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고민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라고 여겼겠지.
“…아.”
멀지 않은 곳에서 둘은 바위에 홀로 기대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레리아나를 발견했다.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고 움직인 터라 풀이 밟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밤하늘 아래에서도 붉어진 눈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아르펠은 그런 레리아나를 보며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적어도 로한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았다. 선명한 의지에 감응해 그의 외견이 순식간에 변했다.
“…로한? 아르펠을 왜…….”
“대련할까.”
“뭐?”
어느새 검으로 변한 아르펠을 로한은 단단히 쥐었다. 요요히 빛나는 새까만 검신을 바라보는 레리아나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주춤거림에 옅은 한숨과 함께 덧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성검 꺼내서 일어나.”
“…….”
“약해서 화난 거잖아, 너.”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레리아나가 비로소 움직였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의지에 감응한 성력이 손끝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 하나가 금세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약하다고 생각해?”
“알고 싶으면 나랑 대련해 보면 되겠네. 이번엔 나도 안 봐줄 테니까.”
그녀의 읊조림에 로한은 태연히 대꾸했다.
여태껏 신전에서 함께 수업을 들은 둘이었으니 대련을 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력 차가 눈에 띄게 벌어지고 난 이후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한다고 해도 로한은 항상 레리아나의 실력에 맞추어 검을 나눴다.
레리아나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을 본인이 시인하자니 기분이 마냥 좋을 리가 없었다. 검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의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을 기점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권능을 쓰지 않고 오로지 검만을 이용한 대련이었으나, 한 합을 나누자마자 레리아나의 표정은 빠르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무거워……!’
분명 대검을 쥔 것은 이쪽이었다. 그런데도 묵직하게 떨어지는 힘을 온전히 부담하기가 어려웠다. 성력으로 몸을 강화했는데도 불구하고 검을 쥔 쪽의 손목이 찌릿했다.
“윽…!”
레리아나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던 로한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으려던 검의 궤도를 틀었다. 유려하게 공중을 노닐던 검이 한순간 가속되더니 그대로 레리아나의 옆을 향해 치고 들어갔다. 변칙적인 움직임에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음에도 반응하는 속도가 느렸고, 결과는 그 순간 정해졌다.
검을 걷어내는 것 같은 움직임에 레리아나는 손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제대로 공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검을 바라보는 눈길이 허망했다. 주먹 쥔 두 손은 상당히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이번엔 네가 공격할래?”
그렇게 다시 한번 시작된 대련이었지만.
“허억, 헉…….”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친 숨결을 힘겹게 내뱉는 레리아나와는 달리, 로한의 숨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공격이었으나, 레리아나의 검은 로한에게 도저히 닿지 않았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건지, 그녀의 표정은 여러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졌어.”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순순히 졌노라 이야기를 내뱉은 레리아나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그 자리에 함께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는 행태를, 로한은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카시아가 나 때문에 죽는 꿈을 꿨어.”
“개꿈이네.”
“맞아, 개꿈이지.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정말 그렇게 돼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초조했나 봐.”
몸을 움직이니까 좀 낫다.
푸스스 웃음을 흘렸지만 따라 웃는 이는 없었다. 그저 고요히 응시해 오는 시선뿐이라, 레리아나의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가도 차차 가라앉았다. 애써 끌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점점 힘을 잃었다.
꾹 다물고, 잘근 깨물기까지 하는 입술에는 여러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로한. 넌… 왜 그렇게 강해? 어떻게 강해졌어?”
“…….”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금세 흩어질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로한이 그 중얼거림을 못 들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까딱인 그가 아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그 이유부터 찾아.”
“이유?”
“강해지고 싶은 이유.”
“…넌 뭔데?”
“아르펠을 지키는 거.”
우울했던 얼굴에 금세 찬물이 들이 부어졌다. 확 깨는 표정을 짓고 만 레리아나는 결국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어떻게 변하는 게 없냐…….”
그녀는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쪽에 떨어져 있는 대검까지 착실히 주워서는 로한에게 대충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열심히 생각해 볼게. 고마워.”
퉁명스러운 어투였지만 그녀가 부끄러워 그런다는 것쯤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로한은 멀어지는 레리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가벼이 검을 두드렸다.
“아르펠.”
그 부름을 듣자마자 아르펠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아르펠의 시선은 어색하게 로한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몸을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팔을.
“…로한, 팔은.”
아쉽다는 듯 가벼운 입술의 삐죽임이 함께 하기는 했지만, 순순히 팔이 떨어졌다. 아르펠은 가까스로 이상한 기분을, 그리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방금 전 보았던 레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나마 나아졌다. 고민이 역력하던 것을 보니 머지않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작 속 레리아나에게는 이런 묘사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로한을 돕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인물에 그쳤다. 권능을 쓰는 묘사도 누군가 다쳐 도울 때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검을 잡는 일이 없었다.
‘…지금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로한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특별한 감상을 가지지 않는 아르펠의 입장에서는 꽤 큰 변화였다. 물론, 지금의 레리아나가 로한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저 잘했죠?”
아르펠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로한이 고개를 기대왔다.
피부가 맞닿는 감각에 손끝이 움찔 떨렸지만, 활짝 웃고 있는 이면에 미세한 질투가 새어 나오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던 아르펠은 말없이 그의 머릿결을 정돈해 주었다. 바로 직전까지 격한 움직임을 반복했던 탓에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응, 잘했어.”
나직한 한 마디에 솔솔 피어오르는 감정은 행복이었다. 레리아나까지 떠난 바람에 고요한 숲에 단둘이 남았기 때문일까. 유독 그것이 달큼하게 느껴졌고, 기분이 고양되었다.
아마 다른 누구도 아닌 로한의 행복이기 때문일 거라고, 아르펠은 그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늦추지 않으며 생각했다.
정말로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58
내내 눈을 뜨지 않고 자는 척을 했던 카시아는 아침부터 레리아나의 상태를 꾸준히 살폈다. 레리아나는 계속 그 ‘이유’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듯했지만, 어제보다는 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서야 카시아는 레리아나가 멀리 있는 틈을 타 로한과 아르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왔다.
그 뒤로 두 번째 마을까지의 이동은 상당히 순조롭게 이어졌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해가 하늘의 정 중앙에서 살짝 기울어져 있을 무렵이었다.
“일단 밤까지 기다려 볼 거지?”
눈부신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레리아나가 문득 로한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렉시아가 건네준 보고서에는 이 마을에 괴이한 소문이 돈다고 했다. 밤마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데, 마을과 동떨어진 숲길을 홀로 걸으면 그 짐승이 잡아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종된 사람이 있다는 증언이 제법 많았다. 몇몇 용병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을 찾았으나, 짐승의 흔적은 찾지도 못했다고 했다.
이상현상이 관찰되는 시간은 밤이었으니, 해가 쨍쨍한 지금은 그 소문을 조사하기에는 무리였다. 거기다 야영을 하느라 씻지 못한 몸이 찝찝함을 호소해 왔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로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시아는 주변을 훑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 여관의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두 분, 방은 같이 쓰실 겁니까?”
“네.”
방을 정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로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돈주머니를 바라보던 카시아는 잠깐 망설이던 것도 잠시, 가장 좋고 넓은 방을 선택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접수처의 남자에게 이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들떠 보였다.
짧은 식사와 목욕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따뜻한 물 속에 푹 잠겨 있다 와서인지 열기를 뿜어내는 몸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는 몸짓이 익숙했다.
비싼 값을 하는 듯, 손 아래에 닿는 침대는 성인 두 명이 자기에도 충분히 넓었고 부드러웠다. 살짝 열어 놓은 창틈 사이로 솔솔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빨리 씻었네요?”
로한이 뒤따라 들어온 것은 금방이었다. 마찬가지로 훈기를 뿜어내는 몸을 바라보다가, 어쩐지 시선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아르펠은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제가 머리 말려 줘도 돼요?”
“…머리?”
“네. 저 계속 말려 주고 싶었어요.”
물론 아르펠이 그런다 해서 아랑곳할 로한이 아니었다. 곧장 아르펠이 앉은 곳에 몸을 딱 붙여 앉고선 뜨거울 정도로 시선을 던졌다. 볼이 간질간질할 정도였다.
무심코 손이 움직여 로한에게 수건을 건넸다. 간절히 바란다는 듯 반짝거리는 로한의 눈과 마주친 순간 어쩔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은 항상 이 길이네요.”
“검이니까.”
“계속 말리기 편할 테니까 괜찮지 않아요? 전 매번 잘라야 해서.”
“이제 안 잘라도 되잖아.”
“아… 그렇네요.”
20살이 되고 난 직후 아르펠과 계약을 한 이상, 그의 몸은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앞으로 머리카락이 길어질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내내 머리가 길면 자르기를 반복해서인지, 아직은 그 사실이 못내 어색한 모양이었다.
머릿결을 수건으로 닦고 조물거리며 물기를 빼는 행동은 퍽 조심스러웠다. 물기를 닦아내기를 몇 번 반복했을까. 적당히 마른 듯한 머리는 결대로 흩어져 살랑이고 있었다.
“다 됐어요.”
생글 웃는 얼굴이 상당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흘끗 로한을 바라보았다가 그가 목덜미에 걸치고 있는 다른 수건 하나를 자연스레 빼낸 아르펠이 그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네 차례야.”
“음, 전 괜찮은데.”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이 이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정말 수줍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다. 곱게 휘는 눈가나, 살짝 발개져 있는 눈 끝, 옴폭 패인 보조개에, 예쁜 호선을 그리는 도톰한 입술까지.
아르펠은 왠지 모르게 울렁이는 듯한 가슴을 익숙하게 무시했다. 자신에게 해 준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로한의 머리를 가만히 말려 주기 바빴다.
“오늘 잘 거예요?”
“자야지. 안 자려고 했어?”
“밤에 울음소리가 들린대서요.”
“내가 깰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졸음을 느끼지도 않고, 잠든다고 해도 조그마한 기척 하나에 금방 눈을 뜰 수 있는 아르펠이었다. 자는 척, 가만히 눈만 붙이고 있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암묵적인 휴식시간이 된 오후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아르펠은 그 전까지 로한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고, 가벼운 군것질도 했다. 마치 어릴 때가 생각나는 듯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관에 되돌아올 즈음에는 하늘이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로 둘은 잠자리에 누웠고, 숨결이 안정되어 가며 차차 잠에 빠지는 로한을 지켜보던 아르펠은 그저 눈을 감고 있으려고만 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몇 시간 뒤, 아르펠은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아르펠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스스로가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한껏 복잡한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고 말았다.
“……로한?”
왜 잠이 든 거지. 대체 언제?
그런 의문을 생각하기 전, 아르펠은 기척의 주인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막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로한이었다.
“…아르펠. 깼어요?”
“어디 가?”
“화장실이요.”
아르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림자, 즉 어둠에 가까운 권능을 가진 아르펠은 밤하늘 아래에 있더라도 모든 것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아르펠과 계약을 하게 된 로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한의 얼굴에 미묘한 열이 돌고 있었다. 평소보다 피부가 붉은 느낌이 만연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것을 살피다가 되물었다.
“이 밤중에?”
오고 가는 말소리가 금세 사라졌다. 바람결을 타고 선명히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물결치는 수많은 애정 속에서 한 자락의 당혹감이 묻어 나왔고, 또…….
“…정말 알고 싶어요?”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몇 발자국 걷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로한의 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르펠은 물러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주춤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주 보는 눈이 잘게 떨렸다.
대답이 없는 것을 긍정으로 알았는지, 로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내 작은 속삭임이 뒤따랐다.
“꿈에서 아르펠이 나왔거든요.”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로한의 손끝이 아르펠의 얼굴에 닿았다. 소중한 것을 보듬는 것처럼 볼을 훑고 내려갔으나, 애정과는 양상이 다른 짙은 감정이 흔적을 남기듯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저 몽정했어요, 아르펠이 나오는 꿈 꾸면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감정의 이름은 욕망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아르펠을 바라보며, 로한은 느릿하게 손을 뗐다.
“그럼 저 다녀올게요.”
태연하게 화장실로 향하는 로한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르펠은 그를 고정하고 있던 실이 끊긴 것처럼 침대 위로 털썩 앉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온갖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 도저히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자꾸만 가슴이 울컥거리며 묘한 감정을 토해냈다. 열이 도는 볼을 차게 식은 손으로 문질렀다.
‘…로한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말문이 막혔고,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와중에 로한이 떨어뜨리고 간 한 줌의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게 훤히 보였다. 그게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기를 반복했다. 지금만큼은 아르펠에게 있어서 로한이 세계 최대의 난제였다.
---!
순간, 묘한 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혼란 속에 내던져져 있던 아르펠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이건…….”
다시 한번 같은 소리가 쏟아졌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낯이 심각해진 로한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르펠. 들었어요?”
“…그래.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야.”
“일단 우리끼리 가 봐요.”
근처의 방에서 머무는 레리아나와 카시아에게 생각이 닿았지만 당연한 듯 말해 오는 로한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브 하나를 대충 챙겨 입고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여관을 뛰쳐나왔다.
당연히 창문을 통해서였다. 제법 큰 탓에 성인 남자 하나쯤은 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넓이였기 때문이다.
소리의 흔적을 따라가는 걸음들이 재빨랐다. 방금 전 들은 소리는 이곳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짐승의 울음소리’가 확실했다. 다만….
“…소리가 미묘하게 달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아르펠이 감상을 내뱉었다. 로한 역시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들은 소리는 짐승의 울음보다는…… 그래. 사람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짐승처럼 처절하게 울부짖는 누군가의 비명.
몇 번 더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달리던 발걸음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착각이 아니라면, 아니, 애초에 그들이 동시에 착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땅 아래에서… 들리고 있네요.”
로한이 작게 침음을 삼켰다. 땅 아래라면 지하라는 뜻이고, 길 한 가운데에서 멈춰 섰으니 이 지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입구를 찾아야만 했다.
번거롭다는 기색이 가득한 로한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아르펠은 급격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이놈들은 지하를 좋아할까.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고방식이었다.
***
결국 두 사람은 지하의 장소에 대한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르펠은 다시 잠들기 직전까지 오늘 느꼈던 감정을 곱씹었지만, 그럼에도 잠은 왔고, 둘은 함께 아침을 맞았다.
“깨우지도 않고 그냥 갔다고!”
“…레리아나 님. 제가 깨웠습니다.”
“아, 맞다…….”
아침을 먹던 와중 버럭 소리친 레리아나가 머쓱하게 웃었다.
전날 밤,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카시아는 레리아나를 깨웠지만 그녀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로한과 아르펠, 두 사람에게 알리려 했지만 이미 그들의 방은 비워진 지 오래였다.
“뒤늦게 쫓아가기가 애매하고, 레리아나 님을 홀로 둘 수 없어 자리를 지켰습니다. 죄송합니다.”
“딱히 죄송해할 필요 없습니다.”
“맞아, 시아. 내가 잘못한 거지….”
“알고는 있네.”
대신 대답한 로한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열이 받았는지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잘못이 있었기에, 레리아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
“아마 그건 짐승이 아닌 사람의 소리일 겁니다.”
흘끗 로한을 살핀 아르펠은 그 대신 어젯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소리는 명백히 사람의 것이었다는 사실부터 소리의 진원지가 땅속이었고, 그러므로 마을의 어딘가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을 거라는 것까지.
“마을이 좁지는 않으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군요.”
무척이나 넓은 곳은 아니었지만,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찾기 위해 세세하게 뒤져보아야 한다면 이 정도 크기도 아주 넓었다.
결국 세 사람과 하나의 검은 그날 하루를 통째로 지하 통로의 입구를 찾는 데에 소비하고 말았다. 물론 허탕이었다.
59
렉시아가 건네준 보고서에 적혀 있던 지부의 위치, 그리고 들어가는 방법은 현재 그들이 찾고 있는 장소와는 전혀 달라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래에 참고 사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에 대한 것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함’이라고.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한 지 이틀째. 레리아나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정말 이 마을에 있는 거 맞아?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데.”
“마을에서 못 찾으면 밖도 찾아봐야지.”
머지않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싫다고 외치는 얼굴이었다. 물론 로한은 그런 변화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온 신경이 아르펠에게 쏠린 지 오래였다. 그의 손이 분주히 아르펠의 그릇 위를 왔다 갔다 했다.
“…로한. 됐으니까 그만 줘도 돼.”
“그치만 아르펠은 너무 말랐는걸요…….”
“난 먹어도 살 안 쪄.”
“그래도요.”
갈 곳 잃은 숟가락이 잠시 눈앞에서 흔들렸다. 애원하는 듯한 눈을 마주하니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식사 때도 이미 반복되었던 일이었다.
“난 먹어도 살 안 쪄…? 와, 부럽다.”
맞은편에 있는 레리아나가 혼이 빠진 눈으로 몇 번 중얼거렸다. 카시아마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한 바람에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그게 사뭇 억울했는지 아예 수프를 그릇째로 들고 마셨다. 고개를 치켜든 바람에 스르르 뒤로 넘어가는 로브를 카시아가 붙잡았다. 사람의 눈길을 잘 사로잡는 반짝이는 금발이 완전히 드러나기 직전이었다.
우당탕.
먹고 마시느라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틈에서 무언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점과 술집을 겸하는 곳이다 보니 거하게 취해 넘어지는 사람이 꽤 많았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의 시선은 분명히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평소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로한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바람에 의자를 넘어뜨린 남자였다. 하얗게 질린 낯은 물론이고 후들거리며 떨리는 다리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 그의 시선은 정확히 레리아나에게 향해 있었다.
“…하아.”
“내, 내 탓이야?”
“그럼 누구 탓인데.”
“……미안.”
남자는 급하게 계산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빠르게 도망치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에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은 카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나오십시오.”
남자가 나간 방향을 뒤따르는 발걸음이 산뜻했다. 비명이 울려 퍼진 것은 식사를 빠르게 마무리한 셋이 값을 제대로 치르기도 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꽤 험하게 붙잡혔는지 이리저리 흙투성이가 된 남자는 허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배를 곯는 일이 많은지 볼이 살짝 패일 정도로 말랐으며, 체력이 달리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겁이 많아서인지 필사적으로 달렸던 다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제법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멈칫한 건 레리아나뿐이었다. 아르펠도 로한도, 그의 모습을 보며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이에게 베풀어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레리아나 님의 얼굴을 보고 도망치지 않았나. 무슨 꿍꿍이지?”
“꾸, 꿍꿍이라뇨.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전 그저, 당신들이 시, 신관인 줄 알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끝내는 속삭이는 듯한 크기로 줄어들었으나, 이 자리에서 그 목소리를 못 들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카시아의 미간이 파삭 구겨졌다. 제압하고 있는 힘이 강해진 것도 당연했다.
“파, 팔… 악!”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눈그늘이 짙은 눈매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얼굴에 묻어 있는 흙먼지가 눈물에 닿아 함께 쓸려내려 간 탓인지, 턱 끝에 방울져 맺힌 것들은 색이 탁했다.
빤히 그를 바라보던 로한이 느릿하게 몸을 숙였다. 느리게 뻗어진 손가락이 남자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 가벼운 반복에 불과했으나 정작 그것을 당하고 있는 대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새파래지고 있었다.
“신관인 줄 알고 도망갔다 하셨습니까.”
“예, 예…!”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
꿀리는 게 없으면 도망가면 안 되지. 곱게 휘어진 눈매에 섬뜩함이 고였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남자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아르펠의 시선 또한 찼다. 제국의 사람들은 신관을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성력과 마력을 얻는 것이 신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제국을 위협하는 망령에게서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 신관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레리아나의 얼굴만을 보고 그녀가 신관이라 유추했으며, 그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도망쳤다.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는 것이 걸리기는 했으나 의심을 거둘 이유는 되지 못했다.
결국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토로했다.
“어릴 때 아, 아버지께선 신관이 나쁜 놈들이라 하였습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와서, 저도 모르게 그만…….”
“…우리가 신관인 걸 안 이유는?”
“…….”
“답해라.”
“크흡! 답, 답하겠습니다. 답할게요! 파, 팔을…!”
입을 다물 낌새를 보이자마자 팔이 꺾였다. 반쯤 엉엉 울며 소리치는 것에 카시아가 천천히 손에서 힘을 거뒀다. 남자의 시선이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나서.”
“크게 말하십시오.”
“여, 여성분이, 너무 빛이 나서……!”
순간 침묵이 흘렀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정이 거세되어 있던 로한의 눈에 천천히 빛이 돌아왔다. 그마저도 황당함이라는 감정에 가까웠다.
내내 말이 없던 레리아나는 삐죽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아르펠은 흘끗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빠르게 외면하고 말았다.
“…레리아나.”
하지만 입은 착실하게 그녀를 불렀다. 바닥에 제압된 남자를 바라본 아르펠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을이 궁금하다고 했었지.”
“마을? …아. 맞아요! 볼거리가 많은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구경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지 뭐예요.”
레리아나는 잠깐 눈을 크게 떴으나 머지않아 아르펠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한쪽 눈을 찡긋대는 태도가 다분히 짓궂었다.
아르펠의 시선은 ‘이게 당신의 면죄부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침을 꿀꺽 삼킨 남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 잘할 수 있어요!”
그를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던 카시아가 묘한 표정으로 아르펠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을 가늠하듯 말이 없던 것도 잠시, 몸을 억누르고 있던 무릎을 떼고 팔을 반쯤 뒤틀어 버리려고 했던 기색을 거뒀다.
“영 믿을 수 없는 놈이니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레리아나 님.”
“설마 내가 시아를 안 데려가겠어? 자, 어서 소개해 주세요!”
“하,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당장.”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소녀라고 경탄할 정도로 화사한 눈웃음을 짓고 있던 레리아나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이 자리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껴버린 남자는 쐐액, 소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했다간 뒤쪽에 서 있는 기사에게 이번에야말로 팔을 뽑힐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멀어지는 레리아나와 카시아, 그리고 도축장에 끌려가는 듯 얼굴이 퍼렇게 질린 남자까지 번갈아 가며 시선을 주던 로한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아르펠과 맞닿은 눈이 빙그레 휘었다.
“같이 가요.”
손이 덥석 잡혔다. 심지어는 꽉 붙들고 놓지 않겠다는 양 단단히 깍지까지 껴 버려서, 잠시 잡힌 손을 말없이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한은 이미 아르펠의 생각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잡힌 손을 살짝 끌어 앞서 걸어가는 것에 아르펠은 순순히 그를 뒤따랐다. 비스듬하게 시야에 로한이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알 수 없이 묵직해지기를 반복했다.
“아까 그 남자, 집이 어딘지 아시나요?”
둘이 향한 곳은 조금 전까지 식사를 하고 있던 식당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자를 향해 로한은 살짝 로브를 걷어 보였다.
따뜻한 색감이 한가득한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쏠렸다. 타인이 쉽게 호감을 느낄 만한 미소였다. 홀린 듯이 로한을 바라보던 그녀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두 볼이 미묘하게 붉어진 채였다.
“아, 알 법하네요. 그놈한테 돈 빌려주셨죠?”
그들의 계산을 도와주었던 여자는 로한에게 호감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 굴었다.
“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서 거금을 드렸는데… 갚지 않으시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하고 놓쳐 버렸거든요.”
“마을 외곽 쪽에 살아요. 나가서 곧장 오른쪽으로 꺾고 쭉 걸어가다 보면 파란 지붕의 빵집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골목길로 들어가세요. 10분 정도 걸으면 동떨어진 집 하나가 보일 거예요.”
생각보다 더 자세한 정보까지 내놓은 그녀가 작게 웃어 보였다. 수수한 얼굴에 가까웠으나 수줍게 미소를 머금으니 싱그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시간이 되신다면 차 한 잔이라도….”
같이 마실까요?
말이 끝이 나기도 전이었다. 단호하게 거절하되 얻은 정보가 있었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할 생각이었던 로한은 강하게 당기는 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상대가 아르펠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몸에 힘을 풀었다. 순순히 끌려나간 로한은 결국 식당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당황한 여자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로한은 깔끔하게 관심을 끊었다. 어차피 더 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아르펠이 수백 배, 수천 배는 더 중요했다. 의아함을 가득 품고 내려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걱정까지 깃들었다.
“아르펠? 어디 안 좋아요?”
“……아니.”
“그럼….”
“웃지 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로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평소와 달리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려는 듯, 로한의 시선이 아르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제가 다른 사람한테, 웃는 게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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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른 사람한테, 웃는 게 싫어요?”
말문이 막힌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던 로한이 아르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르펠은 잠시 시선을 줄 뿐 조심스럽게 얼굴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말리지 않았다. 볼에 살포시 내려앉은 손끝의 감촉이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응.”
“왜요? 왜 싫어요?”
“모르겠어. 그냥… 싫어. 하지 마.”
아르펠과 함께 한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지만, 로한은 단 한 번도 그를 어른이 아니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로한에게 있어서 절대적이고, 그만큼 커다란 존재감을 가진 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아르펠은 마치 안개 속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한 발짝조차 내딛기 힘든 황무지에 홀로 뚝 떨어진 것처럼. 겁을 먹은 아이를 닮아 있었다.
어려서 아르펠의 보호를 받았던 시간이 길어서일까. 마치 입장이 반대된 것만 같아 벅찬 기분까지 들고야 말았다.
“괜찮아요. 몰라도 돼요.”
천천히 알아가요, 같이.
로한이 내뱉는 말은 마치 자장가처럼 달콤하기도,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상냥하기도 했다. 그의 눈에는 진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고, 아마 아르펠이 무어라 느끼던 그 눈빛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같이 알아가자는 목소리가 귓가에 연신 맴돌았다. 말이 없던 아르펠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컸구나.”
“18살은 진작 넘었으니까요.”
잠시 미간이 좁혀지긴 했으나 곧 짓궂은 미소로 이어졌다. 새삼스러운 감상이라는 듯 책망하는 어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펠은 진심이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믿음까지 차올랐다. 확신을 담고 있는 듯 또렷한 금빛의 눈매가, 찾아낼 수 있을 거라며 다독이는 목소리가 어쩌면 자신을 이끌어 줄지도 모른다고.
“이제 안 그럴게요. 약속할까요?”
먼저 손가락을 내민 것은 아르펠이었다. 결국 한가득 웃음을 터뜨리고만 로한도 빠르게 새끼손가락을 감았다.
“아까 들은 곳으로 가볼 거죠?”
서로를 꼼꼼히 엮은 새끼손가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한은 아르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자연스레 붙잡혀 버린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르펠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향할수록 동떨어져 있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주점이나 다른 가게들과도 지나치게 떨어져 있었고, 다른 집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불이 꺼져 있어 새까만 집안은 그가 홀로 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문단속은 잘 안 할 것 같긴 했지만…….”
혹시 몰라 가볍게 돌려본 문고리였으나 삐거덕거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꼬질꼬질했던 얼굴을 떠올린 로한이 혀를 찼다.
정해진 공간 외에는 치우지 않는다는 것이 티가 났다. 바닥은 어느 선을 기점으로 바깥쪽에 먼지가 도톰하게 쌓여 있었다.
“다른 곳부터 먼저 보자. 찾은 게 있으면 말해.”
먼지 바닥을 밟으면 당연하게도 자국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려 있기야 했으나, 몰래 들어온 것을 들켜서 좋은 일이 없을 것은 자명했다.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잠시 못마땅해 보였던 로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는 점만큼은 그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온 아르펠은 안쪽의 광경을 찬찬히 살폈다.
성인 남자 하나가 자기에는 빠듯한 침대 하나가 벽 쪽에 딱 붙어 놓여 있기는 했으나 위로 먼지가 가득했다. 바닥이나 책상 위 등 손이 닿는 부분만 청소해 놓은 것이 티가 났다.
‘…다른 사람의 방이군.’
먼지가 쌓인 것을 보면 오랫동안 들추지 않았을 것이다. 침대를 쓴 흔적이 없었으니 이곳에서 자긴 무리였다. 흥미를 잃은 눈동자가 곧장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작은 책상과 오른쪽에 놓인 책장 하나. 책은 별로 없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아르펠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넓은 칸에 달랑 하나 놓여 있는 작은 책이었다.
“일기……?”
슬쩍 들춰 본 겉표지에 ‘빈트’라는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일반적인 책에 적혀 있을 문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은 다른 책들과 똑같았다. 안의 내용을 살펴보려면 하는 수 없이 먼지를 털어내야 했다. 그 사실이 못내 거슬렸으나 방법이 없었다.
일기장을 들어 침대 위에 먼지를 털어낸 아르펠은 망설임 없이 겉표지를 넘겼다. 손끝에서 종이 가루가 바스러졌다.
“뭐 찾았어요?”
“로한.”
어깨를 짚는 손에 아르펠의 시선이 흘끗 그에게 향했다. 진작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탓에 로한을 향해 뻗는 손길도 자연스러웠다. 콧잔등에 내려앉은 먼지 한 올을 털어내 준 아르펠이 일기장을 펴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찬찬히 일기장을 훑어내렸다.
일기장 속의 남자에게는 나이가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내는 오래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과 슬픔이 글 속에 절절히 녹아 있었다. 지나치게 쭈글쭈글한 종이도 있는 걸 보면 울면서 글을 적은 적도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는 눈으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지만 건질 것이 없었다. 해봤자 방금 전 만났던 남자는 이 일기장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
“아까 말했던 ‘아버지’인 걸까요?”
“아마.”
그들이 남자의 집에 대뜸 찾아온 것은 신관을 유독 싫어했다던 그의 아버지가 구원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필이면 구원교의 흔적이 남은 이 마을 안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걸렸다.
“이거 봐.”
“이건…….”
일기장의 마지막 장, 일전에 쓰였던 일기보다 급한 느낌이 다분한 필체가 남아 있었다.
「내가 연구한 모든 것을 이 마을의 하나뿐인 책방에 남긴다.」
그다음으로는 의미를 모를 글귀가 이어졌다.
「아기곰은 항상 한쪽 손으로만 식사를 한다. 그로부터 8시간 후, 남긴 콩알을 위로 쌓으니 어느샌가 해가 지고 있었다.」
그게 끝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아르펠이 뒷장을 넘겨 보았으나 그 뒤로는 백지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펠이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일단 나가자.”
거침없이 맨 마지막 페이지를 찢은 건 덤이었다. 놀란 듯 로한이 손을 붙잡았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걸릴 수도 있어요.”
“일기장의 안을 살필 정도면 위쪽의 먼지를 털었다는 걸 눈치챌 정도로 눈썰미가 좋다는 말일 테니 별 차이 없을 거야.”
일기장의 위와 다른 책들의 위를 번갈아 가리키는 손짓에 로한은 그의 말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열기 전에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냈는지 다른 책들은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는 것과는 달리 일기장만 깨끗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 책을 가지런하게 놓은 둘은 곧장 집을 나섰다. 달라진 게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나가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역시 닫았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일기장의 마지막 장에 적혀 있던 책방이었다. 비록 시간이 너무 늦어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듯했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안을 뒤져보는 것은 내일로 미뤄야 했다.
남은 단서로 더는 갈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둘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그들이 묵던 여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의외로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돌아와 있었다. 시간이 워낙 늦어 문을 연 곳이 늦은 시간까지 하는 주점 정도밖에 없으니, 도무지 소개해 달라고 할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외곽까지 한 바퀴를 돈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며 감사해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일단 들어와 봐.”
“무시하는 거야, 지금…?”
“당신도 들어오십시오.”
완벽하게 무시당했음을 강제로 확인하게 된 레리아나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그마저도 아르펠이 꺼내는 종이 한 장에 불평할 타이밍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 사람의 집에서 발견한 일기야.”
“집에 다녀왔어요?!”
“…알고 간 거 아니었나?”
“그냥, 아르펠이라면 생각이 있을 줄 알았죠….”
눈까지 찡긋대길래 그의 의도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말문을 잃은 아르펠을 대신해 로한이 웃으며 설명했다. 됐으니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게 그 남자의 아버지가 연구 자료를 숨긴 장소에 대한 단서일 거야.”
“으… 아무 말이나 대충 적어 놓은 것 같아.”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해 본 말이거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레리아나의 목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글귀를 빤히 내려다보던 카시아가 말했다.
“이걸로는 당장 알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도움이 될 만한 건 이 책방인데….”
“문을 닫았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제안할 게 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르펠은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로한을 바라보는 순간에는 희미한 온기를 품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지하실의 입구를 찾는 일에 진전이 없으니 우선 알고 있는 지부를 먼저 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카시아의 눈에 혼란이 담겼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로 공격을 감행했다가 누군가가 이를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쓸 만한 정보를 모두 챙겨 달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지만, 아르펠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으니 괜찮았다.
“소란 하나 없이 조용히 지부 안에 들어갈 방법이 있습니다.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기만 하면 될 겁니다.”
그를 바라보는 로한의 눈가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
“간부님을 뵙습니다!”
넷은 그날 새벽, 곧바로 여관을 나와 움직였다. 세 사람을 멀리까지 물린 아르펠이 알고 있던 정보를 토대로 지부로 향하는 문을 열자 여러 사람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공동 안을 웅웅 울렸다.
“이게…… 무슨.”
그 소리는 바깥에 있는 셋에게도 들렸다. 아마 이 모든 것이 아르펠에게 망령의 힘이 있는 덕에 가능했겠지만, 그 힘을 직접 이용하고자 할 줄이야. 카시아는 그의 실행력이 황당하기만 했다.
망령의 힘을 숨겨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반지까지 로한의 손에 쥐여 주고 떠난 아르펠이었다. 손에 남아 있는 보랏빛의 반지는 슬슬 온기가 가시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작은 단검이라도 하나 쥐고 있으라고 조언한 아르펠에 어쩔 수 없이 검까지 쥐고 있는 채였다. 아르펠이 아닌 다른 검을.
내내 강하게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놓았다. 신전에서 챙겨온 것이기에 질이 좋은 편인 단검은 달빛에 반짝거리며 바닥에 툭 떨어졌다.
로한이 표정을 차게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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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작전은 이랬다. 하나, 망령의 힘을 가지고 있어 간부로 오인하기 딱 좋은 아르펠이 지부에 먼저 진입해 경계심을 떨어뜨린다. 둘, 지부 안의 모든 사람을 모은 아르펠이 안쪽에서 신호를 보낸다.
마지막은 그 신호를 받은 세 사람이 빠르게 안으로 진입해 신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르펠이 자세한 것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수가 있으니 먼저 들어가는 것이 옳고, 제때 신호를 주겠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동요 한 점 없는 그의 표정은 되레 믿음직하게까지 보여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하.”
하지만 로한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이 상황이 불만족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왜 아르펠과 떨어져 있어야 하지? 왜 그를 혼자 보내야 해?’ 같은 의문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화가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르펠은 그의 검이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상대이며, 서로에게 종속되었다. 그러니 계약만 한다면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르펠.’
왜, 많고 많은 방법 중에서 그를 미끼처럼 사용하는 것을 택해야 하는가. 가만히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곁에 함께 서고 싶었다. 그가 다칠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홀로 떨어져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오래전, 그가 아르펠에게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던 때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너 어디 가?!”
“…….”
“야! 로한!”
“놔.”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이내 로한은 망설임 없이 아르펠이 걸었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놀라 그를 붙잡은 것은 레리아나였다.
앞을 가로막은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지나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의 색을 띠지 않았다. 그나마 읽히는 것이라면, 초조함.
정말 오랜만에 로한의 이런 면모를 느끼고만 레리아나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무심하게 레리아나의 손을 털어낸 로한을, 이번엔 카시아가 붙잡았다.
“아르펠 님의 부탁을 무시할 생각입니까?”
갑옷을 입고 단단한 표정을 짓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로한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뭔 줄 알아요?”
“무슨….”
“아르펠의 부탁… 정말 중요하죠. 중요해요. 날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더욱더.”
“그럼 왜…!”
“내가, 아르펠을 지켜 줘야 한다는 사실보다… 그의 곁에서 영원히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게 아르펠의 부탁이라 할지라도.
아주 어릴 적 로한은 아르펠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도, 계약이라는 달콤한 약속에 한순간 눈이 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내 거야.’
내 검. 내 것. 내 세계.
날을 품은 시선과 마주한 카시아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느꼈던 의구심은 날이 갈수록 크기를 키워가다가 오늘날에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따뜻한 애정이나 사랑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보다 훨씬 서늘하고, 한편으로는 위험하게 느껴지는 적나라한 욕망과 집착.
결국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나고야 말았다. 실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
아르펠을 맞은 내부의 모습은 과거에 그의 손에 의해 무너졌던 지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라면, 희미하게나마 사람의 비명이 들렸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곳은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날 뿐,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부님을 두 눈으로 직접 뵈다니, 죽는 날까지 여한이 없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머리를 땅에 박을 듯 숙이던 놈들은 이제 곁에 달라붙어서 아부를 해 대고 있었다. 빨리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약속했으니까.’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확실히 그들을 모으고 고립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아르펠은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때와 비슷하게 놈들이 자발적으로 연구 성과를 보여 주겠다며 앞다투어 안내를 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르펠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자연스레 곁에서 그를 안내하고 있던 다른 이들도 제자리에 멈췄다. 아르펠의 시선이 아주 먼 곳을 바라보듯, 어딘가 멍했다.
‘아르펠.’
…부르고 있다. 로한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당장이라도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 부름에 응하면 로한의 곁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처럼 깨달았다.
아르펠의 시야로 옅은 보랏빛의 선이 보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오직 아르펠에게만 보이는 로한과 연결된 선이었다.
급한 일이 있나? 밖에 잔당이 남아 있었나? 그래서 위험해진 건 아닐까? 걱정이 우후죽순 불어났다. 곁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따위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쿵. 찰나, 바깥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렸다. 안절부절못하며 아르펠의 주위를 맴돌던 이들이 하나같이 소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웅. 쾅. 우드득.
무언가 부서지고 무너지며 심지어는 뜯기는 소리까지 살벌하게 들려왔다. 그 소음은 확실하게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아르펠 또한 홀린 듯 그 방향을 응시했다.
마침내 앞을 가로막던 벽 하나가 터져나갔다.
“가, 간부님! 제발 저희를!”
“침입자를 공격하라!”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겁에 질린 이들도 있었으나 간부가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한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적이 단 한 사람인 탓인지 의기양양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무너지는 벽 사이로 나타난 것은 당연하게도 로한이었다. 먼지 부스러기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얼굴을 하고는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긴 그가 정확히 아르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펠. 당장 이리로 와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아르펠을 향해 로한이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찼다. 빨리 오기를 재촉하는 것처럼 손끝을 살랑이자 둘을 잇고 있는 선이 강해졌다.
“…간부님?”
“누구보고 간부야, 씨발.”
내내 웃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내뱉는 욕지거리가 살벌했다. 아르펠의 곁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묻어 나왔다.
“아르펠.”
다시 한번 이름이 불리는 순간,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몸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잘했어요.”
드디어 자신의 손에 잡힌 고아한 검을 내려다보면서, 로한이 입꼬리를 유순하게 올렸다.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아름다운 명화를 보는 것 같다며 감탄할 만한 얼굴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지켜보는 사람은 공황에 빠진 구원교의 신자들뿐이었다.
“…감히, 감히 우리를 속이다니! 당장 저놈을 죽여라!”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버럭 고함을 쳤다.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간부 행세를 하던 아르펠이 그들이 속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눈치챈 듯했다.
“죽여? 누구를. 아르펠을?”
문제는 그의 발언이었다.
“저 사람 죽여 버릴까요?”
온기 하나 남지 않은 얼굴이 얼음처럼 굳은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르펠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아니, 그냥 죽일래요.”
순간, 남자의 목이 잘렸다. 정말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곁에 있던 이들이 남자의 죽음을 인지한 것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데굴 굴러 옆에 있던 이의 발끝에 닿았을 때였다.
“끄아아아악!!”
곧장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괴물이라 소리치고, 누군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짐승을 닮은 울부짖음을 내뱉으며 로한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검으로서 로한에게 잡혀 있던 아르펠은 순간 멍해졌다. 예쁘고 착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로한에 대한 생각이 삐끗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누군가 괴물이라며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금방 잊혔다.
누구보고 괴물이래?
단단히 손에 잡혀 있는 마검이 살의를 품자, 이를 눈치챈 로한의 의지에 따른 권능이 끊임없이 몰아쳤다.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림자로 인해 물보라처럼 옅은 핏방울들이 공중에 휘날릴 정도였다.
카시아와 레리아나가 뒤따라 들어온 시점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우웁……!”
잠시 맹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레리아나는 뒤늦게 온 사방이 붉은 이유를 알아채곤 밖으로 달려나갔다. 카시아는 몰려오는 구역질을 애써 참아내며 심호흡했다.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너무 진하게 느껴졌다.
“아르펠.”
로한의 눈이 태연했다. 목소리에도 떨림 한 점 없었다. 자신이 만든 참상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저 혼자 두지 말아요.”
산처럼 쌓인 시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에 홀로 서서 이야기하는 로한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카시아는 팔 위로 잔뜩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고도 태연하다고?
생각해 보면 그랬다. 처음 습격을 받고 적과 대치할 때도 로한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잠깐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았다.
카시아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로한을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그가 아르펠에게 지나치게 맹목적이라는 사실만을 느꼈을 뿐, 또래의 아이들과 지나치게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슬픈 이야기를 듣고 슬퍼했으며, 기쁜 일이 생기면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좋아했다. 그녀가 봐 왔던 모든 것들이 ‘태생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라는 가정을 묵살했다.
62
‘그럼, 이유는?’
그랬던 이가 갑자기 죽음에 지나치게 무감해진 이유는 뭘까. 잠시 허공을 배회하던 카시아의 시선이 여전히 로한의 손에 잡혀 있는 새까만 마검으로 향했다. 그때와 똑같이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머지않아 로한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깨달았다. 두 상황에서 공통점을 찾은 탓이었다.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모두 구원교, 즉, 아르펠을 실험한 단체의 소속이었다. 내내 혼자 남는 것을 불안해하던 로한은 방금 전 ‘아르펠이 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반쯤 돌아 내부로 쳐들어갔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찝찝함도, 죄책감도 마찬가지였다. 죽일 당시에는 분노했을지 몰라도 상황이 끝나면 그 감정조차 깔끔하게 휘발됐다.
그 모든 것들은 ‘아르펠’이라는 존재로 인해 뒤로 밀려나는 것이다. 아르펠과 관련된 일이라면, 로한은 그랬다.
‘……천신이시여.’
오랜만에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싶은 기분이 들고야 말았다.
레리아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시 안쪽에 들어왔다. 몇 번이고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반복하고 나서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공기 중에 짙게 밴 피 냄새 때문에 순탄하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그녀의 목적이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끔 했다.
아르펠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내내 로한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자료 하나를 펼칠 때마다 아르펠이 옆에 잘 있는지 살피기를 반복하는 로한의 탓도 있었지만, 그 역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로한이 수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도륙했다는 사실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신경을 끄려 노력했다. 조금만 삐끗하면 금세 생각의 파도에 휩쓸려 버릴 게 분명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날 닮아서 그런 걸까.
아르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을 때면 항상 로한이 곁에서 그를 붙들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얼굴이 온갖 애정을 담은 채 아르펠을 응시했다. 시체와 핏자국이 낭자한 장소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 해요.”
엄지손가락이 부드럽게 볼 위를 만지작거렸다. 우습게도 아르펠은 어지럽게 굴러가던 모든 생각이,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순하게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상관없지 않을까?’
손속이 잔인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로한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말갛게 짓는 예쁜 웃음 또한 바뀌지 않았다. 그는 처음 그대로였다.
“아니야. 이제… 괜찮아.”
서로의 관계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로한이 기쁘다면, 만족스럽다면 상관없었다. 널뛰던 생각들이 금세 모습을 감췄다.
연구 자료들을 대충 살피고 쓸모 있어 보이면 그림자 안에 넣어두기를 반복했다. 서류를 바닥에 툭툭 떨어뜨리면 그림자가 다가와 냉큼 삼키는 것이 제법 재밌었는지 레리아나의 표정도 아까보다 풀린 채였다. 물론 간혹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는지 명치 부근을 툭툭 치긴 했다.
“…진전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르펠은 오래전 구원교의 지부 하나를 털면서 연구 자료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적혀져 있던 것으로는, ‘성력과 마력이 물건에 저장되는 결’을 알아본답시고 여러 연구를 진행한 듯했다.
“이 ‘염원’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말없이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카시아는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자꾸만 나오는 단어를 통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흘끗 시선을 내려 같은 글자를 응시한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교 측에서 연구하는, 망령의 힘을 저장할 수 있는 장치일 겁니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군요.”
눈에 띌만한 발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구는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거에는 그저 ‘장치’라고만 이야기했던 것에 ‘염원’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은 걸 보면 말이다.
“이건 그 사람에게 넘기는 게 좋겠네요.”
카시아와 아르펠이 함께 바라보고 있던 연구일지를 빼낸 로한은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팔락거리는 종이가 바닥에 완전히 닿기도 전에 그림자의 입에 냉큼 집어삼켜졌다.
“연구에 대한 자료는 이 정도로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 다른 것들을 찾아보죠. 지하의 장소에 대한 단서라거나….”
“어! 이거 아냐?”
잔뜩 어질러진 책상 서랍의 안쪽을 뒤적거리고 있던 레리아나가 종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사람의 손때를 탄 바람에 가장자리가 꾸깃꾸깃하고 색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지도와 흡사했다.
“……진짜 그림 되게 못 그리네.”
레리아나는 자신이 찾아낸 지도를 보면서 작게 한탄했다. 누가 봐도 지도인 것 같기는 했으나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선이 삐뚤빼뚤했고 이상했다. 건물의 크기나 거리를 제대로 고려했을지가 미지수였다.
***
연구소를 빠져나온 일행은 일단 여관으로 향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여관을 나왔으니, 당연하게도 바깥은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은 때였다.
기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며 빠른 속도로 방 안에 틀어박혔던 레리아나는 다음 날 퀭한 눈으로 등장했다.
“으으…… 악몽 꿨어….”
잠을 푹 잤는지 얼굴에 윤기가 도는 로한을 노려보는 것은 덤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사뭇 얄미운 태도였다.
간밤에 마을의 외곽에서는 대학살극이 벌어졌건만, 마을의 분위기는 딱히 달라진 바가 없었다. 약간의 소음을 들었다는 이가 간혹 있었으나 그마저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이 드물었다.
“둘로 나뉩시다.”
마을의 분위기를 기민하게 살피던 로한이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한 장은 어제 연구소에서 레리아나가 찾아냈던 지도였고, 다른 하나는 수상한 남자의 집에서 찾아낸 암호가 적힌 종이였다.
당연하게도 아르펠은 로한과 함께 움직였다. 전날 밤에 보았던 암호가 적힌 종이가 아르펠의 손 위에서 팔랑였다.
“일단 책방부터 같이 가 볼래요?”
“그래.”
시간이 늦어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어제와는 달리 책방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책방을 해 온 건지 노화된 티가 제법 많이 났다.
문을 밀어 열자 딸랑이는 종소리가 났다. 곧장 반기는 여성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었다. 잠시 아르펠에게로 시선을 흘끗 던진 로한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빈트 씨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빈트……? 아뇨, 전 처음 들어보는데….”
여인은 당황한 눈을 한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손에 잡혀 있는 종이를 괜히 한 번 만지작거렸다.
책방의 주인이 ‘빈트’라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암호를 풀 방법도 사라진다. 뜬금없이 아기곰의 이야기가 나오는 암호는 아무런 단서 없이는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안쪽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던 듯, 상당히 부스스한 차림새의 노인이 걸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
“빈트라면 내가 알고 있소만.”
“할아버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자가 노인의 손에 들려있는 여러 권의 책을 보면서 경악했다.
“허리도 안 좋으시면서 왜 책을 정리하세요? 제가 한다니까요!”
“에잉,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매번 덜렁거리면서 무슨….”
“소, 손님이 앞에 계신데 그런 말을!”
얼굴을 빨갛게 붉힌 그녀는 결국 책을 대신 치우러 가겠다며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 위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빈트에 대해서는 왜 물었는가?”
“아들분과 일이 있었습니다.”
“쯧,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게지.”
알만하다는 듯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모호하게 답한 보람이 있었다. 아르펠은 능숙하게 대답한 로한을 칭찬해주듯 로브 사이로 파고든 손을 단단하게 잡아 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미 그놈에게도 말해 주었다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빈트, 그 자식에게 빚을 졌네. 그것 때문에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중이지.”
“마지막 부탁이라면….”
“빈트가 실종되기 전, 그는 내게 책 한 권을 건네주었어. 그리고선 책을 꽂아놓은 위치를 절대로 바꾸지 말아 달라고 했지. 의미 모를 부탁이긴 하나 내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두고 있다네.”
그만큼의 세월이 지나고 부탁을 한 사람도 실종됐으니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다며 노인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몇 분 더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준 뒤에야 위치를 알 수 있었지만, 둘은 만족했다. 그가 알려준 책장의 위치로 가는 발걸음들이 빨랐다. 크기가 큰 책방은 아니었지만 워낙 안쪽이 미로처럼 되어 있다 보니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아기곰의 오순도순….”
기다란 손가락이 책의 등을 훑어가며 제목을 읊었다. 이윽고 누가 봐도 아동용 도서 같아 보이는 겉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위치를 꼼꼼하게 눈여겨보고는 표지를 휙 넘기는 손이 거침없었다. 커다랗게 적혀 있는 글을 무심하게 넘긴 시선은 머지않아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하고 있는 삽화에 닿았다.
아기곰이 식사하는 그림이었다.
‘아기곰의 오순도순 식사 이야기’. 누가 봐도 아동용 도서인 이 책은 빈트의 일기장에도 몇 번 언급되었던 책이었다. 일기장에서 묘사된 그의 아들은 유독 이 책을 좋아했다.
하필 많고 많은 책 중 이 책을 선택하여 책방의 주인에게 위치를 절대 바꾸지 말아 달라고까지 했다. 딱 봐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정확한 내력이 무엇이든 이 책이 ‘연구’와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사실은 맞았다.
“굳이 ‘한쪽 손으로만’이라고 적어놓은 게 걸려요.”
책을 펼치고 있는 아르펠을 대신해 일기장에서 찢어온 한 페이지를 건네받은 로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림 속 아기곰은 왼쪽 손으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로한의 손가락이 차근차근 ‘한쪽 손’, ‘8시간’, ‘남긴 콩알’, ‘위로 쌓으니’, ‘해가 지고 있다’를 짚어나갔다.
“방향과 숫자가 반복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아.”
그 말을 들은 아르펠이 작게 탄식을 흘렸다. 로한을 홱 돌아보는 눈이 새삼스러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로한을 향해 손을 뻗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로한이 너무 똑똑한 것 같다.
63
다음 페이지 삽화에는 아기곰이 남긴 5개의 작은 콩이 있었다. 왼쪽으로 8, 위로 5. 아르펠의 쓰다듬을 기쁘게 받은 로한이 마저 책장의 칸을 세기 시작했다.
“음… 천장을 넘어가네요.”
문제는 위로 5칸을 센다면 책장의 수를 넘어간다는 점이었다. 가만히 위를 응시하던 아르펠이 대신 답했다.
“밖에서 봤던 건물 크기보다 천장이 살짝 낮아. 위에 남는 공간이 있을 거야.”
아기곰을 이용한 암호는 어린아이들만 읽을 것 같은 책의 삽화를 봐야지만 알 수 있었다. 책방도 자주 본 사람이 아니라면 천장의 높이가 상당히 낮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상당히 뜬금없고 암호라고 하기엔 가벼운 퍼즐 같은 글귀였으나, 그만큼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크지 않은 마을 안에서 중요한 자료를 숨기기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로한은 옆의 사다리를 가져와 천장에 손이 닿을 정도로 올라갔다. 살짝 힘을 주자 천장이, 정확히는 딱 그 부분만이 위로 밀려 올라갔고, 고개를 들이밀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드러났다.
잠시 안을 살피는 듯하던 로한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았네요.”
둘은 빠르게 책방을 떴다. 로한과 아르펠이 빈트의 실종을 조사한다고 생각한 건지, 급하게 나서는 둘을 보면서 노인은 “거봐, 얻을 만한 건 없지?”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책방에서 멀리 떨어지고 난 뒤에야 바닥에 맺힌 그림자에서 각종 책과 서류들이 한 움큼 튀어나왔다. 아르펠은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생각보다 많죠?”
로한의 웃음이 멋쩍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마을에서 동떨어진 외곽의 수풀에 기대어 팔자에도 없는 독서를 해야만 했다. 기계처럼 글귀를 읽어내리던 아르펠은 옅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눌렀다.
분명 통증 따위 느낄 리 없는데 그냥 눈이 빠질 것 같았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지만,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본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 가지 사항을 확실히 해두려 한다. ‘악신’이라는 표현은 그분을 시샘하는 세력이 비하의 목적으로 붙여놓은 이름이다.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나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표명한다.」
참고한 서적을 제외하고 그가 직접 기술한 듯한 연구 일지에는 말머리에 항상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이어진 내용 대부분은 역사의 왜곡이었다. 망령들에 의해 대륙이 큰 피해를 받았던 과거를 ‘구원의 일부’라고 표현한 것은 물론, 천신과 마신은 그분의 힘을 두려워해 그분을 세계의 바깥으로 쫓아낸 세계의 악이라 명했다. 그리고 그를 숭상하는 구원교는 세기의 영웅처럼 묘사되었다.
「구원교의 시초는 망령을 직접 몸에 받아들인 일곱 간부이다. 우리의 신이 누명을 쓰고 세계의 바깥으로 쫓겨나기 전의 시대, 간부들은 그 시대를 몸소 겪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누구도 간부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망령의 힘은 그들이 세계의 또 다른 구원자임을 똑똑히 증명할 것이다.」
“재미없어요.”
다른 서류 하나를 집어 대충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아르펠이 고개를 돌렸다.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로한은 아르펠에게 몸을 딱 붙여 왔다.
상당히 공감하는 바였다. 악신과 구원교의 간부에 대한 칭찬만을 줄줄이 늘어놓은 글들은 불쾌함만을 유발할 뿐이었다.
아르펠은 그를 달래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로한의 고개가 살포시 어깨에 닿고, 흐트러진 옅은 머리가 어깨 위에 내려앉으니 어쩐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분명 종이 위에 멀쩡하게 적혀 있는 활자들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게 하는 망령의 힘은 분명 인간들에게 큰 축복을…….」
애써 집중하려는 노력은 무산되었다. 결국 읽고 있던 연구일지를 덮고 한쪽에 정리해 버리자, 말없이 몸을 기대고만 있던 로한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애정, 또 자신을 봐 달라는 온갖 소리 없는 속삭임까지.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르펠은 순순히 로한의 바람에 이끌리고 따랐다.
결국 두 사람은 노닥거리느라 날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
“우리는 그 엉망진창인 지도를 보고 찾으러 다니느라 온종일 뺑뺑이를 돌았는데……!”
아까부터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둘을 추궁하는 레리아나였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억울함이 더해졌다.
카시아는 로한이 들고 온 연구 일지를 살피느라 그녀를 챙겨줄 여력이 없었다. 부루퉁한 낯을 하면서도 결국 인내심을 발해 짜증을 꾹꾹 내리누른 레리아나였다.
느지막한 시간까지 그늘 아래에서 노닥거린 둘과는 달리,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지도도 엉망진창이었고, 주변이 살짝 바뀌면서 지도를 완전히 신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풍족한 저녁 식사로 기분을 조금 풀어낸 레리아나는 당장 오늘 새벽에 움직일 것을 제안했다. 이 마을에서 얻을 것은 이미 다 얻었고, 굳이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분명 맞는 말이었는데.
“…누가 따라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잘 시각, 기척 하나 없이 손쉽게 여관 건물을 빠져나온 넷은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미리 봐 두었던 마을 남쪽 외곽의 과일 가게로 향하는 중이었다.
“속도가 느려요. 아마 일반인인 것 같아요.”
아르펠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기울인 로한이 작게 속삭이며 미간을 슬슬 문지른 탓에 금방 풀렸지만, 찝찝함은 별개였다. 결국 달리는 속도를 훨씬 높여 따라오는 누군가를 따돌려낸 네 사람은 손쉽게 가게의 안쪽에 진입할 수 있었다.
“누…!”
비밀 통로답게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 이틀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을을 헤매게 했던 울분을 담아, 카시아는 칼 손잡이로 남자의 얼굴을 내려찍었다. 단숨에 기절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로한 님. 다 죽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죽이더라도 최대한 깔끔하게 끝맺어 주십시오.”
카시아는 칼 끝부분에 살짝 묻은 혈흔을 무심하게 털어내며 말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은근히 책망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로한은 변함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순순한 반응 의외라는 듯한 카시아의 시선이 로한에게 빤히 닿았다.
가게 안쪽에 있던 커다란 과일 상자 하나를 치우자 좁은 다락방 문처럼 생긴 것이 바닥에 나 있었다. 끼익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의 너머로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보였다.
“으, 냄새.”
레리아나가 작게 투덜거렸다. 마치 하수도를 연상시키는 듯한 불쾌하고 습한 냄새가 났다. 꽤 공간이 넓은 것인지 목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뒤늦게 성력으로 만들어진 빛무리가 주위를 떠다녔다. 마냥 어둡기만 했던 주위가 차차 눈에 잘 들어왔다. 물론 아르펠과 로한은 주위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니, 크게 쓸모는 없었다.
가볍게 옮기는 발걸음의 소리마저 크게 울렸다. 쭉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던 찰나, 맞은편에서 큰 소음이 들렸다.
----!
매일 밤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였다. 성대가 끊어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누군가의 울부짖음.
로한의 감정에 감응한 아르펠이 그 자리에서 검으로 변했다. 검을 쥔 로한이 망설임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간 것도 한순간이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시아는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이를 악물고 말았다.
지금만큼은 그녀 또한 살의를 참을 수 없었다. 다 죽여서는 안 된다고, 최대한 깔끔히 목숨을 거둬 달라 말한 것은 자신인데도.
“가자, 시아!”
빠르게 나아가는 로한의 뒷모습을 보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레리아나가 그녀를 불렀다. 마주친 얼굴에는 미약한 초조함마저 담겨있는 듯했다.
불특정한 누군가의 비명에 또 다른 사람의 외침이 겹쳐졌다. 로한은 침착하게 앞길을 막는 사람들을 베어 나갔다. 경비로 고용되기라도 했는지 중간중간 오러를 사용하는 누군가도 끼어 있었지만, 로한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직접 망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간부라면 모를까, 인원 대부분이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교단인 만큼 그들의 전투력은 바닥을 찍었다.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이들에 카시아는 회한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런 놈들에게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막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히, 히익…!”
이제 남은 건 한 사람이었다.
기계처럼 아무런 감흥 없이 사람을 베던 로한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보내자마자 노인은 다리를 떨며 주저앉았다.
“남은 건 이 한 사람입니까?”
“아마.”
“심문을 해야 하니 살리는 게 좋겠습니다.”
“…아르펠, 이제 그만 돌아와요.”
방금 전까지 전투를 치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한 검의 끝을 로한이 톡톡,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곧장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아르펠은 자신을 보며 까무러치는 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 하아…… 그래서. 이 사람은 그림자에 넣을 거야?”
레리아나의 숨소리는 유독 벅차올라 있었다.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데다가 공격해 오는 신자들을 제압하고 베기를 반복한 탓이다.
카시아는 그런 레리아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레리아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로한을 향해 물었다. 숨이 차 헐떡이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마당에 걱정까지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바로 뒤쪽에서 누군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흩뿌려진 핏물이 역했는지 구역질 소리마저 생생하게 길을 타고 내려왔다.
“…아버, 지?”
끝내 도착한 사람은 익숙한 이였다.
전과 다를 바 없는 허름한 몰골을 한 사내가 주저앉아 있는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불신, 경악, 공포…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눈이었다.
순간 네 사람의 시선이 모조리 눈앞의 노인에게 쏠렸다. 아마 모조리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빈트’다.
64
남자, ‘앤드류’가 일행의 뒤를 쫓아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레리아나와 카시아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그는 본인의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찝찝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가 굳이, 평소에는 청소만 할 뿐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는 책장에 눈길이 닿은 것은.
부자연스럽게 먼지가 쌓여 있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했고,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아버지가 쓴 일기장을 읽었다. 그러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가 누군가에 의해 찢겼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찢겨 있었을 확률도 있었지만 자꾸만 그 신관들이 걸렸다. 잠에도 제대로 들지 못해 창가를 서성거렸고, 그러다 빠르게 달려가는 네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쫓아간다 하더라도 네 사람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중간에 누군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속도를 높였던 탓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앤드류가 꾸역꾸역 이 장소를 찾아 내려온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주위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문득 작은 소리를 들은 덕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이어졌다.
“왜… 왜 여기 있어요?”
꼴사나운 모습으로 뒤로 벌러덩 넘어져 있는 노인은 분명 자신의 아버지였다. 훨씬 더 나이가 들고 볼품없었지만 말이다.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빈트가 소리쳤다.
“앤드류!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저 녀석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 그게 중요해요? 왜 갑자기 사라진 건데요! 내가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해!”
버럭 고함을 치는 빈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추레한 몰골을 한 두 부자가 서로를 보며 언성을 높였다. 넷은 살짝 뒤로 물러난 채 그 모든 것을 응시하고 있기만 했다.
빈트가 앤드류의 손을 낚아챘다. 당장 도망치라는 듯 당기는 힘이 강했지만, 앤드류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뿌리쳤다.
그제야 이 공간에 이질감을 느꼈던 탓이었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눈을 하는 아버지도, 멀리서 웅웅 맴도는 사람들의 비명도 한순간에 실감이 났다. 손을 뿌리친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강한 힘이 실려 있던 손을 뿌리친 탓에 앤드류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책상을 붙잡았지만 지나치게 한쪽에만 힘이 가해진 탓인지 한순간에 책상이 뒤집혔다.
위쪽에 놓여 있던 플라스크와 각종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는 비커들이 뒤집혔다.
“끄아악…!!!”
넘어진 앤드류에게 그 모든 것들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몸이 축축하게 젖어 든다는 느낌이 든 것도 잠시, 액체로 적셔진 부분부터 시작해 짙게 올라오는 통증에 그가 몸부림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귀중한 연구물이…!”
뒤늦게 빈트가 수습해 보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미 쏟아진 내용물은 담을 수가 없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단숨에 몸을 움직인 로한이 손놀림에 자비를 두지 않고 그대로 그를 반쯤 내려치다시피 제압한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차가웠다.
“이건 좀…… 역겹네.”
컥, 컥. 심한 통증에 더해 내리누르는 압박감으로 인해 숨을 쉬지 못하자 괴로운 모양이었다. 로한에 의해 무자비하게 제압된 남자가 막힌 숨소리를 내었다.
짜증, 분노, 역겨움. 가족은 로한이 가진 일종의 역린이었다. 그가 대뜸 움직인 것은 두 남자가 부자 관계인 탓이 클 것이다.
흘러나오는 감정의 낌새를 눈치챈 아르펠이 로한에게 다가가 느릿하게 뒷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살살 움직이는 손가락이 목덜미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제야 들쑥날쑥 튀어나오던 살의가 가라앉았다.
자연스레 손끝에 실린 힘이 줄었고, 숨을 쉴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던 빈트도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럼에도 겁을 잔뜩 먹어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지만.
“액체 중에서 망령과 관련된 것이 있었나 봅니다.”
카시아는 바닥에 드문드문 흩뿌려진 새까맣고 끈적해 보이는 액체와 앤드류의 몸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검은 반점을 살폈다. 그녀의 인상은 진작 찌푸려진 채였다.
아르펠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죽어가는구나, 정도의 감흥이 일었다.
몇 방울이 아니라 한 병을 통째로 뒤집어쓴 이상, 시간을 더 끈다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거.”
“정화는 다 같이 하는 게 나아요.”
“아뇨, 정화가 아니라.”
굳이 나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아르펠이 입을 연 것은 순전히 로한 때문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앤드류를 응시하는 시선에 조막만 한 후회와 동정이 보였다. 로한이 이 상황의 원만한 해결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움직인 것이다.
로한은 여전히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정도 많고, 걱정도 많고, 참 선하다. 그의 볼을 한 번 만지작거린 아르펠이 몸부림치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시커멓게 반점이 올라와 있는 피부 위로 손이 닿았다.
“아르펠!”
망설임 없는 접촉에 되레 로한이 놀랐다. 제압하고 있던 남자조차 내팽개치고 급하게 달려가 아르펠의 손목을 잡아챘지만, 이미 앤드류의 몸에 잔류하고 있던 모든 망령의 힘이 아르펠에게로 빨려 들어간 지 오래였다.
“뭐한 거예요, 지금?!”
“…어?”
아르펠이 직접 나선 이유는 로한이 원한 탓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대상이 대놓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초조함과 분노가 맹렬히 몰아치는 눈을 마주하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흡수할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그런 짓을 해요! 그러다 다치거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 널브러진 채로 심호흡을 하는 이 따위, 로한의 신경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마주 보고 있는 눈동자는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도 형형하게 번뜩였다.
그 눈에 묻어나오는 건 선명한 겁이었다. 격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아르펠은 순간 답을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어쩐지 붙잡힌 양팔이 아릿했다.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으나,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로한이 더 중요했기에 애써 신경을 거뒀다.
“미안해. 안 그럴게.”
순순히 사과를 건네는 목소리가 애달팠다. 살짝 눈을 내리깐 채 말하는 아르펠은 드문 편이었기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완전히 감내하지 못하고 숨마저 헐떡거리고 있던 로한은 뒤늦게 진정할 수 있었다.
“…날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요. 제발요.”
그가 자신의 안위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한은 스스로를 걸었다. 아르펠이 행동하기 전,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제동을 걸어 주도록.
느릿하게 고개를 기대는 모습마저 위태로웠다. 가까워진 몸을 꼭 끌어안으며 아르펠은 답답하게 차오른 것만 같은 기분을 감내했다. 느릿하게 심호흡을 하며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로한은 한참 만에 아르펠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다시 내보인 것은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꽉 마주 잡은 손은 그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다 끝났어?”
뒤늦게 다가온 레리아나는 상당히 뚱한 얼굴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를 신경 쓸 만한 위인은 아닌 로한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 씨는 돌려보냈어.”
“그래.”
“자기 아버지가 벌인 짓을 믿지 못하는 것 같더니… 결국 다 받아들였어. 이제 자기한테는 아버지가 없다더라.”
결국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거지.
레리아나가 반쯤 넋을 놓은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빈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카시아에게 구속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스스로 움직일 여력도, 그럴 만한 정신도 없어 보였다.
실험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자이자 심문을 위한 증인이 될 남자는 로한이 불러온 그림자에게 먹혔다. 억겁 같이 느껴지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어둠에서 그는 아주 긴 시간을 몸부림칠 것이다.
더 깊숙한 안쪽으로 향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쪽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철창이었다. 짙은 혈향과 함께 희미하기만 했던 울음소리와 비명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까드득거리는 묘한 소리마저 뒤따라왔다.
“…….”
기묘한 소음의 정체는 이윽고 밝혀졌다. 철창 안에 갇혀 있는 ‘무언가’들이 벽을 긁어대고 있던 것이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레리아나는 결국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름 아닌 사람이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아 버렸다.
피부가 녹아내려 이목구비를 살필 수 없었다. 뼈가 녹아내린 것인지, 그저 살이 뭉친 것인지. 뭉툭한 손은 손가락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는데, 그것으로 딱딱한 벽면을 연신 긁어 댔다.
핏자국이 흥건했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얼굴 부위에 딱 하나 남아있는 기이한 구멍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비명을 닮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다음 철창도, 그다음 철창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처음 보았던 그 몰골을 한 것이 사람과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형체마저 뭉개져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들도 몇몇 있었다.
카시아가 작게 탄식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그녀의 낯은 창백하게 질려 버린 지 오래였다.
끔찍한 몰골을 한 ‘사람이었던 이들’을 바라보며, 레리아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65
“내가 해 볼게.”
“…레리아나 님.”
“이거라도 해 보게 해 줘.”
절박하기까지 한 한마디에 카시아는 차마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아르펠과 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레리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초조함이 쌓였다. 지난날 로한과 벌였던 대련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기도 했다.
로한에 비해 약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애써도 레리아나의 검은 로한에게 닿지 않았고, 그녀는 크게 벌어져 있는 격차를 절감했다.
‘그럼 그 이유부터 찾아.’
‘이유?’
‘강해지고 싶은 이유.’
로한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 뒤로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해 보았으나 도저히 이유라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로한이 그 이유가 ‘아르펠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듯, ‘카시아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 모든 고민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 레리아나는 또 가슴 깊숙한 곳에 자책감이 내려앉았다.
자꾸만 벅차오르는 숨에 헐떡거릴 때마다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로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레리아나는 처음으로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러면 안 돼.’
그녀는 로한이 악착같이 노력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재능 덕분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검을 쥔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릴 만큼 오랜 시간을 노력해 왔음을 기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해.
초조함이 깊어질수록 레리아나는 그 생각에 매몰되었고, 갑작스레 나선 것 또한 그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가장 처음 보았던 철창의 안으로 들어선 레리아나는 흉측한 것을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겉모습이 끔찍할지라도 이건 그녀가 도와야 하는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그 생각을 반복하니 구역감도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실례할게요.”
그것의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물컹거리는 감촉에 미간이 움찔했으나 그뿐이었다. 머지않아 그녀의 손끝에서 환한 성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레리아나 님!”
“괜찮아.”
문제는 성력이 실험체의 몸에 닿는 순간 발생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카시아가 레리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갑작스러운 발작은 실험체의 안에 깃들어 있는 망령의 힘과 레리아나의 성력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 원인이었다. 그랬기에 레리아나는 성력을, 권능을 쏟아붓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됐어……!’
줄어들고 있다. 느리지만 분명히.
레리아나의 눈이 반짝였다. 권능은 점점 망령의 힘을 걷어내고 느리게나마 그들의 몸을 회복시켜 주고 있었다. 사람 같지 않던 것이 어중간하게나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억, 헉…….”
“…레리아나 님.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아냐, 아냐…… 계속. 할 수 있는데….”
그러기를 몇 분.
레리아나의 손끝에서는 끊임없이 권능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상대가 회복되는 속도는 너무나도 더뎠다. 한 사람을 완전히 회복시키기 전임에도 그녀의 얼굴에서는 땀을 뚝뚝 떨어졌다.
손끝이 크게 떨리고, 숨은 조금씩 거칠어졌다. 보다 못한 카시아가 그녀를 제지했지만 완강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레리아나.”
“계속, 계속 할 거야.”
“레리아나!”
아무런 말 없이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로한이 기어이 입을 열었다. 말을 들을 생각을 않는 레리아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몸이 크게 흔들리고 나서야 멍했던 분홍빛 눈동자에 초점이 되돌아 왔다.
“죽었어, 이미.”
“아…….”
레리아나의 의지에 감응하고 있던 권능이 뚝 끊겼다. 찬찬히 손을 대고 있는 이를 살펴본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숨이 끊어졌노라고.
“왜….”
분명, 느리지만 회복되고 있었는데.
손바닥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땀방울에 섞여 턱 끝에서 툭 떨어지고 있었다. 카시아는 조용히 다가가 레리아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르펠과 로한은 자리를 피했다. 울고 있는 레리아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 인물은 카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걸음을 물리는 둘을 향해 카시아는 짧은 목례를 건네고, 다시금 레리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리아나 님의 잘못은 없습니다.”
진심이 담긴 한 마디가 나직이 읊조려졌다.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레리아나는 카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쩐지 그녀의 말이 멀게만 들렸던 탓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아득해지면서 그녀는 과거의 어느 날, 그러니까, 처음으로 신전에 발을 들이게 된 날을 떠올렸다.
신의 축복으로 그녀는 빈민가에서의 고단한 생활을 벗어났지만, 정작 어째서 자신이 선택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곤 부모 대신 자신을 거둬 준 할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뒤 ‘제 앞에서,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죽는 사람이 없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빈 것밖에 없었으니까.
마냥 어릴 때 했던 다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로, 선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 그리고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서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카시아, 나…….”
더, 강해지고 싶어.
여전히 울음기가 남아 있는 한마디였다. 카시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토록 바라던 ‘신념’을 레리아나가 가지게 되었다는 걸 직감적으로나마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에 온전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이번 일 때문에 레리아나의 마음에 지우지 못할 상처가 남았음을 알고 있으니까.
“네. 제가 돕겠습니다.”
카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등 뒤에서 성심성의껏 돕는 것뿐이었다. 미약한 떨림이 남아 있는 두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른 새벽 시간이었기에, 그들은 아침이 완전히 밝았을 때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렉시아가 알려준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전, 적당히 타고 갈 만한 마차를 알아보던 때였다. 레리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침부터 내내 별말이 없어서였는지, 금세 그녀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다가 뒤늦게 나머지 말이 흘러나왔다.
“나, 이제 신전에 돌아가려고.”
“…신전?”
로한이 빤히 그녀를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낌새를 아예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그저 고요히 레리아나가 뒷말을 이어나가기를 기다렸다.
카시아와는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었는지, 레리아나의 뒤쪽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번에 느꼈어. 내가 너에 비해 너무 부족하다는 걸.”
“…….”
“결국 내가 한 건 거의 없어. 그냥 네 뒤를 따라다닌 것 말고는. 그냥 달려나가는 너를 따라 뛰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벅차고, 제대로 해낸 것도 없고… 정말 권능이나 축복에만 의지했던 것 같더라.”
신전에 돌아가서 열심히 노력 좀 해 보게.
얼굴에는 고뇌의 흔적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채였고,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뚝뚝 눈물을 흘리며 운 탓에 눈이 잔뜩 부어 있었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그녀가 그런 고민을 한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손쉽게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레리아나의 얼굴에는 산뜻한 미소가 고여 있었다. 그간 속을 썩이던 문제를 해결했다는 듯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로한이 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나보단 못할 텐데.”
“아, 재수 없어.”
오고 간 건 힘내라는, 다시 만나자는 낯간지러운 말들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같이 짓궂게 말하는 목소리에 도리어 안심한 듯, 환한 웃음과 함께 내뱉어지는 레리아나의 목소리는 맑게 개어있었다.
뒤늦게 그녀의 시선이 로한의 옆쪽에 서 있던 아르펠에게 향했다.
“아르펠, 저한테 인사 안 해 줄 거예요?”
“기다리고 있을게, 레리아나.”
“…헤헤.”
여전히 무뚝뚝한 반응에 삐죽 입술을 내밀기는 했으나, 아르펠은 느리게 손을 뻗어 레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름 다정하게 내려 노력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순간 넋을 놓고 멍하니 눈을 끔뻑이기만 한 레리아나는 뒤늦게 쓰다듬어진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꿈만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긴 시간을 함께한 이들이었으니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미련이 남은 것도 같았으나, 그럼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로한은 아르펠이 레리아나를 쓰다듬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 나름의 배려일지도 몰랐다.
“나중에 봐요!”
헤어짐의 인사는 짧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평소와 같은 얼굴로,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로한은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하나뿐인 친구를 향해 마주 인사를 해 주었다.
“이제 우리 둘이네요.”
“응, 그러게.”
아주 조금은, 단둘이 남았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흘러들어 오는 로한의 감정은 후련함과 아쉬움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사이로 은은히 존재감을 피력하는 흡족함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르펠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감돌았다.
66
이미 다른 마을로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아르펠과 로한은 곧바로 마차를 타고 마을을 벗어났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레리아나와 카시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그것을 응시하는 아르펠의 시선이 묘하기만 했다.
“아르펠.”
“아.”
“계속 불렀는데 왜 대답도 안 해 줘요….”
지나치게 생각을 깊이 한 모양이었다. 울상이 되어 버린 로한의 표정에 아르펠이 되레 안절부절못했다. 용서를 구하듯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던 로한이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내려간 손이 그대로 입 근처에서 멈추는가 싶었니, 손가락이 로한의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던 아르펠은 손가락이 앙 물리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뭐, 뭐 하는….”
“질투 나서요.”
살짝 힘을 준 건지 물린 손가락이 아릿했다. 찌릿 하고 전기가 흐르는 것도 같았다.
그나마 익숙해졌나 싶은 감정들이 새삼스레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진득한 애정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덤이었다. 눈에 띄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아르펠을, 로한은 그저 즐겁게 바라보기 바빴다.
다시 물어버릴 것처럼 입술이 가까이에 와 닿았다. 빠르게 손을 빼낸 아르펠이 홱 고개를 돌렸다. 다른 손으로 물렸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아… 너무 세게 물었어요? 아파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용케 손을 빼낸 노력이 무색하게 아르펠의 손은 마치 원래부터 있어야 하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로한의 손에 쉽게 붙잡혔다. 물었던 부분을 문지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 뒤로 로한은 평소처럼 굴었다. 여전히 꼬리를 흔들어대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웃었고, 고개를 어깨에 기대는 일이 많았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평생 로한의 애교만 보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까지 들 정도로.
고개를 기대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로한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면 아르펠은 언제나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익숙하게 로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언제부터지?’
규칙적으로 손을 움직이면서, 여전히 머릿속으로는 하나의 생각을 이어가기 바빴다.
아르펠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온전한 사람이 아닌 ‘사람을 흉내 낸 검’인 이상 불변할 법칙이었다.
방금 전 물린 손가락을 괜히 한 번 움직여 보았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손가락 끝을 물렸던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습한 입안도, 장난스레 깨물었던 가지런한 치아도 자꾸만 뇌리에 남았다.
날이 갈수록 몸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아릿한 통증을 느끼는 것도, 꾸지 않았던 꿈을 꾸기 시작한 것도, 잠들지 않으려 했는데도 어느 순간 잠들어 버리는 것도.
흘끗, 아르펠의 시선이 로한에게 향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너로부터 비롯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선을 눈치챈 건지 곧장 고개를 돌려 생글 웃는 것이 마냥 예쁘기만 했다.
***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약속된 장소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난데없는 렉시아의 등장에도 개의치 않은 둘은 익숙하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는 전보다는 피로감이 덜한 얼굴이었다.
“사람이 줄었네?”
“둘은 신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음?”
태연하게 대답하는 로한에 잠시 갸웃하기는 했으나, 렉시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있겠거니 싶은 것이다.
“확보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만.”
“아, 그냥 여기서 풀어놔도 돼. 어차피 이 찻집은 다 내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거든.”
로한은 망설임 없이 그림자 안에서 남자 하나를 내쫓았다. 두 사람에게 차를 건네주러 온 종업원 하나가 자연스레 남자를 질질 끌고 나갔다.
“일단 여기, 다음으로 두 분이 맡을 곳이에요. 하루 이틀 정도 쉬었다 가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익숙하게 찻잔을 기울인 렉시아가 삐죽 웃었다.
“뒤처리 좀 깔끔하게 해 주실래요? 얼마나 심했으면 하나 같이 하기 싫다 떼를 쓰고 토까지 한답니까.”
그의 시선이 흘끗 아르펠에게 향했다. 물론 아르펠은 오해의 시선을 받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옆에 있는 로한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 뿐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아르펠을 보죠.”
“좀 자제해 달라고 사정한 거야. 예민하기만 해선.”
“제가 한 겁니다만, 빌어 보시면 생각 좀 해 보고.”
“…뭐?”
렉시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차를 홀짝이고 있는 아르펠도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자 뒤늦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질린 눈을 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싸고돌더니, 대체 뭘 키워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아주 어릴 적의 로한과 다 자라버린 로한을 더 이상 겹쳐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게 역변인 걸까? 렉시아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렉시아.”
“음?”
내내 말이 없던 아르펠이 처음으로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던 렉시아도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빤히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아르펠이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다섯 손가락 중 정확히 검지만을 내민 채였다.
“물어 봐.”
“……뭐요?”
“물어 보라고, 내 손가락.”
가느다란 손가락이 공중에서 까딱였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충격적인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태연하기만 한 아르펠의 얼굴에 렉시아는 잠깐 벙쪄야만 했다.
“아르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로한의 손이 아르펠의 손가락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내렸다.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아마 백이면 백, 로한의 얼굴을 보고 ‘아, 웃는 얼굴이구나.’ 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라고 진지하게 고민하게끔 하는 얼굴에 가까웠다.
그만큼 살벌했다는 뜻이다.
입꼬리 끝이 잘게 떨리기까지 해서 렉시아는 애써 로한에게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눈을 마주쳤다간 그대로 멱살을 잡힐 거라고, 그의 본능이 강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 살벌한 기세는 굳이 렉시아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느끼고 있어서, 아르펠은 슬쩍 로한의 눈치를 살폈다. 분노와 당황, 그리고 선연한 질투가 로한에게서 솔솔 풍겨 나왔다.
아르펠은 괜히 로한에게 잡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가 대뜸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객관적인 판단을 마친 결과였다.
여러 번 고민한 결과,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아마 로한과 계약한 시점부터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르펠이 그 이상함을 느낀 것은 모두 로한과 몸이 닿거나, 그가 근처에 있을 때였다.
이 가설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같은 행동을 다른 사람이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해 보라고 할 사람이 렉시아 정도이니 처음부터 그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옆에서 같이 자자고 할 수는 없으니 손을 물어 보라고 하는 게 최선 아닌가.
“…안 돼?”
“안 돼요.”
“소원 들어줄게.”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굳건했던 손이 한순간 잘게 떨렸다. 로한의 단호한 얼굴이 눈 녹듯 바뀌어 멍하니 아르펠을 쳐다볼 정도였다.
“…내가 뭘 바랄 줄 알고요?”
침묵 끝에 내놓은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번뇌의 흔적이 역력했음에도 아르펠은 담담하기만 했다. 대뜸 고백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무턱대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인가.
로한은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르펠이 고백을 의식하고는 있는 건가 하는 의심과 우울감이 들었고, 동시에 신뢰받고 있다는 기쁨이 겉돌았다.
결국 마냥 애매한 표정을 하던 로한이 아르펠의 손을 놓았다. 상반된 두 감정이 뒤죽박죽 섞인 애매한 기분임에도 소원을 들어준다는 달콤한 말에 기어코 넘어간 것이다.
원하는 바를 이룬 아르펠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자, 손 물어 봐.”
“…제 의사는요? 제 생각을 존중해 주는 사람은 없는 건가요?”
내민 손가락을 보며 렉시아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당연히 말릴 것이라 생각한 로한이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자,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하기 싫다고 자리를 뜬다면 뒤따라와 제압해서 손가락을 물려줄 사람이 아르펠이기에,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울상을 짓던 렉시아가 아르펠의 손가락을 물었다. 이왕 무는 거 한번 당해 봐라, 라는 생각으로 강하게 힘을 준 것은 덤이었다.
“악-!”
물론 그 선택마저 본인에게 해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한참을 글썽이던 렉시아가 원망이 녹아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부러 이런 거죠?! 무슨 몸이 철, 뭐 그런 거야? 나 괴롭히려고 오러나 마력 두른 거잖아요, 지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답을 맞힌 렉시아였다.
“내가 널 괴롭혀서 뭐 하게.”
“모르죠 저야!”
“꽉 문 거 맞아? 기별도 안 가는데.”
굉장히 억울해 보이는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르펠은 그가 제대로 물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는 건… 천천히 정리되어가던 생각이 뚝 끊겼다. 대뜸 손을 가져간 로한 때문이었다.
“더러워요.”
그는 평소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으로 아르펠의 손가락을 박박 닦기 시작했다. 흔적 하나 남지 않았음에도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이 상당히 불쾌해 보여서, 말없이 손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로한에 의해 꼼꼼히 닦이고 있는 손가락에는 이빨 자국 하나 없었다. 나름 꽉 물었던 렉시아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었다.
“윽.”
그러다 손가락이 물렸다. 괘씸하다는 듯, 렉시아가 물었던 바로 그 자리를 정확하게. 예상치 못한 행동에 한 줄기 신음을 흘리고만 아르펠이 여전히 손가락을 물고 있는 로한을 바라보았다.
로한은 이빨로 손가락을 앙 문 채 눈을 곱게 휘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날, 아르펠의 검지에는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았다.
67
양어깨를 하얀 붕대로 틀어 묶은 남자가 비틀거리면서도 꿋꿋하게 걸어 나갔다. 발아래에 밟히는 레드카펫에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져 내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비틀거리던 몸을 고정하고는 예를 갖춰 인사하는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모습에는 마치 자신의 신을 우러러보는 듯한 경건함마저 담겨 있었다.
“일어나렴, 오스카.”
말없이 이를 관찰하고 있던 황제, 미하일이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느긋한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스며든 채였다.
“많이 다쳤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방심한 바람에.”
“내가 네 실력을 모르겠니. 위험한 상황에서도 잘 해내 주어 고맙기만 한걸. 치료는 잘 했느냐?”
“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붕대는 이미 피로 흥건했다. 멀리서 보아도 서툰 처치라는 것을 알 법했으나, 미하일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남은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그 아이는?”
“확인했습니다.”
톡, 톡. 미하일의 손이 불규칙적으로 황좌의 팔걸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살짝 시선을 내리깐 오스카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호오.”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하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간혹 아예 예상치도 못한 흥미로운 일이나, 괜찮은 계획이 떠올랐을 때 그런 표정을 짓는 편이었다.
“검이 사람이 된다라…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오스카 네가 두 눈으로 직접 봤다면 확실한 것일 테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잠깐이지만 고뇌의 기색이 스쳤다. 녹음이 진 눈은 사뭇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래전 미하일은 구원교와 손을 잡고 신전의 마검을 빼돌렸다. 그 뒤로 신경을 껐지만, 실험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흥미가 생겨 마검을 받았다.
미하일은 그때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검이었지만, 더 이상 마검이라 부를 수 없는 그 존재가 마치 신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더랬다.
때마침 신전에 심어놓은 놈에게서 이번 대에 축복을 받은 존재에 대해서 들었다. 같은 시기에 천신전에서도 축복을 받은 아이가 나타났던 것은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두 신전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기에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로한의 집에 몰래 검을 가져다 두도록 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된 로한은 그가 의도했던 대로 마검을 쥔 듯했다.
“…마지막까지 살폈어야 했나.”
유일한 실책이라면 마을을 불태운 이후 로한의 동향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일 테다. 곧바로 신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으나, 그때 ‘아르펠’이라는 존재를 인지하지 못해 생긴 빈틈은 결국 모든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왔다.
얼마 전까지 황제는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믿었다. 첩자가 발각되어 더 이상 신전 내의 동향을 살필 수는 없게 되었으나, 타락한 마검과 접촉한 로한의 상태가 정상적일 리가 없다 확신했기 때문이다.
두 신전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지는 못했지만, 신전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고.
하지만 마검이 봉인 당하지 않고, 내내 축복받은 이의 곁에서 머물렀다는 것은…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완벽히.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그 벌레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한다고 들었는데.”
“네. 전할까요?”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주렴. 그리고….”
조만간 연회를 열어야겠구나.
남은 날을 가늠해 보던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둘을 자신의 눈앞에 데려와 실험해 보고 싶은 것들이 제법 많았다. 황제는 머지않아 다가올 그날을 고대하기로 했다.
***
그날, 로한과 아르펠은 악신과 구원교의 간부에 대해서 얻은 정보들도 렉시아에게 모조리 넘겼다. 렉시아는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많은 양의 자료를 받아들었다.
그 뒤로 이어진 나날은 비슷했다.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빠지긴 했지만 둘은 여전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원교의 지부를 털었고, 증거를 수집했다.
“완전 유명 인사가 되셨던데요?”
그저 숨겨진 장소를 털고 다녔을 뿐이니 사람들에게 알려질 리 만무했으나, 시기가 잘 맞아떨어져 잡혀 들어가던 사람을 직접 구하고 난 이후에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상업이 발달한 영지였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이야기가 순식간에 퍼져 버렸다.
로한은 피로한 낯이었지만, 렉시아는 생긋 웃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경계심을 높일 테니 마냥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꽤 줄 겁니다.”
“됐으니 다음 정보를….”
“아, 이번은 조금 달라.”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는 로한을 향해 렉시아가 눈을 찡긋댔다. 잠시 서랍을 뒤적거리던 그가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누가 봐도 화려함 일색인 것이 도저히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외견이었다.
금색 수가 놓여 장식된 것은 손에 와 닿는 감촉 역시 뛰어났다. 찬찬히 그것을 살피던 아르펠이 물었다.
“초대장인가?”
“맞아요. 정확히는 황실에서 온 초대장이죠.”
초대장을 뒤집자 뒷면의 오른쪽 아래, 멋들어진 필기체로 발신인이 적혀 있었다. 황실, 그것도 제국의 황제인 ‘미하일 렌제스터’라는 이름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곧 있으면 제국의 축제 기간이 되는 건 아시죠? 축제를 기념할 겸 황실에서도 큰 연회를 여는데, 그 연회의 초대장입니다. 적혀져 있는 바로는 두 분의 공을 치하하겠다는군요.”
초대장을 펼쳐 살핀 내용도 그랬다. 온갖 미사여구 끝에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며, 이번 연회에 참석해 제국민의 안정을 도모하고 축제를 빛내주기를 청하노라.’라는 문장이 이어져 있었다.
‘청하노라’라는, 존중해 주겠다는 태도가 다분해 보이는 어투이기는 했으나 황실의, 황제의 이름을 다는 순간 말투가 어떻든 강제성이 짙었다.
“꼭 참석해야 하나?”
흘끗 로한을 살핀 아르펠이 대신 물었다. 로한의 표정은 구겨진 지 오래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사람을 응시하던 렉시아가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신전과 황실은 독립적이지만 협력 관계에 가까워요.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지금도 겉으로는 그런 상태고요. 명분 없이 이를 거절한다면 신전이 물어뜯길 빌미를 제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디오넬 님이 따로 말씀하신 건 없습니까?”
구겨진 미간을 펴지 못한 로한이 렉시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원래라면 이 초대장은 신전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렉시아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관 중 하나가 초대장을 그에게 건네준 게 틀림없었다.
당연히 여러 말들이 오갔을 것이 분명하다. 렉시아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고개를 함께 끄덕였다.
“장로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더군요. 그렇지만 대신관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로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결국 그 자리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로한은 렉시아가 들고 있던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네, 어차피 아르펠이 곁에 있어 줄 거니까요.”
뒤따라 묻는 아르펠의 어조가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사건의 경위를 알고 난 이후 로한의 가장 큰 복수의 대상이 된 황제다.
연회에 참석하면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한을 걱정한 것이나, 정작 아르펠을 돌아보며 대답한 로한은 평소와 같은 순한 미소만을 띠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늠해 본 그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때 요동쳤던 것이 거짓말인듯 안정적이게… 평소와 같이, 자신을 향한 애정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르펠은 결국 입술을 짓씹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렉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굴었다. 종이 하나를 가져와 주소를 적어 내려가는 손이 자연스러웠다.
“그럼 이곳으로 가요. 함께 갈 신관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종이를 받아든 로한이 그것을 주머니에 넣느라 잠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고 있던 렉시아가 한순간 아르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그래서 그때 소원은 뭐로 빌었어요?”
살짝 미간을 좁혔던 아르펠은 금방이라도 뭐라 말을 할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나온 말은 없었다. 입술을 뻐끔거리고만 있자 눈을 동그랗게 뜬 렉시아가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안 빌었으니까 신경 꺼.”
내뱉는 말투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렉시아는 그런 공격적인 반응에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는 것을 막아 내려 애써야만 했다. 고개를 홱 돌려 멀어지는 아르펠의 목뒤가 붉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벨린한테 소식 좀 전해 줘요!”
결국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안부를 전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짜증 났다. 미간을 좁힌 채 기분 나쁜 티를 내는 아르펠을, 로한이 발견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아까 전 렉시아가 아르펠에게 붙어 무언가를 묻는 모습을 본 탓도 있었다. 고개를 가까이 붙여 묻는 것에 아르펠이 딱 굳었다.
“…그냥. 아무것도.”
상황을 피하는 느낌이 다분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는 듯 하던 로한은 살짝 달아오른 귀를 보고 나서야 가까이 붙였던 고개를 떼어냈다. 곧장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상당히 뿌듯해 보였다.
“그래요? 그럼 됐고요.”
익숙하게 로브를 둘러쓰고 번화가를 걸었다. 한 사람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산뜻했다.
아르펠은 언제나처럼 손을 맞잡아 오는 로한을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맞잡은 손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정들이 마냥 살갑기만 해서, 단단한 감촉이 나쁘지 않아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어쨌든 아르펠은 이 시간이 싫지 않았다.
‘모르겠어.’
이게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를 떠나, 이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간혹가다 모든 게 벼랑 끝에 몰려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감정의 끝을 볼 날이 머지않았다는 일종의 확신이 들어서일까.
괜히 손을 한 번 꼼지락거리며, 아르펠은 겁도 없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68
그날, 대뜸 한 부탁이었지만 아르펠은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다.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로한에게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손가락에 선명히 남아 있는 가지런한 치아 자국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모든 것이 이상했고,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원인이 로한이라는 데에서 아르펠은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저녁 식사를 이어 나갔고, 그날도 음식에 곁들여져 있는 당근은 아르펠의 차지가 되었다. 당근을 슬쩍 포크로 밀어낼 때면 쑥스러워하는 로한의 반응은 여전했고, 그만큼 귀여웠다.
“로한.”
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묵을 여관에 돌아온 때였다. 잘 채비까지 모조리 마친 채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아르펠이 문득 그를 불렀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살살 털고 있던 로한이 곧장 시선을 돌려 아르펠을 마주 보았다.
로한은 머리를 말릴 때면 물이 튀는 일이 없도록 살짝 떨어져 있었다. 변함없는 행동을 두 눈에 꼼꼼히 담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일렁였다.
누군가는 별게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는 아주 사소한 배려였지만, 로한은 언제나 그 사소한 배려들을 모으고 모아 아르펠을 소중히 대하고는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르펠이 굳이 이전의 주제를 꺼내어 물은 것은.
“소원이 뭔지는 말 안 할 거야?”
태연하게 흘러가던 모든 행동이 뚝 멈췄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빤히 마주 봐 오는 눈길이 강렬했다.
“…제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요?”
처음 소원을 들어주겠다 이야기를 했을 때와 비슷한 물음이었다.
뒤늦게 나온 목소리는 쥐어 짜내는 듯한 소리에 가까웠다. 미소를 그린 얼굴이었지만 무언가 참고 있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아르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내내 자리에 멈춰 서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던 로한이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성큼성큼 걸어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행태에 아르펠은 미처 물러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로한은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고개를 숙이자, 그에게 걸쳐져 있는 수건이 어깨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르펠.”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숨결이 닿는 가까운 거리였다. 아르펠은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며 홀린 것처럼 로한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찬란한 금색 눈동자가 계속해서 일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뚜렷하게, 한편으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랑을 갈구하는 감정들이 뱉어졌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 감정은 언젠가 알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동자에 서려 있는 감정이 너무나도 선명한 이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어딘가 모르게 벅차오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미 충분히 가깝다고 생각한 얼굴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감각은 배가되었다.
로한의 고개가 가볍게 비틀어졌다.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바랬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애정에 설렘과 떨림, 긴장이 섞여 들어갔다.
언젠가 한 번, 로한이 소원을 뽀뽀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르펠은 그때의 로한에게 별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도저히, 지금에 와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뭐가 달라졌을까. 로한의 감정을 의식한 것? 그것도 아니라면…….
그 순간 로한이 고개를 뒤로 확 뺐다.
“……로한?”
“장난이에요.”
그리고 지어진 것은 짓궂음이 한가득한 미소였다. 대뜸 돌변해 버린 태도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로한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잠시 말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하던 아르펠이 멀어지는 로한의 손을 붙잡아 확 당겼다. 떨어진 거리가 메꾸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왜?”
어째서 그를 붙잡았는지, 아르펠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것이 비이성적인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한 번 뻗어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멍하니 아르펠을 내려다보던 로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머지않아 그의 눈에 어떠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환희?
아르펠이 그것을 가만히 가늠해 볼 때였다. 가까이 다가온 로한의 손이 볼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아르펠, 제가 바라는 건요.”
“…….”
“우리가 조금, 다른 사이가 돼야만 할 수 있어요.”
잘게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고스란히 마주하며 로한은 다정한 미소를 그렸다.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에 잠깐이지만 넋을 놓고 말았다.
조금 다른 사이. 그 말을 들은 아르펠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꽉 붙잡고 있던 로한의 옷자락도 스르르 놓은 뒤였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은,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여러 감정이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지만, 전보다 흔들림이 명백하게 심해진 아르펠을 바라보며 로한은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결국 그날 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원을 말하는 것은 미루겠다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정리해줄 뿐이었다. 아르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열이 오른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복잡한 기분에 차라리 빠르게 잠들기를 기도한 날.
아르펠은 처음으로 잠을 설쳤다.
***
렉시아가 따로 적어준 주소는 영지의 번화가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저택이었다. 내내 여관을 전전하는 것이 다였지, 귀족이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쓸 법한 저택에서 머문 적은 없었다. 커다란 담장을 응시하는 눈들이 낯선 감정을 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오웬이었다. 아는 얼굴이 한 사람쯤은 오겠다 싶었으나 생각보다 더 익숙한 얼굴이 등장하자 로한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르펠은 영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간 담장의 내부에는 작지만 눈요깃거리가 될 만한 정원도 곱게 꾸며져 있었다. 흘끗 정원에 시선만 준 로한은 아르펠의 손을 단단히 붙잡곤 저택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만 이곳에 머물고, 곧장 수도로 올라갈까 합니다. 방은 이쪽, 도움이 필요하다면 설렁줄을 당기십시오. 식사 시간이 되면 집사가 알릴 테니 아래쪽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여러 설명이 몰아쳤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무감한 어조로 이것저것 말하던 오웬이 입을 딱 다물었다. 정갈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 다가와 그를 말린 탓이었다.
“도련님, 그렇게 불친절한 설명이라니요. 두 분께 저택을 소개하는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부탁하지.”
시선은 못마땅했으나 결국 오웬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도저히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은 노인을 슬그머니 피하는 것도 같았다.
“흠, 흠. 안녕하십니까. 비루한 몸이지만 피데스 후작가의 집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올리버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한껏 지어지는 웃음이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로한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오웬을 ‘도련님’이라 부른 것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었다.
“이런, 아직 말씀을 안 해 주신 겁니까? 도련님도 참…. 비록 신관으로 활동하고 있기는 하나, 저희 피데스 가문의 소중한 막내 도련님이시지요. 수도에 가실 일이 있다고 하여 제가 직접 내려왔습니다. 더 좋은 저택을 잡아 드리고 싶었거늘, 하도 됐다고 손사래를 치셔서…….”
장황한 정보가 쏟아졌다. 별로 듣고 있지 않은 듯한 영혼이 빠진 끄덕거림에도 올리버는 꿋꿋하게 가문에 대해 설명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그중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오웬이 현재 황실 재상 가문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르펠은 언젠가 디오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재상 가문이라면 어쩔 수 없이 황실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굳이 신관이 된 이유는 뭘까. 말을 제대로 나눠 본 기억이 드무니 알 리가 없었다. 로한이 아닌 주위의 사람들에게 워낙 관심이 없는 행동이 이렇게 되돌아오고 말았다.
올리버는 이 저택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있을 건 충분히 있는 곳이었다. 뒤늦게서야 묵을 방을 안내받고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숨을 돌렸다.
와중에 아르펠은 올리버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둘이서 한 방을 쓸 예정이라고 하니 그의 표정이 굉장히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돌을 던진 수면처럼 일렁이기를 반복하던 것도 잠시, 마침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흐뭇한 미소였다.
‘허허, 그거 아주 좋네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더 좋은 이불을 가져다드리겠다며 방을 들쑤시고 난 뒤에야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인상을 좁혔으나, 아르펠의 신경은 다시 로한에게로 쏠렸다. 정확히는 그가 살포시 웃으며 건넨 말 때문이었다.
“침대가 엄청 넓네요. 우리 둘이 뒹굴어도 되겠다.”
“뒹굴……?”
아르펠은 차마 뒷말을 완전히 되뇌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묘해진 표정을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것인지 침대를 톡톡 두드리는 로한은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결국 더 묻기를 포기한 아르펠이 창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깔끔한 창틀이 제법 인상적이다. 가볍게 몸을 걸쳐 바라보는 너머의 풍경이 빽빽했다.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요.”
말을 걸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침대 가까이에 서 있던 로한이 냉큼 창가로 다가왔다. 훌쩍 다가온 몸이 짧게 바람을 일으켰다. 열린 창틈 사이로 밀려들어 오는 바깥 냄새에 로한 특유의 향기가 섞여 들었다.
“…황제 말이야.”
“그러는 아르펠이야말로. 그 사람한테 당한 짓이 있잖아요.”
“당한 짓…?”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깨달았다. 황제의 계략에 의해 신전에서 빼돌려져 실험을 당하긴 했으니까. 아르펠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로한은 쓰게 웃기만 했다.
“그럴 줄 알았어. 매번 나만 신경 쓰잖아요.”
“네가 중요하니까.”
아르펠에게 중요한 건 로한밖에 없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며, 아르펠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나를 위해서라도 계속, 내 곁에 있어야 해요.”
사소한 변화에 불과한 것을, 로한은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뒤늦게 내뱉은 한 마디는 수많은 감정에 매몰된 것처럼 푹 잠겨 있었다.
바람결에 로한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들이치는 노을을 품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사뭇 금빛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69
다음날, 그들은 곧바로 수도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떠나야 한다는 올리버의 주장에 오웬은 상당히 귀찮아했지만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짐을 챙기는 내내 올리버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바로 어제 저택에 도착했던 둘은 당연하게도 손이 가벼웠다. 그럼에도 마차 하나를 통째로 배정받았다. 질이 그렇게 좋지 않을 거라며 상대는 죄송한 표정을 했으나, 여태껏 타 보았던 그 어떤 마차보다 질이 좋았다.
그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 피데스 후작가의 재력을 완전히 실감한 것은 수도의 저택에 도착하고 난 이후였다.
“되게 넓네요….”
아르펠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어가던 로한은 짧은 감상 평을 토해냈다. 언뜻 본 저택의 모습은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이 지내던 신전과 엇비슷했다. 그저 수도에 둔 여유분의 저택이 신전만큼 커다랗다는 것은 그들이 쌓은 부가 어마어마하다는 뜻과도 같았다.
“영지에 있는 저택은 이보다 조금 더 넓답니다. 다음에 시간이 되시면 한 번 놀러 오…….”
“누구 마음대로.”
“도련님도 참, 친구 분들이시잖습니까?”
올리버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게도 그 말을 들은 오웬은 아주 괴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누구보고 친구라는 거야. 딱 그 표정이었다.
“한 번도 손님을 저택에 모셔와 가장 커다란 방을 내어 준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만큼 두 분을 소중히 여기고 계신단 뜻이겠지요.”
전혀 아니었다. 오웬은 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부득불 큰 방을 내어준 것은 디오넬이 두 사람을 소중히 모시라고 이야기한 탓이었다. 그저 상사의 말을 잘 들은 죄밖에 없던 터라, 미간이 파삭 일그러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물론 올리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사의 성격이 유별난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도착한 뒤 짐을 풀 때까지, 그의 오해에 진을 쏙 빼고만 오웬은 상당히 피로한 낯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몇 년 전 아르펠은 로한과 함께 수도에 온 적이 있었다. 마냥 어렸던 그를 데리고 신전에 가기 전, 2년의 시간 동안 제국 곳곳을 여행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때 본 광경들과 지금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기억나? 전에 수도에 왔던 거.”
“당연하죠. 유명한 빵집도 갔었잖아요.”
살짝 돌려진 시선이 로한에게 닿았다. 확실히, 꽤 유명한 빵집에 가 보겠답시고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려 본 적이 있었다.
로한을 빤히 바라보는 눈이 퍽 의외라는 기색을 머금었다. 인간은 어릴 때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 때문일까. 흘러간 세월이 많아서, 함께했다는 것은 기억하더라도 어느 곳을 여행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 맛있었는데…… 또 갈까요?”
“계속 기다리게?”
“…그냥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투덜거리는 입 모양이 어릴 때와 비슷했다. 그때의 로한도 마찬가지였다. 뙤약볕 아래에서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보여 대부분의 시간을 아르펠이 안아 든 채로 보냈는데, 그럼에도 입술은 삐죽 튀어나와 있었더랬다. 빵이 먹고 싶었는지 뚱한 표정임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어이 먹고 싶은 것을 손에 넣었었다.
그 자그마한 얼굴에 얼마나 강단이 서려 있던지. 다행인 점은 고생 끝에 얻어낸 빵이 굉장히 맛있었다는 것이었다. 작은 손으로 양손 가득 빵을 쥔 로한이 입이 미어터지도록 빵을 베어 물고는 행복해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아르펠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나중에 만들어 줄까?”
“음.”
슬쩍 고개를 기대는 로한의 움직임에는 애교의 기색이 다분했으나, 뒤따른 말에 뚝 멈춰 섰다. 아르펠의 눈치를 살피듯 데구르 구르는 눈동자가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그, 아르펠은 힘든 거 하면 안 되니까, 제가 해 줄까요?”
조심스레 손을 붙잡고, 그 위에 고개를 기댄 채 살짝 기울이는 모습에 창으로 들이치는 햇볕이 더해지니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응시하는 아르펠의 눈은 묘하기만 했다.
“내가 한 게 싫어?”
“네? 아, 아니. 아니요. 안 싫은데….”
당장이라도 사람을 홀릴 듯 반짝거리던 눈망울이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살짝 숙어지는 고개와 냅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어버리는 행동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노력이었으나 아르펠의 손길에 금세 무마되고 말았다.
알게 모르게 미간이 좁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뭐가 됐든 아르펠에게 감정이 전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로한은 말을 아꼈다.
그가 망설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자신에게 음식을 한 번 만들어 주었다가 참혹하게 실패한 그날 이후, 아르펠은 몇 번이고 요리에 도전해 보았지만 모조리 같은 결과를 낳았다.
웬만하면 아르펠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로한조차 맛있다고 말하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아르펠은 괜히 입술을 한번 삐죽였다.
“가, 같이 만들까요?”
기민하게 아르펠의 눈치를 살피던 로한이 환하게 웃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르펠의 표정이 풀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의 손을 거쳐 나온 요리가 차마 음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애써 외면한 것에 가까웠다.
결국 언젠가 함께 만들기로 약속했다. 살살 달래려 하는 로한의 낌새를 알고 있었음에도 아르펠은 그의 표정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올리버는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그들을 찾아왔다. 뿌듯한 미소가 담긴 얼굴로 실례하겠다며 양해를 구한 그는 뒤쪽에 있는 무언가를 힘차게 끌었다.
여러 옷이 걸려 있는 기다란 거치대가 주르륵 딸려 들어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활짝 머금은 채로 들어오는 여성도 함께였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로한의 표정이 묘했다.
“…뭡니까?”
“연회의 꽃은 자고로 매력을 한껏 높여 주는 착장 아니겠습니까.”
짝짝, 그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마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그들의 목표가 된 것은 아르펠이었다.
걸려 있는 옷들 중 여러 벌을 들고 와 대어 보는 낌새에 로한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평소와는 다르게 한껏 꾸민 느낌을 주는 옷을 대어 보는 그를 더 잘 보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이건 너무 화려하군요.”
“붉은색 장식이 눈에 띄는 건 되도록 피해야….”
“…흠. 이건 단추가 너무 동떨어진 것 같기도.”
새로운 옷이 아르펠의 몸에 대어지면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고 그 행동이 반복되자 인형처럼 서 있기만 하던 아르펠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로한과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했다는 데에서 온 번거로움이 주된 이유였다.
“오, 이거 꽤 괜찮군요.”
마침내 올리버의 입에서 처음으로 긍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아르펠의 눈이 로한에게 향했다. 확인을 구하는 눈이었다.
“…정말, 정말 예뻐요, 아르펠.”
다만 로한은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이 완전히 넋을 놓고선 정신없이 아르펠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온갖 황홀함이 그에게서 밀려들어 왔다.
덕분에 아르펠은 그의 시선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답답함, 혹은 울렁거림에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아르펠 님, 어떠십니까?”
“…상관없으니 이걸로 해 주십시오.”
“허허, 늙은이의 안목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뿌듯함이 적나라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올리버가 로한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저도 같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호오.”
여전히 아르펠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로한이 대답했다. 잠시 눈을 크게 뜨던 올리버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럼 색상과 장식에 조금씩 변화를 주겠습니다. 이 옷의 시안대로 두 벌을 맞춤 제작해 주시되, 이 부분의 레이스는 조금 짧게…… 아. 단추의 색을 다르게 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그 뒤로 한참 동안 옷을 받아 들은 여성과 올리버의 사이에서 열정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주로 옷에 몇 가지 변화를 어떻게 줄 건지, 어떤 것이 더 어울리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었다.
그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옷이 잔뜩 있던 거치대들도 뒤늦게 사라졌다. 거의 다섯에 가까운 인원이 사라지자 그제야 방이 좀 넓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르펠은 처음으로 정신적으로 지친다는 게 무엇인지를 절절히 깨달아 버렸다.
폭풍이 휘몰아친 것만 같았다. 물론 심적인 의미에서였다.
“…여러 벌 대 보지 그랬어.”
다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로한이 옷을 일절 대어 보지도 않고 연회 때 입고 갈 옷을 정했다는 것이다.
가늘게 뜬 눈에서 묘한 불만족이 읽혔기 때문인지, 멀뚱히 눈을 깜빡이던 로한은 이내 사르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 끝에서 찰랑거리던 불만조차 순식간에 녹이는 얼굴이었다.
“그냥, 같은 옷 입고 갈 생각하니까… 너무 기뻐서요.”
수줍게 고인 미소 아래로 꽃잎이 물들듯 홍조가 피어올랐다. 너무나 선명한 변화에 아르펠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아르펠에게 속삭이는 애정과 사랑의 일면에 온갖 기쁨과 행복이 아롱거렸다. 단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수많은 감정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결국, 말없이 입술을 짓씹던 아르펠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로한은 냉큼 아르펠에게로 다가갔다. 고개를 살며시 어깨에 기대고선 비비적거리는 꼴이 영락없이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개를 닮아 있었다.
“제가 정말 정말 좋아해요…….”
탄식과 같은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기대고 있는 아르펠의 어깨가 잠깐 떨렸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르펠은 로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단순히 못 들은 척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미안해할 이유를 차차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두 눈에 짙은 욕망이 스쳐 지나간 것은 아주 잠시였다.
어쩌면 정말로…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로한의 얼굴에 화사한 볕을 담은 미소가 어렸다.
70
시간은 빠르게 흘러 그들이 초대받은 연회의 당일이 되었다. 수도에서 열리는 성대한 축제의 시작일이기도 한 터라, 날이 가까워질수록 시끌벅적해지던 수도의 거리는 이제 누가 봐도 축제의 느낌이 만연한 상태였다.
가게들은 귀엽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안팎을 장식했고, 커다란 거리에는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북돋는 노점상들이 차려졌다.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되는 밤은 멀었음에도 물씬 풍기는 축제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돌아다니는 인파들이 바글바글했다.
“되게 예뻐요, 아르펠.”
그리고 지금 로한은 아르펠을 마주 본 채로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환하게 피어난 얼굴에서 행복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르펠은 영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신전에서 지낼 때도 내내 편한 옷을 고수하던 편이라 한 번도 연회복 같은 각 맞춘 차림을 한 적이 없던 탓이 컸다.
그를 더 어색하게 만든 건 맞은편에 있는 로한의 차림도 한몫했다. 단추의 디자인이라던가, 소매의 길이라던가, 목깃의 스타일 등 세세한 부분이 다르긴 했지만, 지금 로한이 입고 있는 옷은 누가 봐도 아르펠과 맞춰 고른 옷이었다.
“…너무 비슷하지 않아?”
“전 그래서 더 좋은걸요.”
괜히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던진 물음은 간단하게 묵살되었다. 만족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또 그 적나라한 감정을 느끼고 있자니 도저히 싫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로한의 옷은 언뜻 보면 과거 신전에서 즐겨 입었던 예배 때의 복장과 비슷하기도 했다. 조금 더 화려한 수가 놓여 있고, 중간중간 선이 우아하게 떨어지는 레이스가 달린 탓에 신관보다는 귀족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달랐지만.
대충 단정하게 빗고 가는 편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연한 갈색 머리가 깔끔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다. 아침부터 둘을 달달 볶은 사용인의 경탄할 만한 노력의 결과였다.
“연회,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홍조가 어린 볼을 하고 살포시 웃는 모습은 새벽녘에 이슬을 털어낸 한 떨기의 꽃 같았다. 그만큼 시선을 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로한이 아르펠을 보는 눈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가 입은 검은색의 옷과 대비되는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아르펠은 안 그래도 고아한 귀족을 연상시켰던 분위기가 더욱 빛을 발했다.
반을 넘긴 검은색 머리가 유독 새하얀 피부, 그리고 옷과 대비됐다. 분칠로 인해 더욱 깊어진 듯한 눈꼬리는 사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그의 주위를 감돌았다. 위태롭기도, 그만큼 매혹적이기도 했다. 로한은 참지 못하고 아르펠에게 고개를 기대었다. 마음 같아선 꽉 끌어안고 싶은 것을 일말의 이성이 멈춰 세웠다.
“…아니. 생각해 보니 별로일지도.”
“좋다고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싫은데요….”
웃음을 터뜨리기라도 했는지 기대고 있는 몸이 짧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로한은 정말로 진지했다. 방금까지 머릿속으로 찬양했던 아르펠의 모습을 다른 사람도 본다고 생각했더니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를 자랑하고픈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자랑해서 얻는 결과가 떨어지지 않는 수많은 시선이라고 생각하면 불쾌하기까지 했다.
결국 아르펠은 가기 싫어하는 로한을 어르고 달래 마차에 올라타야 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같은 복장을 차려입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건 올리버뿐만이 아니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공을 들여, 누구보다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사용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껏 뿌듯해하는 반응들을 뒤로하고 올라탄 마차는 겉보기에도 화려했고, 내부도 휘황찬란했다. 미리 타고 있던 오웬은 이런 마차를 타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듯 아주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꼭 그렇게, 같은 옷을 입어야만 했습니까?”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시달리느라 아르펠과 로한을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던 오웬은 그제야 그들이 차려입은 옷을 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맞춰 입은 것이 티가 나는 옷이었다.
“예쁘기만 합니다만.”
물론 그런 말에 기가 죽을 로한이 아니었다.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얼굴에 도리어 오웬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연회에서 같은 옷을 맞춰 입는다는 건….”
“거기까지.”
얼굴에 한가득 배어 있던 웃음이 짙어졌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요구에 오웬은 결국 혀를 차며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잠시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가늠하던 아르펠은, 기류의 정체를 끝내 눈치채지 못하고 시선을 떼야만 했다.
손을 만지작거리는 로한을 익숙하게 내버려 둔 채 살짝 열린 창 사이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 번씩 수도에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축제의 시작일은 오래전 인간들이 망령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날이었다. 위협을 극복해 내고 살아남았음을 기념하고, 앞으로도 이러한 승리를 쟁취해 낼 것임을 기약한다.
그런 의미로 시작된 축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제국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껏 망령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온 주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왁자지껄함은 사그라들었다. 대신 마차의 수가 눈에 띄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주최한 커다란 연회에 초대된 귀족들의 행렬이었다. 오래전 용병 일을 하면서 귀족의 의뢰를 받았던 것 말고는 딱히 그들과의 접점이 없었던 아르펠은 한동안 그들에게 빤한 시선을 주었다.
얼마 안 가 흥미가 끊겨 창을 닫아 버렸지만 말이다.
창마저 완전히 닫히니 은근히 들리고 있던 바깥의 소음이 뚝 끊기며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숨이 막힐 듯한 조용함에 어색함을 호소할 만한 상황임에도 로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펠의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똑똑,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무장을 하고 있는 경비병이 보였다. 어느샌가 황궁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입구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아무리 황궁의 경비병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귀족의 얼굴을 알 리는 없다. 신원 확인을 위해 이것저것을 물어보거나 무언가를 요구할 줄 알았던 이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지체 없이 창을 닫아버리자 의아한 시선이 오웬에게 닿았다.
“…원래는 이렇지 않습니다. 신원 확인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합니다만, 제가 몇 번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어 오랫동안 경비병으로 근무했던 자라면 얼굴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가 곧장 걸음을 돌린 이유는 오웬 때문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외우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황실 재상 가문의 공자 –비록 현재의 신분이 신관이기는 하지만-를 잊을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이르게 황궁의 안으로 진입했음에도 마차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궁의 내부가 굉장히 넓다는 뜻이기도 했다.
…쓸데없네.
그들이 머물던 수도의 저택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신전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의 황제가 즉위하며 대대적으로 증축을 했다는군요.”
아르펠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적이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오웬은 흘끗 시선을 바깥으로 던지며 답했다.
단순히 황권을 다지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짧은 의문이 살짝 열린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온 바람과 함께 금세 쓸려나갔다.
***
연회의 시작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워낙 많은 수의 귀족이 모여서인지 새로운 귀족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연회장의 앞을 지키는 사람조차 없었다. 등장하는 순서도 제각각인 탓에 슬슬 사람이 모인다 싶으면 본격적인 연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듯했다.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모이는 몇 안 되는 자리인 만큼, 오늘의 연회는 많은 소녀들이 데뷔탕트를 치르는 날이기도 했다.
알록달록, 풍성한 드레스 자락은 마치 여러 꽃봉오리를 연상시켰다. 연회장의 구석을 말없이 지키고 있던 아르펠은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나름 흥미롭게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관심 있어요?”
뒤늦게 들리는 목소리가 뚱했다. 돌아본 얼굴 또한 목소리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다. 아르펠이 고개를 빠르게 젓고 나서야 표정이 풀리기는 했다만, 불만이 잔뜩 서려 있는 얼굴만큼은 어릴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사람처럼 딱 붙어있는 둘을 바라보는 오웬의 눈이 퀭했다. 한쪽은 이런 상황을 의식조차 하고 있지 않은 듯해서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은 연회의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번지르르한 겉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신분 탓이 컸다. 입김이 꽤 있는 귀족이라면 진작 정보를 사, 로한이 최근 들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축복받은 존재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로한을 노리는 소녀들이 제법 있을 게 분명했다.
비록 아르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로한과 내내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치는 올라갔다.
물론 그들이 입은 옷이 시선을 더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음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오웬은 슬그머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레리아나는 오지 않는 겁니까?”
익숙하게 로한을 달래 주던 아르펠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오웬에게 물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연스레 대꾸했다.
“네. 수련으로 바쁘다 하더군요. 실상은 그렇지만 몸이 안 좋은 것을 이유로 연회의 초대를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별것 아니라는 투로 답하던 오웬이 반응을 달리한 것은 아르펠의 표정을 본 탓이었다. 웬만한 것으로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얼굴에 명백하게 놀란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르펠? 왜 그래요?”
내내 그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로한도 쉽게 알아챈 변화였다.
한편, 아르펠은 커다란 혼란을 맞았다. 당연히 올 것이라 생각했던 주인공이 연회에 오지 않는다는 답을 받았기 때문이다.
‘…레리아나가 안 온다고?’
원작과 겹치는 몇 안 되는 줄기가 시작부터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71
아르펠은 로한과 함께하기로 한 뒤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당장만 해도 렉시아, 이벨린과 협력해 구원교의 지부를 찾아다니는 마당이었으니 기존의 전개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큰 줄기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 로한이 신전에서 컸다는 것, 가족의 복수를 위해 구원교와 맞붙기로 했다는 것이 그러했으며,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이 연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연회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이 또한 비슷한 전개로 흘러가리라 생각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건.
“…레리아나가 안 온대서.”
“왜요. 보고 싶어요?”
“아니.”
생각에 빠진 터라 점점 부루퉁해지는 목소리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아르펠은 단호하게 부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망설임 한 자락 묻어나지 않는 것에 로한은 그새 기분이 풀어진 듯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얽혀오는 손을 피하지 않으며 아르펠은 조용히 생각했다. 원래라면 레리아나가 참석했을 이번 연회에서는 전개상 상당히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바로 연회에 참석한 황태자가 레리아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다.
원작에서야 황제가 한 패였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로한의 질투를 유발하는 작은 장치에 불과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첫눈에 반했다며 다가간 그의 행동도 로한과 레리아나의 사이를 캐 보기 위한 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좋아했다면 자기 아버지가 벌이는 일을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었으니까.
아르펠이 개인적인 생각을 하든 말든 시간은 흘렀고, 물씬 달아오른 연회의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오고 가는 대화를 실었다. 그런 흐름을 타고 간을 보고 있던 몇몇이 슬금슬금 그들의 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페로든 백작가의…….”
“그간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종종….”
로한은 평민이었지만, 그의 반짝이는 외모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보증된 신분은 많은 귀족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르펠의 손을 놓은 로한은 제법 능숙하게 몰려든 이들을 상대했다. 신전에서 몇 번이고 예배를 담당하면서 귀족들을 상대해 본 이력이 꽤 쌓인 덕이었다.
물론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뿐이지, 아르펠을 혼자 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로한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르펠이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틈틈이 살폈다.
그의 배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아르펠은 잠시 끊겼던 생각을 다시 이어나갔다.
‘이미 원래의 전개는 물 건너갔어.’
레리아나가 없으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원작 속 황태자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로한이 레리아나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기 위한 계기에 불과했으니까.
아르펠은 원작의 줄거리를 알고 있음에도 이를 강박적으로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로 인해 이미 많은 것이 틀어졌음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상관없겠지.’
애초에 황태자는 황제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였다. 어쩌면 엮이지 않는 것이 이상적인 전개일 수도 있다. 아르펠은 깔끔하게 황태자에게 신경을 껐다.
“그런데 이분은….”
짧은 대화만을 나누고 쳐내기를 반복했으나 로한의 앞에 몰려든 많은 귀족 중 누군가가 기어코 아르펠에 대해서 물었다.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모두가 궁금해하기는 했는지 금세 시선이 몰려들고 말았다.
“그도 신관입니다만, 로한 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그 물음에 대신 답을 준 것은 살짝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다가온 오웬이었다.
신전에 들어간 지라 귀족의 신분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제국의 재상 가문이라는 거대한 뒷배경은 여전했다. 그렇기에 그와 말 한번 나누어 보려는 귀족들이 떼를 이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귀찮다는 티를 역력히 내는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마저 감돌았다.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에 처음 질문했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르펠에 대한 질문은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두 분은 미래를 약속한 정인이신 건가요?”
내내 로한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소녀 중 한 명이었다. 두 눈이 열의로 불타오르는 것을 보니 아니라는 대답만 듣는다면 어떻게든 로한과 접점을 만들어 볼 의도가 한가득해 보였다.
당연히 그 속내는 아르펠에게도 읽혔다. 앞뒤 가리지 않고 낯이 반사적으로 일그러졌다. 예쁜 인형 같기만 하던 얼굴이 불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이 모조리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여전히 연회장 대부분은 시끌벅적했음에도, 그들이 서 있는 공간만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질문했던 소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벼락같은 목소리가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거운 분위기를 거짓말처럼 깨부쉈다. 여러 이야기를 꽃피워가며 웃고 떠들던 귀족들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연회장에 입장하고 있는 이들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의 표시였다.
아르펠은 남들과 똑같이 고개를 반쯤 숙인 상태에서 옆의 로한을 흘끗 응시했다. 눈을 가만히 내리깐 채 예를 표하고 있는 로한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덤덤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 와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뜨여진 눈이 아르펠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도 금방이었다. 곱게 휘는 로한의 눈꼬리는 반쯤 반사적인 행동처럼 보였으나, 흘러나오는 온갖 애정만큼은 진짜였다.
“다들 고개를 들으시게.”
정적이 가득 찬 거대한 홀에 온화한 목소리가 뚝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고개를 들은 아르펠은 저 멀리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인간보다 배로 뛰어난 시력이 그의 생김새를 낱낱이 보여 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는 사뭇 유약해 보인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말 한 번으로 이 넓은 공간을 휘어잡았다는 것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걸맞은 기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짧은 은발,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녹색에 가까웠다. 황제의 옆에는 그를 쏙 빼닮은 남자 하나도 함께 있었다.
‘황태자.’
그리고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벨린도 함께였다. 오늘따라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 색이 한층 강렬해 보였다.
황제는 그 뒤로 짧은 인사말을 건넸다. 연회를 즐기고, 앞으로의 축제도 성황리에 끝나기를 바라는 말이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로한의 앞에 줄지어 있던 사람들은 사라진 뒤였다.
“…정인이라는 말은 왜 한 거야?”
아까의 불쾌함이 잔재해 있는 건 여전했기에, 그 불쾌함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아르펠은 로한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것만으로도 널뛰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당신들이 입은 옷 때문입니다.”
“옷?”
“예로부터 같은 옷을 맞춰 입으면 정인이거나,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이라고들 여겼지요. 로한 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별 내색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르펠이 뚝 멈췄다. 고개가 빠르게 돌아가며 자신의 옷과 로한의 옷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맞춰 입은 옷이었다.
정인이라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사방팔방 알리고 다녔다는 건가? 유난히 맞춰 입은 옷을 좋아하던 과거 로한의 반응이 연신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동시에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새하얀 백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슬며시 아르펠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그의 얼굴에 차츰차츰 열이 오르는 것을 눈치챈 로한이 마냥 수줍은 미소를 내걸었다. 적나라한 사랑이 퐁퐁 흘러나왔다. 감정을 읽는 능력 따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오웬에게도 훤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반쯤 고장 난 아르펠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다. 한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폐하.”
오웬이 한 줄기 음성을 토해냈다.
황제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르펠은 저 멀리 서 있는 이벨린과 눈이 마주쳤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로한이 기계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연회는 잘 즐기고 있는가?”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묻어나지 않은 온화한 얼굴이었다. 태연한 로한의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거슬렸는지. 그를 마주 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뒤늦게 인사를 드리는군요. 부족한 몸으로나마 마신을 모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로한입니다.”
“그대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네. 부족하다니, 그런 말 말게. 최근 제국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으니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던걸.”
“과분한 축복을 받은 덕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둘 사이에서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제국민을 해치려 한 이단의 계획을 무사히 막은 것을 치하하는 말과 그에 감사를 표하는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내내 로한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황제가 낌새 하나 없이 아르펠에게로 화제를 돌린 것은 그때였다.
“들어보니 함께 공을 세운 것 같던데. 괜찮다면 간단한 소개를 들어보고 싶군.”
“…로한 님을 도와 신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르펠입니다.”
“호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와 일반적인 신관 사이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아르펠이 굳이 로한에게 존칭을 사용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무엇에 흥미를 느꼈는지, 반짝이는 눈동자는 아르펠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런. 내가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군. 괜찮다면 추후 알현실에 들러 주겠나? 그대들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그래.”
“뜻에 따르겠습니다.”
“기대하겠네.”
확답을 받고 나서야 황제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느릿한 걸음걸이 하나에도 위엄이 묻어나오는 이였다.
뒤늦게 로한은 웃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몸을 비스듬히 돌려 아르펠을 마주하고는 은근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다른 귀족들을 등진 채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기분 나빠요.”
“괜찮아? 바람 좀 쐴까?”
“하…….”
입술을 짓씹는 얼굴은 사뭇 초조하게까지 보였다. 하긴, 그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게끔 만든 이가 황제였다. 그를 눈앞에 두고 태연하게 굴었던 로한이 대견하게까지 느껴졌다.
72
황제를 마주할 때만 하더라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린 채였다. 생각보다 더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그를 당기는 아르펠의 손길이 급해졌다. 흘끗 오웬을 돌아보며 고갯짓을 한 번 해 보이고는 그대로 연회장 바깥으로 향했다.
미리 오웬에게 설명을 들었던 대로, 바깥에는 참석자들이 쉴 수 있도록 서로 분리된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찾아 들어간 아르펠이 곧장 커튼을 쳤다.
“좀 괜찮아?”
선선한 바람이 굽이쳐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괜히 로한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을 밀어내지 않은 로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려는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조금만….”
“응?”
“조금만 더, 위로해 줘요….”
작은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당장이라도 끊길 듯한 숨소리에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목이 꽉 막히고 진창을 구르는 것만 같은 답답함이라, 아르펠은 그저 로한의 바람대로 가만히 그를 쓰다듬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림을 그리듯 볼 위를 노닐었다가 목으로 내려왔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목덜미를 느릿하게 토닥거리는 손이 익숙했다.
손이 귓가를 스칠 때마다 로한의 몸이 움찔거렸다. 창백했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용히 쓰다듬을 받고 있던 로한이 웅얼거렸다.
“…그 자식이 아르펠한테 관심 가지는 게 싫어요.”
순조롭게 이어 나가던 손길이 뚝 멈췄다. 로한이 말한 ‘그 자식’은 황제가 분명했다. 당연히 가족을 잃었던 그날 밤의 악몽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르펠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당황하고 말았다.
“다시… 다시 데려가면 어떡해요? 전처럼 아르펠을 노리면….”
잠시 흔들리던 눈은 로한이 더듬더듬 말을 이을수록 잔잔해졌다. 아주 오래전 황제에 의해 아르펠이 구원교에게 넘어갔음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유독 황제와 구원교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그 장본인을 직접 마주한 데다가, 황제는 아르펠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로한이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속이 답답한 건 여전했다. 불안의 기색이 가시지 않은 로한을 의자에 앉히고는 내려다보는 눈이 선명했다. 금빛 눈동자가 홀린 것처럼 아르펠의 눈에 사로잡혔다.
단단하게 양 볼을 쥔 손이 말랑거리는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로한이 작게 신음을 냈다.
“그런 걱정 하지 마.”
“그치만…….”
“강하잖아, 로한. 나 지켜 주겠다며.”
어릴 적부터 몇 번이고 해 온 약속이었다. 그 말을 가슴속에 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로한은 뒤늦게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다는 듯 세차게 움직이는 고개가 귀여워 보였다.
로한의 상태는 한층 안정되었지만 아르펠은 그에게 조금 더 확실한 무언가를 쥐여 주고 싶었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로한, 우리가 떨어지게 되더라도… 네가 부른다면 난 언제든 네 옆으로 갈 수 있어.”
“…정말요?”
“난 네 검인걸.”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눈이 짧게 일렁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벅차오름이, 선명히 전해지는 만족스러움이 점차 기분이 나아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완전히 감정을 가라앉힌 로한이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아르펠은 볼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바람이 시원했다.
많은 귀족들이 모여있어도 넉넉할 정도로 커다란 연회장이었지만, 북적한 느낌과 끊이지 않는 소란은 어쩔 수 없었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어지러웠던 정신도 말끔하게 환기가 되었다.
연회장의 소음은 멀게만 들리고, 수풀과 나뭇잎이 한껏 흔들리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깔렸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흐드러진 달빛이 선하게 웃고 있는 로한의 얼굴 위로 내리쬐었다.
어쩐지 목이 탔다.
“마실 거 갖고 올까.”
“제가 갔다 올게요.”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음료를 건네주던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들에게 음료를 받아올 생각으로 일어났건만, 로한이 멈춰 세우는 바람에 다시 앉아야 했다.
“여기서 저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로한은 커튼을 걷고선 테라스 바깥으로 나갔다. …목이 말랐나? 휑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실없는 추측을 했다. 그저 아르펠 혼자서 사람이 많은 연회장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던 것뿐이었으나, 아르펠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둘이 함께 있던 탓일까, 유난히 테라스의 안쪽이 넓게 느껴졌다. 그만큼 고요하기도 했다. 슬슬 흔들리는 수풀의 소리는 어렴풋하기만 해서 오히려 혼자라는 감각을 더욱 북돋아 주기 바빴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닫혀 있던 테라스의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너는.”
안쪽으로 들어온 사람은 로한이 아닌 불청객이었다. 단순한 불청객이라 취급하기에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라는 것이 흠이었지만 말이다.
황실의 상징이기도 한 은발에 녹색 눈동자는 달빛 아래에서 고고히 빛났다. 귀찮았지만 나름의 예는 취해야 했기에, 아르펠은 하는 수 없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르펠입니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이 문제였다. 귀족이 자신의 가문을 밝히듯, 신관의 신분으로 온 아르펠이었기에 신전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이 또한 오웬이 여러 번 일러준 덕에 알고 있었으나, 기다리는 로한은 오지 않고 달갑지 않은 이가 나타나자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다.
아직 인간들 사이의 과도한 예법은 아르펠에게 번거롭기만 했다. 그로서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그, 나는…….”
원래라면 귀찮은 티가 역력한 인사말에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무례를 지적해야 할 인물이 고장 나 버렸기 때문이다.
테라스에 들어서자마자 황태자는 달빛을 등지고 선 인물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밤하늘이 녹아든 듯한 새까만 머리가 바람결에 흩날렸고, 고요히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는 세상 그 어떤 진귀한 보석을 가져오더라도 뒤지지 않을 만치 아름다웠다.
새하얀 피부에 살짝 분칠한 건지 눈두덩이가 붉은빛을 머금고 있어 은근한 요사스러움을 풍겼으나, 틈 하나 없이 온몸을 싸매고 있는 하얀 정복 탓에 금욕적인 느낌도 깃들어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던 그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야 말았다. 그것은 마치 온 세상이 두 쪽 나는 듯한 충격 같았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죄송합니다만, 이미 맡은 자리입니다.”
물론, 그러든 말든 아르펠은 정중히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 그제야 멍하니 아르펠을 바라보고만 있던 황태자가 정신을 차렸다.
“…루시엘 렌제스터다.”
잠시간 뜸을 들이던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붉은색의 카드를 들었다.
“테라스를 사용하고 있을 때는 창에 이것을 꽂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들어오는 일이 있으니, 앞으로 주의하도록.”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아르펠은 그저 감흥 없이 그가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테라스에 들어올 때부터 테이블에 놓여 있어 무엇인가 했더니만, 사용 여부를 표시하는 용도였나보다.
곧장 나갈 줄 알았던 황태자는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연하게 자리에 앉은 아르펠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나가지 않느냐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그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너’라는 호칭이 ‘그대’로 바뀌었으나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흘끗 아르펠의 표정을 살핀 루시엘이 급하게 덧붙였다.
“아주 잠깐이어도 괜찮다.”
“…예, 그럼.”
거절하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차가운 인상의 얼굴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묘했지만 아르펠은 굳이 이유를 따지지는 않았다.
황제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인상의 남자였으나, 그의 색을 똑 닮았는데도 황태자는 차가움을 형상화한 것 같은 이였다. 오히려 그런 점이 매력이라고, 데뷔탕트를 치르느라 들떠 있던 소녀들이 떠들어 댔던 것 같기도 하다.
꽤 잘난 얼굴이긴 했으니 인상은 별 상관없었을 것이다. 마치 쓸모 있는 도구를 보는 듯한 품평하는 시선이었음에도 루시엘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아르펠이 굳이 루시엘을 허락한 것은 그가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제와 뜻을 함께하는 이라면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약간의 시간을 희생하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 거슬리는 점이라면 그가 로한이 앉았던 맞은편에 은근슬쩍 앉았다는 것 정도였다.
“아르펠이라고 했지. 가문은 어디인지 물어도 되나?”
그 불편한 시선을 끝내 눈치채지 못한 루시엘이 아르펠을 향해 물었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한 아르펠은 그의 뜻대로 대답해 주었다.
“신관입니다.”
“…….”
순간 마주한 시선이 움찔한다. 아르펠은 그 찰나의 변화조차 놓치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빤한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그렇군.”
물론 그 조그마한 단서는 금방 흔적을 감추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려 만지작거리고 있던 붉은색 카드를 응시했다. 뒤따라 질문을 건네는 목소리가 태연하기만 하다.
“신관을 별로 안 좋아하십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동요는 무척이나 짧았다. 아르펠이 신관이라 답한 순간 보였던 빈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황태자로서 군림한 시간이 거짓은 아니었기에 차분해진 그에게선 아무런 위화감을 찾을 수 없었다.
글렀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차가운 얼굴에 아르펠은 떠보기를 포기했다. 여기서 더 한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음?”
대신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점이 남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펠이 천천히 루시엘을 향해 몸을 숙였다.
73
무례하다고 책을 잡아도 모자랄 만한 행동이었으나 루시엘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아르펠의 얼굴이 마냥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 뿐.
냉철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눈동자는 금세 혼몽해졌고, 귀는 빨갛게 달아올랐다. 숨마저 멈추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펠이 속삭였다.
“머리에 붙어 있는 실, 떼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나지막한 물음이 있고 나서야 루시엘은 정신을 차렸다. 미묘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끄덕이는 모습을 아르펠은 끊임없이 눈에 담았다.
실제로 실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대충 떼는 척만 했다. 곧장 떨어지는 몸짓에는 미련 한 점 없었다. 되레 멀어지는 아르펠을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만이 끈덕지게 곁에 남았을 뿐.
도저히 모를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관찰하던 아르펠은 그의 빈틈을 발견한 이후 세웠던 가설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황태자, 루시엘 렌제스터는 자신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다. 어쩔 줄을 모르는 태도와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뚝뚝 흘러내리는 눈빛은. 그것은 아르펠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존재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말이다.
“이, 이만 가 보지.”
“네?”
루시엘의 호감을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마주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라스를 나서는 발걸음이 지나치게 급했다. 누가 봐도 그가 당황했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껏 붉어진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아르펠은 굳이 사라지는 루시엘을 붙잡지 않았다. 곧 있으면 로한이 올 것이다. 굳이 만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로한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왜?’
동요 하나 없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는 로한을 떠올리자마자 요동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로한이 마음을 고백해 왔을 때 느꼈던 모든 것을 그저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이라고 애써 믿고 있던 아르펠에게 뒤늦은 혼란이 찾아왔다.
만약, 단순히 사랑을 고백한 데에 느낀 당황스러움이라면 방금 전 황태자의 마음을 알아챘을 때도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그가 로한을 통해서만 온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달랐다.
아르펠은 조심스럽게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사람을 흉내 내는 몸은 어설프게나마 손끝에 심장박동을 전해 주었다. 그것이 비록 아주 느리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지금은 그 소리가 너무 거셌다.
사랑을 고백하는 목소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쏟아지는 애정, 그리고 행복. 그 모든 것을 차근차근 떠올릴 때마다 귓가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많이 늦었죠?”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 주범이 뒤늦게 테라스에 찾아왔다. 양손에 주스를 든 채로 들어선 얼굴에는 미안함이 한가득했다.
아르펠은 흘끗 저 멀리 보이는 달을 응시했다. 그새 각도가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어디서 뭘 하고 온 건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걸린 시간에, 말없이 로한을 지켜보는 눈빛이 그를 추궁하는 듯했다.
하지만 로한이 아르펠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었다.
“……아르펠. 누구랑 같이 있었어요?”
아르펠이 홀로 있었어야 할 이 공간에,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함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손에 들린 잔 두 개를 내려놓은 로한의 얼굴이 굳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는 있었지만 그의 감정에 감응하는 아르펠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격정적인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건 명백한 분노였다. 제가 나갈 때와 다른 각도로 틀어져 있는 의자, 미처 사라지지 않은 온기. 그 모든 것이 또 다른 사람의 존재를 명명백백히 보이고 있었다.
가뜩이나 화가 나 보이는 로한에게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심상치 않은 반응이 되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 탓에 아르펠은 그에게 답을 주는 것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 말 안 해 줘요…?”
“…아.”
“나한테 숨겨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말 안 해 주는 거예요? 나 몰래 만난 그 사람이 중요해서?”
가까이 다가온 로한이 아르펠의 어깨를 잡았다. 최대한 힘을 빼려고 노력한 것 같았으나 영 조절하기 어려운 듯, 위에 올려진 손이 덜덜 떨리고 어깨에 전해지는 힘도 들쑥날쑥했다.
아르펠은 오로지 로한에게만 선명한 감정을 느꼈으며, 로한의 의지에 따라 조금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통증, 꿈, 수면욕… 여태껏 겪어본 바로는 그랬다.
어깨 위로 약간의 아릿함이 느껴졌다. 통증을 닮았지만, 그렇다고 아프다고는 할 수 없는 무거운 감각. 아르펠에게는 이것마저 새로웠다. 조심스럽게 뻗은 손이 로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생각이 많아지려는 것을 애써 붙잡고는 그를 달래기 위한 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누가 왔는데요?”
“…황태자.”
연회장에서 황제와 마주친 것만으로도 강박에 가까운 불안을 호소했던 로한이었다. 황태자와 단둘이 고립된 공간에서, 그것도 자신이 없는 상황에 만났다는 사실은 무겁게 그의 목을 죄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빨갛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점차 격해지는 감정을 느끼며 아르펠은 손을 옮겼다. 양손이 로한의 허리를 당겨 껴안았다. 자연스럽게 무게 중심이 흐트러진 로한의 몸이 완전히 아르펠을 덮었다.
한 손을 뒤로 넘겨 간신히 의자 등받이를 손에 쥐고는, 자신의 몸 때문에 그림자가 진 아르펠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두 눈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던 분노조차 깡그리 날아간 채였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허리를 가로질러 껴안은 손은 규칙적으로 로한의 등을 두드렸다. 마치 어릴 적, 엉엉 울음을 터뜨리던 그 시절의 로한을 달래는 듯한 몸짓이었다. 비록 품에 안겨 있는 대상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 크게 자라나 버렸지만, 아르펠에게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편하지 않은 자세일 텐데도 로한은 그대로 몇 분을 더 버텼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흘러들어 왔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확인한 아르펠이 로한을 다독였다.
물론 그사이 황태자와 나눈 대화에 대해서 모조리 말해 주어야 했다. 대화 자체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던 게 사실이라, 로한은 은근히 미덥지 않다는 기색을 풍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넌 어디 갔다 왔는데?”
“아…….”
흐트러진 아르펠의 옷을 만져 주던 로한은 금세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슬쩍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가 들고 온 주스 잔이었다.
“…그냥, 벌레 퇴치요.”
“벌레?”
“주스가 달아서 그런가 봐요. 생각보다 많이 꼬였어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티가 역력했다.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 따위 없었지만, 시선을 가만히 마주한 로한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르펠은 그의 변명 아닌 변명을 굳이 들추지 않으려 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 정체 모를 감정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나한테 말 못 하는 거야?”
“아…….”
여태껏 로한이 싫어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그만두었던 탓일까. 곧장 되묻는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그는 작게 침음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르펠의 얼굴을 살피다 시선을 떨구는 행동은 잘못을 저지르고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와 닮아 보이기도 했다.
로한의 눈매가 축 처지고 나서야 아르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반쯤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음을 뒤늦게 자각했기 때문이다. 빤한 시선이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달싹이는 입술에 닿았다.
“…아냐. 괜찮아. 다치지만 않았으면.”
느릿하게 로한의 얼굴을 향해 뻗은 손이 볼을 간지럽히며 내려앉았다. 사뭇 긴장한 것 같아 보이던 로한의 얼굴이 낯익은 배려에 빠르게 풀어졌다.
대답하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면 묻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로한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아르펠이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기준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이 흔들리는 이유는…….
가만히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뻔한 일이었다. 로한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 정도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겪는 바람에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으니까.
네가 내게 숨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뚜렷한 욕망은 머지않아 테라스에 물밀 듯 들어오는 바람에 휩쓸려 금세 모습을 감췄다.
눈에 띄게 윤곽을 드러냈다 흩어져 버린 그 생각이, 작은 심술 같은 갑작스러운 행동이 튀어나온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테라스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두 사람은 곧장 그곳을 나섰다. 로한이 가져온 주스를 한 입 마시는 건 덤이었다. 달큼한 액체가 들어가니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슬슬 연회가 끝나는 시간일 거예요. 일단 알현실부터 찾아가 봐야….”
“로한 님!”
익숙하게 아르펠을 이끌며 기다란 복도를 나아가던 걸음이 뚝 멈췄다. 뒤에서 쾌활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르펠 또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레리아나 만큼이나 화려한 금발이 굽이쳐 흘러내렸다. 레리아나가 예쁜 인형 같은 외모라면, 눈앞에 있는 여자는 누가 봐도 화려한 미인이었다. 푸른빛 눈동자가 로한을 향해 생긋 눈웃음을 쳤다.
“저, 조금 전에 뵙고 잠깐 인사를 드렸었는데… 기억하시나요?”
“셀툼 후작가의 영애라고 하셨죠.”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여자의 미소가 한층 더 당당해졌다. 여전히, 로한의 옆에 서 있는 아르펠에게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아르펠은 그저 방관자처럼 옆쪽에 서서 두 사람이 시답잖은 말마디를 주고받는 광경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방관자 같다고 인지하는 순간 아르펠의 세상에 벼락이 떨어졌다.
돌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가 입을 가리고 웃는 것으로 보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 그것도 아니라면, 로한이 선선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는 것 정도일 테다.
“저랑 결혼하실래요?”
멍하던 와중에도 그 말만큼은 선명히 들렸다.
“로한 님이 원래 평민이셨다는 거, 전 신경 쓰지 않아요. 지금은 신의 축복을 받았고, 뛰어난 실력으로 제국민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으셨죠. 만약 저와 결혼하신다면 제 신분으로 그 오점은 지울 수 있을 거예요.”
“…음.”
“분명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수 있어요. 매력적이지 않나요?”
로한은 말이 없었다. 목 끝까지 불안감이 차오른 아르펠이 내내 가만히 있던 몸을 움직여 그의 손을 잡아챘다.
싫다고 해. 지금 당장.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이 행동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그를 막는 것이 중요했다. 손에 담긴 절실한 애원을 읽어 낸 듯, 로한은 그녀를 향해 정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이미 마음에 둔 분이 있어서요.”
“…그렇, 군요.”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여자는 벌게진 얼굴을 하고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남은 건 아르펠과 로한, 단둘뿐이었다.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르펠은 황홀할 정도로 쏟아지는 만족감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아르펠. 이제 갈까요?”
이제껏 봐 왔던 그 어떤 미소보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한 로한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은근히 들려오는 콧노래 소리가,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74
아르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감정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둘에게는 아직 이 연회장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활짝 핀 웃음을 굳이 감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로한은 아르펠과 손을 잡은 채 걸음을 빨리했다. 비록 느지막하게 도착한 알현실의 앞, 복도를 메우고 있는 수많은 귀족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제국 대부분의 귀족이 초청되는 연회라 함은 평소 황제를 알현할 일이 없던 귀족들이 그와 이야기를 나눌 유일한 기회라는 말과도 같았다. 알현을 원하는 귀족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조금, 일찍 올 걸 그랬네요.”
이런 모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로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떤 이들은 당당함을, 또 어떤 이들은 불안감을 얼굴에 한가득 품고 저마다의 이유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양새만 본다면 시장통에서 저렴하게 파는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줄을 서 북적거리는 평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타의로, 그것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로한이 돌아갈 것을 고려해 보던 찰나였다.
“로한 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꽉 닫힌 알현실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중무장하고 걷는 모습이 위압적으로 느껴졌는지, 중간중간 몸을 움츠리는 귀족들마저 있었다.
찡그린 표정을 빠르게 지운 로한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꽤 오랫동안 줄을 선 것 같은 이들을 망설임 없이 제치고 들어선 안쪽에는 이미 다른 손님이 하나 있었다.
“아, 왔군.”
적당히 호응해 주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가 둘을 향해 손짓했다. 맞은편에서 방금 전까지 열심히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남자는 금세 내쫓기고 말았다. 반쯤 질질 끌려 나간 것에 가까웠다.
“연회만 열면 이런 일이 제법 많아서 말일세.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꽤 고역이더군.”
금방 이 자리에 앉아 있던, 반쯤 쫓겨난 남자에게도 예의상 차를 건네기는 한 모양이다. 마주 보고 앉은 기다란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놓인 채였다.
눈짓 한 번으로 곁을 지키고 있던 시종에게 그것을 치우게 한 미하엘은 두 사람분의 차가 마저 나오고 나서야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제란 제국을 다스리는 하나뿐인 존재이지. 그 때문에 황궁을 비우기가 쉽지 않아, 종종 깥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나름의 낙으로 삼고 있네. 그대들을 부른 것도 그저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런 것이니, 크게 긴장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그는 정말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낌새였다. 결국 로한이 그간 있던 일들을 아주 간략히 정리했다. 과정을 모조리 생략하고 결과만 나열한 솜씨에 황제의 웃음이 짙어졌다.
“대단해. 말로는 쉽지만, 분명 힘든 고난이었을 테지. 제국을 위해 힘써 준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만….”
톡, 톡.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테이블 위를 쳤다.
“괜찮다면, 축제를 진행하는 동안 황궁에 머무르는 게 어떻겠나? 그동안 최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내 신경 쓰지.”
아무리 생각해도 노고를 치하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황제의 제안은 겉으로 보았을 때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매년 제국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4일간 진행된다. 그의 말인즉 나흘 동안 둘에게 황궁의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좋은 대우를 해 주겠다 보장한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이야 이를 반기겠지만, 두 사람에게는 달랐다. 미소를 지은 채 마주 보고 있긴 하지만, 서로 적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던가. 공을 치하한다기보다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들의 발을 묶어놓겠다고 선언한 것에 가까웠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던 로한이 끝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감사를 표하기라도 하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하고 가는군요. 축제를 편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일어날 준비를 하는 둘을 가만히 내버려 두던 황제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내내 로한만을 응시하고 있던 황제가 시선을 스르륵 돌렸다. 가느다란 동공이 정확히 아르펠을 향하고 있었다.
“축복받은 이들은 자신만의 검을 쓴다고 들었네만. 이번 만남에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도 하고 있었지. 헌데… 검은 두고 온 건가?”
“제국의 태양을 뵙는 자리에 감히 검을 쥐고 올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고 왔습니다. 검을 들고 왔다면 지금도 절 지나치게 의식하는 폐하의 충실한 종이… 이빨을 드러냈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지나친 걱정이군. 교육은 잘해 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네.”
“얼마 전 습격을 받은 일이 있어 제가 예민하게 굴었군요. 송구합니다.”
황제는 로한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웃다가, 아르펠에게 건네던 시선마저 떼어내고는 묵을 방에 모셔다드리라며 시종을 불렀을 뿐이었다. 암묵적인 축객령에 가까웠다.
두 사람은 순순히 물러갔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무표정을 고수하던 아르펠의 모습을 곰곰이 더듬어 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려 있던 것은 완벽한 무관심이었다.
“과연… 사람인 척에 불과하다는 건가.”
손도 대지 않은 두 사람분의 찻잔이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되었으니 이만 나와도 좋다.”
“예.”
긴 시간 동안 기척을 죽이고 황제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가 튀어나와 예를 표했다. 무던한 시선이 남자, 오스카의 양어깨를 살폈다.
“상처는 어느 정도 나았느냐.”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구나.”
다행이라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달리 오스카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한없이 차가웠다. 아까 전 로한이 남기고 간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남아 있던 탓이다. 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낸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일을 당신이 벌였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고 경고하려는 것 같았다.
“어린 것이 재주도 좋지.”
“…….”
“다음부턴 내 주위에 머물지 않는 게 낫겠구나. 감이 좋아 네 존재쯤은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니.”
“하지만 전 폐하를 지켜드려야 합니다.”
순종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가 바짝 고개를 들었다. 피처럼 선명한 붉은빛을 내는 눈이 연신 일렁였다.
“되었다. 대책 없이 황궁에서 날 건들 만한 무지렁이들은 아니니. 당장은 증거가 없으니 태연한 거죽을 뒤집어쓴 것뿐일 테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오스카의 얼굴에는 상당한 불만이 서려 있었으나 결국 반박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의 주인이 정한 몇 가지 규칙 때문이었다. 규칙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상냥한 주인이나, 선을 넘는다면 그 누구보다 잔악무도해지는 모습을 몇 번이고 겪어 알고 있었다.
그가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은 더 이상 의사를 물어선 안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주위를 지키고 싶었으나, 여기서 더 애원한다면 앞으로의 일에서도 완전히 배제될 수 있다. 주먹을 꽉 말아 쥐어 가며 자제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하시던 결론은 얻으셨습니까.”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고운 곡선을 그리는 눈매는 마치 그의 인내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글쎄. 나는 판을 깔아준 것뿐이니, 그쪽에서 잘 처리해 준다면 될 일이긴 하다만… 워낙 사나운 사냥개가 붙어 있으니, 실패할 확률이 높겠어.”
“이미 몇 번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울까요?”
“내버려 두렴. 허술한 녀석들이니 함께 움직인다면 이쪽까지 덩달아 들쑤셔질지도 모르지. 굳이 먹잇감을 내어 주고 싶지는 않구나.”
근처에 있는 설렁줄을 당기자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오스카가 다시 몸을 감추고 난 뒤에야 급하게 들어온 시종이 머리를 조아렸다.
“오늘은 피곤하구나. 바깥의 손님들을 물리도록.”
설설 다가와 찻잔을 정리하는 것에 빤히 시선을 주던 미하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이 두 찻잔에 든 내용물은 본궁 바깥의 수풀에 버리게.”
찻잔의 끝을 쥐던 손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고 뻣뻣한 고개가 연신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쉽구나.
시종의 손에 넘어간 찻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찰랑대는 붉은색 찻물이 유난히 시야에 남았다. 작은 목소리에 불과해, 그 누구도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
시종에게 안내받은 방은 화려했다. 말없이 안을 살피다 위험한 것이 없다고 판단한 뒤에야 로한이 아르펠의 손을 잡은 채로 안으로 들어섰다. 유독 눈에 띄는 행동에 그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로한.”
이름을 부르는 잔잔한 목소리가 예민하기까지 한 행동의 연유를 묻는 것 같았다.
“…이만 물러가 주시겠습니까.”
“네, 네…! 혹 도움이 필요하시면 침대 옆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아르펠에게 대답하기 전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향해 눈을 흘긴 로한은, 그가 부리나케 사라지고 나서야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누군가 아르펠을 노리는 것 같아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금방 이해했는지 아르펠은 잡힌 손을 마주 잡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문득 떠오르는 상황이 하나 있기도 했고.
“아까 벌레 퇴치가 그거였구나.”
주스를 가지러 간다면서 지나치게 오래 있다가 돌아온 로한은 ‘벌레 퇴치’라는 이상한 말을 했었다. 당시 급하게 달려온 그에게서 은은한 피 냄새가 났다가 사라졌던 것을 기억했다.
“아… 알고 있었네요.”
“피 냄새가 조금 나서.”
로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소매의 냄새를 맡는 행동에, 아르펠은 작게 웃고 말았다.
“네 체향을 맡으며 잠들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나 봐. 다른 사람들은 별 차이 못 느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다친 곳은 없고?”
“…아르펠은, 왜 그런 말을, 그렇게.”
“음?”
반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웅얼거리는 것에 가까워 발음이 불분명한 탓에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아르펠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어 보인 로한은 그저 허탈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75
“허술한 걸 보면 구원교 쪽인 것 같긴 한데…… 아마 황제도 암묵적으로 허락한 거겠죠.”
뒤숭숭한 감정을 삼켜가며 화제를 돌리는 로한을 향해 아르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점은 아르펠 역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축제 기간 동안 굳이 황궁에 묶어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들이 신전에서 나오자마자 습격을 감행한 황제라면 이번 제안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르펠의 빤한 시선이 로한에게 향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의 피 냄새는 어쩌다 난 건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 다분해 캐묻기가 꺼려졌다. 로한의 몸을 몇 번이고 꼼꼼히 살핀 결과, 다친 곳도 없는 것 같고.
그 시선을 뭐라고 느낀 건지, 로한이 생긋 웃으며 손을 엮어 왔다.
“걱정 마요. 제가 잘 지켜 줄게요.”
“……그래.”
“그러니까… 아르펠도 그 사람이랑 만나지 마요.”
“그 사람?”
단단하게 맞잡은 손의 감촉에 한 눈이 팔린 아르펠은 한 박자 늦게 로한을 향해 되물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마주 잡은 손과 웃고는 있으나 형형한 기세가 적나라하게 묻어 나오는 눈이 시선을 조금도 떼지 말라고 붙잡아 두는 것만 같았다.
“황태자요.”
작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에는 옅은 떨림이 배어 있었고, 불안감도 함께 솔솔 풍겨왔다. 아르펠은 잠시간 말없이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내가 그 사람이랑 둘이 왜 만나?”
“그럼 됐어요. 괜찮아요.”
되레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태도에 로한의 눈매가 유순해졌다.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빠르게 안심시켜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아르펠이 그의 감정에 감응하기는 하지만, 불안을 호소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로한의 심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쏟아지는 감정을 벅차할 때는 언제고, 아르펠은 남아 있는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안심하라는 의미로 로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는 것뿐이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비벼졌다.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몸이 이렇게 컸으니 강아지보다는 커다란 개에 어울릴까.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손끝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조금씩 망가졌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지, 내내 기분 좋은 감정이 쏟아져 내리기만 했다.
살짝 열어둔 창 틈새로 밤 내음을 담은 바람이 솔솔 스쳐 들어왔다. 서늘한 기온을 가만히 느끼며, 은은한 달빛 아래에 있는 네가 정말 예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저만… 저만 바라봐주세요. 아르펠은 내 검이잖아요.”
“…….”
“사랑하고 있어요, 아르펠….”
달큼한 고백이 들렸다. 분위기를 잡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움큼 올라오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토해낸 말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감정이 물결치며 밀려들어 오는데, 아르펠은 오늘따라 그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느낌을 받았다.
“……응.”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르펠이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내놓은 것은. 오늘만 해도 들쑥날쑥한 여러 감정적인 변화를 겪었던 터라 무엇 하나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 답이, 로한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쏟아지는 감정이 한결 더 찬란해졌다. 아르펠은 순간 숨을 흡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마검인데도 그랬다. 그만큼 짙은 애정과 사랑이었다.
“고마워요.”
“……왜?”
그리고 튀어나온 것은 난데없는 감사 인사였다. 도통 그 연유를 유추할 수가 없어, 아르펠은 가슴의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을 꾸역꾸역 참아내고 그에게 물었다. 얼핏 그의 행동은 초조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대답해 줬잖아요.”
“그 대답은…….”
“알아요. 제 고백에 대한 답, 아니란 거.”
웃으며 속삭인 로한은 아르펠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붙잡힌 손끝이 움찔 떨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얼 해야 할지 갈피를 잃은 사람처럼 아르펠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낭떠러지 끝에 선 아득한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저절로 붙잡은 손에 의지하고 말았다. 전해져 오는 강한 힘에도 로한의 얼굴에는 산뜻한 미소만이 가득했다.
“제가 처음 고백했을 때, 아르펠이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
“그다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안 해 줬는데…….”
“…로한.”
“지금은 나한테 미안해하지도 않고, 대답도 해 줬으니까.”
그래서 고마워요.
그의 말에 담긴 감정에는 정말로, 부정적인 것들이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다고. 그의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아르펠에게 흘러들어오는 로한의 감정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왜 그런 걸로 고마워해.
머릿속에 치솟은 의문이었으나, 아르펠은 차마 그 물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로한의 기분을 괜히 헤집어 놓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변명일지 모르겠다.
한 번도 자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여태껏 그가 전해온 진심에 차차 반응이 달라졌다는 그 말이 유독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그럴 때마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들이 널뛰며 존재감을 피력했다.
‘나는…….’
이다음, 또 로한이 진심을 부딪치는 때가 온다면.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아르펠은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
황궁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이 밝아 왔다.
“거기다 두고 나가 주실래요?”
로한은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이들에게 하나 같이 축객령을 내렸다. 기분 좋은 티를 내는 말간 목소리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긴 했다. 우물쭈물하던 시종들이 결국 가져왔던 것들을 바닥에 모조리 내려놓고 나간 뒤에야 그가 몸을 움직였다.
그런 로한을 따라 주섬주섬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킨 아르펠은 아래에 널브러진 많은 것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행동에서 의아해하는 감정을 느낀 것일까. 묻지 않았지만 로한은 순순히 이유를 말해 주었다.
“말했잖아요, 아르펠을 노리고 있는 놈들이 있다고.”
“……이거랑은 상관없지 않을까?”
“안 돼요. 어디서 무슨 위험이 닥칠 줄 알고. 그러니까 뭐든 조심해야죠.”
도저히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은 눈이었다.
결국 아르펠은 로한이 주머니 속에 있던 은화 하나를 세숫물에 살짝 담가보고, 시종이 가져온 옷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고, 또 아침 입가심용으로 내어준 듯한 찻물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굳이 은화로 확인해 보는 것을 보면 독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아르펠은 사람이 아닌 검이었기에 인간의 몸에 치명적인 독이라고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사실을 간과한 건지, 걱정에 정신이 팔려 순간적으로 잊은 건지 모르겠다.
“알았어. 그럴게.”
그래도… 걱정을 받는 지금의 상황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르펠은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로한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당장 어제저녁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으니 나가서 수도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즐길 수 있는 날은 아직 충분했다.
‘황궁에 들어올 기회가 다신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자기 전 나눈 여러 이야기 중에는 황궁에 대한 것도 있었다. 흔치 않은 기회인 만큼 만족할 만한 결과가 있든 없든, 황궁 안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축제 기간 동안 황궁에서 머무는 것은 어떠냐는 황제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은 것도 같은 이유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묶여 정신이 없었던 아르펠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로한이 기특하게 느껴져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가져온 아침 식사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독이 든 음식은 단 하나도 없었으나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 어린 눈을 하는 것을 보면 끝까지 황실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못한 것 같았다.
상당히 어수선했던 식사를 마친 다음.
“절대 안 돼요.”
그렇게 대답하는 로한은 단호하다 못해 어렴풋이 화가 나 보이기까지 했다. 아르펠은 그의 완강한 반응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황궁 안을 살펴보자는 계획은 순조롭게 실행되는 듯했지만, ‘따로 떨어져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라는 말 한마디에 로한의 기세가 돌변했다. 음식에 독이 있으면 어쩌냐며 강박적으로 확인하던 아침의 태세와 닮아 있었다.
어젯밤, 로한이 음료수를 가지러 갔을 때 잔을 건네주던 남자가 몰래 가루 같은 것을 넣었다고 했던가. 언뜻 듣기로는 그랬다. 직접 목격했으니 그가 예민하게 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이 커다란 황궁을 같이 돌아다니면서 빈틈없이 확인하는 것은 무리였다. 거기다 둘이서 같이 돌아다니면 더 눈에 띄고 말 것이다.
검의 모습을 한다면야 상관없을 테지만…… 황제에게 마검은 따로 보관해 두었다고 말한 이상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로한.”
“같이 다녀요, 네?”
“네가 원하면 언제든 네 곁으로 갈 수 있다고 했잖아.”
물론 좋은 방법이 아니다 뿐이지, 아예 하지 못할 방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르펠이 그와 떨어지려고 하는 것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어제부터 더 시끄럽게 날뛰고 있는, 영문 모를 감정을 생각해 볼 시간이.
“…정말 내가 부르면 올 거예요?”
“그래. 약속할게.”
드물게 보이는 아르펠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로한이 먼저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황궁의 탐색은 그렇게 아르펠의 뜻대로 되는 듯했으나….
“…로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로한이 아르펠을 불렀다. 강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와, 눈에 조금만 힘을 주면 보이는 보랏빛의 선.
아르펠은 순순히 그 의지에 응했고, 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어디론가 쑤욱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코앞에서 로한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너무 가까운 얼굴에 살짝 당황하던 찰나, 갑작스레 나타난 아르펠을 바라보며 로한이 멍하니 중얼거렸더랬다.
‘정말로, 오네요…….’
홀린 듯 아르펠을 바라보기만 하던 로한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살짝 붉은 기가 도는 얼굴로 슬쩍 눈치를 보는 건 덤이었다.
“죄송해요… 아르펠이 정말 올 수 있는 걸까 불안해서…….”
처연하게 내리까는 눈과 떨리는 목소리에 아르펠은 뭐라 말을 얹지 못하고 로한을 달래야만 했다.
물론, 그 두 가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아르펠이 로한을 혼내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76
여전히 아쉬워하는 로한과 떨어져 황궁 안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황제의 제안으로 황궁 안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되기는 했으나, 이 잡듯 뒤지는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서 좋을 리는 없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황궁인 이상 황제의 눈이 어디든 존재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됐다.
그것이 아르펠이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길만을 골라 움직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황궁에 무언가 있다면…….’
황궁의 지하, 아주 깊숙한 곳.
황궁 안에 망령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있다고 가정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깊은 지하였다. 망령의 힘을 그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는 아르펠이었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런 느낌이 일절 나지 않았다.
정말로 기운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저 아래 깊숙한 곳에 빼도 박도하지 못할 증거가 남아 있다면, 이 넓은 황궁 어딘가에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을 테다.
목적지가 따로 없는 걸음은 황궁 안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일반인에게 들키지 않고 돌아다니는 일 따위야 아르펠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향한 곳 중에는 꽃망울을 틔운 색색의 꽃들이 가득한 정원 역시 있었다. 여태 봤던 정원 중에서도 단연 가장 화려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로한도 같이 올걸.’
누구든 경탄할 만큼의 아름다움을 한가득 품고 있는 황실의 정원을 보면서도, 아르펠은 로한만을 생각했다.
정원이 정말로 예쁘다며 상기된 얼굴로 함께 걷자고 속살거릴 것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손가락을 엮어오며 틈새도 남지 않게 단단히 마주 잡겠지.
그렇게 생각했더니 손끝에서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여태껏 수도 없이 잡아 왔던 로한의 단단한 손이.
끝없는 상념에서 깬 것은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질 무렵이었다. 아르펠은 썩 민망하여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렇게 누군가 가까워질 때까지 정신없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도는 기분이었다.
주변이 탁 트인 정원이니 딱히 피할 곳도 없었다. 마주칠 수밖에 없는 거리임을 인지하고는 다가오는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여러 모종과 도구들을 손에 산처럼 쌓아 놓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정원사였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 어…!”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갑작스레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테다.
정확히 머리 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들을 흘끗 응시한 아르펠은 그것을 받아 주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택했다. 풍성한 잔디 위로 용도를 알 수 없는 흙투성이의 물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
당연히 받아 줄 줄 알았던 건지, 내뱉어지는 목소리가 멍했다. 하지만 아르펠의 알 바는 아니었다.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걸음을 떼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 저기요!”
“뭡니까.”
“이것 좀 같이 주워 주시면…….”
“싫습니다.”
도움을 받으려는 남자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아르펠을 붙잡지 못했고, 아르펠은 그 자리를 떴다.
그렇게 조사해 본 정원은 딱히 얻을 만한 게 없었다.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내려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딱히 아쉬움이랄 건 없었지만… 아르펠의 얼굴에는 묘한 성가심이 서려 있었다.
인상착의도 기억나지 않는 정원사를 시작으로 은근한 접근이 늘어났다. 자꾸만 앞에서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사람이 많아졌고, 비틀거리며 몸을 부딪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아르펠은 모두를 피했다. 바닥에 철푸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슬슬 귀찮음이 심해지는 터라, 누가 봐도 같은 수법을 위해 다가오는 듯한 한 남자를 흘끗 응시했다. 동선이 겹치는 시점에 맞추어 발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넘어지려는 이를 붙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동시에 손목에서 거슬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동요 한 점 없는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바닥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남자가 겁에 질려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간 그림자들이 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 사지는 물론이고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게끔, 혀까지 단단히.
툭. 바닥에 떨어진 것은 무언가를 바른 것처럼 끝이 번들거리는 침 하나였다. 방금 전 아르펠의 손목을 노렸던 것이었다. 무얼 하나 싶어 굳이 그 행동을 막지 않았건만, 정작 침은 아르펠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기이한 형태로 구부러져 있었다.
“흐어…… 억, 컥!”
“같은 독을 가지고 있나.”
물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돌리지도 않는다. 동요했는지 흔들리는 눈을 보았음에도 아르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침이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내뱉으며 완전히 찌그러져 버리는 것 빼고는. 몸은 묶여 있었지만, 눈에는 문제가 없던 남자는 그 꼴을 보고 겁에 질려 버렸다.
힘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바늘 끝만큼은 살려 두었기에, 아르펠이 느릿한 손길로 그것을 남자의 목에 가져다 댔다. 빠르게 맥박치고 있는 곳을 정확히 노린 바늘은 금방이라도 얇은 살가죽을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억! 억!”
당장이라도 말하겠다는 듯 열렬한 끄덕임이었다. 무심히 그 발악을 지켜보던 아르펠은 그대로 그림자를 움직였다.
“거짓을 말한다면…….”
“하, 할게요! 다 말하겠습니다!”
굳이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직전까지 강압적으로 움직였던 그림자가 아가리를 벌리듯 몸의 크기를 부풀리기만 해도 남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몸을 풀자마자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는 꼴이 사정을 모르고 본 사람이라면 가련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자는 아르펠의 예상대로 구원교의 끄나풀이었다.
“이,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어서…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막대한 돈과 함께 부탁을 받았으며, 차마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사람을 죽일 일은 없다고 해서 냉큼 받았다며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 남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아르펠은 그의 품을 뒤져 나왔던 액체가 든 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나?”
“이, 있긴 하지만 기억이 잘… 모였던 장소는 기억합니다!”
묻지도 않은 것을 주절주절 말하는 남자는 그만큼 다급해 보였다. 굳이 말을 끊지 않고 설명을 듣던 아르펠은 남자가 말할 정보가 다 떨어져 입을 다물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바닥에서 튀어 오른 그림자가 그대로 남자를 집어삼켰다. 옷 주머니 안에 구겨진 침과 독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넣자 이 자리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거기, 누구지.”
살짝 흐트러진 옷까지 정리하니 시간이 딱 맞았다. 아르펠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상당히 복잡해질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정면을 응시한 아르펠의 미간이 짧게 움찔거렸다.
어젯밤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정복을 갖춰 입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었다. 오히려 화려함이 덜해지니 옷의 각이 살아나 사무적이고 냉한 느낌이 한층 더 강해졌다.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황제를 닮아있었다.
“넌…….”
그 분위기는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뜬 이는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바로 어제, 그와는 더 이상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나눴던 로한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랬기에 아르펠은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다른 누가 있지 않았나?”
이윽고 들린 말이 아르펠의 발을 붙잡고 말았다. 결국 떠나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그렇군.”
거짓을 말하는 얼굴에는 한 자락의 망설임도 서려 있지 않았다. 황태자, 루시엘은 기민하게 아르펠의 얼굴을 살피는 듯했지만, 그가 거짓을 말했다고 의심하지 않는 모양인지 머지않아 수긍했다.
이제 됐겠지.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해 이만 가 보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마침 찾고 있었다.”
“…저를 말입니까.”
“그래.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는데 궁 안에 있을 줄은 몰랐군.”
아르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루시엘이 눈을 깜빡이는, 아주 짧은 순간에.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말이다.
“괜찮으면 나와 정원을 산책하지 않겠나?”
“…….”
“그대에게… 하고픈 말이 있어서 그래.”
선뜻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거절의 의미라 지레짐작한 건지 그가 급하게 덧붙였다. 그제야 아르펠은 전날 그가 보였던 선명한 호감을 기억해 냈다. 하필이면 그 뒤로 있었던 일들과, 로한과의 대화 때문에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아르펠의 한 줄기 시선은 그저 의중을 파악하려는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을 받는 이는 얼굴빛이 한결 상기되어 있었다. 마주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늘한 빛이 감돌았던 표정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 변화는 훨씬 뚜렷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토록 정중하게 부탁하는 이가 ‘황태자’라는 점에서, 지금 아르펠과 로한이 머무는 곳이 ‘황궁’이라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아르펠은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둘이서 만나지 말라고, 그토록 신신당부하던 로한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아르펠은 앞서가는 루시엘을 따라가기로 했다.
아주 잠깐은, 잠깐 정도면 괜찮을 거라며.
77
아무도 없는 황궁의 정원에서 한가로이 걷는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들렸다. 발을 옮길 때마다 풀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둘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둘의 표정 차이는 두드러졌다. 앞서나가는 이는 긴장감이 역력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이는 태연하다 못해 무관심해 보였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에 간간이 시선을 주던 아르펠은 앞서 나가던 루시엘이 걸음을 뚝 멈추고서야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발갛게 달아오른 귓불이 장미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그대를 보고 난 이후로… 밤새 많은 생각을 해 보았어.”
“그러시군요.”
달싹거리는 입술은 망설임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드문드문 떨리는 목소리도 그러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고 인지했을 무렵.
“……신전을 나오는 게 어떤가?”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인 건 둘째 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망설이다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아르펠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물론 루시엘의 시선이 거둬지는 아주 짧은 순간에 한해서였지만.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다. 신전에서 나와 신관을 그만두라는 의미지.”
침묵이 가늘게 이어졌다. 숨을 죽이고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어쩐지 긴장을 한 것 같아 보였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별것 아닌 한 마디 물음이었음에도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의 색이 변했다. 붉은색 물감을 물에 풀어놓은 것처럼 서서히 하얀 뺨이 물들어갔다. 그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건, 내가… 그대를.”
“…….”
“연모…, 아니, 작은 호감을 가지고, 큼. 있어서다.”
‘황태자’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안면이 있지 않더라도 그에 대해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이었다면 누구나 말을 잃었을 모습이었다. 그 차갑고 냉철하기로 소문 난 남자가 얼굴을 붉히고 사랑을 고백하는 꼴이라니. 심지어 말까지 더듬어가며 횡설수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존재가 다름 아닌 아르펠이었기에, 영 낯선 모습에도 이상함 한 번 느끼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말의 진위를 따져보는 눈빛일 뿐 당황도, 특별한 감정도 새어 나오지 않는 공허한 눈에 가까웠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루시엘은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의 침묵을 무어라 생각한 걸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루시엘이 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지금 당장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야.”
고고하고 오만한 황태자보다는 풋내기 소년의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아르펠은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정도였나.’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 남자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소설 속에서 묘사한 황태자를 떠올리고 있을 뿐. 그곳의 황태자는 아르펠이 아닌 ‘레리아나’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니까.
-그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로한과 레리아나가 함께 참가한 연회에서 황태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아르펠이 서 있는 이 정원에서, 흐드러지게 핀 장미들에 둘러싸여.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는 유려했고,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은백색 머리카락과 느릿하게 깜빡이는 녹음이 진 눈은 붉은색이 만연한 정원과 지독히 잘 어우러졌다. 레리아나는 그를 보고 ‘완벽함이라는 것을 신이 빚어낸다면, 어쩌면 이 남자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라는 감상을 남겼더랬다.
그러나 그 지나친 완벽함이 낯설고 거부감이 일어 황태자를 정중하게 거절했고, 이는 로한과의 사이를 한층 가깝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계단이 되었다.
‘다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흐트러진 숨결과 흔들리는 눈동자, 유려하긴커녕 횡설수설하는 목소리까지. 로한에게서 비롯된 사랑을 수없이 지켜보고 받아왔던 아르펠이기에, 루시엘이 정말로 진심이라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다.
“그대는 오랜 시간 신전에 몸담았으니 내 제안을 수락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이해한다.”
“…….”
“하지만 신전을 빠져나온다면… 내가 꼭 그대를 거두어 주도록 하지. 이것만큼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었다. 부정적인 감정만큼은 굳이 알아보려 애를 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했기에, 아르펠은 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곧장 눈치챘다. 그것은 명백한 거부감이었다.
로한과 떨어지라고.
루시엘의 의도가 무엇이든 아르펠에게 그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곧장 몸을 돌려 나가고픈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이곳은 황궁이고, 그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르펠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로한에게도 영향이 간다. 그는 그런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인간인 척을 하려면 인간의 예법에 맞게.
황궁에 도착하기 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다짐했다. 로한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거부감이 티가 나지 않아야 한다. 그랬기에 두 눈에 서리는 선명한 반감을 억누르고는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분명 곧바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갑작스레 본능이 경종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아르펠.’
여러 번 겪어 본 감각이었다. 넓은 황궁에서 처음 떨어졌을 때도, 로한은 이렇게 아르펠을 불렀다. 실제로 곁에서 그를 부르는 이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리고 나면 기이한 보라색 실이 보였다. 팽팽하게 당겨져 햇빛 아래 반짝이는 것은 당장 이리로 오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 실을 쥐어 부름에 응하고 싶은 마음을 인내했다.
누가 됐든 황궁 측의 인사에게 이 힘을 섣불리 알려서는 안 된다. 눈앞에 있는 이가 황제와 가장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황태자라면, 더더욱.
‘…귀찮네.’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입을 막아 버리면 될 것을. 초조한 눈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루시엘은 적어도 지금 이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빠르게 거절하고 자리를 파하는 것이 아르펠이 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두 번째.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 열렬한 감정의 흔적을 두 번째로 발견하니 알겠다.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인 저 눈이… 불쾌하다고.
로한이 보고 싶었다. 같은 감정을 머금고 있는 다른 색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그 생각 하나만이 강렬해졌다. 당장 그를 마주해서 숨이 막힐 듯 쏟아지는 감정을 느끼고 싶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손을 잡을 때마다 흘러들어오던 황홀하기까지 한 애정까지.
“꺄악!”
느리게만 굴러가던 사고가 퍼뜩 뜨인 것은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을 때였다. 반사적으로 아르펠과 루시엘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활짝 열린 창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여인의 목소리였으나 소리를 지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빠르게 다가오는 한 사람의 기척이었다. 익숙한 그 기운을 아르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르펠과 마찬가지로 달려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루시엘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검 끝이 수풀을 향함과 동시에 커다란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대는.”
“두 번째로 뵙는군요. 강녕하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대뜸 난입한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루시엘은 검을 거뒀지만,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곳에는 웬일이지.”
“아르펠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걸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되는 일인 걸 알고 있다면 이만 물러났으면 하는데. 보다시피,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건 이쪽이라서 말이지.”
오만하기까지 한 말투였으나 로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좁히며 아르펠의 옆에 다가갔을 뿐.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를 지켜보던 루시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문득,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훔쳐 들었다는 걸 잘도 시인하는군.”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귀가 원체 좋은지라,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전하.
살가운 목소리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로한이 미약하게 얼굴에 걸쳤던 눈웃음을 풀었다. 순하게만 보이던 얼굴은 금세 날이 벼려졌다. 시선을 마주하는 두 사람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이미 미래를 약속한 이가 있습니다.”
“……뭐?”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르펠은 흘끗 로한을 바라보았으나, 루시엘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는 아르펠을 빤히 응시했다.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르펠은 둘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로한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부터 새어 들어오는 감정은 명확했다.
로한은 화가 나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순간부터 은근히 불안함이 차올랐다. 여태껏 로한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드물었으니까.
그 분노가 자신으로 인해 비롯됐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둘이서 만나지 말라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 놓았음에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꼴을 보았으니 화가 났겠지.
“…정말 정인이 있나?”
확인하는 투로 물은 목소리는 아니라고 답해 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떼어내고픈 생각이 더 강했던 아르펠에게 그런 속뜻까지 알아챌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애초에 로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을 굳이 생각까지 해 가며 반응해 주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 ‘정인’이라는 단어가…… 유독 귀에 끈덕지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느낌에 입을 다물자 대답을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어느새 잡혀 있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아르펠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군.”
흘끗, 루시엘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가만히 감내하는 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초조함, 불안함과 같은 여러 감정이 묻어나왔던 모습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만큼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황태자’로서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일지도 몰랐다.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말 한마디를 토해 냈다. 차게 식은 표정과는 다르게 퍽 힘겨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무례를 용서해 주게. 다신 이런 일은 없을 걸세.”
“…괜찮습니다.”
루시엘은 아르펠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사라졌다. 누군가는 쓸쓸해 보인다고 평할 만한 모습이었으나 아르펠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대번 로한에게 향했다.
“……아르펠.”
그리고, 수많은 감정을 감내하는 듯한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질끈 감았다 뜬 눈에는 끝을 모를 진득한 무언가가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이 찰랑이고 있었다.
78
무슨 말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는 것처럼 로한은 한동안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운을 떼지 않았다. 꽉 잡은 손에서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르펠은 점점 초조함을 느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낙담.
그에게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태껏 연정이나 사랑, 그런 달콤한 감정만을 맛보는 것에 익숙해졌던 아르펠은 그 차이를 절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기까지 했다.
뒤늦게 그의 입이 열렸다.
“…오기로 했잖아요. 내가 부르면 오겠다고……. 불렀는데. 분명 불렀는데 왜 안 와 줬어요?”
“……로한.”
“나랑, 약속까지 했으면서. 왜.”
휘몰아치는 감정을 감내하려는 것처럼 로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태양의 색을 닮은 눈동자가 한껏 어둑해져 있었다. 그 안에 가득한 온갖 격정을 마주하며, 아르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나도 아르펠이 느끼는 감정을…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혹시 내가 싫어진 거예요? 계속 곁에 있으려고 했던 게 귀찮았어요?”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로한의 형형했던 눈빛이 조금이나마 유해졌다. 곧장 부정하는 아르펠의 얼굴이 아슬아슬하게 보였으니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로한은 애써 들끓고 있는 화를 사그라뜨리려고 노력했다. 아르펠을 잡은 손에 더 세게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애써 풀었다.
화내지 마. 그만해. 몇 번이고 스스로 되뇌고 나서야 분노로 새빨간 색이 덧입혀졌던 머릿속이 차차 가라앉았다. 착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여 줘도 부족할 마당에 아르펠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저를 두고 아르펠에게 호감을 가진 다른 누군가와 아르펠이 단둘이 있는 일은.
로한이 아르펠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궁의 복도를 지나다 바깥의 정원을 향해 흘끗 시선을 주었고, 빼곡한 장미꽃의 틈새에서 아르펠을 쉽게 발견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서 있는 황태자까지도.
그 광경을 인지한 순간 로한의 얼굴이 굳었다.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지난날의 기억보다, 지금 당장 아르펠을 마주하고 있는 저 남자를 어딘가로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단둘이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연회에 참여하며 지겹도록 얼굴을 보았기에 로한이 루시엘의 얼굴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말이 오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황제의 편이 분명했으니 아르펠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테니까. 바람에 실려 온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신전을 빠져나온다면… 내가 꼭 그대를 거두어 주도록 하지. 이것만큼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그가 들은 것은 이야기의 뒷부분이었지만, 루시엘이 제안하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았다.
눈 깜짝할 새에 로한의 얼굴은 감정이 거세된 것처럼 차게 식었다.
진중하게 속삭이는 저 목소리가, 아르펠을 바라보는 눈빛이, 가만히 있질 못하는 몸이…… 그가 아르펠을 향해 품고 있는 감정을 보여 주었다.
감히, 자신과 같은 감정을 다른 누군가가 아르펠에게 고백하고 있다고.
‘아르펠.’
로한은 곧장 아르펠을 불렀다. 저따위 말은 듣지 말고 당장 돌아오라고,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하지만 아르펠은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강렬하게 그를 원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이렇게 묶여 있는데도 아르펠은 얼마든지 네 손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그러니 더 꽁꽁 묶어 벗어나지 못하게 하자고.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시간은 느릿하게 흘렀고, 아르펠이 입을 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받아 줄 리가 없을 거라 이성이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끼어들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창가에서 몸을 던져가며.
근처에서 이를 함께 목격한 이에 대한 것은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져 버렸다. 로한은 그렇게, 아르펠 하나만 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릴수록 목이 탔다. 영원히 곁에 묶어 놓고 싶다는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마주 잡고 있던 손을 조금 더 깊게 엮었다. 빈틈없이 깍지를 끼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아니면… 내가 아르펠을 사랑하는 게 싫어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지만,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아르펠이 듣지 못할 크기는 아니었다.
로한은 눈꼬리를 늘어뜨리다가도 간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아르펠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이 충격을 받은 것처럼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다.
“아르펠이 그렇다고 하면, 노력해 볼 테니까… 그러니까, 싫어하지만 말아줘요…… 네?”
아르펠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할 리 없다. 언젠가 아르펠이 ‘내게 의미 있는 존재는 너뿐이야.’라고 말해 주었던 것처럼, 로한에게도 아르펠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 그가 없다면 로한의 세상은 온통 바래 버릴 것이다. 그러한 세상을 굳이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로한이 아르펠을 놓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명제였다. 그럼에도 거짓으로 점철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은 로한에게 어떠한 확신이 있어서였다.
“……싫어. 하지 마.”
아르펠이 허락할 리 없다는 확신.
로한의 말을 듣자마자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절대로 하지 말라는 듯 팔을 당겨오고,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동공이 거센 바람 앞에 나부끼는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뚜렷한 변화에 로한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럼에도 두 눈에 서리는 희열은 감출 수가 없어서, 그는 아르펠을 정면에서 바라보기보단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것을 택했다.
떨림을 숨기지 못하는 몸에 기대어 속삭였다.
“그럼, 계속 제 옆에 있어 주세요… 네?”
아르펠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로한의 애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달래 주는 것.
아르펠이 저를 안쓰럽게 여길 수 있도록 로한은 최선을 다해 감정을 죽였다. 이 선명한 기쁨이 그에게 새어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미세한 기쁨 한 조각 정도는 눈치챌 만도 하건만, 아르펠은 방금 전 로한이 내뱉은 말로 인해 정신이 없었던 건지 크게 신경을 쓰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아르펠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날이 정말 머지않았다고, 로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
로한은 아르펠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아르펠은 손이 꽉 잡힌 채 로한이 가는 대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간혹 그의 눈이 흘끗 옆으로 향해 로한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황태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냥 로한이 부른 그 순간에 그에게로 향할 것을 그랬다. 울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아르펠은 가슴이 크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로한을 슬프게 했다. 그것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나지막하게 묻던 그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으면 좋겠냐고. 그 물음을 듣는 순간 아르펠은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온 세상이 뿌옇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과 결혼하자며 당돌히 말했던, 화려한 치장을 한 여자도 다시금 떠올랐다. 머릿속 한구석으로 애써 몰아넣었던 기억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이 애정을 뱉어내며 사랑을 속삭이는 로한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 무언가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여전히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별개로, 그가 자신에게 건네주는 감정의 한 톨까지도 타인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감정은 지나치게 몸집을 불렸다.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 마음이 자라나자, 아르펠은 도저히 예전처럼 로한을 지켜만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의 선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부모에 가까운 자신이 감히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을 거절한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 온 것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로한의 곁을 다른 누군가에게 내어 주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겪자마자 급변했다.
‘결국… 난 인간이 아닌데.’
꼭 그 선을, 도리를 지켜야 할까?
그냥 가져. 가지고 싶잖아. 뺏기기라도 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듯했다.
…뺏기기 싫다.
“아르펠?”
“아.”
로한을 상대로 가진 적나라한 욕망 때문이었을까. 아르펠은 저도 모르게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로한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니, 그건 아니고…….”
슬며시 부정의 답을 내놓았건만, 로한에게 팔이 휙 끌려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처하지 못한 몸은 속절없이 그와 가까워졌다.
순간 아르펠은 숨을 멈췄다. 로한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 행동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이 이어졌다. 점점 더 가까워지던 로한의 얼굴이 마침내 툭, 하며 아르펠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의 이마가 아르펠의 이마에 닿은 것이었다.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
검은 열 안 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아르펠은 입을 꾹 다물기를 택했다. 숨이 막힐 듯 위태로우면서도 이마에 닿은 그의 체온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르펠, 얼굴이 빨간데요? 진짜 열 있는 거 아니에요?”
“뭐?”
뒤늦게 뺨을 문지르는 손길이 급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허둥지둥했다.
정신이 없어 보이는 아르펠을 바라보며 로한은 짓궂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아르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거짓말이었으나, 로한은 아주 당당했다.
‘완전 거짓말은 아니니까.’
뺨이 아니라 귀지만.
79
“어서 와요, 두 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로한이 아르펠을 데리고 간 곳은 이벨린의 앞이었다. 우아하게 차 한 잔을 마시는 그녀의 행동은 렉시아와 함께 만났던 그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르펠의 시선이 그녀의 옷차림으로 향했다.
드레스 차림일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편한 승마복,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는 차림새다. 궁에서 입을 법한 옷은 아니었다.
“따라붙은 이는 없습니까.”
“제가 이 짓을 좀 많이 해 봐서요.”
승마복을 톡톡 두드리는 이벨린의 얼굴은 제법 뿌듯해 보였다.
기사단의 순찰 시간을 정확히 따져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오는 일은 많이 해 봤다는 말을 곁들였다. 천을 엮어 창에 덧대고 내려왔다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도 함께였다.
“아까 일은 잘 해결됐나요?”
흥미 없는 얼굴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펠에게 건네는 질문이었다. 의중을 묻는 듯한 시선에 그녀가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그,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우연히 정원에서 당신이 황태자와 함께 있는 걸 봐서요.”
“…네. 잘 해결됐습니다.”
“그놈이 몹쓸 짓이라도 한 건 아니죠?”
아르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민하게 그를 살피던 이벨린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답지 않게 장미꽃 정원에 가서 아르펠과 붙어 있을 건 또 뭔가. 혹여나 이쪽의 계획을 알고 선수를 친 건 아닌가 싶어 식겁했었다.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지만…….’
아무렴. 아무런 일이 없다고 한다면야 상관없지.
“그때 그 비명은 황녀 전하이신가 보군요.”
“들켰네요. 우연히 로한을 만났는데 갑자기 창에서 뛰어내리지 뭐예요? 깜짝 놀란 바람에.”
“창에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너무하네요. 아, 그리고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렇게 안 불러도 돼요. 격식 차리는 것도 싫어하고, 사이가 사이기도 하니까?”
아르펠이 미처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화장을 더해 유독 반짝거리는 눈매가 가볍게 윙크를 날렸다.
로한은 그녀를 못마땅하게 응시하고 있었지만, 아르펠은 아니었다. 아까 그 창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신경 쓰인 것인지 내내 로한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애써 그것을 모른 척하려는 듯했으나, 결국 로한은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치만, 너무 신경이 쓰여서…….”
“으흐흥.”
“…….”
꼼지락거리며 아르펠의 손을 잡고,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처연하게 눈꼬리를 내리깐 것은 누가 봐도 안타까움을 자아낼 만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아르펠 또한 그랬으나, 둘 사이를 가로지른 음흉한 웃음소리에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 주범을 향해 로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핫, 실수. 계속하세요.”
“됐습니다.”
상당히 냉랭한 어조였다. 이벨린은 결국 미련 넘치는 얼굴로 애써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아까 전과는 달리 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아르펠의 표정을 살피다가 로한의 살벌한 시선을 받은 것은 덤이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황궁 안에서 증거를 찾으려고 한다면서요?”
“의심 가는 게 있습니까?”
“음, 의심 가는 거라…….”
황궁에 처음 들어선 둘에 비해서라면, 이 황궁 안에서 거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이벨린이 훨씬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낯을 해 보였다.
“일단 이 황궁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아주 유력해 보여요. 의심 가는 정황을 발견한 건 아니지만… 정말로 폐하가 구원교와 관련된 무언가를 관리하고 있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두었을 거예요.”
이벨린은 그 사실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황제로서 군림해 온 그를 아주 가까이서 본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분은 타인을 잘 믿지 않아서, 정말로 중요한 게 있다면 지척에서 본인이 관리하세요. 그러니 정말 무언가가 있다면 이 황궁 안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해요. 폐하는 궁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황태자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전 아는 게 없네요. 그래도 황궁 안을 직접 탐색하는 건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않을게요.”
“왜죠?”
“아마 황족만 접근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을 확률이 높아요. 제가 황궁을 뒤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출입구를 찾는 게 오히려 빠를걸요?”
로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시종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며 황궁 안을 돌아다닌 게 헛고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적나라한 표정을 읽어서였을까, 이벨린이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얹었다.
“아예 얻은 게 없지는 않아 보이는데요?”
“음흉한 눈 치우시죠.”
“표현이 참 신랄하시네요.”
흘끗 아르펠을 살피며 한 말이었으나 로한은 그것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입을 삐죽이며 불평하기는 했다만 그 눈빛이 워낙 형형한 탓에 이벨린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놈은 어떻게 지내고 있던가요?”
자연스러운 화제 돌리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는 부드러이 말하는 것에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펠이 운을 뗐다.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 녀석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놈이니까요. 아마 어디에 떨어져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걸요?”
“연락은 따로 하지 않는 겁니까?”
“네, 괜히 눈에 띄어 봤자 쓸데없는 주목만 받을 테니까요. 달에 한 번 사람을 시켜 중요한 사안만 전달받고 있어요.”
그 뒤로 이벨린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렉시아의 흉도 꽤 많았는데, 그중에는 렉시아와의 첫 만남이 술집이라는 딱히 궁금하지 않은 정보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 황궁에서 황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 황태자의 더러운 성격, 찝찝한 황제 등… 그녀는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모조리 내뱉는 듯했다. 황궁에서 지낸다면 지금처럼 감정을 생생히 드러내며 이야기할 수 있는 말동무는 없을 테니 이해는 갔다.
그랬기에 로한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고, 아르펠은 이벨린을 신경 쓰는 로한을 배려해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벨린의 이야기를 듣던 아르펠은 그제야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금세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같이 어울려 줬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들어줄게요.”
아르펠이 건넨 것은 지금은 그림자 속에 들어가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 이가 건넨 정보였다. 이에 대한 처리를 부탁하는 것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벨린이 짧게나마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당신들의 거취가 황궁으로 결정되었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요.”
둘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는 황제가 축제 기간 동안 그들에게 궁 한 칸을 내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었다. 의미 없이 이런 결정을 할 리가 없다고 예측했건만, 역시나였다.
아마 이번 일이 밝혀지더라도 황궁은 아무런 책임을 물지 않을 것이다. 그저 사특한 이교도가 벌인 짓이라 공표하고 신전 측에 유감을 표하는 게 다일 테지. 대대적으로 그들을 소탕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면 그만이다.
“좋아요. 그 일은 내가 맡죠.”
이벨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제법 신뢰가 가는 당당한 목소리였으나, 어째 둘은 그것에 집중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로한이 아르펠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 그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아르펠의 신경 또한 그에게 쏠려 있었다.
“역시, 제가 같이 있어야 했는데…….”
절절한 감정이 툭툭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였다. 이벨린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같은 이야기 들은 거 맞지, 방금?
분명 아르펠은 그 남자를 알아서 잘 구속했다고 했다. 이벨린은 그 방법이 궁금했지만 ‘아르펠에 대해서 너무 캐묻지 말라’라는 렉시아의 당부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결론은, 아르펠은 어딜 봐도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잡힌 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이벨린의 논리였으나, 아르펠의 옆에 앉아 있는 로한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해. 다음엔 안 떨어질게.”
어쩐지 눈꼴이 시렸다.
***
“후, 얘기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할 줄은. 로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어느샌가 노을이 지고 있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또 봐요! 즐거웠어요!”
그녀는 왔던 것처럼 다시 창틀에 두꺼운 천을 걸어 그것에 매달려 올라갔다. 바깥에 기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지는 않은지 매섭게 살피며 말이다. 이벨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무렵, 아르펠은 오랜만에 정신적인 피로를 느꼈다. 그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둘은 방을 나서 원래 그들이 묵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와중에도 서로의 손은 꼭 잡고 있었다.
시종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로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소곤거리는 탓에, 아르펠은 귀에 와닿는 그의 숨결이 간지럽고…… 또 왠지 모르게 뜨겁다고 생각해 버렸다.
“우리 내일 축제 구경하러 갈래요?”
“…응, 그러자.”
“소원도 빌고, 같이 불꽃놀이도 봐요.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요.”
내일 있을 일들을 상상하는 얼굴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아르펠은 그의 얼굴이, 2년 동안의 일탈을 즐길 때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에 가 보자며 설레 했던 어릴 때의 표정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왜… 다를까.’
분명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왜 지금의 그를 보는 기분은 다를까.
조그마한 아이인 탓에 항상 품에 안고 다녔던 그때와는 달리 로한은 아르펠보다 커 버렸다. 그때처럼 볼을 만지작거리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 손을 위쪽으로 뻗어야만 했다.
찬찬히 그 행동을 되짚어가며 여전히 말랑거리는 볼 위로 손을 얹었다. 따끈한 체온이 손을 덥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로한이 살짝 고개를 비틀어 아르펠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술을 묻었다.
말캉한 감촉이 손바닥 안쪽에 진한 흔적을 남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저랑 절대 떨어지면 안 돼요.”
손바닥에 대고 웅얼거리는 입술 때문일까, 안쪽이 너무 간질거렸다. 그곳에서부터 열이 번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80
황궁 연회를 기점으로 막이 오른 성대한 축제는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여전했다.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으며, 길가에는 각종 아기자기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작은 가게도 많았다. 1년에 한 번만 열리는,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기다리던 축제이니만큼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기도 했다.
함께 놀러 온 가족, 그리고 연인들이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로한이 어릴 적 축제를 즐겼을 때와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그냥, 로한과 지금 이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르펠에게는 소중했다.
“아르펠, 이거 좋아하죠?”
그새 로한은 옆에 있는 노점상 하나에서 주먹 한 줌 정도의 과자를 사 들고 왔다. 빵을 한입 크기로 잘라 튀기고, 그 위에 설탕을 아낌없이 뿌려 바삭한 과자 같은 식감을 자랑하는 간식거리였다.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한이 내미는 것을 순순히 받아먹었다. 사실 이 간식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한이 어렸을 때 달달한 간식거리들을 좋아하다 보니 함께 먹었을 뿐. 그만큼 자주 먹다 보니 좋아한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로한은 솔솔 피어오르는 행복을 굳이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영영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던 그의 시선이 아르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조심 좀 하시죠.”
대뜸 옆을 지나가는 남자의 어깨를 턱 붙잡은 로한이 방긋 미소 지어 보였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간 아르펠과 정확히 부딪힐 만한 위치였다. 성을 내려던 남자는 분명 웃고 있음에도 섬뜩해 보이는 로한의 표정을 보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빠르게 도망쳤다.
“안 부딪혔죠?”
“응. 네가 막아 줬잖아.”
그가 막아 주지 않았더라도 아르펠은 어렵지 않게 피했을 테지만, 아르펠에게는 로한을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시비를 거는 게 목적인 듯 어깨를 치고 지나가려는 사람, 그리고 돈주머니를 소매치기하려는 사람… 심지어는 물건을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으슥한 뒷골목에.
처음에는 그러려니 넘기는가 싶던 로한도 점차 얼굴에 짜증이 차올랐다.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들 모두가 아르펠을 노리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의도가 지나치게 투명했다.
“…저 잠깐 갔다 올까요?”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 로한은 어깨를 치고 지나가려는 사람은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소매치기하는 사람은 단단히 붙잡아 경비대에 넘기고, 물건을 옮겨달라는 사람은 깔끔히 무시했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다분히 노력했으나 슬슬 아르펠과의 시간을 방해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 로한이 삐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다음에 오는 게 그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보복을 벼르는 감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의견을 물어오는 저 눈동자는 한결같았다. 허락해 준다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구는 로한에 아르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
빠져나가려는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절대 혼자서는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한 손짓에 로한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머리꼭지까지 올라갔던 짜증이 한순간에 푸시시 가라앉았다.
끈질기게 아르펠을 노리던 그 시점부터 상대는 이미 특정되었다. 둘은 망설임 없이 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 곳을 가든 불온한 세력이 도사리는 어두운 골목길은 있는 법이다. 신변을 위협받을 만한 장소라 한다면 이만한 장소가 또 없었다.
“으읍, 읍!”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놈의 목숨은 없다!”
둘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아르펠이 로한과 함께 골목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복면을 쓴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검 끝이 그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겨누고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가만히 못 있어?!”
잔뜩 겁을 먹은 아이가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건 걸걸한 목소리의 협박뿐이었다. 오들오들 떠는 아이는 선명한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기만 했다. 남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르펠은 아이의 상태를 살피기보단 옆에 서 있는 로한을 살폈다. 미묘하게 인상이 찌푸려진 얼굴은 아이의 안위를 기민하게 따져보는 듯했다.
만약 이 자리에 혼자 있었다면 아르펠의 목적은 자꾸만 귀찮게 하는 남자를 처리하는 것이었으므로, 아이의 목숨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치든 말든 공격부터 감행했겠지. 하지만 로한이 아이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순간, 그 선택지는 곧장 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한이 저 아이를 구하고 싶어 하니까.
“목적이 뭐지.”
“인질 교환이다! 네놈이 이쪽으로 오면 아이는 살려주지.”
킬킬거리며 웃는 모습은 정말로 이 작전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수적으로 이쪽이 열세라고 생각해서일까. 뒤쪽까지 늘어서 있는 여러 명의 인원을 흘끗 살폈다.
“…아르펠을 달라고?”
“그래! 어서 그놈을 넘…… 컥!”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한 선택이 가장 최악의 선택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를 걱정하는 눈치였던 로한의 눈이, 아르펠을 거론하자마자 돌아버린 것이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어느새 로한은 아이를 겁박하고 있던 남자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덩치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린 로한은 태연하다 못해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흑, 흐엉…….”
아르펠은 한쪽으로 떨어질 뻔한 아이를 붙잡았다. 로한이 걱정하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놔둘 수 없었다.
“커헉, 쳐! 당장 쳐! 누구라도 좋으니 다 죽여!”
로한의 손에 잡힌 남자는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것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망치지 못하게 뒤쪽을 막고 있던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오합지졸이었다.
말없이 그 모든 것을 바라보던 아르펠은 조용히 손을 들어 아이의 눈을 가려 주었다. 찰나, 바닥에서 솟은 검은색의 날카로운 가시가 적의 몸을 단번에 꿰뚫었다.
수많은 이들이 단 한 순간에 절명했다. 살아남은 이는 로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 하나뿐이었다.
“아……?”
단말마도 내뱉지 못하고 목숨이 달아난 이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땅에서 넘실거리던 그림자가 파도처럼 솟아 시체들을 먹어 치웠다. 꽈드득, 꽈드득.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남자는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 모든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사, 살려…….”
난 뭘 건드린 거지?
그 생각을 하기도 전, 반사적으로 살려달라는 애원이 튀어나왔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는 찬란한 황금색이었지만, 남자는 그 눈에서 죽음을 보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천에 뚫려 있는 구멍 사이로 보이는 눈에는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로한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살려 주지.”
그 눈에 환희가 맺힌 순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로한이 그대로 남자의 멱살을 놓았다. 하지만 남자가 땅에 몸을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내내 로한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그림자에 의해 먹힌 것이다. 물론 로한은 약속을 지켰다. 비명 하나 없이 고요히 그림자 속에 파묻힌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체가 되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끝없는 어둠 속에서 감각을 잃고 몸부림칠 뿐, 살아는 있을 것이다. 며칠 뒤 렉시아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아르펠.”
로한은 깔끔히 남자를 마무리 짓고 뒤로 돌아 아르펠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던 아이는 어느새 아르펠의 품에 안겨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뒤늦게 떼 준 아르펠이 로한의 눈빛을 보고는 움찔했다.
어쩐지 그 눈이 심상치 않았다.
아이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던 아르펠이 그를 끌어안는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여러 이유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로한이 아이를 걱정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르펠이 이 아이를 챙길 이유는 충분했다. 하필이면 로한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였고, 똑같이 겁에 질려 있으며, 엉엉 울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아르펠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 로한을 달랬던 방법을 기억해 냈다. 끌어안고 다독여 주는 것. 그때와는 다르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아주 기계적인 토닥임이었지만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안정을 얻은 듯 아르펠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아이를 잘 돌보네요.”
그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아르펠은 말없이 눈을 굴렸다. 바람을 타고 전해진 감정은 아주 적나라한 질투였다.
아르펠은 곧장 아이를 내려 주었다. 잠시 휘청이는가 싶던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씩씩하게 자리에 섰다. 비록 다리에 힘이 풀려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는지 알아?”
“모르겠어요…….”
“그럼 경비대에 가자.”
아이는 한때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둘은 아이를 빠르게 경비대로 데려다주었다. 아이의 부모가 계속해서 아이를 찾고 있던 건지, 곧장 찾아온 그들은 엉엉 울면서 아이를 끌어안았다. 울음을 그친 듯싶던 아이도 다시금 눈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눈물을 죽죽 뽑아냈다.
둘은 그 난리 통을 기회 삼아 빠르게 경비대를 빠져나왔다. 길가로 나오자마자 로한의 손이 슬그머니 아르펠을 붙잡았다. 익숙하게 감겨드는 손가락에 움찔하기는 했으나 손길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애가 좋아요?”
…아무래도 질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어쩐지 입꼬리가 씰룩거릴 것만 같아서, 아르펠은 다른 한 손으로 애써 입 주변을 누르며 기분을 숨겼다.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81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던 방해는 그 시점을 기준으로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포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실행할 인원이 없는 건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축제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 것만큼은 꽤 만족스러웠다.
축제의 거리에 빼곡하게 늘어선 각종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밝았던 하늘에는 어느샌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저 장식에 불과한 것만 같던 것들이 은은히 빛을 발하며 거리에는 색색의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4일간 이루어지는 축제의 밤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해가 지고 난 뒤부터 이어지는 기도의 행렬을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먼 과거, 인간들이 망령에게서 승리를 일구어 낸 것에는 이 땅에 존재하는 두 신의 지분이 컸다. 신에게서 하사받은 힘이 인간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축제가 시작되면 수도의 정중앙에 신에게 공양을 할 수 있는 작은 제단이 따로 마련되고는 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며 밤마다 사당에 찾아가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 꽃을 공양하고 그해의 소원을 비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저희도 기도하러 가요.”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꽤 괜찮은 분위기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난 이후 로한은 양손에 하얀 꽃을 사들곤 들뜬 낯을 했다.
사실 그들이 이 축제를 접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 그러니까 로한이 어릴 적 수도에 들렸을 때, 축제의 끝물이나마 잠깐 즐긴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소원은 빌었었다.
“전에 빌었었잖아.”
“지금은 소원이 달라졌는걸요.”
빠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수줍어 보이기도 했으나, 어떻게 보면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얼굴을 붉히고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천천히 읊조리는 행동이 그랬다.
아르펠이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일련의 변화를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로한의 눈은 끈덕지게 아르펠을 따랐다.
결국 아르펠은 로한이 쥐여 주는 꽃 한 송이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 되게 많네요….”
공양을 할 수 있는 곳이 하나뿐이라서인지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로 긴 행렬이 이루어졌다. 혹시나 인파에 떠밀려 아르펠을 놓칠까, 로한은 그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붙잡았다. 로브가 벗겨지지 않도록 제대로 고정해 주는 건 덤이었다.
아르펠은 군말 없이 그 모든 행동을 받았다. 어쩐지 보살펴지는 기분이었다. 맞닿은 손가락 끝을 타고 꾸역꾸역 애정이 흘러들어 와서 몸 안쪽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그의 눈길이 새삼스럽게 로한에게 닿았다.
몸만 컸지, 그는 여전히 자신을 아껴 주고, 좋아해 주고, 의지해 주었다. 비록 ‘좋아한다’는 의미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로한이 건네주는 끝을 모르는 애정에 아르펠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빼앗기기 싫다는 마음 하나만큼은 자각했지만, 문제는 지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을 바라는 것 같은 로한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라는 답이 아니라 실망하면? 혹은 슬퍼한다면? 아르펠은 자신으로 인해 일그러지는 로한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상상만 했는데도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소원…….’
빼앗기기 싫다. 평생 그를 옆에 두고 싶었다. 로한의 우선순위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일 따위, 있어서는 안 됐다.
하얀 꽃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빌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
줄은 길었지만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전통 의상을 입고 길가를 돌아다니는 사람 몇몇을 구경하거나 로한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침내 꽃을 놓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유난히 아르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사람들에 의해 투박하게 조각된 두 신의 자그마한 신상이었다. 천신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일단 마신은 신상과 닮지 않았다. 저기서 조금 더 껄렁함이 더해져야 했다.
하얀 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로한을 따라 꽃을 놓고, 두 손을 맞잡았다. 줄을 서며 떠올린 하나의 소원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평생…….’
로한의 곁에는 나 하나뿐이기를.
적나라한 욕망이 드러났을 때였다.
신상으로부터 시작된 기이한 파동이 한순간 공간을 덮쳤다. 일렁이면서 퍼져 나가는 것은 강대한 마력이었다.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고,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한 힘은 아르펠에게는 꽤 익숙한 힘이었다.
“아르펠!”
무슨 상황인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로한에게 붙잡혔다.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바삐 손이 움직였다. 몸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손은 다친 곳이 없는지를 꼼꼼하게 살피는 듯했다. 아르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고 난 이후에야 로한은 눈에 띄게 안심했다.
“다친 덴 없죠?”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로한의 눈은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펠은 그저 그의 볼을 짧게 토닥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변했다. 색감이 빠진 세상에서 움직이는 건 로한과 아르펠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멈춰, 마치 그들이 서 있는 공간에서 완전히 배제된 느낌마저 들었다.
<오랜만이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잠시 고개를 돌렸던 로한은 눈앞의 신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을 쥐어 마구잡이로 흔드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방금 여기서 목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어지러우니까 흔들지 마, 야!>
제발 흔들지 좀 말라는 애원이 한 번 더 나오고 나서야 로한의 손이 멈췄다. 원래 있던 자리에 신상을 되돌려 놓는 모습에 귀찮음이 가득했다. 아르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 신상을, 아니, 마신을 향해 물었다.
“이곳은 신전이 아닌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당연하게도 정순한 마력이 그들을 덮친 순간부터, 아르펠은 마신의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르펠처럼 마신을 자주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짙은 마력이 퍼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럼에도 신상을 흔든 것은 그저 작은 심술에 불과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바람은 신의 의식을 강림시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의지가 되기 마련이다. 긴 세월 동안 모인 의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하찮은 돌덩이에 올 이유는 없었어.>
껄렁한 겉모습 없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자 어느 정도 위압감이 있기는 했다만, 그마저도 투박한 돌덩어리가 달그락거리며 말하고 있으니 거기서 그쳤다.
빤히 내려다보는 로한의 표정은 진작 구겨져 있었다. 꽃이 마신을 불러왔다고 생각했는지, 흘끗 꽃을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공양했던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하는 낌새였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쯧. 글렀구만. 육아에 대차게 실패했어.>
돌아온 건 신랄한 평가였다. 이번엔 신상의 머리가 아르펠에게 붙잡혔다.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아르펠의 손이 신상을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잘 크지 않았습니까.”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일단 손 좀 놓으련?>
다시 안정적으로 바닥에 내려지고 나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간에 구역질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둘의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아르펠의 ‘잘 크지 않았습니까’ 발언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로한은 살짝 들떠 보이기도 했다.
돌로 만든 석상에 불과했기에 그의 눈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지 알 겨를은 없었지만, 분명 마신은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헛웃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더니 결국 잡아먹히겠네, 저거.>
딱히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혼잣말이었으나 혀를 차는 소리만큼은 선명했다. 머지않은 시일에 홀라당 먹힐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수줍게 웃는 로한은 그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내숭을 부리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그를 싸고도는 아르펠에게 저렇게 잘 먹힐 표정도 없다는 뜻이었다. 꼭 마주 잡은 손을 굳이 떼어 내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확실했다.
<아무튼, 너희가 가 줘야 할 곳이 생겼다.>
그가 굳이 신전이 아닌 수도 한복판에서 강림을 시도한 것도 다 이 이유에서였다. 기억해 두라며 입을 열었으나, 정작 용건은 떠듬떠듬 전달되었다.
<제국의 동쪽에 있는 피… 뭐? 이름이 왜 이렇게 어려워. 피데스?>
아무래도 너머에서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가 있는 듯했다. 보나 마나 디오넬일 게 뻔했다. 마신의 진언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으니까.
<쯧, 쓸데없이 지명은 왜 바꿔선.>
디오넬의 말을 대신 전한 돌덩이가 짧게 불평했다. 새삼스럽게 마신이 사람들이 피데스를 ‘피데스’로 부르기도 전, 먼 고대부터 존재해 왔던 신이라는 것이 실감 나긴 했으나….
그마저도 하찮은 돌덩이라는 외관과 신뢰도를 뚝 떨어뜨리는 투덜거림에 가려질 뿐이었다. 로한의 표정은 은연중에 한심함마저 품었다.
<아무튼 거기로 가라. 더러운 기운이 고여 있으니 최대한 빨리. 안내는 그쪽 사람들이 해 주겠지.>
본모습으로 대화하는 중이었다면 분명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책임한 태도이기도 했으나, 로한은 마신이 관심을 갖고 직접 용건을 전해 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피데스라는 이름은 익숙했다. 당장 그들이 황궁에 머물기 전까지 지낸 곳이 수도에 있는 피데스 후작가의 저택이었다.
더러운 기운이란 무엇인지, 후작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정확히 알려 준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신의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 귀찮아. 이만 끊는다.>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뚝 끊겼다.
82
아르펠은 그가 보고 있는 세상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로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로한을 살폈다. 그리고, 그를 돌아본 아르펠의 표정은 빠르게 굳고 말았다. 흑백의 색채는 어느샌가 로한의 몸까지 침범해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이런 짓이 가능한 존재는 단연 마신밖에 없을 것이다. 살벌한 시선이 고요히 서 있는 석상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그것이 덜그럭거리며 가볍게 흔들렸다. 아직 강림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예민하게 구는 것 좀 보게? 누가 쟤 죽인 댔냐?>
불평 어린 목소리가 석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물론 아르펠의 표정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미묘한 경계의 기색까지 서린 것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싸고돌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정말, 그 수준이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다.
뭐, 끼리끼리인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짐작하고 있기로는 로한의 집착이 더 심했다면 모를까, 이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환장의 한 쌍인 놈들도 찾기 힘들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흥분했던 것도 잠시, 마신이 로한에게 해를 끼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아르펠은 한결 차분해졌다.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새어 나오는 석상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이 무언의 압박을 닮아있었다. 이 돌발행동의 의중을 묻는 것 같기도 했다.
<흠, 내가 네 소원을 들었다.>
“훔쳐 들으신 겁니까.”
<누가 나한테 빌래? 내 석상 앞에서 빌었으면서 뭘.>
역시나 마신은 뻔뻔했다. 마신이든 누구든 들려줄 생각이 없던 소원이기에 아르펠의 표정에 묘한 짜증이 섞였다. 이럴 거면 석상의 앞에서 소원을 빌지 말 것을. 후회가 막심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평생을 약속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한다지.>
“……네?”
<이런 문제에는 네 부모 격인 내가 빠질 수 없는 법. 저놈의 집착이 심상치 않긴 하다만, 내가 직접 선택한 놈인 만큼 더 나은 놈은 없을 거다. 이 결혼, 허락해 주마.>
줄줄 흘러나오는 말에 아르펠은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명 목소리는 들리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단어 하나만큼은 아주 잘 들렸다.
“…결혼, 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급하게 되물은 목소리가 삐끗했다. 머릿속은 고장 난 것처럼 덜그럭거려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나갈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들쑥날쑥한 속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그러기를 한참, 아르펠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랑 로한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흐음, 이건 좀 재미있네. 아직도 안 받아 준 건가? 신전을 나설 때부터 숨기지 못한 걸 보면 금방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석상의 시선은 내내 아르펠에게 향해 있었다. 그 끈질김이 마치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겸, 아르펠은 순순히 그 의문에 답했다.
“전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니 로한의 애정에는 답해 줄 수 없…….”
<그야 배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평생을 저놈과 같이 있을 텐데 뭘 그렇게 고민하냐.>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르펠은 제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작은 석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멍했다.
석상에게서 비식거리는 웃음이 샜다.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구는 아르펠이 퍽 귀엽기도, 우습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는 둘은 진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이 인격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
좀 도와줄까.
저렇게 되어 버린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으니, 마신은 기꺼이 아르펠을 돕기로 했다. 도와줘야겠다는 마음 반, 지켜보면 퍽 재밌겠다는 마음 반이라는 건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뭘…… 어떻게.”
<고백해야지, 네가. 저놈은 네가 뭐라고 하든 받아 주기만 하면 좋아서 못 견딜걸?>
“…….”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는 특별한 관계로 엮였을 때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법이라 하더군.>
아르펠은 그 말에 기어코 넘어가 버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하니 흔들리기만 하던 눈에 드디어 빛이 돌아왔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고백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르펠이 고백하는 법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질문한 대상이 아르펠보다 더 무지하면 무지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은 마신이라는 점일 테고.
<내가 자초지종 알려 주도록 하지.>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 아르펠은 그 어느 때보다 마신이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
흑백이었던 세상에 점차 색채가 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만큼은 참 경이로웠다. 로한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순순히 이끌리며, 아르펠은 그의 눈치를 긴밀히 보았다.
그들의 뒤에는 여전히 소원을 빌기 위해 손에 하얀색 꽃을 쥐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축제가 끝나면 가 볼까요?”
“…응.”
그런 대화를 했었지. 로한까지 멈춰 버린 세상에서 마신과 한참을 대화했던 아르펠이었기에, 그는 로한이 꺼내는 말의 주제를 곧장 눈치채지 못했다. 그 탓에 대답에 약간의 망설임이 섞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오웬과 함께 가면 가는 데 딱히 문제도 없을 거예요.”
그 모습이 걱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 건지, 살짝 고개를 숙인 로한이 속삭였다. 다정함과 배려가 담뿍 묻은 읊조림이었다.
당연히 아르펠은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마신이 이야기한 ‘고백하는 방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고 뭐고, 로한을 빼앗기기 싫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자신의 감정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해 망설인 것뿐이었기에 마신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조금만, 더 이따가…’
시간을 가늠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마신이 말해 주었던 때가 되지 않았다. 인내심이 자글자글 타올랐다.
더 이상 노을의 붉은빛을 찾아볼 수 없는 까만 밤하늘에는 고고히 빛나는 달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별들이 가득했다. 달과 별마저 축제를 즐기고 있다고 해도 믿을 법한 꽤 영롱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하늘은 아르펠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어야 했다. 하지만 로한과 손을 맞잡고 소원을 빈 후 돌아가는 길이라는 상황이, 마신이 신신당부한 거사를 치를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 하늘을 비단길처럼 보이게 했다.
치솟는 긴장감에 어쩐지 기분이 아득해졌다. 아르펠은 맞잡은 로한의 손에 조금이지만 힘을 주었다.
“불꽃놀이…… 한다는 데. 보고 갈래?”
“……너무 좋아요.”
로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꽃잎으로 물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분홍빛이 번져 있는 하얀 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고백의 필수 조건은 자고로 낭만적인 분위기지.
문득 마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고백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 주겠다는 그는 셋째 날 밤에는 수도의 신전에서 주최하는 불꽃놀이가 있다며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다음은…….
“아르펠.”
“어?”
“무슨 고민 있어요?”
정신없이 생각하던 것이 딱 걸려 버렸다. 로한을 돌아본 아르펠의 눈에 미묘하게 당황이 서렸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로한에게서 당장이라도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새어 나왔다.
“아냐. 없어.”
덧붙이는 말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아직 불꽃놀이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로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고요히 아르펠을 내려다보는 로한은 딱 봐도 그것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주의가 쏠려 있는 아르펠은 그를 눈치채지 못했고, 로한은 굳이 더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붙잡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줄 뿐이었다.
축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나흘이었지만, 불꽃놀이를 하는 것은 셋째 날 밤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늦었음에도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르펠과 깍지 낀 손을 고쳐 잡은 로한은 그 인파에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그를 이끌어 나갔다.
“사실 아르펠이랑 같이 보고 싶어서… 괜찮은 장소도 알아 놨어요.”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보통 사람이라면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야 들을 수 없는 작은 크기였다. 하지만 아르펠의 귓가에는 그 말이 어떤 것보다 선명히 들려왔다.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구는 단단한 손의 감촉, 길가에 늘어선 노점상의 조명이 은은히 비친 얼굴. 장미 꽃잎을 짓이겨 물들인 듯 미묘히 붉은 빛이 떠올라 있는 볼이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누군가는 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아르펠에게는 아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 그리고 눈에 아른거리는 작은 변화 하나하나들이 무엇보다 크게 다가오고는 했다.
괜찮은 장소를 알아 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인파를 거슬러 올라간 그들이 다다른 곳은 인적이 드문 언덕 위였다.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수도의 한복판과는 다르게 정적이고 고요한 느낌이 다분한 장소였다.
“여기 있으면 더 잘 보일 거예요.”
처음 만난 이래로 어디를 돌아다니든 두 사람은 함께 다녔으니, 원래라면 로한이 아는 장소를 아르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좋은 장소’는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음이 분명했다.
평소의 아르펠이라면 그 점이 신경 쓰여 정보의 출처를 물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의 아르펠에게 그 사실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북적거리는 큰길 한복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보다, 단둘이 있는 이곳이 단연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온전히 만족스러워하지 못한 것은…….
‘낭만적… 인가?’
‘고백엔 자고로 낭만적인 분위기’라며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마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낭만, 그리고 불꽃놀이.
아르펠의 뇌리에 콕 박힌 것은 그 두 단어뿐이었다.
83
상당히 직관적인 후자와는 달리 전자는 듣는 이에 따라 굉장히 주관적인 견해가 섞여 의미가 달라지는 단어였다.
감미롭고 따뜻한 분위기를 칭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의’를 알고 있는 것이지, 그는 낭만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막 감정을 배워 가는 마당에 서정적인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한편, 로한은 그의 머릿속에 겹겹이 쌓인 혼란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아르펠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아르펠처럼 감정에 감응하지 못해도 그가 지금의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줄곧 로한은 아르펠만을 바라봐 왔으니까.
무표정한 얼굴이라 할지라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 변화는 자신을 상대할 때 더 뚜렷하게 티가 났다. 퍽 만족스러운 일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것은 로한이 아르펠의 기분을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되고는 했다.
“아르펠.”
나직한 한 마디가 아르펠의 정신을 붙잡았다. 마주 잡은 손만큼이나 단단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낭만’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던데….”
아르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주범을 기어이 입에 담았다. 크게 떠지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올라갈 뻔한 입꼬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내가 말했어?”
“네. 비슷해요.”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달싹이는 입술이 그 단어를 전해 주었을 뿐이지. 입 모양이 일정하게 반복된다는 것을 눈치챈 직후 로한은 그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굳이 그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지만, 곱게 휘어 있는 눈매만큼은 답이 나올 때까지 쉽게 떨어지지 않을 기세였다.
아르펠의 낯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마신의 말에 정신이 팔려 로한에게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기어코 티를 내 들켜 버렸다. 솔솔 풍겨 오는 속상함에 기분이 저절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독특한 소음이 수도 안팎에 퍼졌다.
피유웅- 펑!
무언가가 하늘 높이 날아가 터지는 소리.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하늘은 색색의 불꽃이 터져 반짝이고 있었다.
달의 색과 엇비슷한 화사한 은빛은 물론이고 붉고 푸른 꽃들이 순식간에 밤하늘을 수놓았다. 압도적인 화려함에 별빛마저 바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또한 잠깐이었다. 뒤늦게 돌린 시야에 여전히 변함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로한이 비쳤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소음을 내며 하늘로 거슬러 올라간 불꽃이 터질 때마다 그의 얼굴에도 오색 빛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로한의 시선은 굳건했다. 잘 보인다는 장소에 직접 데리고 온 장본인이었음에도, 현재 그의 관심사에는 저 불꽃이 포함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아르펠은 조용히 인정했다. 적어도 지금 이 분위기가 마신이 말한 ‘낭만’은 아닐 것이라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뇌를 천천히 천천히 밀어내며 여전히 잡혀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낭만적인 분위기였으면 좋겠어요?”
안타깝게도 생각을 끊어내려 한 것은 시도에 그쳤다. 다시금 그 단어를 주워 담는 로한의 목소리에 손끝이 움찔 떨렸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대답을 종용했다. 불꽃이 터지는 소음, 아래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점차 멀어져 갔다.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르펠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그냥.”
“거짓말.”
느릿하게 입을 벌렸으나 나오는 소리는 없다. 미묘하게 새어 나왔던 속상함이 어느 순간 눈부신 환희로 물들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구슬 비처럼 옷깃만을 적시던 것이 마치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온기 어린 감정이 기어코 황홀함을 피워 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잖아요.”
금빛 눈은 하늘에 수놓아지는 불꽃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는 웃음기가 배어 있어 사뭇 장난스러웠지만, 아르펠은 그 안에 담긴 짙은 열망을 읽어 냈다.
살짝 당겨지는 손은 빨리 말을 해달라는 무언의 재촉을 하는 듯했다. 원하던 것을 얻어 내기 직전의 고양감을 숨기지 못한 탓일까, 아르펠은 그것이 아이의 어리광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포기하고 뒤로 미룰까 하는 망설임이 가득했으나 잔뜩 기대하는 눈치인 로한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기는 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마신이 충고랍시고 남긴 말들이 모조리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온통 하얗게 바래 버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직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어 본 현상인 만큼 아르펠은 고장 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귀가 먹먹해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긴 침묵이 이어졌지만, 로한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아르펠이 힘겹게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마지막 불꽃이 터져 축제를 마무리하는 분위기가 된 지 오래였다.
“내가,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마침내 운을 뗀 것은 언뜻 들으면 상당히 뜬금없는 이야기에 가까웠다. 아르펠 또한 그 사실을 통감했다. 고백에 대한 각종 훈수를 모조리 잊어버린 탓에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은 탓이었다.
“…그래요?”
“그래서였어, 내가 널 거절한 건. 난 너한테 부모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고… 인간들의 논리대로라면 네가 원하는 관계는 되어줄 수 없잖아.”
나지막하게 토로하는 것은 분명한 진심이었다.
마주 보는 눈에는 작은 흔들림 하나조차 없었다. 불꽃놀이도 끝나 그들을 비추는 건 하늘에 올라선 커다란 달밖에 없는 지금, 아르펠은 로한의 눈이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펠.”
여전히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는 목소리가 아르펠을 불렀다.
“전 한 번도 아르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퍽 충격적인 말과 함께.
오늘따라 존재감을 피력하는 심장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반복하던 심호흡이 뚝 끊겼다. 빠르게 깜빡이는 눈에는 미약한 당혹감이 서린 채였다.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해 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로한이 내뱉은 말이 지나치게 단호한 탓이었다.
“아르펠이 인간이 아니란 걸 제대로 알면서도 사랑한 거예요. 저한텐 아르펠이 어떤 존재든 상관없어요. 제가 아르펠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거니까.”
마주 본 눈은 흔한 동요 한 번, 흔들림 한 번 없이 단단한 눈이었다. 그랬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사로잡힌 것처럼, 아르펠은 한동안 로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로한의 눈꺼풀이 닫혔다 다시 열렸을 때.
그제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네가 날 사랑해서 참 다행이라고.
아르펠은 결국 환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뚜렷한 변화를 마주한 로한이 되레 멍해져 버리는 것도 금방이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운을 떼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제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답을 로한에게 전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달가웠다.
“로한, 너도 알다시피 난 감정이 뭔지 잘 몰라. 그러니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당장 되돌려 줄 수는 없겠지만….”
“…….”
“그래도 영원히 네 곁에 있고 싶어. 네가 영원히 내 곁에 남아있으면 좋겠어. 너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좋아.”
로한의 입술이 달싹이고, 두 눈엔 점차 물기가 차올랐다. 마치 아르펠이 다음에 내뱉을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거, 네가 가르쳐 줄래?”
알 수 없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 탓일까, 말을 내뱉는 내내 어쩐지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심장 소리가 유난히 컸고, 얼굴에는 열이 도는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감정을 토해 내는 로한의 눈이 좋았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속삭이고 있지 않나.
손이 잡히고, 당겨졌다. 순식간에 앞으로 이끌린 몸이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맞닿은 몸에서 지나치게 큰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계속… 계속 가르쳐 줄게요.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벅찬 음성이 흩어졌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로한은 몇 번이고 두 말을 반복했다. 말없이 품에 안겨 있기만 하던 아르펠도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양손이 로한의 몸을 가볍게 감싸 안았다.
아. 아르펠은 이내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줄기차게 들리는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 온 세상을 채워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행복과 애정, 몇 번이고 사랑을 고백하는 목소리……. 만약 이런 것들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가지게 되었다면, 끝내 그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빼앗기기 싫다. 로한이 주는 이 모든 것들을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퍽 잔인한 결론이었으나 아르펠은 제 성정을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도, 불순한 욕심도 인정한 판국에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를 인정하는 것이 어려울 리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차라리 잘 됐다고. 인간이 아닌 마검이라, 망령에 의해 영혼에 맺혀 있던 인격이 무뎌져서, 그 덕에 인간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않느냐고….
그 모든 것이 아니었다면 아르펠은 로한의 고백을 받아 주고도 끝내 미약한 죄책감을 털어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르펠이 느끼고 있는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만족감이었으니까. 로한의 이런 모습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데에서 온, 어쩌면 저열하다고 할 수 있는 만족감.
“고마워.”
아르펠이 작게 속삭였다. 뚜렷한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84
불분명했던 관계가 확실하게 명명되어 하나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일이었다. 몇 번이고 아르펠을 품에 끌어안으면서 사랑한다 웅얼거리던 로한은 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물론, 품에서 놓아줬다 뿐이지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축제가 마무리되어 널널한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내내.
슬슬 정리되는 노점상과 불빛을 잃어 가는 거리의 조명들을 보니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불꽃놀이에 미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처음 시작될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일에 집중한 탓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끝나 있었다.
‘그게 ‘낭만’이었던 것 같은데.’
하늘을 수놓는 장엄하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는 것에서 우러나온 아쉬움이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마신이 말했던 ‘낭만적인 분위기’에 그보다 잘 부합하는 순간은 없었을 테다.
그런 최적의 순간, 머리가 새하얘진 자신은 고백보다는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짙은 미련이 몸집을 부풀렸으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수도의 축제를 즐기는 날이 온다면, 벼르고 벼렸던 ‘낭만적인 고백’을 성사시키리라. 마신이 가르쳐 준 몇 가지 멘트를 잊지 않겠다는 듯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아 올렸다.
훈수라기엔 굉장히 쓸데없는, 각종 느끼한 구닥다리 멘트에 가까웠던 터라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 도리어 잘된 일이었지만, 아르펠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황궁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유독 짧게 느껴졌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야 하는데 무언가 달랐다.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은 시간, 짧게 느껴지는 거리를 비롯해 묵던 방에 되돌아와 씻고, 잠을 청할 때까지…. 그 모든 순간이 이상하게도 새로웠다.
침대에 함께 나란히 누웠을 때 옆자리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어딘가가 빠듯하게 차올랐다.
“아르펠… 자요?”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감았던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본 아르펠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홍조가 올라온 얼굴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안 자.”
“손잡고 자도 돼요?”
“응. 마음대로 해.”
“…껴안고 자는 건요?”
“그래.”
“……뽀뽀해도 돼요?”
끝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아르펠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원하는 것을 기어코 쟁취하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을 환하게 밝힌 로한이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보드라운 입술이 잠시간 볼에 파묻혔다. 중간에 목덜미가 부드럽게 잡히지만 않았다면 금세 떨어져 나갔을 온기였다.
“…아르펠?”
“이제 전처럼 그런 소원, 안 빌어도 되니까.”
아주 옅은 읊조림이었다. 언젠가 한 번 로한이 빈 소원으로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서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서로의 입술이 맞붙었다.
로한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뚝 멈춘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듯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반응이 색달랐다. 그를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뜨던 아르펠이 대뜸 로한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질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아주 약한 힘에 불과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온몸을 전율시키는 둔중한 울림에 가까웠다.
떨어지는 입술 끝이 어쩐지 단 느낌이 들었다.
“로한.”
마치 숨이 막힌 사람처럼 가만히 굳어 있는 이에게 아르펠은 스스럼없이 손을 가져다 댔다. 볼을 쓰다듬고, 방금 전 본인이 입을 맞춘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환희와 사랑, 어쩌면 한 자락의 욕망.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쏟아져 내리는 향연은 아르펠의 기분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달구어지는 것 같은 느낌은 다분히 중독적이었다.
이윽고 토해 낸 건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었다.
“물어 봐.”
손가락을 내밀고 말하는 것에 로한이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동그랗게 떠진 눈매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순한 눈매가 여러 번 깜빡이기를 반복하더니 아르펠의 손가락 끝을 물었다. 당연히 그가 물자마자 입을 뗄 것이라 생각한 아르펠이 몸을 작게 떨었다. 뒤따라 느껴지는 물컹거리는 촉감 탓이었다.
“…핥으라곤 안 했는데.”
그 말에도 배시시 웃기만 하는 로한을 보니 차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르펠은 그가 만족할 때까지 손가락을 내어주어야 했다.
묘한 느낌이 드는 손가락을 괜히 한 번 움직여 보았을 때, 뒤늦게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어 보라고 했던 이유도 모두 뒤따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서였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난 사람의 흉내만 내는 검인데도 감정을 느껴. 자고 싶지 않은데도 잠이 오고, 가끔 가다는 꿈도 꾸고, 통증을 느낄 때도 있어.”
아르펠은 그저 신기했다. 어디까지나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한 자신이 정말로 인간이 되는 것 같은 순간들이. 이러니 로한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를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서렸다.
그저 짧은 감상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로한은 다른 것에 집중한 듯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걱정스러워졌다. 통증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아팠어요?”
“…아니. 그냥 따끔했어.”
“미안해요….”
물렸던 손가락이 금세 로한에게 넘어갔다. 미미한 치아 자국이 남아 있는 손을 보듬는 손길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희미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만 아르펠이 다른 손으로 로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네가 날 사람같이 만들어 주는 것 같다고.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어.”
아주 짧은 정적이 이어진 후, 로한의 손이 득달같이 움직였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 붙어있던 몸이 틈 없이 꽉 파묻혔다.
누구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하늘의 별똥별마냥 쏟아지는 온갖 형태의 감정들에, 아르펠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로한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릿했고, 동시에 본인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애정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고마워요…….”
옅은 울음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
누군가 바라마지 않던 행복을 드디어 손에 쥐게 된 늦은 밤, 누군가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정확히는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이벨린은 둘과 마찬가지로 축제가 열리는 거리에 나와 있었다.
물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옷까지 찾아 입고 얼굴을 묘하게 가렸을 뿐더러, 가장 눈에 띄는 머리까지 질끈 묶어 모자 안에 감춰 버린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외출이긴 했으나 이를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상하고 우아하기보다는 말괄량이에 가까운 그녀였기에, 축제 기간이 되면 몰래 외출을 감행하는 것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아마 아버지도 알고 있겠지만…….’
몰래 나가던 것을 들켰다기보다는 그녀의 성정을 알고 있기에 예측한 것에 가까울 테다. 코앞에서 축제가 열리는 데도 잠자코 황궁 안에만 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곁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한 사실이었다.
- 나갈 거면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나가거라.
축제에 몰래 나갔다 온 날 그런 말을 들어 얼마나 놀랐던지. 당시에는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으나 지금은 딱히 그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게 ‘아버지’로서의 걱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가족을 헌신적으로 챙기지는 않았으나 무신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벨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서렸다. 그런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녀는 괴상한 감정을 느끼고는 했다.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죽이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기에, 그의 애정을 느낄 때마다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잘못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였다.
“전하. 이 자가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고생했어.”
그 기분을 떨쳐낸 것은 함께 나온 호위 기사가 밧줄로 꽁꽁 묶은 남자 하나를 바닥에 내팽개친 때였다. 짧게 치하를 내리는 이벨린의 옆으로 검은색 장갑을 낀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오랜만에 심문 좀 해 보겠네.”
바닥에 쓰러져 떨고 있는 이들을 상대하고 있다기엔 퍽 유쾌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심문’은 그들이 자리한 오두막의 옆에 딸린 작은 창고에서 이루어졌다. 밧줄에 꽁꽁 묶인 이들이 질질 끌려가는 소리와 막힌 비명이 점차 멀어졌다.
남자의 ‘심문’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벨린은 어둠 속에서 나오는 인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 불꽃놀이 하네.”
펑,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는 굉장히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으나 색색의 빛만큼은 작게 난 창틈 사이로 내려앉았다. 잠시 창 바깥으로 시선을 주던 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다 했으니까 이제 치워도 돼.”
손에 낀 가죽 장갑을 대충 벗어 바닥에 던지자 어두운색의 나무 바닥에 그보다 더 짙은 무언가가 묻어났다. 먼지투성이가 된 검은 장갑과는 다르게 길쭉하게 뻗은 뽀얀 손이 옥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오두막에 딸린 작은 창고 안에서 막 빠져나온 렉시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언뜻 보면 상쾌해 보인다고 착각할 만큼 말간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여러 번 봐온 이벨린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걸.
붉은색 액체로 질척거리는 너머의 바닥에서 애써 시선을 뗀 그녀가 고개를 한 번 까딱여 보였다. 어서 빨리 말이나 해보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일단, 교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것 같아. 특이한 건… 이번 일을 사주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거나 열등감이 심하고, 욕심이 많다는 점이려나.”
렉시아가 허공에 손을 한 번 흔들자 그의 옆에 목석처럼 서 있던 이가 서류를 하나 건넸다. 팔락거리는 종이 위에 사주를 받고 몹쓸 짓을 감행했다가 지금은 창고의 안쪽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깔끔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85
“책상 하나 갖다 놓길 잘했지?”
빙그레 웃은 그는 이벨린의 앞쪽에 놓인 책상에 서류를 적당히 펼쳐 놓았다. 제법 값비싼 태가 나서인지 낡고 협소한 오두막과는 동떨어져 괴리감을 자아내었으나 편리한 건 사실이었기에, 이벨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러 사람의 자료를 한데 뭉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책상의 반도 채우지 못할 만큼 양이 적었다. 중요한 정보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언뜻 보면 특이점이 없는 이들이었지만, 이벨린은 곧장 흥미를 잃기보단 찬찬히 렉시아가 내놓은 정보를 살피기를 택했다.
힘든 가정 형편, 쌓여 있는 빚, 병을 앓고 있으나 돈이 부족해 치료가 어려운 가족……. 이 외에도 열등감이 심하다는 둥, 욕심이 많다는 둥, 주변 평판이 굉장히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막대한 돈을 주고 일을 부탁한다면 하나 같이 거절하지 못할 사람들만 쏙쏙 골라냈다. 그녀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위쪽에 한패가 있네.”
이번 일에 손을 댄 사람이 모두 형편이 어렵거나 욕심이 많은 사람인 상황을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누군가 의도를 갖고 짜 맞춘 상황이라고 하는 편이 신빙성이 있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의 형편과 성격을 꿰고 있는 사람.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렉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말인데, 저놈들한테 이것저것 물어봤어. 가장 쓸모 있는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을 먼저 기절시켜 주겠다고 했더니 꽤 쏠쏠했지.”
또 다른 종이 하나가 렉시아의 품에서 나왔다. 쓸 만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측근을 시켜 조사한 정보였다.
“시종, 시녀는 물론이고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의 사정도 꿰고 있는 데다가 형편이 어려울 땐 사비로 종종 돕기까지 하는 모양이야. 덕분에 배려심이 깊고 성정이 착하다는 평이 자자하지.”
헤이먼.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귀에 익은 이름이다.
성별은 남자, 나이는 35세, 특이 사항이 있다면 몰락 귀족이라는 점.
일을 잘하고 평판이 굉장히 좋아,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경비대장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신분의 한계로 인해 맡는 일이 거의 없는 8번대의 대장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구원교의 입김이 닿은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황제가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만족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러니 황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그의 입김이 닿아 있을 게 분명했다.
“일단 조금 더 조사해 볼게.”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는 이벨린을 말없이 살피던 렉시아는 한 번 고갯짓하는 것으로 창고 안에 있는 것들을 치우라 명령했다. 옆을 지키던 그의 수족들이 즉시 자리를 벗어났다. 일사불란하지만 흔한 소음 하나 없는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살짝 내리뜬 눈매, 꾹 다물린 입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이벨린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한도 끝도 없이 차갑게 식어 갔다.
“렉시아.”
길었던 정적을 깨고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늘어놓은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있던 렉시아의 손끝이 흠칫 떨렸다. 단단히 벼르는 듯한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조사에서 손 떼.”
“…음, 왜?”
“내가 족칠 거니까.”
살벌한 읊조림에 무심코 이벨린의 눈을 바라본 렉시아는 이유를 묻는 것조차 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매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황녀다움’을 강요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황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여자였다. 이단의 수족이 궁내에서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안을 들쑤셨다는 사실이 못내 모욕적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분노가 사건의 주범인 구원교에게 향하는지, 아니면 그 난장을 눈감고 넘어가 준 황제에게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의 이벨린은 건들면 안 된다.
긴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하면서 그 사실을 철저하게 학습해 온 렉시아가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축제가 끝나기까지는 아직 하루가 남아 있었으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마신이 직접 ‘더러운 기운’이라고 언급한 만큼 하루빨리 궁을 나서겠다고 결정했고, 말을 돌리는 것 없이 곧장 인사를 전했음에도 황제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교가 벌인 짓거리들을 암묵적으로 허락해 준 사람치고는 흔쾌한 대답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꽤 찝찝하군요.”
덜커덩거리는 마차를 타고 가는 길, 오웬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렇게 말했다.
궁에 있는 동안 직접 위협을 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구원교가 둘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을 불구경하듯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는가. 황궁에 직접 발을 묶어 놓은 것은 그였으니 아예 관여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보내 주다니.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이미 달려가고 있었고, 수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오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신께서 잠시나마 강림해서 했던 말을 로한에게 전해 듣고 난 뒤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킨 탓이었다. 느릿하게 말을 내뱉은 지금조차도 그저 침착함을 가장한 것에 불과했다.
마신께서 직접 ‘더러운 기운’이라고 언급할 정도라면 사안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하필이면 자신의 영지에서 발생했다. 우스운 건, 신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과는 종종 연락하고 있던 오웬조차도 그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제 가족이 그 일과 관련이 없을 거라고, 감히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일 테다.
영지에서 발생하는 심상치 않은 일은 아무리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빠른 시일 내로 영주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소리 소문 하나 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를 감췄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 ‘누군가’가 제 가족일 수도 있는 일이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오웬의 얼굴이 저절로 흐려졌다. 말이 다그닥거리며 마차를 이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즈음, 그를 끝없는 구렁텅이에서 꺼내 준 목소리가 있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을 키웠던 분들이라면 이런 일에 손을 대진 않으셨을 겁니다.”
말을 내뱉은 것은 로한이었다. 오웬은 잠시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처음엔 그저 위로랍시고 한 말인 줄 알았으나, 다정함이라는 감정 자체가 결여된 듯 덤덤한 빛을 띠는 두 눈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음을.
“…예. 감사합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으니 한층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혼자 불안을 키우는 것보다는 믿음을 가지되, 진실은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옳았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내 정신이 없어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이, 침착함을 되찾은 순간 한꺼번에 몰려온 탓이었다.
‘…왜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한과 아르펠을 바라보는 오웬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둘과 함께 마차를 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적응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시선조차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로한은 여느 때와 같이 아르펠의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깍지를 꼈다 빼기를 반복하고, 장난치듯 손가락에서부터 시작해 손바닥까지 훑으며 간지럽히는 손길은 평소 하는 행동과 비슷했다.
배시시 웃으며 아르펠의 어깨에 고개를 비비적대는 것이 조금 심해 보이기야 했다만… 이것까지는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그런 그를 토닥이는 아르펠의 손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것은 로한의 눈빛이었다.
전에는 타인이 있으면 자제하기라도 했다. 지금의 그는 감출 생각은 있는 것인지, 온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눈에서 사랑이 퐁퐁 흘러나왔다.
눈앞에서 누군가의 애정 행각을 감상하는 취미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아르펠의 반응이었다. 분명 로한의 행동이 전과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펠은 여전히 똑같이 그를 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기뻐 보이는 것도 같았다.
“설마, 두 분…….”
한 줄기 의심이 피어오르는 순간 오웬은 튀어나가는 한 마디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로한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한가득 고이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그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굳이 남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최후의 발악이었으나 사랑에 눈이 먼 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르펠의 어깨에 폭 고개를 묻은 로한이 기어코 오웬의 말을 대신 끝맺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펠이 저 받아 줬어요… 그쵸?”
“응.”
온기 어린 눈을 한 아르펠은 그런 로한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토닥거리기를 반복했다. 조금은 바보 같기도, 혹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보이기도 한 웃음소리가 로한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웬은, 그런 둘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 둘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 아니, 확신까지 들 정도였다.
그때, 길들여진 온순한 동물처럼 굴던 로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잠시 의아함을 내비치던 오웬은, 그의 옆에 있는 아르펠 역시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다.
벌컥 마차의 창을 연 로한이 소리쳤다.
“마차 돌려요! 당장!”
마력까지 실은 목소리는 쟁쟁하게 울려 마부의 귀에 닿았고, 그들이 귀한 손님인 것을 알고 있던 마부는 갑작스러운 요구의 이유는 알지 못하더라도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우르릉. 어디선가 불길한 소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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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값이 나가는 탓에 승차감이 좋기로 정평이 난 마차였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 같은 평을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빠른 속도로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달려 나가는 마당에 좋은 승차감을 기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벽에 손을 짚고 몸이 고꾸라지는 일이 없도록 버티고 있던 오웬은 문득 기묘한 감각 하나를 느꼈다.
달리는 마차로 인한 흔들림뿐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는 듯한 느낌.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우레와 같은 굉음이 등 뒤를 덮쳤을 때였다.
수많은 소음이 섞였다.
말들이 놀라 울부짖는 소리, 마부의 비명, 무언가 쓸려내려 가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이건….”
그 어마어마한 소음이 끊기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부가 바퀴를 손보겠다며 마차를 잠시 멈춰 세운 이후. 오웬은 그제야 바깥의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 지옥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와 커다란 돌이 흙더미에 쓸려 내려와 길까지 집어삼켰다. 아까 전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면, 혹은 마차를 돌리는 시점이 늦었더라면 저 흙 아래에 마차가 파묻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저 둘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일 테다. 전형적인 행정직 신관이었던 오웬으로서는 산사태가 일어나기 전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 반응해 마차를 돌리는 일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바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갑작스레 빠른 속도로 달려온 것이 걱정됐는지, 가볍게 마차를 점검하던 마부가 잠깐 말을 망설였다.
“이 길이 피데스 영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긴 하지만 다른 길과는 꽤 동떨어져 있습니다. 돌아간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대신 출발은 잠시 미뤄도 되겠습니까?”
“예, 원할 때 불러 주십쇼!”
죽을 고비를 막 넘긴 사람치고는 시원시원한 답변이었다.
출발을 잠시 미룬 로한이 오웬을 향해 대강 눈짓했다. 물론 아르펠의 손은 꼬옥 붙잡은 채였다. 눈에 훤히 보이는 차별 대우를 태연하게 넘긴 오웬이 무너진 흙더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흙을 대충 손으로 만져 본 그의 미간이 대번 구겨졌다.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만져 보니 더 이상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산사태라고 하기엔 흙에 수분기가 너무 적군요.”
대개 산사태는 비가 많이 올 경우 발생한다. 만약 이 지역에 비가 많이 왔다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 한둘쯤은 그 이야기를 했겠지. 연회가 끝난 후 잠깐 거리를 돌아다녔으나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한편, 아르펠은 길까지 쓸려 내려온 나무와 돌, 그리고 흙의 잔해와 가까워질수록 짙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묘한 냄새가 자꾸만 후각을 자극했다.
“…망령 냄새가 나.”
“근처에 망령이 있어요?”
아주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으나 옆에 딱 붙어 서 있던 로한은 그 조그마한 음성에도 곧장 반응했다. 싸하게 굳는 얼굴에 아르펠이 고개를 저었다.
“흙에서 나는 냄새야.”
쏟아진 흙의 양이 길을 다 덮어 버릴 정도로 많아 현장의 범위가 방대한 것은 물론이고, 공기 중에 맴도는 냄새조차 굉장히 옅고 은은한 탓에 곧바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너진 흙더미에 가까워지니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로한과 오웬의 얼굴은 묘해졌다. 망령의 힘에 굉장히 예민한 아르펠의 말이니 믿기야 하지만, 그조차 집중해야 느낄 수 있는 만큼 그들에게는 평범한 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조금 까만 흙처럼 보이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색이 조금 까맣다는 것. 흙을 만지던 손을 탁탁 털어 낸 오웬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뿌리를 보고 나서야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누군가의 수작이라는 거겠네요.”
흙 사이로 드러난 나무가 냄새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까맣게 물들어 있는 뿌리는 로한과 오웬 또한 느낄 수 있을 만큼 망령의 기운에 푹 절어 있었다. 끝부분부터 쪼그라들어 있는 모양새가 마치 썩은 것만 같았다.
아르펠을 따라 나무뿌리를 살피고 있던 로한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산사태를 누가, 어떻게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의도는 확실했다. 피데스 영지로 향하는 길목을 막는 것, 혹은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 이미 길목이 막혀 버린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르게 피데스 영지에 도착해야 했다.
로한과 아르펠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지만, 생각이 통한 건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웬은, 그 둘의 행동에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마부님.”
“아, 출발하시게요?”
“아뇨,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웃는 얼굴로 마부에게 다가간 로한은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이 길목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어느 정도 걸리는지,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얼마나 더 오래 걸리는지….
어차피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마당에 왜 이런 것을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기는 했다만, 마부는 착실히 그 물음에 답해 주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하하, 그런 편이죠.”
지연되는 시간은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 원래 이렇게까지는 걸리지 않지만,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린다며 마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보수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부탁이요?”
“네. 이전에 들렸던 마을로 돌아가셔서 전서구를 날려 주시겠어요? 내용은…….”
대충 갑작스레 발생한 산사태에 망령이 얽혀 있는 것 같으니 조사해 달라는 말이었다. 물론 암호를 섞었기에 눈앞의 마부가 진짜 내용을 아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굉장히 친절한 설명이었으나, 마부는 한 번에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르펠은 로한을 대신하여 당황스러워하는 마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방금 전 로한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는 종이였다.
“고마워요…….”
사소한 배려 하나에도 상기되는 얼굴이 예쁘게 보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아르펠의 얼굴에 묘한 뿌듯함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찰나에 불과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시선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탓이다.
오웬은 그 모든 것을 뒤쪽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르펠이 마차 뒤쪽에서 몰래 그림자를 뒤져 종이와 펜을 꺼내는 모습도, 시선을 피한 그의 귓불이 새빨개진 모습도, 그런 아르펠을 보며 로한이 행복해하는 모습도, 전부 다.
분명히 말하지만,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었다. 그는 ‘눈꼴이 시리다’라는 표현을 어떤 상황에서 쓸 수 있는지 톡톡히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럼 마부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이어진 짧은 정적. 서로를 응시하는 눈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안 가시나요?”
“……안 타시나요?”
질문이 겹쳤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로한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만 가 보시면 됩니다.”
“예? 안 타시는 겁니까?”
“네.”
“그게 무슨…….”
뒤따른 물음은 오웬의 것이었으나, 로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퍽 완강한 태도를 보인 탓일까, 오웬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마부는 반쯤 떠밀려 자리를 뜨고 말았다.
유일한 이동 수단인 마차가 떠났으니, 이후 산사태로 인해 막힌 넓은 길목에 두 사람과 사람의 모습을 한 검 하나만이 남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중 허망한 눈을 하는 것은 오웬뿐이었다. 유일하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혹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던 그를 대신해 아르펠이 먼저 운을 떼었다.
“내가 들고 갈게.”
“안 돼요. 무겁잖아요. 아르펠이 검으로 변하고 제가-.”
“싫어.”
쿠궁. 단호한 거절에 로한의 얼굴이 천둥번개라도 내리친 듯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웬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말의 내용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뭘 들고 간다는 것이며, 뭐가 무겁다는 말인가?
“그럼 반씩 나눠서 들자.”
다행히 말다툼 아닌 말다툼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을 맺었다. 서로가 만족스러운 결론을 얻은 모양인지 서러움이 맺혀 있던 로한의 얼굴도 한층 평화로워졌고, 아르펠도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웬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지금.
“…뭡니까?”
오웬은 그들의 말을 강제로 이해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로한이 제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을 때였다.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는데도 보폭을 줄이지 않길래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건만, 안타깝게도 그 행동은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컥!”
무라도 뽑는 것처럼 오웬을 들어 올린 로한이 그대로 그의 몸을 들쳐 멨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땅을 보게 된 오웬의 머리와 그로 인해 피가 쏠려 벌게지는 얼굴을 지켜보던 아르펠이 조용히 대안을 제시했다.
“업어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업어 드릴게요.”
아르펠의 한 마디에 몸이 홱 돌아가더니 금세 자세가 고쳐졌다.
“이게, 이게 뭐 하는 짓…….”
덕분에 머리에 피가 쏠리지 않긴 했다만, 정신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몰아치는 상황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오웬에게 로한이 앞으로의 계획을 대충 설명했다.
“다음 마을까지 뛰어서 가려고요.”
문제는, 너무 대충이라는 것일 테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쏘아붙이려던 오웬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튀어나가는 두 사람에 입을 꾹 다물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얼굴을 반쯤 때린다고 해도 무방한 바람에 괜히 입을 열었다 혀라도 씹을까 겁먹은 탓이었다.
오웬은 그날 처음으로 사람이 마차만큼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전 안에 틀어박혀 일만 하며 살았던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작게 터진 헛웃음이 거센 바람소리에 묻혔다.
87
제국을 주름잡는 가문 중 하나임을 보여 주는, 가히 압도적이기까지 한 드넓은 성. 절제된 화려함이 녹아 있는 건축물들이 그들이 위세 높은 가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전에 들렀던 수도의 타운하우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다. 입구를 지나쳤는데도 불구하고 본성까지 마차를 타고 한참을 더 들어와야 했을 정도였다.
한참을 이동하던 마차가 비로소 느리게 멈춰 섰다. 피로한 낯을 감추지 못한 오웬이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내리려 할 즈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독 체격이 좋은 남자였다. 아르펠은 그의 정체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리테란 피데스. 피데스 후작가의 첫째이자, 현재 재상 일을 하느라 수도에 머물고 있는 후작을 대신해 영지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인물이었다. 새롭게 구한 마차를 타고 오는 중 오웬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하하, 동생 녀석이 손님을 데리고 오는 건 처음이군요.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놈이 까탈스럽게 굴더라도 이해 좀 해 주십쇼.”
거짓말을 조금 보태 솥뚜껑만 한 손이 오웬을 툭툭 쳤다. 어깨에 손이 닿을 때마다 마른 몸이 이리저리 휘청이는 것이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순간, 허허롭게 웃고만 있던 그가 얼굴을 싹 굳혔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사뭇 날카롭고 예리한 느낌을 풍기기 시작했다.
“근데… 마차는 왜 이러냐? 수도에 있는 놈들이 너 무시하는 건 아니지?”
심각해진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분위기를 주도했던 이가 헛다리를 제대로 짚어버린 탓이었다.
“하아…….”
오웬이 적나라한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창피함이 물밀듯 올라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해명 아닌 해명, 그리고 가벼운 통성명이 오간 뒤 그들은 본성의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장대한 외관에 걸맞게 넓게 트여 있는 초입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이 가득했다. 앞장서 걷던 리테란이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흐음. 원래라면 제 보좌관에게 안내를 맡겼을 테지만, 그가 잠시 외출을 해서 말입니다. 마침 시간도 괜찮으니 제가 직접 안내를 해 드릴까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제안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오늘 저희가 오웬 님을 따라 피데스 후작가까지 찾아온 건 공자님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말입니까?”
로한의 대답에 의아한 듯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리테란이 오웬을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 ‘이야기’라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했는지 내내 호탕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공손히 인사를 건네 오는 사용인들을 모조리 물린 그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기다란 복도를 몇 번이나 꺾어 들어가고 나서야 사람의 발이 잘 닿지 않을 법한 은밀한 곳에 있는 응접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중대한, 혹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신중해서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아르펠은 그를 따라 걸으며 엷게 펼쳐 두었던 마력을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대화인지라 차 대접은 못 해 드릴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배려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가벼이 웃은 로한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축제에서 마신께 계시를 하나 받았습니다. 피데스 영지 어딘가에 ‘더러운 기운’이 고였으니, 이를 해결하라고.”
“더, 더러운 기운이라면…….”
“망령일 확률이 높습니다.”
당황하는 일은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던 리테란의 얼굴이 눈 깜짝할 새에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제 형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던 오웬은 소리 없이 안도했다. 저 반응은 정말로 몰랐을 때 나오는 반응이라고. 그런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아르펠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저희는 여태 망령과 관련된 일을 여러 번 해결해 왔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마신께서 ‘더러운 기운’이라며 직접 언급하신 적은 없으셨죠. 그러니 이번 일은 분명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닐 겁니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행동이 리테란의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이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어떻게든 협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짐작 가는 곳은 있으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영지민들이 엄청나게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영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최근 특이한 일이 발생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을은 없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한 또한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피데스 후작가에 오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무작정 걸음을 옮긴 것이었으니 잠시 갈피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제쳐 두었다. 오히려 영지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였으니, 괜히 의심 거리를 늘려 시간을 지체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무엇이 됐든 쓸 만한 단서를 얻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가능성을 입에 담으려는 찰나였다.
“내부에 배신자로 의심되는 자는 있습니까.”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르펠이 제가 하려던 말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맞은편에 있는 리테란이 그의 발언에 당황하여 무어라 해명했지만, 동시에 같은 말을 할 뻔했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직전까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마음속 깊숙한 곳이 사르르 녹고 말았다. 허물어지려는 표정만큼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붙들어 낼 수 있었다.
“로한?”
아르펠의 손이 로한의 무릎을 가볍게 도닥였다. 그 손길이 로한의 정신을 일깨웠다.
빤히 바라보는 눈에 걱정의 기색까지 묻어 나왔다. 간단한 질문 하나를 했을 뿐인데 로한의 감정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으니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괜찮아요.”
로한은 그 걱정을 기껍게 받아넘겼다.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잠시 미뤄야 했다. 이야기 하다 말고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 리테란에게 미안함을 담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아니라며 잽싸게 고개를 저은 그는 앞서 말한 것을 뭉뚱그려 덧붙였다.
현재 본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굉장히 오랜 시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가족들이 모두 피데스 영지에 살고 있으니 망령의 편에 설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명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로한도, 아르펠도 그 사실만큼은 동의했다.
하지만 내부에 배신자가 있지 않은 이상 말이 되지 않는다.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피데스 영지의 모든 마을에 대한 정보를 리테란이 관리할 수는 없다. 아랫사람들이 거른 정보를 확인하는 식일 테고, 작은 마을, 변방에 있는 마을일수록 중요도가 낮으니 다시 확인할 일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제 희망 사항이겠군요.”
여러 근거를 내놓던 리테란은 짧은 침묵 끝에 한 마디를 토해 냈다. 후작을 대신해 넓은 영지의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만큼 유능한 인물일 테니,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사실도 깨달았겠지.
“어차피 오늘 안으로 결론을 짓긴 무리인 일입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두 분은 당분간 여기서 묵으시죠. 방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동생아, 그래도 안내는 내가…….”
“형님은 집무실에 가 계세요. 그간 받았던 서류들 싹 다 뒤져야 할 거 아닙니까. 농땡이 피우다간 일주일 밤은 꼴딱 새워야 할 겁니다.”
나서서 상황을 정리한 것은 오웬이었다. 깔끔한 정리에도 유일하게 반발하던 리테란은 일주일 밤이라는 이야기에 돌처럼 굳었다.
***
오웬이 안내해 준 방은 굉장히 깔끔하고 넓었다. 방 하나를 부탁할 때에는 ‘이 둘을 진짜 한 방에 넣어도 되나’ 싶은 눈으로 응시하긴 했다만, 그뿐이었다.
서류 분류를 돕겠다는 제안도 거절당했으니 당장 남아 있는 일정은 이후 다가올 저녁 식사 정도일 것이다.
“그 산사태가 우리를 이곳에 늦게 도착하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일으킨 거라면, 상대는 우리의 목적지가 피덴스 영지라는 걸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겠죠?”
“그렇겠지.”
수도에서 출발한 뒤 산사태가 발생한 지역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약 나흘이다. 주로 야영을 하며 이동했지만, 근처에 마을이 있을 때는 마을에서 묵기도 했기에 반나절 정도의 시간은 제외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산사태를 일으켜 길을 막을 준비를 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마차는 산사태에 휩쓸릴 뻔한 것을 간신히 피하고 직전 들렸던 마을로 되돌아갔다.
이번 일을 계획한 이가 유일하게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면, 로한과 아르펠이 오웬을 번갈아 가며 업은 채 다음 마을까지 직접 뛰어 갔다는 점일 테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건 총 두 가지였다.
“일단, 정보는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새어 나갔겠네요.”
첫째, 피데스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 정보를 빼돌린 사람이 있다는 것.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기는 했으나, 오웬은 출발 전 수도의 타운하우스에 잠시 방문했다.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면 그곳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리고 저희의 발을 묶어야 했다는 건, 뭔가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거니까… 제가 이번 일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엄청 급할 것 같아요.”
둘째, 그들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굳이 산사태라는 큰일을 벌여 가면서까지 발목을 확실히 묶을 수단을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둘의 돌발 행동은 계획의 치명적인 오류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이 후작가 안에서 일을 벌일 셈이었다면, 지금쯤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똑똑하네.”
로한의 머리를 토닥여 주자 그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감돌았다. 머릿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떨어지던 손끝이 볼 위로 내려앉을 무렵이었을까.
문득 창밖으로 뛰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옷까지 잔뜩 휘날려가며 성 안으로 급히 들어오는 남자였다.
“엄청 급한 일이 있나 봐요.”
아르펠의 시선을 빼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던 로한이 미간을 좁혔다. 내뱉는 목소리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닌다는 게, 딱 저런 사람을 두고 표현하는 말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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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르게 서류를 찾아보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만찬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불쑥 찾아온 오웬은 얇은 서류 뭉치를 건네며 그런 말을 전했다. 하루 만에 방대한 양의 서류를 다 살펴볼 것을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건 형님을 돕는 보좌관들의 정보입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낼 테니 눈에 익혀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보좌관은 총 셋.
젊은 여자와 남자 하나, 그리고 중년의 남자 하나였다. 이름과 간단한 신상 정보만이 죽 나열된 서류는 깔끔했고, 그만큼 빈틈이 없었다. 몇 번을 읽어 보아도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중 갑자기 외출을 했다던 사람은 누굽니까?’
‘오늘 돌아온 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쪽일 겁니다. 나머지 두 분은 아직 외출 중입니다.’
오웬의 손가락은 세 명의 보좌관 중 중년의 남자, 케드윈의 신상이 적힌 종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그저 나열된 글자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이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정갈하게 장식된 요리가 담긴 접시들이 그의 손 위에서 화려하게 노닐었다.
중간중간 서커스라 해도 믿을 법한 기예가 펼쳐지자 로한의 눈이 당황으로 떨렸다. 리테란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고, 오웬은 반쯤 똥을 씹은 표정이었다. 한 톨의 변화도 없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는 것은 아르펠뿐이었다.
“케드윈. 그만 하고 내려놓게. 손님들이 당황해하시지 않나.”
“하하, 막내 도련님의 손님이라고 하시니 제가 너무 들떴나 봅니다.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으니 이렇게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말이죠.”
“그것도 정도가 있지.”
옆쪽에서 짤막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트레이를 운반하고 있던 시녀들이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시선이 향하니 화들짝 놀라 사라지기는 했다만, 반응을 보니 그가 손님을 상대로 뜬금없는 묘기를 선보이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기다란 식탁 위가 가득 채워지는 동안 소소한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를 주도하는 이는 대개 리테란이었고, 굉장히 일방적인 흐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다른 동생 두 놈은 기사가 되겠다고 황궁 기사단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막내 놈은 신전에 틀어박혀 있지 않나… 그래서 요즘은 삶이 너무 적적…….”
가벼운 근황이 불평으로 변질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테란이 짧게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아르펠은 제 앞을 채운 음식, 그리고 음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미 한 번 느껴본 적 있던 위화감이 옅게 피어올랐다. 한 입 두 입,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이들 틈에서 아르펠은 조금도 손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르펠? 왜 그래요?”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로한을 시작으로 리테란과 오웬마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독이 들었군요.”
“……독이요?”
부드럽게 움직이던 식기들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나름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얼음장처럼 차게 가라앉은 로한의 눈은 아르펠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케드윈.”
“네.”
리테란의 한마디가 싸하게 내려앉은 적막을 뚫었다. 곧장 그의 말에 대답한 케드윈이 은 식기를 이용해 아르펠의 앞에 놓인 음식을 확인했고, 음식에 닿자마자 변색된 스푼은 명백한 답을 내려 주었다.
“제 불찰입니다, 각하.”
이를 확인하자마자 케드윈이 고개를 숙였다. 가볍다 못해 날아갈 것 같던 아까까지의 자세는 깨끗이 사라진 뒤였다.
불순한 움직임을 살피지 못한 제 죄다, 자신 또한 독을 넣을 수 있는 용의자 중 한 사람이니 조사를 받겠다. 리테란이 자신을 복잡한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그는 한 점의 흔들림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후, 그대는 여기에 남도록. 밖의 기사를 불러 상황을…….”
결국 리테란은 그의 눈에서 진의를 찾기를 포기했다. 친우와 다름없는 그를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야 했다만, 당장 첫날부터 독살을 노릴 줄이야.
오웬의 손님이, 그것도 마신의 계시로 인해 찾아온 손님이 독살당할 뻔한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네 사람은 각자 다른 음식을 선택했다. 그러니 그 종류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를 잡고 범인을 추리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들 수도 있다.
계시를 받은 두 사람이 직접 찾아올 때까지 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낯부끄러운 일이었건만, 이제는 그들을 볼 면목조차 없을 것 같았다. 리테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전 제 음식에 독이 들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독살당할 뻔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예? 하지만….”
“당연한 듯 음식부터 확인하시더군요. 잔에서는 독이 검출되지 않을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음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 시도해 봤을 뿐입니다. 식기가 변색이 되었으니 자연스레 잔은 괜찮을 거라 여겼나 봅니다. 심기가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눈이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침착했다. 아르펠은 감흥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느리게 움직인 손이 잔 안에 은 식기를 넣어 가볍게 휘저어 보였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은으로 된 스푼이 음료에 닿았으나 색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잔 안에서 찰랑이고 있는 옅은 주홍빛의 음료는 독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한없이 맑기만 했다.
아르펠은 그것을 케드윈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이걸, 왜.”
“이걸 드신다면 방금 전 제 무례를 사과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마셔 보게.”
한 박자 늦은 거절은 상황을 지켜보던 리테란의 단호한 한마디에 의해 일축되었다.
그의 형형한 눈에 일말의 의심이 서려 있다는 것을 눈치챈 케드윈이 마른침을 삼켰다. 바르르 떨리는 손이 살짝 움직였으나, 끝내 아르펠이 쥐고 있는 잔을 건네받는 일은 없었다.
“아르펠.”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와중, 나직한 목소리 하나가 둘의 사이를 갈랐다. 아까부터 전해지고 있던 감정 하나가 눈에 띄게 몸집을 부풀렸다. 다정하게 이름을 읊조린 음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살의였다.
그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잔을 빼앗겼다. 커다란 손이 오른손을 감싸 쥐고 안에 잡힌 것을 조심스럽게 빼내는 일련의 행동이 그렇게 빠르고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유려한 손길에 한눈이 팔려서일까. 바닥에서 치솟은 그림자가 얇은 줄기처럼 뻗어나가 케드윈의 몸을 눈 깜짝할 새에 묶어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쓰레기한테 굳이 왜 물어봐요.”
“끄억!”
“그냥 입에 부어 버리면 되는 걸.”
그림자가 강제로 케드윈의 입을 벌리고, 로한은 그 위로 잔을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내용물이 제 입 안으로 떨어질 것 같자 직전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던 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억! 억!”
고개를 휘휘 저으려는 움직임이 참으로 필사적이다. 그마저도 그림자들에게 묶여 버둥거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 참담한 꼴을 바라봐야만 하는 리테란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입만 풀어줄 수 있겠나?”
저렇게까지 발버둥을 친 이상, 본인이 잔에 독을 넣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테란은 케드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정말로 많았다. 은 식기로 확인이 불가능한 독을 어떻게 구했는지? 왜 하필이면 아르펠을 노렸는지?
그 모든 것이 궁금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빠져나온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케드윈. 왜 그랬지?”
그는 계시에 대해 전해 들으면서 끝도 없는 모순에 빠져들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믿고 싶다는 마음 또한 함께 커져간 탓이다. 그런 마음을, 눈앞의 케드윈이 걷어찼다.
그것이 분노에 불을 지피는 한편, 도저히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방금 전까지 웃는 얼굴을 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제 곁을 지켰던 이를 이렇게까지 처참한 꼴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를 망령의 편에 서게 만들었는가.
몸을 얼기설기 구속한 그림자가 입만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헐떡이는 숨결, 겁에 질린 목소리는 능숙하게 손님을 대하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채였다.
“저주, 제 아들이 저주에 걸렸습니다.”
“저주?”
“어쩔 수 없었어요, 제 아들이 지은 죄를 갚으려면, 이 방법밖에…. 아내가 계시를,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분께 계시를 받았어요! 머지않아 후작가 성에 검은 머리의 외부인이 찾아올 테니 반드시 그에게 ‘씨앗’을 먹이라고.”
두려움이 깃든 남자의 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몸을 묶고 있는 그림자도, 살의를 감추지 못하는 로한도, 그 ‘씨앗’이라는 게 들어 있다는 잔도, 지금만큼은 그의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아, 아아… 실패했어. 이제 내 아들이 죽을 겁니다. 그분께 벌을….”
“어이, 케드윈!”
“용서를, 용서를 빌어야…….”
무엇 하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리테란이 그를 몇 번 불렀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는 일은 없었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몰골이 정신이 완전히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리테란 님.”
작은 부름과 함께 휘리릭 뻗친 그림자 줄기가 다시 케드윈의 입가를 꽁꽁 묶어 버렸다.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 하는 로한의 의지에 감응한 것이다.
감정이 들어간 탓일까, 처음보다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그림자가 남자의 살결을 파고들어 미약한 핏줄기를 냈다.
“이 사람, 제가 심문해도 될까요?”
로한의 입에서 나온 건 얼굴에 감돈 화사한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아르펠은 입만 잠시 달싹였을 뿐 그를 말릴 수 없었다.
89
독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부터 로한은 수많은 감정에 휩싸였다. 이를 빠르게 눈치채지 못했다는 자책. 조금만 늦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정말로 아르펠이 독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아르펠을 노린 자를 향한 지독한 살의.
흘러나오는 감정을 하나하나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중 아르펠이 가장 선명하게 읽었던 것은 다름 아닌 살의였다.
상대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포악한 충동이 널뛰었으나 그는 내내 그것을 억눌렀고, 아르펠의 뜻대로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르펠이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심문’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까지 얼마나 인내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건…….”
“형님.”
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풍기는 리테란을 막아선 이는 오웬이었다.
웃음만 화사했다 뿐이지, 진작 로한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가장 먼저 아르펠을 살폈었다. 그가 로한을 말리길 바라며 보낸 눈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웬은 신전에서 지내던 시절의 로한만을 기억했으나, 간혹 들려오는 보고는 조금 다른 면모를 전해 주었다. 간혹, ‘아르펠과 관련되면 충동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음’이라던가…….
‘순화했군.’
저건 충동적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돌아가 있지 않은가.
“……음.”
리테란은 한 박자 늦게 그 눈을 발견하곤 침음을 토해 냈다.
밝은 금빛이라 언뜻 보면 눈이 반짝인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짝이기보다는 번들거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위험한 눈이었다.
숨길 기색도 없어 보이는 짙은 살의에 무(武)를 어느 정도 연마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한순간 경직될 정도였다.
“…대신, 죽여선 안 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또한 신관이니 어느 정도의 치유는 할 줄 아니까요.”
결국 리테란은 로한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위험한 눈을 한 놈을 괜히 자극하지 않고 싶은 탓이 컸다.
“아르펠, 저 다녀올게요.”
인사하는 목소리만큼은 다정했다. 아르펠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로한의 손을 잡았다. 검을 잡은 탓에 군살이 배인 딱딱한 손이었지만 아르펠의 눈에는 여전히 뽀얗고 예뻐 보이기만 했다.
바닥에서 일렁거리던 그림자가 무언가를 툭 뱉어 냈다. 가죽으로 만든 검은색 장갑이었다. 구원교의 지부를 찾으러 다닐 적에 렉시아에게 이것저것 받아 모아 놓은 보람이 있었다. 장갑을 끼고 있으면 손에 피가 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피가 튀면 더러우니까…….”
“…고마워요.”
가죽 장갑의 출처가 렉시아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로한은 그저 아르펠이 건네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온전히 기뻐했다.
한때 살기가 넘실거렸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두 눈이 수줍게 내리깔리고, 볼에 홍조가 슬며시 올라오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장갑을 낀 로한은 그림자로 꽁꽁 묶인 케드윈을 끌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 하나와 함께 가는 것을 보면 심문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안내받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두 분은, 그러니까….”
로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리테란이 말문을 텄다. 어이가 없어 보이기도, 얼떨떨해 보이기도 한 목소리였다.
그 누가 와서 뜯어말려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눈이 사르르 풀어지던 광경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었다. 감동을 주는 말을 한 것도,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피가 튄다며 장갑을 건네주기만 하지 않았나.
리테란에게는 둘의 관계가 감히 정의내릴 수 없는 무언가로 보였다. 그 생경함에 바보같이 입만 뻐끔거리던 리테란은 옆에 서 있던 오웬이 팔꿈치로 가볍게 한 번 치고 나서야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던 오웬의 눈에 문득 아르펠의 표정이 걸렸다. 찡그렸다고 하기에도, 찡그리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표정은 어딘가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새였다.
“아닙니다.”
고개를 젓긴 했다만, 아르펠은 속이 꽤 복잡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로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멀어지던 순간 우울히 가라앉던 눈을 보았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때 그에게서 흘러나왔던 엷은 감정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까.
‘왜…….’
왜 그렇게 슬퍼하고 있느냐고, 이미 가 버린 로한을 뒤쫓아 가 묻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다녀오겠다’라는 한마디가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의지의 표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입술을 꾹 깨물어 애써 그 충동을 참아 낸 아르펠은 여전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한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으니,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생각이 많아진 머리를 애써 비웠다.
“일단 이 잔 안의 내용물은 따로 보관해 신전 측에 넘기십시오. 중요한 증거물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만. 독이 들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 다른 신관들보다 망령의 힘을 더 민감히 느끼는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잔에서는 망령의 잔재가 느껴집니다.”
망령…. 아르펠의 말을 짧게 되뇐 리테란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고, 오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자연스레 떠오른 일이 있는 탓이었다.
“산사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해당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산사태?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오웬은 뒤늦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피데스 영지로 오는 길에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일어난 산사태를 겪었으며, 토양과 나무의 뿌리가 망령의 영향을 받아 썩어 있었다고.
꼭 영지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려 하는 것 같았다는 말에 리테란이 팔을 괴었다. 케드윈이 급하게 자리를 비운 것도 그즈음이었으니, 독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나름대로 들어맞았다.
그의 시선이 눈앞의 아르펠에게 향했다. 복잡함, 그리고 진중함이 서린 눈은 그를 분석이라도 하는 것처럼 길게 바라보았다.
이 남자에게 독을 먹이기 위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체는 망령을 이용해 산사태를 일으켰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로 내부자 중 배신자가 나왔으니 그가 처리한 서류를 뒤져본다면 마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빠르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좌관이 노렸던 아르펠이 그 계시와 관련이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겉으로는 아닌 척 포장하는 다른 한 명과는 다르게, 그는 대놓고 폭풍을 몰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쩌면 이쪽이 더 위험할지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는 자색 눈동자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닮아 있었다. 리테란은 가만히 눈두덩이를 짚었다. 동생 놈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버린 것인지, 왜 이렇게 위험한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지 모르겠다.
오웬이 들었다면 누가 어울려 다녔냐며 어이없어할 생각이었다.
***
늦은 밤이었지만 그들은 만찬을 마무리하고 각자의 방이 아닌 리테란의 집무실로 향했다. 로한을 기다릴 겸 케드윈의 서류를 뒤져보기 위함이었다.
자리에 걸터앉아 여태 그가 정리해 왔던 영지의 실태 조사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기를 몇 분.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로한이 등장했다.
종이가 날리든 말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펠은 성큼성큼 로한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우울한 기색은 온데간데없는 말갛게 핀 얼굴이 고운 미소를 그려 보이기만 했다.
아르펠은 그 미소를 찬찬히 바라보다 물었다. 바람에 미처 날아가지 않은 옅은 피 냄새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걱정을 온전히 덜 수가 없던 탓이었다.
“힘들진 않았어?”
황당하다는 눈초리가 뒤에서 쏟아졌으나 아르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였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뜻을 전한 로한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심문을 통해 얻은 것들을 빠르게 풀기 시작한 것이다.
“마신께서 말씀하신 ‘더러운 기운이 고인 곳’은 놈의 고향인 베모스 마을인 것 같습니다.”
“…고향? 고향이라고 하셨습니까?”
리테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했다. 당장 본인의 가족들이 사는 곳에서 문제가 벌어졌을 텐데 왜 입을 다물고 있었단 말인가?
빠르게 그에게 보고해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지는 못할망정, 아예 숨겨 버리는 것은 그들이 사는 마을을 사지로 몰고 가 버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혼란을 숨기지 못하는 낯빛에 로한이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얼마 전부터 마을에 사는 사람이 하나둘씩 잠들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니 잠든 채로 죽는 사람도 허다하다더군요. 이걸 그 마을 사람들은 저주, 혹은 천벌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그럼 대체 왜 제게 보고를……!”
“그들이 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아르펠이 의아히 눈을 떴다. 두 신전 외에 모든 종교가 이단이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인 대부분은 신전을 믿는다. 당장 ‘망령’이라는 위협적인 존재로부터 보호해 주는 이들이 신관이기 때문이었다.
잠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망령 때문이라 판단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괴현상이 코앞에 닥친 이상 신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단입니다. 잠에서 깨지 못하는 현상이 여우신의 저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노한 여우신에게 공양하고 용서를 빌어야만 저주가 풀린다고 굳게 믿고 있어요. 아르펠에게…… 그따위 짓을 한 것도, 모두 그놈의 아내라는 작자가 여우신에게서 받은 계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으득. 중간에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리테란은 착잡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뒤로도 로한은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만약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무사히 용의 선상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의심을 받을 만한 이를 따로 준비해 놓았고, 그게 트레이를 나르던 시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케드윈은 마지막으로 음식의 독을 확인한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그녀의 방에 몰래 독이 든 병까지 숨겼다고 털어 놓았다. 아마 그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대신 범인이 되어 잡혀간 건 그 어린 시녀였을 것이다.
90
리테란은 그 시녀가 다른 보좌관 하나가 동생처럼 아끼는 아이였음을 말하며 얼굴에 번져가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여태 자신이 건넨 근거 없는 신뢰가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는 것이 한스러웠다.
“치료는 다 해 두었으니 대화를 나누는 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 뒤로 알아낸 정보를 몇 가지 더 일러준 로한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겉으로만 멀쩡했지, 속으로는 그 ‘여우신’에 완전히 미쳐 있는 놈이라는 사실 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두 분께, 특히 아르펠 님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제 보좌관이 아르펠 님의 목숨을 노리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리테란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떤 세력이 개입되어 있든 이번 일이 자신의 영지에서, 그것도 본성에 머무는 손님을 노리고 벌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죄의 이유가 아니겠는가.
한 점의 동요 없는 얼굴이 그의 사죄를 받았다. 더 이상의 추궁도, 죄를 묻는 일도, 하물며 괜찮다며 대답을 건네는 일도 없이. 그저 받을 사과니 받았다는 흔들림 없는 태도를 누군가는 비인간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리테란은 도리어 그 태도 덕에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남은 자료는 제가 최대한 빠르게 정리할 테니 두 분은 이만 방에 돌아가서 쉬시지요.”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의 말을 사양치 않은 아르펠은 짧은 묵례를 끝으로 단숨에 로한의 손을 잡아끌었다.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급함마저 서려 있어서, 그들이 나간 자리에는 얼떨떨한 두 시선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아르펠? 무슨 일 있어요?”
보폭 넓은 걸음을 몇 번 거듭하니 방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재촉하기만 했던 아르펠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로한을 바라보았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눈매가 동그랗게 떠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에서 쉬라는 한마디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한을 데리고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니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냐고, 왜 네가 슬퍼하냐고.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으나, 정작 이를 물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마련되자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로한의 표정을 보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뜸 두 팔을 벌려 보인 건.
“…이리 와 봐, 로한.”
작게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벌리고 있는 팔이 무엇을 뜻하는지 빠르게 깨달은 로한은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아르펠이 이러는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본능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몇 번이고 그를 부추겼다.
로한은 온순한 짐승처럼 아르펠의 품에 몸을 구겨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등허리에서 느껴지는 토닥임이 가져다주는 안정을 만끽했다. 어깻죽지에 느릿하게 비벼지던 고개가 뚝 멈춘 것은 이윽고 들린 아르펠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고마워.”
“……네?”
뜬금없었지만 짙은 감정이 담겨 있어 쉽게 넘길 수 없는 목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온정을 가득 품고 있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홀린 듯 아르펠을 바라보는 로한의 눈에 맹목적인 감정이 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만을 응시하던 눈이 떨어졌다. 아르펠이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이다. 묘하게 붉어져 있는 귓불이 로한의 시야에 끈덕지게 남았다.
“…그냥, 오늘 많이 고생한 것 같아서.”
“아…….”
시선을 피하는 한이 있더라도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로한은 아르펠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묵직한 감정이 켜켜이 쌓여 올라간다.
나 때문이구나. 내가 신경 쓰여서.
이건 그가 건네는 어설픈 위로였다. 애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묻어 있는 위로. 그렇게 생각했더니 느릿하게 터져 나오는 탄식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로한?”
그 소리를 아르펠이 놓칠 리가 없었다. 두 눈에 서리기 시작하는 걱정에 로한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드물게 속내까지 고스란히 내비치고 말았다.
“……뽀뽀.”
“응?”
“그냥, 뽀뽀하고 싶어졌어요….”
방금 전 건넨 말이 별로였나 싶어 걱정하던 것도 잠시, 로한의 대답을 들은 아르펠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커다래진 눈이 단 한 번의 깜빡거림도 없이 빤히 로한을 올려다보았다.
새빨개진 얼굴이 유독 뚜렷했다.
뽀뽀, 뽀뽀…….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고, 손끝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움찔거렸다.
“…해도 돼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로한의 두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아른거렸다. 웅얼거리는 도톰한 입술을 보는 순간 강렬한 생각 하나가 솟아올랐다.
‘귀여워.’
귀엽다. 깨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무의식중에,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떠오른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점령해 나갔다.
홀린 것처럼 로한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던 아르펠은,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로한이 시무룩해질 무렵이 되고 나서야 손을 움직였다. 껴안고 있던 몸에 힘을 주어 바짝 끌어당기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약한 힘이었음에도 순순히 끌려간 로한은 목덜미를 달래듯 토닥이는 손길에 냉큼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느리게 입술이 맞붙은 순간, 붉게 물든 눈꼬리 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미처 내뱉지 못한 옅은 탄식이 입안을 맴돌았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사람의 체온만큼 따뜻하지도 않은 특유의 온기가 입술에 와닿았다.
비단결만큼이나 보드라운 감촉, 벅찰 정도로 뛰는 심장, 은은히 나는 달달한 향기…. 그 모든 것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한순간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랗게 떠진 채 아르펠을 응시하는 눈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달아올랐다.
“……됐어?”
깃털처럼 내려앉았던 입술이 떨어지기 직전, 로한의 눈이 빠르게 감겼다. 누군가는 재능 낭비라고 억울해할지도 모르는, 가히 경이로운 반응 속도였다.
덕분에 아르펠은 입을 맞추고 있는 내내 로한이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한 박자 늦게 파르르 떨리며 떠진 눈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빼곡하게 쏟아지는 찬란한 감정에 숨이 멈췄다. 분명 입술을 먼저 떨어뜨린 건 자신이었으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입을 맞붙이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아르펠, 제가 바라는 건요.’
‘우리가 조금, 다른 사이가 돼야만 할 수 있어요.’
언젠가 로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나직이 속삭였던 말이.
이미 그런 사이는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단순히 입술만을 붙이는 게 아닌, 그 이상의 것을 해도 될 것이다.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마음은 진작 한쪽으로 기운지 오래였다. 굳이 그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충실히 따르기로 한 아르펠은 멀어지는 로한의 몸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고마워요, 아르펠.”
미련 하나 없는 목소리에 뚝 멈추고 말았다.
코앞에서 기회를 놓치자 둘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씻을 거죠?’라는 물음과 함께 흐트러진 침대 위를 정리하는 로한을, 아르펠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기만 했다.
‘……왜?’
순하게 웃는 얼굴은 짧은 입맞춤만으로도 정말로 만족하고 있었다. 로한에게서 퐁퐁 새어 나오는 감정이, 그가 느끼고 있는 만족이 거짓이 아니노라고 아르펠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없을 텐데…….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친 순간 로한에게서 흘러들어온 감정은 짙은 애정이자 욕심이었고, 적나라한 충동이자 욕망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치고, 짧게나마 읽었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휘발되었음을 눈치챈 순간,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욕실로 밀어 넣는 손길에는 정말이지 망설임이 단 한 자락도 묻어 나오지 않아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아르펠은 침대 위에 로한과 나란히 눕고 난 뒤였다. 까만 천장을 바라보는 눈이 멀뚱히 깜빡거렸다.
“어서 자야죠.”
빠르게 깜빡이는 눈을 발견한 건지 옆에서 푸스스 웃음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로한의 손이 가슴팍 위로 올라왔다.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손길은 언젠가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 손길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마냥 기꺼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해도 잠들진 않을 텐데.’
그러니 그만해도 된다고, 계속해도 네 손만 힘들 뿐이라고.
이를 곧바로 말하지 않은 것은 이 시간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로한의 얼굴에 스며들어 있는 미소가, 살짝 휘어져 있는 그의 눈이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속삭이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지.
조금만, 조금만 더 이따가 말하자. 그런 망설임이 연거푸 이어지기를 몇 번.
“아르펠. ……자요?”
아르펠은 거짓말처럼 잠에 빠져 버렸다.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눈을 꾹 감고 고른 숨만 내뱉는다. 가슴팍 위를 느릿하게 도닥거리던 손길은 멈췄으나, 로한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보단 아르펠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택했다.
아까 전의 목소리가 다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번 일을 정리하는 내내 로한은 수상한 기색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 아르펠을 위협에 노출시켰다는 죄책감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완전히 감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아르펠은 그 짧은 한마디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까.
그가 위로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도, 감성적인 말을 하는 것에 재주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랬기에 오늘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또 용기를 내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이리 애쓰는 존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가 많이 좋아해요.”
듣는 이가 없는 고백이었으나 괜찮았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 내일이든, 또 그다음 날이 됐든 다시 들려주면 그만이었다.
같은 사랑을 속삭이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소중히 대답해 주는 목소리, 그리고 은은히 휘어진 눈이 짙은 애정을 담고 있다는 것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아르펠을 바라보던 로한도 느지막이 잠을 청했다. 그의 손을 꿈에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틈 없이 마주 잡은 채.
91
계시가 가리키는 장소가 어딘지 알았으니 더 이상 후작가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간단한 조찬 후 떠날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은 꽤 성대한 배웅을 받았고, 몰려든 사람 중에는 리테란 역시 끼어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면 무슨 부탁이든 상관하지 않고 피데스 후작가가 두 분을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아르펠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독살 위협에 대한 죄책감, 배신자의 색출, 영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변의 해결……. 꽤 복잡한 이유들이 얽히고설켜 나온 결론일 테다. 손을 보태기 위해 기사를 파견하고 싶다던 제안을 거절한 탓도 있겠지.
망령이 얽힌 이상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는 기사들의 도움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들을 대동하고 마을에 진입해 경계심만 높일 바에야 소수 인원으로 이변을 파악하는 게 나았다.
그런 의미에서 피데스 후작가의 도움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머지않은 미래, 황제를 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들은 누구보다 강력한 우군이 되어 주겠지.
“베모스 마을은 영지의 북서쪽 끝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다른 마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점 정도겠군요. 아마 ‘여우신’이라는 마을을 지켜 주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도 이런 폐쇄성이 원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차락차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단조로운 목소리가 마차 안을 채웠다. 함께 베모스 마을로 이동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오웬의 것이었다. 이내 그의 손이 떠나기 전, 리테란이 건네주었던 서류들을 덮었다.
지리상 고립되었다던 마을답게 마차로 진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직접 발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한 경사진 산길이 누군가에게는 꽤 벅찼는지, 뒤쪽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업어 줄까요?”
“아뇨, 후, 됐습니다.”
슬쩍 고개를 들은 오웬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짜증이 슬슬 뭉쳐 오는 종아리의 근육으로 인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산길을 오르면서도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가는 둘의 눈꼴 시린 행각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셋에게 마냥 희소식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건…….”
마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로한의 낯이 싹 굳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무언가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아니, 이렇게 선명히 느껴지는 것을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느 경계선을 기점으로 공기 중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기운. 이는 분명 ‘망령’의 것이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오웬마저도 호흡을 멈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릴 정도의 밀도였다.
대화가 다시 이어진 건 몸을 몇 발짝 뒤로 물린 이후였다. 사람이 오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수풀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서야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침묵이 툭 끊어졌다.
“아르펠. 혹시 특별하게 느낀 건 있어요?”
“아니.”
셋 중 망령의 힘을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아르펠이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농도만 조금 짙을 뿐, 그가 여태 느꼈던 다른 망령의 기운과 별다를 게 없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이 땅에 뭔가 있는 것 같아.”
기운의 진원지는 땅이었다.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른 것들이 마을 안을 빼곡히 채워 버린 것이다. 오웬이 짧게 침음했다.
“…이건 저희끼리의 힘으로는 안 될 것 같군요.”
결론은 빠르게 내려졌다. 둘을 가볍게 돌아본 그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제국의 바깥쪽,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버려진 땅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곳만큼 심하지는 않아 사람이 살 수는 있으나… 이 마을에선 그곳과 비슷한 기운이 풍기고 있습니다.”
망령이 들끓는 대지.
이는 제국의 바깥쪽에 있는 땅으로, 망령의 기운에 물들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땅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봉인된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악신의 기운으로 인하여 망령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이곳을 관리함과 동시에 망령들이 제국의 안쪽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방어선을 굳건히 지키고, 숨어 들어온 망령들로부터 제국민을 보호하는 것. 이것이 두 신전의 의무였다.
상념에 젖은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잠자코 설명을 듣던 로한이 운을 뗐다.
“저흰 마을에 진입하겠습니다.”
“……저흰?”
퍽 단호한 음성 탓에 의구심을 표하는 것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다만 뒤이은 오웬의 되물음은 황당함을 표하기보단 그의 의도를 묻는 것에 가까웠다.
“도움을 청하는 것과 별개로 내부의 일을 파악할 사람은 필요하니까요. 오웬 님은 근처 마을로 이동해서 주변 신전에 협력을 요청해 주세요. 저와 아르펠은 마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겠습니다.”
“음.”
“여러 명이 모여서 접근해 봤자 경계심만 높이는 꼴일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할 말이 많은 듯 눈매를 가늘게 좁히던 오웬은 지긋한 시선에도 흔들림이 없는 로한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곳이니 조금이라도 안전할 방책을 세우고 가기를 바랐건만, 도저히 저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디오넬 님도 꺾지 못하는 걸 내가 꺾을 수 있을 리가.’
자조적인 생각이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일하게 꺾을 수 있는 존재라면 사람의 행색을 한 눈앞의 마검이 있기는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방법이 없군요.”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애초에 하나뿐인 셈이었다.
***
오웬을 보낸 둘은 곧장 베모스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망령의 기운이 짙다뿐이지, 안쪽은 평범한 마을들과 그리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게.”
푹 눌러쓴 로브 사이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말에 느릿하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로한이 느끼는 이상함을 그 또한 도드라지게 느끼고 있었다. 그린 듯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이 무엇보다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애당초 ‘평범한 마을과 다를 것이 없다’라는 전제 조건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곳이다.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잠들고, 깨지 못해 죽어 나가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마을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마을 안의 사람들에게선 그런 기색을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화로운 산속의 마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보이니 마을 안에서 일어난 사태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퍽 거부감이 일고야 마는 것이다.
다만 둘이 마을의 광경에 수상함을 느꼈듯, 얼굴을 꽁꽁 가린 채 마을 안을 기웃거리는 둘의 모습에 수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보쇼.”
아르펠이 굵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지독한 경계심이 서려 있는 험악한 얼굴의 남자가 그들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뭘 그리 기웃거립니까?”
“아…….”
짧은 탄식이 시간을 버는 것처럼 느리게 터져 나오고, 로브 밑으로 시선을 교환하는 일련의 과정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눈빛이 오고 간 직후 몸을 움직인 것은 로한이었다. 로브 사이로 부드럽게 휜 입꼬리가 드러났다.
“이 마을에 굉장히 영험한 존재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빌고 싶은 소원이 있어 직접 찾아온 건데…….”
말을 이을수록 흩어지는 웃음기, 그리고 어물대는 목소리에 미묘히 초조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그 ‘영험한 존재’를 만나러 온 것에 사활을 건 사람처럼 구는 행동은 남자의 경계심을 조금이지만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흐음, 흠. 영험한 존재를 찾아왔다고 했습니까? 거, 바깥에 신이라는 작자한테 빌면 될 것이지 왜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왔데.”
“신이라… 글쎄요. 일평생 빌었던 소원 한 번 들어주지 않는 신을 굳이 믿어야 할까요. 그럴 바엔 제 손으로 제가 믿을 신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뻔뻔한 대꾸는 남자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조차 완전히 지워버린 것 같았다. 큰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면 로한이 건넨 대답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크하, 젊은 친구가 포부가 아주 거창하구만……!”
웃음과 함께 튀어나온 말은 혼잣말인 듯,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뒤늦게 가다듬었다. 함께 움직이는 일행이라는 아주 간단한 말로 자기소개를 마친 아르펠은 ‘촌장님께 안내해 드리겠다’라며 앞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잘했어.’
스치듯 손을 맞잡고 소리 내 말하지는 못하지만 입 모양으로 응원의 한마디를 전했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 가볍게 세운 계획이었건만 로한은 생각보다 잘 움직여 주었다. 순하게 미소 짓던 얼굴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처럼 아로새기며, 아르펠은 아까 전 남자가 내비쳤던 선명한 경계심을 떠올렸다.
그 경계는 단순히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보이는 경계심일까, 그것도 아니면…… ‘경계’를 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굳이 바깥의 신을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면 이 마을의 여우신이 바깥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 말 자체가 일종의 떠보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외로 남자의 말은 몇 마디 더 이어졌다.
“최근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긴 합니다만… 촌장님 덕분에 빠르게 안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마을을 굳건히 지켜 주시는 고마운 분이시지요.”
외지인분들이더라도 저희와 뜻이 같다면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시니, 마을에서 편히 묵으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는 목소리, 얼굴에 떠오른 푸근한 웃음에는 ‘촌장’이라는 이에 대한 맹목적이기까지 한 호감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92
“동생! 촌장님 뵈러 가는 거야?”
“그려, 누님도 오늘 일 마무리 잘하고!”
“이따 가는 길에 가게에 한 번 들러! 남은 빵 몇 개 싸게 챙겨줄 테니까!”
“하하, 나야 고맙지!”
‘촌장’의 집으로 가는 길.
집이 마을의 중앙에 있는 듯 남자의 걸음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향했다. 마주치는 면면마다 정겨운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는 행태들이 ‘이상적인 마을’이라 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의문을 일으켰다.
개중에는 불신의 눈초리를 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남자가 ‘촌장께 안내한다’라는 말을 입에 담기만 하면 곧장 풀어져서는 부드러운 인사를 남기고 떠나고는 했다. 그 행동이 퍽 괴이쩍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영험한 존재’만큼이나 믿고 따르는 것 같던 이 마을의 촌장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허허, 신령님을 모시고 싶어 직접 찾아오신 분들이라니. 마침 오늘 길몽을 꾸었는데, 이리 보답받게 될 줄은 몰랐군요.”
중년과 노년의 경계선에 선 남자는 ‘인자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빚어낸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웃으면 곱게 접히는 눈꼬리 옆에 잡혀 있는 세월이 느껴지는 주름에, 비교적 느릿하지만 중후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끔 하는 매력이 있는 목소리까지.
기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집 옆에 딸린 작은 채소밭이었다. 다 자란 것을 거두고 있었는지 알맹이가 제법 큰 감자 같이 생긴 것을 한 손에 들고, 얼굴 한쪽에는 흙먼지를 묻힌 채 허허로이 웃는 얼굴이 그다음이었던 것 같다.
아르펠은 그 모습이 꽤 인위적이라 생각했다.
“아, 이런. 손님들을 이런 곳에 세워둘 수는 없지요. 따라오시겠습니까? 별건 없지만 가벼운 차 한 잔이라면 대접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촌장의 집안으로 발을 들이는 동안 가벼운 통성명이 오갔다. 씁쓸한 풀잎 향이 올라오는 차 한 잔을 마시며 아르펠은 그 이름을 곱씹었다.
마이센. 사실 특별할 것은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이 유독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드는 것은, 그에게 밝힌 가명 때문일까.
확실하게 결론이 난 것은 없지만 만에 하나 촌장이 구원교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둘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마을에 들어서기 전 미리 이야기를 나눈 대로 로한은 조단이 되었고, 아르펠은 셀이 되었다.
“흐음, 그래요. 그런 일이…….”
그 뒤로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긴 시간 동안 빌어온 소원, 신에 대한 원망, 영험한 존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발 벗고 나서서 마을을 찾아오고자 했다는 결심…….
말을 하는 이는 대부분 로한이었으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감복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마이센은 한 사람만이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토록 의지가 확고하고 깊으시니, 분명 신령께서도 두 분의 소원에 응하실 겝니다. 이 마을에 원하시는 만큼 묵고 가시지요.”
다만……. 뒤이어 사족이 붙었다. 인자한 얼굴에 한가득 고인 환한 미소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마을이 그리 넓지 않아서 말입니다. 빈집이 몇 개 있기는 하나, 대부분 좁은 편이라…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 묵으시는 건 어떠신지요? 촌장들이 쓰던 집을 대대로 물려받아서 그런지 늙은이 혼자 지내는 집치고는 넓은 편이고, 빈방도 넉넉히 남아 있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고, 말투는 친절하며, 내용도 언뜻 들어보면 둘을 배려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마을의 기이함과 마신의 계시를 함께 엮어 생각해 본다면, 그의 제안은 마치 자신의 반경 안에 두고 감시하려는 행동과 비슷했다.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촌장에게로 안내해 준 남자가 내비쳤던 경계심. 그리고 아닌 척하며 여전히 경계를 내려놓지 않는 마을의 촌장, 마이센. 그들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 아르펠이 티 나지 않게 눈을 흘겼다.
마을 안을 조사하려면 어느 시간대든 자유로운 운신이 가능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일반인인 이상 감각을 속이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촌장의 집에 발이 묶인다면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만큼은 자명했다.
제안을 거절하기 위한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을까. 아르펠이 그런 고민을 하며 찻잔을 기울일 무렵이었다.
“제안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찻잔을 손에서 놓지 않은 아르펠의 시선이 그대로 로한에게 향했다. 거절의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그 탓일까, 여전히 웃음을 띠고는 있었으나, 되묻는 마이센의 얼굴도 묘하게 굳은 채였다.
“소리가…….”
은근한 침묵이 얼마쯤 이어졌을까, 로한에게서 조막만 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작 로브를 벗어 드러나 있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특이한 색을 가리기 위해 마력을 차단한 바람에 까매진 눈동자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렸으며, 손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찻잔의 가장자리를 문질러 댔다.
그 적나라한 변화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 새겨지기도 잠시.
“밤에, 소리가…… 들릴까 봐요.”
“크흡……! 큽, 쿨럭, 죄, 죄송합니다. 켁, 콜록.”
이어진 발언에 아르펠의 입에서 커다란 기침이 튀어나왔다. 처음엔 생각에 빠져서, 그다음엔 로한의 모습에 넋을 놓느라 계속 입에 대고 있던 잔에서 찻물이 한 움큼 넘쳤고,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간 것이 거하게 사레가 들린 것이다.
얼떨결에 난생처음 사레가 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 아르펠의 얼굴이 벌게졌다. 목에 이물감이 느껴지고, 자꾸만 기침이 나오고, 눈앞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한이 급히 등을 토닥여 주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했다.
“크흠. 흠.”
마이센의 입에서 어색한 헛기침이 터졌다. 어서 빨리 화제를 넘겨 버리고 싶어 하는 낌새가 다분했다.
한쪽은 볼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밤에 나는 소리’를 언급하고, 다른 한쪽은 그 말을 듣자마자 거하게 사레가 들려 얼굴이 따라 새빨개진다. 누가 봐도 그렇고 그런 사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럼 근처에 두 분이서 지내실 만한 집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본인의 집에서 머물라고 제안했던 사실을 말끔히 잊은 사람처럼 빠르게 대화를 매듭지은 마이센 덕분이었다. 누군가의 목을 잠깐 희생한 것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
“미안해요, 그렇게 당황해할 줄 모르고…….”
“아냐. 괜찮아.”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만 대충 갈아입은 마이센은 곧장 집을 안내해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다시 마을 한복판을 걷게 된 지금, 고개를 가까이 기울인 채 소곤거리는 로한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었다.
앞서나가는 촌장에게는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괜찮다 답을 해 주면서도 시선은 저절로 로한에게 향했다. 살짝 내리깔린 눈매와 아래로 푹 기울어져 있는 눈썹이 침울한 느낌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
천천히 로한을 향해 손을 뻗은 아르펠이 그의 눈꼬리 아래를 살살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나름의 위로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우울해 보이던 얼굴에 빠르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고분고분 그 손길을 받은 로한의 얼굴에 순한 미소가 한 아름 고였다. 그 눈에 띄는 변화를, 여느 때와 같이 벅찰 정도로 쏟아지는 소중한 감정을 차곡차곡 담아낼 때였을까.
아까 전의 대화를 상기하던 아르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 가지 의문이었다. 짧게 달싹이던 입술이 그 의문을 망설임 없이 입에 담았다.
“……아까.”
정말 타당한 의문이고, 그만큼 궁금하니 꼭 답을 듣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은 마을의 중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 괜찮지요?”
쓸데없는 물음과 함께 고개를 홱 돌리는 마이센에 의해 내뱉으려던 질문이 뚝 끊기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뗀 손끝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서로를 응시하다 홱 돌아간 고개, 갑작스레 떨어진 상기된 로한의 얼굴…. 뒤늦게 수습하긴 했지만 아무 일 없었던 척하는 태도엔 숨기지 못한 부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둘을 돌아보는 마이센의 얼굴은 무언가를 가늠하듯 떨떠름한 빛을 띠었다.
그런 그를 응시하는 아르펠의 눈은 멍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던 탓이었다. 급히 입을 연 로한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주먹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편히 지낼 수만 있다면 아무 곳이나 상관없습니다. 아,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저희를 안내해 주셨던 분이 이 마을에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었다고 하셔서요.”
얼굴에 남아 있던 들뜬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착실히 대답을 내놓은 목소리는 질문을 덧붙여 화제를 돌리기까지 했는데, 한순간 마이센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던 것을 보면 퍽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영험한 존재를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이곳에는 마을을 수호하고 사람들의 행복을 빌어 주는 여우신이 계십니다. 땅은 비옥하고, 병을 앓는 사람이 없으며, 모두가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축복 받은 곳이었거늘…….”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그에게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마 전부터 하나둘씩 신께 화를 입은 사람이 생기고 있습니다. 누군가 금기를 어겨 마을에 저주가 내린 것은 아닐지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잡은 모습은 신에게 기도하는 신실한 신도를 닮아 있었다. 인자한 얼굴에 머금은 웃음이 어둠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등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나기까지 했다.
“그분의 족적은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뿐, 그만한 뜻이 있을 테지요. 계속해서 속죄하고 용서를 빌면 언젠가 그분 또한 노여움을 푸실 겁니다.”
주변에서 짧은 탄식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촌장의 믿음에 탄복하기라도 한 듯, 주위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걸음마저 멈추고 흘린 나직한 감탄사였다. 이윽고 터지는 우레 같은 박수 소리에 아르펠이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93
로한은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며 부드럽게 마이센의 말을 끊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다 같이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기이한 광경이 몇 분이고 이어졌을지도 모르지.
촌장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아르펠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마을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이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이 시선을 빼앗은 탓이었다.
“이곳은…….”
로한의 목소리에서 옅은 당황이 묻어 나왔다.
빽빽하지는 않아도 나름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던 아담한 목조 건물들 사이, 유독 한 공간만 부자연스럽게 비어 있었다.
부지의 가장자리에 남은 흔적을 보면 의도적으로 건물을 짓지 않았다기보단, 지었던 건물을 부수고 부러 빈 공터를 만들어 낸 것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에 돌로 만들어진 관이 있었다. 대여섯 사람은 족히 들어갈 수 있을 크기에, 흔한 꽃 한 송이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이 기이하다 못해 이 공간을 스산하게 만드는 듯했다.
“신께 벌을 받아 영면에 든 이들을 모아 기리는 곳입니다. 죽은 이들의 넋을 빌고, 또 그들이 죽음으로도 갚지 못한 죄를 마저 속죄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요. 주에 한 번, 다 같이 이곳에 와 죽은 이들을 대신하여 여우신께 용서를 빌고는 합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경우 저주를 받게 되고, 저주를 받은 시간이 길어지면 죽는다.
죽은 이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불에 태워 남은 뼈를 보관해 놓은 곳이 저 관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꽃 한 송이조차 곁에 놓아 주지 않고.
죄를 지었으니 이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며 슬픈 얼굴을 하는 것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 뒤로 마이센은 곧장 두 사람이 묵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촌장의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여 도착하기까지의 이동 경로를 대강 따져보면 그리 가볍게 넘어갈 사안은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빈집이었던 바람에 먼지가 상당히 많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눈앞에서 걱정스러움을 가장하는 이 남자는 마을을 빙 돌아왔다. 아까 전, ‘무덤’이라는 곳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그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면 둘 중 하나였다. 이단이되 망령의 일에 얼떨결에 휘말렸거나, 혹은 애초부터 이단과 망령, 둘 모두에 가담했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죄질이 나쁘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후자가 비교도 할 수 없이 악랄하기는 했다만.
“내일은 신께 소소히 공양할 수 있는 제단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바쳐 눈에 들게 되면 단 한 번 소원을 들어주신다더군요.”
한 마디로 그 ‘소원’이라는 것을 이루고 싶으면 성의를 보이라는 뜻이었다. 마이센을 빤히 바라보는 아르펠의 눈이 먼 과거의 기억에 잠겨 들었다.
검증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먹이고, 상대의 믿음을 담보로 아주 조금의 ‘성의’를 요구하는 행태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째 세계가 달라져도 수작질은 뻔할 정도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렇군요. 이런 거라도 괜찮을까요?”
“허허,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로한은 그 수작질에 착실히 응해 주었다. 옷 안쪽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슬쩍 보여준 것이다.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차분히 대답하기는 했으나, 그 순간 보인 약간의 틈은 두 사람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로한의 손짓을 따라 스르르 돌아갔던 마이센의 눈은 짧게나마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음습하게 서려 있던 것은 반짝이는 금화를 손에 넣고 싶다는 탐욕과 욕심일 것이다. 재빠르게 눈에 서린 감정을 지워 냈으나 아르펠은 그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움튼 새까만 욕심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그 제단이라는 곳, 지금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이런저런 말을 덧붙여 주었으나 모두 사소한 안내에 불과했다. 오가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마이센이 집을 나서려고 할 즈음,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르펠이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제단… 말입니까?”
입을 연 것이 낯설기라도 했던 건지 멀뚱히 눈을 뜨고 있던 그가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다. 미묘하게 톤이 올라갔던 목소리를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가다듬는 것은 덤이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시간이 그리 늦지 않은 것 같은데.”
흘끗, 밖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어서 이유를 말하라 종용하는 듯했다. 마이센은 이를 후자와 가깝게 느꼈고, 마치 추궁을 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찌푸리려 했다. 시선이 정확히 맞닿기 전까지는.
그가 아르펠의 눈을 정확히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내 말을 잘 하지 않았을 뿐더러 함께 온 남자에게 워낙 순종적으로 구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했다.
그러니 까맣고 어둑한 눈에 흔한 감정 하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도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 이질적인 눈동자에 등줄기가 싸하게 식으며 소름이 돋았다.
“마, 마을의 규칙입니다…. 제단이 숲속에 있는데, 신께서 늦은 시간에 영역 안에 발을 들이는 걸 싫어하시는 바람에.”
생명체는 미지의 존재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마이센 역시 마찬가지였고,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며 아르펠에게서 느꼈던 수상쩍음을 한순간에 휘발시켰다.
침착함을 가장하고는 있었으나 미약한 떨림까지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 목소리에 로한이 슬그머니 입을 가렸다. 손 아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는 것은 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후 마이센은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줄행랑이라 봐도 무방한 빠른 몸짓이었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웃음을 터뜨린 로한이 옆에 있던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저래요? 뭐 했길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멍한 깜빡임뿐이었다. ‘나 궁금해요’라는 말을 열심히 피력하느라 반짝거리는 로한의 눈을 보고서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날이 그다지 어둡지 않은데 굳이 내일로 미루는 게 이상해서 물은 거고, 대답을 들은 게 다다.
본인의 무감정한 눈에 상대가 일방적으로 겁을 먹고 달아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이는 아르펠의 머릿속에 몇 없는 미스터리로 남고 말았다.
***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는 말이 맞긴 한 건지 바닥부터 시작해 공기 중에도 작은 먼지가 나풀나풀 흩날리고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소복이 쌓인 먼지 위로 발자국이 선명히 찍힐 정도였다.
“……일단, 청소는 해야겠죠?”
빗자루와 걸레는 있었고, 수도는 고장 나지 않았으니 청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를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기가 힘들 뿐이지.
마을에 며칠을 묵을지 모르는 만큼, 말끔히는 아니더라도 자주 이용하는 생활 반경은 청소해 두는 게 나을 것이다.
무사히 빈집을 얻은 것은 좋으나 청소를 목전에 둔 것이 달갑지는 않았는지, 로한이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소하기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툭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한숨이 연신 새어 나왔다.
“제가… 제가 할 수 있으니까. 아르펠은 쉬, 쉬어요.”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빗자루를 찾아 손에 쥐곤 배려의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떨리고, 말이 느릿한 게 마음속 어딘가가 갈팡질팡하는 모양이었다. 의연한 척은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에 숨기지 못한 미련이 담뿍 묻어났다.
무언가를 치우거나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렇다고 재주가 있지도 않은 아이. 그런 그가 미련을 숨기지 못한다고 한들 말만이라도 이렇게 해주는 것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진짜?”
작은 되물음에 안 그래도 삐죽 튀어나와 있던 입술이 조금 더 튀어나왔다. 도르륵 굴러가는 시선과 빗자루를 쥔 채 꼼지락대는 손, 그리고 묘하게 어물쩍대면서도 끝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의 끝이 말려 올라가고 말았다.
무어라 말을 얹는 대신 로한의 손을 붙잡고 그림자를 일으켰다. 어둡게 바닥을 물들이기 시작한 것이 이내 잔잔히 물결치기 시작했다. 옅은 파도를 연상시키는 것이 마룻바닥을 스치고 지나가자 도톰히 쌓여 있던 먼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가구를 타고 올라간 그림자는 꼬물꼬물 움직이며 먼지를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이후에는 창가로 가 모아 놓은 먼지를 퉤 뱉어내기까지. 먼지투성이였던 집안이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림자 사용법에 로한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아르펠의 손끝이 제 입술에 닿을 때까지, 그렇게.
“속상했어?”
멍했던 눈동자에 빠르게 초점이 돌아왔다. 묘하게 웃음기가 서려 있는 목소리에 뒤늦게 놀림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올랐다.
“……놀리지 마요.”
“응. 안 놀릴게.”
곧장 되돌아오는 대답에는 진심이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 아주 조금 억울함이 차올랐으나… 그뿐이었다.
발개진 눈이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는 아르펠의 얼굴에 닿았다. 여전히 입술 끝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도 끈덕진 촉감을 남겼다. 그 모든 것을 되새기다 보면 억울한 감정은 모습을 쏙 감춰 버리는 것이다.
지지대를 잃은 빗자루가 바닥에 떨어지며 통, 통 거리는 소음을 냈다. 내내 빗자루를 쥐고 있던 로한이 아르펠의 몸을 껴안으며 생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94
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해가 완전히 진 한밤중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빛이라곤 은은한 달빛밖에 없는 완연한 어둠 속에서 두 형상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굳이 밤 시간대를 선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짙은 경계심 때문이었다.
길을 돌아다닐 때, 밥을 먹을 때, 소소한 대화를 할 때…… 심지어 보여 주기식 행보를 위해 무덤에 들러 기도를 할 때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적의를 눈에 띄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친절함을 가장한다고 해서, 눈 안쪽에 서려 있는 희미한 반감과 의심마저 완전히 숨긴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온 마을 사람들이 그런 눈을 하고 있으니, 그 시선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요원할 터.
“이 집 맞아요?”
“응. 창문으로 들어가자.”
이미 목적지가 정해진 것처럼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없었고, 실제로 정해져 있기도 했다. 이 집을 눈여겨본 것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정확히는 촌장의 집으로 향하며 마을 안을 가볍게 둘러보았을 때였다.
이 마을에는 삿된 망령의 기운이 골고루 느껴졌다. 이는 마을의 ‘땅’에만 한정된 것으로, 마을을 둘러싼 숲이나 건물,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선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도 내부에서 짙은 망령의 기운이 새어 나왔다. 거기다…….
“확실히 혼자 사는 집인가 봐요.”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로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떠올렸다.
오늘 저녁,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아르펠은 그를 대동하고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처음 발견한 이 집과 같이 건물 내에서 망령의 기운이 풍기는 곳을 걸러내기 위함이었다.
발견한 건 약 6채. 둘은 그 집들이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그 많은 집을 찾아내었음에도 그날 밤의 목적지는 처음 보았던 집이 되었다. 이유는 꽤 단순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적었으니까.
둘 이상의 기척이 느껴지는 다른 집과 달리 느껴지는 기척은 딱 하나. 즉, 그 집에는 저주에 걸린 자가 홀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찰칵.
창틀 사이로 스며들어 갈 만큼 얇게 벼려진 그림자가 창 안쪽의 잠금장치를 풀었고, 둘은 어둠 속에 녹아들어 기척 하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세월의 흔적 때문에 창을 열면서 어쩔 수 없이 난 자그마한 소음이 제외한다면 찬사를 받아 마땅한, 완벽한 잠입이었다.
혼자 사는 집답게 그리 넓은 곳이 아니어서 그런지 집주인을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허름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마른 인영 하나. 새어 나오는 숨결이 생각보다 거친 것을 보면 고비가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망령이 신 취급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남자의 상태를 조용히 살피던 아르펠이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신의 벌. 신의 저주. 이 남자가, 나아가 이 마을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현상은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일개 인간의 장난질에 놀아나고 있다면 모를까.
“아르펠. 그럼 이 남자도 그때 그 사람들처럼…….”
“아니. 그건 아니야.”
로한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르펠은 그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를 쉽게 짐작해 냈다. 구원교의 인체 실험장에서 보았던, 죽음을 갈구하며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이들을 생각하는 것일 테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던 이들과 비교하면 눈앞에 잠들어 있는 남자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망령’ 그 자체가 몸 안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망령이라고 하기엔 옅고, 안개 같은 재질의 무언가가 몸 안쪽에 움터 있었다.
기세가 비교적 약하고 얌전했기에 통증을 크게 느낄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건 이 안개 같은 것이 남자의 ‘생명’을 먹고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아르펠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인체 실험을 당했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기운이 몸 안에 붕 떠 있어. 흡수하려면 흡수할 수는 있을 것 같…….”
“아르펠.”
따뜻하고 다정하며, 옅은 웃음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 알아 낸 사실을 보고하는 것처럼 착실히 읊조리던 아르펠은 그 부드러운 부름에 고장 난 기계처럼 뚝 멈추고 말았다. 남자를 살피고 있던 시선 또한 금세 로한에게로 돌아갔다. 아르펠로서는 몇 없는 잽싼 행동이었다.
느리게 다가온 손이 두 손을 붙잡는다. 풀어내고자 하면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손길인데도 족쇄라도 채운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런 짓 안 하기로 했잖아요, 응?”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에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가 끼워지고, 곱게 휘어져 있는 눈매 사이로 은은한 분노가 느껴질 때쯤이 되어서야 멈췄던 사고가 어색하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거리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의 상태를 관찰하면서 알 수 있는 사실을 모조리 뱉다 보니 함께 말한 것뿐이지,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약속까지 나누지 않았던가. 이름도 모르는 인간의 목숨과 로한과의 약속, 이 두 가지는 아르펠에게는 비교할 가치가 없었다. 간단한 문제였다. 그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로한에게 치우쳐 있었으니까.
“…억울해.”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왔으나,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투덜거림을 닮은 한 마디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적어도 왜 억울하냐는 물음이 나올 줄 알았던 아르펠은 아무런 답이 없자 내리깔았던 시선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랗게 떠진 금빛 눈동자였다.
그리고, 무어라 말을 하고픈 듯 달싹이는 입술.
옅은 음성이 그 사이로 새어 나올 무렵.
―!
거짓말처럼 문을 여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한의 얼굴이 낭패라는 듯 일그러졌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바로 보이지는 않을 위치지만, 딱 거기까지다. 집이 좁아 몸을 숨길만 한 곳은 없고, 창문을 열고 빠져나가자니 닫아 놓은 창문을 다시 열면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게 분명했다.
몰래 나가기는 글렀다. 차분히 결론을 내린 로한은 머지않아 차선책을 떠올렸다.
‘제압하자.’
결정은 굉장히 빨랐다.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일반인의 것과 흡사했다. 그러니 얼굴을 보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받았다는 걸 알아채더라도 정체가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외부인인 자신들을 수상하게 여길 것이 뻔하나 증거가 없는 이상 추궁하지 못할 터.
로한이 그 생각을 실천하려는 순간, 그의 시야에 하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잡으라는 듯 살랑거리는 손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홀린 것처럼 손을 붙잡은 직후, 그들의 코앞에 있는 바닥이 까만 물감을 퍼뜨린 것처럼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영역을 넓혀 가던 것이 발밑에 닿고, 그대로 둘의 몸을 삼켰다. 까만 바닥마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니 방 안은 누군가 왔다 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끔해져 있었다.
직후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흠.”
안을 대충 살피던 이는 곧장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차분했다. 눈으로는 물건을 품평하듯 이것저것 따지며, 손으로는 착실히 품 안을 뒤지는 것이 익숙한 태가 났다. 주머니에서 나온 손에는 어느새 작은 구슬 하나가 들려 있었다.
투명한 구슬은 잠든 이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렁이더니, 끝부분부터 시작해 점점 하나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묘하게 탁한 빛을 띠는 검푸른 색. 그 변화를 확인한 남자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놈도 얼마 안 남았군.”
대업이 머지않았다.
그리 중얼거리며, 남자는 구슬을 챙기고 다시 집을 나섰다.
남자가 완전히 빠져나가자 위태로운 숨소리만이 집안에 맴돌았다.
***
“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가 남자가 사라진 이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그림자’라는 것이, 아르펠과 로한이 범죄자나 구원교의 일당을 잡을 때 애용했던 그 공간이라는 점인데.
무엇 하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느껴지지 않는 새까만 어둠을 닮은 무저갱. 인간이 아닌 아르펠이야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게 큰 타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로한은 아니었다.
그 탓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르펠은 로한을 조심스럽게 안은 채로 토닥여 주는 중이었다. 그림자를 빠져나온 직후 덜덜 떨리는 손을 봐서인지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한층 안정되고 나서야 아르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 자신이 느꼈던 억울함을 피력하는,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제가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소리와 어리광을 피우듯 비비적거리는 머리, 조곤조곤 토해 내는 목소리가 로한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졌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등허리를 토닥이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르펠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레리아나면 가능할 것 같은데…….’
인체 실험장에서도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망령의 기운을 정화했던 아이다. 비록 몸이 버티지 못해 치료를 받던 대상이 죽기야 했다만, 그때에 비해 상태가 양호하니 빠르게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들 테니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자면서. 대신 오늘 내내 묻고 싶었던 것을 묻기로 했다. 묘하게 핑계처럼 느껴진다는 기분이 들기야 했으나… 깔끔히 무시했다.
“로한, 있잖아. 내가 계속 궁금했던 게 있는데.”
“궁금했던 거요?”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밖이 새까만 것이, 완벽한 밤이다. 궁금한 것을 묻기에도 딱 좋은 시간이었다. 의아히 눈을 깜빡이는 로한을 응시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밤에… 소리 들린다고 했잖아. 그거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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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한은 어디 하나가 고장 난 사람처럼 굴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고, 입술 사이가 살짝 벌어졌으나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반응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응시하던 아르펠이 덧붙였다.
“촌장 집에서 말했잖아. 밤에 소리 나니까 빈집 달라고.”
“그, 그건…….”
하얀 볼에 금세 홍조가 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입술 끝이 연신 달싹거렸으나, 정작 나온 말은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나쁘지 않은 변명이었다. 꿍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 그리고 연신 흔들리며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눈동자 때문에 거짓말인 것이 다 티가 났을 뿐.
상황을 무마하고 싶은 낌새가 다분해 보이는 모습이었건만, 아르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데 그거 알아?”
직전 로한이 한 말의 대답으로는 들리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의 말을 무시한 것이다.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버린 마을에서의 첫 만남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언제나 로한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그의 말을 꼬박꼬박 들어준 아르펠이었다. 그러니 뻔히 들은 말을 모른 척 넘기는 것도 이번이 최초일 테지만, 정작 로한은 이를 인지할 정신도 없는 듯했다.
“뽀뽀만 하면 소리가 잘 안 나.”
“……!”
“다른 거 해 볼래? 소리 잘 나는 거.”
뒤이어 들려오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니까.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리고, 눈앞이 아득해지며, 심장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세게 뛰어대는 마당에 다른 것들을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슴이 턱 막힌 것처럼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눈만 부릅뜨고 있던 로한을 도운 것은 아르펠의 손이었다. 느릿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진정하라고 달래 주는 것만 같아서, 그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한 줌의 숨을 길게 토해 낼 수 있었다.
흘끗 바라본 아르펠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파격적인 말을 입에 담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평온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다, 그의 귓불과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음을 발견한 로한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태연한 표정과 다르게 발갛게 물이 든 피부는 충동을 불쑥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로한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까지 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눌러보려 애썼다.
“너도 하고 싶잖아. 응?”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다가가야 한다고 이성을 꽁꽁 붙들어 매고 있던 다짐이 뚝 끊어졌다.
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방 안, 그나마 있는 것이라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옅은 달빛이 다였다. 그마저 등지고 있었음에도 아르펠의 눈동자는 선명히 반짝이기만 했다.
그 오묘한 보랏빛에 한 자락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안 순간, 손가락 끝이 저릴 정도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꽉 잡힌 손과 조곤조곤한 음성이 은근한 재촉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아…….”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짧은 탄식뿐이었지만, 그 짤막한 음성에 묻어 나오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가벼운 끌어당김에 순순히 딸려오는 몸, 그리고 소용돌이치듯 쏟아지는 여러 감정의 틈새에서 아르펠의 입꼬리가 조용히 위로 올라갔다.
마음을 추스르고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지도 않고, 두 눈에 서린 욕심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솔직해 보였다.
욕심일까, 집착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랑일까. 아르펠은 제 안에서 움트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자신을 욕심내는 저 행동에, 짙은 욕망이 넘실거리는 눈에,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오는 그의 손에 만족감을 느꼈다는 점일 테다.
아르펠은 제 얼굴에 와 닿는 감촉에 기꺼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 울컥 차오르는 충족감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가감 없이 쏟아지는 모든 감정이 저에게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기꺼웠으니까.
온기가 눈에 띄게 번져가고, 숨결이 점차 가까워진다. 마침내 입술 위로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닿았을 때.
아르펠이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몸을 물렸다. 틈 없이 포개져 있던 두 입술 사이로 얇은 공백이 생겼다.
차게 가라앉은 시선이 정확히 창밖을 향했다. 미처 커튼을 치지 못해 바깥을 투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창의 건너편,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로한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는 뚜렷한 감정을 띤 적이 거의 없는 눈동자가 시선의 주인공을 향한 분노로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토록 고대하던 것을 코앞에서 망쳐 버린 이를 향한 선명한 살의였다.
“…아르펠.”
고개가 완전히 돌아가고, 몸이 더 멀리 떨어지기 직전. 작은 속삭임과 함께 아르펠의 몸 위에 얹어져 있던 로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목 위로 옅게 돋은 핏줄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인내심을 보여 주는 듯했다. 상대가 벗어날 수 없도록 옥죄되 아파하진 않게, 손아귀의 힘을 애써 조절해낼수록 아르펠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졌다.
똑같이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붙여 오는 것에 되레 당황한 건 아르펠이었다. 살짝 커져선 빠르게 깜빡거리는 눈이 사랑스럽다는 듯, 로한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어렸다.
이윽고 얇디얇은 틈새만을 남긴 채 코앞에 자리해 있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런 핑계도 댔으니까…….”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한 만큼, 아르펠은 로한이 하는 말의 의미를 빠르게 이해했다. 시선 따위는 무시하자고, 그러니 허락해 달라고.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더 닿고 싶다는 욕심을 모른 척 숨기고 넘겼던 이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슴을 빠듯하게 채우는 충족감, 이런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독점욕, 사락사락 볼 위를 조심스럽게 스치는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애정… 그리고 황홀할 정도로 빼곡한 욕망을 토해 내는 눈까지.
적어도 아르펠은, 그런 로한을 코앞에 두고도 멈춰 설 위인은 되지 못했다.
어느샌가 바깥에 그들을 지켜 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였다. 정확히는, 잠시 떨어졌던 뜨거운 체온이 다시 살갗 위에 닿자마자 머릿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춰 버렸다.
“왜…….”
곧장 입술에 내려앉을 것 같던 것이 경로를 틀었다. 입술 옆쪽의 볼에 한 번, 오뚝하게 올라온 코끝에 한 번, 움찔거리는 눈가에 한 번, 모양 좋게 드러난 이마에 한 번씩.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의문을 드러내던 아르펠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목 뒤, 그리고 귀 끝에만 머물고 있던 붉은 기운이 점차 얼굴 위를 물들여갔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쏟아지는 애정, 그리고 그 끝에 남은 작은 웃음소리. 그것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고, 귓가에 녹진하게 남았을 즈음, 마침내 두 입술이 맞닿았다. 질끈 감은 눈 틈새로 언뜻 드러났다가 사라진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 끝이 아르펠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멈칫하는 사이 입술이 잘근 깨물렸다. 그 감각을 감내하는 건지, 아니면 쉬지 못한 숨을 마저 쉬려는 것인지 꾹 닫혀 있던 입술 새로 틈이 났다.
불에 델 듯 뜨거운 것이 그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아니, ‘불에 델 듯 뜨겁다’라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게 맞는 걸까?
몸 어딘가를 녹여 버릴 것 같은 지독한 뜨거움이 느껴지고, 안에서는 열기가 훅 터져 나온다. 손끝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마검으로서 인간을 초월한 청력은 시끄럽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사로잡혀 바깥의 바람 소리 하나를 잡아내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르펠에게는 낯선 감각이자 경험이었다.
“흐…….”
옅은 신음을 닮은 숨결이 새어 나갔다. 뻣뻣하게 굳은 혀를 톡톡 두드리는 것부터 시작해 조심스럽게 얽혀 오고, 느릿하게 엉킬 때마다 머릿속에 열이 차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지기만 했다.
먼저 도발한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꼴이었으나, 그 모습을 보고도 로한은 꿋꿋하게 아르펠을 몰아붙였다. 살짝 떠진 눈이 일렁이는 것이, 오히려 불어나는 만족감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아르펠, 숨 쉬어요.”
멀어져 가던 정신이 돌아온 것은 등의 토닥거림과 함께 나직한 음성이 들리고 난 뒤였다.
순간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한 박자 늦게 로한의 말을 이해한 아르펠은, 그제야 입을 맞추는 내내 숨을 쉬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숨이 찰 리가 없는데. 아르펠의 본질은 마검이었으니,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숨을 쉬지 않는다 하더라도 죽을 리는 없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헐떡이는 숨결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 폐부에 숨을 밀어 넣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었다.
애정 어린 눈동자가 그런 아르펠의 모습을 한 올 한 올 뜯어보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잔뜩 번들거리는 입술, 새빨개진 얼굴, 헐떡이는 숨결……. 아르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흐트러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이 로한에게는 크나큰 기적으로 느껴졌다.
“아.”
아르펠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갔다. 멍했던 정신이 차차 돌아오고 있었으나, 그만큼 직전에 나누었던 짙은 입맞춤이 연거푸 떠오른 탓이었다.
숨을 갈취당하고, 뜨거운 체온을 나누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은 다분히 중독적이었다. 그 대상이 로한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숨이 차 죽을 것만 같던 그 아찔한 순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눈송이처럼 흩뿌려지는 애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두 팔을 뻗어 로한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한 번 더 할래.”
“하.”
반쯤 넋을 놓은 채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남아 있는 한 줌의 여유마저 앗아갔다.
숨을 토해 내기가 무섭게 성급히 아르펠에게 입을 맞춘 로한은 도톰하게 부어 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앞의 이를 탐하고 싶다는 욕망이 무서운 속도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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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을 아는 것과 실제로 겪어 보는 것은 다르다. 그날, 아르펠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놀라 멀어지는 누군가의 시선, 후다닥 사라지는 기척을 곧바로 눈치채지 못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살짝 부은 듯한 입술을 매만지며 상념에 빠졌다. 그 당시의 일을 어렴풋하게라도 떠올리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었으나, 다른 곳으로 튀는 생각은 미처 붙잡지 못했다. 뜨거운 숨결이 오고 갔던 어슴푸레한 새벽의 기억이 머릿속을 자꾸만 침범한 것이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어느샌가 상념을 시작한 이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으나 아르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했다. 간밤의 일을 되살릴수록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감정이 의구심 한 자락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르펠.”
온화한 음성, 그리고 귀 끝에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손길. 그 두 가지만 아니었더라면 바쁘게 이어져 가던 생각이 끊기는 일도 없었을 테고, 앞서나가는 이를 따라 기계적으로 옮기던 발걸음을 멈추는 일도 없었을 테다. 아르펠의 시선이 곧장 옆으로 돌아갔다.
유하게 휘어진 눈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평소보다 유독 더 밝아 보이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의 손길이 닿는 곳에 열이 몰리는 것만 같았다.
행복이 퐁퐁 솟아나는 눈을 앞에 두고 있으면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언젠가는 이것을 낯설게 여긴 적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펠은 이에 익숙해졌다. 로한을 마주하고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크흠, 흠. 조, 조금 쉬었다 갈까요?”
둘 사이에 흐르던 묘한 분위기에 금이 간 것은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뒤늦게 따라오던 이들의 부재를 눈치챘는지 저만치 앞서간 마이센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얼굴엔 어색한 기색이 한껏 묻어난 채였다.
연신 힐끔거리는 눈과 작게 곁들인 헛기침에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다분히 엿보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하느라….”
“하하, 아뇨. 사과하실 것까지야. 금슬이 좋은 건 축하할 일이지요.”
금슬까지 언급하는 것에 아르펠의 시선이 비스듬히 땅을 향했다. 심장의 고동이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으로 옮겨간 것만 같았다.
와중에도 고개를 든 것은 미묘한 괴리감이었다. 고작 하룻밤이 지났건만 대부분의 의심이 해소된 것처럼, 마이센이 내비치는 경계심은 지난날에 비해 한풀 꺾여 있었다. 그것이 못내 거슬렸다.
집을 따로 구하는 것을 은근히 못마땅해 했던 전날의 태도, 지난 새벽 선명히 느껴졌던 누군가의 시선, 다음날 거짓말처럼 옅어진 경계심.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니 상황은 금방 짜 맞춰졌다.
목적이 무엇이든, 둘을 감시하고자 한 건 눈앞의 이 남자라고. 앞서나가는 마이센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에 미약한 짜증이 서렸다.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한 발짝 두 발짝 나아갈 때마다 발아래에 밟히는 나뭇잎들이 사부작거리는 소음을 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공기가 참 좋죠?”
“…네, 뭐.”
마을 바깥쪽에 있는 숲은 생각보다 깊고 울창했다. 그 모습이 제법 신비롭고 속세와 동떨어져 보여 신을 모신다는 제단이 세워져 있기 걸맞은 장소 같았으나,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공기가 무거워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들이마시는 공기에 짙게 서려 있는 음기, 코끝을 맴도는 악취……. 일반적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이 숲 안쪽에 가득했다.
마을 전체에서 은은히 느껴지던 망령의 기운이 사방에서 진동한다. 비스듬히 올라간 로한의 눈썹이 그 역시 숲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마이센의 말과 함께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길이 끊겼다. 여태 좁게 이어져 있던 길이 넓어지고, 빽빽한 나무들로 둥글게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구조물이었다.
쓸데없이 새하얗고 신성해 보이는 여우상이 네모난 기둥 위에 늠름하게 올라서 있다. 누군가는 감탄하며 바라볼 모양새였으나, 아르펠은 별 감흥 없는 눈으로 그것을 살피기만 했다. 소원을 빈다며 변방의 마을까지 직접 찾아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감한 반응이었다.
“멋지네요.”
그런 동떨어진 반응을 천연덕스럽게 무마한 로한이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척 봐도 묵직해 보이는 모양새에 묘한 눈으로 아르펠을 응시하던 마이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분명 신께서도 기꺼워하실 겁니다.”
말에서도 군침이 흐를 수 있다면 진작 흘렀을 것이다. 애써 숨긴다고 숨긴 것 같았지만 격양된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이 그의 속에 그득하게 들어차 있는 욕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물러나 있겠다는 마이센을 뒤로하고 제단 앞에 섰다. 로한이 제단 위에 금화 여러 개를 흩뿌릴 무렵, 아르펠은 그의 곁에 선 채 짧게 덧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는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여긴 아니야.”
“…그래요?”
잠시 멈칫했던 손이 다시 유연히 동작을 이어간다. 두 손을 모아 잡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신에게 기도하는 모양새였다. 하물며 그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에게는 얼마나 경건해 보일까.
물론, 손을 모으고 눈만 감고 있다뿐이지 신에게 빌기는커녕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테다. 마이센의 낯에 흡족한 미소가 깃들었다.
“밤에 다시 와야겠네요.”
둘이 나중을 기약하는 것도 모르고서.
***
“안 돼, 의심하면 안 되는데…….”
불 하나 켜지지 않아 어두운 방 안, 피골이 상접한 여인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었다. 뭉개진 발음으로 안 된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기괴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이 자그마한 침대에, 정확히는 그 위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닿았다. 굳게 감긴 눈과 홀쭉해진 볼, 마른 입술이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색색거리는 소음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달아나지 않도록 몇 번이고 작은 볼을 감싸 만지작거리는 행동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네가… 네가 뭘 잘못했다고.”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서 시작된 저주.
그녀의 아이는 그 저주의 희생양 중 하나였다. 곱게 간 감자에 물을 섞어 약하게 간을 한 것을 꾸준히 먹이고는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였다. 말라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날이 쌓여갈수록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거란다.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오로지 여우신만 믿으며 살아왔다. 의심해서는 안 되는데,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죽음에 가까워질 때마다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굳건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금이 갔다.
“신이시여…….”
탄식을 닮은 말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두 손을 모아 몇 번이고 간절히 기도했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대로 행동했으니 내 아이는 깨어날 거라고, 살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으스스한 감각이 등골이 스치는 것에 여자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사방에 내려앉은 어둠 탓일까, 주위를 인지하는 데에만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습관적으로 아이를 먼저 살핀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불은 켜 놨던 것 같은데.’
확연히 어두워진 하늘을 보고 졸았다는 것을 곧장 깨달았으나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집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침대로 오기 전, 바깥쪽의 등에 불을 붙이고 왔으니까.
그때까지는 아무런 위기의식이 없었다. 그러려니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을 뿐.
하지만 무릎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
몸이 덜컥 굳었다. 착각이 아니다. 등에 닿은 감촉은 누군가의 손이었다. 사지가 붙잡히지도 않았고, 하물며 통증이 이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저 몸을 지그시 누르는 힘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목이 졸린 듯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뒤따랐다.
“쉿.”
비명을 지를 생각도 하지 못했으나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입이 꾹 다물렸다. 겁에 질려 헐떡이는 숨결만이 입술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를 반복했다. 공포라는 생경한 감정으로 인해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인 지 오래였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사탕으로 아이를 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하게 달래는 기색이 녹아 있었지만, 여인은 말없이 몸을 떨기만 했다.
그녀를 억누르고 있는 위압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는 되레 인간 같지 않은 기괴함을 풍기고 있었으니까.
침대 위에 반쯤 묻힌 고개가 거세게 끄덕였다. 무엇이든 말을 하겠다는 의지가 적나라하게 묻어 나오는 행동이었다.
“신께 계시를 받았다고 하던데, 계시를 받은 방법이랑 내용 좀 자세히 알려 주시겠어요?”
“꿈을, 꿈을 꿨어요!”
“꿈?”
이어진 말은 횡설수설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떠한 약을 누군가에게 먹이라는 말을 들었고, 남편을 통해 후작가로 보냈다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잠자코 변명을 듣던 남자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그 약이라는 건, 어디서 났습니까?”
“그건 잘… 일어났더니 머리맡에 놓여 있었어요.”
“집에 누군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고요?”
“모르겠…… 힉! 죄송, 죄송합니다. 그치만 정말, 정말로 모르는 일이에요. 신께서 직접 하사하신 거라고 생각해서…!”
그 뒤로 짧은 문답이 오고 갔지만 그녀가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상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머릿속 한구석에서 이러다 정말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흐음.”
“살, 살려 주세…….”
옅은 침음이 마치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겁에 질려 잘근잘근 깨문 입술은 어느새 넝마가 된 뒤였다. 살려 달라는 애원은 흔들리는 목소리에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겁을 주체하지 못한 몸이 부들부들 떨릴 즈음, 여자는 목에서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이렇게 죽나……?’
시야가 까맣게 바래지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이제는 다 부질없는 미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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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한은 실이 뚝 끊어진 것처럼 기절해 버린 여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목을 쥐었다 놓길 반복하는 손, 연거푸 미약한 살기가 어렸다 사라지는 눈에 일말의 고민이 서린 듯했다.
그가 하고 있는 고민은 간단했다. 죽일까, 말까. 케드윈을 심문하면서 알아낸 집에 직접 들어선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의 아내이며 계시를 운운한 당사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아르펠이 다칠 뻔했던 일이 모두 이 여자에서 비롯되었음을 되새길 때마다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로한. 다 끝났어?”
“네, 들어와도 돼요.”
그 고민을 대신 끝낸 것은 바깥쪽에서 들리는 아르펠의 목소리였다. 여인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은 로한이 태연한 대답과 함께 그녀의 몸을 등지고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미묘히 붉은 자국이 남아 있던 걸 보면 목에 멍이라도 들 것 같았지만, 아무렴. 그에겐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기절한 이를 등진 채 짧은 대화가 오갔다. 계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받았는지, 약은 어디서 났는지… 여태 여자를 통해 들은 것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게 다였지만.
로한이 그녀를 제압하고 정보를 얻어낼 때 아르펠은 벽 너머에 서 있었다. 귀가 좋았으니 고작 벽 한 겹에 가로막혔다고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할 리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잠자코 로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조곤조곤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우신이라는 존재도 누군가가 꾸며 냈을 확률이 높아요.”
로한의 얼굴에 쓴웃음이 고였다.
신이라고 하기엔 그것의 목적이 너무나도 투명했다. 계시를 받았다던 보좌관의 아내도 결국 신을 사칭하는 무언가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다.
심문 한 번으로 얻어 낸 정보라기엔 꽤 값졌다. 신은 거짓된 존재고, 신을 지칭하는 누군가는 구원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윽고 떠오른 것은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걸치고 다니던 촌장의 얼굴이었다.
“촌장 짓인가?”
“글쎄요….”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마이센인가? 의문이 뒤따랐지만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일이 생각보다 커진 이상 이것에 엮여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죽음조차 불 싸지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담보로, 마을 전체를 상대로 한 일종의 사기극을 벌인 셈이다. 로한이 작게 혀를 찼다.
“일단 숲 쪽으로 가볼까요?”
이 집에서 더 이상 알아낼 만한 것은 없다. 그러니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기보단 미리 봐두었던 곳을 살피러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르펠 역시 동감하는 바였기에, 자신을 이끄는 로한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마을에 내려앉아 있는 짙은 어둠은 몸을 숨기고 움직이기에 제격이었다. 둘 역시 감시의 눈을 떨쳐낼 겸 한밤중이 되어서야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이를 노린 것은 둘뿐만이 아닌 듯했다.
“저건…….”
누군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기척을 느낀 것은 마을 바깥쪽의 숲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가파른 숨, 반쯤 달리는 것과 다름없는 발걸음, 손에 들린 삽…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을 앞둔 사람임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수상한 조합의 남자가 헐레벌떡 숲 안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뒷모습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촌장, 마이센이었다.
“…따라가 보자.”
당황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애초에 숲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거기에 ‘미행’을 더한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건 없었으니까.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상을 알기 위해서라도 촌장의 뒤를 캐야 했으니, 오히려 운이 좋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인인 촌장의 뒤를 밟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풀에 스치는 작은 소음 하나 내지 않은 채 마이센의 뒤를 고스란히 밟아가기를 몇 분, 아르펠은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낯익은 여우 조각상이 보였다. 새하얀 석상이 미미한 달빛에 도드라지며 제법 신성한 느낌을 풍겨서일까, 도리어 모순이 짙은 존재감을 발했다. 짜고 치는 사기극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마이센은 제단의 뒤로 향했다. 머지않아 푹푹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언제까지 그놈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뒤따라 들린 것은 작은 투덜거림이었다. 사방이 고요해서일까, 나무 뒤쪽에 몸을 붙인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아르펠에겐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 뒤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간혹 몇 마디를 중얼거리긴 했으나 ‘그놈’에 대한 험담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을 하인으로 보느니 어쩌니,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손 떼고 다른 구역으로 가야겠네, 불평불만이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진다.
땅을 파는 소음이 줄어들고, 일을 다 마무리한 듯 옷을 툭툭 터는 소리, 삽을 정리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이윽고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한 마이센이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둘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의 신형이 숲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난 뒤였다. 로한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두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제단의 뒤쪽,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이센이 무언가를 하고 있던 그 자리로.
“많이도 해 먹었네.”
그에게서 나직한 감탄사가 들렸다. 나름 자연스럽게 덮기는 했으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어색함을 미처 숨기지 못한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자를 이용해 흙을 몇 번 퍼 나르자 물건을 숨기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구덩이가 드러났다. 로한이 공양했던 금화부터 시작해 각종 장신구, 자그마한 보석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이 안쪽에 가득했다.
굳이 땅 아래에 묻어둔 이유는 모르겠으나 상당한 양의 공양물을 대놓고 빼돌렸다는 것은 눈대중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마을 내에서 의구심을 느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거짓된 신에게 미쳐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촌장은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응. ‘그놈’이 상관이겠지.”
불만을 토로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뒤치다꺼리, 하인 노릇… 그런 단어를 조합해 보았을 때 촌장은 ‘그놈’의 하수인인 듯했다.
다르게 해석하면 그 상관에 대한 정보는 촌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다음 계획을 세우는 로한의 목소리가 거침없었다.
“숲을 마저 둘러보고 마중 나가야겠네요.”
얼굴에 살가운 미소가 꽃피고, 어조는 태연했으나 의도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건, 촌장은 이후 집에 들이닥친 둘로 인해 좋은 꼴을 당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일 테다.
파헤쳤던 흙을 다시 덮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우연이 겹쳐 촌장을 미행했을 뿐이지, 애초에 둘이 숲을 찾아온 목적은 이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 저쪽.”
숲 안쪽에 빽빽하게 들어찬 망령의 기운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그들이 한밤중에 외출을 감행한 두 번째 이유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의 기운을 꼼꼼히 살피던 아르펠이 한쪽을 가리켰다. 예민한 기감이 그를 조금 더 짙은 내음이 느껴지는 숲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
방향을 잡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르펠은 안쪽으로 향할수록 망설임 없이 특정한 방향을 짚어 냈고, 그를 뒤따라 갈수록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은 로한 또한 실감할 정도로 뚜렷했다.
다만, 큰 난관 없이 근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머지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윽…….”
처음 이상함을 느낀 것은 아르펠이 걸어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을 때였다. 그를 걱정한 로한이 괜찮냐 묻기는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저 조금 더 꼼꼼히 살피느라 그랬던 것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말렸어야 했던 걸까.
앞서 걸어가던 아르펠이 기어이 옅은 신음과 함께 몸을 휘청거린 순간, 로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오한이 드는 얼굴이었다. 순하게 웃을 때는 마냥 온화하게 보이던 이목구비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벼려지고, 표정이 지워진 얼굴에는 은은한 살기가 어리기까지 했다.
곧장 아르펠을 부축한 로한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떴다. 멀리, 조금 더 멀리. 그의 손에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안겨 있던 아르펠은 휘청거렸던 그 자리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고 나서야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내뱉는 숨결은 한층 안정되어 있었다.
“아르펠.”
로한의 발걸음이 멈추고, 아르펠은 그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표정 한 점 깃들어 있지 않은 싸늘한 낯이 보이는 순간 저절로 몸이 움찔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울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못하는 뒤죽박죽인 표정이 얼굴에 걸쳐졌다. 마주 잡은 손끝에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그것이 빼곡한 걱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한은 아르펠을 부른 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기 어린 눈을 하고 빤히 시선을 마주하고만 있을 뿐.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아르펠이었다.
“어지러워서 그랬던 거야. 진짜 괜찮아.”
“…어지러웠다고요?”
마검인 그가 어지러움을 호소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 생각한 로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래질 지경에 다다르자 아르펠이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입에 담은 말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음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지금은, 괜찮…….”
“괜찮아. 정말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비롯해 그보다 더 흔들리는 듯한 손길이 볼에 와 닿았다. 금방 깨질 무언가에 손을 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없이 조심스럽기만 하여, 아르펠은 냉큼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었다. 미약하게 남아 있는 잔 떨림이 그의 불안을 보여 주는 듯했다.
좁혀지려는 미간을 애써 붙잡았다. 뭐가 뭔지, 대체 이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가뜩이나 복잡하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끼얹어졌다.
98
망령의 기운이 더 짙어지는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런 고통을 처음 느껴보는 아르펠로서는 굉장히 생소한 감각이기는 했으나 무난히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순간 훅 짙어진 기운에 몸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핑 돌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쪽에 망령의 힘을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간신히 진정한 로한을 향해 아르펠은 그리 말했다.
느껴질락 말락 했던 것이 ‘무언가’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다. 몸 안의 기운이 새어 나가고, 무언가가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 치운다. 마력과 망령의 힘에 근간을 두고 있는 아르펠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순간 망령의 기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억눌러 주던 반지의 힘도 짧게 흔들리긴 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겉으로 제 기운이 새어 나가기는 했으나 아주 잠깐에 불과했고, 이를 눈치챌 만한 사람은 없었을 테다. 이를 사소한 걱정거리라 치부하며 넘기자마자 또 다른 고민이 그를 찾아왔다.
일이 상당히 곤란해졌다. 힘의 근원을 찾은 뒤 가능하다면 그것을 제거할 계획이었건만, 정작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자신이 무력해졌으니.
다만 로한은 다른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흘끗 본 얼굴이 아까보다 더 무너져 있는 것에 아르펠은 제 머릿속 어딘가가 고장 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말도 하지 못했다.
걱정, 불안, 초조함… 시도 때도 없이 일렁이는 것들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어째서 그러한 감정이 샘솟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손만큼은 눈치껏 로한의 몸을 토닥이기를 반복했다.
머지않아 다급함을 담은 목소리가 로한의 입에서 쏟아져 내렸다.
“지금은… 지금은 안 그래요? 불편한 곳은요?”
머리는 아프지 않냐, 눈은 제대로 잘 보이냐, 귀가 먹먹하지는 않냐, 감각이 둔해지지는 않았냐…….
그런 물음이 끊임없이 뒤따랐다.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는 손에 몸을 맡기며 아르펠은 휘몰아치는 상황에 정신없이 휩쓸렸다.
뒤늦게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음에도 로한은 그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직접 확인하고 난 뒤에야 눈에 띄게 안심했다.
“아프면, 어디 이상하면 꼭 말해 주세요. 네? 제발요…….”
이윽고 새어 나오는 한 마디는 영락없는 애원이었다. 꼭 잡은 손이 마치 매달려 오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물끄러미 잡힌 손을 바라보기도 잠시, 아르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충만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연신 일렁이던 눈망울은 ‘집에 돌아가자’라는 말을 듣고는 그나마 진정했다. 금붕어 똥처럼 졸졸 따라오는 녀석을 이끌며 더듬더듬 숲속을 나아갔다.
기운의 근원을 찾으러 나서는 바람에 깔끔하게 나 있던 길을 벗어난 지 오래라, 울창한 나무와 불규칙하게 늘어선 수풀만이 죽 이어졌다.
“제가 업어 줄까요?”
“아냐, 안 그래도 돼.”
“그럼 부축하는 건….”
“나 진짜 괜찮아, 로한.”
와중에도 로한은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한 듯했다. 미련이 듬뿍 남아 있는 질문이 연신 이어지다 뚝 끊겼다. 한 박자 늦게 돌아본 그의 얼굴에는 옅은 서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완강한 거부에 속상하기라도 했는지, 아랫입술이 조금 튀어나와 있는 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튀어나온 입술을 꾹 눌러보고 싶다는 충동이 든 탓일까,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복잡해졌던 머릿속이 한결 나아졌다. 달래듯 손을 조금 더 깊게 얽으며 걸음을 부추길 때였다.
“잠깐만요.”
갑작스레 표정이 딱딱해진 로한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아르펠 역시 별다를 바 없어 보이는 숲길에서 옅은 기시감을 느꼈다.
“마력…….”
한 줄기 희미한 마력이 땅 아래에서 피어올랐다. 숲 전체를 꿰찬 망령의 기운에 비하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희미했지만, 분명 멀지 않은 곳에서 연신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로한의 발길이 다다른 곳은 밑동이 유독 두꺼운 나무의 아래였다. 땅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솟구쳐 밑동을 파헤치기도 잠깐.
어둡기만 한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옅은 반짝임이 시선을 앗아갔다. 흙 사이에 파묻혀 있던 은색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한 마력의 잔향이 남은 빛바랜 포켓 목걸이였다.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의 귀중품처럼 보이는 것이 왜 이런 숲 한복판에, 그것도 조성된 길과 동떨어져 인적이 드문 곳에 묻혀 있을까. 자꾸만 생각이 한쪽으로 쏠렸다. 문득 이 목걸이의 주인이 그리 좋은 결말을 맞지는 못했을 거라는 직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증명됐다. 열심히 주변을 파헤치고 있던 그림자의 끝에 무언가 걸렸기 때문이다. 흘끗 드러난 구덩이 안쪽을 응시한 로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땅 아래에는 묻히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백골이 된 시체가 있었다. 백골의 위에 걸쳐져 있는, 반쯤 썩어 들어간 옷가지는 익숙한 느낌을 풍기기까지 했다.
그를 본 아르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생각이 맞았네, 로한.”
신관이 이 마을에 온 적이 있나 봐.
백골의 정체가 신관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제 모양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기는 했으나 신관의 옷을 지겹도록 많이 봤던 아르펠로서는 못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한은 마을 사람들의 지나친 경계가 신관의 방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세운 적이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결말로 그 가설이 증명된 것이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착잡함, 그리고 분노였다.
“날이 밝으면 바로 움직일까요.”
조용히 의견을 묻는 목소리에 희미한 경멸이 배어 있다.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했지만, 아르펠에게는 그 감정이 무엇보다 선명히 느껴졌다.
마을의 참상을 보며 특별한 감상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아르펠은 확신했다. 끔찍함이라는 것을 형상화한다면 이 마을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고.
***
사부작, 사부작.
나뭇잎을 밟는 소리, 수풀이 스치는 소리, 자갈이 알알이 박힌 흙을 밟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남자가 열심히 숲속을 헤쳐 지나가고 있다는 증명해 주었다.
“왜 이렇게 깊은 곳에 만들어 놔서는……!”
더운 날씨도 아니었건만 이마 위로 땀이 주르륵 흐른다. 불쾌함이 녹아든 얼굴을 한 남자, 마이센은 작게 이를 갈며 불만을 토해 냈다.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던 인자한 웃음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번 더 수풀을 해치고 나서야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울창한 나무가 주위에 늘어서 있는 좁은 길목, 그 위에 자리한 흙을 대충 발로 훑어내자 손잡이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가장 먼저 드러났다.
홈이 패여 있는 곳을 잡고 당기는 손길이 몇 번이고 이를 반복해 온 것처럼 익숙하기만 했다. 끼이익, 거리는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숨겨져 있던 나무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직전까지만 해도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입을 꾹 다물고, 못마땅해 보이던 표정도 눈 깜짝할 새에 갈무리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기다란 복도를 지날 때는 은은한 긴장의 기색이 묻어나올 정도였다.
「늦었군.」
“죄, 죄송합니다.”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울림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마이센은 곧장 눈앞의 이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왕좌처럼 보이는 거대한 의자에 한 남자가 늘어져 앉아 있다. 펑퍼짐한 옷, 그리고 얼굴에 쓰고 있는 커다란 가면이 그의 체형은 물론이고 얼굴의 생김새까지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남자의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것도 같았다.
숲에 퍼져 있는 망령의 기운, 그것보다 몇십 배는 더 짙은 기운이 눈에 있는 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이를 실감한 마이센은 더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 없이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 비굴한 태도는 이윽고 들린 말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드디어…… 그릇을 찾았다.」
“그, 그릇이라뇨? 그게 정말입니까, 간부님?”
고개가 홱 들릴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부릅뜬 채 정처 없이 흔들리는 두 눈이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마력과 망령… 그 두 가지 힘이 공존하고 있다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그릇은 없겠어.」
“그 말씀은…….”
「본래는 더 나중에 진행할 생각이었다만… 생각이 바뀌었다. 마을로 돌아가 준비에 착수해라, 마이센. 오늘에서야 길고 길었던 실험의 끝을 볼 수 있겠구나.」
“고,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더 이상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이 인사를 올리고 후다닥 몸을 물리는 것이 퍽 다급하게까지 보였다.
들뜸, 설렘, 환희… 온갖 감정이 벌게진 얼굴 위로 묻어났다.
긴 시간 동안 구원교에 몸을 담은 그는 본교에서 오랫동안 준비하던 「실험」이 자신의 고향에서 진행된다는 이유 덕분에 중간 관리자로 발탁될 수 있었다. 고향 사람들을 상대로 비인간적인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괜찮다.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이 맞지.’
마이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귀한 그분의 뜻에 발판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노라고.
원래부터 마을 사람들이 믿던 여우신을 이용해 실험을 수월하게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이번 일로 괄목적인 성과를 얻게 된다면 그 역시 구원교 내에서 큰 포상을 얻을 게 분명했다. 그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니 감격이 차오를 정도였다.
신이 난 마이센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넓고 새까만 방 안에 홀로 남아있던 남자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비루한 몸뚱어리를 벗어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 세상은 곧 그분의 손에…….」
히죽. 가면 안에 가려진 기괴한 모양의 입술이 위로 치솟았다.
99
“헉……!”
눈이 부릅떠지고, 짤막한 숨이 터져 나왔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 어두운 천장, 오래된 집 특유의 묵직한 나무 내음. 그 모든 것들을 찬찬히 인지해 나가기도 잠시, 쌔근거리는 숨소리에 퍼뜩 정신이 되돌아왔다.
흘끗 돌아간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로한을 꿰뚫어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하게 고동치던 심장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느리게 움직인 손이 얌전히 덮혀 있는 이불을 만지작거리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닦았다. 손가락 끝에 남은 축축한 감각 때문일까,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생소한 감정이 몰아쳤다.
“…악몽?”
지금의 상황을 낯설게 느끼는 것과 별개로 결론은 빠르게 내려졌다.
놀라서 깬 잠,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 얼굴을 따라 흐르는 식은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이 뒤섞여 쏟아졌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혼몽하던 와중에도 어렸을 적 로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는, 그 작디작은 아이가 악몽에 괴로워하던 나날이.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인간들이 악몽을 꿨을 때 흔히 보이는 증상이라는 것쯤은.
‘무슨 꿈… 꿨더라.’
자연스레 생각이 그리로 닿았으나,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을 몇 번이고 되짚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새까만 먹으로 머릿속 어딘가를 덧칠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일까, 깜빡이는 눈이 멍한 기색을 띠었다.
몇 차례 방황하던 시선은 결국 다시 로한에게로 돌아갔다. 비스듬히 돌려져 있는 몸과 꼭 감긴 눈꺼풀 아래로 길게 뻗은 빽빽한 속눈썹이 보이고,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쏟아지는 숨결이 손끝에 닿은 것만 같았다.
아르펠의 손이 짧게 움찔거렸다.
‘손…….’
손을 잡고 자고 싶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내리는 것만큼이나 행동도 빨랐다. 이불 틈으로 꼬물꼬물 들어간 손이 로한의 손을 찾아 나선 것이다. 손을 마주 잡고 자면 기억나지 않는 악몽으로 인해 찝찝했던 기분도 한결 나아지리라.
하지만 아르펠의 계획은 머지않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서로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맞닿았을 무렵, 창 바깥에서 불쾌하기까지 한 기척이 적나라하게 난 것이다. 로한을 붙잡는 대신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일어난 아르펠이 소리 없이 창가로 다가섰다.
창을 가리고 있던 낡은 커튼을 걷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흐릿한 마을의 모습이었다.
눈에 문제가 있다거나, 창이 더러워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안개. 숲에서부터 흘러들어온 안개가 마을을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다.
옅은 검푸른 빛이 도는 안개가 일렁이며 끊임없이 세를 불려 나갔다. 마치 마을 전체가 잡아먹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광경이다.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는 아르펠의 얼굴에 미약한 불쾌함이 서렸다.
“……아르펠. 왜 일어나 있어요.”
“아.”
부스스, 이불을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잠이 덜 깬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불쾌함이 눈 녹듯 녹아내린 얼굴이 등 뒤에서 다가오는 로한을 돌아보았다.
졸린 기색을 숨기지 못한 눈매가 묘하게 처져 있었다. 아르펠은 손을 뻗어 눈 끝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충동을 감내해내야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을 깨우기 위해 볼을 가볍게 토닥이긴 했다만.
끔뻑, 끔뻑. 느릿하게 내리깔았다 들어 올리기를 반복하던 눈꺼풀에 어느 정도 초점이 돌아오고 나서야 기다란 손가락이 창밖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로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검푸른 안개. 그 역시도 마을 안을 누비고 있는 심상치 않은 색의 안개를 본 것이다.
“저건…….”
“저게 저주의 원인인 것 같아.”
일전에 저주에 걸려 잠든 사람의 몸속에서 느꼈던 것과 굉장히 흡사한 기운이 안개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검푸른 안개 안에서 넘실거리는 악의, 사람들을 잠에 빠뜨려 결국 목숨을 앗아가는 저주까지. 굉장히 옅었지만, 그것은 분명 망령의 기운이었다.
본래 평범한 사람들은 짙은 망령의 기운에 노출되면 살아남기 어렵다. 곧바로 호흡기에 침투하는 안개 같은 형태라면 더욱더. 그럼에도 이 마을 사람들이 잠들고 생명력을 빼앗기는 것에 그쳤던 건 목숨을 어찌어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운이 옅었기 때문일 테다.
“…일단, 내일 다시 움직여요.”
어느새 졸린 기색이 완전히 가신 로한의 목소리가 그를 다독였다. 단단하기까지 한 음성이 쥐고 있던 커튼을 놓기를 은근히 독촉하는 듯했다. ‘내일 열심히 움직이려면 잠을 푹 자야 한다’는 끈질긴 주장은 덤이었다.
결국 아르펠이 손에 쥔 커튼을 놓고 순순히 로한의 손에 이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개’의 시작은 몇 시간 전 둘이 다녀왔던 그 숲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상 증세에 발이 묶여 돌아왔던 마당에, 안개의 진원을 찾으려 다시 숲에 들어가봤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다정한 배려인 셈이다.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곱씹어 곤란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배려.
조금 전과 같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 아르펠이 슬쩍 로한의 손을 건드렸다. 흠칫하는 기색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오는 게 제법 달가웠다.
“손잡고 잘래?”
“……좋아요.”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이는 얼굴에 묘하게 붉은 기가 돌았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리고 홍조가 어린 담겨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손은 꼬물꼬물 움직여 손가락 사이사이를 조심스럽게 얽어 왔다.
맞잡은 손 사이에 작은 심장이 새로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두근, 두근. 옅은 박동이 손에서 느껴지는 것이 꽤 나쁘지 않았다. 그 규칙적인 울림과 손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체온 때문일까, 왜인지 모르게 눈앞이 가물가물해져만 갔다.
이제는 로한의 곁에서 졸림을 느끼는 것도 익숙할 지경이었다. 몰려오는 수마에 순순히 몸을 맡기며 아르펠은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잠들기 직전,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유가 뭐지.’
앞서 목격했던 빈민가에서 자행한 납치, 그리고 잔인한 인체 실험.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음에도 구원교가 이 두 가지를 행한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망령의 힘을 온전히 담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목적이.
그렇다면 이 안개는, 마을의 저주는…….
대체 무슨 목적을 담고 있을까.
* * *
빛이 어슴푸레하게 들이치는 이른 아침, 마이센은 여느 때처럼 집 밖에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아침 인사를 하러 다니는 대신 집안을 연신 서성이고 있었다.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입꼬리가 자꾸만 치솟았다.
“드디어 오늘….”
거사를 치른다.
푸른색을 띠는 조악한 구슬을 손에 쥔 채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오늘만 지나가면 귀찮게 매달리는 사람들을 상대할 필요도 없고, 이런 촌구석 마을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토록 고대하던 출셋길이 열리는 것이다.
꿈에 그리던 미래가 바짝 다가왔다. 머릿속에서 기대가 뭉게뭉게 부풀어 올랐다. 여태까지의 모든 고생과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달콤한 상상이었다.
―끼익.
즐거운 상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몸이 흠칫했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홱 돌아간 시선이 빠르게 가늘어졌다.
‘창문은 다 닫아 놨을 텐데……?’
열어 놓은 창이 바람에 흔들렸다고 하기엔 창이란 창은 모조리 닫아 놓고 커튼까지 꼼꼼히 치지 않았나. 미심쩍게 소음이 난 방향을 바라보다 결국 걸음을 옮겼지만, 역시나 창문은 꼭 닫혀 있고 커튼까지 깔끔하게 쳐진 채였다.
착각이었나. 마이센은 그리 생각하며 혀를 쯧 찼다. 거사를 앞두고 있으니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졌나 보다, 라며.
그리고 방을 나서기 위해 뒤로 도는 순간.
“흐억!”
커다란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코앞에 시꺼먼 형상이 소리도 없이 서 있었다. 기척도, 소음도, 숨소리 하나조차도 듣지 못한 채 마주한 거한에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한 발짝 두 발짝 뒷걸음질을 쳤으나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 탓일까, 덜덜 떨리던 다리는 금세 힘이 풀리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마이센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거리는 거센 소음와 겁에 질려 헐떡이는 숨소리가 어두운 집안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 소란에도 그림자를 닮은 사내는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그 한결같은 태도에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하던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마이센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떠올랐다.
“호, 혹시 간, 간부님이 보내셨……?”
“간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아니, 로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익숙한 목소리. 그것을 인지한 마이센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고 말았다.
“다, 당신은….”
그제야 로브 아래로 드러난 하관이 익숙해 보였다. 얼굴에 맴돌던 희망이 가시고 공포가 다시 넘실거리기 시작할 즈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 끄윽.”
삐거덕거리며 고개가 느리게 돌아갔다. 이윽고 제 어깨를 잡고 있는,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손을 본 순간.
짧은 신음과 함께 마이센의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가 버렸다.
“…기절한 것 같은데요?”
완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몸과 입에 물려 있는 거품, 그리고 뒤로 넘어가 흰자가 보이는 눈이 영락없이 혼절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저 어깨에 손만 가져다 댄 것뿐이었던 아르펠은 졸도해 버린 마이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미안.”
“아니에요. 물이라도 부으면 되죠.”
바닥에서 줄기줄기 솟구친 그림자가 마이센의 몸을 꽁꽁 묶었다. 발버둥 한 번 칠 수 없는 완벽한 매듭이 실시간으로 완성되고 있는 와중,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아르펠의 시선을 빼앗았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자그마한 구슬. 겉면이 매끄럽지 않아 투박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표면에 어두운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100
촤아악.
거침없이 떨어진 물줄기가 마이센의 몸을 적시다 못해 그 아래 바닥까지 흥건히 적셨다. 온기 한 점 없는 차디찬 물이어서일까, 거품까지 물고 기절했던 그가 물 폭탄을 맞자마자 파드득 몸을 떨며 깨어났다.
“흐어억!”
거기에 새된 비명까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방황하는가 싶던 눈은 머지않아 공포에 질렸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써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은 물론이고 꽁꽁 묶여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맞은편에 서 있는 두 인영이 주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차라리 계속 기절해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목 끝까지 차오른 공포심을 애써 털어 내던 와중, 마이센의 시야에 반짝이는 금빛이 스쳐 지나갔다. 덜덜 떠는 와중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 방 안에 저런 색을 낼만 한 건 없을 텐데, 하는.
둔해진 사고가 느리게 굴러간 탓에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그게 상대의 눈동자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 설마……!”
몸을 묶고 있는 일렁이는 검은색의 줄기, 그리고 그걸 사용하는 금색 눈동자의 주인공.
구석진 마을에 처박혀 있는 입장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이센이 구원교 내의 일에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구원교의 신도들에게 악몽이라 불리는 누군가에 대한 소문도 이미 몇 번이고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과 망설임 없는 손속. 웬만한 기사들도 당해 내지 못한 자를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구원교의 신도가 버틸 수 있을까? 그들에게 ‘그’는 말 그대로 자연재해와 비슷했다. 막을 수도,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커다란 재앙 그 자체라는 소리다.
‘그’를 만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으니 정확한 생김새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악명이 드높아지며 알음알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마저도 이 고립된 마을에선 ‘갈색 머리에 금색 눈동자’와 같은 어중간한 정보가 다였다.
제국인들 중에서도 별로 없는 특이한 금색 눈동자.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눈 색이…….’
달라졌다. 분명 새까만 색이었던 눈동자가 선명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누군가는 찬란하다, 아름답다며 찬양할 그 색이 마이센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눈 색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당장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마당에 외면해 봤자 현실을 부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다고 눈앞의 남자가 구원교의 대척점에 있는, 마신의 축복을 받은 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여, 역시 그냥 처리했어야…….”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과거에 대한 후회뿐이었다. 마을에 저 둘이 들어왔을 때, 수상함을 느꼈을 때 그냥 처리해야 했다는 후회.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듯 탄식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찰나.
“…끄아아악!”
마이센은 발끝으로부터 몰려오는 끔찍한 통증에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꼭 발이 통째로 꿰뚫리는 것만 같은 지독한 감각이었다. 꺽꺽 넘어가는 숨을 애써 갈무리하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 마이센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끄윽, 끅…….”
제 발을 완전히 꿰뚫은 검은색의 가시, 그로부터 줄줄 흘러나오는 피가 마치 꿈만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다.
“누굴 처리한다고?”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기절할 수 없었다. 귓가에 들리는 섬뜩한 목소리가, 어깨를 내리누르는 중압감이 그의 정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흠칫 돌리자마자 보이는 얼굴은 언뜻 보면 무표정했으나, 눈동자는 아니었다. 일렁이는 보랏빛 동공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빽빽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말 그대로 사신(死神), 그 자체였다. 고통에 끅끅대는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아르펠. 전 괜찮으니까 그만 해요.”
그러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리는 로한이 천사처럼 보일 수밖에. 아르펠이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에 기뻐하는 것뿐이었다는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마이센으로서는 로한이 유일한 활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몇 분 뒤, 자신이 그의 손에 의해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을 줄도 모르고.
* * *
“끄어억, 억… 사, 살…….”
“알고 있는 걸 말하면.”
“말… 말하겠습니다. 말할게요. 제바알….”
일전에 한 번 케드윈을 심문해 본 솜씨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솜씨 덕분일까. 그림자에 꽁꽁 묶인 채로 물바가지를 뒤집어썼던 처음 모습을 멀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이센의 얼굴은 망가져 있었다.
“들어가도 돼?”
똑, 똑. 그런 둘의 사이를 가른 건 느리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청명하기까지 한 소리를 낸 이는 다름 아닌 아르펠이었다.
그가 방 밖으로 나간 이유는 간단했다. 로한이 그렇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으니까.
어차피 방을 나간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벽 한 겹에 불과한 이상 소리는 생생히 들릴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순순히 몸을 옮긴 것은, ‘심문하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다’라며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로한을 끝내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아, 들어와도 돼요.”
로한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방문을 열고 들어선 아르펠은 흘끗 마이센을 내려다보았다. 입까지 헤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행색이 딱 봐도 정신을 놓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순하게 웃고 있는 로한이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는 것에 괴리감을 느꼈을 테지만, 아르펠은 아니었다. 수고했다는 듯 볼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는 오히려 기특함이 묻어있기까지 했다.
일방적인 문답이 시작된 것은 그 짧은 해후가 끝나고 난 뒤였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이센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로한이 나긋한 목소리를 운을 떼었다.
“분명, 간부라고 했었죠.”
“예, 예…….”
“구원교의 간부를 말하는 겁니까?”
고개가 세차게 끄덕여진다. 로한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간부’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라 못을 박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으니까.
언젠가 구원교의 간부들에 대한 정보를 얻은 적이 있었다. 악신이 존재하던 고대부터 존재한, 망령의 힘을 쓰는 일곱 간부. 그들이 일반적인 구원교의 신도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간부가 한 명이라도 관여된 이상 심상치 않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 그리고 목적. 아는 건 모조리 얘기해 보세요.”
그러니 이 남자가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먹어야겠다. 로한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속에 불타는 의지를 본 것일까. 시선을 고스란히 마주한 마이센의 몸이 포식자를 마주한 소동물처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떨린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됐다.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당장 그의 손이 가까이 다가와, 지옥 구렁텅이를 몸소 뒹굴었던 몇 분 전의 상황을 다시 재현해 줄 테니까.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가 마이센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 이 마을에는 원래부터 신앙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걸 이용했다는 겁니까?”
“네, 네… 제가 마을 사람들을 오랜 시간 선동, 흡. 선동해 왔습니다. 다만 계획이 시작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마치 어떻게든 변명을 주워 삼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눈을 굴려 눈치를 보던 그가 급히 덧붙였다.
“그, 그래도 확실한 건 다 알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묻지 않았음에도 이런저런 사족으로 살을 붙였다.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건네는 정보 대부분은 쓸데없이 장황하기만 했다.
“당신이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는 정보가 없다면…….”
로한이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뒷말을 아꼈지만 그 누가 보더라도 이후에 이어질 말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곱게 휘어진 눈매와는 다르게 웃음 한 점 맺혀 있지 않은 입술을 본 마이센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자, 장치!”
“장치?”
“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이번 계획의 주축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해요! 이번에 본교에서 새롭게 개발한 장치의 열화판이라고, 성능을 확인해 본다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아르펠은 간절함을 담고 쏟아지는 그 말에서 낯익은 표현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본교에서 새롭게 개발한 장치’라는 말에.
몇 번이고 들어본 적이 있지 않던가? 망령의 힘을 저장하고자 했던, ‘염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게 된 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마이센이 언급한 장치가 ‘염원’이 맞다는 가설을 세우니 이런저런 의문의 매듭들이 빠르게 풀렸다. 마을에 가득한 망령의 기운, 특히나 기운이 짙었던 숲속,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망령의 힘까지…….
만약 그것이 단순히 ‘저장’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흡수’까지 가능하다면 당시 아르펠이 겪었던 기묘한 현상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저주의 원인으로 보이던 안개도 모두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럼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장치의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구원교는, 마이센이 말하는 간부는 그 귀찮음을 감수했다. 긴 시간을 들여 마이센이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기를 기다린다는 수고까지 들여가면서.
“그건, 저도 잘…… 정말입니다! 제겐 성능을 확인해 보는 거라는 말 밖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둘의 눈에 의심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안 탓일까, 그의 두 눈에 억울함이 깃들었다.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로한을 대신해 먼저 운을 뗀 것은 아르펠이었다.
“몸이 많이 편해지셨나 봅니다.”
우뚝. 떨리던 마이센의 몸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거짓말을 다 하고.”
101
아르펠은 로한의 감정만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부, 극도로 진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자라면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했다. 저주받은 마검으로서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알 수 있었다.
마이센이 그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쯤은.
“크흐…… 흐흐흐!”
본심을 찔려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해서인지. 그의 입에서 반쯤 실성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겉모습과 꽤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이미 계획은 시작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영광스러운 제물이 되고, 이 땅은 신께 축복받은 땅이 되겠지!”
버럭 고성이 튀어나왔다. 절벽 끝까지 몰린 상황이 도리어 각성제 역할을 한 것일까.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얼굴, 그리고 번들거리는 눈매는 겁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대뜸 반말을 내지르는 꼴 또한 마찬가지였다.
빤히 그 행태를 지켜보던 로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함이었다.
“당신도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달라! 내겐 그분의 안배가……!”
마구잡이로 말을 내뱉고 있던 도중이었다. 아르펠에게서 무언가를,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마이센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목도한 것처럼 두 눈이 커다랗게 뜨이기까지 했다.
“이거 말하는 건가.”
그의 적나라한 시선을 느낀 아르펠이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검푸른 빛을 띠는 구슬 하나가 그의 손안에서 빛을 발했다. 익숙한 투박함을 자랑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타인의 손에 들려 있자 낯설게만 느꼈다.
“……어라?”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 그럴… 그럴 리가.”
새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얼굴이 몇 번이고 현실을 부정했다. 가만히 그 꼴을 바라보던 아르펠이 손을 움직였다. 구슬을 쥔 채로 위아래로 움직이고, 옆으로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마이센의 시선이 조르르 따라왔다.
종내 깨뜨려 버릴 것처럼 주먹을 꽉 쥐어 버리자 그에게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안 돼!!”
파랗게 질린 얼굴은 언뜻 보면 보랏빛으로 보일 정도로 색이 짙어져 있었다. 발작이라도 하는 듯 몸을 뒤틀고 숨을 할딱거리는 얼굴은 완연한 공포의 기색을 띤 지 오래였다.
두려움. 그의 두 눈에 서려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르펠의 손에 있던 구슬을 대신 받아든 로한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자였기에 심문했을 뿐 목숨을 쥐고 흔들 수는 없던 이전과 다르게, 이제는 이쪽에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넘어와 있었다. 상황이 급변한 셈이다.
“이게 없으면 당신도 제물이 될 텐데, 이제 좀 말할 마음이 들었나요?”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힌 사람처럼 완전히 넋을 놓은 얼굴이었다. 가볍게 구슬을 흔들어 보이자 그나마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뭐, 뭐든……!”
뭐든 하겠다. 뭐든 말하겠다. 마이센의 눈빛에 선명한 의지가 서렸다. 조그마한 희망에 매달리는 것처럼 안광이 번들거리기까지 했다.
그림자에 묶인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바닥에 납작 엎드리기까지 하는 것에 로한이 입을 다물었다. 말이 엎드렸다지, 팔도 다리도 쓰지 못하는 마당에 몸을 냉큼 뉘었으니 바닥을 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갑작스레 돌변하며 소리를 질러댔던 것은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확신 때문이었는지,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꼴은 비굴하다 못해 처참했다. 살기 위해 하는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순된 자였다. 제물이라며, 축복이라며 떠들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정작 자신이 같은 꼴을 당할 처지가 되니 살려달라며 빌빌대는 것에, 로한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어렸다.
“이 마을을 망령의 땅으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발뺌했던 목적을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망령의 땅으로 만들겠다’라는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탓에 미묘히 미간 사이를 구기던 로한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디선가 짙은, 끔찍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히익!”
그 변화를 아르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얼음장 같던 표정이 더 차갑게 굳으며 로한과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덩달아 울리는 겁에 잔뜩 질린 마이센의 목소리까지.
“대, 대답! 대답했잖습니까! 빨리 구슬을…!”
그림자에 단단히 묶인 처지라는 것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거세게 몸부림치는 마이센의 피부 위로 잔상처가 끊임없이 새겨졌다. 그럼에도 그는 몸을 뒤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의 통증보단 코앞에 다가온 거대한 공포에 휘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챙그랑―!
이윽고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청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소음 하나 때문에.
심각한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로한도 아르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구슬을 내어달라며 애원하던 마이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 넘기며, 아르펠은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아무런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방금 전까지 멀쩡히 들려 있던 구슬이 어느 샌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 하하하!”
작위적인 광소가 한아름 터졌다. 허탈한 감정이 줄기줄기 맺혀 있는 웃음이었다.
“날… 날 속였어! 속였다고! 으아아악!!!”
휙 돌아간 시선이 정확히 아르펠을 향했다. 눈을 얼마나 부릅떴는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눈동자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안색을 벌겋게 붉힌 채 미친 듯이 몸만 뒤트는 꼴이 흡사 광인(狂人)과 다름없었다.
몸을 묶고 있는 그림자가 풀리면 금방이라도 아르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것이 로한의 신경을 거슬렀다.
그냥 기절시켜 버릴까. 무기질한 눈이 그런 생각을 머금었을 때였다.
“……끄륵!”
괴성을 지르던 마이센의 몸이 뒤틀렸다. 거짓말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잔뜩 커다래진 눈동자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눈앞의 남자가 기절하는 광경은 아르펠의 눈에 천천히, 아주 낱낱이 보였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기절의 이면에는 뚜렷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쯤은.
기운이 뭉쳐 뚜렷한 선을 만든다. 정말로 두 눈에 보이는 선은 아니지만, 그 기운을 누구보다 선명히 느낄 수 있는 아르펠은 그것을 선(線)이라 명명했다. 정확히 마이센의 목 뒤에 마수를 뻗친 것이 그의 몸을 타고 거미줄처럼 촘촘히 번져가고 있었다.
“일단 나가 봐요.”
그 변화를 인식한 건 로한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마이센의 몸을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응시하던 로한이 바깥을 향해 고갯짓했다.
조금 전 마을 일대를 휩쓸었던 강대한 기운. 그것이 연관된 거라면 단순히 마이센만으로 끝날 리는 없다.
촌장의 집을 빠르게 뛰쳐나오기도 잠시, 둘의 걸음이 멈췄다. 데구르르 굴러와 발치에 부딪히는 빛깔 좋은 사과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의 이질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것이 굴러온 방향으로 느릿하게 고개가 돌아갔다.
엎어져 있는 과일 바구니와 그 옆에 쓰러진 여인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 물건을 팔던 상인들, 소소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듯하던 청년들,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던 추측이 사실이 된 것이다.
꼭 감긴 두 눈과 평화로워 보이는 표정, 쌔근쌔근 흘러나오는 숨소리는 영락없이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을 닮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한날한시, 동시에 잠들어 버렸으며…… 그들에게서 망령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일 테다.
“아르펠, 하늘이….”
“…응. 보고 있어.”
하늘이 어두워진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사특한 기운이 먹구름처럼 하늘 한가운데에 뭉쳤다. 빛 한 점 통하지 않는 것이 서서히 태양을 가렸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점차 거뭇한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광경이 온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에 맺혀 무서운 기세로 팽창하던 검푸른 구체는 이윽고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갈래갈래 찢어진 덩어리들이 하늘 위를 떠돌았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조금씩 크게, 더 크게… 마치 까만 유령을 연상시키는 것이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며 커다란 원을 그려 냈다.
마침내 그것들이 반구 형태를 띠며 마을을 감쌌다. 그렇게, 망령으로 된 거대한 장막이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 * *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예. 다 같이 들어가면 괜한 경계심만 살 겁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 두 분도 그런 걸 원하시진 않겠죠.”
오웬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두 분도 원하지 않을 거다’라는 단호한 말 때문일까, 걱정 반, 불만스러움 반을 담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던 상대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까지만 들어가면 안 될까요?”
물론, 그건 몇 초도 되지 않았다. 꿋꿋하게 손을 들고 얘기하는 이에 오웬의 낯에 선명한 피로감이 서렸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가 뒤쪽에 서 있는 또 다른 인영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레리아나 님이 오시면 다른 한 분도 같이 딸려오지 않습니까.”
“시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 안 되겠지?”
“안 됩니다. 제 임무는 레리아나 님의 호위니까요.”
“쳇.”
그랬다. 오웬의 앞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레리아나였다.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카시아는 둘째 치고, 뒤쪽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신관들은 어디 전쟁을 앞둔 모습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102
그 모습을 보며 오웬은 나지막한 한숨을 입에 머금었다. 주변 신전에 협력을 요청하겠다고 나섰건만,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신관들의 너머, 며칠 전 직접 걸음했던 신전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다른 곳으로 파견을 나간 신관이 많아 인력이 부족하다… 별 같잖은 핑계를 대가며 발뺌하는 꼴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들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모른 척하고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제대로 마무리해야겠어.’
당시에는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빠르게 협력을 구하는 것이 급했기에, 오웬은 망설임 없이 그 신전을 떠났었다. 그렇게 다른 지역의 신전으로 이동하다 만난 것이 레리아나와 그녀를 따르는 신관들이었다.
‘어, 오웬 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그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오웬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이동하는 데 시간을 소비할 바에야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낫겠다고.
‘천신께서 계시를…….’
얼마 안 가 그들이 향하던 목적지가 같은 곳이었음을 깨달았다. 마신이 계시를 내렸던 것처럼 천신 역시 계시를 내린 것이다.
또래와 다를 것 없는 활기찬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레리아나를 꽤 오랜만에 본 오웬은 그녀가 변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생기가 넘치는 눈은 한편으론 번듯한 검사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돌아온 베모스 마을의 근처, 마을 안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던 오웬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건…….”
사기(死氣)를 닮은 불길한 기운. 그것이 멀지 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등골이 저절로 오싹해지고 소름이 타고 올라올 정도의 무언가에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 기운의 진원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짙고 빽빽하게 차오른 기운이 그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탓도 있었으나, 그곳이 그들의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베모스 마을. 그 기이한 공기는 그곳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함께 가 봐야겠네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레리아나에게서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를 막아 세우는 이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마을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작게 침음을 내뱉은 오웬 또한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눈에 미약한 걱정과 불안이 어렸다. 마을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미지의 현상을 마주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잃어버린 땅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혹시 이 땅에….”
“하늘에 뭔가가 있습니다!”
검을 갈무리한 카시아가 오웬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전투를 하러 뛰쳐나갈 것처럼, 칼날과 같이 벼려진 눈을 하던 그녀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의 목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 위로 검푸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맹렬한 기세로 부풀던 것이 펑 터지며 잘게 쪼개지고, 어슬렁거리며 공중을 떠돌아다니던 것은 점차 아래로 내려오며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기까지 했다. 마치 거대한 검은색 커튼으로 사방을 감싸 버린 것만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저거 설마…… 망령이야?”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꿈결을 헤매는 것 같은 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말에 담긴 감정에 공감했다. 그만큼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은 여태까지의 상식을 완벽히 벗어나고 있었으니까.
마을을 감싼 커다란 장막은 검푸른 덩어리 무리가 빙글빙글 돌며 만들어 낸 것이었다. 하나하나가 괴이한 기운을 흩뿌렸으며, 그것이 내뱉는 소리는 귀곡성을 닮았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불쾌한 감각이 자연스레 몸집을 불렸다.
감히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짙은 어둠과,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선명한 망령의 기운. 멍하니 그 꼴을 바라보던 레리아나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저 안에…….”
그 둘이 있다고?
충격은 짧았고, 고뇌는 더더욱 짧았다. 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는 상념을 털어 버리고 곧바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모여든 찬란한 성력이 마침내 거대한 대검 하나를 토해 낸다. 군살이 잘게 박힌 손이 그것을 거침없이 붙잡았다.
“당장 진입하겠습니다.”
흩날리는 꽃잎을 모아 곱게 찧어 색깔을 낸 것 같은 포근한 분홍빛 눈동자에 날카로운 한풍이 불었다.
떨림 한 점 없는 검 끝이 정확히 베모스 마을을 향했다. 어쩌면, 그간의 노력은 모두 오늘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레리아나는 숨을 죽여 다짐했다. 비로소 오늘, 그놈을 따라잡는 것은 물론 고맙다는 말까지 꼭 듣고 말겠노라고.
* * *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자 남은 것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안을 비추는 빛이라곤 가게나 집에 켜진 희미한 불빛 말고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밤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렇게 밤이 된 마을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넘실거리는 어둠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모조리 먹어치운 것만 같았다.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이 망령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채자 아르펠의 얼굴은 빠르게 구겨졌다. 저 시커먼 것들이 가져다주는 감각이 다름 아닌 익숙함이라는 사실에 묘한 불쾌함이 올라왔다.
“쓰러진 사람들을 깨울 방법은 없을 것 같아요.”
그사이 침착히 상황을 판단한 로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바닥을 나뒹굴다시피 쓰러져 있는 마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마을의 중앙인 이곳뿐만이 아니라, 마을 곳곳에 같은 증상을 겪는 이들이 넘쳐나겠지.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저주’, 그들이 신의 벌이라고 모양 좋게 포장했던 것과 같은 증상을 내보이고 있었다. 속 편하게 신만을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이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마이센 또한 그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몸 안에 움터 있는 망령의 기운이 갈수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을 확인한 로한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기행을 벌일 수 있는 이는 하나뿐이다. 마이센의 상관이라고 했던, 구원교의 간부.
「이거… 참 의외로군.」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는 누군가의 음성이라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또각, 또각. 들릴 리가 없는 커다란 발걸음 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가진 것이 공기를 잘게 흔들었다.
무시할 수 없는, 피부를 따끔하게 만들 정도의 기척이 피어오른다. 여태 만났던 상대 중에서도 그 누구보다 강렬한, 소름 끼칠 정도로 짙은 기운을 품은 존재에게선 본인을 숨기고자 하는 기색이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그 오만함을 문제 삼을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기백이 그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일 테다.
「둘 모두에게서 마력이 느껴지는구나. 신전의 끄나풀인가… 쯧.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번 기회에 치워 버리길 잘했어.」
온몸을 뒤덮은 펑퍼짐한 옷, 그리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기괴한 가면. 피부를 내보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퍽 강박적이기까지 한 옷차림새였다. 펄럭거리는 옷을 휘감은 채로 느릿하게 걸음 하는 모습에 지독한 나태가 배어 있는 듯했다.
「그래서.」
순간, 가면 사이에 자리한 눈동자에 선명한 불길이 일었다.
「그릇은 누구지?」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배짱 한 번 좋은 아이구나. 날 앞에 두고서도 모른 척을 할 줄이야.」
가면 너머의 얼굴이 한껏 미소를 짓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질 즈음, 아르펠이 그를 붙잡았다.
“조심해. 저 남자는 달라.”
“알고 있어요. 간부라고 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손을 내려다보는 눈이 복잡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의 끝이 조금이지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심코 그런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공포’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직감이.
구원교의 간부는 ‘망령’을 직접 몸에 받아들인 자들. 같은 계열의 힘을 가지고 있는 아르펠이기에 누구보다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망령보다 배는 끔찍한 존재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망령의 기운에서 지독한 피 냄새가 났다. 그가 수도 없이 피바람을 몰고 다녔음을 증명하는 잔향이었다.
“위험할지도 몰라.”
물론, 아르펠이 차원이 다른 힘을 목도했다고 해서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명한 공포를 느낀 것은 이곳에 있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서 있는 로한이,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결국 마을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이곳을 지키리라는 사실을 알아서일지도 몰랐다.
상처 입는다면, 다친다면, 혹여나 죽기라도 한다면……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이 끊임없이 최악의 미래를 그렸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는 로한이 아르펠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괜찮아요, 아르펠.”
작은 속삭임을 가져다주는 목소리가 온화했다. 나직이 퍼지는 웃음소리가 곱기만 하다. 마치 자기를 믿어 달라는 것처럼, 그렇게.
“곧 있으면 오웬이 다른 사람들을 데려올 테니까요. 그 전까지만 혼자서 버티면 돼요.”
“……응, 알았어.”
머뭇거리는 시간은 짧았다. 결국 아르펠은 로한의 의지대로 인간의 외형을 포기하고 검으로 되돌아가기를 택했다.
긴장, 떨림, 그리고 책임감. 그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르펠은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사람이 온다고 달라져?’
그래 봤자 제일 강한 건 너일 텐데. 가장 앞장서서 싸우는 것도, 제일 많이 다치는 것도 너일 게 분명한데.
하지만 굳건한 눈을 마주한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 단단한 눈빛이 몸을 옭아매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네가 다치는 게 싫다는 한 마디조차 내뱉지 못했다. 그러니 아르펠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호오.」
저 괴물에게서 로한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했다.
103
「검, 검이라…. 어째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만.」
남자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일었다. 바라마지 않던 것을 갑작스레 선물 받은 것처럼 어딘가 상기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때 교에 넘어왔던 그 마검이었나. 분명 실험은 실패라 들었었는데…… 하아. 사람이 되는 신비로운 능력이라니, 당장이라도 연구해 보고 싶구나. 아니, 안 될 말이지. 소중한 그릇에게 그래서는 안 돼.」
하아. 진득한 숨소리와 함께 인간 같지 않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숨결에 배어 있는 선명한 들뜸과 황홀함은 불쾌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이보다 완벽한 그릇은 없겠어. 잡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게 아쉽긴 하다만, 그릇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감수해야겠지. 모든 일이 끝나고 그분의 힘을 빌려 흔적을 지워 버리면 그만.」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남자는 그리 말했다.
마을 전체를 웅웅 울리던 기이한 음성이 차츰 커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알 수 없는 힘에 공명하는 소리가 무거워지고, 공기의 떨림이 심해진다.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그를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만 같았다.
“자꾸 헛소리만 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압박감도 로한을 꺾지는 못했다.
마을이 이 지경이 되고, 간부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긴장한 기색이 도드라졌던 로한의 눈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살짝 내리깔린 채 바닥을 응시하는 시선에 차곡차곡 살의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를 넘길 일은 없어.”
아르펠을 ‘그릇’이라 칭하는 것부터 연구를 운운하고, 함께 가자는 망발을 늘어놓는 것까지. 무엇 하나 거슬리지 않는 말이 없었다. 검 손잡이를 느리게 놓았다 쥐는 행동에 진한 분노가 묻어났다.
꿈결을 헤매기라도 하는 듯 몽롱했던 가면 너머의 눈이 싸늘하게 굳었다. ‘인간’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텅 빈 눈동자가 뚫어져라 로한을 시야에 담았다.
「내놓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텐데도?」
본인이 질 가능성 따위는 조금도 점치지 않는 오만한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그것이 영원불변할 자연의 이치라는 것처럼.
로한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기만 했다. 그의 발이 닿은 곳부터 시작해 새까만 영역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물감을 풀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이 번지는 기이한 광경에 가면을 쓴 남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세를 불려 나간 검은 그림자가 마침내 바닥에 쓰러진 이들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이내 로한을 중심으로 선명한 파문이 일었다.
작은 물결로 시작한 것은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파도가 되었고, 그 파도는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군.」
그림자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의 중앙이 눈 깜짝할 새에 텅 비었다. 무감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본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싸워 본 게 언제였던가. 그 아득한 기억이 기세 좋게 제게 덤비는 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고, 남자는 순순히 그 충동에 몸을 맡겼다. 로한의 주위로 심상치 않은 기세가 휘몰아치는 걸 보았음에도 그랬다.
이것은 일종의 변덕이자 자비였고, 호기심이었다. 그분의 대척점에 있는 주제에 그 힘의 편린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검을 감싸는 태도라니.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새로운 군상에 참을 수 없는 흥미를 느꼈다.
「신기한 힘이기는 하나… 알고 있을 텐데? 그것들과 이어진 힘은 끊어지지 않았다.」
“알고 있어.”
검을 틀어쥔 로한이 태연히 대답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림자의 영역에 가라앉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망령의 힘에 묶여 있다는 것을. 도리어 그들이 그림자의 안에 있기에 그 사실이 더욱 잘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사방을 감싼 어둠이 모든 것을 보여 줬다. 새하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 의식을 잃은 사람들의 몸에 실처럼 얇디얇은 무언가가 거미줄처럼 감겨 있는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실의 끝은 괴이한 외형의 남자에게 닿아 있었다.
그럼에도 로한이 태연한 것은, 애초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망령의 힘을 끊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한은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전력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필시 의식을 잃어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눈먼 공격에 크게 다치고 죽어 나갈 터.
제아무리 좋은 감정이 들지 않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다. 등 뒤에 두고 보호해야 할 사람이 늘어나면 곤란해지는 것은 이쪽이었으니,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뒤늦게 상대의 목적을 알아챈 탓이다. 넓게 펼쳐진 기감이 저 멀리, 마을의 구석진 부근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기척을 눈치챘다.
「나약하고, 어리석으나…… 나쁘지 않아. 오히려 아깝군. 잡신의 축복을 받지만 않았더라면 내 친히 그릇과 함께 너를 거두어 갔을 것을.」
끄흐흐. 성대를 쥐어짜는 것만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으로 약하게 느껴지는 검의 떨림에 숨을 느릿하게 내뱉었다.
“아르펠.”
짤막한 속삭임.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라기보단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며 건넨 작은 위로에 가까웠다.
남자가 밟은 땅이 망령의 힘에 의해 오염되는 순간, 로한이 그를 향해 뛰쳐나갔다.
마력으로 강화한 몸이 검은빛을 흩뿌리며 빛살 같은 속도로 남자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비스듬히 내리그어진 검이 쾌(快)의 극을 담아 커다랗게 반원을 그려냈다. 검 끝에 무언가가 걸리고, 날카로운 검날이 그것을 단숨에 베어버린 순간.
<뒤!>
머릿속에 꽂히는 토막 난 외침에 반응한 로한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코앞에 들이닥친 검은 손아귀를 단숨에 베었다.
「대화도 할 수 있는 건가?」
짧은 대화에서 오고 간 힘의 파동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가면 속의 눈이 흥미로움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내보였다.
딱 한 번의 공방. 그것만으로도 눈앞에 있는 상대의 격을 느꼈다. 흘끗, 뒤를 돌아본 시선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검은 손아귀가 비쳤다. 로한이 벤 것은 남자가 아닌 그가 바꿔치기한 검은 손이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남자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오염된 땅 아래에서 하나둘씩 검은 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끈적한 망령의 기운을 줄줄 흘리는 것이 먹잇감을 찾으려는 듯 몇 번이고 꿈틀거렸다.
로한은 입을 열지도,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당황해하지도 않았다. 칼날처럼 벼려진 날카로운 눈동자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그의 몸은 검푸른 대지의 안쪽으로 쏘아졌다.
「크흐흐!」
즐거워 마지않는 웃음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몸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망령의 손이 튀어나와 진로를 방해했다. 그 걸림돌을 모조리 베어낸 검이 마침내 남자에게 닿았으나 거짓말처럼 그의 몸이 뒤에서 나타났다.
남자는 바닥에서 뻗어 나온 손아귀를 이용해 공격하거나 몸을 피하기만 했다. 숨기지 않은 웃음소리는 그가 지금의 전투를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주고받는 공방이 위협조차 되지 않는 일방적인 발악에 불과하다는 듯.
하지만 잠깐 미간을 일그러뜨릴지언정 로한이 흥분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그저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몸을 움직이고 손을 베어 냈다. 그가 베어 낸 검푸른 손아귀가 꿈틀거리다 거짓말처럼 새로 자라났음에도 그랬다.
「흐음. 무지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미련한 건가. 그렇게 해서는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다.」
남자가 혀를 쯧 찼다. 땅 위로 피어난 검푸른 손아귀들이 그의 의지에 감응에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몸을 잡아 찢어 버리겠다는 듯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에 로한은 짧게 숨을 가다듬고 몸을 움직였다.
곧장 검으로 베어 낼 줄 알았건만,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선보이며 아슬아슬하게 모든 공격을 피한다. 이윽고 로한이 남자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왔다.
「하!」
가벼운 깨달음이 곁들여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자그마한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입이 있는 곳’을 움찔거리며 웃음을 토해 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지만, 둘은 볼 줄 모르는군. 그 손은 내게 아무런 피해도…….」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손아귀를 이끌고 오는 것이 영락없이 자신마저 그 물결에 휘말리기를 바라는 꼴이었다. 만약 저것이 실체가 있는 손이라면 그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것은 자신에게 복속된 망령의 힘이었다.
수많은 망령의 손은 그저 로한만을 노릴 뿐 주변에 무엇이 있든 신경 쓰지 않으며 움직였다. 그중 하나가 남자의 몸을 스쳐 지나갔지만, 몸에 닿는 순간 안개처럼 흩어져 형태를 잃었다.
보란 듯 비소를 터뜨리던 찰나, 남자는 로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음을 깨달았다.
키이이잉!
그를 뒤따르는 알 수 없는 소음. 그 소음의 진원지를 본능적으로 찾은 남자는 자신이 소환해 낸 모든 손의 안쪽에서 그 불길한 소리가 새어 나왔음을 깨달았다.
「이……!」
“이런 걸 오만이라고 한다지.”
일검(一劍). 그사이 남자의 코앞까지 뛰어든 로한이 검을 일직선으로 그었다. 남자의 몸이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으나 로한의 입가에 매달려 있는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남자의 본능이 그렇게 외칠 무렵.
거짓말처럼 제자리에서 멈춘 검푸른 손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갔다. 땅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폭음, 그리고 그 안쪽에서부터 빠르게 기세를 불린 마력의 폭풍이 순식간에 마을을 집어삼켰다.
폭풍이 몰아친 한가운데, 움푹 파인 구덩이 아래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로한은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아직이야. 살아 있어.>
그리 장담하는 아르펠의 목소리와 더불어 그 또한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거대한 마력의 폭풍에 대비할 틈도 없이 휩쓸렸음에도 아직 남자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104
수십 번, 수백 번 손을 베었다. 몸을 붙잡으려 뻗어 오는 손, 그리고 한데 뭉쳐 닿는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처럼 구는 거대한 손아귀까지.
그 끊임없는 굴레에 빠졌음에도 로한은 침착히 움직였고, 덕분에 불규칙적으로 파고드는 줄 알았던 손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알았다. 사실 규칙보다는 ‘빈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긴 했다.
검푸른 손아귀는 베어 버리더라도 그 절단면에서 재생했다. 특이한 점은, 모든 손이 재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력의 여부.’
그 차이점은 마력의 여부에서부터 비롯됐다.
마력으로 ‘몸’만 강화해 손을 베어 버리면 절단면에서 손이 다시 재생되었다. 하지만 ‘검’에 마력을 담아 손을 벨 경우, 베인 손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손이 생겨났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이유가 두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마력이 닿았을 경우 재생하지 못하거나, 혹은 재생을 하더라도 마력이 사라지지 않아 조종할 수 없거나.
마력을 품은 칼날이 스치는 순간 재생하기 위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부자연스럽게 멈춘 손의 단면을 직접 보았기에 가질 수 있는 의구심이었다.
그런 의문을 가졌을 때 아르펠이 말했다.
<로한. 검에 마력을 불어넣어.>
몇 번이고 해 본, 별달라진 점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로한은 아무런 불평 없이 순순히 아르펠의 말을 따랐다. 새까만 검신에 마력이 휘몰아치며 색이 조금 더 짙어졌다. 밤하늘을 고스란히 칼날 위에 걸어 놓은 것만 같은 고고한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 색이 조금이지만 변하는 순간.
로한은 벼락처럼 몸을 움직이며 여전히 자신을 노리는 손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휘날렸으나, 베였던 손들은 어느 순간 재생해 원래의 모습을 빠르게 되찾았다.
누군가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절망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포기하고 순순히 검푸른 손아귀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한은 아니었다. 수도 없이 손을 베고, 남자에 의해 공격이 한층 더 매서워지는 순간 발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전신에 골고루 퍼져 있던 마력이 한곳에 모이며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
마침내 남자에게 다다른 순간, 바라던 대로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오해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콰아아앙―!
직후 마력의 폭발이 일대를 휩쓸었다. 주변에 있던 집 몇 채가 갈기갈기 찢겨 날아가자 말 그대로 폐허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역시…… 대단해.’
권능이 담겨 있는 마력의 폭풍은 로한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저 거센 바람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전, 로한에게 의견을 전한 아르펠은 마력을 머금은 칼날에 ‘망령’의 힘을 덧씌웠다. 그 움직임을 느끼자마자 로한은 손을 베어 나가며 그 절단면 하나하나에 망령의 힘으로 감춘 마력을 심어 놨다.
겉을 감싸고 있는 망령의 힘으로 인해 마력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손들은 고스란히 재생했다. 일종의 시한폭탄이 된 셈이었다.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남자는 폭발에 휩쓸렸다. 그러니 대단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아르펠은 본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활용해 상황을 헤쳐 나갈 묘책을 세웠으니까.
「끄으윽…….」
움푹 팬 구덩이 속에서 짧은 신음이 들려왔다. 로한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야 한다. 아니, 버티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저 남자를 꺾어야만 아르펠을 지킬 수 있을 테니.
피어오른 흙먼지가 어느 정도 가시자 안쪽의 모습이 대충이나마 눈에 들어왔다.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당연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일 공격을 ‘망령’의 힘을 품은 그가 정면으로 맞았으니까.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이 용할 수준이었다.
저것의 목을 베어야 한다. 로한의 두 눈에 살기가 어리고, 그의 몸이 구덩이 안쪽으로 움직였다. 정확히는 움직이려 했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말라고요?”
<그래. 저건…….>
부르르. 새까만 검신이 짧게 떨렸다. 그 선명한 떨림에 로한이 눈매를 좁혔다. 아르펠의 감정을 읽어 내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훤히 알 수 있었던 탓이다.
아르펠은 지금, 불안해하고 있었다.
「흐, 끄흑. 대단해, 대단해…….」
괴로움에 흘리는 신음인지, 그것도 아니면 즐거움에 토해 내는 웃음인지. 잔뜩 뒤섞여 제대로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의미 모를 음성을 흘린 남자가 짧은 감상을 덧붙였다.
위기감 하나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상, 폭발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권태로움을 집어던진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언뜻 보면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 같았으나, 로한은 그를 향해 움직이지 못했다. 아르펠의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본능마저도 함께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에게. 저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가면이….’
찬찬히 남자의 모습을 살피던 와중 한 줄기 위화감이 고개를 들었다. 갈가리 찢겨 엉망진창이 되고, 먼지를 뒤집어써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는 옷과 달리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채 멀쩡한 가면. 그것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케헥, ‘시험’해 보다 이렇게 당한 게 얼마 만인지. 아깝다, 아까워…… 하찮은 몸으로도 그런 힘을 내다니. 그 껍데기를 벗어던지기만 하더라도 하늘에 닿을 수 있을 텐데.」
망령의 벽으로 틀어막혀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던 눈이 휘리릭 돌아가 로한을 응시했다.
「아이야.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너라면 나와 함께 갈 자격이 있다.」
남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담은 것만 같은 어조에도 로한은 입을 가만히 다물고만 있었다.
대신, 그 제안의 답을 들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닥에서 치솟은 수많은 그림자의 가시가 남자의 몸을 꿰뚫었다. 섬뜩한 소리가 뒤따랐으나 고통 어린 신음도,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것만 같다는 착각마저 드는 찰나.
빠지직.
어디선가 낯선 소음 하나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로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면에 금이 갔다.
***
건물은 형체라도 남았던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검게 물든 대지는 끊임없이 같은 색의 안개를 토해 냈다. 마력으로 몸을 보호한 로한에게는 닿지 않았으나, 마을을 둘러싼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는 것만큼은 자명했다.
“크윽……!”
발을 내디딜 때마다 뒤쪽의 땅이 움푹움푹 파였다. 쿠웅, 쿵. 덩달아 울리는 커다란 소음까지 뒤따랐다.
몸을 옆으로 비틀자마자 원래 로한이 있던 자리를 무언가가 덮쳤다. 무서운 속도로 내리친 검이 바닥에 반쯤 꽂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검푸른 촉수 한 가닥을 베었다.
땅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솟구쳤다. 날카로운 가시로 변모한 것이 수많은 촉수를 꿰뚫고, 그중 일부는 늪지처럼 변해 촉수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움직임을 막았다. 가볍게 숨을 들이켠 로한이 그것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편의 검무(劍舞)처럼, 가히 예술적인 움직임이다.
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방대한 마력이 물결을 그리며 파도처럼 촉수들을 휩쓸었고, 공기 중에 움틀 거리던 망령의 힘 또한 모조리 몰아냈다.
먹구름이 걷히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 끝나자 그 아래로 촉수 가닥이 우수수 떨어졌다. 빗방울이라도 된 것처럼 우수수 추락하는 것들이 괴상하기 짝이 없었으나, 정작 로한은 그 광경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흐읍!”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비스듬히 그은 또 한 번의 검격은 하늘을 가를 듯한 거대한 검기를 만들어 냈다. 방대한 마력과 권능이 뒤섞인 것이 일대를 가루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소용없다.」
일전에 꺾었던 그림자의 손처럼 이 촉수 역시 끝도 없이 재생하는 존재였다. 같은 수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 조금이라도 공격을 받으면 완전히 소멸했다가 다시 재생되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고마워요.”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짧은 틈. 검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마력이 떨어졌던 체력과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좋다. 로한이 부드러이 웃어 보이며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눈이 위쪽을 향했다.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남자. 아니,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는 온몸에서 돋아난 수많은 촉수로 로한을 노리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하는 옷의 구멍에서 시작되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검푸른 촉수의 물결. 상황이 이리 변한 것은 저것이 쓰고 있던 가면이 깨진 직후였다.
‘인간이 아니다.’
촉수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시점부터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테지만, 가면이 벗겨진 후 확실히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저것이 내는 목소리가 기이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로는 낼 수 없는 공기의 떨림을 자아내고,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내뱉는 웅웅 울리는 음성. 그 비인간적인 목소리의 원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저것에게는 입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건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그 외에는 ‘사람’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피부는 녹아내렸으며, 코의 형태는 뭉개져 있었고, 입술은 피부와 함께 완전히 녹아 버린 건지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사지에서 뻗어 나온 촉수까지.
그것이 구원교가 그토록 찬양하는, 망령을 몸에 받아들인 일곱 간부의 정체였다.
105
눈앞의 존재는 인간보다는 망령이, 망령보다는 괴물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로한은 마을의 구석진 곳에 널브러져 있을 마이센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구원교에서 그토록 ‘영웅’이라 부르짖던 간부들이 이런 끔찍한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아니, 확실히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알았다면 진작 마을에서 도망치고도 남았겠지.
이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끔찍한 것을 목도하면 혐오감을 느끼고, 불쾌함을 호소하며, 그것이 극에 다다르면 두려움에 질리는 인간의 본능.
<오른쪽 뒤에 다섯, 그 위로 세 개.>
보다 효율적인 움직임, 그리고 체력의 안배를 위해 로한은 주위에 퍼뜨려 놓았던 마력을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다가오는 모든 것의 기척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었건만, 마력을 끌어모으는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에게는 대신 눈이 되어 줄 존재가 있었기에.
로한은 아르펠의 말을 듣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발끝에 마력이 모이고, 땅을 밀쳐낸다. 왼쪽 위로 크게 도약한 몸은 위에서 짓쳐 드는 촉수를 깔끔하게 쳐내었다. 완전히 베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검면으로 그것을 후려쳐 공중에서 경로를 틀어 버리는 행동은 가히 유려하기까지 했다.
“후우…….”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직후 입술 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마력을 운용하고, 몸을 격하게 움직였으니 슬슬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는 몸이 아니라 정신이 지쳤다. 무서운 속도로 옆을 꿰뚫고 들어오는 촉수 다발을 빠르게 베어 낸 로한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베어 내고, 또 베어 낸다. 하지만 계속 베어 낸다 한들 촉수는 끊임없이 재생했다.
아무런 진척도 없이 상황이 반복되자 제아무리 로한이라 하더라도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힘이 무한대일 리는 없는데…….’
이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재생하는 것을 마음껏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안에 망령의 힘을 품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본체, 즉 하늘에 떠서 촉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는 놈이 재생을 위한 기운을 공급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힘을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수십 가닥의 촉수가 쉴 틈을 주지 않고 공세를 퍼붓는 와중에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풀어만 갔다. 우웅, 검이 짧게 떨리기 전까지는.
<로한. 오른쪽 다리에 살짝 두꺼운 부분, 보여?>
날아드는 촉수의 방향과 개수를 알려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아르펠이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반사적으로 그가 말한 부위로 시선을 돌린 로한이 미간을 좁혔다.
표현할 말이 없어 ‘다리’라 말하긴 했으나, 그것은 차마 사람의 다리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망측했다. 꿈틀거리는 촉수 수백 가닥이 엮여 커다란 기둥 같은 것을 만들고, 다리가 있어야 하는 곳을 대신 채워 공중에 떠오른 간부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저길 베면 되는 거죠?”
<응. 정확히는 더 안쪽.>
“해 볼게요.”
긴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아르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깨달았다는 듯, 로한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택했다. 태세를 갖춘 그의 검이 날카롭게 빛을 발하며 위쪽에서 쏟아지다시피 내리찍는 촉수 무더기를 단번에 갈라 버렸다. 동시에 그의 움직임 또한 한껏 고조됐다.
권능이 휘감긴 새까만 칼날이 다가오는 촉수를 사정없이 찢어발긴다. 이윽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유연히 피했으나, 그 모든 것을 상처 하나 없이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핏― 미세한 소음과 함께 로한의 볼에 얇은 실선이 생겼다. 머리를 공격하는 촉수 하나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난 작은 상처에 불과했으나, 아르펠의 불안함을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나도 뭔가를….’
도와야 하는데.
로한에게 닿지 못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무의식을 맴돌았다.
로한을 처음 만나 그를 신전에 데려가기 전까지는 보호자로서, 또 신전에 도착한 이후에는 검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그의 곁을 지켰다.
마침내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이자 계약자가 되었건만,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를 지키고 가르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검이 되어 힘을 주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마음이 타들어 갔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내재되어 있는 마력으로 간간이 몸을 회복시켜 주는 것뿐. 그것조차 미미해서 도움이 되는지 확실치 않았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상처가 점점 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지 않나.
이럴 거면 차라리, 계약을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머릿속을 좀먹던 불안감이 그런 생각마저 토해 냈을 무렵.
멈추지 않고 몸을 움직인 로한은 어느샌가 아르펠이 말했던 그곳에 다다라 있었다.
마력과 권능이 한데 뒤섞이고, 검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삐를 한순간이라도 놓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사나운 기운이 검을 중심으로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주변의 촉수가 미처 반응하지도 못하는 새에 로한의 몸이 눈부신 속도로 솟구쳤다. 뒤따라 휘둘러진 검이 커다란 반월을 그리고, 강렬히 검날 주위를 맴돌던 마력이 묵직한 울음을 부르짖으며 검날에 닿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카아아앙―!
모든 것을 양단해 버릴 것처럼 매섭게 몰아치던 검격이 날카로운 소음을 뱉어 내며 멈춰 섰다. 검의 진로를 방해하는 무언가가 그 너머에 있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강대한 힘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정확히는, 사그라든 것이 아니라 일점에 모였다. 검 끝에 걸리는 것을 부숴 버리려는 것처럼.
콰지직. 이윽고 무언가 깨지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직후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나아가지 않던 검이 매서운 속도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백 가닥의 촉수가 완전히 토막 나고, 검에서 새어 나온 먹색의 파동이 세상을 물들였을 때.
<로한, 뒤!>
한껏 환해진 얼굴을 하는 로한의 뒤쪽으로 수십 개의 촉수 가닥이 내리꽂혔다. 무언가가 공기를 매섭게 가르고 다가온다는 감각, 그리고 아르펠의 외침 덕에 뒤쪽에서 공격이 날아오고 있음을 곧바로 알아챈 로한이 몸을 반 바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매끄럽게 나아간 검이 촉수를 깔끔히 갈랐다. 아르펠은 그 순간이 마냥 느리게만 느껴졌다.
더는 재생하지 못한다는 듯 다시 자라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수백 개의 촉수가 로한이 몸을 돌리자마자 꿈틀거렸다. 겉면이 끓어오르고, 거짓말처럼 새 촉수가 자라나고, 그렇게 자라난 수많은 가닥이 로한을 노렸다.
“……아.”
머지않아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뒤늦게 자신에게로 향하는 적의를 눈치채곤 반응했으나,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저것들을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르펠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수도 없이 로한의 검을 봤고, 그 누구보다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한계 역시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가까스로 몸을 돌렸으나 촉수는 코앞으로 다가온 지 오래였다. 아래로 내리고 있는 검을 최대한 빠르게 긋는다 하더라도 공격을 피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다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언젠가, 정확히는 계약하기 전 로한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누구보다 강해지고, 계약도 하고, 그렇게… 소중한 이를 있는 힘껏 지켜주고 싶다고.
비밀을 속삭이듯 자그맣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부끄럽다는 듯 발갛게 꽃물이 들었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나 그건 아르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 예쁜 말을 하는 아이가, 어렸을 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자란 로한이 소곤거리는 애정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그러니 바란 것이다.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곁에서 지키고, 종국에는 같이 스러지고 싶다고.
웃는 모습만 볼 수 있길, 남에게 상처 입지 말길, 매 순간이 행복하길. 그러기 위해선 여태껏과 마찬가지로 그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아르펠은 생각했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상황은 어떤가. 로한은 상처 입기 직전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에 아르펠은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안 돼.’
하지만 그것은 포기와 직결되지 않았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뭐라도 해서 그가 입을 피해를 줄여야 했다. 답지 않게 필사적이게 된 아르펠은 이윽고 온 힘을 다해 권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이 되어 권능의 주도권을 로한에게 넘긴 이상, 아울러 로한이 검 끝으로 펼쳐 낸 권능이 미처 갈무리되지 않은 이상 아르펠이 권능을 제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것이 변치 않을 사실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아르펠은 단 한 번도 이미 손을 떠난 권능을 다시 움직여 보려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야 해.’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로한이 다칠 테니까.
찰나의 순간, 새까만 검날이 한층 어둑한 빛을 발했다. 동시에 사방에 퍼져있던 권능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나아가려는 힘과 그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거부반응이라도 이는 것처럼 흩어지기 직전의 권능에 검은 전류가 타닥타닥 튀었다. 아르펠은 그러한 반응을 코앞에 두고서도 몸 안의 마력을 한계까지 굴리며 떠나간 권능의 안에 ‘의지’를 밀어 넣기만 했다.
로한을 지켜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삐죽삐죽 튀어 나가는 힘을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힘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권능이 점차 의지에 순응하고 궤도를 찾아가더니 마침내 아르펠의 부탁에 응한 것이다.
로한이 몸을 비틀고, 쏟아지는 촉수의 세례가 그의 옆구리를 관통하기 직전.
콰가가각!
로한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가시들이 촉수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106
비록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더라도, 로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꿰뚫린 촉수들을 다시 한번 베어 냈다. 깔끔하게 반 토막이 난 것들이 가루로 화해 사라지고 나서야 공중으로 도약했던 몸이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르펠이 한 거예요?”
<응. 미안해, 나 때문에.>
“네? 뭐가요?”
<내가 알려 준 것 때문에 다칠 뻔했잖아.>
“아니에요! 다 제가 방심해서 그런 건데….”
처음 말이 오갈 때만 하더라도 동그랗게 떠져 있던 로한의 눈이 이제는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아르펠의 발언에 당황하기라도 한 듯 두서없는 말까지 주워 삼으며 고개를 저어 댔다.
우드득,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뒤따랐다. 확실한 건, 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가 언제 베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촉수를 뒤쪽에 두고 할 만한 대화는 아니라는 점일 테다.
「흐. 아쉬워라, 아쉬워. 조금만 더 빨랐다면 완벽했을 텐데.」
위쪽에서 웃음기가 잔뜩 베인 목소리가 울렸다. 입이 있어야 하는 부위가 기이하게 비틀어지는 것을 보면 웃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로한은 그것을 굳은 낯으로 지켜보았다.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감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로한의 손안에 쥐어진 검신이 짧은 울음을 토해 내며 떨렸다.
간부가 내뱉은 말은 방금 전의 상황이 모조리 노림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에 가까웠다. 놀아났다는 생각에 알아냈던 모든 것들을 의심할 만도 하건만, 아르펠은 불쾌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침착히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아까 그 부분이 힘의 근원인 건 맞아.>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검격을 피하기 위한 대처를 따로 마련해 놓은 것이리라. 그 탓에 하마터면 로한이 다칠 뻔한 걸 생각하면 이가 저절로 갈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알아낸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 숲에 있던 그거 같아.>
힘의 근원이 내뿜는 파동을 코앞에서 느꼈다. 그랬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이 숲에 퍼져 있던 망령의 힘의 근원이자, 저에게서 힘을 빼앗아갔던 정체불명의 무언가이며, 마을에 기이한 안개를 일으켜 저주를 건 주체라는 것을.
마이센이 말한 ‘장치’도 저것일 것이다.
“몸은 안 아파요?”
<…응. 괜찮아.>
다만, 로한의 관심사는 달랐던 걸까.
곧장 심상치 않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는 반사적으로 아르펠의 몸 상태부터 살폈다. 숲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 있는 모양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당황해 잠시 머뭇대던 아르펠이 괜찮다는 확답을 쥐여 주고 나서야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차갑게 굳어 버렸다. 그 역시 떠올린 것이리라.
“염원…….”
저것이 그 ‘염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로한이 작게 읊조렸다. 마이센에게서 ‘장치’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뇌리를 맴돌던 것이 다시금 그의 입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가라앉았던 눈이 다시 원래의 빛을 머금고 정확히 앞을 응시했다. 손은 검을 바로잡고, 입술 새로 차분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널뛰던 기분도, 끊임없이 머릿속을 좀먹던 고민도 망설임 없이 치워 버린 로한이 히죽 웃고 있는 불쾌한 낯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염원이 맞든 아니든, 저것을 깨부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장치의 정확한 역할이나 기능은 그 이후 알아봐도 충분할 터.
“아르펠. 아까 그거 다시 할 수 있어요?”
<가능해.>
비록 간발의 차로 실패하긴 했으나, 이미 한 번 다다른 적이 있는 길이다. 그러니 아르펠의 도움만 있다면 전보다 쉬울 것이라고, 로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달그락, 달그락.
어디선가 불쾌한 소음이 들려왔다. 간부와의 전투로 인해 난장판이 된 마을 한복판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 그것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키힉, 키히힉.」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럼에도 로한은 시선을 옮기지 못하고 그저 휘날리는 흙먼지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 부딪히는 듯, 불규칙한 소리와 더불어 미세하게 껴 있는 작은 소음 하나가 자꾸만 귀에 거슬린 탓이었다.
마치… 그래. 땅을 내딛는 발걸음 소리를 닮았다. 그리 생각하니 흙먼지 너머에 보이는 어슴푸레한 형상이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로한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일그러졌다. 마침내 흙먼지에 가려졌던 무언가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을 때,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한데 뭉쳐 탄식처럼 쏟아져 나왔다.
끔찍함, 혐오감, 참혹함……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아르펠 또한 그런 로한의 감정을 전해 받으며 눈앞에 있는,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의 축복을 받아 영면에 든 시체는 좋은 재료가 되지. 저들도 이 사실을 알면 무척이나 기뻐할 게다. 그 쓸모없는 인생에 쓰임새를 찾아 주었으니.」
까맣게 물든 뼈가 조각조각 이어져, 해골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뼛조각이 만들어 낸 발은 터벅터벅 땅 위를 걷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소음은 착각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수많은 해골이 검푸른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텅 빈 눈이 번뜩일 때마다 그것으로부터 망령의 기운이 짙게 느껴졌다. 뼈의 위에서 일렁이는 안개 같은 것을 빤히 바라보던 로한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그들을 욕보여야 했나?”
축복을 받아 영면에 든 시체. 간부는 분명 그리 말했다. 그러니 갑자기 등장한 해골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던, 저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무덤. 분명 마이센은 죽은 이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뼈를 관의 안쪽에 모아둔다고 했다. 그렇게 모인 뼈 하나하나에 깃든 망령의 기운이 지금의 불쾌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안타깝군. 난 그들에게 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준 것뿐이다. 신께 도움이 되었으니 그들 또한 기쁘게 떠났을 테지!」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소리치는 모습에 선명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로한은 그 꼴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만의 사상에 심취해 있는 이와는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로한.>
“…알고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었다. 그저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어떻게든 가라앉히고 감내하려던 것뿐이다. 이대로 전투에 뛰어들면 동작이 단순해지고 거칠어질 게 뻔했기에.
분노가 싸움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아르펠에게 들었지 않나. 그 기억을 곱씹으니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솟구치던 살의가 한층 안정을 찾았다.
눈앞의 해골은 ‘실체를 가진’ 망령에 불과했다. 검을 바로 쥔 로한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을 파악해 나갔다.
“…쯧.”
문제는 그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뒤쪽에서 몰아치는 촉수였다. 몸을 옆으로 피하자마자 그가 있던 자리에 촉수가 내리꽂히며 살벌한 소음을 냈다. 그것을 미처 베어 버리기도 전에 또 다른 공격이 매섭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혀를 찬 로한은 결국 해골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당장 수백의 촉수를 상대하고 베어 내기에도 여념이 없는데, 이제는 저것들까지 함께 견제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역시 공격이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빽빽이 담긴 권능이 몰아친 직후 그림자가 맺혀 있는 자리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났다. 다시금 로한에게 손을 뻗던 촉수들이 그에 꿰뚫려 한꺼번에 소멸했다.
로한이 권능을 이용해 공격하면, 흩뿌려진 힘을 다시 한번 변형해 아르펠이 시간차 공격을 가한다. 실로 완벽한 연계 공격이었으며, 여태껏 축복을 받은 이들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끼어들기 시작한 해골 때문이었다.
<…장치를 부숴야 해.>
부서지면 다시 이어붙인다. 해골 또한 무한정에 가까운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즉, 촉수든 해골이든 저것들을 완벽히 제압하려면 수백의 촉수에 파묻혀 있는 장치를 정확히 부숴야만 했다.
끊임없는 악순환이다. 점점 늘어나는 공격에 사방이 틀어막혔건만, 정작 이 공격을 끝내기 위해서는 이곳을 빠져나가 힘의 근원인 장치를 깨야 하니.
‘사람이 더 있었더라면.’
이 공격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이들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가능했을 텐데. 이를 악물은 로한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콰아아앙!
기척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환한 빛으로 온몸을 휘감은 존재가 그의 앞쪽에 내리꽂혔다. 유성우라도 떨어진 것처럼 그것이 지나온 길에 환한 궤적이 남고, 그 주위에 있던 것들이 모조리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증오스러운 잡신의 종자들이……!」
수백 번의 공방에도 잃지 않았던 여유가 드디어 깨졌다. 머지않아 자신의 승리로 끝이 날 게 분명한 싸움에 갑작스레 난입한 불청객에게서 천신의 흔적이 강하게 느껴진 탓이리라.
“성녀님을 지켜라!”
“해골을 베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
“최대한 붙잡아라! 우리의 역할은 두 분께 길을 여는 것이다!”
갑작스레 난입해 촉수와 해골을 베어 버리는 성기사들을 보며 로한은 잠시 넋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성력이 몰아치니 반사적으로 아르펠부터 보호하고 봤지만, 그럼에도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각이 마냥 낯설게만 느껴졌다.
유성우를 닮은 강렬한 공격이 터진 그 지점에서 불쑥 검 하나가 솟아올랐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들 엄두도 내지 못할 거대한 대검이 가볍게 흔들린다. 퍽 익숙한 문양에 로한의 입에 헛웃음이 걸렸다.
“야! 로한!”
안 죽었냐!
하찮지만 제법 그리웠던, 지원군의 등장이었다.
107
같은 편이 늘어난 덕분에 공격이 분산되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곳이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전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해후를 나누기엔 적절치 못한 장소였다.
성력이 일대를 휩쓸 때마다 수십의 촉수가 토막 나고, 망령의 힘이 깃든 해골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눈부시기까지 한 광경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으며, 로한은 문득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거의 한 몸처럼 끼고 있던 반지가 손끝에 느껴졌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
왜 하필 그때, 많고 많은 것들 중 반지가 마음에 걸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신의 장난일지도 모르지.
손가락에 차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검의 끝부분에 걸쳐놓았다. 신전에서 출발하기 전 디오넬에게 받아 두었던 보호 아티팩트였다.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듯했지만 아티팩트이기 때문인지, 머지않아 크기가 딱 맞게 조여들었다.
<고마워.>
반지를 끼고 있는 검이라니, 굉장히 생소한 조합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아르펠의 목소리에는 미묘히 들뜬 기색이 서려 있기까지 했다. 이미 비슷한 모양새의 반지를 하나 끼고 있었으면서.
가볍게 미소 지은 로한은 검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옅게 퍼져 있는 성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 마력을 두껍게 두르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쥐새끼 같은 놈들! 이곳에 스스로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으드득, 이를 가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공격이 한층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한 발짝 내딛는 것마저 버거워하거나, 진작 공격에 당해 상처를 입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로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는 얼굴은 몇 없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이지 않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력의, 성력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날카로운 소음을 토해 내며 내리꽂히던 촉수가 그것에 휘말려 갈가리 찢기고, 검푸르게 물든 뼈는 산산이 조각났다.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치고 나가는 로한의 뒤에서, 또다시 촉수 여러 가닥이 그의 뒤를 노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커다란 성검을 쥔 레리아나의 검격 한 방에 모두 사라졌다.
이윽고 레리아나의 손끝이 옅은 황금빛을 품었다. 그곳에서부터 피어오른 기운이 그녀의 몸에 스며드는 것도 잠시, 검을 내지르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기 시작했다. 숨을 한 번 들이켜고, 검을 내지른다.
“흐읍!”
쾅, 콰앙―!
가녀린 팔목에서 나온 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굉음이 뒤따라 울려 퍼졌다.
‘이대로만 하면….’
금방 끝이 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그녀가 신관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드득. 드드득.
이상한 소음과 함께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것이 느껴졌다. 곁에서 함께 촉수를 베어 넘기고 있던 카시아가 낯을 굳히곤 크게 소리쳤다.
“땅이다! 발밑을 조심해라!”
땅을 딛고 있는 발바닥으로부터 불규칙한 진동이 전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것이 점점 선명해지고,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솟구칠 것처럼 대지가 커다란 울음을 토해 냈다.
마침내, 땅 아래에 박혀 있던 촉수가 튀어나온 순간.
땅이 크게 요동쳤으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이는 없었다. 그저 멍하니, 촉수의 끝에 잡혀 있는 것들을 응시하기만 했을 뿐.
“저건…….”
누군가에게서 볼품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 눈에는 지독한 불신이 어리고, 누구 하나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가져다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땅에서 솟아오른 것들은 곧장 하늘 높은 곳에 자리해 보란 듯이 꿈틀거렸다. 그 끝에 다름 아닌 사람을 꽁꽁 묶고서.
땅속을 헤집으며 끌려온 탓인지 흙투성이에, 이리저리 상처를 입어 엉망이 된 몸들이 하나같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카시아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의식을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점은 그들에게서 지독한 망령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시각각 몸을 갉아 먹고 있는 사기가 공기 중에 진동했다.
「키힉.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뭐할까, 이리도 나약한 것을.」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들던 촉수들을 베어 넘기던 검격이 사그라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던 신관들마저 움직임을 멈춘 탓일까. 숭덩숭덩 잘렸던 촉수들이 끈질기게 새로 자라났다.
그래. 저들은 모조리 인질이었다.
당장 사람들을 묶고 있는 촉수는 땅을 꿰뚫고, 마력으로 보호한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존재였다. 의식을 잃어 제대로 된 저항도 할 수 없는 이들의 몸을 찢는 것은 저것들에겐 일도 아닐 터.
“…젠장.”
로한이 이를 악문 채 욕설을 뇌까렸다.
인질로 잡힌 이들 중에는 익숙한 면면이 몇 있었다. 개중에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저 멀리 아른거린다. 다른 이들보다 몰골이 배는 엉망인 남자, 마이센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한 보호는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는 있었다. 애당초 의식을 잃은 이들을 그저 싸움의 여파가 닿지 않도록 마을의 변두리에 물려놓은 게 다이지 않은가.
<넌 최선을 다했어.>
어지럽게 얽혀 들어 가던 감정이 짤막한 한 마디에 거짓말처럼 풀렸다.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는 어조다.
내가 다 지켜보았노라고, 그러니 잘못 따위 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우습게도 로한은 그 말에 큰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책, 그리고 죄책감. 아르펠은 저에게로 쏟아지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 받으며 생각했다.
‘불필요한 감정.’
상대가 로한이라면 몰라도, ‘저것들’에 한해서는 가질 필요가 없는 감정이라고. 로한이 저들에게 죄책감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도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마을에 있는 내내 자신과 로한의 앞길을 방해만 했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보호할 가치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로한이 그들을 구하고 싶어 했다. 이곳에서 모두가 살아나갈, 동시에 로한이 다치지 않을 방법이 필요했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 주마.」
활짝 미소를 짓는 것처럼 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지금의 상황이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음성 하나하나에 짙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난 지금부터 저놈들의 생명력을 써서 내 몸을 회복시킬 거다. 질이 좋지 않아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쓸 맛은 있더군.」
“그게, 무슨……!”
「네놈들이 날 공격할수록, 저 벌레들이 죽어간다는 소리다.」
스산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볍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전해 준 이야기를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해 만들어진 고요함이었다.
하지만 아르펠은 알 수 있었다.
<사실이야.>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의 몸에는 생명력을 조금씩 먹어 치우는 저주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맥동하는 망령의 힘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옅은 존재감을 발했다.
확실한 건, 정확한 원리를 알 수는 없어도 저주가 간부가 말한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르펠의 확답을 들은 로한은 자신을 돌아보는 카시아를 향해 굳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겁도 없이 지옥에 발을 들인 자신을 원망해라.」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방어해라!”
수십, 수백의 촉수가 다시 매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대로 물어뜯어 버릴 것만 같은 흉포한 기세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격을 하지 못했다.
베어 내지도, 피하지도 못한다.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서서 막아 내는 것뿐이었다.
「크하하하!」
이명처럼 울리는 커다란 비웃음을 뒤로하고, 로한 또한 손끝이 아려올 정도로 묵직하게 내리치는 공격을 막아 냈다. 지금이야 막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비롯된 초조함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쯤, 문득 누군가의 시선 한 자락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것은 또렷한 분홍빛 눈동자였다. 자기를 믿어달라는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 하며, 가까이 다가가면 쐐액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빠르게 끄덕이는 고개까지.
‘내가 저주를 풀 수 있어.’
입 모양으로는 그리 주장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헛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한가득 차올랐던 초조함마저 푸쉬쉬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당장 가서 멱을 따 버리라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그어 버리는 행동이 아주 적나라했다.
<많이 컸네.>
“그러게요.”
아르펠은 그런 그녀를 보고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행동을 가려주려 애쓸 뿐 말리지 않는 다른 신관들을 보면, 레리아나는 이런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그녀의 행동을 지지받을 만큼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세 개 펴졌다. 하나씩 접혀 두 개가 되고, 하나가 되어, 마침내 세 손가락이 모두 접혔을 때.
성검이 가볍게 바닥을 찍으며, 커다란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이자, 종막의 시작을 의미하는 빛이었다.
「이 벌레들의 목숨을 신경 쓰지 않을 셈이냐. 좋다! 가증스러운 민낯을 드디어 드러내는구나!」
가소롭다는 듯 이죽거리는 놈의 목소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로한의 발끝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마치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진 것 같은 옅은 일렁임이었다. 켜켜이 마력이 쌓여 가고, 점차 그 물결이 거세져 갈 즈음.
피이이잉―!
발끝에 모인 마력이 그의 몸을 밀어줌과 동시에 사람이 땅을 박차며 난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이명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순간, 레리아나에게서 터져 나오던 빛도 사그라들었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놈의 웃음소리가 사그라든 것도, 기이하게 뒤틀려 있는 동공이 느릿하게 구르며 상황을 파악한 것도 그때였다.
108
「…이게 무슨?」
분명 인질로 잡은 놈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잡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 위선자 행세를 하는 놈들을 보란 듯이 비웃기 위해 친히 조각내 주었단 말이다. 그런데 왜, 저리도 멀쩡하단 말인가?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버러지 같은 천신 놈의 종자가아아아!」
레리아나로부터 피어오른 성력의 종착점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레리아나의 권능, ‘치유’.
그녀는 권능을 이용해 놈의 감각을 비틀었다. 그로 하여금 ‘인질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주었다’라고 착각하게끔 한 것이다.
과거, 상대를 치유하거나 강화하는 것까지가 한계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대의 몸 자체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러니 이 상황은 그녀의 노력이 쌓아 올린 틈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레리아나 님을 보호해라!”
레리아나에게 눈이 돌아간 놈은 뒤쪽에 모든 공격을 치중하고 있었다. 땅이 요동치고 뒤집히고 있음에도 신관들은 그녀의 앞을 꿋꿋하게 지켜 냈다. 그들이 제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로한 또한 그의 할 일을 해내야 했다.
‘목을 베는 것.’
앞을 노려보는 로한의 눈이 번뜩였다.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 없는 속도로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간 로한은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생각에 생각을 반복했다.
그가 원하는 검은 간단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탐욕스러운 검. 그 검으로 아르펠이 짚어 준 곳에 있는 장치를 부숴 버릴 것이다. 더 나아가, 놈의 목까지 단번에 갈라 버리리라. 그 의지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이전과 다를 것 없이 공격한다면 또다시 실패할 확률이 높을 터. 그는 아르펠의 신뢰를, 저들이 만들어 낸 기회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부수고, 물어뜯고자 하는 마력이 끊임없이 검에 불어넣어졌다. 원래도 까만빛을 띠고 있던 것이 그림자의 권능과 뒤섞이며 한층 더 짙게 물들었다.
‘부족해, 아직…!’
크게, 더 크게.
불어난 마력이 칼날을 넘어서 더 거대한 검을 형상화했다.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을 닮은 무언가가 로한의 손끝에서 현현했다.
감각이 점차 예민해지고 넓어졌다. 앞쪽에 있는 놈이 무어라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날아드는 촉수를 몸을 비틀어 피하고, 마력으로 강화한 몸을 이용해 걷어차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을까.
아래쪽에서 황금빛이 번쩍였다. 이윽고 들리는 작은 환호성에, 인질이 무사히 구출되었음을 깨달은 로한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보였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뭐해, 오만함에 패배하게 될 텐데.”
「이놈이―!!!」
작은 중얼거림에 불과한 말을 들은 것일까. 실핏줄이 잔뜩 터져 붉게 물든 놈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군림하는 자의 표본처럼 굴었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로 사라지고, 분노에 완전히 잠식된 놈은 그저 본능에 잠식되어 날뛰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이성을 잃었으면 저를 잡아먹을 위험조차 인지하지 못한단 말인가.
황금빛 눈동자에 순간 붉은 정광이 스쳐 지나갔다. 고여 있던 마력이 다시금 회오리치기 시작하며 검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돌풍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돌풍은 대기를 찢고, 커다란 공명음을 울리며, 점차 주변의 공간을 집어삼켰다.
짐승의 이빨을 형상화한, 여러 갈래로 찢어진 검기의 끝. 그곳에선 살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부분만이 이지러져 보이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
코앞으로 다가와서야 그것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뒤늦게 두 눈을 크게 뜬 놈이 수십의 촉수를 한꺼번에 쏟아 냈다. 근처의 해골을 단숨에 몰아 방패막으로 쓴다는 선택까지 해보았으나, 공격을 막지는 못했다.
「젠자아아앙!」
베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과 다르게, 로한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검을 내지르기 직전, 뒤쪽에서 솟아오른 황금빛의 기둥 덕분이었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찬란한 금빛 기둥이 단숨에 하늘을 꿰뚫었다. 그 빛줄기에 한해서만큼은 장막을 이루고 있는 망령도 몸을 물려서일까. 좁은 틈새 사이로 햇빛이 떨어지며 신비롭고 황홀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마을 사람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저주가 풀렸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로한은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눈부신 역광과 대비되는 새까만 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를 닮은 것이 놈의 다리를 노렸다. 막아서는 촉수를 가르고, 해골을 토막 내며, 다리의 아래서부터 수백의 촉수를 산산이 부숴 버리면서.
「크아아아악!」
카아아앙―!
전과 비슷한 금속음이 들렸으나,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거대한 해일처럼 몰아치는 검격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만, 그마아안!」
“아니.”
다 먹어 치우는 검을 바랐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김없이. 다시금 로한의 눈에 붉은빛이 아른거리는가 싶더니, 그의 검이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수백의 촉수로 이루어진 다리를 완전히 갈라 버리다 못해 그 이상을 덮친 거대한 검기의 파도는.
「끄어어어…….」
놈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나서야 모습을 감췄다.
***
“하…….”
거센 탈력감이 몸을 좀먹었다.
툭, 하고 바닥에 초라히 떨어진 것은 방금 전까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쓰러지지 않을 것처럼 굴던 간부의 반신이었다. 그마저도 새까맣게 물들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지만.
그래도, 해냈다. 탈력감만큼이나 그에게 찾아든 것은 다름 아닌 성취감이었다. 단 한 번도 구사해 본 적이 없는 일격이었으며, 단 한 번도 담아 본 적이 없는 의지였다.
그러니 들뜰 수밖에.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된 로한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검을 집어 들었다.
“아르…….”
“로한! 피해!”
문제가 뭐였던 걸까. 모든 게 다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던 것?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것? 아니면, 제3의 위협은 상정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
레리아나의 새된 비명에 고개를 돌린 로한은 보았다. 사그라드는 황금빛 기둥을 따라서 천천히, 마을 전체로 거미줄처럼 번지기 시작하는 강렬한 성력의 기운을.
마치 파도처럼 몰아치는 것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로한이 있는 곳을 덮쳤고, 그렇게 온 마을을 휩쓸다 ‘간부’의 몸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사아아……!
불길한 소음을 토해 낸 간부의 몸은 반으로 쪼개진 가면 하나만을 남기고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저주의 끝은 그에게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로한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간부의 몸이 단숨에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성력의 파동이었다. 순식간에 끝도 없는 불안감이 몸을 잠식하고, 둔중한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르펠?”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혼잣말에 가까운, 아주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평소의 아르펠이라면 절대로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대답이 없다.
“아르펠.”
다시 한번 불렀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못했다.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 끝이 흔들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기분이 아득해지고, 귀가 먹먹해지며,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물 속에 잠겨버린 것처럼, 그렇게…….
장난이라 말하며 뒤늦게라도 답해 주길 바랐다. 눈앞이 빠르게 흐려졌다. 검날을 몇 번이고 손으로 쓰다듬으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아르펠, 아르펠, 아르펠…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파삭.
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초점이 사라진 두 눈이 느리게 굴러가 소음을 낸 주체를 확인했다. 전투를 하던 중 로한이 반쯤 위안삼아 검의 끝에 끼워둔 보호 아티팩트였다.
정중앙에 박혀 있는 보라색 보석이 빛을 잃고 깨져 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빼 들고, 몇 번이나 손으로 쓰다듬으며 확인한 로한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보호 아티팩트는 보호의 역할을 다했을 때, 혹은 그 허용치를 넘어선 공격을 받았을 때 깨진다. 몇 번이고 들어 반쯤 달달 외우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아르펠은…….
자연스레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왜? 왜 갑자기? 무슨 잘못을 해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의구심 속에서, 멍해져만 가던 로한의 정신을 일깨우는 이가 있었다.
“미안. 미안, 미안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레리아나였다.
그제야 흐리멍덩한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잔뜩 흐트러진 금색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분홍빛 눈망울이 눈물을 뚝뚝 뱉어 냈으나, 안타깝게도 로한은 그녀를 달래줄 정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됐어.”
딱 한 마디. 그가 레리아나에게 건넨 말은 그것뿐이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었던 걸 안다. 방법이 없었던 것도 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걸 알았다면 로한은 인질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모조리 죽이기를 택했을 테니까.
로한이 아르펠을, 검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절한 눈으로 그를 좇은 레리아나는 끝없이 침잠한 무저갱 같은 시선을 마주하고서 제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빛 한점 찾아볼 수 없는 눈을 마주하고 느낀 이 감정은 무엇일까.
공포? 두려움? 무서움?
어쩌면 모두 다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 감정의 시발점이 로한이 아닌 자기 자신일 뿐이다.
‘내가… 다 망친 거야.’
함부로 나서서. 아르펠을 생각하지 못해서. 그래서… 내가 아르펠을 상처 입히고, 로한마저 상처 입혔다. 내가 저 애의 눈을 저렇게 만들어 버렸다.
꽉 쥔 주먹 사이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차마 멀어지는 로한을 붙잡을 수도, 하물며 어디를 가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
검을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준 로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혼란이 가라앉고 나니 손안에 잔재해 있는 권능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러니….
“…마신.”
그를 찾아가면, 방법이 있을 테지.
금빛 시선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장막, 그 너머를 눈에 담았다. 마을을 둘러싼 망령의 흔적이 서서히 걷혀 간다.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망령을 따라 쏟아지는 빛줄기의 수도 점차 늘어 마침내 푸르른 창공이 완전히 드러났다.
내리쬐는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손을 뻗었다. 그 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로한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109
마을을 격리하던 장막은 사라졌고, 사람들을 위협하던 저주는 사라졌으며 구원교의 간부로 추정되는 인물은 목이 베였다. 그럼에도 상황이 말끔히 해결되었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폐허가 된 마을의 뒷수습과 부상자의 치료는 둘째 치고 근 몇십 년간 구원교가 이렇게 눈에 띄게 일을 벌인 적은 처음이었다. 알 수 없는 목적에 심상치 않은 동향까지. 당분간 그곳에 주둔하기로 한 신관들의 낯에 거무죽죽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그나마 베모스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의 내막을 꿰고 있는 이는 로한이었으나, 정작 그는….
“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마을 근처에 있는 신전을 이 잡듯 뒤지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그 역시 마을에 남아 있어야 할 테지만, 로한이 흩뿌리는 흉흉한 기세와 더불어 간부가 쓰러지고 난 직후의 소란을 듣고 그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어림짐작한 신관들이 차마 붙잡지 못한 것이다.
로한은 제 앞에서 쩔쩔매는 신관에게 시선 한 점 주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누구나 연유를 물을 법한 화려한 멍이 양 눈에 적나라하게 매달려 있었음에도 그랬다.
이 신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로한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주교가 이용하는 기도실을 찾는 것.
‘그곳이라면…….’
마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꾸만 눈앞의 신관에게 방해받고 있었다. 어서 빨리 마신을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이, 아르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좀먹어 버린 탓에 도통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나갈 수가 없던 탓일까.
이토록 난리를 피워대고 있음에도 제 앞을 막아서는 건 지겹도록 우는 소리를 내는 신관 하나뿐이며, 이 신전이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느낄 새가 없을 정도로 강박적으로 한 목표만 쫓고 있다는 게 정확했다.
기어이 그는 한 줄기 충동을 느끼고 말았다. 온 신경이 허리춤에 고정해 둔 묵색의 검이 아닌, 품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단검을 향했다.
죽일까?
이윽고 내려진 결론은 굉장히 비이성적이었다. 아르펠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대로 가다간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경한 공포가 그를 부추긴 것이다.
“부,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이렇게 보냈다간 이번엔 정말로 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요…!”
한 겹 남아 있던 실낱같은 이성이 뚝 끊어진 것은 남자의 손이 저를 붙잡았을 때였다. 제 딴에는 애원이었겠지만 로한에게 그 행동은 기폭제나 마찬가지였다. 선득한 살의를 고스란히 내보인 눈이 정확히 코앞에 있는 신관을 향했다.
“헉……!”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일까. 공기를 몇 배는 무겁게 만드는 끔찍한 살기가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 신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치를 보던 끝에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건만, 몸을 옥죄고 있는 살기는 거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그러니 당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다 못해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안 그래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퍼렇게 물들어 갈 때 즈음.
“로한님.”
뒤쪽에서 비롯된 목소리 하나가 그를 지옥에서 건져냈다.
익숙한 목소리에 로한이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것조차 잠깐이었다. 주저앉은 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등진 그는 곧바로 자신을 부른 이, 오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도실, 어디 있습니까?”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따위의 질문은 없었다. 궁금하지 않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궁금할 정신조차 없는 건지. 눈대중으로나마 살펴보았을 때 누가 봐도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게 후자일 것이라고, 오웬은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뒷수습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갑옷으로 무장한 신관, 할리온에게 수습을 부탁한 뒤 걸음을 옮겼다. 지나다니는 사람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는 뒤를 따르는 로한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무리 신전이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라고는 하나 이질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광경이다.
이조차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가만히 그의 의중을 가늠한 오웬은 문득 떠오른 의문 하나를 입에 담았다.
“아르펠 님은 어디 계시고 혼자 오셨습니까?”
“기도실.”
“…….”
단호한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오가는 일은 없었다. 상대에게서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없음을 선명히 확인만 하게 된 꼴이다.
오웬은 그 이유를 묻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기분 나빠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쩌면 아르펠의 행방을 묻는 마지막 질문을 건네는 순간, ‘이건 파고들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을 담는 순간 빛이 바래 검게 죽어 있는 눈이 붉게 번들거린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살의일까, 더 묻지 말라는 경고일까, 그도 아니면 두려움일까.
구원교와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아 그의 상태에 무지한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아르펠과 관련된 일이라면 로한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는 것이 서로의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건강에 이롭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그 신념을 적극적으로 따른 오웬은 그를 텅 비어 있는 기도실로 안내했다. 신전의 ‘주교였던 자’가 개인적으로 쓰던 기도실이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직한 음성을 마지막으로 기도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내내 가슴 안쪽을 맴돌고 있던 한숨을 뱉어낼 수 있던 것은 그 이후였다. 멀리 보이던 망령의 장막이 걷힌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고, 로한이 직접 이 신관까지 걸음한 것을 보면 마을의 일 또한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웬은 단 한 번도 로한이 그토록 절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누구보다 쉽게 무너질 듯한 얼굴을 떠올릴수록 그의 눈에 복잡함이 서렸다.
“신관님, 그분은?”
깊어져 가던 상념을 깬 것은 부탁한 일을 마치고 돌아온 할리온의 목소리였다. 철커덕거리는 갑옷의 금속음이 그의 걸음 소리에 맞춰 울렸다.
짧은 물음에 가벼운 고갯짓으로 답을 해 보인 오웬은 들뜬 기색의 할리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로한의 표정이 살벌했던 건 제대로 보긴 한 걸까.
그와 함께 이 신전에 찾아온 것은 베모스 마을의 바깥으로 장막이 내려온 직후였다. 도움이 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본격적으로 싸움이 벌어진 곳에 발을 들인다고 해봤자 방해만 될 게 뻔할 터.
순순히 그것을 인정한 오웬은 그 자리에서 노선을 틀어 미리 봐두었던 신전으로 향했다. 카시아에게 부탁해 쓸 만한 신관 한 명을 데리고서.
‘이단을 심문하는 데엔 이 녀석이 딱 좋을 겁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카시아는 할리온을 지목하며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지원을 끝까지 거부하며 뻗대었던 신전에 쳐들어와 직접 정리를 시작하는 순간 깨달았다.
‘신’을 이야기하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쌓아 올리는 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람을 접으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에서 얼마나 괴리감이 느껴지던지. 그는 반쯤 신에게 미쳐 있었다.
바글바글하다까지는 아니어도 신관의 수가 제법 되었던 이 신전이 텅 비고, 아까 전 로한을 붙잡았던 신입 신관 딱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감옥에 내려가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할리온을 이곳에 세워 놓고 감옥을 살피러 가도 되겠지. 신이 직접 축복을 내린 로한을 동경하는 듯했으니 문제없이 밖을 잘 지켜 줄 터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오웬은 기도실 앞을 서성거릴 뿐 쉽게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이미 느끼고 있던 복잡함 위에 초조함과 불안함이 덧그려졌다.
그래, 어쩌면 이건 걱정일지도 모른다.
기도실의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연갈색의 동그란 뒤통수를 떠올린 오웬이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
로한은 기도실의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검을 빼 들었다. 영롱한 보랏빛 보석이 박혀 들어가 있는 검신은 길게 들이치는 햇살 아래에서 조금도 바래지지 않는 새까만 빛을 띠고 있었다.
“아르펠.”
마지막으로 입에 담아 보는 자그마한 부름이었다. 조금 귀여운 것 같다고도 생각했던 검의 떨림, 잔잔하게 답해 주는 음성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감정이 거세된 듯 삭막해진 눈동자가 짧게 일렁였다.
가만히 손을 들어 검의 위를 쓰다듬던 로한이 천천히 신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흡사 제 소원을 간청하는 사제처럼 경건한 자세였다.
색색의 유리를 거쳐 가며 잘게 부서진 빛이 로한의 머리 위로 내리쬐고,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숫제 황금색으로 보이게끔 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신성한 성화(聖畫) 같다며 감탄할 법한 모습이었다.
두 손에 검을 소중히 쥔 로한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달싹이던 입술이 마침내 갈라진 음성을 토해 냈다.
“…마신이시여.”
신에게 축복을 받은 몸이면서도, 신전에 몸을 의탁해 예배를 이끌어 나간 경험이 꽤 있으면서도 로한은 지금처럼 기도실에 들어와 신을 향해 기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저 이 세상의 전부가, 가장 커다란 존재가 아르펠일 뿐. 하지만 지금, 로한은 아르펠을 위해 난생처음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제게 축복을 내린 마신이 이 기도에 답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아르펠을.
그 토막 난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110
<흐음, 이거 골 때리네.>
의식이 날아갔다 되돌아오는 것. 한 마디로, 영혼이 이동하는 기분은 굉장히 생소하고 이상했다. 아주 조금은 불쾌한 것 같기도 했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되찾은 로한은 어렴풋한 시야 위로 그려지는 한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기다랗게 내려와 옅은 바람결에 휘날리고, 자수정을 박아놓은 듯한 보랏빛 눈동자는 진중한 고민의 기색을 내비치며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곧게 뻗은 눈썹도, 나풀거리는 속눈썹도, 하얗다 못해 창백한 느낌이 드는 피부도, 살짝 올라간 눈꼬리의 끝도 누군가를 지나치게 닮아있었다.
조금 더 몸집이 크고, 머리카락이 길며, 표정이 다양하고, 나이가 들어 보인다.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르펠의 얼굴과 그나마 꼽아볼 수 있는 차이점이라곤 그 정도가 다였다.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마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곳에 덩그러니 앉아 있을 존재는 마신을 제외하곤 없기도 했다.
묵색의 검이 그의 손에 들려 있다. 검을 손에 쥔 채로 휘휘 돌려보는 것을 말없이 응시하다, 로한이 그를 향해 물었다.
“아르펠은 괜찮습니까?”
묻고 싶은 게 그것 말고도 몇 가지 있었지만, 로한은 아르펠의 안위를 묻는 말부터 입에 담았다. 잘게 떨리기 시작한 금빛 눈동자에 선명한 불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자리에 앉아라. 올려다보기 귀찮다.>
로한의 한쪽 눈썹이 들썩거렸다. 귀찮음이 한가득 묻어나는 언행을 아르펠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가 은근히 신경을 긁었으나 아쉬운 입장인 이상 이를 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고집에 못 이겨 자리에 앉고 나서야 마신은 마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서로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건만, 그럴듯한 인사 하나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이런지 이유는 대충 알고 있겠지?>
“네. 강한 성력에 노출됐습니다.”
그 방식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 그런 쓸데없는 겉치레에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으니.
오히려 로한은 처음 이 장소에 발을 들였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안정되어 있었다. 마신의 반응도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목소리는 마치 해결책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맞긴 한데, 그것 뿐만은 아니다.>
마신의 손안에 잡혀 있던 검이 스르르 빠져나가 공중에 떠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힘으로 고정된 검의 밑에서부터 짙은 어둠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신이 불어넣은 마력이었다.
<검 안에 성력이 잔재해 있긴 하지만,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단숨에 의식이 날아갈 만한 힘은 아니었지. 그러니 이건 전적으로….>
차랑, 차랑. 칼날 안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성력이 그의 손짓 한 번에 청량한 소음을 뱉어 내며 깨져 나갔다.
<이놈 탓이다.>
마침내 검의 구석에 있던 성력까지 완전히 산산이 부서져 내렸을 때, 마신은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앉는 검을 다시 손에 쥐며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간단한 몸짓에도 미묘한 권태로움이 묻어났다.
“…그게 무슨.”
<아르펠은 특이하지. 본래라면 내 권능만 담고 있어야 할 검에 악신의 기운이 깃들었고, 그 두 가지 힘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나, 딱 보니 그동안 몇 번, 망령을 흡수라도 한 것 같은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일그러뜨렸던 로한은,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굳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많지도 않았다. 딱 두 번, 아르펠이 망령의 힘을 흡수해 버린 것은 그게 다였다. 혹시 모를 상황이 걱정되고 불안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는 제 부탁을 받고 나서는 멈췄었는데.
천천히 목을 죄어 오는 것은 다름 아닌 죄책감이었다. 조금 더 일찍 그만두게, 아예 하지 못 하게 말렸어야 했던 것을. 그 안일한 선택이 지금의 상황을 불러왔다는 생각까지 닿자 숨이 턱턱 막혔다.
<흐음.>
마신은, 그런 로한을 소리 없이 지켜보는 중이었고. 야트막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은근히 검 하나와 사람 하나를 지켜보는 일에 맛 들린 것처럼도 보이기도 했다.
<성력에 휩쓸려 의식이 날아간 것도 망령의 힘이 강해지면서 생긴 작은 뒤틀림으로부터 비롯된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그것 때문에 영혼의 축이 잠깐 흔들린 것뿐이고.>
“…그럼, 아르펠은.”
<성력도 다 몰아냈으니, 내가 힘만 조금 더 불어넣어 주면 끝.>
“하아…….”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튀어나온 한숨에 진한 안도가 묻어났다. 한 번 싹을 틔운 뒤로 몇 번이고 심장을 덜컥거리게 한 불안감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지.>
짙은 마력이 가볍게 검신의 위를 휩쓸 무렵, 마신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을 하는 로한을 향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를 가득 담은 눈이 덧붙인 말 한마디에 그새 얼굴을 얼음장같이 굳힌 이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야. 이건 임시방편이라는 소리지. 지금처럼 단번에 의식이 날아가는 일은 없겠지만, 아르펠은 여전히 불안정해. 성력에 닿을 때마다 크게 위험해질 거다.>
보랏빛 눈매가 가볍게 휘었다. 누가 봐도 상대를 살살 긁는 어조에, 장난기가 다분한 표정이었으나 정작 로한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르펠이 위험해질 수 있다’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게 정확했다.
<그래도… 내가 내린 계시를 무사히 해결했으니, 상으로 작은 도움은 줄 수 있겠지.>
입가를 씰룩이기도 잠시, 마신은 상대의 반응을 구경하기를 그만두고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어느샌가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던 새까만 구체가 천천히 떠올라, 길게 뻗은 검신 위로 내려앉았다.
아래쪽이 조금 더 둥그스름하고 위쪽으로 갈수록 좁게 모여드는 모양은 물방울 같기도 했고, 작은 씨앗 같기도 했다. 검으로 스며든 것이 빽빽한 마력을 공기 중에 흩뿌리며 싹을 틔워 나갔다.
이윽고 검의 주위를 완전히 에워싼 검은색의 줄기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드러난 검의 모습을 응시하는 로한의 눈초리가 어쩐지 멍했다.
“이건…….”
<영혼을 안정화시키고 성력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성물이다. 직접 영감탱이한테 찾아가서 얻어 낸 거니까 감사히 받으라고.>
제게로 날아드는 검을 단단히 붙잡은 로한이 그것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화려하다기보단 단아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매끈한 검집이 손 아래에 빈틈없이 착 감겼다.
성물이라는 이름값은 한다는 걸까. 뛰어난 성능에 더해, 미적으로도 우수한지라 보면 볼수록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이 피어올랐다.
이것이 아르펠을 지켜 주는 하나의 방벽이 될 것임이 자명한 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감상을 말끔히 치워둔 로한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으니까 이제 가라.>
흥미를 숨기지 못하고 두 눈을 반짝일 때는 언제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젓는 행동에는 적나라한 귀찮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드러누울 기세인 마신을 가만히 지켜볼지언정, 로한이 먼저 발을 옮기는 일은 없었다.
<왜 안 가냐?>
당최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로한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신이었다. 고개를 기울이는 행동에 미묘한 불안함이 묻어나왔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끄응.>
이 순간, 마신은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라는 인간들 사이의 격언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결국 풀어지려는 자세를 다시 추스른 그가 성가심이 담뿍 담긴 눈으로 로한을 지켜보았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그런고로, 로한은 거절하지 않고 궁금한 것들을 모조리 묻기 시작했다.
아르펠은 언제 깨어나냐, 일어나고 난 다음 조심해야 할 게 있냐, 만약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냐, 조금이라도 아파하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 등등. 대부분 아르펠의 안위를 극성으로 걱정하는 질문들뿐이었다.
<그만! 그만해라, 이 미친놈아!>
처음에는 그러려니 답해 주던 마신마저 지겨움에 몸서리를 칠 정도의 질문 세례는 그의 비명 아닌 비명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얻어야 하는 대답도 어느 정도 다 얻었겠다, 로한은 뻔뻔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르펠이 무사하다는 확답을 받은 것 같아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함마저 완전히 지워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신의 말대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움직이려 할 즈음. 문득 생경한 의문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로한이 슬쩍 마신을 돌아보았다.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환장하겠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거절의 뜻은 아닌지라, 곧바로 운을 떼는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안배와 성물은 서로 다른 겁니까?”
차마 당장 꺼지라 말하지는 못하고 이만 부득부득 갈아대고 있던 마신이 멈칫했다. 하필이면 벼르고 별렀던 질문이 정상적인 질문이라니. 대충 답해 줄 수도 없지 않는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짙은 한숨을 내뱉은 그가 로한의 귓불로 시선을 옮겼다.
오묘한 보랏빛 보석을 박아넣은 귀걸이가 그곳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꽤 오래전, 아르펠을 통해 그에게 넘긴 자신의 안배. 온전한 신의 힘과는 다른 기묘한 울림이 그 안쪽에서 끊임없이 존재감을 발했다.
재차 한숨을 뱉어낸 그는 번거로워 죽겠다는 낯을 하면서도 순순히 설명을 시작했다.
<내 손길이 닿았다는 점은 그리 다르지 않지만, 성격은 다르지. 성물은 내가 직접 권능을 써 빚어낸 도구라면 ‘안배’는… 내 손길이 닿았으나 온전히 내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쉽게 말하면 ‘의지의 발현’이야.>
빙그르, 마신의 손가락이 가볍게 공중에서 원을 그렸다.
<혹시 이 세상이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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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한은 묘한 눈을 할 뿐 곧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마신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결’은 무엇일까.>
다분히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거듭 부풀어 올랐다.
‘결’, 흔히들 ‘결말’이나 ‘마지막’을 의미할 때 쓰는 말. 직관적으로 해석하자면 이 세계의 마지막은 무엇일 것 같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까지 나아가니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세계의 마지막. 꽤 불길한 표현이지 않은가.
<우리는 그걸 세계의 멸망으로 보고 있다.>
귀찮음, 권태로움, 흥미.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러한 기색만을 품고 있던 마신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코앞에 시선을 두고 있음에도 마치 아득히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아, 신비로움이 물씬 일었다. 그것이 눈앞의 존재가 ‘신’임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사실 그렇게 실현 가능성이 높은 일은 아니지. 우리도 그걸 원하지 않을뿐더러, 무(無)의 의지도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로한의 미간 사이가 빠르게 좁혀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마신의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니 어디서부터 되짚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했다.
그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마신은 ‘흠, 여기서부터 다시 설명해야겠네.’라며 손을 휘저었다. 물론 두 눈에는 신비로움이 깃든 적이 없는 양, 귀찮음만 한가득 서린 채였다.
<신의 탄생을 주도하고 세계의 이치를 주관하는 게 ‘무(無)의 의지’다. 어려우면 그냥 신보다 높은 지고의 존재라고 생각해라.>
마신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조소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뒤따라 흘러나왔다.
<그건 그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잊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거야.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
우리가 만든 세계, 그리고 너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의지는 이야기의 결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유일한 관객일 거다. 결에 도달한다면 세상은 또다시 무(無)로 되돌아갈 테니까.>
이윽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로한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가 차고 있는 자그마한 귀걸이를 향하고 있었다.
<안배란 이 무(無)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존재지. 그러니 무엇이 됐든, 이 세계에 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너를 이끌어 줄 거다.>
별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잠자코 끼고만 있으라는 소리야. 그리 덧붙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불퉁했지만, 제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기에 로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됐지? 이만 가라. 제발.>
‘제발’이라며 덧붙이는 한 마디가 그토록 간절히 들릴 수 없었다. 아르펠과 비슷한 낯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피곤해 죽겠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표정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 모순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로한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을 유영하던 궁금증들을 모조리 던진 탓인지, 다시금 초조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빠르게 돌아가서 아르펠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이 공간을 나가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의식을 점차 가물가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 성물 말인데.>
잠자코 있던 마신이 대뜸 입을 연 것은 그 무렵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의아히 응시하기도 잠시, 이어지는 이야기에 로한의 두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
“이거, 정말이야?”
“…네, 전하.”
여러 장의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이벨린의 손이 잘게 떨렸다. 커다란 혼란과 당황으로 점철된 두 눈은 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 보였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단순한 혼란스러움이 아니라고. 이건 황제에게, 제 아버지에게 느끼는 지독한 배신감이노라고.
“수고했어. 이만… 물러가도 좋아.”
그녀의 최선은 정보를 직접 건네주러 온 수족에게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그런 이를 물리고 나서야 이벨린은 완벽히 혼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순간, 한 겹 남아 있던 표정마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
홀로 있는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손끝에 강한 힘이 들어가며 그 끝에 잡혀 있는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진다. 우그러지는 글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눈길이 차게 식었다. 옅게나마 남아 있던 애정이라는 이름의 들불이거센 바람에 휘말려 불씨를 사그라뜨리는 것이 느껴졌다.
렉시아에게 ‘이 일은 내가 조사해 보겠다’라며 호언장담을 했던 축제 날의 밤. 그날 이후 이벨린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차근차근 그 일을 파보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에야 모든 결과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믿을 만한 이에게 지시했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조사를 진행했다. 조심성이 많은 제 수족의 성격상 정보가 불확실했다면 이리 보고하지도 않았을 테다.
“이게 다, 사실이라고…….”
그럼에도 이벨린은 제 수족에게 ‘이게 정말이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짧은 글귀 하나가 던지고 간 혼란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배신감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거대한 폭풍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여, 신전의 주도하에 망령의 힘이 녹아 있다고 판별된 독(이하 망령독)은 그 출처가 구원교가 아닌 것이 확인된 바.
(중략)
위와 같은 사항들을 고려하였을 때, 해당 독을 만들어 낸 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황궁일 것이라 판단됨.」
긴 글귀 중에서도 유독 그 부분이 눈에 잘 들어왔다.
황궁의 뒤에는 황제가 있다. 나랏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황제의 묵인하에 로한과 아르펠이 황궁 내에서 곤란한 일을 겪었던 것처럼, 종이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면… 이 또한 황제가, 제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말이 된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로한과 아르펠이 황궁의 밑에서 느껴진다 했던 불길한 기운은 ‘망령독’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제국민들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다스리고, 제국을 수호하는 황궁. 하지만 황궁은, 황궁의 정점에 서 있는 제 아버지는 세상을 위협하는 구원교와 손을 잡았다. 이러한 황궁의 모순을 알게 된 후부터 이벨린은, 도저히 그의 속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무슨 목적이 있기에, 무얼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긴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토록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다고 한다면.
‘감당해 낼 수 있다고? 그 재앙을?’
그의 목적이 신전의 무력화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제국에 두 개의 태양은 필요 없다’가 그의 정론이었으니.
하지만 신전은 망령이라는 재앙을 막는 존재이자, 제국을 수호하는 또 하나의 벽이다. 그들이 없다면 이 제국을, 제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망령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벽이 사라진 제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모래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 모래성의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복잡한 생각을 애써 정리해 나가고, 손에 들어간 힘 때문에 사정없이 구겨진 종이를 뒤늦게나마 펴보았다. 잘근 깨문 입술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 주었다.
그렇게 몇 분을 말없이 서 있었을까.
“황녀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무도’에 나도 포함된다 확신할 수 있는가?”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상념에 빠져 있는 이벨린을 끌어올렸다.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일까, 아직도 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미련 때문일까. 종이를 급하게 정리하는 손길에 어수선함이 묻어났다.
예고도 없이 방문한 이가 들이닥치는 순간까지도 그저 서류에 적힌 글귀가 보이지 않도록 뒤섞어 놓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주변을 완벽히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바깥의 기사는 내 부탁을 이행한 것뿐이니 문책하지 마. 말도 없이 방문한 거니, 환영해 줄 필요는 없겠지?”
가느다래진 눈이 맞은편의 이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눈빛에 서려 있던 수많은 고민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뒤였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혹시 차여서 그런 건가?”
상대에게서 새어 나오던 기세가 한층 더 짙어졌다. 부득 이를 가는 소리마저 들려오자 이벨린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곱게 휜 입술이 손가락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이, 골탕 먹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눈에 훤히 보이는 몸짓이었다.
기묘한 방 안의 모습을 살피는 듯하던 남자, 루시엘은 심기가 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갑작스럽긴 했다만, 피차 이야기를 나눌 기분은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다 못해 냉혹했다. 그 안에 서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자 손으로 가려진 이벨린의 입가에 한가득 서려 있던 미소가 차차 가시기 시작했다.
“이벨린. 당분간 궁 밖으로 나가지 말고 몸을 사리도록 해라.”
“……뭐?”
이윽고 들려온 한 마디는 무거운 선고처럼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완전히 웃음기가 걷힌 이벨린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구겨졌다.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신 거니,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잠깐, 갑자기 왜-.”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이유는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가는 루시엘의 뒷모습을 이벨린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곡차곡 쌓여 가던 생각의 고리가 마침내 하나로 이어졌다.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끝마쳤다고 생각한 조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에게 들킨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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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떻게? 짧은 의문이 뒤따랐으나 빠르게 털어 냈다. 황궁에 황제의 눈과 귀가 있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을 수 없는 것은, 제게서 등을 돌린 이가 내보이는 지독한 위선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멀어지는 등을 바라만 보고 있던 이벨린이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내뱉었다.
“그거 다 위선이고 기만이야. 알아?”
황태자 루시엘은 황제와 비슷했다. 황제의 말을 듣고, 그와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움직인다. 여태껏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막 확인했기 때문일까. 이벨린은 제 속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혐오감을 순간 감출 수가 없었다.
“…….”
“루시엘!”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한 마디에도, 뒤따라 강하게 부른 이름에도 루시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를 간 이벨린이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이려고 하던 찰나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죄송합니다, 전하.”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루시엘을 따라온 기사들이 대뜸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사뭇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거구의 기사들에 이벨린이 미간이 적나라하게 구겨졌다.
“저희는 폐하의 명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하.”
굽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강압적인 말투. 그 미묘한 차이를 모를 리가 없었기에, 이벨린에게서 튀어나온 짤막한 탄식에는 황당함이 한가득 점철되어 있었다. 꽉 쥔 주먹이 치밀어오르는 부아에 감응하듯 부르르 떨려왔다.
루시엘은 그런 소음을 모조리 들었음에도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했다.
뒤통수에 무언가를 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
스르르 돌아간 눈동자가 찬찬히 상황을 파악했다. 바닥에 툭 떨어지는, 종이를 구겨 동그랗게 뭉친 것과 내가 던졌다고 알리듯 팔을 앞으로 뻗고 있는 이벨린, 그리고 돌처럼 굳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기사들.
“나한테 던진 건가?”
하얀 종이 뭉치를 조용히 응시하기도 잠시, 무감정한 눈동자가 그대로 이벨린에게 향했다.
“응. 역겨워서.”
“……뭐?”
수풀이 우거진 듯한 초록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한순간의 치기도,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이벨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으로 제 앞에 선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겨워 죽을 것 같아. 고결한 척 연기하는 게 위선적이고,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게 가증스러워.”
담담한 어조에 선명한 진심이 묻어났다.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일까? 루시엘은 다시 몸을 돌려 나가는 대신 가만히 서서 그녀의 말을 듣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직접 부딪혀오는 감정에도 한 치의 동요를 보이지 않던 그였건만.
흔들림 없던 표정은 머지않아 들린 또 다른 말에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네가 감싸는 그 사람이 누굴 죽이려 했는지 알고는 있어?”
굳건히 둘러쓰고 있던 평정에 금이 갔다. 그 무엇이든 꿰뚫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누이의 시선을 마주한 루시엘의 눈동자는 풍랑이라도 만난 듯 정처 없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차차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힌 눈동자는 다시 이성이라는 견고한 가면을 썼다. 일말의 동요를 내비친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이윽고 그는 단호히 등을 돌렸다.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구나, 이벨린.”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일방적인 거부, 그리고 앞을 단단히 가로막는 기사들에 소리 없이 혀를 찬 이벨린은 결국 방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고, 문은 단단히 닫혔다. 완전히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꼴에 그녀의 입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당분간 저 문을 스스로 열 일은, 이 궁을 나가는 일은 없으리라.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벨린은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손끝에 구겨진 종이가 스쳤다. 딱 한 장, 루시엘에게 던진 쪽을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손에 들려있는 자료 속 수많은 글귀를 차분히 가라앉은 눈이 몇 번이고 살폈다.
두 손 가득 종이를 쥔 이벨린은 촛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렁이는 불꽃에 종이를 가져다 대자, 곧 그것은 제 손안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네가 한 짓을 외면하지 마.”
갈 곳을 잃은 목소리가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 사그라들었다.
***
“문 앞을 지키도록.”
이벨린의 방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후, 루시엘은 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인적이 드문 곳에 발을 들였을 무렵. 허리를 꼿꼿하게 펴 여유롭다 못해 고상하게까지 보이던 움직임에 아주 조금의 다급함이 서렸다. 손에 들린 구겨진 종이 하나가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냈다.
“…….”
루시엘은 이것이, 자신이 들이닥치기 직전까지 이벨린이 보고 있던 서류임을 알고 있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시켜 종이를 치우게 했다가 분란을 만들 바에야 직접 처리하는 것이 나을 터.
제 손으로 종이를 챙겨 들고나온 것은 그러한 이성적인 판단을 거친 결과였다. 하지만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서고, 구겨진 종이를 향해 시선을 옮기는 순간…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이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이것을 태워 버렸을 것이다.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테다.
그럼에도, 자꾸만 종이 속 내용이 거슬리는 것은…….
‘네가 감싸는 그 사람이 누굴 죽이려 했는지 알고는 있어?’
이벨린의 말이, 덤덤한 그 목소리가 자꾸만 뇌리에 울리는 탓이었다.
그녀가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 들어봤다. 친밀하지도 않았고, 살가운 말을 나눈 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니. 루시엘은 가만히 제자리에 선 채로, 잔잔한 경멸과 혐오가 끊임없이 묻어나던 차디찬 음성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할 것이다. 저를 도발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내뱉은 말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근신을 당한 것이 억울해서, 화풀이하고 싶어서, 치기 어린 반항심에. 여러 가지 이유가 들쑥날쑥 떠올랐으나 흔들리는 사고를 바로잡아 준 것은 없었다.
결국 구겨진 종이의 끄트머리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던 손이, 그것을 천천히 펴냈다. 꾸깃꾸깃한 자국들 사이로 깔끔히 정렬된 검은 글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그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
“로엔티오 피데스는 들어라.”
한 남자가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쳐 커다란 목소리를 낸다.
그 앞에 초라한 꼴로 무릎을 꿇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그를 보고 웅성거리는 귀족들, 마지막으로 찬란한 옥좌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무기질 같은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이 차근차근 눈에 들어왔다.
“감히 제국의 영토 안에 망령을 들이고, 제국민의 목숨을 희롱했으며, 스스로 권좌에 올라서겠다는 헛된 욕심을 부려 반란을 꾀한바. 이하 생략한 수많은 죄목까지 고려한 결과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려도 모자르다.”
이지러지던 시야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 부로 로엔티오 피데스의 재상직을 박탈하고 성(姓)을 회수하겠다. 성을 버리고 신전에 들어가 제국의 안위에 헌신하고 있는 이를 제외한 직계 존속 셋과 그들의 직속 병력은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해 참형에 처한다. 이후 그들의 시신을-.”
“웃기는군.”
그 순간,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듯 처참히 갈라진 음성이 공간을 일순간에 갈랐다. 막힘없이 이어지던 남자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숨이 막힐 듯 무거운 정적이 빽빽이 내려앉았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맞춰 볼까. 피데스 후작가의 영지와 재산은 제국에 귀속된다… 이런 내용일 것 같은데.”
“…….”
당당히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던 남자의 표정은 완전히 깨졌다. 그리 이상한 내용도 아니었다. 반란을 일으킨 가문은 그 직위를 박탈하고 성을 회수하게 되니, 남은 재산과 영지를 제국이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마치 일말의 양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은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서기관. 이어 말하지 않고 무얼 하는가.”
“아, 알겠습니다!”
물론 이어지는 위압적인 재촉에 그는 다시금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영지와 재산은 제국에 귀속된다…… 그 짤막한 음성이 끝이 난 때였을까.
로엔티오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광활한 궁 안쪽을 한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재미 좀 보셨겠소, 황제.”
그가 내뱉은 한 마디는 그것뿐이었다. 그 말 안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느낀 것일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정적 속에서 황제는 로엔티오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무기질하고 날카로운 눈초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살폈다.
“…내일 아침, 황궁 앞에서 죄인들의 목을 베어라.”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기묘한 신경전은 황제의 일축으로 막을 내렸다. 씨익 입꼬리를 올린 로엔티오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다음은 누구일지 궁금하군.”
말 안에 담긴 비꼼이 그리 가볍지 않음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단순한 혼잣말일까, 자리를 파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고 등을 돌리는 황제를 향한 말일까. 그것도 아니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또 다른 귀족들을 향한 경고일까. 그 말의 진의는 로엔티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떠 있던 해가 눈 깜짝할 새에 지며 순식간에 밤이 찾아오고, 머지않아 다시 해가 떠오르며 어두웠던 밤하늘에 어슴푸레한 빛이 차오른다.
그리고.
툭― 데구르르.
‘아르펠’은 바닥에 떨어져 제게로 굴러오는 머리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광경에서 죄인처럼 구속되어 있던 로엔티오 피데스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이의 얼굴은 꽤 익숙하기까지 했다.
리테란 피데스.
이 자를 어째서 알고 있는지, 어디서 만났는지 따위를 떠올릴 시간도 없이 곧장 튀어나온 이름 하나. 그 이름을 되뇌고 나서야 텅 비어 있던 머리에 거짓말처럼 수많은 기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113
머릿속에 낀 안개가 걷힌 듯, 아득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되돌아오는 느낌은 제법 생소했다. 드문드문 이어지다가도 뚝 끊기기를 반복했던 생각 또한 느리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입을 열어 소리를 낼 수도, 작은 탄식 한 번 내뱉을 수도 없다.
‘아르펠’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그저 처형이 집행되는 모습을 보고, 죄인의 목이 잘렸다며 기뻐하는 제국민들의 환호성을 듣고… 그 모든 것의 꼭대기에 서 있는 황제를 두 눈에 담는 것뿐.
시간이 다시금 빠르게 흐른다. 황궁의 앞쪽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이 흩어지고, 잘린 죄인의 목은 성문의 앞을 장식했다. 뒤쪽에서 비치는 태양이 황궁의 앞으로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신이 썩어 들어갈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을 무렵. 기사들이 죄인의 머리를 치웠다. 직후 눈앞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들개의 먹이로…… 아니.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이 있겠군.”
휘리릭 감긴 시야가 제 궤도를 완전히 찾았을 때 보인 것은, 거대한 황좌와 그 위에 권태롭게 앉아 있는 황제였다. 언제나 그의 낯에 피어 있던 온화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형형한 빛을 발하는 두 눈에 남은 건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사람을 연상케 했다.
고개를 저은 그의 입가에 미미한 조소가 어렸다.
“오스카.”
“네.”
유일한 황좌의 옆, 그림자처럼 황제의 곁을 지키던 오스카가 그 짧은 부름 한 번에 앞으로 나서 부복했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몇몇 기사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죄인들의 시신은 네가 처리하도록.”
명령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뒤따라 담담한 축객령이 내려지고, 들이치는 노을을 등진 이들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이 오스카에게, 정확히는 그가 수습한 시신에게로 닿았다.
“앞으로 네놈들이 빛을 보게 될 일은 없을 테니, 지금을 즐겨 두거라.”
더 이상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할 망자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가 거대한 왕좌 위를 공허히 울렸다.
‘아르펠’은 그저 가만히 서서 황제의 독백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생각의 향연 아래, 불규칙하게 퍼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마음껏 말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는… ‘지켜보기만’ 할 수 있는 기이한 곳. 원치 않아도 시점이 바뀌며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치 빠르게 흘러간다. 마치 이곳에 꼭 봐야 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처럼.
또다시 태양이 지고 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아르펠’은 마침내 이 괴상한 공간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제 반투명한 손을 내려다보며 아르펠이 중얼거렸다.
‘꿈.’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자그마한 입 모양만이 그가 어떠한 단어를 내뱉었음을 짐작케 했을 뿐이다.
이윽고 한 가지 의문이 차올랐다.
‘왜…….’
정말로 이것이 꿈이라면, 어째서 이 두서없는 꿈을 꾸고 있는가.
이미 벌어진 과거의 단편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머지않은 미래를 경고하는 걸까? 가지를 뻗으며 나아간 생각이 여러 가설을 만들어 냈다. 최근 들어 떠올린 적 없던 이름 모를 소설 속 내용이 되살아난 것은 그때였다.
그 작은 깨달음을 축하하듯, 동시에 눈앞이 흐릿하게 뭉개지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광경이 코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에게 부여받은 힘이 없는 이들이라면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의 지독한 사기. 검푸르게 물든 대지의 위로 끊임없이 망령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살점이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망령에 사로잡혀 그곳을 거닌다.
흑백으로 물든 커다란 공간은 햇빛마저 거부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방에는 잿가루가 날렸으나, 그 출처는 알 수 없었다. 생기를 빨아 먹혀 말라 죽은 식물의 부스러기, 다 타 버린 ‘마을’의 흔적… 그러한 것들이 아닐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피데스 영지의 변두리, 자신들만의 신을 모시며 폐쇄적으로 살아가던 베모스 마을. 소설 속에서는 그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에 ‘로한’이 관여하는 일은 없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제국을 떠돌며 구원교를 찾아다니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었으니, 마신에게서 계시를 전해 듣지 못한 것이다.
‘…….’
로한, 그리고 그를 따라다니던 레리아나의 부재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했다.
제국 내에 생긴 새로운 망령의 땅이라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검은 대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망령으로부터 비롯된 저주가 저들이 모시는 신의 벌이라고 믿어, 결국 영원한 잠마저 순순히 받아들이고만 무지한 자들의 죽음을 발판 삼아.
그제야 아르펠은 마신에게 계시를 받은 그 순간부터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마신의 계시가 소설 속에서 등장했다면 그것은 내용의 줄기를 뒤바꾸는 중요한 분기점일 터.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고, 신전 측에서 일을 해결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한 번의 실패에 불과했지만, 이는 수많은 피해를 낳았다. 백성들의 인명 피해뿐만이 아닌 신전의 기반이 흔들렸고, 귀족파를 대표하던 피데스 후작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황제에게 권력이 급격하게 몰렸다.
아마 황제는 이 저주받은 땅이 ‘피데스 영지’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죄목을 뒤집어씌웠을 테다.
불쾌한 망령의 목울음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썩어 들어간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망자의 비명이 겹쳐 들리는 것도 같았다. ‘끔찍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 끔찍함이라는 것을 형상화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이건 그저 지독한 악몽일 뿐이라고. 그러니, 이만 꿈에서 깨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보고 싶다.’
자신이 알고 있는 로한이, 항상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는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그 강렬한 염원이 마침내 꿈을 깨뜨린 걸까?
거짓말처럼 눈앞이 흐려지고 귓가가 먹먹해졌다. 아득한 심해로 끌려가는 기분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아르펠은 순순히 눈을 감고 아득해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제가 없는 미래 따위, 자각하지 못했던 소설의 뒷이야기 따위 더 이상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
침잠했던 의식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지자마자 아르펠이 느낀 것은 저를 꼭 쥐고 있는 손의 감촉이었다.
이윽고 바래진 시야에 느리게 색채가 차올랐다. 창 틈새로 들이치는 어슴푸레한 노을, 그 빛을 온전히 받는 커다란 신상.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차차 인지하고 있을 때, 고요한 기도실 안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르펠.”
검에서 비롯된 옅은 떨림을 느낀 것일까. 아르펠이 정신을 차렸음을 곧장 눈치챈 로한이 입을 연 것이다.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짙은 불안감과 초조함을 녹아든 결과인지. 갈라진 목소리 끝이 적나라하게 떨렸다.
<로한.>
“…잘 잤어요?”
상대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음성에 안도가 서렸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얼굴이, 검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로부터 느껴지는 차디찬 체온이, 걱정을 채 덜어 내지 못한 눈동자가… 그 모든 것이 시선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아르펠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로한의 반응에 초조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막 깨어나 정신이 그리 또렷하지 않았음에도 아르펠은 곧장 힘을 끌어모았다. 몸은 괜찮은지, 기분은 괜찮은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로한이 그런 것들을 물을 새도 없었다.
“로한.”
다시 한번 선명한 음성이 아르펠의 입에서 토해졌다. 짧은 빛에 둘러싸이는 것도 잠시, 그새 사람의 모습을 갖춘 아르펠이 로한에게로 손을 뻗었다. 볼을 만지작거리는 곧고 가느라단 손가락이 퍽 조심스러웠다.
오묘한 색의 보랏빛 눈동자가 올곧이 시선을 마주했다. 로한은 그 눈빛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제 볼을 토닥이는 손길이, 단단히 마주 봐 오는 시선이 서툰 위로 같다고 생각하며.
“괜찮아?”
“…하하.”
그러다 기어코 ‘괜찮냐’는 물음을 던지자 로한의 입에 허탈한 웃음이 고이고 말았다. 정작 정신을 잃었다 막 깨어난 것은 그이면서, 어째서 제 안위를 챙긴단 말인가.
떨리는 입꼬리에 씁쓸함이 물들었다. 이럴 때조차 걱정받는 것이 나쁘지 않고, 또 그런 아르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버려서.
“괜찮아요, 괜찮아질 거예요…….”
그의 다른 한 손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괜찮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제 아르펠이 있으니 괜찮았다. 괜찮아질 것이다. 마주 잡은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몸은… 괜찮죠?”
이윽고 로한의 손이 움직였다. 아르펠의 팔을, 어깨를, 목을… 그렇게 차차 올라간 손길은 퍽 조심스러워서, 마치 상대의 존재를 몇 번이고 확인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지만.
“괜찮아.”
“…정말로요?”
“응.”
그 평온한 대답이 일종의 시발점이었다. 꾹꾹 눌러왔던 것들을 한 번에 터뜨리는 것처럼 수많은 물음이 쏟아져 내렸다. 머리는 아프지 않은지, 어지럽지는 않은지, 기억에 문제는 없는지…….
다급하고 두서없는 질문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아르펠은 착실히 로한에게 답을 건네주었다. 질문에 하나하나 답할 때마다 손등을 토닥여 주는 느릿한 위로에 로한은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연신 불안히 흔들리던 눈동자의 떨림이 마침내 완전히 가셨을 때. 로한의 말에 따라 몸 상태를 찬찬히 살피던 아르펠은 문득 이상한 답답함을 느꼈다.
어쩐지 목이 죄이고 갑갑했다. 내내 온 신경이 로한에게 쏠려 있어 인지하지 못한 감각들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목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움직인 그는.
“……?”
제 목에 채워져 있는 이상한 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114
목을 완벽히 감싸고 있는 줄 같은 것,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만져지는 장식 하나. 고개를 내려 그것을 확인한 아르펠은 기묘한 빛을 발하는 은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장식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어째 어색했다. 옷을 만들 때 쓰는 부드러운 천 재질이라기보다는, 가죽 같은 질감에 가까운 것이…….
의아함을 한가득 담은 시선이 뒤늦게 로한을 향했다.
“이건… 뭐야?”
“아, 그거요.”
괜찮다는 대답을 들은 이후 한껏 풀어져 있던 얼굴이 고운 미소를 그렸다. 뒤따라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검집이에요. 아르펠이 사람일 때는 그 모습이고요. 예쁘죠?”
그제야 아르펠은 검이었을 때 느꼈던 미묘한 갑갑함을 떠올려 냈다. 검집 때문이었을까. 다만 납득은 하더라도, 마지막에 덧붙인 짧은 물음에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마신한테 받았어요. 계속 차고 있으면 위험할 일은 없을 거예요.”
영혼을 안정시켜 주고, 성력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주는 성물. 가벼이 설명해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것’의 역할을 꼼꼼히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르펠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다지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당장 이번에 정신을 잃은 것도 성력에 휩쓸린 탓이었으니, 이것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근데…… 로한, 이건.”
이것의 모양새가 이상했으니까.
목을 딱 맞게 죄이고 있는 검은색 가죽처럼 질긴 천, 한가운데에 달려 있는 자그마한 은색 고리, 그것에 매달려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장식까지.
아무리 봐도 목줄이었다. 로한과 함께 여러 마을을 지나치면서 한 번쯤, 이와 비슷한 것을 목에 달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본 것도 같았다. 옆에서 허허 웃으며 ‘고놈 참 기세도 좋아.’ 따위의 말을 내뱉는 노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그려지기까지 했다.
“혹시… 마음에 안 들어요?”
“……응? 아니. 괜찮아. 예쁜 것, 같아.”
옛 기억을 떠올리니 저절로 표정이 오묘해졌지만, 이마저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로한의 얼굴이 서서히 우울한 기색을 풍기자 차곡차곡 쌓여가던 찝찝함이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힘겹게 되찾은 웃음이니, 그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의구심을 몰아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 테다.
결국 아르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제 목에 걸린 목줄을 방관하고 말았다. 기어코 마음에 든다는 대답까지 건네고 나서야 로한의 낯이 다시 밝아졌다.
느리게 뻗어온 그의 손이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며, 아르펠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아무래도 육아가… 상당히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한 기억들이 촤르륵 지나가며 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허탈한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뭐라 일축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거둬진 아르펠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며, 로한은 기쁨에 겨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맞잡은 아르펠의 손등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어 보였다.
언뜻, 로한의 머릿속에 짓궂은 표정을 머금고 이야기했던 마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르펠이 사람으로 돌아가면 모습이 좀 많이 바뀔 거다. 네 염원에 반응할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는 말고.’
‘염원’. 최근 들어 꽤 많이 들려오는 그 짧은 울림이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단어와 함께 어떤 심상을 몇 번이고 되뇐 탓일까. 아르펠이 사람으로 변한 순간, 그를 본 로한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 또한 아르펠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이 목줄에 가깝다는 사실은 인지했다. 그랬기에, 그 누구보다 확실히 스스로의 ‘염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아르펠이 제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를 곁에 묶어 두고 싶었다. ‘염원’에 반응한다는 성물은 이를 착실히 들어준 것이다.
“아르펠, 저랑 다시 약속 하나 할래요?”
하지만 로한은 이를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곁에 묶어두고 싶다’라는 게 제 소원임을 알게 되면… 아르펠이 자신을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니.
그랬기에 로한은 적나라하게 화제를 돌렸다. 여전히 손등에 닿아 있는 입술이 옅은 숨결을 뱉으며 달싹거리자 마주 잡은 손에 짧은 떨림이 일었다. 간지러워하는 듯한 몸짓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약속?”
“앞으로 망령의 힘에는 절대 손대지 말기.”
아이를 어르는 듯한 다정한 한 마디에 아르펠의 눈이 멍하니 끔뻑이기를 반복했다. 보랏빛 눈동자에 ‘그건 이미 한 약속이 아니던가?’ 따위의 의문이 서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러나 이상함을 느낄지언정 결국 고개를 끄덕여 주었기에, 로한은 그런 그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숨기지 못한 행복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입꼬리 끝에서 연신 떨어져 내렸다.
그의 목 위에 덧대어진 검은 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구심을 가지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결국 예쁘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것이 자신을 배려해 내뱉은 말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르펠이 건네주는 배려가, 자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 한결같은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을 둔중히 울렸다.
그가 항상 자신을 아껴 주었기에 이런 찬연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되짚어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로한은 제 앞으로 향하는 아르펠의 새끼손가락을 보며 작은 미소를 터뜨렸다. 산뜻한 웃음소리가 기도실 안에 내려앉았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도저히 말을 내뱉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르펠,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조막만 한 속삭임이 단단히 엮이는 새끼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드물게 환한 미소를 그리는 아르펠의 낯을 마주하며, 로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
“아.”
로한이 기도실에 틀어박힌 이후로 계속해서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오웬은, 드디어열리는 낌새를 비추는 커다란 문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군데군데 서린 초조함이 완전히 가신 것은 로한의 옆에 멀쩡히 서서 나오는 아르펠을 발견하고 난 이후였다.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이윽고 들리는 로한의 목소리에 옅은 당황이 배어 있었다. 기도실에 들어가기 전, 그에게서 묻어나던 날카로운 기세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오웬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르펠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축하를 내뱉기는커녕, 180도 돌변해 버린 로한의 태도에 황당함을 표하지도 못한 것이다. 대신, 멍한 시선이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 예. 계속 서 있기는 했는데.”
한 박자 늦게 대답이 튀어나왔으나 그마저도 어색했다. 온 신경이 눈앞의 광경에 쏠린 탓일까, 더듬더듬, 느리게 이어져 나가는 목소리는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근데. 그, 목에 그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시선이 향한 곳은 아르펠의 목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목에 매여져 있는 검은색의 무언가를 향해서.
“성물입니다.”
“성물…?”
오웬의 눈이 기묘해졌다. ‘세상에 그딴 성물이 어디 있냐’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은 눈이었다. 잠시간 아르펠의 말을 이해해 보려 애쓰던 그는 결국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고 말았다.
“어딜 봐도 목줄…… 아니. 아닙니다. 실언했군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어 나가던 것도 잠시, 오웬이 어색히 말을 돌렸다. 묘한 다급함마저 서려 있는 행동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최대한 끼어들지 말자는 본인의 신념을 뒤늦게 떠올린 탓이리라. 고개까지 휘휘 저어가며 혼란스러움을 애써 걷어낸 그가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상당히 뒤늦은 인사였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아르펠 또한 꽤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오웬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목소리에 옅은 걱정이 녹아든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장신구’에서 시선을 떼어 낸 그는 사무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일종의 보고와도 비슷했다.
“…이렇게 돼서, 현재 이 신전은 제가 관리하는 중입니다.”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중간 과정을 깡그리 뭉뚱그렸으나, 이보다 더 깔끔한 요약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신전의 비리와 이단의 묵인을 죄목으로 삼아 신관들을 벌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 신관이…….”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로한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아르펠 또한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베모스 마을의 뒤편, 깊은 숲속에서 발견한 죽은 신관의 흔적. 오웬이 들려준 죄목에는 ‘소속 신관의 실종을 덮었다’라는 것도 있었으니, 희생당한 신관이 이곳에 소속된 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에 대해 언급하니 오웬의 표정 또한 흐려졌다.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한숨에 깊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조사를 맡긴 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로한과 아르펠은 곧장 신전을 떠나지 않았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오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방 하나를 대략 안내해 주는 말을 마지막으로 둘은 오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아르펠의 시선이 오웬을 향했다.
“후작가에 무슨 일은 없습니까?”
“예?”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에 오웬의 눈이 미묘해졌다. 그 미묘함이 한층 더 깊어진 것은, 짧은 되물음에도 여전히 진지한 빛을 띠고 있는 보랏빛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꿰뚫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신비로운 눈빛이 대답을 몇 번이고 부추겼다.
“…별일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군요.”
당혹스러움을 누르고 답을 내놓았으나 정작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가 버리는 아르펠의 행동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찼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오웬의 입가에는 허탈한 웃음이 한가득 고이고 말았다.
115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은 금세 모습을 감췄다. 오웬의 안내에 따라 하룻밤 묵을 방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그 뒤로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아 보자면 오늘따라 유달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로한의 태도일 테다. 조금만 멀어져도 두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는 했으니.
그럴 때면 아르펠은 군말 없이 로한의 곁에 있어 주었다. 서러움을 대놓고 티 내지는 못하고, 은은한 불안함을 머금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 안쪽이 자꾸만 욱신거리는 것이, 죄책감을 닮아있는 것도 같았다.
“로한.”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뽀송하게 씻고 나온 로한을 마주한 아르펠은 대뜸 로한을 불러세웠다. 곧장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낯에 희미한 웃음이 서려 있다. 걱정거리 하나 없는 편안히 풀린 얼굴이었으나, 아르펠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았을 때에 불과하다고.
“고민 있어?”
“……아.”
로한의 감정에 감응할 수 있는 아르펠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어려 있는 걱정과 불안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짧은 물음을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빠르게 무너졌다.
“역시 아르펠한테는 못 숨기겠네요….”
다시금 미묘한 미소가 로한의 얼굴에 머물렀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의 씁쓸한 기색이 묻어났다.
아르펠은 이유를 되묻기보단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제가 멀어질까 불안해하던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원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로한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레리아나, 있잖아요.”
아르펠은 그 물음에 자연스럽게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렸으나, 머지않아 기억을 뒤지는 것을 포기했다. 떠오르는 것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성력에 휩쓸려 중간에 의식을 잃은 그에게는 기억나는 것이라 해봤자 전투 중 간간이 들려 왔던 그녀의 목소리 정도가 다였다.
그 정도로 강력한 성력의 주인은 레리아나 정도밖에 없으니 의식을 잃게 만든 이도 그녀일 테다.
옅은 죄책감이 스며들어 있는 로한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던 아르펠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찾으러 갈까?”
그리 어려운 추측은 아니었다. 레리아나의 성격이라면 자신의 탓이라며 심하게 자책하고 있을 게 분명했고, 로한은 급한 나머지 그녀를 신경 써 주지 못했을 테니. 모든 상황이 해결되고 나서야 그는 이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 이상의 재촉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옆을 지키다 원하는 답을 내어 주는 아르펠에 로한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못내 신비롭게 느껴진 탓이었다.
자신과 아르펠은 괜찮다고 안부를 전해 주고, 그때 대답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넌 잘못이 없다고… 그렇게 말해 줘야겠지. 그리 생각하며,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깊은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음날 느지막한 아침, 두 사람은 신전을 떠나기 위한 채비를 마쳤다. 따로 마련해 둔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로한은 자신들을 마중하러 나온 오웬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예. 이 신전도 아직 정리하지 못했고, 집에 한 번 돌아갔다가 곧바로 중앙신전으로 돌아갈 예정이라서요.”
매끄러운 대답이었으나 정작 말을 하는 오웬의 낯은 유독 무뚝뚝했다. 정확히 말하면 속엣말을 인내하자 자연히 나온 표정이었다. 하마터면 로한이 물은 순간, ‘내가 왜 너희 둘 사이에 끼냐.’라는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것을 내리누른 오웬은 더 설명하는 대신 아르펠을 흘끗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냉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빤한 시선이었으나 정작 반응을 보인 것은 로한이었다. 어색하게 아르펠을 돌아본 그가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둘 사이에 흐르는 말 못 할 기류의 원인을 모르지 않았던 오웬은 결국 커다란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놈도 그리 나쁜 놈은 아닙니다. 로한 님을 많이… 음. 지나치게 동경하는 놈일 뿐이라서요.”
그리 말하는 오웬의 낯에 미묘한 자괴감이 서렸다.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그의 얼굴에 묻어 나왔으나…….
“그렇군요.”
“…….”
차갑다 못해 한풍이 부는 듯한 대꾸에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을 직감한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겉모습은 정중한 배웅 그 자체였으나, 실상은 이만 꺼져달라는 부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전 업무가 바빠서 이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르펠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 로한에게, 마음속으로 심심찮은 위로를 보내 주는 것밖에 없었다.
오웬이 등을 돌리고, 마부가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작게 열린 창틈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고립된 공간 속, 그렇게 로한은 딱 보아도 기분이 가라앉은 아르펠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동시에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다…….
막 일어나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꼭 한 번은 뵙고 싶었다며 들떠서 말을 걸어오더니 냉큼 손을 잡아 악수하고, 종이와 펜을 가져와 이름을 써달라며 이상한 부탁까지 한, ‘할리온’이라는 신관 때문이었다.
“아르-”
“좋겠네. 널 아껴 주는 사람도 생겨서.”
“…….”
아르펠을 부르려던 로한은 말문이 턱 막힌 듯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나아가 말을 뚝 끊어 버리는 것은 아르펠의 평소 모습과 정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로한이 이런 반응을 내보인 것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느리게 끔뻑거리는 눈이 멍하니 아르펠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비껴가 창밖을 향하는 시선, 어쩐지 진한 감정이 녹아 있는 것만 같은 표정…….
로한에게 다른 이의 감정을 읽는 재주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봐온 만큼 아르펠의 낮에 서린 감정이 무엇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 표정에, 말투에 녹아 있는 건 다름 아닌 불만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아르펠.”
아르펠이 내보이는 질투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로한은 곤란함을 느끼기는커녕 잔뜩 들뜨고 말았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직전까지 아르펠의 반응에 안절부절못했으면서, 지금은 그 모습에 기뻐하는 꼴이라니.
뒤늦게 내뱉은 이름에 미처 숨기지 못한 벅찬 감정이 한가득했다. 이어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느낀 아르펠이 로한을 돌아본 순간, 옅은 의문이 내포된 눈빛을 마주한 로한은 참지 못하고 활짝 미소를 지어 버렸다.
“저 진짜, 너무 행복해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곧장 맞은편 자리로 몸을 옮기고 손까지 단단히 깍지 껴 잡아 버리는 행동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아르펠은 그것에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저 몸을 흠칫 떨기만 했을 뿐.
이윽고 쏟아지는 황홀한 감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투명했다. 연인들이 속삭이는 그 어떤 사랑의 밀어보다 달콤할 거라는 이상한 확신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에 열이 몰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까.
거짓말처럼 목이 타기 시작했다. 검인 그는 물을 마실 필요가, 갈증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도.
“있잖아요.”
나긋나긋 흘러나오는 따스한 목소리가 온 신경을 사로잡았다. 깍지를 꼈던 것도 잠시, 차근차근 손부터 시작해 팔목을 건드리고, 마침내 목을 감싸고 있는 ‘장신구’까지 타고 올라온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보물을 매만지는 것처럼, 혹은 간질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르펠은 그 손길에서 어느 때보다도 짙은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뽀뽀해도 돼요?”
그런 와중에 정작 묻는 말은 귀엽다 못해 순진하기까지 하니. 곱게 휜 눈에 옅게 짓궂음이 비쳐 보이는 것을 보면 부러 한 말인 것 같긴 했다만, 그것을 따지고 들 겨를도, 생각도 없었다.
결국 아르펠은 동경을 핑계 삼아 로한에게 달라붙던 이로 인한 불쾌감을 완전히 잊고 말았다. 은근히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진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아름다운 눈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 듯, 그렇게.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아르펠이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고 다급히 뻗은 손이 그대로 로한의 목덜미에 닿았다.
놀란 듯 동그랗게 떠진 금빛 눈은 이내 고운 호선을 그렸다. 저를 끌어당기는 힘에 순순히 응한 로한이 다른 손으로 아르펠의 몸을 껴안았다. 평소보다 뜨거운 몸이 손끝에 선명한 온기를 남겼다.
아르펠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입술이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고 말았다.
고작 한 번이지만 입맞춤을 나눠 본 적이 있어서일까, 로한은 익숙한 듯 안까지 혀로 파고들다가도 안쪽을 부드러이 헤집어 왔다.
하지만 아르펠은 그러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가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딱, 로한을 끌어당길 때뿐이었다.
“으…….”
입맞춤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덜컹거리는 마차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머리는 지나치게 올라오는 열기에 버벅거리기 바빴으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낯설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숨이 가빠지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 그것에 진저리를 치며 입술이 떨어지려는 찰나, 작은 신음을 토해 낸 아르펠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으음. 조금만 더 해도 돼요?”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열기가 어린 눈동자가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꿈결 같은 미소를 그려 냈다. 더하자고 재촉할 생각은 없었건만, 우습게도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아르펠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로한의 몸을 끌어당겼다. 어쩐지 전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만….
그렇게 둘은, 가까운 마을로 이동하는 시간 대부분을 깊은 입맞춤으로 채우고 말았다.
116
바쁘게 거리를 누비는 인파, 그들로부터 비롯된 시끌벅적한 소리. 한가롭다, 평화롭다 같은 감상만이 다분했던 다른 마을들과는 다르게 이곳은 번화가라는 느낌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경쾌한 분위기를 한껏 북돋는 것들이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옅은 서늘함을 품은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아르펠은 마차가 떠나간 곳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가 봐요. 바로 가 볼까요?”
마침 행인에게 ‘용병 길드’의 위치를 묻고 온 로한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제게로 뻗은 손을 자연스레 붙잡은 아르펠은 앞서나가는 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피데스 영지의 서쪽을 주름잡고 있는 상업 도시였다. 원래 있던 베모스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는데, 굳이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온 것은 레리아나의 소식을 뒤늦게 접한 탓이 컸다.
그녀가 베모스 마을을 진작 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두 사람은 곧장 목적지를 수정했고, 그것이 이 마을이었다. 레리아나의 정보를 얻을 겸, 앞으로의 일정을 짜볼 겸 가장 가까운 용병 길드가 있는 곳으로 걸음 한 것이다.
황도에 비견할 만큼 넓은 번화가를 지나 길게 이어지는 거리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웅장하기 그지없는 석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태껏 봐왔던 것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을 정도의 압도적인 외관이 시선을 빼앗았다.
“요즘 할 만한 의뢰가 없어.”
“얼마 전에 황궁에서 낸 공고 있잖아?”
“흥, 그 속이 시커먼 놈들의 어디를 믿고?”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온갖 소음이 귀를 울렸다. 길게 이어진 테이블을 중심으로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용병들도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 주전부리를 앞에 쌓아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온갖 정보가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일까. 몇몇은 제법 쓸 만한 정보를 입에 담고는 했으며, 개중에는 일이 수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베모스 마을의 소식을 물어다 주는 이까지 있었다.
소란스러운 길드 안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가서 보고 올까?”
추가로 개설된 듯 보이는 의뢰 게시판의 한쪽에 개미 떼처럼 몰려든 용병 무리였다. 로한은 물론이고, 아르펠까지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려 심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는 이들을 주시했다.
“음… 아니요. 저희랑은 관계없는 일이니까요.”
아르펠이 넌지시 던진 질문에 로한은 고민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하기야 했다만, 중요한 일은 아닐 테니. 그러나 둘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쪽들도 용병 아닌가? 요즘 이것만큼 가십거리인 게 어디 있다고 그래.”
등을 돌리려는 찰나 들리는, 둘의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아르펠이 자신들을 향해 말을 건 중년의 남성을 고요히 응시했다. 로한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당당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스스로의 친절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나 같은 용병은 필요 없지만, 등급이 낮은 용병들한테는 저게 천금 같은 기회가 될 수도…… 헉?!”
매끄럽게 이어져가던 설명이 뚝 끊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정확히는 아르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한 순간, 얼굴이 퍼렇게 질린 남자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르르 떨리던 그의 입술이 토막 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다, 당신은…!”
마치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것만 같은 태도였다. 아르펠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을 뿐 개의치 않았으나, 정작 뚜렷한 반응은 로한으로부터 나왔다. 수려한 미소가 깃든 눈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르펠, 누구예요?”
얼굴만 웃고 있다뿐이지 추궁의 의미가 가득한 한마디였다. 그제야 아르펠의 몸이 흠칫 떨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와 마주 잡은 손 틈새로 느껴지는 강한 힘에 불길함을 느끼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이야.”
“그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는 척했다는-”
“아니! 아닙니다! 저 이올입니다, 이올!”
남자에게서 다급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어둑하게 침전한 눈은 웃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낮은 등급의 용병일 것이라 낮잡아 본 처음과는 다르게 고개를 저어 대는 그의 행동에는 지나칠 정도로 각이 잡혀 있었다.
스스로 등급이 나쁘지 않다고 소개했던 것에 걸맞게, 그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현명히 대처했다. 긴 세월 동안 싸움터를 전전하며 쌓아온 생존 본능이 빛을 발한 것이다.
까닥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는 위기감을 느낀 탓일까. 마지막 희망을 바라보듯 아르펠을 향하는 남자의 눈이 사뭇 간절하게 빛났으나…….
“…누구?”
아르펠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주지 못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이올’이라는 이름을 들었음에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니.
“기, 기억 안 나십니까? 전에 등급 시험, 저랑 같이 보셨잖아요!”
“아.”
그 필사적인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아르펠은 한 남자를 떠올려 냈다. 로한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용병이 되기 위해 등급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제 상대를 해 주었다는 사실만큼은 생각이 났다.
물론, 딱 그것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실력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다지 뛰어난 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르펠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한은 남자, 이올에게로 향하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작은 사건 하나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근데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얼굴이 변하지를 않았습니까? 그때랑 똑같은 것 같은데.”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에서 벗어난 이올은 뒤늦게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는지 아르펠의 얼굴을 빤히 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로서는 당연히 가질 만한 궁금증이었다. 자신만 해도 지나가는 세월을 못 피하지 않았는가.
워낙 강렬한 기억이어서인지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탓에, 이올은 눈앞에 서 있는 아르펠이 십 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기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표정 하나 깃들어 있지 않은 얼굴은 사뭇 비인간적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를 향해, 아르펠은 담담히 답했다.
“제가 동안입니다.”
“……예?”
두 눈에 황당함이 서린다. 달싹이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따위의 외침을 내뱉을 것 같았으나, 그것은 단순한 바람에서 그치고 말았다. 오싹, 하고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또다시 경종을 울린 탓이었다.
“……그, 그렇군요. 정말로 동안이십니다.”
생사기로에서 수도 없이 목숨을 살려준 본능이다. 이올은 그것을 철저히 따르기로 했고, 목 끝까지 차오른 의구심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실제로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천운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쩌면 이 둘 사이에 낀 것이 일생일대의 위기라는 이상한 예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도르륵 구르는 눈동자는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듯 조심스럽게 주변의 상황을 살피기 바빴다.
그토록 믿고 있었으나 말을 걸기 전까지 어떠한 경고도 해주지 않은 제 생존 본능을 수도 없이 원망했다. 앞으로는 함부로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을 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로한이 그를 붙잡았다. 눈물겹게도 살짝 뒤로 물린 몸을 다시 원상태로 돌릴 수밖에 없던 이올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눈에서 읽히는 것이 순수한 의문이라는 점일 테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쇼, 제가 다 답해드리겠습니다!”
비굴하기까지 한 한마디였다. 부드러이 미소 지은 로한은 여전히 용병들이 몰려있는 의뢰 게시판을 향해 고갯짓했다.
“아까 말씀하셨던 그 기회라는 거, 다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등급이 낮은 용병’이라며 둘을 향해 망발을 내뱉었던 조금 전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순간 입을 앙다문 이올이었으나, 재촉하는 듯한 눈빛에 힘겹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기괴할 정도로 얼굴이 변하지 않은 아르펠만큼이나 질문을 던진 남자 또한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 얼마 전 황궁 측에서 호위 의뢰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신분, 자격, 등급… 그 어느 것도 구애받지 않는 의뢰가요. 보수도 나쁘지 않으니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몰리는 겁니다.”
“아까 본인은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음, 그야 황궁의 기사들과 용병들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찝찝하게 생각하는 놈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분명 ‘천금 같은 기회’라고 했던 것 같은데….”
“끙…….”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캐묻는 로한은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를 내비쳤다. 처음만 하더라도 관련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이올의 말을 듣고 있자니 조금씩 관심이 생겼다.
머지않은 미래에 황제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정해진 이상, 황궁의 동향은 대략적으로라도 알아두는 게 나았다. 용병 업계를 잘 알고 있는 이가 나서서 설명해 주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용병과 기사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르펠 역시 아는 바가 없어 보였다. 둘의 표정을 확인하던 이올은 이윽고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기사는 오러를 사용하는 자만이 될 수 있지만, 용병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평균적인 실력만 갖추고 있다면 오러의 유무와 관계없이 용병이 될 수 있습니다. 등급이 낮기야 하겠지만요.”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기사가 되고 싶었으나 오러 때문에 실패해 용병으로 전향한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니, 생각보다 꽤 많아요. 그들에게는 황궁의 기사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검술을 보는 것이 천금 같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117
“물론 기사가 되기를 꿈꾸던 이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력이 뛰어난 이들을 보며 견식을 넓히는 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조금이라도 올라가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눈독을 들일 만한 의뢰일 수밖에 없어요.”
‘저야 딱히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만.’ 하고, 그새 아주 조금 자신감을 회복한 목소리가 덧붙였다.
물론 돌아오는 시선은 박했다. 로한이 미심쩍은 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올이 못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한쪽은 미심쩍은 눈은커녕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불만이 쌓인다 한들 그것을 반박할 용기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애써 자신을 다독인 이올이 어색히 헛기침했다.
“…사실 아예 없던 일인 건 아닙니다. 이번처럼 의뢰 신청 조건이 거의 없는 경우는 처음이지만, 전에도 몇 번 황궁 측에서 용병들을 데리고 가 도적을 토벌한 적이 있으니까요.”
“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로한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찝찝함이 남기야 했다만, 이례 없는 일은 아니라고 이 업종에 오랫동안 종사한 이가 증언했으니 더 이상 캐물을 거리가 없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갈 수 없었다.
***
갑작스러운 만남만큼이나 이별도 빨랐다. 착실히 감사 인사까지 남기고는 눈 깜짝할 새에 가 버리는 둘에, 결국 그 자리에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이올만이 남게 되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바라마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원하는 것을 성취한 셈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허어…….”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방금 전 자신이 짧지 않은 용병 인생 중 최대의 위기를 넘겼다는 것일 테다. 그것이 지금, 이올이 안도가 듬뿍 담긴 한숨을 내쉬는 이유였다.
접수처로 향한 두 사람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올의 뇌리에는 소름이 끼치다 못해 식은땀까지 맺히게 했던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딱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남아 있다면…. 웃는 낯을 하고 사람 하나 담글 것처럼 굴었던 놈의 얼굴에서 이유 모를 익숙함이 느껴진다는 것. 자연스레 먼 과거의 일을 회상하던 이올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림잡아 십 년 전쯤의 일이다. 과거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도통 잊을 수가 없는 상대의 공격 때문이었다.
당시 오러를 쓰지 못하던 이올이었지만, 긴 시간이 지나며 실력을 갈고닦은 덕에 그 역시 오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B등급 용병의 벽을 허물고 A급까지 올라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당시의 상대가 보여 주었던 공격을 재현할 수가 없었다. 오러를 두르지 않은 검을 잘라낼 수 있었지만 그때의, 검 너머의 상대까지 단숨에 베어 버릴 듯한 소름 끼치는 무언가는 이올의 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단순히 ‘살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올은 그 질문에 확실히 아니라는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싸움터를 전전하며 그 누구보다 살기에 익숙했으니.
오히려 그것은…… ‘죽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언제나 위기 상황에서 그를 구해 주었던 날카로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러니 도저히 그 당시의 기억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잊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충격적인 공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검 하나 들지 않고서 단단한 금속을 동강 내 버리는 힘도, 그 모습을 놀란 듯 바라보는 심사위원들도, 그리고-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던 자그마한 아이도.
“설마, 그 애가…?”
앳된 얼굴형이 어딘가에 겹쳐진다. 떨리는 시선이 둘이 사라진 곳을 향했다.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꽤 순해 보이던 아이가 저렇게 자라났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더 파고들지 말라는 듯 본능이 경종을 울렸던 남자의 외견도 이제 와 다시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비교 대상을 옆에 두니 십 년 전과 티끌만큼도 달라지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한층 더 기괴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저씨!”
돌이라도 되어 버린 듯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던 이올을 일깨운 것은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말괄량이라는 느낌이 다분한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녀가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얼마 전부터 검을 가르쳐 주고 있는 젊은 용병 중 하나였다.
“금방 나온다면서 왜 이렇게 안 나와요? 다들 한참 기다렸다구요!”
“아, 미안하다. 금방 가마.”
어수룩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올이 뒤늦게 소녀를 따라나섰다. 은근한 목소리가 그를 떠본 것은 그때였다.
“근데 아까 그분들은 누구예요? 되게 잘생겼던데?”
“알면 다친다.”
“네에? 아니, 소개해 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세요! 변명이 너무 성의 없잖아요!”
불만이 가득 어린 음성이 뒤따라왔으나, 이올이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그 둘을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만큼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테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자잘한 생각들을 털어 냈다. 두 번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까지 곁들이며, 그는 그렇게 용병 길드를 나섰다.
***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접수처를 지키던 직원의 안내로 용병 길드의 깊은 곳까지 들어선 둘은… 익숙하기 그지없는 이를 마주하는 중이었다. 살랑살랑 흔드는 손에 반가운 기색이 한가득 녹아 있었다.
안내역을 맡은 직원은 발 빠르게 자리를 뜬지 오래였다. 텅 비어 있는 문가를 응시하는 로한의 눈에 은은한 황당함이 서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유사시에 이쪽으로 찾아가라’라며, 언젠가 한 번 용병 길드의 지부 위치가 담긴 목록을 쫙 뽑아 준 적이 있었다. 여러 지부 중에서도 렉시아의 계획에 손을 거들고 있는 곳을 골라 적어놓은 것이다.
이곳 역시 그중 하나였다. 레리아나의 정보를 얻기 위해, 앞으로의 일정을 짜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렉시아가 직접 나타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하나였고, 지부는 제국 곳곳에 퍼져 있었으니. 용병 길드의 수장 노릇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매번 만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지부장을 찾아 이야기만 나눌 생각이었건만, 정작 눈앞에 있는 건 렉시아였다. 활짝 웃고 있는 낯이 태평해 보인 탓일까, 로한은 그에게 왠지 모를 얄미움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웃음이 가득 서린 목소리가 로한의 물음에 답했다.
“후작가 변방의 마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거든. 둘이 향한 곳도 대충 알고 있었으니 관련된 소동은 아닐까 싶어서. 지금 보니 미리 와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이번 계시에 관한 일은 전한 적이 없었으니 어느 영지의 어느 마을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렉시아는 알고 있었다.
이 말은 즉, 뒤를 캤다는 소리다. 아르펠의 시선에 자연히 날이 섰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 것일까, 렉시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그 눈을 피하는 것을 택했다.
안타깝게도 얼굴이 따끔따끔한 게, 여전히 살벌한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다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일단 저를 찾아온 이유부터 들어볼까요?”
말을 돌리는 것 하나는 수준급이었다. 여전히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고 있기는 했으나 목소리만큼은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잘 넘어가는 듯했으나….
“혹시 레리아나에 관한 건가요?”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묻지도 않은 레리아나의 이야기를 기어코 입에 담은 것이다.
“……그냥, 대놓고 사람을 붙이지 그래?”
“네? 아니, 아니에요. 이건 오해예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이런 것까지 캐고 다니지는 않거든요? 동업자한텐 최소한의 예의는 지킨다고요!”
내내 시선으로만 불만을 표하고 있던 아르펠이 마침내 미간까지 구겨 버리는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렉시아는 다급히 고개를 저어 댔다. 이대로 가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도 몰랐다.
아르펠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이를 간절히 바라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게슴츠레 떠 있는 눈은 부추겼으면 부추겼지, 절대로 말릴 사람의 눈은 아니었으므로.
둘의 눈에 서려 있는 것이 선명한 불신임을 눈치챈 렉시아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억울함이 잔뜩 서린 숨결이 느리게 튀어나왔다.
“어제 레리아나가 이곳에 방문했습니다. 기사 아가씨도 함께요. 그 둘에게 대충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뿐입니다.”
“레리아나가……?”
“네, 두 분 이야기를 꺼냈더니 뭔가 기색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관계된 일은 아닐까 찔러봤죠.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제 실력입니다, 실력!”
결백을 피력하는 목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빙하처럼 얼어 있던 아르펠의 눈빛이 조금이지만 풀렸다. 렉시아는 그런 아르펠을 보며 숨기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푹푹 뱉어 내었으나, 곧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장난스레 운을 떼었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뭔데요?”
“레리아나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습니다.”
“흐음…….”
가벼운 물음에 로한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를 돌아본 렉시아는 햇빛을 담은 듯 찬란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꽤 가라앉아 있던 레리아나의 모습이 덩달아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지금 생각해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둘의 사이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 레리아나를 마주했을 때 혹시나, 그들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으나… 로한의 표정을 보아하니 굳이 사서 우려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거야 쉽지.”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남은 구원교의 지부를 처리하겠다 나섰고, 렉시아는 그런 둘에게 최적의 경로를 짜주었다. 그러니 그녀의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알려주기 전에 풀고 싶은 궁금증 하나가 남아 있었다.
“대신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렉시아의 시선이 아르펠에게 향했다. 대답도 채 듣지 않고 묻는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 묻어있었다.
“혹시 목줄은 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모두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피했던 소재가 화두로 던져졌다.
118
이윽고 찾아온 것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정적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던 아르펠은 시선을 아예 돌려 버렸고, 로한은 가만히 웃고 있을 뿐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 무거운 침묵을 온전히 홀로 감내하게 된 렉시아는…….
“흠, 흠.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오시면 제가 전해드리려 했던 말이 있었는데. 답은 그것부터 전해드리고 해도 되죠?”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돌렸다. 둘 사이에서 흐르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능숙하게 다른 화제를 꺼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르펠의 목에 있는 ‘장신구’를 힐끔힐끔 살피는 게, 여전히 그것의 정체를 알아낼 생각이 만연해 보이기는 했다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는 듯 렉시아가 운을 떼었다.
“이벨린이 전해달라고 부탁한 이야기예요. 황궁에서 꽤 귀찮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그때 아르펠이 건네줬던 독에 대한 건데….”
그의 손이 종이 무더기 속에서 깔끔한 필체로 작성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그것을 건네받은 로한이 눈을 가늘게 뜨곤 곧장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르펠 또한 서류를 곁눈질했다.
“쉽게 말하면, 그 독은 황궁에서 만들어졌단 거죠.”
빠른 이해를 도우려는 듯 덧붙인 목소리에 로한의 눈살이 대번 찌푸려진다. 잘근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결에는 적나라한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그 독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펠에게 쓰려 했다니.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끝부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놈의 황궁, 황궁. 이제는 그곳을 떠올리기만 해도 열이 뻗쳐 올랐다.
그 일그러진 표정을, 제게로 전해져 오는 증오를 아르펠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로한의 손등을 도닥이기만 했다. 나는 괜찮으니 속상해하지 말라는 작은 속삭임과도 같았다.
렉시아는 잠시간 입을 다물고 그들이 서류를 다 확인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던 로한의 손이 가장 마지막 장까지 넘겼을 무렵, 렉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벨린은 당분간 밖으로 못 나올 겁니다.”
“네? 그게 무슨….”
그가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로한이 놀라 되묻고, 아르펠은 고요히 시선을 마주했다. 그 나름대로의 의문을 표하는 방식이었다.
“근신을 당했다는 모양이야. 뒤를 캐다가 걸렸대.”
“…….”
빙그레 웃으며 로한의 의문을 해소해 준 렉시아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둥글게 휜 눈매가 꽤 짓궂은 것을 보면 미묘히 죄책감이 서려 있는 그의 눈빛이 재미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네 탓, 아니, 두 분 탓은 아니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부탁하지 않으셨어도 어차피 그 고집불통은 똑같이 일을 벌였을 테니까요.”
아무튼, 하며 그가 또 한 번 분위기를 바꾸었다. 먼저 시작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제가 전하려 했던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 사실 그녀가 궁 안을 들쑤시다가 근신을 당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서요. 아마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윽고 렉시아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돌돌 말려진 커다란 종이 하나가 딸려 나오기가 무섭게 위쪽에 촤르륵 펼쳐졌다. 제국의 일대를 상세하게 그려 낸 지도였다.
“그러니, 이만 두 분의 부탁을 들어 드려야겠죠?”
겸사겸사 일정도 짜 드리고. 짤막한 웃음과 함께 기다란 손가락이 지도 위를 차근차근 짚어 나갔다.
***
그 어떤 곳보다 화려하고 광활하지만, 그와 모순되게도 공허함이 느껴지는 알현실.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커다란 황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남자, 미하일은 당돌하게도 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는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흐음.”
“나아가 추측한 바로, 아르펠이라는 자에게는 당신이 제공한 독이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이미 위대한 분의 힘을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가만히 이어지는 말을 듣던 황제가 부드러이 미소를 머금었다. 당당히 실패를 밝히는 남자에게 그 어떠한 탓도 하지 않는 모습은 상냥하다 못해 우매하기까지 보일 정도였다. 남자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고개를 느리게 기울인 황제가 되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그게 다인가?”
“……!”
온화한 얼굴에는 여전히 따스한 웃음이 고여 있었으나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순간 오싹한 기분에 몸이 굳어 버렸다.
어떻게든 말을 내뱉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차디찬 북풍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처럼 이빨이 딱딱 부딪혀 기이한 소리만 나올 뿐.
“나도 참, 아쉬워서 그대를 탓하게 됐군. 그대들이 많은 노력을 해주고 있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네. 미안하게 됐어.”
“……그, 그렇죠.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눈 한 번 깜빡일 수조차 없는 극도의 긴장을 끊어 낸 것은 황제의 한마디였다. 몸을 옥죄고,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알 수 없는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랬기에, 남자는 어수룩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도 멍청하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쯤 이탈한 음이 그의 당황을 고스란히 내비쳐 주었다.
……착각인가?
부드럽고, 사뭇 여리게까지 보이는 황제의 미소를 두 눈에 담으며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자꾸만 목에 남은 가시처럼 신경을 거슬렀다.
“크, 크흠. 다른 소식이 생기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그는 그 찝찝함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노력하기보단, 빠르게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어찌 보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가 알현실을 완전히 빠져나가자마자 황제의 낯에 걸려 있던 따스한 미소가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무표정해진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본 미하일이 톡, 톡 하며 팔걸이를 불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폐하.”
직전까지 구원교의 신자가 있던 자리에 누군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완벽히 부복한 채 모습을 드러낸 오스카가 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멋대로 모습을 드러내 송구합니다. 하지만, 폐하. 감히 청하옵건대, 제가 단 한 번, 사사로이 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번뜩이는 눈매는 분노를 애써 감추려 노력은 하고 있었으나, 살의로 타오른 흔적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사로이 검을 쓰고자 하는 대상’은 안 봐도 훤했다.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을 우롱한 자를 직접 검으로 베어 넘기고자 하는 것이다.
허락해 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기세인 오스카를 바라보며 황제가 미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의 태도를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꾸짖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날 탓하지는 않는 것이냐?”
“하지 않습니다.”
그럴싸한 이유도, 어중간한 아부의 말도 붙이지 않는다. 그랬기에, 오히려 미하일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오스카를 제 옆에 두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제 앞에서 감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뻗대는 녀석은 오랜만에 봐서 재미나기는 했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허영심에 가득 찬 놈들은 미하일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마침 오스카도 불만이 쌓인 것 같았으니 그의 장난감으로 던져 주기에 딱 좋겠지. 영락없이 애완동물로 취급하는 모양새였으나, 미하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취급일지언정 오스카는 한결같이 기뻐할 것임을 알고 있기도 했고.
“오스카.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느냐?”
가만히 앞으로의 일을 가늠하던 미하일이 오스카를 향해 물었다. 물음은 짧았으나, 대답은 길게 이어졌다. 이런저런 보고를 듣고자 하는 그의 속내를 알아챈 오스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계획을 낱낱이 늘어놓았다.
미하일은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듣기만 했다. 끝내 기나긴 설명이 종점에 다다랐을 즈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질문 하나를 던진 것은 그의 자그마한 변덕이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지는 않고?”
“…제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순간 저 스스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일이라도, 폐하께서 하신 일이라면 절대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그리 말하는 오스카의 목소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단단했다.
“그리 약속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
시험을 해보는 것인지, 떠보는 것인지, 혹은 가볍게 놀려보는 것인지. 그저 평소와 같은 미소만을 띤 채 묻는 미하일에 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오스카가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는, 제…….”
신이시니까요.
붉은색 눈동자가 몽롱하게, 또 요사스럽게 빛났다. 정말 하나뿐인 신이라도 바라보듯 맹목적이고 집요한 감정이 두 눈 안에 잔뜩 뒤엉켜 있었다. 그 적나라한 시선을 마주하며 미하일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래. 이만 물러가 보려무나.”
“예, 폐하.”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인 미하일은 오스카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아주…….”
유용한 개새끼야.
어릴 적의 치기로 주워온 개새끼치고 제법 쓸모 있지 않은가. 여느 때와 같은 감상을 늘어놓으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이어 나갔다.
마침내 거대한 황좌의 뒤에 다다랐을 때, 가로막힌 벽 위를 몇 번 만지작거리자 거짓말처럼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곳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옆에 구비된 작은 등불을 손에 쥔 채 얼마나 아래로 내려갔을까. 꽤 깊은 땅속으로 들어왔다는 자각이 들 때쯤, 또다시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텅 빈 공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상자 하나. 무언가를 봉인해 두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견고한 잠금장치가 그것의 주위를 겹겹이 감싸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대여섯 개의 자물쇠들이 툭툭 떨어지고 나서야 상자가 열렸고-
“이것이…….”
그 안에서 영롱한 푸른 빛을 띠는 보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줄 거다.”
그것은, 이제는 잊힌 신의 흔적이자 과거였다.
119
“…황태자 전하?”
황태자의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하나가 본인의 책무도 잊은 채 무심코 입을 열고 말았다. 그만큼, 그가 마주한 황태자의 얼굴은 마음속 어딘가가 처참히 망가져 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그가 알고 있는 황태자는 쓸데없이 입을 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멋대로 먼저 말을 걸었다가는 몸이 저절로 떨리는 날카로운 눈초리와 함께 한 소리를 듣고는 했…….
“……?”
쿵.
크게 깨질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황태자, 루시엘은 꾸짖기는커녕 말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기사가 내뱉은 말 따위는 듣지도 못한 것처럼. 쾅 닫히는 문이 퍽 단호하게 느껴졌다.
문을 닫고,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자각이 들고 나서야 루시엘의 걸음이 비틀거렸다. 촛대 위에 붙여 놓은 불 또한 짧게 일렁이는 것이, 그의 혼란스러운 심사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 하하.”
이윽고 터져 나온 것은 허탈한 웃음소리였다. 자조적이게도,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게도 들리는 것이 공허한 집무실 안을 울렸다.
아득하기만 했던 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펠이라는 자에게는 당신이 제공한 독이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찬찬히, 그리고 끊임없이… 절대로 외면하지 말라는 듯. 몇 번이고 반복되는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은 루시엘이 천천히 손을 올려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가 그 대화를 훔쳐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하필이면 아버지의 전언을 이벨린에게 직접 전하러 가서. 그녀가 남긴 말이 신경 쓰여서. 그녀가 던진 종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읽어서…… 그렇게 돋아난 의문을 참지 못하고 알현실을 찾아가서.
아니, 어쩌면 이 또한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몰랐으면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해 보는, 무의미한 도피.
‘처음 뵙겠습니다. 아르펠입니다.’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보았음에도 한 치의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덤덤한 눈을 마주하고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나. 멋대로 인사치레를 생략해 버리고, 감히 황태자인 저를 문전박대하려는 행동을 보고 무어라 생각했는가.
무엄하다? 발칙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무엇도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저 거슬릴 정도로 세게 뛰는 심장과 횡설수설하고 있는 제 목소리뿐이었다.
‘전하, 저는…….’
이윽고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이 또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의 일부였다.
여전히 감정 한 톨 섞여 있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에 바람 소리가 섞여 들어간다. 흔들리는 풀잎의 소리가 겹쳐 들릴 때면 은은한 꽃내음이 덩달아 맡아지고는 했다.
모든 기억에서 아르펠이 고백에 정확한 대답을 건네주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답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어떤 값비싼 보석에도 견줄 수 없을 듯한 보랏빛 눈동자는, 언제나 자신을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몇 번이고 그때의 기억을 곱씹고 있지만, 이는 미련이 아니었다. 다른 이에게로 향하는 애정을 제게로 빼앗아 오고 싶다는 주제 모를 욕심도 아니었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진실이었으니, 아르펠과의 만남을 더듬으며 추억할 뿐이었다. 이미 맺어진 인연을 억지로 갈라서 미움 받을 마음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문득 드는 생각 하나를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기만했나?’
폐하께서 가는 길이 곧 자신이 가는 길이다.
폐하의 뜻은 자신의 뜻이다.
루시엘은 그렇게 배워 왔고, 그렇게 행동해 왔으며,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폐하가 아르펠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 또한…. 생각이 나아가기 무섭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다급히 숨을 들이켠 루시엘이 가슴께를 손으로 짓눌렀다.
이제 와서… 역겨움을 느끼고 만 것이다. 우습게도.
***
렉시아가 짚어 준 길을 따라 떠나온 지도 며칠. 겸사겸사 길목에 있던 몇몇 구원교 지부까지 차근차근 부순 것치고는 꽤 빠르고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여태껏 걸어온 길을 가늠해 본 아르펠이 생각했다.
이건 모두, 베모스 마을에서 있었던 일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현재 구원교는 전체적으로 활동을 멈추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일곱 간부 중 하나가 죽은 탓이겠지.
“아르펠, 여기서 밥 먹고 갈까요?”
“응, 그래.”
동시에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던 그 기괴한 몰골이 다시 한번 떠올랐지만, 로한의 물음 한 번에 모습이 희미해졌다. 이윽고 마주 잡은 손을 타고 올라오는 따스한 체온까지 더해지자 머릿속을 맴돌던 흉측한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이 새삼 가슴을 간지럽게 만들었던 탓일까. 고개를 끄덕인 아르펠의 얼굴에 자연스레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내비친 한 자락의 설렘에 가까웠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른 음식점에 비해 배는 혼잡한 곳이었다. 맛이 좋은 것으로 입소문도 났지만, 주점까지 겸해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입구부터 사람이 가득했기에 북적이는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둘이서 식사를 하기엔 나쁘지 않은 자리를 잡았건만.
“윽…….”
문제는, 이곳이 그때그때 싱싱한 제철 재료를 주재료로 삼아 요리를 선보이는 특이한 음식점이라는 데에 있었다.
종업원이 내려놓은 접시에는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싱그러운 주황빛의 채소가 한가득했다. 언뜻 향긋한 당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도 같았다.
반사적으로 낯을 구긴 로한이 옅은 신음성을 토해 냈다. 미처 싫은 티를 숨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 놓고선 뒤늦게 눈동자를 데구르 굴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아르펠은 하마터면 대놓고 입술을 씰룩일 뻔했다. 조금, 아니. 많이 귀여워서.
“조금만 있다가 다른 곳 갈까?”
좁은 테이블 위에 늘어선 당근 요리를 포크로 장난스럽게 찌르며 속삭였다. 묻는 목소리엔 은은한 웃음기가 서린 채였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였다. 로한은 그것에 아주 작게 불만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반박을 내뱉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언젠가, 아르펠이 ‘사랑을 모른다’라고 말했던 때를 로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을 모른다고 해서 그의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펠이 로한의 감정에 감응하듯, 로한 또한 그가 내뱉는 말에 한가득 담겨 있는 다디단 애정으로 흠뻑 적셔질 때가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는 다정한 배려가, 간혹 던져 주는 어설픈 위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먼저 붙잡아 오는 손이 그랬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바람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아이 취급하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발그레 붉힌 채 고개만 느리게 끄덕여 보이는 수밖에. 곁에 놓인 음료만 줄기차게 마셔대는 움직임은 사뭇 다급하게도 보였다.
“크흐…… 술맛 좋다!”
“…젠장. 요즘 일이 왜 이렇게-.”
“요즘 옆 마을에서 멧돼지가 그렇게 기승을 부린다던데.”
둘 사이에 오가던 이야기가 끊기자 그 사이를 메꾸듯, 왁자지껄 떠드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식 선택을 완전히 실패했음에도 둘이 자리를 뜨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혹, 레리아나와 카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봐. 둘이 다녀간 곳이라면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을 테니, 마을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그들의 위치를 추측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수고를 들이게 된 까닭은 얼마 전 찾아온 악천후 때문이었다. 렉시아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라 움직였지만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랐을 즈음,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이미 마을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때부터 정보를 물어물어 뒤를 쫓아야만 했다.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주점은 온갖 소문과 정보의 성지인 법. 실제로 이 방법은 꽤 나쁘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길을 헤매는 일 없이 곧잘 뒤를 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혹시 그 얘기 들었나?”
그때, 수많은 목소리에 어떤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주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 주겠다는 듯.
“요즘 용병들이 계속 실종되고 있다더군. 그거 때문에 용병 길드 측에서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던데…….”
“뭐? 실종?”
“씁, 조용히 해! 비밀리라고 했잖나, 비밀리!”
여타 쓸데없는 대화들과 하등 다를 것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남자는 퍽 흥미로운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잠시 미간을 좁혔던 아르펠이 로한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용병의 실종’에 대한 대화를 듣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말일세, 이게 영 꺼림칙한 거야. 그래서 내가 아는 지인이 개인적으로 조사해 보니까… 사라진 용병들에게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는 거지.”
“공통점? 뭐였길래 그러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들켜서는 안 되는 은밀한 이야기인 건지.
말을 전해 주던 대각선에 앉은 남자는 맞은편에 앉은 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 전, 좌우를 휙휙 돌아보는 열정까지 내비쳤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의뢰 기억하나? 황궁이 용병 길드에 맡겼던 의뢰 말이야.”
“아, 알지, 알지. 그거 꽤 유명했어. 맡았던 놈들이 워낙 떵떵거렸어야지. 동네방네 출셋길 열렸다고 얼마나 소리를 치고 다니던지,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어. 그래 놓고선 의뢰가 끝나고 하나같이 길드로 돌아왔었지? 출세는 개뿔…… 어, 설마?”
“설마가 그 설마야. 사라진 놈들이 모두 그 의뢰를 맡았던 놈들이라는 거지. 황궁에서 조사차 인력을 파견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짓기야 했다지만…….”
숨을 한 번 가다듬은 남자가 덧붙였다.
“누가 봐도 찝찝해 보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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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주 찝찝하네요.”
“헉……!”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남자는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뒤에서 살며시 몸을 누르는 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새 자리를 옮긴 로한이 남자의 뒤에 기척 없이 서 있었다. 아르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빈자리에 앉은 그에, 직전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또 다른 남자는 기절할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하시던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
“물론, 공짜는 아니고요.”
반짝이는 다섯 개의 금화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어느새 로한 역시 아르펠의 옆에 나란히 착석한 지 오래였건만, 금화에 시선이 고정된 둘의 주의를 끌지는 못한 듯했다.
흔들리는 눈을 감추지 못하던 남자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시는 건-.”
어느새 말투에 존칭이 곁들여졌다. 본인은 인지조차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로한은 그런 그를 향해….
다섯 개의 금화를 더 내밀었다.
“…….”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방금 전,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음에도 반강제로 거절한 셈이 되었던 또 다른 남자가 일행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대충, ‘거절하기만 해봐’ 따위의 눈빛에 가까웠다.
“…제이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콜빈입니다!”
“이봐! 이야기하는 건 난데 네가 왜 소개를 해?!”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빠르게 뒤집혔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남자들의 고개가 끄덕여지기 무섭게 가히 충성스러운 태도로 자기소개를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돈을 나누느니 마느니 말싸움을 해 가며 가볍게 티격태격하기까지 했다. 조금 전 로한이 두 사람에게 건넨 열 개의 금화가 평민에게는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로한의 빤한 시선을 버티지 못한 둘이 알아서 입을 다물어 버렸기에, 이러한 상황은 잠깐에 불과했다. 돈을 어떻게 나누는지는 관심 없으니 이야기나 시작해 보라는 무언의 재촉을 받았던 탓이었다.
결국 자신을 제이크라고 소개한 남자는 주섬주섬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실 제 친구가 용병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의 친구가…….”
그렇게 몇 분간, 그의 이야기는 장황하게 이어졌다.
기실 이야기를 듣고 내린 결론은 조금 전에 엿들었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금화 열 개가 결코 아쉽지 않았던 것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죠?”
“응. 확실히.”
그가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일 테다. 음식의 값을 치른 뒤 주점을 나서는 둘 사이에 짧게 대화가 오고 갔다.
거짓임이 들통날 시 끝까지 쫓아가 그 대가를 배로 받아내겠다는 경고를 대놓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희게 질릴지언정 그는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믿을 만해 보였다는 소리다.
로한은 잠시 고개를 돌려 뒤쪽의 주점을 바라보았다. 심장 언저리에 자꾸만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일이 있음을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신경 쓰이면 용병 길드에 가볼까.”
그런 로한을 곁눈질로 살피던 아르펠이 물었다. 톡톡, 살짝 구겨져 있는 로한의 미간을 매만져 주니 금빛 시선이 금세 따라 붙어왔다.
“걱정해 주는 거예요?”
“응.”
은근히 애교가 배어 있는 물음이었음에도 아르펠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결국 나직이 웃음을 터뜨리고만 로한은 대답을 대신해 그의 손을 마주 잡는 것을 택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그 전에.”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조금이지만 어색함이 서려 있었다. 다음 식당에는 부디, 당근이 아닌 다른 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담긴 탓일지도 모르겠다.
***
로한의 작디작은 바람이 통한 것일까. 두 번째로 방문한 식당은 꽤 성공적이었다.
배불리 한 끼 식사를 마무리했을 때는 두 번째 식사임을 감안해도 제법 늦은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둘은 용병 길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러 의뢰가 모여드는 곳답게 밤낮을 불문하고 불이 켜져 있었으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후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낼 방법을 고뇌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볼까. 접수처에 있는 안내원을 붙잡고 물어볼까. 의뢰 게시판을 뒤져볼까.
그것도 아니면 접수처에 있는 이에게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터다. 이곳이 렉시아가 짚어준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지부’ 중 한 곳은 아니었지만, S급 용병패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을 보여 준다면 어느 정도의 도움은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얼핏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로한 님? 아르펠 님?”
고개를 돌린 아르펠이 그들을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흐릿한 이목구비의 중년 남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항상 렉시아의 옆에 있던 짙은 다크서클이 특징적인 남자, 정도일 뿐.
“…너무하십니다! 전에도 기억하지 못하시더니!”
데인이라고요! 데인!
빤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는 두 사람을 보고 무언가 눈치챈 듯 데인이 크게 소리쳤다. 주변을 왱왱 울리는 목소리에 억울함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하…….”
멀뚱히 서 있던 아르펠은 한 박자 늦게 인사말을 건넸다. 푹 한숨을 토해 내는 데인의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죄송합니다. 최근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거든요.”
대신 사과다운 사과를 건넨 것은 로한이었다. 그 역시 데인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물론, 용건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로한의 낯에 의문이 서렸다. 그도 그럴 게, 여태껏 데인을 마주칠 때면 렉시아를 보러 갔을 때이거나, 그를 마주했을 때 외에는 없었지 않나. 하지만 지금의 데인은 다른 용건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음… 레리아나 님께 말씀드렸으니, 두 분께도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레리아나? 걜 만난 겁니까?”
“예. 하루 전에 이 마을에서 만났는데… 문제 있나요?”
레리아나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로한의 표정이 미묘히 굳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기라도 한 듯, 뒤늦게 덧붙인 물음이 위태롭게 떨려왔다.
데인이 설명을 이어나간 것은 로한이 고개를 젓고 난 뒤였다. 그 위에 곁들여진 적나라한 한숨이 안도의 의미로 느껴지는 건, 과연 기분 탓일까.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힌 아르펠이 데인을 응시했다.
“제가 여기 온 건… 크흡, 컥! 쿨럭!”
하필이면 말을 막 시작하다 아르펠의 눈과 딱 마주쳐 버린 그는 거하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여태껏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우왕좌왕할 정도의, 사람 하나 보낼 것 같은 기침이 쏟아져 내렸다.
저 눈에 서린 건 단순한 못마땅함일까, 그것도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신호일까. 데인은 그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어 냈다. 오래전부터 아르펠을 봐 오며 그의 남다른 면모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흠, 흠.”
기침이 완전히 멎고,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어색히 아르펠의 눈치를 두어 번 살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야.
“최근 용병들이 실종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아십니까?”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이곳에 방문한 용건에 대해 설명하려 운을 뗄 수 있었다. 그대로 ‘용병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가 싶었다.
“잠시만요.”
잠자코 데인의 말을 듣던 로한이 데인의 이야기를 끊기 전까지는.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주제가 낯설지 앟았던 로한은 그간 알게 된 정보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황궁의 의뢰, 실종된 용병, 그리고 숨겨진 배후의 이야기까지.
“…이미 알고 계셨을 줄은 몰랐네요.”
데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그는 표정을 굳힌 채 말을 덧붙였다.
“그럼 설명이 더 쉽겠군요. 저희가 이 마을에 찾아온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두 분께서 들은 게 마냥 허무맹랑한 헛소문은 아니라는 소리죠.”
데인이 뒤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용병 길드에 들어와 그를 마주친 순간부터 눈에 띄던 이들이었다. 색이 다른 용병패가 그들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데인을 따르는 용병들인 듯했다.
“렉시아 님의 명령으로 저희는 실종된 용병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고, 얼마 전 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말은…….”
“예. 실종된 용병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이 마을입니다.”
그 말에 로한이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문득 이번 여정을 시작하기 전, 잠시 들렀던 용병 길드에서 ‘특별한 황궁의 의뢰’라며 떠들어댔던 용병들의 목소리를 떠올린 것이다.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여겨 넘겼건만, 그때 느꼈던 잠깐의 찝찝함은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나 제 앞에 찾아오고 말았다.
이것이 우연일지, 필연일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일, 최대한 세세하게 들어 보고 싶은데요.”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진 이상 황실이 관여되었음은 기정사실과 다름없는 것.
그러니 이번 황궁 의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누가 참여했는지, 그중 누가 실종됐는지, 실종된 이들과 실종되지 않은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그들의 신분, 성격, 실력, 외모, 가정사까지……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무엇이 닥쳐오든 그것에 대응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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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들의 불빛도 하나둘씩 꺼져가는 깊은 밤, 로한과 아르펠은 여전히 용병 길드에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곳의 2층, 구석진 방에 잠시 신세를 지는 중이었다.
“음…….”
그런 곳에서, 로한과 아르펠은 바닥에 온갖 종이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모두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 혹시 몰라 가져온 것들이라며 데인이 넘겨준 자료들이었다.
말없이 그것을 들여다보던 로한이 작게 침음을 흘렸다. 흰 종이, 그리고 검은 글자. 한참 동안 서류를 눈에 담았으니 피로를 느낄 만도 했다. 고개를 돌려 로한을 바라본 아르펠이 넌지시 물었다.
“잠깐 기댈래?”
“그래도 돼요?”
곧장 되묻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빨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전까지 얼굴에 서렸던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주 본 눈동자는 잔뜩 기대감이 어려 반짝반짝 빛이 나기까지 했다.
권유를 받았으니 내킨다면 곧장 기대면 될 텐데, 곱게 휘는 눈매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착각인가 싶지만, 그런 착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는 맹목적인 눈빛에, 감정이 아닌가.
의아함이 들었지만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만 해도 가슴 깊숙한 곳에 겹겹이 쌓이는 충족감이 계속해서 행동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에 로한은 냉큼 아르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내 놓지 않고 있던 서류들은 진작 손에서 떼어낸 지 오래였다. 팔랑팔랑 떨어져 내린 종이들이 다시금 바닥에 흐트러졌다.
“그만 보고 싶어요….”
“거의 다 봤으면서.”
“그래도.”
아르펠은 제 어깨에 고개를 비비적대는 로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칭얼거림이 새어 나올 때마다 심장이 둔중하게 울려대기를 반복했다. 그로서는 퍽 기꺼운 감각일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으면 따스한 체온과 끝 모를 애정이 느껴진다. 로한을 껴안고 있으면 그것이 더 잘 느껴져서 좋았다.
“이것저것 정리도 해 줬잖아. 잘하던걸.”
그의 등을 느리게 토닥이던 아르펠이 속삭였다. 그 짤막한 속삭임 안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언뜻 들으면 다정하게만 들리는 위로 너머, 은연중에 서려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었다. 간혹 제게 어리광을 피우는 그를 볼 때면 언제나 그랬다. 여전히 의지가 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울던 아이를 달래주던 과거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으니.
다만 이 ‘어리광’은 짧았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한은 어른스럽게 행동하고는 했으니까. 그러니, 원래라면…….
“얼른, 다 끝났으면 좋겠다…. 그렇죠?”
지금쯤 그만두고는 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덧붙여지는 말에 규칙적으로 로한의 등을 두드리던 아르펠의 손이 뚝 멈췄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제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는 이를 향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전해져 오는 감정만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흘려 넘길지도 모르는 짧은 중얼거림에 불과했지만, 아르펠은 그것이 어리광이라는 이름으로 한 겹 감싸인 진심임을 모르지 않았다.
이내 뻗어진 손이 그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애정이 한 올 한 올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느리게 대답한 아르펠이 몸을 움직였다. 고개를 비틀어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끝에 입을 맞춘 것이다. 내내 고개를 묻고 있던 로한이 흠칫 몸을 굳힌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이 슬쩍 들렸다.
“……아르펠은, 진짜.”
한참을 비비적댄 탓에 잔뜩 흐트러진 앞머리 아래로 가느다랗게 뜬 눈매가 드러났다. 언뜻 보아도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금빛 동공이 여러 감정으로 덧입혀져 일렁이기를 반복했다.
밤늦은 시각, 둘만이 있는 공간이다. 쥐고 있던 고삐를 먼저 놓은 것은 아르펠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잠깐. 아주 잠깐이라면…….
그렇게 생각한 로한이 아르펠과의 거리를 바짝 좁힌 순간.
“깜빡하고 이걸 빼먹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확인하고서 돌려놓지를 않아…서……?”
기별도 없이 갑작스레 열린 문 사이로 데인이 종이 한 뭉치를 손에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 자료를 추가로 들고 오는 것이 민망하기라도 했는지 얼굴 가득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채였다.
물론, 그것이 사라지는 것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딱 붙어 있는 둘을 응시하는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사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데인은 이 정적에 숨이 막혀 왔다. 아니, 숨을 쉬려는 시도 자체가 과분한 것일지도.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하… 하하하.”
끔찍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를 뚫고 나온 것은 자그마한 웃음소리였다. 그마저도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한 듯 괴상하기만 했다.
“문이… 문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그쵸? 문을 두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걸 까먹고…!”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몸이 방에서 점점 멀어졌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뚝딱거리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웠으나 그 노력이 가상했던 탓일까. 데인은 마침내 문고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희망이 들어찬 얼굴이 순식간에 비장한 기색을 띤다.
“다음부터는 꼭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아니, 아예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다른 놈들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방해 안 할게요!”
그 외침이 마지막이었다.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남은 것은 그가 바닥에 두고 간 자료들이 다였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로한이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처음부터 문을 아예 잠가놓을 것을.
***
다음 날, 데인은 다시 한번 방에 찾아왔다. 이번엔 노크까지 제대로 하고서. 정확히 세 번의 두드림과 허락 끝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 일련의 행동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일전에 건네받은 자료에 대한 이야기는 한 박자 늦게 시작되었다.
실종된 용병들에게는 ‘황궁의 의뢰’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몇 가지 존재했다. 낮은 실력, 안 좋은 가정 형편, 실력 향상에 대한 욕심, 그리고….
“기사가 되고자 했으나 실력 부족으로 번번이 탈락,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용병으로 전향했다… 이 정도겠네요.”
“예. 그게 가장 주목할 부분입니다.”
로한의 깔끔한 정리에 데인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이들이 모두 기사가 되길 원했다는 점. 이것이 가장 눈에 띄는 공통분모였다. 그러니 황궁에서 딱히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의뢰를 내걸었을 때 재빠르게 지원했을 테지.
“의뢰를 받은 모두가 실종된 게 아니고, 사라진 이들도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니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죠. 하지만 이들의 성향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겁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들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가 황궁이다. 그런데도 황궁이 이번 실종과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 데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저희는 현재 이 마을을 중심으로 조사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곳이 실종된 용병 중 하나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니까요. 레리아나 님 역시 얼마 전 조사에 합류하셨고…….”
그 뒤로 그의 설명이 쭉 이어졌다. 로한과 아르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레리아나가 이 조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미 어림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이 연관된 이상 그녀 역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데인의 말을 듣고 있는 둘이 그러했듯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용병의 인상착의를 외워 두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잿빛 머리, 까맣게 탄 피부, 입가에 남아 있는 커다란 흉터. 자잘한 이목구비 따위를 세세히 설명한 것을 잠시간 읽어 내려가던 로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가실 겁니까?”
“예. 빨리 시작하면 할수록 좋으니까요.”
“그건… 맞긴 하네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둘은 멍하니 서 있는 데인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데인은 보았다. 대체 왜, 여태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나 싶을 만큼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아르펠의 목에 있는 무언가를.
“어…?”
멍청한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이틀 동안 여러 번 얼굴을 마주했음에도 이상함 한 번 느끼지 못한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만큼 번개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저거-.
“목…….”
목줄인 것 같은데, 라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으나 안타깝게도 그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을 향하고 있던 로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데인은 말문이 턱 막혀버리는 것을 느꼈다.
수년간 쌓아온 직감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미 운을 떼 버린 이상, 여기서 할 말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우레와도 같이 크게 들리고, 찰나의 시간은 영겁처럼 길게 이어졌다. 빈말로도 좋은 상사라고 할 수 없는 렉시아의 곁에서 수많은 일을 처리하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기까지 했다.
마침내, 데인은 달싹이던 입술을 열어 마저 문장을 마무리했고,
“목… 목걸이가. 정말로, 잘 어울리십니다…….”
그가 던진 승부수는 꽤 놀라운 효과를 내었다. 잠시 눈썹을 들썩이는가 싶던 로한이 빙그레 미소를 그려 보인 것이다. 반짝이는 두 눈은 은근한 만족스러움마저 품은 듯했다.
“감사합니다.”
심지어, 감사 인사까지 곁들여가며.
두 사람은 그 인사를 끝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데인은 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후에도 여전히 얼어붙은 상태였다. 지난밤에 보았던 상황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윽고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 데인이 제 몸을 격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잘했다… 잘했어, 데인.”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질문하지 않은 보람이 여기 있구나. 그가 뿌듯함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긴긴 세월 제대로 된 복지 하나 없는 진흙탕에서 구른 보람을 드디어 찾은 것 같았다.
“……뭐 하세요?”
비록 뒤늦게 찾아온 부하에게 괴상한 시선을 받기야 했지만.
122
일전에 방문했던 피데스 영지의 상업 도시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현재 그들이 있는 곳 역시 만만치 않게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마을이었다.
그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농지의 면적이 전체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어 사람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라는 것일 테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니.
“이제 여기만 돌아보면 될 것 같아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로한이 말했다. 손에는 오늘 아침 용병 길드에서 출발하기 전 데인이 전해 주었던 지도를 꼭 쥔 채였다.
며칠 전부터 용병들이 이 근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로한과 아르펠이 살펴볼 곳은 얼마 없었다.
지도 위에 붉게 표시된 지점은 총 다섯 곳. 대부분이 미심쩍은 구석이 남은 곳이거나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한 곳이었고, 아쉽게도 별다른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둘은 마지막 표식이 있는 지점에 다다라 있었다.
“…사람이 생각보다 더 없네.”
아르펠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태껏 둘러보았던 곳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북적인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어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이 제법 눈에 띄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이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이 부근은 사람조차 몇 명 살지 않았다. 집은 있었지만, 그곳에는 쥐 죽은 듯한 고요함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척 하나,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뭔가…….”
이를 하나하나 둘러보던 로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버려진 집들을 살펴볼수록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신경에 거슬렸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천천히 내려간 시선이 잡초 하나 자라나지 않은 깨끗한 마당을 살폈다.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 흐트러진 물건들만이 남아 있는 집 안쪽과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아르펠이 집의 외벽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집을 비운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집의 외관은 깔끔하다. 안쪽이 어지럽혀지긴 했으나 모두 집주인이 급히 짐을 싸다가 남은 흔적에 불과했다.
쌓인 먼지도 그리 두껍지 않았으니, 이들은 이 근방을 떠날 이유가 생겨 얼마 전 갑작스럽게 짐을 싼 것일 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저 집은…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로한 또한 공감하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다른 말을 덧붙이곤 손으로 어느 곳을 가리킨 것이다.
자연스레 그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아르펠의 시선이 돌아갔고, 덕분에 그는 맞은편에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 더 심각하네.”
조용히 그곳을 살핀 아르펠이 냉정히 평가했다.
금이 간 외벽, 불에 탄 흔적, 깨진 창,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있는 주변의 땅까지. 조심스레 살핀 안쪽은 바깥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도둑이 든 것처럼 온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 바닥 중간중간에는 피처럼 보이는 거무스름한 액체가 말라비틀어진 자국이 적나라하게 남아있기까지 했다. …집주인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참혹한 과거의 일부를 보여 주는 현장이었음에도 아르펠의 낯은 한 점의 변화조차 없었다. 핏자국을 응시하는 눈이 가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듯 차디찼다. 이것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이제 더 이상 없었으니.
“다 둘러봤어?”
“네.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네요. 이 장소가 실종된 용병과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 근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이 집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사건이 사라진 용병을 찾을 단서가 될지는… 미지수였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아주 낮은 확률일 테지.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로한은 자신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밖으로 빠져나온 참이었기에, 폐허가 된 집의 뒤쪽에 있는 산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산적 조심……?”
아르펠이 가리킨 것은 그 앞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 표지판 하나였다.
그 누구도 못 보고 지나칠 수 없게 하려는 듯 나무 표지판에 요란한 색이 덧입혀져 있다. ‘산적 조심’이라는 큰 문구 아래에 세세한 주의사항을 나열한 종이까지 덩달아 붙어 있었다.
요약해 말하면 조금 전 둘이 다녀온 집에 살던 이가 산적에게 당했으니 집 안팎으로 방비를 잘 해 두라는 소리였다. 산적을 토벌하기 위해 용병에게 의뢰를 맡겼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산 중턱에 산적의 주둔지가 있는 것 같다며 산길을 이용하지 말라는 강력히 주의까지.
“…확실히, 산적 때문에 사람들이 다 마을 안쪽으로 이동한 모양이네요. 그래도 용병들을 모집했다면 산적은 금방 토벌됐어야 할 텐데.”
무사히 토벌되었다면 그 소식을 전달 받았을 거고, 집을 떠났던 이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을 테다. 그런 낌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맡겼다던 의뢰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로한이 미간을 살며시 구겼다.
“찝찝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산적이 신경 쓰여?”
“보통 외진 곳이라도 마을을 직접 공격하는 일은 드무니까요.”
대개 산적들은 산길을 이용하는 행인의 짐을 약탈하거나 상인 무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배를 채운다.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할 정도로 성과가 없을 때는 근처 마을을 공격해 도적질하는 일이 있다고도 들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딱 한 집만 노린 후 사라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산적들의 행동도, 마을의 대처도, 용병 길드에 맡긴 의뢰가 이토록 느리게 진행되는 것도 하나 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산적의 짓이 맞긴 할까?
“일단 돌아가자. 용병 길드로 가면 의뢰를 정말 처리하고 있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겠지.”
로한은 여러모로 거슬리는 점이 많아 보였지만, 아르펠은 그를 느리게 다독이는 것을 택했다. 지금은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늘이 벌써부터 붉은 기운을 진하게 내비치는 것이, 곧 밤이 찾아올 듯했다.
덩달아 하늘을 바라본 로한이 머쓱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것이 제법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것 같다며.
“오늘은 길드에 잠깐 들렀다가 여관으로 돌아갈까.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전 괜찮은데…….”
“피곤해 보이니까 안 돼.”
곧장 돌아오는 단호한 대답에 로한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의사를 묻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다가도 문득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강제 여관행이 결정되기야 했지만, 아르펠에게 걱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퍽 기껍게 느껴진 것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와중에도 세심하게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그의 배려가 사랑스럽기도 했다.
“알았어요. 대신 가기 전에 어제 갔던 그 주점에 가서 음식도 싸 가요. 지금 돌아가면 주문할 수 있겠죠?”
“아마 그럴 거야.”
“그럼―.”
어서 가자고, 말갛게 미소를 지은 로한이 아르펠의 손을 잡고 그리 말하려던 때였다.
누군가 그의 시야 한구석에 스쳐 지나갔다.
옆모습에 불과했지만, 전반적인 이목구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잿빛 머리에 구릿빛 피부, 언뜻 보인 입가의 흉터까지.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금세 사라져 버리는 이를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아르펠.”
그를 지켜본 것은 로한뿐만이 아니었다. 나지막한 부름에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 역시 방금 전 지나간 남자를 보았다는 듯.
지나치게 익숙한 인상착의. 데인이 건네주었던 자료를 몇 번이고 살폈기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던 ‘실종된 용병들’ 중 하나였다.
***
복잡한 산길을 헤쳐 지나가는 발걸음이 있었다.
수도 없이 일대를 돌아다녀 본 것처럼 나아가는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움직였을까. 좁다랗게 이어지던 숲길이 넓게 트이고, 안쪽에 숨겨져 있던 임시 거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숲을 지나온 걸음의 주인, 제링거는 재빠르게 거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여태 저를 기다린 듯 숨을 죽인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은?”
“무사히 끝냈다. 곧 덫에 걸려들 테니 우린 계획대로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겠지.”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어렸다. 간혹 한두 명, 미약한 망설임이 남아 있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허리춤에 매단 검 자루를 자꾸만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것이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고스란히 내비쳤다.
“저,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러다가 개죽음이라도 당하는 건……!”
그중 유일하게 겁먹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던 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이 말을 꺼내는 것조차 그에겐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 말에 대꾸한 것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었다. 한심함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목소리에 질문한 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링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감정한 시선이 남자에게 닿았다.
“여기서 그만두면 네가 평범한 용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나?”
“……!”
“이 마을의 산적을 이용한 순간부터 너는,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다. 마을 변두리에 살던 친절한 노부부. 그들을 죽인 게 누구라고 생각하지? 우리가 딱 하나 살려 놓은 산적?”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던 제링거는 단호히 덧붙였다.
“아니. 그들을 죽인 건 우리다. 그리고 너이기도 하지.”
여전히 망설임에 떨고 있던 남자가 그 말에 얼음처럼 굳었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제링거는 코웃음을 치기만 했다.
“이곳에 주둔하는 산적을 토벌하니 영웅이라도 될 줄 알았나? 천만에. 산적 하나를 살려 놨고, 그를 협박해 마을 사람을 죽이게 했다.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우린 남자의 제안을 받았어.”
그러니 그들은 살인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강해지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만큼은 같을 터.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또한, 제링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일에 깊게 가담해 버린 이상, 멋대로 이 판 안에서 빠져나가려 한다면…….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선택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걸 명심하도록.”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123
“이거, 아무리 봐도….”
잔잔하게 비추던 노을마저 사라지고 사방이 어슴푸레해질 시각, 로한이 얼굴을 구기곤 중얼거렸다. 찝찝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전혀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워낙 상황이 정신없이 흘러간 탓이었다. 실종된 용병이 느닷없이 나타났고,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가. 로한과 아르펠은 숲으로 향하는 그를 쫓기에 급급했다.
깊은 숲에 발을 들였을 즈음에서야 이성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사고가 의문을 제기했다. 뒤늦게 숲 안쪽을 살핀 아르펠이 덧붙였다.
“흔적이 옅어졌어.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이 아닌 것 같아.”
길은 여전히 나 있었지만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은 옅어져 있었다. 흙길이 좁아지고, 주변에 자라난 풀이 한층 더 무성해졌으며 간간이 볼 수 있었던 길 안내 표지판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용병, 다급히 숲으로 향하던 발걸음, 숲의 지리를 완전히 꿰고 있기라도 한 듯 금세 사라진 기척까지.
실종되었다던 용병이 왜 사람도 드나들지 않는 이런 깊은 숲속으로 기어들어 와 있는 걸까. 누가 봐도 수상한 꿍꿍이를 가진 사람의 행동이지 않은가.
그들이 용병을 목격한 곳도 사람의 왕래가 극도로 드문 마을 변두리 지역이었다. 어쩌면 그 행동조차 노린 것일 수도 있다. 거슬리는 점들을 하나하나 상기해 낸 로한의 눈이 느리게 침잠했다.
“…유인당한 모양이네요.”
그의 추측이 맞다면, 이런 외딴 숲속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하나일 터.
실제로 둘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주겠다는 듯 사방에서 조금씩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가 담긴 움직임에, 로한이 작게 속삭였다.
“아르펠.”
“응.”
내뱉은 것은 이름 하나뿐이었건만 아르펠은 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후드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는 성인 주먹만 한 은색 공 하나를 꺼내 들고선…… 이내, 망설임 없이 하늘 높이 던져 버렸다.
퍼엉―!
하늘에 붉은 불꽃이 터졌다. 용병 길드를 빠져나오기 전 지도와 함께 데인이 손에 쥐여 주었던 것 중 하나였다.
‘최근 길드에서 개발한 물품 중 하나입니다. 외부에서 일정한 힘을 가하면 터지는 구조인데, 화력은 약하지만 터질 때 나오는 불꽃색이 선명해서 신호탄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더군요.’
혹시나 조사 중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이걸 던져 주세요.
믿음을 주려는 듯 활짝 웃어 보이던 데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당장 저녁과 밤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어두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장담할 만도 했다며.
아르펠의 돌발 행동과 동시에, 코앞에 있는 수풀 아래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시린 칼날이 금방이라도 로한의 목을 끊어버릴 듯 매섭게 들이쳤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붉은색의 불꽃이 습격자의 얼굴을 고스란히 비춰 주었다.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은 눈이 살기로 번쩍였다.
그 찰나의 순간.
“이건……!”
아르펠은 검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로한은 그 검을 쥔 채 가볍게 휘둘렀다. 복잡할 것 없는 간결한 움직임이었지만 있는 힘껏 내리찍는 사내의 검을 간단히 쳐내 버렸다.
검을 휘두른 순간 로브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났지만, 로한은 개의치 않고 다음 공격에 대비해 태세를 갖췄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들이닥친 남자의 공격을 필두로 사방에서 검격이 몰아닥쳤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로한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의 옷 끄트머리조차 스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입이 떡 벌어지는 실력도, 사람이 검으로 변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광경도 혼란의 이유는 아니었다.
“…로한. 로한이잖아!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이런, 이런 말은 없었……!”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자진하여 실종된 척을 하기 전, 길드에 머물면서 들었던 여러 소문이 있었다. 로한에 관한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이번 대의 마신의 축복을 받은 자. 제국을 어지럽히는 이단을 몸소 숙청하며 영웅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이.
얼마 전 베모스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막아냈다는 것이 알려지며 그의 행보는 더더욱 주목받았다. 제국 곳곳에서 말썽을 피우던 이단의 기세가 수그러드니, 다 그를 무서워하여 숨은 것이라는 뜬소문이 몇 번 돌 정도였다.
덩달아 인상착의에 대한 정보도 용병들 사이에서 돌았으니, 그들이 곧장 로한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공격 의지가 반 토막 났다. 그의 행보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예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그 생각이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오기라도 한 것일까?
“으억…!”
“크흡!”
가뜩이나 볼품없던 검들이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하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로한을 공격하기는커녕 저들끼리 부딪히고 엉킨 것이다.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청명한 금속음이 퍼져 나갔다. 그 뒤를 고통에 토막 난 신음들이 장식했다.
“이상하네.”
로한은 곧장 뒤로 물러난 이들을 응시하며 작은 감상을 읊조렸다. 의아한 시선이 손끝에 닿는다. 여러 검을 단숨에 받아냈음에도 손에 느껴진 충격이 미미했다.
…대체 어떻게 남을 습격할 생각을 했는지조차 모를 허접한 실력이었다. 거기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도 터무니없이 얄팍했다. 고작 한 번 검을 나눴을 뿐인데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몇몇은 두려움을 숨기지도 못하는 기색이었다.
자신을 노린 것이든 아니든, 저들이 누군가를 유인하여 습격하는 작전을 세울 만한 위인은 못 된다는 소리다.
“용병들과 척질 만한 일은 안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들의 뒤에 배후가 있다는 것일 터. 로한이 검을 비틀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저기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말할 사람은 없습니까? 당신들에게 이 일을 시킨 이가 있을 텐데요.”
너희들은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들을 위험인물로 보지 않는다는 반응이기도 했다.
그 말에 대부분은 처참하게 인상을 구겼으나, 덤벼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다 같이 감행한 공격이 단 한 사람에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막히지 않았나.
하지만 로한이 그 이상 말을 잇는 일은 없었다. 내내 그에게 몸을 맡긴 채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아르펠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전해왔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 로한.>
그것도, 조심하라 속삭이는 경고를.
당장 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로한은 아르펠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가 말한 것을 따른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감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의식하지 않으면 흘려 넘길 만한, 혼잣말에 가까운 자그마한 속삭임. 하지만 로한은 그 목소리를 선명히 들었다.
그 음성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머지않아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익숙한 인상착의… 자신들을 이 깊숙한 숲까지 유인해 온 그 남자였다. 로한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직전에 나눈 짧은 대화가 마음속에 어떠한 불씨를 지피기라도 한 것일까?
남자의 눈은,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감히, 나를 욕보여? 이 나를?”
이윽고 터져 나온 열등감이 똘똘 뭉친 말 따위는, 로한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남자의 두 눈에서 풍기는 기운이 너무나도 불길했다. 마력도, 성력도, 그렇다고 망령의 기운도 아닌…….
순간, 남자의 검이 붉게 타올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번에야말로 다 같이 공격하면……!”
“저 목을 베서 가져가면, 나도 그들처럼 높은 자리에….”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감정을 터뜨렸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악착같은 의지, 이번엔 가능할 거라는 희망, 출세를 향한 욕심까지. 동시에 그들의 검 역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오러야.>
“하지만 오러라고 하기엔, 형태가 너무….”
로한의 고운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거기다 그는 저들의 신상 정보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쓰여 있던 글귀를.
오러의 형태가 괴상한 것은 둘째 치고, 오러를 내뿜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실제로 검을 맞부딪혀 본 결과, 그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검을 막 잡은 철없는 이들과 비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수련을 꾸준히 해 왔는지조차 의심되는 엉성한 자세들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저들은 오러를 쓸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러를 사용하는 자라면 적어도 검의 기본기에 탄탄해야 하나, 달려드는 이들에게서는 단 한 번도 그것을 느껴보지 못했으니까.
로한의 되물음에도 아르펠은 이미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로한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그에게는 선명히 들렸기 때문이다.
사나운 오러가 내뿜는 파동, 그리고 그것에 잡아먹혀 울부짖는 검의 비명이. 그가 사람이 아닌 ‘검’이었기에 가능한 직관적인 판단이었다.
<헷갈릴 만해. 저건 일반적인 오러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로한. 두 눈에 마력을 집중하고 저들을 잘 봐. 바깥이 아니라, 몸의 안쪽을. 그럼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로한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이들을 피해 몸을 물리는 와중에도 아르펠의 말을 착실하게 따랐다. 두 눈에 일제히 몰린 마력은 곧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 주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흑백의 세상, 그 안에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는 것. 시뻘겋게 타오르는 검 위의 불길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리고, 그 불의 시작점은… 다름 아닌 심장이었다.
<저들이 쓰는 건, 인간의 생명을 불태우는 오러야.>
아르펠이 차디찬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124
신이 내린 기적이 아닌, 오로지 인간의 노력으로만 일구어 낸 힘. 그런 의미에서 성력, 마력과는 궤를 달하는 ‘오러’는 심장이 아닌 단전을 그 근원으로 삼았다.
누군가는 단전이 몸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신관들이 성력, 혹은 마력을 사용하는 과정을 모방한 것이라 말하고는 했다.
그 유래가 정확히 무엇이든, 신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 이들에겐 오러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만큼은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생명……?”
낯설고도 불쾌한 어감에 로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펠은 검으로 로한의 손에 들려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새빨간 오러를 피워내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저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평할지도 모르겠다. 검 끝에서 넘실거리는 붉은색의 오러는 타들어 가는 불꽃처럼 화려했으니.
하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했다.
“크아아아―!!”
저것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괴물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쓰고 있는 힘이, 다른 무엇도 아닌 본인의 생명을 불태워 피워 낸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힘을 원하면 원할수록, 더 강한 힘을 내면 낼수록 생명은 저항할 수 없는 거센 불길을 마주한 듯 속절없이 타들어 갔다. 아르펠은 그것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아.”
그것이 저들을 안타깝게 여겨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애초에 로한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아르펠에게는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달려드는 이들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는 로한 역시 그의 심정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이긴 했다만.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로한이 검을 휘둘렀다. 쩌엉! 검과 검이 부딪히자마자 커다란 소음이 일었다.
“…….”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우측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한 발짝 물러나 피했지만, 묵직한 감각만큼은 손에 남았다. 로한은 묘한 눈을 하고 잠깐이나마 제 손을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네,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그 찰나의 반응을 아르펠이 놓칠 리가 없었다. 걱정스레 들려오는 물음에 로한이 작게 속삭여 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깃든 채였다.
단단하게 엮여 있지 않고 얼기설기 빈틈이 많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러다. 그러니 어렵지 않게 파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정작 검을 맞부딪혔을 때 든 감상은 반대였다.
예상과 달리 더 무겁고, 흉포하며, 강하다. 저들의 오러는 여태 로한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오러와는 완전히 궤가 다른 힘이었다.
이를 눈치챈 순간부터 로한은 더 이상 힘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한 번 포악한 기세로 쏟아져 내라는 검격을 망설임 없이 쳐냈다. 동시에 마검에 실려 있던 무형의 기운이 붉은 오러를 단숨에 갉아먹었다.
“그으윽……!”
상대에게서 짐승과 같은 목울음 섞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명을 파 먹힌 자가 내는 날 것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로한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 끝에 모여 있는 기운 속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윽고 커다랗게 입을 벌린 그것은 아귀처럼 상대의 검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몸만 비틀어 피했다. 좌측 구석을 파고든 공격은 미처 닿기도 전에 상대의 머리를 검등으로 내려찍으며 무마시켰다. 앞을 비워두기는 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끄아악!”
아르펠이 상대의 검을 아그작 씹어 먹었던 그림자를 또다시 움직였다. 짐승의 머리를 형상화하고 있던 것이 흩어지기도 잠시, 가시처럼 솟구쳐 로한을 노리는 이들의 손을 눈 깜짝할 새에 꿰뚫었다.
그 모든 상황이,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다.
어찌 보면 굉장히 허무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들의 생명까지 태워 가며 덤볐으나, 승패는 처참할 정도로 명확하게 갈렸으니.
“후우.”
로한이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피로함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분위기 자체를 환기하려는 행동에 가까웠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말없이 그의 전투를 돕고만 있었던 아르펠이 입을 열었다. 눈앞에 널브러진 이들의 처리를 묻는 것에 가까웠다.
“음… 그러게요.”
대답하는 목소리에 적지 않은 고민의 기색이 묻어 나왔다.
자신과 아르펠을 숲으로 유인해 기습한 놈들이기는 했으나, 로한은 손속에 자비를 두었다. 검으로 그들을 벨지언정 치명상을 입는 일은 없도록 조절한 것이다.
이들에겐 얻어낼 것이 많았다. 이번 일의 배후가 정말로 황궁이 확실한지, 그들의 계획은 무엇인지, 기이한 오러의 출처는 어디인지.
그리고, 어째서 자신들을 유인했는지.
특히나 마지막 의문에 대한 답이 가장 알고 싶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눈에 띄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황제의 눈이 심겨 있을 만한 곳도 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뒤에 따라붙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유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몇 번이고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답은 얻지 못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것. 그렇게 생각한 로한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일단 살려둘까요? 곧 있으면 데인의 일행도 올 테니 나머지 정리는 그들에게….”
맡기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바닥을 기던 이들 중 누군가가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더니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처참하게 파 먹혀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 같은 망가진 검을 들고서. 살의가 가득 담겨 있는 절규가 그에게서 튀어나왔다.
“으아아아! 죽어, 죽으라고!”
꽤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핏발이 선 눈에는 반드시 상대를 베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물론 이는 로한에게 그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했다.
“역시, 아까부터 이상한데….”
로한은 뛰어드는 남자에게로 검을 휘둘렀다. 고개조차 완벽히 돌리지 않은 상태였건만, 날카로운 검날은 두부를 가르듯 남자의 두 손을 앗아가고 나서야 멈춰 섰다. 흩뿌려지는 피와 찢어지는 고함이 그 뒤를 메꾸었다.
마지막 몸부림은 로한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고 잠깐의 발악으로 끝이 났다.
로한도, 아르펠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남자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로한은 얼굴에 찝찝함이 가득했다.
“아르펠. 아르펠도 느꼈죠?”
<응. 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 같네.>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한 표현에 로한이 잠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하마터면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목을 가다듬느라 잠깐의 시간을 소비하기는 했다만, 로한 역시 아르펠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붉은색 오러를 쓴 이들은 힘이 한층 강해지고 몸놀림이 재빨라졌다. 이것은 기존의 오러와도 크게 다른 점이 없었으나, 문제는 이들의 행동에 있었다. 공격은 단순해지고, 협동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합을 맞추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공격에 방해가 되면 서로를 견제하고 공격을 날리기까지 하니.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로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이성 따윈 없는, 본능에 완벽히 충실한 짐승만 같아서.
<붉은 오러의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네.>
“…뭐, 저희는 그냥 렉시아한테 넘기면 되니까요.”
원리를 파악해 보려는 듯 상념에 빠지는 것도 잠깐이었다. 곧 망설임 없이 미련을 떨쳐 낸 로한이 부드러이 미소를 그렸다.
누군가가 들었다면 ‘나한테 떠넘기는 거냐’라며 비명을 질렀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사정을 신경 써주는 이는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로한 님! 아르펠 님!”
그 흐름을 끊어 낸 것은 숲의 너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곧장 반응한 아르펠이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았을 무렵, 일행은 딱 맞게 둘이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온 듯 가쁘게 숨을 내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앞쪽에 서 있던 데인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정신없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적나라하게 흔들리는 목소리가 설명을 요구했다. 쓰러져 있는 익숙한 면면들, 부러진 검, 잘린 손, 땅을 적신 피……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정보에 머리가 어지러운 듯했다.
이어지는 로한의 설명을 들을수록, 주변을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눈빛은 도로 침착하게 되돌아갔다. 머지않아 여러 감정이 쌓이고 쌓인 한숨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후……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관없습니다. 다치지도 않았고.”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데인의 목소리에도 로한은 깔끔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이들이었으니 위협을 느낄 리가 만무했다.
“…일단, 이놈들은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둘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데인이 뒤에 있는 이들에게 눈짓했다.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들을 구속하는 손길들이 일사불란했다.
퍽 단호한 움직임이었으나, 그것이 그들의 복잡한 속내를 모조리 감추지는 못했다. 특히나 데인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실종된 용병들이 산적을 이용해 특정 지역을 장악하고, 기습을 도모한 데다, 불길한 붉은색의 오러를 썼다니.
“이번 일은 렉시아 님께 보고하고―”
자신의 복잡함과는 별개로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해야 한다. 일에 말려들게 한 사과도, 더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도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데인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쿠웅, 우드드득―!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125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소음이었다. 수많은 소리가 뒤엉켜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을 만들어 냈다. 얼핏 땅이 흔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아니, 과연 착각이 맞을까.
쿵, 쿵. 커다란 울림이 가까워질수록 숲의 한복판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쓰러진 습격자들을 제압하고 끌고 갈 준비를 하던 용병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굳어 있었다. 다가오는 굉음으로부터 거대한 위압감을 느낀 것이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위가 조용해 졌을 때.
“데인, 용병들을 데리고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세요.”
“예? 하지만 두 분을 두고 갈 수는…!”
“저흰 괜찮으니, 어서요.”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데인은 이미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능이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져 움직일 수 없었다.
위태로운 분위기를 끊어낸 것은 로한이었다. 덧붙인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만큼 단호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데인은 로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나서야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아득하게 느껴지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다.
“최대한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라!”
이를 악문 데인이 멈칫한 이들에게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용병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통해 숲을 빠져나가기 전,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로한과 아르펠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둘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두 분은, 안 가십니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저 둘을 내버려 두고 간다는 일말의 죄책감일지도 모르겠다.
“더 늦으면 몸을 빼지 못할 겁니다.”
이에 아르펠은 덤덤히 답했다. 데인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입술을 짓씹는 수밖에 없었다. 건조한 보랏빛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아서.
그 누구도 소리 내 말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남아 있어 봤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어쩌면 앞으로의 싸움에 자신이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짐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멀리서 느껴지는, 사람 하나는 손쉽게 짓누를 것 같은 기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격을 넘어서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남는다고 해 봤자 개죽음만 당할 테지. 그러니 저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다고 해서, 물씬 이는 회의감과 죄책감마저 완전히 털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레 표정이 가라앉았다.
“대신 근처 신전에 방문해 상황을 전해 주세요. 지원군을 데리고 올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 예, 꼭 그러겠습니다!”
그런 데인을 바로잡아준 것은 로한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사소한 부탁에 불과했지만, 그의 한 마디는 수척해진 얼굴에 화색을 되찾아 주었다.
데인은 뒤쪽에서 그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난 이후에서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꼭 무사하셔야 합니다!’ 따위의 인사를 몇 번이나 내뱉던지. 미련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가장 늦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소란스러움이 사그라든 숲속의 한복판.
용병들이 무사히 빠져나갔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한은 시선을 돌려 음울한 기운을 한껏 풍겨대는 숲의 너머를 응시했다. 귀가 웅웅 울릴 정도의 소음에 흉포한 살의가 뒤엉켰다. 미지의 존재는 여전히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
“아르펠.”
로한이 나직하게 아르펠을 불렀다. 그 부름을 기다렸다는 듯, 아르펠의 신형이 곧장 이지러졌다. 익숙한 검의 형태로 탈바꿈한 그를 한 손에 꼭 쥐며, 경계심을 키우는 순간.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맞은편에 있는 나무들이 우수수 꺾여 나갔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빽빽했던 나무 중 반이 부러진 만큼, 그 너머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존재 역시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애매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쳐졌다. 조금의 곤란함이 묻어나오는 듯도 했다. 그만큼, 숲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는 심히 갑작스러웠으며 뜬금없었다. 검을 고쳐 잡기가 무섭게 제게로 날아드는 거대한 주먹을, 로한은 재빠르게 피했다.
멈추지 않은 주먹은 그대로 땅을 내리쳤다. 땅의 흔들림, 무언가 터지는 듯한 굉음, 그리고 주먹이 닿은 곳부터 시작해 빠르게 금이 가는 땅까지. 그것만으로도 ‘저것’의 주먹에 담긴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에 더불어 망령의 기운까지 담겨 있었던 탓에 산산이 조각난 땅이 점차 검게 물들기까지 했다.
<로한, 조심해. 저건…….>
“응, 알고 있어요. 구원교의 또 다른 간부… 맞죠?”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키의 3배쯤은 되는 듯한 거구에 나무 한 그루와 맞먹을 것 같은 굵은 팔뚝, 이질적인 초록색 피부. 당장 나열해 본 특징만 보았을 때는 인간과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롭게 발견된 괴생명체라고 해도 무방할 테지만…… 이를 상대하고 있는 둘은 어렵지 않게 ‘저것’의 정체를 알아챘다.
거구의 괴물에게선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망령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더하여 안면을 덮고 있는 익숙한 형태의 가면,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이형적인 생김새까지.
얼마 전 레리아나의 손에 죽음을 맞은 구원교의 간부처럼, 저것 역시 일곱 간부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크어어어-!」
하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이곳에 간부가 보란 듯이 나타났는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상태가 상당히 이상한 듯했으니.
<…뭔가 이상해.>
녀석에게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은 고함이 쏟아졌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 사이로 누런 침이 뚝뚝 떨어진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이전의 간부와는 달리, 둘의 눈앞에 있는 거인은 커다란 고함을 내지를 뿐 말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행동 또한 둔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강하긴 하지만 주먹을 내지르는 경로가 지나치게 단순했다. 일반적인 사람이야 눈 깜짝할 새에 죽어 나가겠지만, 로한 정도로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라면 한 박자 늦게 피해도 될 정도였다.
직접 몸을 피하는 로한은 물론이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르펠 역시 기이함을 느꼈다. 마치 이지가 없는 짐승처럼……. 이어져 나가던 생각이 뚝 멈췄다. 아까도 분명,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설마…….>
“아르펠, 봤어요?”
저놈, 눈이 붉어요.
음울하고 끈적한 살기를 뚝뚝 흘리는 붉은 눈. 로한의 말에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르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까의 습격자들과 저놈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지금은 이에 대해 자세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속도가 느리다고 하더라도 간부의 주먹에 담긴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으며, 그것에는 망령의 힘까지 담겨 있었다.
당장은 눈앞의 전투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상대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던 로한은 곧장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어렵지 않게 피한 뒤 검을 움직였다. 유려하게 그어진 검이 단숨에 거인의 피부를 갈랐다.
「크악!」
일전에 맞붙었던 간부에 비교해 몸의 내구성은 좋은지 조금 더 힘을 주어야 했다. 한 번 겉가죽을 가른 검은 막힘없이 나아가 놈의 팔을 반쯤 베어 낼 수 있었다. 검날에 듬뿍 담겨 있던 마력 때문인지, 곧장 고통스러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얕았나.”
완전히 팔을 베어 낼 셈이었던 의도와 다르게 상처만 입히고 끝냈다. 인상을 구긴 채 뒤로 반걸음 물러나는 순간 녀석이 상처가 난 팔을 휘둘렀다. 어찌나 강하게 휘두르는지, 팔이 코앞을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생?”
반쯤 배여 덜렁거리고 있던 팔이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나 갈라졌던 피부는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붙어 버렸다. 피부 위로 흐르는 피만이 직전의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 되고 말았다.
입술을 짓씹은 로한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반대쪽 팔, 옆구리, 다리… 여러 곳을 베어 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눈앞의 간부는 상처가 나는 족족 그것을 회복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꾸만 몸 여기저기를 베인 것이 그의 분노를 부추긴 듯, 안 그래도 이지를 잃은 듯했던 행동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 베어도 베어도 끝이 나지 않는 괴물 같은 재생력까지. 누군가는 막막함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을 테지만, 적어도 로한은 아니었다.
느리게 숨을 가다듬은 그가 눈을 빛냈다. 그를 쓰러트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무리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고마워요. 역시 아르펠밖에 없다.”
곧장 로한의 계획을 눈치챈 아르펠이 덧붙였고, 로한은 순순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기쁘다는 듯 두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다분히 애교스러운 말을 덤으로 내뱉으면서.
꽤 귀여운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질 만한 감상은 아니었지만 상상은 자유 아니겠는가. 제 감상을 철회할 마음은 없었던지라, 아르펠은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막지 않았다. 웃는 모습을 두 눈에 담기 위해 검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는 작은 아쉬움 역시 스쳐 지나갔다.
내내 마력만 담겨 있던 칼날에 권능이 섞였다. 한층 더 새까매진 검의 끝이 마치 안개처럼 일렁인다.
그 검을 바투 잡으며, 로한은 거인을 향해 발돋움했다.
상처를 입히고 또 입혀도 끊임없이 회복한다면…….
저것의 회복 속도를 뛰어넘고, 회복을 시도할 시간조차 없도록 만들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126
로한은 일전, 베모스 마을에서 전투를 치를 때 레리아나가 힘을 사용했던 방식을 떠올렸다. 온 마을을 에워싸며 파도처럼 쏟아져 내리던 거대한 성력. 살의는 온전히 배제하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의지만이 담겨 있던 힘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여태 써왔던 공격성이 짙은 검과는 정반대의 것이었으나 이변은 없었다. 상상으로만 꽃피웠던 검이 로한의 손에서 곧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끊임없이 일렁이며 몸집을 부풀리고, 한없이 정순한 느낌마저 드는 그것은… 검은색 불꽃을 닮아 있었다.
가히 압도적인 재능이었다. 검날의 위, 삿된 것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기세로 부풀어 오르는 마력과 권능을 보며 아르펠은 그리 평했다.
「크르륵…!」
맞은편에 있던 간부가 또다시 짐승을 닮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매섭도록 타오르는 상극의 힘을 마주하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전과 다를 바 없이 단조로운 움직임이었다.
눈에 익을 정도로 뻔한 공격에 로한은 발 한쪽을 옆으로 빼며 빠르게 몸을 틀었다.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이 땅에 꽂히든, 부서진 바위 파편이 뺨에 얕은 상처를 내든, 망령의 기운이 그곳을 검푸르게 물들이든…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발을 딛고 박찰 때마다 로한의 몸에서 넘치듯 흘러나온 마력이 오염된 땅을 되돌렸다. 이윽고 녀석이 고성을 터뜨렸다.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상대에 차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것처럼.
가뜩이나 이지를 잃고 짐승처럼 행동하던 놈이다. 로한이 지핀 분노의 불씨는 그것의 본능을 한층 더 부추겼다.
이제 눈곱만큼 남아 있던 이성마저 사라졌는지 상대를 쫓는 일에 눈이 먼 녀석은 자신이 유인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곱만큼도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로한은 곧바로 검을 내지르지 않았다. 방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돌진하기만 하는 상대가 몇 번이고 급소를 무방비하게 드러냈음에도 그랬다.
<다 됐어, 로한.>
계속해서 이어질 것만 같던 끝이 없는 추격전을 뒤로하고, 마침내 아르펠이 목소리를 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씩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다시 한번 고쳐 잡은 로한은,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간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몸집보다 배는 작은 상대를 노리느라 자세가 꼬인 채 공격을 감행했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사냥감이 정면에 있었다. 제아무리 멍청한 머리라 하더라도 그 정도는 셈할 수 있었다.
거인의 낯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승리를 점친 미소였다. 이 일격만 꽂아 넣으면, 얄미울 정도로 꽁무니를 잘 빼던 놈은 흔적도 없이 뭉개지리라.
코앞에 주먹이 다가왔다. 내지르는 속도가, 공기를 가름과 동시에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딱 봐도 범상치 않았다. 저 두꺼운 손에 압도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로한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언뜻 보면 더없는 위험한 이 상황을, 바라마지 않았다는 것처럼.
“지금!”
주먹이 닿기 직전, 그가 커다란 음성을 토해 냈다. 동시에 거짓말처럼 녀석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여태 로한이 밟고 지나다녔던 땅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가시처럼 돋아나 놈의 몸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어림잡아 백여 개는 될 가시들이 거인의 몸을 고정했다. 서로 얽히고설킨 기묘한 위치는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상대라 하더라도 몇 초 정도는 꼼짝없이 묶어 둘 수 있는 완벽한 덫을 만들어 주었다. 가시를 타고 흐르는 피, 고통에 괴성을 지르려는 듯 벌어지는 입을 눈에 담으며… 로한은 검을 휘둘렀다.
타오르는 검이 녀석의 몸을 갈라 버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팔 아래에서부터 반대쪽 어깨까지, 완전히 거인의 몸을 양단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 단면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끼아아악―!!」
귀곡성 같은 비명.
선명하게 뇌리에 꽂히는 괴성에 로한이 슬쩍 미간을 구겼다. 몸이 완전히 양단되어 불타고 있는 주제에 비명은 잘만 지른다 싶어서. 경악스러울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일 테다. 그리 생각하며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아르펠이 작게 속삭였다.
<물러나.>
로한은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벗어났다. 내내 상대의 몸을 묶어 놓고 있던 가시들이 한계에 달했는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음에도 그랬다. 아르펠을 향한 믿음은 그만큼 굳건했다.
그리고, 완전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일렁이던 그림자 가시들이 한순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미 타오르고 있던 불꽃의 기세가 한층 더 사나워지고, 세찬 바람에 휩쓸린 불길은 거대한 화염의 폭풍을 연상시켰다. 이에 저항하려는 듯 녀석의 몸에서 망령의 기운이 마구잡이로 뿜어져 나왔으나 막강한 화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새까만 불길은 계속해서 거인을 태워 나갔다. 이제는 이명처럼 들리는 비명이 완전히 멎고, 양단된 몸을 이어 붙이려 용을 쓰던 재생력이 한계에 달아 잠잠해지고, 거대한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릴 때까지.
그때까지 로한은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켰다.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드는 것을 두 눈에 담고 나서야 일말의 긴장감으로 굳어 있던 몸을 부드럽게 풀 수 있었다.
“아르펠, 이제 돌아와도 될 것 같아요.”
톡톡, 검 손잡이를 부드럽게 두드리는 손길이 이어진다. 그 호의를 굳이 거부하지 않은 아르펠은 곧장 모습을 바꿨다. 짧게 빛무리가 쏟아지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소복이 쌓인 잿더미 위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간부는 다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걸까요?”
그것은 거인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커다란 가면이었다. 어두운 초록빛을 띠는 가면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완전히 두 동강 났다.
아르펠의 시선이 반으로 갈라진 가면을 향했다.
“얼굴을 가리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딴에는 꽤 실없는 생각이었으나, 로한은 꽤 진지하게 반응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여태 본 간부들은 하나같이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괴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니.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남아 있다면 얼굴을 가리고 싶을 만도 했다.
“이건…….”
그러다 느껴지는 낯선 기운 하나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운의 진원지는 가면이었다. 반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끝부분부터 천천히 조각나기 시작하더니, 가루가 되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무너진 가면.
아르펠 또한 이를 느꼈다. 마력도, 성력도, 하물며 망령의 기운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운은 그 역시 난생처음 접해 보는 미지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망령의 것처럼 해로운 것이냐 묻는다면, 아르펠은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신…….”
이건, 순수한 신의 권능에 가까운 힘이라고.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에 로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신? 이게 신의 힘이라고요?”
“그래. 저렇게 정순하고 깨끗한 힘은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신은….”
말끝이 묘하게 기어들어 갔다. 그 목소리는 물론이고 마주한 눈빛에서 깊은 복잡함이 느껴져서, 아르펠은 가만히 손을 뻗어 흐트러진 로한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새어 나온 감정 역시 그의 깊은 고뇌를 보여 주는 듯했다.
“맞아. 신은 천신과 마신밖에 없어.”
하지만, 로한. 아르펠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은 천신과 마신, 단 둘뿐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진리이자 앞으로도 변치 않을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신이 하나 있기는 했으나, 그는 이 세상에 망령을 퍼뜨린 악신이다. 하지만 조금 전 둘이 느낀 기운은 악신의 잔재인 망령의 힘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남아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악신은 원래부터 악신이었을까?”
‘악신’이라는 이름은 악에 물들어 버린 신에게 주어진 멸칭일 뿐이다. 비록 그 이름을 잃어버려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명(無名)의 신이 되었지만, 악신이 악신이기 이전 그가 가지고 있던 힘이 있을 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한은 생각이 꽤 많아 보였다. 잠시 숲의 너머를 향해 시선을 주던 아르펠이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르펠?”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하지만, 데인이 다른 신관들을 데리고 온다고…….”
멍하니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무섭게 로한의 표정이 굳었다. 뒤늦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들이 전투를 치른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신전이 하나 있었으니, 도움을 청하러 갔다면 지금쯤 신관이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둘을 도우러 온 신관은 아무도 없었다.
일이 잘못됐나? 가다가 또 다른 습격을 당했을 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데인이라면 자신들을 배신할 리는 없을 테니,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애써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며 초조한 기색을 감춘 로한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단 신전으로 가요.”
무사히 도착했는지, 만약 무사히 도착했다면 어째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인지. 여러 의문이 샘솟았다. 신전에 찾아가 물어봐야 할 것이 많았다.
그렇게, 신전을 목적지로 정한 둘이 난리 통이 된 숲 한복판을 떠나려고 할 무렵이었다.
쿠우우웅―!
어디선가 한 줄기 커다란 소음이 일었다. 간부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방금 전의 굉음은 꽤 먼 곳에서 들려온 듯했다.
하지만 로한은 그 방향으로 잠시 시선을 줄지언정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찝찝함이 남아 있었지만 당장은 신전을 찾아가 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르펠이 가만히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일만 없었더라면,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자.”
“하지만….”
반박하려는 목소리가 눈 깜짝할 새에 가라앉았다. 순간 마주 본 아르펠의 눈이, 자신은 알지 못하는 아득한 미래를 보는 것처럼 신비롭기만 해서. 홀린 것처럼 침묵을 지키는 로한을 향해 아르펠은…….
“레리아나가 위험해.”
폭탄을 던졌다.
127
노을이 져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마을의 변두리에 있는 숲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수상쩍어 보이는 행색을 한 이들은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치실 겁니까?”
“아니, 내가 뭐 도망을 쳤다고…….”
중간중간 속살거리는 짧은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적나라한 추궁과 민망한 기색이 한껏 묻어나는 변명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화제를 회피하고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로브를 만지작거린 탓일까, 얼굴을 꼼꼼히 가리고 있던 로브가 스치는 바람에 휘날려 벗겨지고 말았다.
화려한 금발이 바람결을 따라 물결쳤다.
“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요.”
“……시아, 말에 가시가 있어. 나 마음이 아파.”
“그랬군요.”
괜스레 머리를 한 번 정리하며 시선을 피해 보았으나 각고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레리아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던 카시아가 지지 않고 같은 이야기를 다시금 끌어왔기 때문이다. 툴툴거리는 것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영혼이 쏙 빠져나간 것만 같은 대답에 레리아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피하는 건 그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사과를 해야지, 해야지 마음을 먹었다가도 아득한 절망 속에 풍덩 빠져버린 눈을 하던 로한을 떠올리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지낸 짧지 않은 시간, 레리아나는 로한과 아르펠이 서로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상대를 한순간에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강해졌다며,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며 가졌던 알량한 자만심은 기어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늪에 더 깊게 빠지는 것만 같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끔은 대화가 가장 빠른 해결책인 법입니다.”
덤덤한 목소리가 잠깐이나마 내려앉은 침묵을 깼다. 변함없이 앞을 응시하기만 하던 카시아가 슬쩍 시선을 돌려 레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조그마한 얼굴이 온통 자책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데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전해 들은 기묘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황궁과 관련된 낌새가 다분했기에 조사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지만, 둘은 데인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하, 운이 꽤 좋네요. 레리아나 님에 로한 님까지 이번 조사를 도와주시다니.’
‘…로한? 로한도 여기 있다고요?’
‘네, 어제저녁에 우연히 마주쳐서… 아, 참. 로한 님께서 두 분을 찾으시던데.’
그 말을 들은 직후 레리아나는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말을 이어나가던 데인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흠칫해 조심스럽게 물을 정도였다.
‘저, 혹시…… 두 분 싸우셨나요?’
부정의 답을 내놓았으나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눈치가 기민한 편인 그가 공기 중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으니.
하지만 그만큼의 소득도 있었다. 아르펠이 무사하다는 희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던 것이다. 가만히 몇 시간 전의 일을 되새기던 카시아가 그대로 쐐기를 박았다.
“진작 얘기 좀 해 볼 걸, 하면서 제 바짓가랑이 잡고 후회해도 안 달래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레리아나의 얼굴에서 울적함이 단숨에 가셨다. 덧붙이는 한마디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얄미움과 고마움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 카시아를 향했다.
“알았어……, 이번 일만 끝나면.”
결국, 레리아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 맞아, 얘기는 한 번 해봐야 하니까…. 데구르 눈을 굴려 괜히 한 번 시선을 피하며 합리화하는 것은 덤이었다. 마음은 진작 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또 한 번 원망스러운 시선을 받을까 봐 지레 겁에 질려 외면했을 뿐이지.
고개를 여러 번 털며 뒤숭숭한 기분을 가라앉혔다. 다시 이 주변을 살피는 일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이 구석진 숲길을 누비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데인의 부탁을 받아 마을 주변을 조사하던 중, 한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는 숲에서 버섯을 따다가 우연히 숲 깊은 곳에 발을 들였고, 그곳을 헤매던 와중 사람이 오래 묵은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것이 한둘이 아니니 혹 산적의 주둔지가 아닐까 두려워 허겁지겁 숲을 빠져나왔단다. 사라진 용병에 대한 목격담은 아니었지만… 둘은 직접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분명 이 근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람이 다니지 않아 풀이 무성한 숲길, 엇비슷하게 보이는 수많은 나무가 어지러이 이어졌다. 노인이 그려준 약도를 손에 든 레리아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급하게 돌아온 나머지 위치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며 우려하던 게 결국 사실이 된 듯했다.
“…시아, 우리 길 잃은 것 같지 않아?”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레리아나는 기어이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입에 담았다. 이윽고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현실을 부정하는 듯싶던 카시아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숲을 빠져나가서 처음부터 다시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고 카시아는 말하려 했다.
흉흉한 살기가 자신들을 덮쳐오지만 않았어도 끝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눈을 치켜뜬 카시아가 레리아나의 앞을 막고 검을 휘둘렀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쳐낸 비수들이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레라아나는 말없이 성검을 소환해 쥐고 성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몸을 휘감은 권능이 카시아에게 닿는다. 갑작스럽게 전투를 치르게 된 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침착한 태도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왜?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나. 그 노인도 한패인 건가… 그런 의문들이 우후죽순 솟아났다. 고민을 거듭해도 이 자리에서 내릴 수 있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은 복잡한 생각을 미뤄두고 이 상황부터 무사히 헤쳐 나가야 했다.
그리 판단을 내리며 검을 고쳐 쥘 무렵, 숲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조심하십시오, 레리아나 님.”
벼려지지 않은 날 선 살의가 넘실거렸다. 기척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상대라는 게 아니었다. 상대는 모습을 숨길 이유도, 살의를 감출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너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 오만함을 납득시키고도 남았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둘에게 꽤 익숙한 이였다.
“…….”
으드득. 말없이 남자를 응시하던 레리아나가 이를 갈았다. 로브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 형체, 몸집, 걸음걸이, 허리춤에 걸쳐져 있는 검… 단 한 번도 그것들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때의 일은 뇌리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신전을 나서자마자 겪었던 습격, 처음으로 마주한 타인의 살의, 공중에 흩뿌려지는 누군가의 피…… 꿋꿋하게 앞을 지켜주던 카시아가 자신을 지키느라 상처 입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날.
몸집을 부풀리는 살의를 애써 내리눌렀다. 분노에 휘둘리면 명명백백히 자신에게 독이 될 뿐이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가볍게 심호흡을 하는 차.
남자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새에 코앞에 당도했으나 둘은 당황하지 않았다. 카시아가 그의 검을 맞받아치고, 순식간에 둘의 사이를 파고든 레리아나가 남자를 베어 냈다. 칼날 위로 일렁이는 성력이 눈부신 빛을 터뜨렸다.
동시에 남자의 몸이 아주 조금 휘청거렸다. 한쪽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것이다. 카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흐읍!”
짧은 들숨과 함께 온몸의 힘을 끌어 모아 날린 검격은 권능에 의해 강화되어 매서운 빛을 발했다. 날카로운 기세를 발하는 것을 남자는 간신히 피했으나, 그를 향한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오른쪽 구석으로부터 치고 올라온 성검이 남자의 앞섬을 베어 냈다. 찰나의 순간에 몸을 뒤로 빼 얕은 상처를 낸 것에 그쳤지만, 공방이 얼마 오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처를 낸 것만큼은 봐줄 만한 성과였다.
한발 뒤로 물러난 남자는 옅은 핏물이 배인 앞섬을 지긋이 응시했다. 이윽고 그에게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이한 힘이군.”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열심히 즐겨 둬.”
레리아나가 짧게 이죽거렸다. 반응해 주지 말라며 카시아가 토를 달았으나 그녀는 꿋꿋했다. 분노에 못 이겨 달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니까.
로한과 떨어져 개인적인 수련을 시작한 이후, 그녀의 권능은 한층 더 발전했다. 단순히 상대의 신체 능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특정한 부분만을 골라 능력을 끌어올려 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덕분에 그녀를 상대하는 이들은 갑자기 몸 한쪽에만 힘이 들어가 균형을 잃기 일쑤였다. 남자가 잠시 비틀거린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오른쪽 팔에만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며 한순간 몸의 중심이 무너졌을 테다.
그럼에도 레리아나는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르고 당황스러워하던 여태까지의 상대들과는 다르게, 남자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으니까. 이것이 레리아나의 힘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마저도 말이다.
소리 없이 이를 악문 레리아나가 생각했다.
‘이번엔 꼭…… 내 손으로.’
저것의 숨통을 끊겠다.
손에 잡힌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그녀는 위태롭게 이어지던 침묵을 단숨에 끊어 냈다. 땅을 박찬 몸이 그대로 남자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증오스러운 검 위로 덧입혀지는 선명한 오러를 바라보며, 레리아나는 그대로 검을 그었다.
128
“큽… 레리아나 님!”
“난 괜찮아!”
다급한 카시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리아나는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더라. 팔 아래로 뚝뚝 흐르는 붉은 선혈이 기어코 땅 위를 적셨다. 권능을 빌려 팔을 치료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본격적인 전투의 막이 오르고, 승기를 잡은 건 레리아나와 카시아 쪽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누구 하나 약점이 되지 않는 단단한 연계, 불시에 파고드는 레리아나의 공격에 남자는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치명상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상처가 계속해서 남자의 몸에 새겨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레리아나는 희망을 품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검을 연마한 그간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집중하면 저 남자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남자의 오러가 붉게 빛을 발하는 순간, 그 희망은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커다란 의구심이 머릿속을 온통 차지했다. 끝부분이 갈기갈기 찢어진 듯 불규칙한 형태를 띠는 붉은색 오러는 마치 새빨간 불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기세가 한층 더 두드러져, 그것을 눈에 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오러의 색이 뒤바뀌고 난 직후 남자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여태 휘둘렀던 검보다 배는 빠르고, 강하다. 사납게 타오르는 오러와 맞부딪힐 때마다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쳤다.
카시아를 공격하려는 놈의 집중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뒤에서 기습했다가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찰나의 순간, 무방비했던 왼쪽 팔을 노린 녀석의 감이 소름 돋을 정도였다.
“시아! 뒤로 빠져!”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남자를 상대해야 했을 카시아와 자리를 바꿨다. 곧장 무겁게 내리치는 검을 쳐내며 권능을 강하게 쏟아냈다. 일순 성검 끝에서 반짝인 빛이 벼락처럼 움직이며 남자의 얼굴을 향했다.
검은 놈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로브는 무사할 수 없었다. 옆 부분이 완전히 잘리는 바람에 얼굴을 감춘다는 본래의 용도를 잃고 만 것이다.
어두운 피부, 짙은 남색 머리, 눈에 띄는 붉은색 눈동자…… 겉모습만큼은 멀쩡한 놈이었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눈에 담으며, 레리아나는 또 한 번 검을 움직였다.
권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단순히 성력만을 이용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발끝에 빛이 머물기가 무섭게 한 줄기의 섬광이 되어 쏘아진 레리아나의 몸이 금세 남자의 앞에 당도했다.
몸을 크게 반 바퀴 돌리며 검을 휘두르는 순간, 끌어올린 권능을 한순간에 터뜨렸다. 다리 한쪽에 지나치게 힘이 실린 남자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검을 휘두르는 어깨와 팔에 남은 권능을 아득바득 끌어모았다.
일직선으로 파고드는 검이 한순간에 배는 빨라졌다. 상대의 균형이 무너지는 시점을 완벽히 계산하여 내질렀기에, 모든 것이 완벽한 공격이라고 생각했건만.
“……하.”
그녀의 검은 상대에게 닿지 못했다. 남자의 몸이 거짓말처럼 속도를 높혀 검로를 벗어난 탓이었다.
여기서 더 빨라진다고?
슬슬 경악을 넘어서 질리기까지 했다. 붉은색의 오러를 내보인 뒤로 남자의 신체 능력은 한계를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인간의 몸이란 자고로 끝이 있을 수밖에 없거늘, 자신처럼 권능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레리아나 님!”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이었다. 상대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으니 아주 조금은, 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레리아나가 마음을 다잡은 것은 뒤쪽에서 들리는 카시아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슬쩍 돌아본 그녀는 비장한 낯을 하고 있었다. 직전의 대치에서 상처를 입기라도 했는지 옆구리에 적지 않은 피가 묻어나오는 듯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굳건했다.
레리아나는 조용히 검을 바로잡았다.
‘그래. 이번엔 내가 카시아를 지켜야 하니까.’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 장기전에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는 순간이었다.
“커헉!”
마주 보고 있던 남자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후두둑 떨어지는 선혈이 비현실적이었다. 순간 레리아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검은 남자에게 닿지 못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히긴 했으나 저리 피를 토할 만큼의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잠시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눈이 아까보다 기세가 줄어든 듯한 붉은 오러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역시, 그런 힘을 마구잡이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갑작스레 솟아난 붉은색 오러,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신체 능력, 아무런 기미도 없이 토해낸 피. 동떨어진 채로 머릿속에 떠다니던 것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남자가 쓰는 힘은,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 피해를 입는 힘인 것 같았다.
어렵지 않게 도출해 낸 결론에 옅은 헛웃음을 짓자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에 금이 갔다. 묘하게 좁혀진 미간과 꿈틀거리는 눈썹에 묘한 쾌감이 일 정도였다.
저리 피를 토하는 것을 보면 이미 놈의 몸은 상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몰아붙인다면 이쪽이 완전히 승기를 잡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다.
최대한 빠르게 놈을 처리하고, 카시아를 치료한다. 그렇게 계획을 세운 레리아나가 검을 한 번 털어내곤 그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한쪽이 묘하게 우세하던 공방은 점차 팽팽해지더니, 머지않아 힘의 균형마저 무너졌다. 검이 매서운 소음과 함께 격돌할 때마다 남자의 손이 위태롭게 떨렸다. 다가오는 검날을 발로 걷어차 버린 레리아나가 거리를 좁히고 들어가며 검을 찔러 넣었다.
“큭……!”
왈칵. 또 한 번 핏방울이 공중을 수놓았다. 끝도 없는 대립에 누구 하나 상처를 입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전보다 창백해진 듯한 남자의 낯에 레리아나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남자는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이미 그의 입가는 핏자국으로 흥건해진 지 오래였다. 뒤집어쓴 것이 검은색 로브만 아니었더라면 피로 흠뻑 젖어 붉어진 옷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럴지언정, 그는 초조해하거나 불안함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레리아나가 그 뻔뻔한 태도에 찝찝함을 느낄 지경이 되어서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동료가 걱정되지는 않나 보군.”
“……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질 정도의 적나라한 도발이었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간신히 시선이 뒤로 향하려던 것을 막았다. 카시아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남자가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뒤쪽에 카시아의 기척이…….
‘어?’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순간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눈앞의 남자와 팽팽히 대립하는 와중에도 레리아나는 끊임없이 카시아의 안위를 확인했다. 기감을 퍼뜨려 그녀가 문제없이 같은 자리에 있는지 살폈고, 간혹 들리는 목소리에 의식을 잃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카시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형용할 수 없는 오싹함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이는 한순간의 방심으로 이어졌고, 그 방심이 전황을 뒤집었다.
퍼엉!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뭉게뭉게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시야를 온통 가려 버리는 뿌연 연기에 레리아나가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또다시 같은 방법으로 달아난 것이다.
“젠장.”
나직이 욕설을 내뱉은 레리아나가 몸을 움직였다.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지긴 했으나, 지금은 그를 뒤따라가 붙잡는 것보다는 카시아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넓게 퍼진 연기 속을 헤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레리아나는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존재에 화색을 띨 수 있었다.
“시아!”
“레리아나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카시아였다.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의 안위부터 살피는 그녀에 레리아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못 잡은 건 아쉽지만, 시아가 무사하잖아.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레리아나가 빠르게 카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일단 이 숲부터 빠져나가자. 곧장 돌아가서 용병 길드에 보고부터 해야 할 것 같아. 저 남자가 나타난 걸 보면 분명 황궁도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겠지. 생각보다 본격적이야.”
어쩌면 이번 소동 자체가 덫일 수도 있겠어.
전투하는 도중에도 틈틈이 머리를 굴려 낸 결론이었다. 저 뛰어난 실력을 보면 분명 황제의 최측근일 텐데, 그가 개입했다는 것 자체가 미심쩍었다. 카시아의 손을 잡아끌며 정신없이 생각을 이야기하던 레리아나는 문득 그녀가 입었던 상처를 떠올렸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치유해 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으면서.
“……시아.”
레리아나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카시아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등을 돌려 그녀의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 레리아나는 말문이 막혀 잡고 있던 손을 떨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상처, 어디 갔어?”
카시아의 옆구리가 멀쩡했다. 분명 칼에 베여 피가 한 움큼 묻어났는데. 옷도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는데.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양 깔끔한 옷을 보니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숨이 턱턱 막히고, 물속에 빠진 듯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음이 일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뒤로 물러난 레리아나가 간신히 목을 쥐어짜며 물었다.
“너…… 누구야.”
순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덤덤한 낯을 하고 있던 카시아가 미소 지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있는 주제에 입꼬리만 둥글게 휘는 기괴한 모습으로.
‘카시아’의 형상을 한 것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129
소음의 근원지로 이동한 로한과 아르펠을 반긴 것은 황량하게 남겨진 전투의 흔적뿐이었다. 자신들이 등을 지고 온 곳만큼이나 꼴이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심상치 않은 전투가 치러진 듯 남아 있는 검흔들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헤집어진 땅, 꺾여 있는 나무, 주인을 알 수 없는 핏자국.
땅 곳곳을 물들인 누군가의 혈흔을 말없이 바라보던 로한이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이 피의 주인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니길 바라듯.
그럼에도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숲에 퍼져 있는 익숙한 성력만큼은 외면하지 못했다. 그 힘은 몇 번이고 보고, 느껴왔던 레리아나와 카시아의 것이었다. 불쾌한 상상이 머릿속에 한가득 자리했다.
“아르펠. 이 성력은…….”
더듬더듬, 로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르펠은 굳이 그에게 대답을 건네주지 않았다. 말없이 로한의 손을 붙잡아 주었을 뿐.
둘은 전투 중 발발한 소음을 듣고 이곳으로 향했고, 얼마 걸리지 않아 이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정리된 뒤였다. 전투를 치른 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건 레리아나나 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리 급하게 모습을 감출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여러 이유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중 반은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그랬기에, 아르펠은 당장 맞잡은 손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단정 짓긴 일러.”
적을 추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아르펠이 작게 속삭였다.
마냥 부정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불확실한 가정으로 로한이 낙담하고 있는 것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건넨 자그마한 위로였다.
어쩌면 스스로를 위해 희망을 불어넣은 걸지도 모르지. 그 역시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잘못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르펠은 그들을 향한 마음이 로한을 향한 ‘걱정’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응, 아르펠 말이 맞아요.”
다행히 로한은 그 말에 기운을 차렸다. 혼잡한 전투가 끝을 맺은 지 얼마 안 된 만큼,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은 제법 많았다. 이를 쫓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뒤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흔적을 완전히 없앤 건 아니니 뒤쫓아 갈 순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용병 길드 쪽에서도 소란을 눈치챘을 테니 우리끼리 먼저 가도 상관없을 거야. 신전도… 비슷할 테고. 정 신경 쓰이면 따로 흔적을 남기고 가자.”
아르펠은 잠시 지원 요청을 보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신전을 떠올렸다. 그들이 소란을 듣고 나설 확률은 적어 보였지만… 당장은 신전의 이상 현상에 대해 조사하기보다 사라진 레리아나와 카시아를 추적하는 게 더 중요했다.
둘을 뒤쫓아 간다는 표시를 남긴 이후, 로한은 앞장서 숲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어 갔다. 부드러운 흙바닥 위에 남은 발자국이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고 있었다. 무성한 수풀을 손으로 걷어내며 그의 뒤를 따르던 때, 아까부터 미묘하게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로한이 대뜸 말을 붙여 왔다.
“아르펠, 있죠.”
아까…….
흘끗 뒤를 돌아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도 요요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오늘따라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한 걱정, 그리고…. 아르펠은 로한의 감정을 가늠하다 말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게선 전과 같은 초조함과 불안함이 읽히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감정의 대상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이유에 의문이 들어찼다. 갑자기 왜 이럴까. 몸이 불편한가? 잘 살펴보았다고 생각했건만, 혹시나 아까의 전투에서 상처라도 입은 건 아닐까?
부지불식간에 여러 의구심이 커다랗게 불어날 즈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중에 얘기해요, 우리.”
로한이 그런 생각들을 단숨에 끊어 버렸다. 아르펠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만 남기고 등을 돌린 채 앞만 보고 가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옷을 붙잡고 늘어져 뭔지 알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애써 그런 기분을 억누르니 고민만 많아졌다. 상태가 안 좋은가 싶어 몇 번이고 눈대중으로 살펴보았지만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쪽으로 생각이 닿았다.
‘아, 그건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 그래도 마을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냐는 로한을 향해 아르펠은 말했었다. ‘레리아나가 위험하다’라고.
로한은 그에 의문을 표했지만 순순히 뒤를 따라와 주었다. 그리고 아르펠의 말대로,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공격을 받고 모습을 감추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순간 로한은 둘을 향한 걱정과 더불어 조그마한 의구심을 피워 냈다.
아르펠이 레리아나의 위험을 짐작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워낙 전개가 달라진 바람에 이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소설’ 속 내용이 갑자기 떠올라서. 문득 기억이 샘솟은 순간, 아르펠은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자신들이 조사하고 있는 ‘용병 실종 사건’은 소설 속에서 언급된 적조차 없었다.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진실은 소설을 집필한 작가만이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과 엇비슷한 사건 하나가 일어나긴 한다.
구원교는 계속되는 로한의 습격에 해결책을 강구했다. 큰돈을 지불하고 실력 좋은 이들을 고용해 지부를 지키게도 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로한이 귀신같이 지부를 습격하며 그 모든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당시 로한은 레리아나와 함께 다녔고, 둘의 조합은 이론상 완벽했다. 한쪽은 압도적인 공격을 구사하고,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상처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뛰어난 치유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래서 그들은 생각했다. 둘을 떼어 놓자고. 그 계획으로 인해 비교적 약한 레리아나가 노려졌고, 로한의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양동작전을 실행했다. 강한 적을 배치해 로한의 눈을 멀게 한 후 뒤쪽에 대피한 레리아나를 납치한 것이다.
물론 이 일은 이후 로한에 의해 레리아나가 무사히 구출되며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일명, 성녀 납치 사건. 이 일로 두 신전 모두 들썩이고 사이도 꽤 나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슷해.’
문제는, 이것이 지금의 상황과 퍽 흡사하다는 점일 테다. 용병 실종 사건이라는 본질적인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떨어진 둘을 동시에 노리는 것. 이와 더불어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전투 이후 흔적을 감추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분열을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그린 듯 잘 맞아떨어지는 전개가 아닌가.
순간, 아르펠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가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소설 속 사건에는 꽤 까다로운 놈 하나가 개입했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이번 일이 소설과 같은 목적이라면…… ‘그놈’ 역시 이 일에 끼어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이건.”
그들이 쫓는 흔적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이어졌다. 이 또한 유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추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로한은 꿋꿋이 남겨진 흔적을 따라 이동했고, 그렇게… 지금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로한의 등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시선을 돌린 아르펠 역시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을 시야에 담았다.
땅, 수풀, 나무할 것 없이 온갖 곳에 흩뿌려져 있는 혈흔, 코를 자극하는 지독한 피 냄새,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이었다. 그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둘의 눈은 어둠에 굴하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그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연히 주변을 바라보던 로한이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그의 낯에 다급함이 서렸다. 나뒹구는 시체들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붉게 물든 길의 끝, 반쯤 부서져 내린 폐가가 자꾸만 두 눈에 아른거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피를 머금은 흙이 눅눅해지다 못해 완전히 젖어 버린 것이다. 로한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아르펠은 그를 대신해 주변을 꼼꼼히 확인했다.
“…….”
그러니, 바닥에 굴러떨어져 있는 은색 용병패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 확인한 면면들도 익숙했다. 데인이 보여준 서류 속의 그림과 지나치게 흡사한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벌컥. 그 사실을 미처 말할 새도 없이 로한이 폐가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르펠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느리게 안을 살피던 시선이 한 곳에서 우뚝 멈췄다.
더러운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새까만 인영, 그로부터 흘러내리다 못해 한가득 고여 있는 피 웅덩이…… 지나치게 익숙한 얼굴까지.
“카시아!”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눈치챈 로한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아르펠은 곧장 그녀의 몸을 살폈다. 그녀의 몸 안을 맴돌고 있는 성력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그 속도가 확연히 느려져 있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닌 듯했다.
로한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챈 듯, 금세 침착하게 가라앉아 말을 이었다.
“…일단 응급처치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 아르펠은 경계를,”
서 주세요, 라고 끝맺으려 했던 말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무언가 다가오는 게 바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아르펠이 밖을 확인하려 했지만, 옷깃을 붙잡는 로한에 의해 실패했다.
“로한.”
나지막한 부름이 뒤따랐다. 너도 알고 있잖아. 덤덤한 눈이 그를 달래듯 바라보고, 안정을 찾아주려는 듯 손을 들어 어깨를 토닥였다.
다가오는 수많은 기척은 적이 아니다. 그들로부터 피어오른 성력이 그리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한은 아르펠을 붙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 또한 바깥에서 다가오는 이들이 자신들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왜 불안하지. 불온하게 뛰는 심장이 자꾸만 거슬렸다.
130
백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눈앞에 늘어섰다. 그런 이들의 앞, 잿빛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려 묶고 있는 중년의 여성은 아르펠과 로한을 마주하자마자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희를 대신해 상황을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인사였다.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가 로한이 부축하고 있는 카시아를 눈에 담았다.
“괜찮으시다면, 그분의 치료는 저희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로한은 순순히 긍정했다. 조심스럽게 카시아의 몸을 바닥에 눕히자마자 뒤쪽에서 뛰어나온 신관 여럿이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치료하기 시작했다. 반짝이며 터져 나오는 성력을 흘끗 바라보던 그는 말없이 아르펠을 제 뒤로 당겼다.
흘러나오던 피가 멎고, 가빴던 숨소리가 차츰 차분해져 갔다. 옷은 여전히 피로 질척였지만, 카시아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것은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혼자서 저 상처를 수습하려 했다간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테지. 덕분에 눈앞의 신관들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폐가를 둘러싼 사건 현장은 우중충하고 부산스러웠다. 간간이 구석진 곳에서 구역질하는 이들도 보였다. 숲을 흠뻑 적신 핏줄기부터 시작해 단칼에 목이 베여 늘어진 여러 구의 시체까지. 이러한 참극을 눈앞에 두고 멀쩡할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로한과 아르펠의 앞으로 중년의 신관이 다시금 다가왔다. 방금 전 감사 인사를 건네왔던 그 신관이었다.
“늦었지만,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네피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이 마을에 자리잡은 신전의 신관장이라 덧붙였다. 뒤따라 이런저런 말이 이어졌다.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둥,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몰랐다는 둥……. 대부분 능력 부족에 대한 사과였다.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상황을 알고 싶은데…….”
도저히 끊기지 않을 것 같은 기다란 사과에 로한이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멈칫한 네피아가 민망한 듯 목을 가다듬는 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착잡한 감정이 내려앉았다.
“주변을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흔적을 깔끔히 지우고 도주했더군요.”
“…….”
“성녀 님은…….”
말문이 뚝 끊겼다. 네피아는 염치가 없다는 듯 입술을 짓씹으며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아르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홀로 상처를 입은 채 발견된 카시아와 사라진 레리아나. 그토록 우려하던 상황이 눈앞에 닥치고 만 것이다.
로한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책과 걱정, 그리고 선명한 의문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런 로한의 모습을 무어라 해석한 것인지, 네피아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채로 읊조리기만 했다.
“이번 일은 정식으로 용병 길드 측에 항의할 예정입니다.”
“…용병 길드 말입니까? 갑자기 그쪽은 왜-”
로한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로선 용병 길드의 이름을 꺼내 드는 네피아의 행동이 퍽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로한, 잠깐.”
그런 로한을 붙잡은 것은 아르펠이었다. 직전, 긴박한 상황 탓에 그가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하지만 로한은 늘어선 시체들의 정체가 용병이었음을 알게 되었을지언정, 떨떠름한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네피아의 태도에 공감하지 못한 것은 여전했으므로.
“네피아 님. 저들은 현재의 용병 길드와 관련이 없는 자들입니다.”
“…현재라는 건?”
“최근 실종된 용병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언뜻… 들어본 것도 같네요.”
이윽고 로한은 네피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갑자기 실종된 용병들과 길드 내에서 시작된 조사, 반대편에 있는 숲에서 겪었던 그들의 습격까지. 그녀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기에 황궁의 이야기를 빼니 설명이 단출해지기는 했다만, 이 일의 배후가 용병 길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네피아의 표정은 어딘가 시원치 않았다.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살피던 아르펠이 둘의 대화에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묘한 확신이 어린 한마디를 들은 네피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속내를 들키고 만 것에 갈팡질팡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아르펠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게도…… 네. 그렇습니다.”
전 용병을 믿지 못합니다.
이상할 정도로 단호한 한마디였다. 아니라며 발을 빼지 않는 것보다는 낫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적대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느낀 건 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르펠처럼 상대의 부정적인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네피아의 얼굴에 남아있는 숨기지 못한 경멸의 잔재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했다. 이 마을의 신전과 용병 길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로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일에 끌고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네피아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씁쓸한 미소를 띠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마저 하는 것으로 하죠. 지금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요.”
남은 정리는 저희가 도맡아 하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적을 상대하신 분들을 또다시 고생시킬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녀가 어둑해진 하늘을 향해 눈짓하며 덧붙였다. 처음 흔적을 쫓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붉게 물들어 있던 하늘은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이곳에 죽치고 남아있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건 없겠지. 수색을 진행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고, 사라진 레리아나를 쫓을 만한 단서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당장 레리아나를 찾는 일은 미뤄두자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그러한 발언에 미련이 남아야 하건만, 로한은 그 사실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어 들린 네피아의 말이 그의 신경을 흐트러뜨렸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목격했을 뿐, 저희가 한 일은 없습니다.”
아르펠이 로한을 대신해 답했다. 애초에 둘이 이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였다. 쓰러진 카시아가 적을 처치하고 힘이 다해 쓰러진 것이라 생각했건만, 눈앞의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뜨던 네피아가 푸스스 웃었다. 직전의 대화로 인해 가라앉아있던 낯빛이 조금이지만 짐을 덜어 낸 듯 밝아져 있었다.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굳이 숨기시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겸손이 너무 과해도 독이 될 수 있답니다. 남아있는 검흔에서 두 분의 흔적이 차고 넘치게 느껴지고 있으니까요.”
“……혹시, 신관님이 확인하신 그 검흔.”
확인해 볼 수 있습니까?
은근히 장난스러움을 담아 이야기하던 네피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로한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검흔을 확인하는 것 정도야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순순히 상관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 길로 로한은 아르펠을 뒤에 대동한 채 네피아가 말했던 ‘검흔’을 확인하러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을 두 눈에 담았을 때, 로한은 조용히 이를 악물고 말았다.
실종된 용병들의 시체, 남긴 적이 없는 검흔, 홀로 남은 카시아, 그녀를 찾자마자 거짓말처럼 뚝 끊긴 적의 흔적.
기이할 정도로 모난 곳 없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처음 실종된 용병들에게 습격을 받는 것부터 시작하여 갑자기 등장한 간부를 상대하고, 커다란 소음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남은 흔적을 쫓는 것까지.
그쯤 되니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했네.”
유인당했다. 습격을 받았을 때와 똑같이.
아르펠은 눈앞에 남아있는 검흔을 꼼꼼히 확인했다. 네피아가 ‘두 분이 남긴 흔적’이라며 콕 짚어 말한 이유가 있었다.
“……이런 게 가능할 리가.”
한 박자 늦게 튀어나온 로한의 목소리가 미묘히 떨렸다. 그럴 만도 했다.
나무에 선명히 새겨진 검흔에는 채 날아가지 않은 마력이 선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신관들은 모두 신의 힘을 빌리고는 하지만, 개개인마다 독특한 마력의 파장을 가지고 있었다. 네피아가 이 흔적을 둘의 것이라 믿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마력과 그림자의 권능과 뒤섞여 유독 새까만 기운을 풍기는 것만 같은 흔적은 아르펠의 것과 유사했다. 이를 어떻게 흉내 낸단 말인가?
로한은 답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듯했지만, 아르펠은 아니었다. 예상가는 바가 딱 하나 있었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건 검흔에 남아있는 마력이 ‘로한’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점. 보통 마력과 권능을 한데 묶어 사용할 때에는 로한이 직접 마력을 운용하고는 했으니, 이것이 남이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예상가는 게…… 하나 있어.”
이들은 일부러 자신의 마력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로한’의 것을 흉내 낼 수가 없으니, ‘아르펠’의 마력으로 대체한 것일 뿐. 그러니 이 검흔을 남긴 자는 자신의 마력을, 권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가능성은 하나였다.
수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서 자신의 마력을, 권능을 지겨울 정도로 연구하고 분석한 곳이 하나 있지 않은가.
“황궁.”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로한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또다시, 악몽을 꿀 것 같았다.
131
용병 길드로 되돌아가는 길, 아르펠은 말이 없는 로한을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둘은 현장 정리를 맡기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쓸 만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지금, 유일하게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카시아의 증언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건데…….
로한은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용병 길드에 들리자고 제안했다. 그들이 마주했던 또 다른 간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겸 이것저것 물어볼 게 많았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용무를 마치고 신전에 갔을 때 카시아가 깨어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별문제 없이 상황이 흘러가는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로한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린 것이다.
“…….”
묵직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기분이 안 좋은가. 왜 안 좋아진 거지. 아르펠이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레리아나의 부재였다. 그리 생각하니 급 우울해진 로한의 반응이 이해는 갔다.
레리아나는 로한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녀가 잘못되었으니 로한의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렵지 않게 그의 반응을 납득한 아르펠은 이런저런 말을 내뱉어 위로해 주기보다는 조용히 손을 잡아 주기를 택했다. 자신의 손길이 로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길 바라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깍지까지 끼는 순간, 평소와 다르게 로한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것 같긴 했으나 그러려니 넘어갔다. 많이 힘든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로한 님, 아르펠 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용병 길드 앞에 도착했을 무렵, 문을 열고 들어선 둘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데인이었다. 자리를 지키는 내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눈 밑이 퀭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네, 데인도요.”
떨떠름하게 데인을 살피던 로한이 답했다.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으면서 아무런 소식이 없어 가는 길에 잘못된 것은 아닌가 걱정했더니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피로한 기색만 짙어졌을 뿐이지 몸에 아무런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다행이다, 큰 소리가 계속 들리길래 걱정했다, 다친 곳은 정말 없느냐, 몸이 안 좋으면 꼭 말해 달라……. 끝도 없이 걱정을 토해 내는 데인을, 아르펠은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꾸역꾸역 말을 이어 나가면서도 둘을 널찍한 소파로 이끌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듯한 태도였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시지요?”
내내 이쪽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던 데인이 비장한 낯빛을 띤 채 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묻고 싶은 것도,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조용히 옆자리에 앉아 있는 로한을 응시한 아르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부탁한 말을 신전에 전한 게 맞습니까?”
“예……? 네, 전했…. 설마 아무도 파견되지 않은 겁니까?”
그간 타인과 소통하는 일을 도맡아 하던 로한이 아닌 아르펠이 운을 떼었다는 것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였다. 아르펠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곧장 알아들은 데인의 표정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사뭇 배신감까지 담긴 듯한 표정이었다.
“…죄인들을 심문하느라 제가 직접 방문한 건 아니지만, 믿을 만한 놈을 시켜 신전에 보냈습니다. 말을 전한 건 확실합니다.”
젠장, 대체 무슨 속셈인지. 덧붙여 읊조리는 목소리에 짜증이 한가득 배여 있었다. 말없이 이를 지켜보던 아르펠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 보군요.”
조금 전, 네피아에게도 똑같이 했던 질문이다. 그녀는 이 물음에 그렇노라 대답했었지. 이왕이면 이 자리에서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좋을 듯했다.
“후…… 사실 제가 아는 건 별로 없습니다.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이곳에서 지내며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는 건 알았습니다. 대부분… 신전을 꺼리는 느낌이었죠. 이 마을에서 긴 시간을 생활한 용병일수록, 더요.”
데인의 설명은 이랬다.
이 마을에서 신전과 용병 길드의 사이가 틀어진 건 특별한 이유도, 원인도 없었다. 불친절한 태도, 예의 없는 말투, 반복되는 험담……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집단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저도 이렇게 전해 들은 게 다입니다만…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도움을 요청한 것까지 무시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두 분이 잘못되셨을 수도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이건 당장이라도 항의를 하러 가야……!”
“괜찮습니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를 아르펠이 간단하게 제지했다. 데인은 들썩이던 엉덩이를 가만히 두기는 했으나, 여전히 미련이 많이 남은 낌새였다. 허락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물론, 아르펠은 그가 미련을 가지든 억울해하든 깔끔하게 신경을 끊었다. 지금 당장 그의 머릿속에 들어찬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
신전과 용병 길드 간의 불화는 오랜 시간을 걸쳐 서서히 골이 깊어졌다. 그 계기를 아무도 모르고, 남아 있는 건 유언비어식의 소문밖에 없다라. 간단히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찝찝함이 타고 올라왔다.
“하, 그래놓고선 이제 와서 나서는 척이라니.”
“……그건 무슨 소립니까?”
“아, 몇 시간 전에 신전에서 사람이 하나 찾아왔었습니다.”
쭉 이어져 나가던 생각의 흐름을 끊어 낸 것은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데인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냥 넘어가기엔 사정이 있어 보였고, 아르펠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판단은 옳았다. 신전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데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마을 북쪽 숲에서 들렸던 커다란 소리 말입니다. 그걸 듣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확인을 해보려 했는데…… 아, 두 분도 그쪽에서 오신 거지요?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다치지는- 아, 예. 이어서 말하겠습니다.”
됐다는 휘적임 한 번에 냉큼 수긍한 그가 마저 운을 떼었다.
“아무튼, 신전 측에서 찾아온 신관이 숲에는 이미 신관들을 파견했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혹시 모를 불순분자의 습격을 대비해서 저희는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게 안전하다나, 뭐라나…. 맞는 말이라 용병들에게도 마을에서 대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일을 할 때만큼은 서로 맞춰 주는구나 싶었는데.”
하아. 이윽고 깊은 한숨이 터졌다. 이런 힘겨루기는 취향이 아니라며 한탄을 늘어놓는 것은 덤이었다.
“그 신관, 이름은 알고 있습니까?”
“아, 예. 그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이름이…… 네피아였던가.
혹시나 싶어 이름을 물었던 아르펠은 예상치 못한 답에 몸을 굳혔다. 말없이 데인에게 시선을 보내어 그를 살폈지만, 그는 확실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상 이름을 헷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후 여러 번의 문답을 통해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들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데인이 말하는 ‘네피아’는, 숲에서 마주한 그 신관이 맞았다.
“그……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그 네피아라는 사람에게 문제라도….”
마주한 둘의 반응이 심상치 않으니, 데인이 슬그머니 네피아에 대한 것을 물었다. 안타깝게도 그 물음에 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로한은 로한대로 생각이 많아 보였고, 아르펠은 머릿속에서 짜 맞춰지는 생각들을 정리하기에도 바빴다.
이쯤 되니, 우려하던 것이 확실해졌다. 과거의 이야기, 소통의 부재, 엇갈린 행방…… 이 모든 것들은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이 이곳에 있다.
눈치를 보다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데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의 존재를 확신했으니 그에게도 주의를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데인.”
아르펠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음성에 담긴 심상치 않은 기류 탓일까,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데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대련하죠.”
“…네?”
“지금 당장.”
“……네?”
갑작스러운 건 둘째 치고 이유조차 짐작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 데인을 향해 목검을 하나 건넸다. 아르펠은 진작 자리에서 일어나 대련할 채비를 마친 뒤였다.
그러곤,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데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일어나지 않고 있느냐는 의문이 한가득 묻어났다.
삐거덕, 데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로한을 향했다. 열렬한 시선이 사뭇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듯했지만, 그에게 닿지 못했다. 반응이 없는 것은 물론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상대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목검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가 잔뜩 흔들렸다. 제삼자가 들었다면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안쓰러운 음성이었다.
하나 상대가 누구인가. 로한이 아니라면 눈앞에서 울며 자지러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아르펠이었다. 퍽 불쌍해 보이는 데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지만…… 데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잘못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는 확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적어도 대련을 하면서 죽을 일은 없겠군.
로한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 아르펠 님의 의도를 알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지만, 대련이 시작된 이상 닿지 않을 물음이었다. 데인은 침착하게 상대를 천천히 분석해 나갔다.
…언뜻 보면 빈틈투성이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자세였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련이라는 이름하에 검을 겨누고 있는 만큼, 상대 역시 자신의 실력에 맞춰 줄 테니까.
가볍게 검을 틀어쥔 데인이 발끝에 힘을 주었다. 찰나의 순간, 그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발도하듯 허리춤에서 시작된 검의 끝이 정확히 아르펠을 향했다.
이럴 땐, 선공이 답이다.
132
몇 번의 합이 오갔다. 데인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대련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는 듯 몰아치는 검격에는 살의가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쁘게 검을 받아치던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강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대련이 이 정도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장에서는 어떨까. 문득 실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실 사람으로 둔갑한 검인 아르펠이 검에 누구보다 능통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데인은 하염없이 감탄하기만 했다. 다시 검을 수련할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됐습니다.”
“조금 더,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펠은 검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려고 했다. 의욕이 꺼지지 않은 눈으로 대련을 잇달아 요청하는 데인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무감하게 깜빡이는 눈이 상대를 살폈다. 이미 검증은 마쳤건만, 상대는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르펠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멋대로 대련을 요청했으니 상대가 원한다면 조금 더 싸워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년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그만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아르펠은 그것이 옅은 거북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탁, 타닥. 그 뒤로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사방이 조용한 탓에 길드 내에는 한동안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졌습니다.”
승부는 생각보다 금방 났다. 당연했다. 이전의 대련이 길게 이어진 것은 데인의 실력을 살피기 위해 아르펠이 검에 담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었으니.
깔끔하게 걷어 낸 검이 우당탕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한바탕 나뒹굴었다. 저릿한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데인은 깔끔히 결과에 승복했다. 애초에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근데 왜 갑자기 대련을 시작한 겁니까?”
떨어진 검을 주섬주섬 챙기며 묻는 데인의 낯은 일견 상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게 검을 건네준 아르펠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을 들려주었다.
“당신이 구원교의 간부가 아닌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예?”
투두둑. 주운 보람이 없게, 데인의 손에 들려 있던 목검들이 다시금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정작 폭탄을 던진 아르펠은 태연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라도 전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이어 나갔다. 자연스레 로한이 앉아 있는 소파로 돌아가 걸터앉는 그에 데인은 순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눈이 비스듬히 돌아갔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한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따라 그의 반응이 이상하긴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말을 던져놓고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아르펠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는 다 데인의 착각에 불과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한을 살핀 것이었건만, 정작 그가 내비치는 반응은 자신과 비슷했다. 넋을 빼놓고 있던 눈동자가 커다래져 아르펠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 열렬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 박자 늦게 아르펠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어디 안 좋아?”
…무엇이 문제인지 눈곱만치도 모르는 듯한 태도로. 더 어이없는 점은 그의 목소리에 로한을 향한 걱정이 담뿍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데인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여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 보았지만, 아르펠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결국 데인은 힘겹게 속을 정리하고…… 아니, 정리되기는 무슨.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의문을 내비쳤다. 간신히 짜내진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아르펠은 그제야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흘끗 로한을 눈짓한 그가 느리게 운을 떼었다.
“구원교의 간부 중 타인의 겉모습을 똑같이 따라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전투 능력은 크게 떨어지는 편이니 대련을 통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말문이 턱 막혔다. 데인은 설명이랍시고 늘어놓은 말들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원하던 설명을 해 준 것은 맞지만, 앞뒤 다 잘라먹고 대뜸 말하니 인과관계를 따지느라 머리가 과부하를 일으켰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상황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 마을 안에 구원교 간부 하나가 숨어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예.”
가까스로 머릿속을 정리한 데인이 단호한 아르펠의 대답에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전에 맞닥뜨렸던 녹빛 피부의 거인 역시 구원교의 간부 중 하나라고 들었다. 만약 로한과 아르펠,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필시 마을에는 커다란 재앙이 닥쳤을 것이다. 하나만 하더라도 이럴진대, 하나가 더 있다니.
그 능력 또한 범상치 않았다. 원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지 않는가. 졸지에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듣다 보니 몇 가지 의문이 차올랐다. 어떻게 간부의 존재를, 그 능력을 알았는지. 약점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하나 곧장 그 의구심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간혹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느끼고는 한다. 흔들림 없는 아르펠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 딱 그러했다. 설령 묻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으며, 아르펠의 말대로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
그제야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찝찝한 위화감이 가셨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좋지 않던 용병 길드와 신전 사이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만약 그 ‘간부’라는 자가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머물렀다면, 어렵지 않게 두 세력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었을 테니.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곧장 구속하고 전해 드리겠다는 말까지 덧붙인 데인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깔끔히 마무리된 대화와는 다르게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한이 자꾸만 신경 쓰인 탓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음, 길드에서 머무르다 가셔도 상관없는데….”
“괜찮습니다.”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이내 나갈 채비를 하는 두 사람에, 데인은 배웅한답시고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마지막으로 조심하라는 한마디를 남긴 아르펠은 그렇게 로한과 함께 길드를 나섰다. 둘의 등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도 한동안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데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코 더 머무르다 가도 좋다는 말을 내뱉었을 땐 긍정의 답이 돌아올까 봐 얼마나 긴장했던지. 평소와 다르게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둘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그토록 고될 수가 없었다.
느리게 길드의 문을 닫은 데인이 고개를 저으며 복잡한 생각을 털어 냈다. 이제는, 길드를 뒤집어엎을 시간이었다.
***
데인이 느낀 이상함을 아르펠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로한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감정을 조용히 감내하지 않았던가.
대련을 할 때도 신경이 쓰였지만 타인을 앞에 두고 물을 수는 없었던지라, 아르펠은 데인의 제안도 완강히 거절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카시아의 상태를 확인해 보아야할 필요도 있었으나, 지금은 로한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로한.”
용병 길드에서 충분히 멀어졌다 싶자 아르펠은 조용히 로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새까만 하늘,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한 길가, 그 위로 선선히 내려앉는 달빛.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다.
“왜요?”
길드를 나설 때만 해도 복잡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었건만, 태연히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은은히 풍기는 속상함만 아니었더라면 아르펠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유를 묻는 목소리에 답을 쥐여 주지는 않았다. 대신, 아르펠은 조용히 손을 뻗어 로한의 손을 마주 잡기를 택했다. 따끈한 체온이 손끝을 덥혔다.
“혹시… 내가 숨기는 게 많아서 속상해?”
몇 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아르펠은 더듬더듬 말꼬를 터 보았다. 로한의 기분이 안 좋아진 순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던 고민이었다.
로한에게는 황실의 실험에 관한 이야기도, ‘소설’의 이야기도 해 준 적이 없다. 전자의 경우 자신 또한 기억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 해 줄 말이 없기는 했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또 다른 간부’의 존재 역시 소설 속에 언급된 비슷한 사건을 토대로 추론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로한에게는, 간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퍽 갑작스럽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자그마한 걱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고 자책하면 어쩌지. 혹은 반대로 숨기는 게 많아서 실망하면 어쩌지.
로한을 향해 조심스레 물음을 건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너무 속상하고 힘들다며 숨기는 것들을 말해 달라 하면 어디까지 밝혀야 할까. 아마 아르펠은 간절함이 서린 로한의 눈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미래는 뻔했다.
결국 이 세계의 비밀과 ‘소설’의 존재를 모조리 털어놓고 말겠지. 머지않은 미래를 그리는 아르펠의 눈이 가라앉았다. 어쩌면, 처음 자신에게 다가온 것도 기만이었냐며 탓할지도 모른다. 순간 심장이 지끈거렸다.
“……아르펠?”
아르펠의 물음에 답을 내놓으려던 로한은 그의 낯에 서린 선명한 불안을 읽었다. 불안뿐만이 아니었다. 두려움, 자책, 혼란…… 그러한 감정들이 얼룩덜룩 묻어나온 아르펠의 표정은 로한에게도 낯선 무언가였다.
걸음을 멈춰 세운 로한이 급히 아르펠을 붙잡았다. 이미 잡은 손은 물론이고 다른 한 손까지 꽉 잡고, 조용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손끝으로 달래듯 손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눈을 마주치기를 계속했다.
여전히 사랑을 내비치는 눈을 본 탓일까. 느리지만 확실하게, 아르펠의 낯에 가득 차 있던 그늘이 걷히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안정을 되찾은 이를 눈앞에 두고 로한은 속삭였다.
언제 말해 주어도 상관없으니, 그냥 같이 있어 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나직하게 쏟아져나온 진심에 아르펠의 표정이 무너졌다.
133
숨겨도 돼요.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 위로하듯 뺨을 쓸어 주는 손길.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우습게도 아르펠은 그것들로부터 커다란 안정을 찾았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무언가가 부서져 내린 것만 같다. 그 생경한 기분을 한 움큼 느끼고 나서야 아르펠은 깨달았다. 매번 의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로한을 마주하고, 그와 함께하고, 넘칠 듯 흘러나오는 애정을 받는 매 순간… 어쩌면 조금은, 불안해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눈 아래를 문질렀다. 감촉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깃털처럼 가벼운 손길이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아르펠의 시야에, 복잡한 기색을 내비치는 로한이 빼곡히 차올랐다.
“울어도 되는데…….”
옅게 흩어지는 목소리에 미련이 묻어났다. 아무리 슬퍼해도, 짙은 회한으로 눈가가 일그러져도 기어코 눈물만큼은 떨어뜨리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듯.
“미안. 눈물이 안 나오네.”
“아르펠이 사과할 일은 아닌걸요.”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은 물론이고 감정까지 퐁퐁 흘러나오고 있으니, 아르펠이 로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결국 그는 자그마한 미소로 고마움을 전했다. 로한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은은한 미소가 고인 얼굴은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찰나 떠오른 미소에 한없이 기뻐하며, 황홀할 정도의 애정을 퍼부어 주는 이가 또 있을까. 저를 단단히 붙잡는 손길을 느끼며 떠올려 보았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아르펠은 로한의 검이 된 것이 좋았다.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려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지언정 이렇게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 느꼈다.
“언젠가는 꼭… 말해 줄게.”
그러니,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 보기로 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로한을 지켜보고…… 그렇게, 더 이상의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때가 눈앞에 찾아오기 전까지.
흔들리는 눈에 담긴 속내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로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한없이 깊은 애정이었다.
둘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아르펠의 낮에 서린 혼란이 완전히 가시고 난 뒤였다. 한 걸음 앞서 나가며 잡은 손을 이끌던 로한이 말을 덧붙였다. 민망한 웃음소리가 뚝뚝 떨어졌다.
“내 기분, 신경 쓰느라 그런 거죠?”
어째서 아르펠이 ‘내가 숨기는 게 많아서 그런가 보다’라는 결론까지 닿았는지 어림짐작했다는 태도였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사실이었기에, 아르펠은 순순히 고개를 주억이기만 했다. 자유로운 나머지 손으로 괜히 볼을 한 번 긁적인 로한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물론, 레리아나 일도 있지만…… 아르펠이 자꾸.”
“……나?”
고민하는 듯 잠시 쉬었다 이어지는 말을 집중해서 듣던 아르펠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자신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하여 안심했건만, 결국 그의 슬픔이 자신에게서 비롯됐다니.
그의 눈이 죄책감으로 흔들리려는 것을 눈치챈 로한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건…… 이어지는 목소리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듯 점점 작아졌다.
“…자꾸, 황실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니까.”
“황실?”
이야기에 집중하던 눈이 한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가 속상해하는 이유를 여러 방향으로 추측해 보고 있었던 아르펠로서는 그 단어가 퍽 뜬금없게 느껴졌다.
이를 본 로한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무덤덤한 얼굴이었으나, 로한에게만은 투명할 정도로 잘 보이는 반응이었다. 함께한 세월이 수없이 쌓여가는 만큼 아르펠의 표정을 훤히 꿰뚫게 되었으므로.
“거 봐요.”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황실을 입에 담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듯한 태도 때문에.
로한의 입장에서는, 아르펠은 지나치게 자신의 일에 무관심한 존재처럼 보였다. 수십 년 전 신전과 황실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말할 때도 그랬고, 황실에서 진행한 실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그 모든 일의 피해자가 자신이었음에도, 아르펠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로한은 그가 그런 반응을 내비칠 때마다, 아무렇지 않아 할 때마다 말 못 할 비참함을 느끼고는 했다. 사랑하는 이가 지옥 같은 과거를 겪었다는데, 이를 끔찍이 여기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자면 아르펠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로한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로한에게는, 터무니없는 슬픔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미안해.”
조용히 입술을 달싹이던 아르펠이 조심스레 사과를 전했다. 로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 수 있었으므로.
자신이 잘못한 게 있겠거니 싶어 사과부터 건넨 것이었지만, 정작 사과를 받은 로한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짓기만 했다. 미처 숨기지 못한 씁쓸함이 배인 웃음이었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뜨거웠지만, 평소보다는 낮은 듯한 체온이 여전히 온기를 전해 주고 있었다. 작게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손을 가볍게 흔드는 로한을 바라보며, 아르펠은 그가 남은 미련을 털어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과 안 해도 돼요. 이제는 괜찮아요. 그냥…….”
내가, 바꾸면 되는 거니까.
그늘이 져 있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맺혀 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고, 시원한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갔다. 풀어진 낯과 로한의 주위를 감싼 분위기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답지 않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감상에 흠뻑 젖어있었으니, 속삭이는 듯한 마지막 말을 아르펠이 듣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뒤늦게 무슨 말을 했느냐 물어도 로한은 꿋꿋이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순간 아르펠의 표정이 허망해졌다. 로한은 이를 보고 키득키득 웃는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속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괜찮아졌다. 한마디 한마디에 솔직한 반응을 내비치는 아르펠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건만.
“…빨리 가요. 지금쯤이면 카시아가 깼을 수도 있으니까.”
로한은 애써 그 기분을 외면했다.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르펠을 잡아끄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그를 향해 말간 미소를 그려내는 것뿐이었다.
***
도착한 신전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에서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건 물론이고, 이에 휩쓸려 성녀까지 모습을 감췄다니.
그들은 실종된 용병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한편, 의식이 없는 카시아를 치료하고 신전으로 이송했다. 그녀가 레리아나의 뒤를 쫓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또 다른 말로, 카시아와 레리아나를 습격한 정체 모를 적 역시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유독 신전의 주변을 둘러싼 병력의 수가 많아 보였다. 둘은 로한의 신분 덕분에 몇 안 되는 절차를 거치고 신전 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한 님, 아르펠 님.”
신전에 들어서자마자 네피아는 둘을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이했다. 낯은 한껏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음에도, 전과 다르게 수척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옅게 얼굴에 내린 그늘이 그간의 일을 대신 전해 주는 듯했다.
“일이 잘 안 풀렸나 보군요.”
“……네, 아무래도.”
이를 모르지 않은 로한이 넌지시 운을 뗐다. 어색한 미소를 그린 네피아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카시아 신관님의 치료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다만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으시니… 짐작 가는 이유도 없어 곤란한 상황입니다. 이렇게 가다간…….”
말을 끝까지 잇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뒷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카시아가 빨리 눈을 떠야만 레리아나를 구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를 알고 있었기에, 네피아는 이야기를 끝맺지 못했다. 카시아가 눈을 뜨지 못하면 레리아나를 구하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니.
흐려지는 상대의 낯을 따라 로한의 표정도 좋지 않아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황실의 짓거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레리아나를 데려가 무슨 짓을 할까.
“…….”
황실의 행보를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황실의 손에 넘어가 온갖 곳에 이용당했던 이가 옆에 앉아 있지 않은가.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생각에 로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로한.”
그를 끌어 올린 것은 나지막한 아르펠의 부름이었다. 한 박자 늦게 떠진 눈이 아르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상대의 안위를 확인하는 듯한 애처로운 눈길에 아르펠은 말없이 로한의 손을 붙잡아 주기만 했다.
느리게 호흡하는 가슴팍이 보였다. 로한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두 번… 아르펠을 따라 여러 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길 반복했다. 마주친 눈이, 보란 듯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나드는 숨결이 소리 없이 위로를 건네주는 듯했다.
여러 감정으로 들끓던 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풍랑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흔들리던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눈을 하고, 로한이 먼저 운을 떼었다.
“오늘 밤, 날이 밝기 전까지… 카시아 신관의 호위 인력을 줄여 주셨으면 합니다.”
이 모든 소동의 주인공을 반쯤 방치해 두자는, 파격적인 제안과 함께.
134
어둑한 새벽, 빛이라곤 창가에서 스며 들어오는 달빛이 다인 고요한 방안. 집중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작은 숨소리만이 적막을 가르고 들려왔다.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 위에는 까만 머리의 여성이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음영진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그 모습을, 남자는 새삼스레 눈에 담았다. 깜빡이는 눈에 옅은 의구심이 어렸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신전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녀 레리아나의 실종. 신관 하나가 얼굴이 퍼렇게 질려 중앙 신전에도 소식을 전하러 갔으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의 축복을 받은 이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다니. 남자 역시 이야기를 전해 듣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었다.
남아 있는 흔적도, 증거도 없다. 수색은 지지부진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어진 유일한 실마리가 바로 카시아 신관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그녀는 가볍지 않은 상처들을 여럿 달고 있었다. 수많은 신관이 그녀에게 달라붙어 부상을 치료했다. 문제는 상처가 말끔히 나았음에도 카시아 신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불안의 목소리를 내는 신관들이 제법 되었으나, 그렇다 한들 그녀가 깨어나는 것 외에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없었다. 신전은 외부 세력에게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호위 인력을 빽빽하게 배치했다.
몇 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데없이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고, 빼곡히 차 있던 호위 인력이 빠졌다. 남은 건 방 안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자신과, 문밖을 지키고 있는 친구 하나뿐.
폭풍의 눈이나 다름없는 상대를 단둘이서 지킨다니? 거기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은 갑작스레 습격해 오는 상대에게서 호위 대상을 완벽히 지킬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난다면 백이면 백 휘말려 버릴 것이다.
물론, 그가 불안해하든 말든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최선은 짙게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밤새 이어지는 경계에 동상마냥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야 했으므로.
똑, 똑똑똑, 똑.
문 바깥에서 일정한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위 임무를 떠안아 버린 친구 녀석과 정해 둔 신호였다.
방금 건 용변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뜻이다. 마주 노크를 하며 대충 답을 한 남자가 다시금 길게 숨을 내뱉었다. 불만을 가지면 뭐하리. 그가 이곳에 남아 호위를 서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 안 가 또 한 번 생각이 흐트러졌다. 돌아오면 두 번 문을 두드리기로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건너편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똥을 만들어서 싸나…….”
“그러게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제 말이 그 말이다. 제아무리 친구 놈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호위가 충분한 상황이면 몰라, 둘이서 지켜야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러다니.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봐라, 얼마나 심하면 저런 대답까지……. 대답?
남자의 몸이 우뚝 굳었다. 호위는 자신과 친구, 둘이다. 친구라는 놈은 용변을 보겠다며 사라졌다. 고로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목소리는, 대체 누가 낸 것이란 말인가.
오한이 느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삐거덕 고개를 돌린 남자는 두려움에 잔뜩 흔들리는 눈을 하고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응시했다. 이윽고…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카시아 신관님!”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하더라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던 그녀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된 목소리를 낸 남자가 허둥지둥했다. 누구든 좋으니 이 희소식을 빠르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잠식해 버린 탓이었다.
“시, 신관님을! 아니, 네피아 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이라도 방을 뛰쳐나갈 듯했던 움직임은 호위 대상의 한마디에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위 임무를 배정받았으면서 보호해야 할 이를 홀로 남겨두고 벗어나려 하다니. 카시아가 제지해 주지 않았다면 커다란 실책을 범할 뻔했다.
친구 놈이 돌아올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야겠다. 힘겹게 마음을 가다듬은 남자가 다짐했다.
“혼자 계십니까?”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킨 카시아가 물었다.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몸을 움직이는 것에 놀란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이 호위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만, 지금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친구가 돌아오면 다른 신관님께 이 소식을…….”
“아뇨. 제가 직접 움직여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몸이….”
“괜찮습니다. 충분히 회복된 것 같군요.”
다만… 완강히 고개를 저은 카시아가 뒤따라 한마디를 더했다. 빛을 등지고 있었던 탓일까. 남자는 위협적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눈을 발견하지 못했다.
“괜찮으시다면, 가까이 오셔서 부축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예, 얼마든지 해 드려야죠!”
의욕이 넘치는 눈이 반짝거렸다. 카시아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손을 뻗었다. 자신을 붙잡으라는 듯 뻗은 굳은살 베인 손을 응시하던 카시아가, 손을 잡으려는 듯 몸을 숙였다.
그렇게, 둘의 몸이 가까워진 순간.
카시아의 눈이 번뜩였다. 다소곳이 이불 안에 있는 듯싶던 손이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하얀 천 아래 가려져 보이지 않던 손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손끝에 쥐어진 검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남자를 향했다.
그는, 이 모든 광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검으로 위협당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전개에 몸이 굳었다. 한계까지 커다래진 눈은 날카로운 검을, 점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것을 연신 뒤쫓아 갔다. 하얗게 물들어 버린 머릿속에 연신 의문이 넘실거렸다.
왜? 왜 카시아 신관님이 나를? 무슨 목적으로? 난 이대로, 죽는 건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기어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직면했으므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온 힘을 다해 시선을 들어 올려 카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분명 푸른색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불길한 붉은 빛을 발하는 것을.
채앵-!
찰나, 카시아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소음을 내었다. 사람을 찔렀을 때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매서운 음이었으며, 무엇보다 남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떠보았다. 당장이라도 가슴을 꿰뚫을 것만 같던 검이 거짓말처럼 멈춰 있었다.
“크윽……!”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살기가 줄줄 흐르던 검도, 그 검을 쥐고 있던 카시아도. 바닥에서 줄기줄기 솟아난 검은색의 끈 같은 것으로 묶여 있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몸을 구속하고 있는 건지, 카시아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남자는 급변한 상항을 이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만 뒤로 물러나 주세요.”
뒤쪽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에 놀라 물러나기 전까지. 무심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돌린 그는 어느샌가 문이 열렸음을 깨달았다. 그 너머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아.”
알겠다. 그는 어렵지 않게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오가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게다가 신전에서 스치듯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구원교의 몰락에 그 누구보다 힘을 쓰고 있다는, 마신의 축복을 받은 자. 분명 이름이…… 로한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의 정체를 인지하자마자 몸에 바짝 들어 있던 긴장이 쓸려 나갔다. 비틀거릴 뻔한 것을 간신히 견딘 남자는 허겁지겁 ‘카시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에게서 멀어졌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다름 아닌 ‘살았다’였다.
***
카시아를 호위하던 남자가 그녀에게 공격을 받으려는 찰나, 로한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내 상대를 벼르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뻗어 나간 그림자 줄기들이 ‘카시아’의 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 강한 힘이 몸을 구속해 버리자 그녀는 신음을 토해내며 멈춰 섰다.
신전에 도착하기 전, 아르펠은 말했다.
‘아마 그건 신전에 숨어들었을 거야.’
자신이 말한 간부는 신전에, 정확히 말하면 카시아의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데인에게 경고하고 겸사겸사 그의 결백도 확인한 것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로한은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현재로선 그녀가 사건의 열쇠나 다름없었으니, 그것 역시 카시아를 처리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며.
신전에 도착해 카시아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로한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곧 이것이 반대로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놈의 방심을 이끌어내야 한다. 경계를 최대한 느슨히 해서, 그것이 자신의 숨통이 조여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호위 인력을 대폭 줄여 달라는 요청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로한의 요청을 들은 네피아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격한 반응을 내비쳤지만, 구원교의 간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 역시 직감한 것이다. 신전을 뒤집어엎어 내부에 있는 적을 찾는 것보다, 그를 유인하는 것이 빠르다는 걸.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마저 아까웠다. 지금 이 순간, 레리아나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강박이 네피아의 고개를 끄덕이게끔 했다. 동료를 미끼로 삼는다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짓을 묵인할 정도로.
“이, 이게…….”
아마, 그런 그녀마저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지켜내고자 한 대상이, 도리어 자신의 숨통을 노리는 날카로운 가시였을 줄은.
135
계획을 실행하기 전 로한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던 네피아는 상황을 곧바로 이해했지만, 그녀를 뒤따라온 다른 신관들은 아니었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충격적인 사실일수록 이를 곧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버럭 목소리를 낸 신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시아의 손에 은빛 단검이 들려 있다는 것을 분명 목격했다. 그럼에도 그 검으로 다른 신관을 찌르려 했다는 정황을 유추하지 못한 것이다. 신관은 그녀의 몸을 구속한 수많은 그림자에 집중한 나머지 로한에게 언성을 높였다.
다른 이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어떤 이는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서 있었고, 또 다른 이는 로한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그를 말리려는 것처럼 손을 뻗은 이 역시 있었다. 네피아가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저게, 인간으로 보입니까?”
로한 또한 그들의 혼란을 모르지 않았다. 휙 돌아간 금빛 눈동자가 기이하게 일렁였다. 순간, 안 그래도 빡빡하게 상대의 몸을 조이고 있던 그림자에 더 강한 힘이 깃들었다. 이윽고 놈의 입이 벌어진다.
「끼에에에엑―!」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건 사람의 비명이라고도, 짐승의 울음소리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소음이었다.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언가’가 미친 듯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같은 공간에 서 있는 모두가 깨달았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일 수가 없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비명이, 불길하게 타오르는 붉은색 눈동자가, 상처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몸을 꺾어 어떻게든 도망가려 하는 움직임이 그리 말해 주었다.
“으…….”
처음 언성을 높였던 자 역시 저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경멸이 담긴 탄식을 내뱉은 신관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녀석의 눈코입이 흐물거리기 시작하자 그러한 분위기가 극에 달했다. 얼굴을 반죽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목구비가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했다. ‘카시아’의 외관을 덮어썼는데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자 본능적으로 다른 이의 겉모습을 따라하고자 한 것이다.
그 기현상은 얼굴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점차 그 범위가 번지기 시작하더니, 머리카락의 길이와 색, 몸집의 크기, 손발의 생김새까지 온몸이 끊임없이 변했다. 누군가가 뒤쪽에서 구역질했다. 그만큼 역겨운 광경이었다.
“…그럼, 카시아 신관은 대체.”
불길함이 한가득 배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를 기점으로 끔찍한 정적이 퍼져 나갔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카시아 신관을 찾아내지 못하고, 레리아나의 행방에 대한 단서 역시 알아내지 못해…… 결국 두 사람을 잃는 것.
구원교와 신전 사이의 싸움의 판도를 뒤집어 버릴 만한 일임은 물론이고,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문책을 피할 수 없겠지.
그때, 네피아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두신 방법이 있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공포와 두려움을 내비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침착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신관을 이끄는 자리에 있었기에 무너지지 않으려 애쓴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일개 신관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은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앞쪽에 서 있던 네피아의 눈에는 로한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카시아의 부재에 모두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한 점의 흐트러짐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던 그 평온한 낯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졌다.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로한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야 로한의 입이 열렸다.
“이건 구원교의 간부 중 하나입니다. 보다시피 타인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고요.”
“그런…….”
“이 마을의 신전이 용병 길드와 사이가 안 좋다고 하셨죠.”
구원교의 간부. 그 두려운 존재에 신관들이 이를 악물 무렵, 로한이 뜬금없는 주제를 꺼내 들었다. 눈을 크게 뜬 네피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 역시 타인의 모습을 따라 할 수 있는 자가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자세한 일의 내막은 전해 들은 바가 없었기에 이어질 로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 오기 전 용병 길드에 들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크고 작은 불화가 쌓이고 쌓여 이 지경이 됐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고의로 신관의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싸움을 거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엔 그러려니 넘어가려 했지만, 그게 수도 없이 반복되다 보니.”
남들보다 이타심이 있다고 한들 신관 역시 사람이다. 계속해서 시비가 걸리고 당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그 대상을 향한 감정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감정이 안 좋아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용병 길드와 신전의 관계는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었다.
“용병 길드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소소.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에 있는 것의 정체를 들었을 때부터 긴가민가했던 것이 사실이 되고 만 것이다.
두 집단 사이의 불화가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 결국 신전과 용병 길드 모두 구원교에 의해 놀아났다는 말이었다. 다른 신관들 역시 그 사실을 곧장 깨달았던 걸까. 눈 깜짝할 새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이 과거를 되새기며 열이 오르든 말든, 로한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있는 놈을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다행히 약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흉내 낸 상대의 무력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 로한은 그리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놈에게 신관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력이나 마력을 가진 이들이 풍기는 특유의 기척을 똑같이 재현하지 못할 테니까.
누군가 대뜸 손을 들어 물은 것은 그때였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라며 소리친 목소리가 제법 당찼다.
“그럼 여기서 느껴지는 카시아 신관님의 기척은 뭡니까?”
차근차근히 해나간 설명의 목적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그에 로한은 숨김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볍게 주먹을 쥐는 것으로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대는 간부 놈의 입을 그림자로 틀어 막아 버린 것은 덤이었다.
“카시아 신관이 무사히 살아남아, 가까운 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소리죠.”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개었다. 틀림없는 희소식이었다.
***
로한이 간부를 꽁꽁 묶어 놓고 있는 동안 신관들은 카시아 구출 작전을 펼쳤다. 조용히 눈을 감은 네피아가 빽빽이 기감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땅 아래에 계신 것 같다’라 말하자 부산스럽게 자리를 떴다.
얼마 안 가 카시아는 무사히 구출됐다.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관들이 달라붙어 잽싸게 치료를 한 덕에 후유증 하나 없이 말끔하게 나은 모양이었다.
“간부의 처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카시아가 안정을 취하는 틈을 타 네피아는 또다시 로한과 아르펠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몇 십번이고 형태를 바꾸는 것을 응시하는 눈에는 선명한 혐오가 섞인 채였다.
로한이 담담하게 답했다.
“죽일 겁니다.”
“…하지만, 캐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요?”
잠시 멈칫한 네피아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그녀는 로한의 태도가 의외라고 생각했다.
구원교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간부’가 있다는 이야기는 신관들에게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그게 그저 구원교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신도들이 부풀려 퍼 나른 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 그 생각은 깨졌다. 차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를 두 눈으로 마주한 것이다. 이런 게 간부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무엇을 향해 간부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괴물이었다.
그런 자를 산 채로 잡은 것은 엄청난 실적이었다. 당장 이 자를 중앙 신전으로 넘겨 심문한다면 구원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기밀을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로한 역시 그를 살려 두겠다고 할 줄 알았거늘.
이해할 수 없는 눈을 하는 네피아를 향해, 로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보십시오.”
“네?”
“이놈이 이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제야 그녀는 ‘간부’의 겉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생김새가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인지하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을 들여 보니 알 수 있었다.
입의 형태를 한 부위로부터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는 것은 사람의 말이라 할 수 없는 괴기한 울음소리였다. 로한이 입 부근을 틀어막고 있던 그림자를 치우자 더욱 잘 들려왔다.
시뻘겋게 물들어 반쯤 돌아간 귀기 어린 눈, 발작하듯 떨리는 몸, 부글부글 끓는 숨소리까지. 결국, 네피아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이놈이 도저히 의사소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
“이것과 비슷한 간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될뿐더러 남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둔하고 부자연스러웠죠.”
몇 시간 전에 상대했던 몸집이 거대한 간부의 이야기였다. 행동 양식도 비슷하지만, 무엇보다 둘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지 않은가.
붉게 물든 눈동자. 뚜렷한 대상 없이 흘러나오는 끈적한 살의를 품은 눈이 그러했다.
거기다…… 로한이 마저 말을 이었다. 동시에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그림자 줄기에서 뻗어 나온 커다란 가시들이 순식간에 간부의 몸을 꿰뚫었다.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을 질러대던 놈은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살려둔다 한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똑같이 재앙을 불러올 놈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흉내 낼 수 있을 테니. 이 마을에 닥쳤던 것과 비슷한 재앙을 또 다른 곳에서 일으킬지도 모르는 놈이었다.
로한이 하고자 한 말을 마저 이해한 네피아는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그의 손속은 잔인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안일한 것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간부의 몸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톡,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던 가면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내 그것은 깔끔히 반으로 갈라졌다. 일전에 느껴본 적이 있던 낯선 신의 기운을 풍기며.
136
간부 하나가 더 사라졌다. 이로써 남은 간부는 넷이 된 셈이다. 희소식이었으나, 로한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베모스 마을에서 마주한 간부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상태가 이상했다. 한 줌의 이성도 찾아볼 수 없었던 움직임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듯 부자연스러웠다.
붉게 물든 눈, 그리고 가면이 부서질 때마다 흘러나오는 기이한 기운은 한없이 이질적이었으나 망령의 기운처럼 불쾌함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더없이 찝찝했다.
습격을 감행했던 용병들도 그들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귀기를 흘리는 붉은 눈과 이성이라곤 쥐뿔도 찾아볼 수 없었던 거친 검격…… 거기다 생명을 불태우며 피어오른 새빨간 오러까지.
기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황궁의 의뢰였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급습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붉은 오러도 모두 황실과 얽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인즉, 이해할 수 없는 간부들의 행동 또한 배후에 황실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찬찬히 생각을 정리한 로한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로한 님, 아르펠 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간부가 죽은 것을 확인한 네피아는 물러났고, 로한과 아르펠은 그녀가 안내해 준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려 마지않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초췌한 낯의 카시아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름을 담은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충격을 받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두려운 건지. 아리송한 태도였지만 로한은 그녀의 몸 상태부터 물었다.
“…네, 이곳의 신관분들이 치료해 주셔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잠시 말을 늘이는 듯하던 카시아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이 절 구해 주셨다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감사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두 분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그녀의 입에서 의미 모를 웃음이 흘러나왔다. 작게 미소 지으며 겸손한 태도를 고수하는 로한이나, 변치 않는 평온한 낯을 하면서도 종종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아르펠이나 달라진 게 없다면서.
두려움에 기다리지도, 멈춰 서지도 못하던 레리아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이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레리아나는 지금 카시아의 곁에 없었다. 지켜내지 못했다.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 카시아의 낯에 죄책감이 빼곡하게 차올랐다.
일변하는 카시아의 표정은 일종의 신호가 되었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던 아르펠이 운을 띄웠다.
지금 그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꽤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카시아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당시의 상황. 아르펠은 그것을 물었다.
눈을 질끈 감는 것도 잠시, 카시아는 숨을 가다듬곤 애써 침착한 어조로 그때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답지 않은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그녀가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간혹 인과관계가 무너진 말이 들려도 둘은 조용히 카시아의 이야기를 듣기를 택했다. 대충 예상가는 것들을 끼워 맞추면 되었으므로.
“……해서, 저는 뒤쪽에 빠져 레리아나 님의 전투를 지켜보았습니다.”
갑자기 터진 연기가 시야를 완전히 가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두서없이 말을 이어 나가던 카시아가 숨을 들이켰다. 로한은 그 ‘연기’가 레리아나 실종 사건의 시발점임을 직감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레리아나 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얼마 안 가 연기 속에서 레리아나 님이 보이더군요. 옷에 피가 흥건해서 크게 다치신 줄 알고 급하게 다가갔는데…….”
주먹을 꽉 쥐었다 푼 카시아가 이를 악물곤 나머지 말을 읊조렸다.
“그대로 찔렸죠. 칼에.”
그녀는 그 순간 의식을 잃었다 했다. 중간에 자신을 부르는 레리아나의 목소리를 언뜻 들은 것도 같았지만, 속수무책으로 감기는 눈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표정에 가득 서려 있는 것은 복잡함이었다.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계속 생각했습니다. 왜 레리아나 님이 날 공격했을까. 그런데…… 깨어나 보니 알겠더군요.”
그 개자식이, 저희를 농락했다는 걸.
으드득. 살벌하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먹 쥔 손에서 바르르 떨렸다.
“…아마 레리아나 님도 저와 비슷한 수법으로 당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 얼굴을 하고 다가갔다면 경계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로한은 카시아의 추측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가정으로만 두었던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시간도 되었다.
로한은 몇 년 전, 처음 신전을 나설 때 자신들을 습격해 왔던 이름 모를 남자를 떠올렸다. 황제의 최측근으로 보이던 녀석.
렉시아와 이벨린의 정보망을 통해서 예측한바, 그는 오래전에 황제에게 거둬진 ‘오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놈인 듯했다. 성별과 이름, 외견상 나이대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놈이었지만, 그가 황제의 충실한 심복이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 놈이 직접 레리아나와 카시아 앞에 나섰다.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도, 간부와 용병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흔적도 모두 황제와 관련이 있음이 확실해진 것이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했다. 로한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전해 들은 대로라면 카시아는 레리아나보다 먼저 정신을 잃은 것이 된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 역시 레리아나의 행방을 모른다는 말이 될 터. 머리꼭지까지 차오르려는 초조함을 애써 내리누른 로한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옆에 있던 아르펠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말았을 테다.
“그럼, 당신도… 레리아나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겁니까?”
그 말에 카시아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무어라 단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녀에게서 묻어났다.
“원래라면 그랬을 겁니다.”
“……원래라면?”
“비록 정신을 잃었지만, 제게는 아직 느껴집니다. 레리아나 님이 제게 마지막으로 써주셨던 권능이……. 그러니, 이 힘을 따라가면 그분을 발견할 수 있을 테죠.”
일전에 비해 크게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던 카시아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미처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유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렇다 한들, 저와 같은 일반적인 신관이라면 추적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권능과 성력에는 명백한 우위 관계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저희를 쫓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리아나 님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벅찬 듯 내뱉는 음성에 거센 감정이 넘쳐 흘렀다. 아르펠은 입을 다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그녀의 말을 귀에 담기만 했다.
로한을 마주할 때와 같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카시아의 감정이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인간이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품을 수 있나. 사람 하나와 검 하나를 상대로 말이다.
“…저희밖에 할 수 없는 일인가 보네요.”
투명하기까지 한 진심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던 로한은 머지않아 상황을 이해했다. 이 자리에 자신과 아르펠이 없었다면 레리아나는 그대로 놈들의 손아귀에 넘어 갔을 테지.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제야 카시아가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 줄 겸, 곧바로 추적을 부탁하기 위함일 것이다.
로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리아나는 카시아의 주군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친구이기도 했으므로.
“가자.”
로한의 마음을 알아챈 아르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하는 그 스스럼없는 행동에 로한은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르펠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카시아 역시 따라붙었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곧장 비장한 투로 말을 덧붙여 왔다.
“방해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그렇다면야 좋을 테지만, 어차피 레리아나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권능이 묻어 있는 카시아가 필요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싫다고 한들 그녀를 짐짝처럼 들고서라도 데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녀를 훑어 본 시선은 그저 상태가 괜찮은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신전을 떠나기 전 로한과 아르펠, 카시아는 잠시 네피아에게 들렸다. 셋이서 본진을 치러 가겠다는 말에 기겁하는 것도 잠시, 잇따른 설명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느리게 고개를 꾸벅이는 얼굴에 간절함과 걱정이 한껏 서려 있었다. 후발대를 붙일 시간을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목소리도 그러했다.
작게 감사 인사를 전하곤 몸을 돌렸다. 슬슬 밝아질 기미가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로한은 생각했다.
이렇게 널 걱정하고,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모든 이들의 마음이 닿아, 부디 레리아나가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름 끼치도록 규칙적인 소음에 레리아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으…….”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몰려오는 통증에 골이 다 아팠다.
흐릿했던 시야가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던 레리아나는 이곳이 지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두운 사방, 눈앞에 처져 있는 빽빽한 철창, 서늘한 온도. 철창의 너머에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장치들이 늘어서 있었다.
‘……졸려.’
방금 정신을 차렸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감각이 둔했다.
느리게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몸을 살펴본 레리아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수갑과 족쇄, 그리고 손목에 꽂혀 있는 날카로운 바늘. 붉은빛의 섬뜩한 액체가 바늘을 통해 꿀렁꿀렁 들어오는 것이 두 눈에 보였다.
137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것만 같았다. 물에 잠긴 듯 몽롱하던 정신이 눈 깜짝할 새에 수면 위로 끌려 올라갔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들이 삽시간에 차오르는 것은 덤이었다.
‘너…… 누구야.’
레리아나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을 기억했다. 카시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카시아가 아닌 것. 익숙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 경계를 푼 것이 실책이었다. 뒤늦게나마 몸을 뒤로 빼려 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리고 말았으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레리아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지워낼 수 없었다.
‘카시아는…….’
카시아는, 어떻게 됐지?
전투의 막바지 단계에서 카시아는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연막이 터진 후 홀로 남겨졌을 그녀는 과연 무사할까? 사고가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 흘렀다. 카시아의 얼굴을 한 가짜가 머릿속 한구석을 단단히 차지해 버린 탓이었다.
조용히 이를 사리물며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또렷해진 의식과는 다르게 여전히 몸은 둔하기 그지없었다. 성력으로 회복해 보려는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레리아나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다 그 시선이, 제 손목에 닿았을 때.
“…젠장.”
이제껏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던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불쾌하기 그지없는 상황의 원인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도 손목에 꽂혀 소량씩 들어오고 있는 정체 모를 액체 때문이겠지.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불쑥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만큼은 막지 못했다.
신에게 축복받고, 성녀라 추앙받는 존재. 사람들의 우러름을 언제나 등 뒤에 달고 살아온 레리아나였으나, 그녀 또한 2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전면에 나서 망령을 없애고 구원교의 신도를 베어 넘긴다 한들 지하 감옥에 갇혀 몸도 움직이지 못한 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득해지는 정신과 가팔라지려는 숨을 간신히 가다듬을 무렵.
“깼나.”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공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떤 레리아나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철창의 너머, 까만 후드를 둘러쓴 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증오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자태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새 상처가 난 입술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왜, 날 데려온 거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검을 맞부딪혔던 상대가 그곳에 있었다. 꾹 눌러쓴 후드 너머로 살짝 보이는 붉은 눈은 음침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레리아나의 상태를 살피는가 싶더니, 말없이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이러다간 아무런 답도 듣지 못하고 기회를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씬 일었다.
등을 진 이의 뒷모습이 더 멀어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레리아나는 급하게 다음 말의 운을 떼었다.
“카시아는!”
데려온 이유를 물을 땐 조금도 반응하지 않던 놈은 카시아의 안위를 묻고 나서야 몸을 우뚝 세웠다. 흘끗 이쪽을 향한 눈이 섬뜩했다. 답을 듣고 싶은데 듣고 싶지 않기도 한 이상한 양가감정에 시달리면서도 레리아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같이 있던 여인을 말하는 건가.”
“…그래. 이것만, 이것만 알려 주면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카시아는…… 어떻게 됐어?”
두서없이 토해 내는 말이 필사적이었다. 그 안에 밴 불안이 적나라하건만, 정작 앞을 응시하는 시선만큼은 단단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점이 아니꼬웠던 걸까.
남자는, 오스카는 비스듬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영락없는 비웃음이었다. 그 행동에서 선명한 적의를 읽은 레리아나가 몸을 굳혔다.
“글쎄. 그 여자는 너와 달리 쓸모가 없어서.”
답하는 목소리가 단조롭다. 이쪽을 긁어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럼에도, 다 알고 있음에도…… 카시아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발목을 붙잡아서.
속을 지탱하던 것이 단숨에 무너지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두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내 친구, 내 스승, 그리고…… 내 가족. 레리아나에게 카시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고 신전에 거둬진 이후부터 줄곧 옆을 지켜 주었던 존재가, 그녀였다.
그러니 잘못되어선 안 된다. 어떤 방법이든 좋으니 이곳을 빠져나가서 그녀의 안위를 살펴야 했다.
있는 힘껏 몸을 움직였다. 간신히 의지에 따른 손목이 수갑과 세게 부딪히며 커다란 소음을 냈다. 애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금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옥을 빠져나가는가 싶던 오스카는 생각보다 금방 되돌아왔다. 품이 넓은 로브를 뒤집어쓴 중년의 여성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드, 드디어!”
레리아나가 깨어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휘어진 입매에서 희열에 찬 숨결이 튀어나왔다.
“어떤가요? 눈은 잘 보여요? 소리는 들리고요? 말은 할 수 있고? 몸은 잘 움직이나? 참, 내 정신 좀 봐. 몸은 움직이면 안 되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여자가 자신을 실험체로 보고 있다는 점일 테다.
같은 사람을 마주한 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기 어린 눈동자가 번뜩였다. 빠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린 레리아나가 짓씹듯 말을 뱉어 냈다.
“꺼져.”
“아하하!”
살기가 가득한 시선과 욕설을 마주했음에도 여자의 태도는 여전했다. 도리어 미친 듯이 웃어 젖히기까지 하니, 레리아나의 기분은 금세 진창을 구르고 말았다.
그런 그녀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여자가 발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 몸이 왜 안 움직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제가 지난 3년간 진행했던 연구예요! 신관의 몸에는 성력과 마력이 흐르고 있어서 망령의 힘을 응축해 주입한다 한들 유의미한 결과는 얻어 내지 못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실험을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 기껏 구한 귀한 실험체들을 폐기해야 했죠.”
하지만 얼마 전에 정말, 진짜로 실험에 성공한 거예요!
순간 레리아나는 아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묻지 않았음에도 여자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것들을 자랑이라도 하듯 줄줄이 입에 담았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실험하는 주제에, 잘도. 기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통통 튀는 목소리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신관들의 몸에는 고유한 양의 성력이나 마력이 흐르고 있더라고요? 그와 비슷한 양의 상반된 힘을 외부에서 주입하면, 그걸 상쇄하느라 마음대로 두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거예요. 아가씨가 힘을 쓸 수 없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죠! 놀랍죠? 대단하지 않나요?”
물론, 아가씨의 성력이 너무 많은 바람에 아까운 아가들을 모조리 투입하게 돼 버렸지만…….
미련이 넘치는 중얼거림이 뒤따랐다. 레리아나의 손목에 꽂혀 있는 바늘을, 정확히는 그 안에 흐르는 붉은 액체를 응시하는 눈에 아쉬움이 한가득 담겼다.
그 뒤로도 여자는 조잘조잘 말을 이어 나갔다. 검푸른 색이 나왔으면 예뻤을 텐데 아쉽게도 붉은색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덤이었다.
“이봐.”
“아! 죄송해요, 오랜만에 연구의 성과를 들어줄 사람이 왔다는 게 감격스러워서 그만!”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이어지던 일방적인 대화는 옆쪽에 서 있던 오스카의 독촉으로 인해 끝을 맺었다.
레리아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주먹을 꽉 쥐고만 있었다.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음에도 어찌나 강한 힘을 준 건지,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이 기어이 상처를 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발악하듯 소리를 내지르면서,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쏟아 내고 말 것 같았으니까.
‘진정해. 반응해 주지 마.’
그렇게,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부터 생각해 봐야 했다. 쓸데없이 경계심을 높여 놓아선 안 됐다. 최대한 조용히, 고분고분하게… 죽은 듯 그들 사이에 어우러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레리아나의 계획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감옥의 반대편으로 물러났던 여자가 챙겨온 것이 지나치게 익숙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고 새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야. 그게 왜……!”
옅게 하얀빛을 흩뿌리는 커다란 대검. 정식으로 계약하고 난 이후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성검이 그곳에 있었다.
칼에 찔려 정신을 잃기 전 검을 갈무리하지 못했던 것에 생각이 닿았다. 레리아나가 거세게 이를 악물었다. 뿌득거리는 살벌한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으나, 그 살의를 정면으로 맞은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홀하기까지 한 시선이 성검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사실 먼저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검이 반응을 안 하더라고요. 설마 모양만 예쁜 고철 덩어리인건가 했는데, 역시 아가씨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게 문제였네요!”
아아, 어떡해. 너무 기대돼.
중얼거리는 목소리 위에 과거의 기억이 덧입혀졌다.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아르펠이었다. 마검이었던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된 이유, 오래전 황궁에서 당했던 실험. 남 일처럼 이야기하던 무감정한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아른거렸다.
부족한 실력을 실감하고 신전에 틀어박혔을 무렵, 레리아나는 딱 한 번 천신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었다. 예고 없이 발밑이 훅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동화 속 천사처럼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때 레리아나는 아르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여태 누구에게도 꺼내 보지 못한 물음을, 그라면 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제 검도, 혹시 아르펠처럼…….’
그에 천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장담하마. 다시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란다.’
그다음에는, 뭐라고 덧붙였더라.
아. 생각났다.
‘만약, 또 같은 일을 당하는 검이 생긴다면…… 그건 더 이상 성검이나 마검이 아니야. 주인을 저주하고, 종내에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검이 될 테지.’
그러나 걱정하지 말렴. 네 동반자가 그런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테니.
138
그 말이 어찌나 믿음직스럽던지.
그날부로 레리아나는 속에 알게 모르게 남아 있던 불안을 완전히 덜어 낼 수 있었다. 말뿐인 장담이었으나 신이 내뱉는 말의 무게는 무거웠고, 그만큼 두터운 신뢰를 느낄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그만.”
그만해. 손대지 마. 제발.
두 눈이 풍랑을 맞은 것처럼 거세게 흔들린다. 미약하게 서려 있던 희망은 완전히 꺼진 지 오래였다.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으며, 그 소리마저 미약해서 얼마 가지 못해 사그라들었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애원이었다.
실험대 위에 올라간 성검이 짧게 웅웅거렸다. 레리아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제 검의 비명처럼 들렸다. 검날이 떨리며 옅은 빛무리를 흩뿌릴 때도 그러했다. 살려 달라고, 구해 달라고…… 그렇게, 제 친구가 소리치고 있었다.
“자, 그럼 어디…….”
들뜸을 숨기지 않는 신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얗게 바래졌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무기력하게 파르르 떨리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고, 느리게 내뱉은 숨이 서늘한 지하 감옥의 공기를 덥혔다.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위한 마지막 각오였다.
‘내가 해야 해.’
카시아도, 로한도, 아르펠도…… 그리고 신마저도.
아무도 이 상황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니, 이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스스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기운이 점차 제 검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레리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렴풋이 짜놓기만 했던 계획을 끌고 왔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을 동안 성검이 반응하지 않았노라고 했던 신도의 말을 떠올렸다. 검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저 여자가 하려는 실험에도 문제가 생기는 거겠지.
그 말인즉, 다시 기절이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시작될 것만 같은 실험을 멈출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력을 바깥으로 밀어 내는 것이 아닌, 망령의 힘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멈춰 세우는 것. 몸이 위험하지 않게끔 스스로 움직이던 성력이었으니 멋대로 멈춘다면 상태가 금세 악화될 게 분명했다.
기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몸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괜찮아.’
미약한 불안감이 차오르려는 속을 애써 다독였다. 가설에 불과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잠깐 잠이 들었다 깨는 것일 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다시 눈을 뜨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보자. 카시아가 무사한지도 알아보아야 했다. 몸 성히 밖을 보게 된다면 그땐 도망치지 않고 로한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아르펠에게 사과도 하고 싶다.
레리아나는 눈을 감고 미래를 기약했다. 분명 머지않은 미래일 것이다. 아무런 문제 없이, 다시 웃는 얼굴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옅은 심호흡을 끝마친 그녀가 마침내 제 몸을 열심히 보호하고 있는 성력을 붙들려던 참이었다.
<그만.>
제 의지에 감응해 별 어려움 없이 점차 속도를 줄여가던 성력이, 다시금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직접 박아넣는 것만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숨이 덜컥 멈추고 몸이 떨렸다.
“……아.”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과 지독한 다정함이 고여 있는 목소리는 이 세상의 것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오묘한 음성이었건만, 레리아나는 그것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에 따뜻한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렴. 네 동반자가 그런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테니.’
이미 한 번 떠올린 적이 있는 말이었다. 마음속에 피어올랐던 아주 조금의 원망이 무서운 기세로 사그라들었다.
‘신께선 함부로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세계를 만들어 낸 두 신의 맹세다. 가볍게 나눈 약속이라 한들 그 무게마저 가벼울 리는 없다.
천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실을 빠져나왔을 때 마주한 대신관은 그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 알 수 없어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저 한때의 배려라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말이, 그가 해 준 약속이었던 것이다.
파지직.
깨달음과 동시에 날카로운 빛무리가 성검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처음 보는 반응에 신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봤자 정전기라고 해도 믿을 초라한 감각이라,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했지만.
“이상하네… 이랬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 실험에 제대로 임하기 위해 본교에 애걸복걸해 오래전 진행했던 마검의 실험 기록까지 얻어온 참이었다. 낡은 종이의 끝부분이 완전히 바스라질 정도로 여러 번 읽었지만 이런 반응이 있었다는 건 보지 못했다.
그냥 착각인가? 혹시 몰라 깃펜을 들어 옆에 가져온 종이에 이상 현상을 휘갈겨 적으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신이 만들어 낸 위대한 물건도 정전기는 일어날 수도 있지 않나. 그 괴리감이 우습게도 느껴져 짧게 키득였다.
“아가씨, 이제 정말로 시작할게요~?”
깃펜을 내려놓은 신도는 그새 조용해진 레리아나를 향해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다. 끌어올린 입꼬리에 우월감과 만족스러움이 다분히 묻어났다. 체념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예쁜 보석 같던 분홍색 눈이 완전히 죽어있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농축된 망령의 힘이 담뿍 녹여져 있는 시험관으로 거치대를 끌고 갔다. 검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성녀의 몸으로 실험을 해 봐도 좋을 듯했다.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해 보지 못한 영역이었으니, 무사히 진행만 한다면 엄청난 위명을 손에 넣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을 달콤한 꿈을 꾸며 성검을 시험관 안으로 집어넣으려던 순간.
눈앞에 있던 성검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무슨……!”
<우리를 머저리로 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불순한 것의 종자야.>
무거운 음성이 지하 감옥 안을 웅웅 울렸다. 뇌리를 관통하는 듯 선명한 목소리였다. 고작 한마디에 불과했건만, 그 웅장한 음성은 듣는 이의 머릿속에 감히 넘볼 수 없는 격을 심어 주었다.
몸이 바짝 굳고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신도는 순간 숨을 쉬는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순간 실감이 들고야 만 것이다. 고저 없는 음으로 신랄한 말을 내뱉고 간 절대자에게 자신은, 벌레에 비할 정도도 되지 않는 하찮은 존재라는 걸.
파지지직.
정전기라 착각했던 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신도가 느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장의 금으로부터 파스스 떨어져 내린 먼지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아아…….”
신이시여.
여자가 낮게 탄식했다. 이윽고, 눈앞이 하얗게 물들어 버렸다.
***
카시아의 몸에 남아 있는 권능의 잔재를 뒤쫓아가는 일은 수월했다. 로한과 아르펠이 한계에 가깝게 속도를 끌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카시아는 둘의 뒤를 잘만 따라왔다.
몸이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히 회복된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으나……. 로한은 중간중간 그녀를 흘끗 돌아볼지언정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멋대로 내세운 배려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더 짙어졌어. 얼마 안 남았을 거야.”
기운을 추적하는 일은 아르펠이 도맡았다. 로한 역시 어렵지 않게 추적할 수야 있었지만, 권능 그 자체를 부여받은 검인 아르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몇 초간 눈을 감았다 뜬 그가 한 방향을 눈짓하자 로한과 카시아가 곧장 걸음을 틀었다. 카시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는 기대감, 혹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 레리아나를 데려간 상대에게 향하는 살의. 상반된 감정들이 시도 때도 없이 솟구쳐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거대한 기운이 그들이 달리고 있는 곳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가라앉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단번에 멎었다. 숲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감히 반항할 생각도 들지 않는 커다란 위압감에 알아서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머저리로 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불순한 것의 종자야.>
이윽고 들린 것은 뇌리에 또렷하게 남은 음성이었다.
그 한마디에 담긴 성력이 엄청났다. 한 박자 늦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로한이 아르펠을 돌아보았지만, 기이하게도 숲에 휘몰아치는 성력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지나갔다. 그를 알아서 피해갔다는 것이 정확할 테다.
“……설마.”
로한이 짧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신 말고 존재할까. 아직도 머릿속에 웅웅거리며 남아있는 듯한 목소리는 낯설기 그지없었으나, 그것이 풍기는 기운만큼은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로한은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던 마신을 떠올렸다.
이윽고 눈앞이 번쩍였다. 숲과 하늘이 온통 빛으로 화한 것마냥 온 세상이 백지처럼 물들었다. 거센 바람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도 잠시.
콰아아앙―!
귀를 먹먹하게 하는 거대한 굉음이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졌다.
139
그들의 앞에 떨어진 것은 한 줄기의 거대한 벼락이었다.
구멍이 뻥 뚫린 하늘에서 쏟아진 벼락은 순간 눈이 멀 정도의 빛을 뿜어내며 땅을 강타했고, 이윽고 일대를 휩쓸었다. 빛이 닿은 모든 것이 부서지며 불탔다. 휘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나무의 밑동이 흔들리고 가지가 꺾여 나갔다.
온 세상을 잡아먹을 듯 사나운 기세로 퍼지는 빛에 앞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모든 것들이 느껴졌다. 울음을 토해 내듯 흔들리는 땅, 날카로운 바람 소리, 그 모든 것에 정신없이 휩쓸리는 숲의 비명이.
한 박자 늦게 성력의 파도가 쏟아져 내렸다.
기이하게도 제 곁은 귀신같이 피해 가는 성력을 인지하며, 아르펠은 생각했다. 신벌이 실존한다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벼락이 내려치기 직전 들렸던 의미 모를 음성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이 현상은 정말 신벌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명멸하던 빛은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지켜본 이들의 눈에는 새하얀 잔상만이 남았다. 제 빛을 되찾은 세상에 익숙해지려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로한은 조심스럽게 아르펠의 손을 붙잡았다.
“……혹시, 다친 곳은.”
“없어. 너도 봤잖아.”
흔들리는 두 눈에 숨기지 못한 걱정이 선명했다.
기묘한 성력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이러는 것을 보면, 성력에 휩쓸려 의식이 날아갔던 적의 기억이 어지간히 선명히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두 눈으로 무사한 걸 확인했음에도 불안을 내비치는 것이 그러했다.
무서워하지 말라며 볼이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애써 가라앉혔다. 언제나 로한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아르펠이라 한들, 지금의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므로. 마주 잡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놓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꽉 잡아 오는 손,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따뜻하게 물든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로한은 자꾸만 튀어 오르는 불안을 내리누를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본 그가 카시아를 향해 고갯짓했다.
“가죠.”
벼락이 떨어진 곳과 로한 일행이 있는 곳. 두 곳을 정신없이 번갈아 보던 카시아의 시선이 뒤늦게 고정됐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이 초조히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머지않아 드러난 곳은 반파된 무덤가였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동그란 흙더미는 무너져 내린 지 오래인 듯, 땅이 쩍쩍 갈라진 채였다. 그런 곳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으니 주변이 성할 리가 없었다.
“여기, 길이 있습니다.”
침착히 주변을 둘러보던 카시아가 길 하나를 찾아냈다. 무너진 지반의 영향인지 원래라면 무덤 사이 교묘히 가려져 있어야 할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딱 봐도 깊어 보였다.
“불편하면 꼭 말해야 해요.”
“알았어.”
“……약속해요.”
“응. 약속할게.”
앞장서는 카시아의 뒤를 따라 내려가면서도 로한은 뒤에 있는 아르펠을 계속해서 돌아보았다. 서서히 희미해져 가고는 있었지만 내려가는 길목에는 여전히 진한 성력의 잔재가 묻어 있었다. 아르펠에게 악역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못내 불안한 눈치였다.
그럼에도 대놓고 걱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걸음걸음마다 불안한 기색이 묻어나는 카시아를 배려한 것일 테다. 역시 다정한 아이다. 아르펠이 손을 뻗어 로한의 머리를 도닥였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은 생각보다 성했다. 겉으로 봤을 때 꽤 심하게 무너진 것 같았건만, 의외로 안쪽은 신벌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 혹시나 길이 막혀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카시아는 그것만으로도 조금의 안도를 얻은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에 다다르자.
“…….”
그녀의 낯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덜컥 숨을 멈췄다. 지하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걸음을 멈춰선 카시아에 로한은 앞을 살피기 위해 비스듬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검은색의 길쭉한 무언가가 땅을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부서진 구조물 중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눈에 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검게 타 버린 누군가의 팔이었다.
완전히 숯덩이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원래 무엇이었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느껴지는 성력의 양으로 보아서는 방금 전 내리친 번개로 인해 타 버린 듯했다. 카시아는 그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버렸다.
로한은 순간 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알 만했다. 레리아나의 걱정을 지나치게 한 나머지 누군가의 팔을 보고 혹시나 그녀도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따위의 생각에 매몰되어 버린 거겠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듯했다. 소리 없이 혀를 찬 로한이 카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어깨를 짚어 가볍게 흔들어 줄 셈이었다.
아르펠이 대뜸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남자 손입니다.”
“……아.”
건조한 목소리는 누구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러한 말투였기에, 카시아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나지막한 탄식을 터뜨림과 동시에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린 건지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반쯤 내밀었던 손을 거둔 로한이 무던한 목소리로 답했다. 소중한 상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제법 비슷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카시아의 태도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이 일이 정말로 천신께서 행하신 일이라면, 레리아나가 다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네요.”
느릿느릿, 목소리는 가라앉았지만 한결 차분해진 듯 카시아가 동의를 표했다.
이는 변치 않을 사실이기도 했고, 불안을 잠재울 위로이기도 했다. 카시아는 그것에 빠르게 안정을 찾은 듯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견한 누군가의 시체에도 당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직전에 보았던 팔과 마찬가지로 바짝 타 버린 시체였다. 새까맣게 변해 버렸음에도 마지막까지 비명을 질렀을 입과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만큼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리고, 숯덩이가 되어 버린 시체의 너머.
“……아르펠. 뒤로.”
웅웅거리는 작은 떨림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옅게 퍼지는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깨끗한 성력이었다. 이를 인지하자마자 로한은 아르펠의 손을 붙잡았다. 의식도 하지 못한 새에 튀어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멈춰 선 둘을 대신해 빛이 새어 나오는 틈으로 가까이 다가간 카시아는 머지않아 손에 성검을 든 채로 되돌아왔다.
“이게 왜…….”
그녀의 손에 잡힌 채로도 커다란 검은 계속해서 잔 떨림을 토해 냈다. 정작 검을 쥔 카시아는 이유를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같은 검인 아르펠은 아니었다. 검의 목소리가, 희미한 자아가 뭉쳐 소리치는 바람이 들려왔다.
천신이 베푼 자비로 인해 잠깐이나마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있게 된 검이 부탁하고 있었다. 레리아나를 찾고, 그녀를 구해 달라고.
서툴기 그지없었으나 그만큼 확고한 의지였다. 아르펠은 순순히 성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손을 들었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아르펠이 말한 곳으로 향한 카시아는 곧장 레리아나를 발견했고,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 또다시 혼란에 빠진 듯했으나…… 그녀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로한이 그저 잠이 든 것뿐이라 말한 뒤로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로한. 괜찮아?”
“……응, 괜찮아요.”
성검은 레리아나의 손목에 닿자마자 빛으로 화해 그녀의 몸에 흡수되었다. 남은 건 타 버린 시체 한 구와 팔 하나, 그리고 무너진 지하 감옥뿐이었다. 그럼에도, 하얗게 질린 로한의 낯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로한을 바라보던 아르펠은 기꺼이 그가 원하는 답을 입에 담았다.
“나가자.”
이유를 좀처럼 예측할 수 없었던 전과는 달랐다. 불과 하루 전의 대화로 로한이 아직도 일전의 ‘실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았던가.
감옥에 갇혀 있던 레리아나, 그녀와 동떨어져 있던 성검, 그 앞에 불타 죽어 있던 신도의 시체. 그리고, 그 주변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망령의 기운까지. 의도가 지나치게 투명한 배치였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먼 과거의 일일지라도, 그것을 충분히 겹쳐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무 일도 없어. 레리아나는 무사하고, 검도 멀쩡해. 신전에 돌아가서 레리아나부터 깨우자. 얘기할 게 남아 있잖아. 그리고… 괜찮다면. 전처럼 다 같이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레리아나를 등에 업고 걸어가는 카시아를 뒤따라가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올 평범한 일상을 읊어 주며, 아르펠은 로한의 손을 잡고 그를 이끌었다.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밟아 올라갈수록 시야가 밝게 물들었다. 새어 들어오던 불안이 차차 줄어들다 마침내 모습을 감췄다. 완연한 아침 햇살이 네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을 때였다.
***
레리아나는 몸을 빠르게 회복했다. 몸에 내재된 성력이 알아서 자가 치유를 했을뿐더러 그녀의 귀환을 확인한 신관들이 모조리 달려들어 성력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납작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인 이들을 간신히 물린 뒤에야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했다.
반파된 지하 감옥의 수사는 네피아에게 맡겼다. 레리아나의 무사 귀환에 휘둘리다 셋이 생각보다 금방 되돌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그녀는 당장 신관들을 파견해 보겠다며 꽤 비장한 표정을 내비쳤더랬다.
그리고, 몇 분 뒤.
“시아……!”
당연한 말일 테지만, 레리아나는 무사히 두 눈을 떴다.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는가 싶던 그녀는 카시아를 보자마자 울컥 눈물을 터뜨렸다. 우수수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 눈물에 당황하던 카시아는 뒤에 있던 로한이 가볍게 등을 밀자 레리아나를 얼떨결에 끌어안고 말았다.
감동의 재회를 치르는 둘을 멀뚱히 바라보던 아르펠은 웃고 있는 로한을 흘끗 살피고 나서야 생각했다. 어찌 됐든 잘된 일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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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많이 다치지는 않았느냐,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기실, 둘의 대화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무사히 서로를 마주하게 된 순간부터 답이 빤히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음에도 그랬다.
아르펠은 조용히 그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매 순간 쌓아 왔던 불안을, 상대의 안전을 확인하게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해소하고 있는 걸까.
“다행이다…….”
당최 말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던 레리아나는 카시아의 몸 상태를 꼼꼼히 물은 뒤에야 나지막하게 탄식을 터뜨렸다. 대놓고 안도의 기색을 띤 숨결이었다. 방금 막 의식을 되찾은 사람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은 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의 낯에 자못 황당하다는 빛이 한가득 어렸다. 이윽고 한숨을 내뱉은 카시아는 조곤조곤 잔소리를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본인의 처지를 잘 고려하라는 말이었다.
“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
“…잔소리요.”
“잔소리, 가 아니라. 시아가 날 걱정해서 해 주는 말이라는 거 알지! 근데, 음, 뭐랄까. 막 일어났더니 좀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는 제법 평화로웠다. 공기는 훈훈했고, 들이치는 바람은 선선했으며, 조잘조잘 이어지는 둘의 목소리는 꽤 오랜만에 듣는 것이라 반가웠다. 무엇보다 로한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은은한 기쁨이라, 아르펠은 이 상황을 온전히 반기기로 했다.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로한이 운을 뗀 것은 둘의 대화가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접어든 뒤였다. 동시에, 간신히 카시아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숨을 푹 내쉬던 레리아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도르륵 구르는 눈에는 어색함이 다분히 묻어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미묘한 태도는 짧았다. 곧장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녀가 로한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은 것이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불안한 듯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선명히 보였다.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십시오.”
로한과 레리아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카시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화한 빛이 감도는 얼굴은 은근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자꾸만 엇나가던 둘이 드디어 대화를 나누는 게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지.
그리고, 그런 카시아에게로 시선을 던지던 아르펠은.
‘…레리아나, 있잖아요.’
과거를 더듬어, 언젠가 로한이 제게 해 왔던 말을 기억해 냈다.
고민은 짧았다. 은은한 죄책감에 잠겨 든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그 또한 답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멀어지는 걸음마다 옅은 머뭇거림이 새어 나올지언정 몸을 멈춰 세우지는 않았다.
애초에 레리아나의 뒤를 쫓은 이유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이지 않았나. 그러니 이게 맞는 방법이었다. 멀어지는 와중 마주친 로한의 눈이 고마움을 표하는 듯해서, 아르펠은 그대로 둘을 등진 채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르펠 님.”
그런 아르펠을 반기고 나선 것은 카시아였다. 그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다.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무사히 해결되어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몇 시간 전보다 배는 밝아져 있었다. 다행인 일이지. 아르펠이 무심히 평했다.
말없이 고개만 꾸벅였다. 그것을 끝으로, 안쪽에 남아 있는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온 카시아가 다시금 운을 떼기 전까지는 말이다.
“걱정하실 것 없으니 그런 표정은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용히 닫힌 문을 응시하고 있던 시선이 돌아갔다. 의미 모를 말이었다.
“…무슨 표정, 말씀하시는 겁니까?”
더듬더듬 되묻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느렸다. 자연히 마주친 눈 너머에 서린 감정을 가늠해 보려 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도리어 푸른 눈에 비친 제 표정을 의식하게 되고 말았다.
무던하던 표정에 어색함이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얼굴이 미묘한 흔들림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아르펠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시아가 마저 말을 마무리 지었다.
“레리아나 님과 로한 님의 사이를 신경 쓰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네. 둘이 화해하길 바라니까요.”
찰나의 망설임 끝에 아르펠이 답을 내렸다.
동공의 떨림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답하는 목소리 역시 눈 깜짝할 새에 평정을 찾았다. 하나 그뿐이었다. 옅게 퍼지는 카시아의 웃음소리에, 또다시 운을 떼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르펠의 눈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말았으므로.
“제가 말씀드린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얼핏, 푸른 눈에 따스함이 서렸다.
“두 분 사이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런 제가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로한 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또한 당신을 아끼고 은애한다는 걸.”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짧게 덧붙인 말은 처음 그녀가 운을 띄웠던 것의 해답이기도 했다. 왜, ‘그런 표정은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했던 의미 모를 말 있지 않은가.
다만, 그것에 의문을 느꼈던 아르펠은… 다른 쪽으로 온 정신이 쏠려 버린 상태였다.
멀뚱히 눈만 깜빡이는 꼴이 이상하게 맹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달싹이는 입술은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카시아는 눈앞에서 펼쳐진 생소한 광경에 도리어 당황을 표하고 말았다.
“아르펠 님? 왜…….”
그녀가 혼란 속에 풍덩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말을…… 잘못했나?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맹한 표정을 짓는 아르펠이라니. 말하기를 망설이는 아르펠이라니. 그간 아르펠과 제법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카시아였지만, 그녀는 단연코 이런 모습을 본 적도,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상대가 로한이라면 모를까, 타인과의 의사소통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명제였다. 여태껏 그렇게 생각했으며, 믿어 의심치 않아 왔다. 직전, 두 눈으로 확인한 것만 아니었더라면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카시아의 체감상 억겁 같은 시간이 흘렀을 무렵. 먼저 정적을 깨고 나선 이는 아르펠이었다.
“제가… 로한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멍한 목소리가 꿈결을 걷는 듯 몽롱했다. 여전히 그와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는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이번엔 반대였다. 내내 아르펠의 이상한 태도에 집중하고 있던 카시아는, 이번만큼은 그것에 신경을 쏟지 못했다.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아르펠이 내뱉은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은 맞는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신을 모시는 신관인데도 불구하고 신의 권능, 그 자체인 아르펠을 향해 불경할 정도로 표정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카시아의 머릿속에 여태 아르펠과 로한 사이에 오갔던 수많은 대화와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납득이 가기는커녕 더 황당해졌다.
“아르펠 님.”
애써 한 박자를 쉬어간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은은한 안타까움마저 서린 눈이 한결같은 혼란스러움을 내보이는 아르펠을 시야에 담았다.
“그걸…… 사랑이라고 안 하면.”
대체 뭘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요……?
매번 쓰던 경어조차 집어치우고 내뱉는 말에 선명한 진심이 느껴졌다. 길을 잃고 흔들리던 아르펠마저 일순 카시아를 향해 시선을 고정할 정도로 뚜렷한 진심이었다. 자연스레 속이 복잡해졌다.
언젠가, 자신이 로한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랑이라는 거, 네가 가르쳐 줄래?’
사랑한다는 로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어주지 못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신이 그 대답을 쥐여 주는 것은 그를 기만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에게 받는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황홀한 애정에 자꾸만 욕심이 나서…… 로한을 붙잡고자 그러한 말을 입에 담았다.
나 또한 네가 욕심나니, 사랑이라는 감정을 네가 알려달라고. 답을 들은 로한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기억난다. 자신을 끌어안았던 그 단단한 품도.
그 순간에도, 그보다 더 오래전에도…… 아르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이란 한없이 인간적인 것이다. 한없이 인간적이기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로한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라고.
아르펠은 잠시 눈을 내리깐 채 생각을 정리했다. 차츰 가라앉아 가던 흔들림이 마침내 멎고, 도르륵 굴러간 시선이 머지않아 카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렇습니까.”
내내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진 채였다. 마주 본 카시아의 눈에 서린 얼떨떨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낌새다. 그로서는, 그저 납득한 것뿐이었다.
한없이 인간적인 것이 감정이라 하면, 인간만큼 감정을 잘 아는 존재는 없는 법이라는 걸.
사랑. 속으로 그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나쁘지 않은 울림이다. 속이 복잡한 것도, 확신을 내릴 수 없는 것도 여전했지만……. 감히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 내리고, 끊임없이 곱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냐, 라…….’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카시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손을 들어 가슴 위를 짚어 보았다. 어설피 인간을 흉내 낸, 지나치게 느린 심장 박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로한을 생각할 때면 조금이지만, 그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같았다. 어쩐지 속이 간지러웠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주는 건, 내가 확신으로 가득 찼을 때 해주고 싶다. 아르펠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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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대화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당연했다. 한쪽은 지레 겁에 질려 도망쳤을 뿐이고, 다른 한쪽은 상대의 사정을 고려할 수조차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던 것뿐이었으니.
그렇게 엉킨 실타래를 마저 풀고, 후련한 얼굴을 한 레리아나와 함께 문을 열고 나온 로한은,
“…기분, 좋아 보이네요?”
묘한 분위기의 아르펠을 마주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표정한 낯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들뜬 기색이 어려 있다는 걸, 로한은 모르지 않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여태껏 함께한 수많은 시간이 답을 알려 주고 있었으므로.
“응.”
“…….”
…그렇다 한들, 저런 고분고분한 대답까지 뒤따라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만 로한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방금 전까지 아르펠과 단둘이 남아 있었던 카시아를 향해서였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늠해 보려는 듯 두 눈이 가느다래졌으나, 이는 로한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아? 왜 그래?”
“아뇨, 아닙니다…….”
이쪽도 상태가 이상한 것은 피차일반이었기 때문이다. 카시아의 옆으로 다가선 레리아나가 그녀를 톡 건들며 물었으나 흘러나오는 건 멍한 대답뿐이었다.
결국 로한은 카시아를 살피던 시선을 거둬들여야 했다. 지금 당장은 얻어 낼 것이 없음을 직감하기도 했지만…… 반대편에서 살며시 손을 붙잡아온 아르펠에게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있잖아, 로한.”
마주한 눈이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아니, 착각이 맞긴 한 걸까. 숨을 느리게 들이켜곤 고개를 주억이자, 아르펠은…….
“사랑한다고 해 주면 안 돼?”
더없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그렇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이상하다. 역시나 이상하다. 아르펠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말이라, 순간 꿈을 꾸고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로한은 한동안 멍청히 눈만 깜빡이고 말았다. 몇 번이고 달싹인 뒤에야 간신히 열린 입술로 더듬더듬, 어떻게든 말을 이어 나갔다. 한없이 둔해진 머리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바람에, 반은 본능적으로 행한 것에 가까웠다.
“…사랑해요.”
아르펠의 낯에 곧장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원하는 답을 손에 쥔 것이 만족스럽기 그지없다는 듯. 문을 열자마자 느꼈던 들뜬 기색이 간간이 묻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당연하게도, 로한의 시선이 홀린 듯 그를 뒤따라갔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쯤 되면 이유를 파헤치고자 했던 의지가 차차 흐릿해지는 법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이가 사랑해 달라 말하는 것도 모자라, 답을 듣고 환히 웃기까지 했다. 로한은 그 얼굴을 마주하고 이유를 캐묻는 위인이 될 자신은 없었다.
다시금, 아르펠의 입술이 벌어졌다. 은연중에 돌아올 대답을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한 로한이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는 순간.
“뽀뽀는?”
“아르펠!”
두 사람의 말이 겹쳤다.
꿈을 꾸듯 아득했던 정신이 한순간 땅바닥에 처박힌 느낌이었다. 말없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로한이 고개를 돌렸다. 아르펠에게 용건이 있었던 듯, 저 멀리서 카시아와 이야기하고 있던 레리아나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채였다.
……들었나. 그녀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폈다. 말이 정확히 겹쳤으니 못 들었을 수도.
그런 바람을 짓밟듯,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도저히 외면할 방법이 없는 극명한 변화였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레리아나를 돌아본 아르펠 또한 그 변화를 목격했다.
“레리아나. 왜…….”
모두가 있는 앞에서 ‘뽀뽀’를 요구한 당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담담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힌 이유를 직접 제공한 셈인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기어코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으려 하는 것을 보면.
아르펠의 질문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레리아나, 왜 불렀어?’라는 말이 반 토막 나 ‘왜…….’에서 멎고 만 것이다.
“아니요! 괜찮아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끼어든 레리아나 때문이었다. 씩씩거리는 숨결마저 섞여 들자 아르펠은 멀뚱히 눈만 끔뻑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세요! 마음껏 하세요!!”
더 진한 거, 얼마든지 길게 하셔도 돼요!!!
단호하다 못해 강렬한 음성이 바락바락 쏟아져 나왔다. 한마디, 한마디가 더해질수록 강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차츰 커졌고, 반대로 레리아나의 몸은 천천히 멀어져만 갔다.
당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발짝 두 발짝씩 대놓고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으니까. 로한은 점차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낯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말까지 무사히 마무리 지은 레리아나는 그대로 도망쳤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카시아를 회수하러 온 것이다.
“방해 안 할게요~!”
후다닥 발돋움을 한 작은 몸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한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어코 자신에게 눈을 찡긋거린 레리아나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굴은 빨개진 주제에 잘도 놀리고 앉아 있다고.
그녀가 카시아를 끌고 가 버렸으니, 자연히 복도에는 로한과 아르펠, 둘만 남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르펠이었다.
“허락도 받았잖아.”
“하하.”
그가 한 말을 듣는 순간 하릴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말이 허락이지, 사실상 어서 빨리 입 맞춰 달라는 재촉이나 다를 바 없는 속삭임이다.
이상하게 들떠 있고, 신나 보이고, 더 적극적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로한은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이러한 모습조차 사랑스럽기 그지없다고.
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직 일이 다 마무리되지 않았다. 네피아 신관을 찾아가 봐야 하고, 용병 길드에도 다시 들러야 하고……. 남은 할 일들이 머릿속에 우후죽순 솟았지만 딱 그뿐이었다.
‘부추겼으면 어련히 잘 책임지겠지.’
로한은 망설임 없이 레리아나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렸다.
마침내 아르펠의 볼에 닿은 로한의 손이 그 위를 톡톡, 부드럽게 두드렸다. 읊조리는 목소리가 자장가를 부르듯 상냥하기만 했다.
“눈, 감아야죠.”
자수정을 닮은 눈이 순순히 모습을 감추었다. 묘하게 상기된 듯하면서도 이런 수동적인 태도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괜히 입꼬리가 씰룩거릴 것만 같아 곧장 입을 맞추는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입술 위를 만지작거렸다.
손이 닿을 때마다 새까만 속눈썹에 잔 떨림이 일었다. 그게 꼭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은근히 귀엽게 느껴졌다.
“……빨리.”
끝날 듯 말 듯 이어지던 손장난은 얼마 안 가 불퉁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막을 내렸다.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한 로한은 애써 그것을 참아내고 숨을 가다듬은 뒤에야 입을 맞췄지만…….
움찔대는 입꼬리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아직 겉만 맞닿아 있는 입술을 통해 그것을 느꼈는지, 그새 아르펠의 눈이 게슴츠레 뜨여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보란 듯이 웃어 보인 로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입술이 조금 더 촘촘히 맞붙는다.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는 손이 느껴지자마자 순순히 입술을 벌린 아르펠은 곧장 밀려들어 오는 혀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것이 익숙하게 입 안을 휘젓는다. 배 언저리를 간질간질하게 웃돌던 열기가 단숨에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몸이 밀린 건지, 아니면 우수수 쏟아지는 감각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물러난 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벽에 등이 닿아 있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순간이 퍽 자극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다였다.
로한의 어깨를 쥔 아르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간절한 손길이었다.
“……흐.”
숨을 꼬박꼬박 쉴 필요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찼다. 입을 맞출 때마다 매번 겪는 경험이었다. 그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차린 로한이 잠시 틈을 벌리자 아르펠의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을 닮은 숨결이 새어 나왔다.
와중에도 로한을 끌어안은 손은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아.”
그러한 아르펠의 손길을 느낀 로한은 작게 탄식했다. 이내 그의 낯이 더없이 짙은 만족감으로 빼곡하게 물들어갔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아르펠이 숨기지 않고 내비치는 욕심이 이토록 기꺼울 수가 없어서.
열감이 잔잔히 남아 있던 입꼬리가 고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아르펠이 곧잘 시선을 빼앗기곤 하던 그 미소였다.
***
“레리아나.”
“아르펠!”
기다리던 이의 목소리에 레리아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급히 등을 지고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덤덤한 얼굴을 한 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입술이 있는 쪽으로 홱 돌아가려는 시선을 붙잡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분명 시선을 잘 비껴갔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부어 있는 입술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왜겠어.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몽실몽실, 머릿속에 피어오른 뭉게구름 위로 로한의 얼굴이 그려졌다.
이로써 레리아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제아무리 마검이라 해도 상처(?)가 바로 회복되지 않는구나. 두 눈이 잠시나마 흐려지고 말았지만, 그녀는 애써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 냈다.
자신이 아르펠을 만나고자 한 것은 이러한 시답잖은 잡념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아르펠한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있잖아요, 아르펠.”
느리게 숨을 가다듬었다. 변함없이 여전한 표정을 바라보니 어쩐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어지간히도 한결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더 좋았고, 그래서 더…….
“제가 많이… 미안해요.”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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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어중간한 침묵이 흘렀다. 아르펠이 레리아나의 사과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얼굴에는 어째서 그녀가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왜?”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자꾸 결론이 흐지부지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유를 추측하는 것을 깔끔히 포기한 아르펠은 짤막한 물음을 입에 담았다.
상당히 뒤늦은 질문에 레리아나가 웃었다. 어째 그럴 줄 알았다는 투다. 이내 은은한 씁쓸함이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왜 사과하는지 모르는 거죠?”
그렇게 말하며 레리아나는 언젠가 로한이 지나가듯 흘렸던 말을 기억해 냈다. ‘아르펠은 스스로한테 관심이 너무 없어.’ 였나. 자조적인 미소가 저절로 그려졌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말에 이제야 철저히 공감하게 되었다.
“저 때문에…… 위험할 뻔했잖아요.”
더듬더듬, 흔들리는 목소리가 느리게 ‘이유’를 이야기해 나갔다. 그 당시의 일을 다시금 회상하는 눈은 진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싱그러웠던 분홍빛 눈이 금세 시들어가며 침잠했다.
레리아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있는 힘껏 끌어올린 성력이 제 손을 떠난 직후, 거대한 괴물에게 달려드는 로한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마을을 잠식한 괴물이 쓰러질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때 느낀 것은 성취감이나 뿌듯함 따위의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눈부신 황금빛의 힘이 온 마을을 휩쓰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심장이 발끝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르펠.’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던 것 같다.
오래전, 황궁의 실험으로 인해 탄생한 저주받은 마검. 비록 기적이 일어나 당사자인 아르펠도, 검의 소유주인 로한도 아무런 문제 없이 함께하고 있지만…… 레리아나는 언제나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르펠은 망령의 힘을 강제로 품게 되었으니, 성력을 가진 자신은 그와 있을 때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로한의 강박적인 당부 탓도 있었지만, 레리아나 스스로도 주의하려 노력했다. 친구, 혹은 보호자. 관계를 명확히 지칭할 표현이 없기는 했지만 아르펠은 자신에게도 소중한 존재 중 하나였으므로.
그랬는데도, 그 마을에서만큼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한없이 치명적인 실수를 말이다. 발끝부터 타고 오른 불안이 현실화되어 모든 싸움이 끝나고 완전히 무너져 내린 로한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나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아르펠을 신경 썼더라면. 내 힘이, 소중한 이를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런 자책을 수없이 반복했던 것 같다.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이 힘이, 다른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는 게.
그게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결국 아르펠을 해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숨이 가빠왔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 뒤로 잠이 들면 그날의 일이 꿈에 나왔다. 손끝으로 빠져나가려는 힘을 붙잡지 못하면서 시작되는 악몽.
깨져 버린 검이, 울고 있는 로한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아르펠이 깨지진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두려움은 자꾸만 상상을 부추겼다.
“그날, 제가 더 신중했더라면 아르펠이 다칠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런 주제에, 아르펠이 무사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이 지독한 안도감이라. 그것을 인지하고 나자 혐오감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미안해하기는커녕 안도나 하고 앉아 있다니.
사과하고 싶었다. 아니, 해야 했다. 아르펠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들 모든 잘못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느리지만 꾸준히 이어져 나갔다. 아르펠이 특별한 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러니까, 저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횡설수설에 가까울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침착히 입을 열었던 것 같은데, 끝을 맺을 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두서없이 튀어나오던 목소리는 머지않아 이상한 말로 끝을 맺었다. 이다음에 뭐라 말해야 할까. 둔해진 사고가 생각을 턱턱 가로막았다. 결국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얘진 탓에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어떻게 사과를 더 전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레리아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던 아르펠이 가만히 손을 뻗은 것은 그때였다. 천천히 다가온 하얀 손이, 그대로 머리 위에 닿았다. 그 손길 한 번에 주변이 맑게 개는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레리아나.”
자그마한 부름이 귀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이 쓱쓱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움직임은 서툴기 그지없었지만, 명백한 위로의 손짓이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운을 떼며…….
“말해 줘서 고마워.”
……고맙다고. 고맙다고 해 주었다.
대체 언제부터 눈물이 맺혀 있었던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룩주룩 흘러나온 눈물이 볼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더없이 다정한 행동에 반해 아르펠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하기만 하니까.
이내 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눈앞에서 울며 웃고 있는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듯. 답지 않게 잘 읽히는 곤란함이 웃음을 부추겼다.
실제로 아르펠은 레리아나가 짐작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슬퍼 보이기에 쓰다듬어 줬을 뿐이다. 여전히 그녀가 사과하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손이 먼저 움직였다.
멋대로 쓰다듬기 시작한 제 손을 바라보며 아르펠은 생각했다. 이건 다 로한을 위한 것이라고.
로한이 레리아나랑 화해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친구인 레리아나의 표정이 좋지 않으면, 로한이 신경 쓸지도 모르니까.
금세 눈물까지 쏟아내는 그녀에 쓰다듬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나 고민에 빠졌다.
다행히 느리게나마 눈물을 그쳐가는 것이 보여 괜찮은 방법이었나 보다 싶었는데, 이번엔 대뜸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미처 그치지 않은 눈물이 볼을 흠뻑 적시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데도 레리아나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왜지?’
왜, 울면서 웃지? 아르펠로서는 도저히 그 감정의 변화를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지는 데도 불구하고 울면서 웃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레리아나를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결국 아르펠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기를 택했다.
그렇게, 레리아나가 완전히 울음을 그치기 전까지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곁을 지켰다.
***
“끝났어?”
“와, 귀신같은 놈.”
레리아나가 울음을 그치자 아르펠도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갈 때 즈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참을성 없는 방문객의 정체를 진작 눈치채고 있던 레리아나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야기가 끝났을 때를 딱 맞춰 오는 거냐며.
로한은 굳이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꿀이라도 발라둔 것처럼 곧장 아르펠의 옆자리로 찾아 들어간 그가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섞여든 모습만 보면 처음부터 셋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얘기는 잘했어요?”
“응.”
뾰족한 레리아나의 시선을 자연스레 외면한 로한은 아르펠에게 기대앉은 채 입을 열었다. 그에 익숙하게 어깨를 내어준 아르펠은 여느 때와 같이 담담히 질문에 응하며 기댄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로운지, 레리아나의 눈에 슬슬 힘이 빠져나갔다.
그래. 원래 저런 걸 뭣 하러 신경 써. 허망하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눈을 도르륵 굴렸다.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생긴 탓이었다.
“로한. 시아한테 뭐 물어볼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거.”
나른히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로한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의 낯에 수려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생글거리는 얼굴에 도리어 질문을 던진 레리아나가 몸을 움찔 떨 정도였다.
“기다리는 동안 얘기 잘하고 왔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상큼했다. 어지간히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 본지, 환히 고인 웃음은 도통 가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던 아르펠조차 당황한 듯 눈을 끔뻑이기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계속 쓰다듬어 주면 안 돼요…?”
손이 멈추고 나서야 그의 반응을 인지한 로한은……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아르펠의 목덜미에 고개를 조금 더 파묻은 채 뻔뻔히 요구하는 것을 택했다. 더 자신을 신경 써 달라는 재촉이었다.
아르펠이 멍한 얼굴로 손을 다시 움직였다. 짙은 만족감이 내려앉은 얼굴이 배부른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기가 막힌 얼굴을 하고 그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던 레리아나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뭔가…….”
저렇게 좋아라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더부룩한데. 역시 친구의 연애 사정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건…… 정신적으로 해로운 일이었다.
143
레리아나는 무사히 정신을 차렸고, 짧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의 일로부터 비롯된 감정의 골을 풀어 나갔다. 모든 사건이 문제없이 일단락된 셈이다.
로한을 통해 구원교 간부에 대해 전해 들은 그녀는 있는 대로 열이 받은 얼굴이 되었다. 한 놈에게 제대로 놀아났다는 사실에 열이 오른 모양이다. 그리고, 간부가 죽을 때마다 느껴졌던 ‘낯선 신의 기척’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그게 가능해?”
레리아나의 얼굴이 찝찝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짧은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혼란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여태껏 믿어 의심치 않아 왔던 사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으므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은 둘뿐이었다. 타락해 세계로부터 잊힌 신이 이제 와 무슨 수로 그런 힘을 쓴단 말인가? 하물며 신성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힘을, 땅속 깊은 곳에 봉인 당해 버린 악한 존재가 말이다.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 물음에 답한 것은 로한이 아닌 카시아였다.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말문이 막혔던 로한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내뱉은 말은 아닌 듯했지만, 먼 과거를 회상하듯 흐려진 카시아의 눈에는 작지 않은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말에 집중할 이유는 충분했다.
“예전에, 대신관께서 하셨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현재 천신전 측의 대신관은 신관 중에서도 나이가 굉장히 많은 축에 속했다. 덕분에 옛날 일을 꽤 많이 알고 있었고, 어릴 때부터 신전에서 지냈던 카시아는 그녀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의 죽음’이었다.
“세계가 그 존재를 완벽히 잊었을 때, 신은 비로소 죽음을 맞이한다……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에게 향한 수많은 염원은 물론이고, 그가 인간 세상에 내린 힘까지 완벽히 소멸해 버린다고.
그 당시에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대신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신에 대한 믿음이 투철했던 카시아는 혹시나 천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버렸더랬다. 물론 얼마 안 가 그것이 하등 쓸모없는 고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지만 말이다.
하여튼, 요지는 이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대화를 조금 더 세세하게 되짚어 나가던 카시아가 또 심사숙고 끝에 말문을 열었다.
“그때 들었습니다. ‘신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요.”
“그, 그런 게 있어? 그게 뭔데?”
“‘신의 안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조용히 카시아의 말을 듣고만 있던 아르펠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느리게 움직이다 마침내 멈춰선 곳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보랏빛 보석. 정확히는 그것을 매단 로한의 귀였다.
“정확히 아는 바는 없지만, ‘신의 안배’에는 단순히 신의 힘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세계의 힘까지 깃들어 있다더군요. 그래서… 신이 죽더라도 안배만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레리아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신의 안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가지고 있기까지 한 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따라 귓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의 존재감이 유독 뚜렷했다.
그러니까, 카시아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로한과 아르펠이 느꼈던 ‘낯선 신의 기척’이, 먼 과거, 악신이 죽기 전 만들어냈던 ‘신의 안배’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겠냐고.
그 ‘신의 안배’를, 누군가가 손에 넣어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니겠냐고…… 말이다.
***
그들의 대화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현재로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딱히 없는 가설일 뿐이다. 카시아가 대신관께 따로 이야기를 드려보겠다 했지만, 글쎄. 신을 만나 직접 묻는 것이 아니라면 한낱 인간이 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테다.
물론, 얼마 안 가 자리를 옮겨야 했으니 굳이 그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야기는 어설피 막을 내렸을 것이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기 바쁜 네피아를 응시하며, 아르펠은 생각했다.
눈 그늘이 잔뜩 져 있지만 기분은 꽤 괜찮아 보였다. 재앙이나 다름없던 사건이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심신이 평화로워졌을 만도 했다. 뒤이어 몰아닥친 수많은 일거리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다만.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감사 인사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그보다, 저희를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또다시 시작될 뻔한 끝없는 인사를 로한이 웃는 낯으로 막아섰다. 그러면서 화제를 바꾸는 실력은 자연스럽고 깔끔하기까지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용건을 떠올린 듯 작게 탄식한 네피아가 민망한 표정으로 운을 떼었다.
“현재 신관들을 파견해 세 분이 발견하셨던 지하 감옥을 중심으로 조사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진행 속도도 꽤 빠른 편입니다. 중앙 신전 측에서 인력을 보태주기도 했고…… 용병 길드와도, 협력하기 시작했거든요.”
“사이가 회복된 것 같아 다행이네요.”
“하하, 네. 부끄러운 일이죠……. 사실 여부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구원교의 손에 놀아난 거니까요.”
하루아침에 긴 시간 동안 쌓인 감정의 골이 모조리 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지금처럼 힘을 모으는 일이 많아진다면…… 그 골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도 올 수 있겠지.
애매했던 마을의 분위기를 상기하던 레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구원교 간부의 수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전해 들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네피아는 조사 결과 중 눈에 띄는 것들을 골라 말해 주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감옥의 뒤편, 다른 곳으로 연결된 듯한 통로를 하나 발견했다는 소식도 끼어 있었다.
덧붙인 바로는 그곳이 버려진 연구실로 보이며,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누군가 오래 머문 듯하단다. 더 발견한 것이 있다면 다시 알리겠다 말하는 목소리가 상관에게 보고라도 하는 것처럼 깍듯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조합인가.
로한과 레리아나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본 아르펠이 납득했다. 신관장이긴 하나 변방의 마을에 머무는 이에게, 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자리한 존재일 게 틀림없었다.
이윽고, 네피아가 조심스러운 투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하에서 발견된 한 구의 시체와 팔, 말입니다만.”
팔은 남성의 것, 시체는 여성의 것으로 보이며, 워낙 까맣게 타 버린 탓에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레리아나를 흘끗거리는 게,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김새를 묻고 싶은 건가. 그리 추측하기가 무섭게, 네피아는 퍽 벅차오른 듯한 눈을 하고 레리아나에게 물었다. 꼭 모은 두 손이 어쩐지 간절해 보였다.
“신기하게도 타 버린 시체에서 강한 성력이 느껴지더군요. 혹시…….”
“아. 그건 천신께서.”
“아아……!”
확답을 전해 들은 네피아가 털썩 무릎을 꿇은 건 한순간이었다. 답을 하고 있던 것도 잊고 쩡 굳어버린 레리아나는 물론이고, 로한과 카시아 역시 당황을 감추지 못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눈을 끔뻑이던 아르펠은 여태껏 만났던 다른 신관들을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려보는 중이었다. 설마 신관들은 다 이런 걸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입 가까이에 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기도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네피아 님?”
“…….”
“신관님?”
“…….”
“저기요?”
네피아는 레리아나가 몇 번을 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한결같은 꼿꼿함을 자랑했다. 결국 그녀를 일으키는 것을 포기한 레리아나는 다른 셋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할 셈이었다.
“그 팔의 주인 말이야.”
예전에, 우리 습격했던 그 사람이야.
같이 싸웠던 카시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정확히는 로한과 아르펠을 향한 말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단숨에 표정을 굳히고 만 로한은 남은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신랄히 평했다.
“……용케도 도망쳤네.”
거대한 천둥번개가 내리치기 전, 로한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뇌리를 관통하는 듯한 음성과 온 숲을 뒤덮어 버릴 것처럼 넘쳐흐르는 광활한 성력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가.
격이 다른 힘에 휩쓸렸음에도 팔 하나만 잘라내고 도망친 것이다.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흠, 흠.”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던 네피아가 헛기침하며 몸을 일으킨 건 그때였다. 본인이 한 짓이 상당히 뜬금없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는지 볼에 미약한 홍조가 서려 있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온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시 자리에 앉아 대화에 끼어드는 일련의 행동이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떨어질 생각을 않는 여럿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그녀가 보란 듯이 이어 말했다.
“천신께서 직접 내리신 벌인걸요. 운이 좋아 팔을 자르고 도망쳤다 하더라도 평생을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과연 격 자체가 다른 힘이 팔만 깨끗이 태워 버리고 끝이 났을까. 로한은 낯에 서린 떨떠름함을 지워내지 못하면서도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천벌이나 다름없던 그때의 광경은 아직도 기억에 똑똑히 남아있었으므로.
그러나 아르펠은, 순순히 넘어갈 생각이 없던 듯했다.
“계속 듣고 계셨던 겁니까?”
“크흠!”
아무리 불러도 꿋꿋하게 기도하고 있던 것을 떠올려 물으니 거센 기침이 튀어나왔다. 어떻게든 무시하고 넘어가 달라는 몸부림이었으나, 아르펠이 그것을 알 리 만무했다.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며 끝내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이를 바라보며 뒤늦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인간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144
그 뒤로 며칠이 흘렀나. 시간 감각이 뭉개져 알 수 없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위태롭게 휘청였다.
팔이 있어야 할 곳이 휑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천으로 뜯겨나간 곳을 빙빙 감싸 지혈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본래의 색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든 것이 멀쩡한 한쪽 손 아래에 축축한 감각을 남겼다.
‘젠장…….’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숨결에 욕설이 섞여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귓가에는 자꾸만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를 머저리로 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불순한 것의 종자야.’
성을 유추할 수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 일대를 휩쓴 재앙은 그 목소리로부터 시작됐다.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거칠게 휘몰아치던 폭풍, 그리고 귀를 찢을 듯 터진 굉음. 이윽고 눈앞이 빛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오스카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저 빛에 닿으면 죽는다.
죽음의 공포가 목전까지 들이닥치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함께 있던 여자 신도가 비명과 함께 타들어 갈 때도, 그녀의 숨이 완벽히 꺼져버릴 때도, 금이 간 천장이 무너져 내릴 때도…… 도망쳤다. 살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이 그의 몸을 움직인 것이다.
무슨 정신으로 그 지옥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등 뒤에서 달려들고 있는 이상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치였으니.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지 않게 되고 나서야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미친듯한 고통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통증의 원인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팔 한 짝이 사라졌다.
우악스러운 짐승의 이빨에 뜯어먹힌 것처럼 상처의 결이 들쑥날쑥했다. 줄 수 있는 고통이란 고통은 최대한 느끼게 해주겠다는 무형의 의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언제, 어떻게 상처를 입었는지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피를 틀어막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신일까.’
숨을 벅차게 내쉬면 내쉴수록,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가던 때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물들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빛, 단숨에 생명을 꺼뜨린 압도적인 힘, 그로부터 비롯된 위압감과…… 감히 그 격을 짐작조차 할 수 없던, 뇌리를 파고든 목소리.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오스카는 신이 내려준 힘을 느낄 수 없었다. 성력이든 마력이든, 오러와는 결이 다른 ‘알 수 없는 힘’이라고 느낄 뿐 그것을 구분할 능력은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팔 한 짝을 앗아간 것이 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납득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었으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몸집을 키우는 와중에도 자조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쳐졌다.
‘……천벌.’
그래.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천벌’일지도 모른다. 지옥에 가더라도 뉘우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만 내린다는 신의 벌.
착하게 살아오기는커녕 용서받지 못할 온갖 죄를 뒤집어쓰며 살았다. 그리 과거를 되짚어 보니 천벌을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고야 만다. 하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발걸음이 비틀거리며 한곳을 향해 나아갔다.
‘내가 죄를 지은 이유.’
두 손이 피로 흠뻑 물들었음에도 꿋꿋이 살아간 이유가 있지 않은가. 죄를 지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손을 더럽히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길 바라서. 천벌을…… 받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그를 대신해 온갖 죄를 범했다. 수많은 사람의 피를 대신 손에 묻혔다.
그 목적이 바래지지 않았으면 했다. 피가 어느 정도 멎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들어 가는 통증을 전신으로 뻗치고 있는 곳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니 알려야 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몸소 나선 적이 없던 존재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고. 그러니 당신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오스카 경?”
정신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던 몸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들려서는 안 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랗게 떠진 눈이 코앞에 다가온 남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기척마저 느끼지 못하다니.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오스카의 낯에 그늘이 졌다.
“…전하.”
갈라진 목소리가 나지막한 음성을 토해냈다.
공기 중에 흐르는 바람에 하얀 은발이 흐트러지고, 은은한 녹음이 서린 눈동자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정처 없이 흔들렸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고 있던 하나뿐인 태양과 꼭 닮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팔이.”
냉정한 빛을 띠고 있던 낯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그 얼굴에 서린 감정이 충격과 걱정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모르지 않을 듯했다.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을 뿐, 제 몰골이 어떤지 알지 못했던 오스카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숙여 보였다. 미처 자신을 붙잡지 못하는 손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고통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불쑥 걱정이 치고 올라왔다.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숨김없이 감정을 내비치는 저 얼굴이 괜스레 미덥지가 못해서.
‘역시…… 부족하다.’
비단 상처를 입은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스카는 ‘루시엘 렌제스터’를 마주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주군과 같이 완벽한 황제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정을 주지 말아라.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라. 그리하여, 완벽한 제국을 뒷받침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의 주군이 바라는 제국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했다.
“폐하…….”
어느새 커다란 문이 목전에 다다랐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울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두운 밤, 인형처럼 표정이 없는 기사들이 열어주는 문 너머로 발을 디디며…… 오스카는 두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필이면 줄곧 노리고 있던 곳에 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발을 들인 것이? 그것을 기회라 여겨 계획을 미루지 않고 멋대로 목표를 바꾼 것이? 또다시 과거를 재현해 보이겠다며 신의 것을 탐하려 하는 여자의 계획에 동조한 것이?
모르겠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행동이었든…….
그 죄를 자신이 범했다는 건 변치 않을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죄를 갚아야 했다. 눈앞이 희게 번질 정도로 올라오는 통증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오스카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날 밤.
황제가 머무는 곳에서, 한 사람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졌다.
***
“…….”
루시엘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황성의 너머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한 눈을 하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게 맞는 것 같아?”
“…….”
“루시엘 오라버니.”
“…….”
“루시엘.”
“…….”
“야.”
말동무 취급을 당하고 있던 이벨린이 그를 툭툭 건드렸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제야 매끈하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갑자기 멋대로 들어오더니 이건 또 뭐하자는 거야? 당장 꺼지라고 쌍욕을 박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로서는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을 모조리 끌어와야만 하는 일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던 입꼬리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 할 때 즈음.
“……모르겠다.”
나직한 음성이 루시엘에게서 새어나왔다.
목소리를 낼 타이밍을 놓친 이벨린이 복잡한 낯을 했다. 폐하에게 동조해 멋대로 자신을 가둔 놈이었으나, 저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 또한 창 너머를 향했다.
빌어먹게도 화창한 날씨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 수놓아진 구름도, 간간히 날아가는 새들도, 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바람 소리도……. 더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었건만, 황궁은 그와 다르게 어수선했다.
“모르겠어.”
내가 가는 길은, 이런 길이었나.
흩어지는 목소리가 퍽 자조적이었다. 이내 루시엘의 눈이 질끈 감겼다. 황성 바깥에 매달려 있는 누군가의 머리를 떠올리는 듯했다.
오스카. 현 황제의, 자신의 아버지의 최측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남자. 이벨린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는 오스카의 얼굴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상당히 무뚝뚝하며, 제 아버지를 이상하게 잘 따른다는 것뿐. 대충 들어보니 목숨을 구원받은 적이 있다길래 그러려니 한 것에 가까웠다.
사람을 볼 때 드는 느낌이란 게 있다.
처음 오스카를 마주한 순간, 이벨린은 그것을 느꼈다. 아, 이 남자는 우리 아빠를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어릴 때 느꼈던 단편적인 감정은 커갈수록 확실해졌다. 그가 ‘미하일 렌제스터’를 배신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원래 그랬어.”
루시엘을 따라 눈을 감았다 뜬 이벨린이 중얼거렸다. 언제나 아버지의 곁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던 이는 황성 바깥에 비참한 꼴로 내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손에 목이 잘려서.
그토록 황제를 따르던 남자가 어째서 황제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았나. 짐작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루시엘의 얼굴 또한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는 것이겠지.
황제는 오스카를 버렸다. 그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해서…… 수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해왔던 부하를 죽였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커다란 돌덩이가 숨을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속이 답답했다. 처지를 동정해 드는 안타까움일까, 그럴 줄 알았다며 흘러나온 비웃음일까. 그녀 또한 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145
“어디 갈 데 있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조촐한 짐을 챙기는 로한을 향해 레리아나가 물었다. 막 네피아와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왔건만, 쉬기보단 곧장 움직이기를 택하는 것이 중요한 약속을 앞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천신이 내린 ‘천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난 뒤 몇 분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문제는…… 대부분 신전의 근황, 조사의 진행 상황, 용병 길드와의 관계와 같은 정보를 공유하는 데서 그친 터라 그럴듯한 소득이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응.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로한은 이곳에 오래 남아 있다 한들 크게 의미가 없을 거라 판단했고, 아르펠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애초에 따로 생각해 둔 다음 목적지가 있기도 했으니, 빨리 떠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며.
레리아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딱 봐도 그게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에 로한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선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의 눈에 담긴 초점이 묘하게 또렷했다.
“궁금하면 같이 가든지.”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니까.
***
“……진짜, 가깝군요.”
레리아나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신전을 나서게 된 카시아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옆에 서 있는 레리아나의 낯엔 사뭇 배신감까지 어려있을 정도였다.
“용병 길드면 용병 길드라 말해도 되잖아. 그걸 꼭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얘기해야 해?”
“내가 가깝다고 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투덜대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그 목소리를 한 귀로 흘러넘기며 아르펠은 평소와 같은 덤덤한 얼굴을 하고 코앞에 있는 건물을 응시했다. 흘끗 로한과 레리아나를 돌아보았으나 투덜거림은 여전했다.
혼란한 대화가 쉽사리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한 아르펠은 그들을 대신하여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가움을 내비치는 익숙한 얼굴에 하마터면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아 버릴 뻔했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가운 기색과는 다르게, 그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시선이 팔린 레리아나가 ‘어, 음…….’하며 묘한 소리를 냈다.
“이야기는 다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그 말을 들어야 할 건 본인 같은데요?”
“예?”
“아뇨, 아무것도…….”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 인사에 어설픈 토가 달렸다. 안타까울 정도로 눈 그늘이 짙게 깔린 얼굴을 바라보며 레리아나가 저도 모르게 덧붙인 것이다. 물론 얼마 안 가 옆구리를 찌르는 카시아의 손가락에 급히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그렇게 묘한 대화는 끝이 났다 생각했거늘, 이번엔 데인 쪽에서 복잡한 표정을 해 보였다. 로한과 레리아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미심쩍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아뇨, 크흡.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로한이 찝찝한 얼굴을 했지만 데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집이 서린 얼굴로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행동에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대충, ‘화해해서 다행이다’ 정도의 표현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을 뒤져보지 않는 한 모를 일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두 손 놓고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는 목소리가 거슬리기라도 했는지, 아르펠의 고요한 시선이 조용히 데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모른 척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만 데인은 어색하게 고개를 틀며 아르펠의 눈빛을 피했다. 이어 삐거덕거리는 목소리로 화제를 트는 솜씨는, 가히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크흠. 흠. 그,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저희 쪽에서 확보했던 용병들에 관한 겁니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태도였으나 전환할 화제를 선택하는 실력만큼은 탁월했다. 로한의 눈에 단숨에 날이 서고, 레리아나와 카시아마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니 아르펠 역시 포기하고 데인에게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병 길드 쪽에서 확보한 이들. 첫 번째 간부가 들이닥치기 직전, 데인과 그를 따르는 용병들이 급하게 끌고 갔던 습격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로한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었기에, 레리아나의 낯에도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데인은 넷을 데리고 건물 뒤쪽에 난 작은 쪽문을 통해 용병 길드를 빠져나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조그마한 오두막이 듬성듬성 서 있는 황량한 길목이 드러났다.
“이곳은…….”
“길드 건물에 그놈들을 가둬둘 만한 공간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몇 달 전에 난 큰 화재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있다길래, 일단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는 중이었습니다.”
까만 재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집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확실히, 비밀리에 심문하기에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환경이다.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르펠이 간단히 평했다.
집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삐거덕, 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샜다. 희미하게 켜진 불빛 너머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몇몇 인영이 보였다. 한 박자 늦게 몰려온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 댔다.
“후우.”
밝은 대낮인 바깥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레리아나가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앞으로 보게 될 것은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마주해서는 안 될 무언가라고, 본능이 경종을 울려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썩은 나무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불쾌함이 절로 치미는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익숙하게 집의 중앙으로 나아간 데인이 촛불을 켜자마자 안의 광경이 조금 더 선명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온갖 구속구로 몸이 단단히 묶여 있는 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모진 고문, 그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내뿜는 거친 숨결이 귓가를 맴돌았다. 차게 굳은 연분홍빛 눈동자가 끊임없이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분명 이보다 더 많았던 것 같은데요.”
로한은 무감각한 눈으로 이들을 훑었다. 레리아나와는 달리 한 치의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고서.
그는 그들의 ‘상태’가 아닌 ‘수’에 집중했다. 분명 습격을 감행했던 놈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수가 많았다. 로한이 말하고자 한 바를 눈치챈 듯,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인 데인이 말을 덧붙였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도 그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심문 도중 죽은 겁니까?”
“……예. 거기다 애초에 버릴 패로 여겼는지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더군요. 대부분 명령을 이행하면 기사 직위를 내려주겠다는 말에 속아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안한 이는 행방이 묘연하고요.”
차근차근 그간 얻은 단서를 설명하는 목소리가 침착했으나,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전개는 아니었다. 오러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 낮은 등급의 용병에게 미쳤다고 중요한 정보를 쥐여 주겠나.
넷의 눈에 서린 의문을 느낀 듯 데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이 보여 주고 싶은 건 이게 아니라고.
“잠시, 이쪽으로.”
그리 넓지 않은 집 때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넷은 데인의 뒤를 옹기종기 따라가야만 했다. 구석에 있는 방으로 향하는 건가. 걸음을 옮길수록 좁아지는 공간에 아르펠의 미간이 미약하게 구겨질 무렵이었다.
“윽…….”
앞장서 가던 레리아나가 지독한 냄새에 코를 막았다. 이전에 맡았던 냄새도 충분히 고약하다고 생각했건만,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이건 무언가가 썩는 냄새였다. 나무나 음식물,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살점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 악취의 근원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 로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잡동사니를 넣는 용도인 듯한 좁은 방 안에는 천으로 뒤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금 내려앉은 어둠 때문에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정확히 분간해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듯했으나, 로한과 아르펠은 아니었다.
권능 덕분에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잘 보였다. ‘무언가’의 위를 덮은 천을 걷어내자마자 드러난…… 차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끔찍한 얼굴이.
“……이건.”
여태껏 큰 동요를 내비치지 않던 로한의 눈마저도 그 순간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약과에 그쳤다. 마침내 드러난 몸이, 그것에 달린 팔과 다리가 말문을 잃을 정도로 기형적이었으니까. 거미, 물고기, 곰, 돼지…… 그러한 것들을 인간과 뒤섞어 놓은 듯한 괴상한 생명체가 눈앞에 있었다.
‘닮았어.’
그 끔찍한 광경을 코앞에 두고 아르펠은 생각했다. 저 인간이 아닌 것들이, 구원교의 ‘간부’를 닮은 것 같다고.
마침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것인지, 옆쪽에 있던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뒤늦게 숨을 들이켰다. 모두가 ‘이것’의 상태를 확인했음을 직감한 데인은 잡고 있던 천을 다시 내려놓았다. 끔찍한 몰골이 두꺼운 천으로 가려졌다.
“아까,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하셨죠.”
창백히 질린 데인의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천천히 숨을 들이켠 그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이 꼴이 됐습니다. 어느 순간 몸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목숨을 잃었죠.”
목숨에는 지장이 없도록 적당한 정도를 지켜 진행하던 심문이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한 이들은 하나 같이 그 자리에서 죽기 시작했다.
“…그 탓에 심문은 어제부로 중지됐습니다. 일을 맡고 있던 용병들이 이게 ‘저주’라면서 도망쳤거든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도 데인은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이게, 저주가 아니면 무엇일까.
두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신의 저주’라는 것이 있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아서. 불쑥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146
눈앞엔 시체가 있고, 등 뒤엔 심문이 채 끝나지 않아 고통에 헐떡이는 이들이 있다. 바깥에서 엿보지 못하는 폐쇄적인 공간이라고는 하나,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갈 만한 장소가 아닌 건 확실했다.
앞장서는 데인을 따라 다시 발걸음을 물리며, 로한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몇몇 인영을 스쳐 지나가듯 눈에 담았다.
이지가 완전히 흐트러진 듯 차마 단어라 할 수 없는 음성들을 토막토막 내뱉는 이들. ……저들이 미쳐 버린 건 고된 심문 때문일까, 혹은 곁에서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 죽어간 동료들 때문일까.
아마 높은 확률로 후자일 테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되는 것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을 것이 두려워서.
“예상 가는 바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길드로 돌아온 뒤 먼저 운을 떼면서도 로한은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는…… 신랄히 평했다. 결과에는 원인이 따르듯, 저 비참한 죽음 역시 본인들이 멋대로 저지른 행동의 대가일 것이라고.
“용병들이 썼던 붉은색 오러.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붉은색 오러…… 확실히. 나랑 시아를 습격한 남자도 붉은색 오러를 썼어. 그 힘을 쓰자마자 갑자기 강해지던데.”
로한의 말에 동의하듯 레리아나가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숨기지 못한 복잡함이 표정 위로 드러나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붉은색의 오러. 듣기만 하더라도 그것이 풍기는 불길한 기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랬다.
더군다나, 그 힘으로 인해 겉모습이 괴물처럼 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오가고 있는 지금.
추측이 사실인지, 만약 사실이라면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측근에게 붉은색 오러를 쓰게 했는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처지였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뒤엉켜 어지러웠다.
“길드 측에서는 추가로 인원을 꾸려서 이번 일을 꾸준히 조사할 생각입니다. 더 알아내는 점이 있다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묘한 침묵이 흐르기도 잠시, 데인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더 오래 끌고 나간다 하더라도 큰 소득이 없으리라는 걸.
로한과 레리아나가 말한 ‘붉은색의 오러’를 참고해 집중적으로 파보겠다는 말이 뒤따라 붙었다.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르펠이 운을 뗀 것은 그때였다.
“황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데인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떠 올랐다. 제국과 구원교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 뒤에 황제가 서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던 그였다.
아르펠은 이번 일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무감정하기 짝이 없었지만…… 데인은 그것이 자신과 길드를 위한 경고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데인이 마주 앉아 있는 넷을 향해 다른 화제를 꺼내 들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혹시 따로 정해둔 목적지가 있으십니까?”
“아뇨, 아직은…….”
“저도요.”
레리아나가 떨떠름하게 답했고, 로한 또한 그녀를 따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와 아르펠은 레리아나를 따라 이 마을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답을 기다렸다는 듯, 데인의 낯이 금세 맑게 개었다.
“따로 만나 주셨으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머지않아 데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꽤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넷은 마을을 뜰 채비를 했다. 레리아나는 데인이 미리 마련해 준 마차에 올라탄 채 조그맣게 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아침, 그 틈에 섞인 용병과 신관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나중엔 저런 것도 없어지겠지?”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도, 그렇다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음성이었다. 그녀를 따라 바깥을 바라본 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과 신관이 함께 있는 모습은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마을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은 서로에게 섞여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비록 아직은 서로를 불편해하는 것이 눈에 띄는 듯하지만…… 이것 또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없어질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로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느리게 대꾸했다. 흘리듯 던진 말을 놓치지 않고 대꾸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창 너머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보는 레리아나의 눈빛은 어째 곱지 않았다.
“말에 영혼이 안 들어있는데.”
“응, 그래.”
답을 해 주면 뭐하리, 딱 보아도 영혼 한 점 들어있지 않은 설렁설렁한 말투인데. 이를 꽉 악문 채 로한을 노려보던 레리아나는 이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마저 눈에 담고 말았다.
조몰락거리는 로한의 손은 어지간히 바빠 보였다. 마차에 타고 난 뒤로 한시도 쉬지 않고 아르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으니, 바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손장난 하나하나에 애정이 퐁퐁 솟아났다.
“…….”
레리아나의 낯빛이 차차 안 좋아졌다. 하나뿐인 친구와 무사히 화해하고 다시 여행길에 오른 건 좋지만,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전혀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게 된 애정 행각은 어째 전보다 더 심해진 듯했다.
말랑한 손바닥을 문지르고,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하나를 톡톡 건드린다. 뒤이어 보란 듯이 깍지까지 끼는 손은…… 보란 듯이?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이어 나가던 레리아나가 물씬 든 직감에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흘끗거리는 로한과 떡하니 눈이 마주친 게 아닌가. 씩 올라가는 입꼬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저놈이 지금, 나 보라고 저러는 건가. 친구가 고의로 보여 주는 애정 행각을 직관하게 된 레리아나의 얼굴이 점점 썩어 들어갔다.
“아르펠.”
그런 레리아나를 익숙하게 무시한 로한이 고개를 기울여 아르펠을 향해 속삭였다. 말이 속삭였다지, 좁은 마차 안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닌 척 레리아나와 카시아의 시선도 로한에게 향했다.
“응?”
작은 부름에 아르펠이 대답하는 순간. 아니, 정확히는 로한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돌리는 순간, 로한이 고개를 숙였다. 하얀 볼 위에 말랑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욱.”
참지 못한 레리아나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던 것이 무색하게도 볼 뽀뽀 한 번에 모든 게 무너져 버렸다. 이 자리에서 성검을 꺼내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로선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한 셈이었다.
무심코 올라온 헛구역질을 애써 가라앉힌 그녀가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마차에서 대놓고 애정 행각이라니,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다 아르펠한테 된통 혼나야 정신 차리지.’
속으로 신랄히 평가했으나, 레리아나는 자신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
로한이 아르펠에게 맹목적으로 굴 듯, 아르펠 또한 로한에게 한없이 약해진다는 것을. 그 사실을 자각한 건 혼을 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건 물론이고,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아르펠의 상태를 확인한 뒤였다.
심지어…… 귀가 빨갰다. 잠깐 헛구역질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레리아나는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른 아르펠의 귓불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녀가 한 박자 늦게 옆에 있던 카시아를 쿡쿡 찔렀다. 익숙하게 손길을 받아주며 고개를 돌리는 카시아를 향해,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르펠……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아?”
라고.
그러나 일전에 그녀 또한 느꼈듯, 이 안은 고립된 마차 안이었다. 딱 붙어 앉아야 할 정도로 좁은 공간은 아니었으나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것도 아니다.
심지어 성력과 마력 덕분에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청각을 가지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아무리 작은 속삭임이라 할지라도 귀에 잘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로한이 붉어진 아르펠의 귓불을 발견한 건…… 모두 레리아나의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미소지은 얼굴에 선명한 환희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무심한 얼굴을 한 와중에도 귀를 빨갛게 물들이는 아르펠이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아르펠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긴 로한이 손등 위로 입맞춤을 내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그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모양새였다. 흘러넘치는 사랑을 표출해 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것처럼, 짧은 입맞춤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부끄러웠어요……?”
이따금 그러한 말까지 섞여 들었으니, 안 그래도 붉었던 아르펠의 귀가 더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황홀할 정도의 애정도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나 다름없던 레리아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애정 행각을 바라보는 눈은 꺼멓게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옆에 앉아 있던 카시아가 측은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덧붙이는 목소리가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어설피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을 느낀 레리아나가 울상을 지었다.
147
“뭔가…….”
어수선한데.
데인이 미리 점찍어 주었던 마을에 도착한 이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본 레리아나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함께 주위를 둘러본 다른 셋의 의견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도와 그다지 멀지 않은 번영한 도시인 만큼 오고 가는 인파가 많은 건 당연했다. 그것만으로 따지고 본다면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광경일 테지만, 사람들의 낯에 서려 있는 우중충한 근심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기묘한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행인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아르펠은 그 주변을 은은한 불안함과 긴장감이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일단 용건부터 해치우죠.”
다만, 그 뜻 모를 감정의 이유를 찾는 것은 이 마을에서의 볼일이 마무리된 이후여도 될 것이다. 멈칫한 일행을 이끄는 로한의 목소리에 수긍하며 걸음을 옮겼다.
바깥에 있는 큰 길가와는 다른, 미묘하게 구석에 위치한 작은 찻집. 딸랑, 하는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그 안에 발을 들인 이들은 익숙한 낯의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존재하는 이라곤 그뿐이었으니, 곧장 발견하지 못 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다 같이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을 흔드는 모습이 지나치게 태평했다. 시원하게 휘어진 눈매가 나란히 서 있는 로한과 레리아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게 마치 이렇게 될 것을 다 짐작하고 있던 사람처럼 보인 탓일까.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로한이 미간을 구겼다.
“화해는 잘 했어요?”
“아하하…… 넵.”
마찬가지로 갈등을 어림짐작했던 데인은 굳이 묻지 않는다는 배려를 선보였건만, 그의 상관인 이 남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흐트러진 녹빛 머리를 웃으며 쓸어넘긴 렉시아가 기어코 그 화제를 꺼내든 것이다.
레리아나는 어색히 웃으며 답하곤 요령껏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뒤를 따른 카시아까지 그녀의 옆을 차지하니, 순식간에 렉시아와 같은 편의 자리만이 남게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말이 없는 아르펠을 돌아본 렉시아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앉아도 되는데.”
“그럼 사양 않고 앉겠습니다.”
“푸핫.”
말을 건넨 쪽은 아르펠이었건만, 냉큼 옆자리를 차지한 건 로한이었다. 제법 단호한 대답을 내놓은 그의 얼굴에 옅은 살벌함이 감돌다 사라졌다. 절대로 아르펠을 제 옆자리에 앉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이 보고 싶어서 넌지시 말을 던진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지. 그렇게 배실배실 웃던 렉시아는 형형한 아르펠의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웃음을 거둘 수 있었다.
흠, 흠. 그는 어정쩡한 분위기를 뒤로 한 채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몇몇에게는 한심함이 섞여 있긴 했으나, 어쨌건 그들의 눈길은 모조리 렉시아를 향했다.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인에게 이야기는 잘 전해 들었습니다.”
그린 듯 빙그레 웃어 보인 그가 말을 이었다. 앞뒤 설명을 다 잘라먹은 말이었으나, 이곳에서 렉시아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는 없었다. 데인이 렉시아에게 전할 말이라고 해봤자 뻔하지 않은가. 일전의 마을에서 있었던 소동에 대한 걸 이야기했겠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 이런 모습은 꽤 의외일지도 모르겠다.
순순한 감사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인 렉시아의 얼굴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해서, 짧은 음성에 서린 감정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감상을 가진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셋의 표정은 거기서 거기였다. 언제나 능글맞고 장난스럽게 굴던 이가 진지하게 고마움을 표시해왔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물론, 다시 고개를 든 렉시아의 낯에는 평소와 같은 짓궂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가볍기 그지없었다.
“씁, 그런 표정은 아무래도 조금 상천데.”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잠시 동그랗게 눈을 떴던 것이 거짓인 양,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인 로한은 더 이상 헛소리를 할 틈을 주지 않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싶다는 렉시아의 말을 전해준 것은 데인이었다. 이 낯선 도시로 그들을 불러들인 것도 그인 셈이었다.
어차피 앞으로의 일정 조율을 위해 용병 길드를 방문할 요량이었으나, 정작 그가 전해다 준 주소는 한적한 곳에 있는 작은 찻집에 불과했다. 그것도 렉시아를 제외한 이라고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찻집.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겠다는 의견을 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꽤 무거운 주제에 속한다는 것도 곧장 어림짐작할 정도였다.
“바로 본론? 그것도 좋지.”
낯설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인 렉시아가 중얼거렸다. …단연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가설과 함께.
“아무래도 원래 목표가 나였던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일순 사방이 고요해졌다. 답지 않게 눈의 크기를 키운 아르펠이 같은 선에 앉아있는 렉시아를 돌아보았다. 미리 놓여 있던 찻잔을 느슨히 문지른 그가 괘념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덧붙였다.
“데인을 보내놓긴 했지만 사건이 더 커지면 직접 가볼 생각이었거든요.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기도 했고.”
그는 이어 여러 가지 이유를 대었다. 최근 황실이 용병 길드를 필요 이상으로 자주 견제하고 있다는 점, 이벨린이 황궁에 발이 묶였다는 점. 그녀를 묶어두며 자연히 용병 길드와의 연관점을 황제가 눈치챘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여태 직접 움직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니, 황궁 측에서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로한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그럼, 굳이 찻집으로 부른 이유가.”
“맞아,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니 수도와 가까워질수록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괜히 용병 길드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였다간 물어뜯길 거리만 제공하는 거지.”
레리아나가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질문도, 온전한 문장도 아닌 모호한 말에 렉시아가 친절히 답했다.
아르펠은 조용히 상념에 빠졌다. 정작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장본인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뻔뻔히 대꾸했으나, 렉시아가 말하는 여러 근거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아예 일리가 없는 가정은 아니었다.
‘어떻게 판을 깔았나 했더니.’
사건에 휘말리며 떠오른 의문 중 하나였다. 그 마을을 둘러싼 사건들은 누가 봐도 단순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불규칙적으로 움직였고, 로한과 자신은 그런 둘을 따라갔다.
그런데도 기다렸다는 듯 실종된 용병들을 둘러싼 음모가 수면 위로 떠 오르고, 두 명의 간부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간부 하나는 오래전부터 용병 길드와 신전을 들쑤시며 갈등을 부추기고 다니지 않았나.
당시에는 몰아치는 상황에 정신이 없어 이러한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로한’과 ‘레리아나’를 노리고 꾸며진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둘을 노리고 판을 짠 게 아니라, 이미 판이 짜인 곳에 두 사람이 뛰어든 것이다.
혼란스러운 게 눈에 보였지만, 다들 어떻게든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렉시아와 용병 길드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묘하게 어설펐던 상대도, 무려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를 감시하는 지하감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초라했던 감시 인력도 어느 정도 말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말인데요.”
이윽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렉시아가 뒤숭숭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이들을 다시 한번 불러모았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 또한 미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최근 황실과 관련된 소문, 들어본 적 있나요?”
“…황실 말입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에 로한이 의아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황실을 둘러싼 소문이라니. 끝없이 이어져 가던 생각들이 한순간 뚝 끊겼다.
“밖이 어수선하던데.”
“맞아요. 느꼈나 보네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르펠이 말이 없는 이들을 대신해 운을 띄웠다. 황실과 관련된 것은 언제나 백성의 삶을 들쑤시는 법이다. 불안, 걱정, 긴장…… 길가를 거니는 이들에게서 풍겨온 부정적인 감정들을 누구보다 잘 느꼈던 그였기에 더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맞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렉시아가 종이 뭉치 하나를 테이블 위에 밀어주었다.
“이름은 오스카. 얼마 전까지 황제의 최측근에 자리했던 남자로, 길드 측에서 추측한 바로는 여태 황제를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한 자로 보입니다”
가장 첫 장에 휘갈겨 그려진 초상화를 바라본 레리아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나치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행길에 처음 올랐을 적 자신들을 습격했던, 얼마 전 마을에서 저와 카시아가 상대했던 남자. 그 증오스러운 얼굴에 이가 다 갈렸다. 차오르는 분노에 느리게 심호흡만을 반복하고 있는데, 초상화를 바라본 로한의 눈은 반대로 기묘해지고 말았다.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황실을 둘러싼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것만 같아서.
“이 사람, 어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반역죄로.”
이를 갈던 레리아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멍한 눈은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뚫어져라 렉시아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들은 게 정말 사실이 맞냐는 듯.
렉시아는 조용히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은 것도, 반역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황성 앞에 목이 잘려 내걸려진 것도, 모두 변치 않는 사실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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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를 빼앗겼군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카시아가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스카. 낯선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을 가진 남자는 도무지 낯설게 느껴질 수 없는 존재였다. 남성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원수를 대하듯 군 레리아나만 보아도 그랬다. 그래서일까. 로한은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적으로 남아 있을 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황제의 손에 죽고, 목이 잘려 황성 앞에 내걸려졌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황성 연회에서 황제를 두 눈으로 마주했을 적, 그의 등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던 기척이 떠올랐다. 그렇게 가까이 둔 걸 보면 분명 최측근이 맞을 텐데, 대체 왜.
‘처음부터 버릴 생각이었나?’
머릿속에 괴물이 된 채 죽어간 용병들이 떠올랐다. 레리아나가 말하길, 자신을 습격한 오스카 역시 후반에는 붉은색 오러를 썼단다. 정말 그 힘 때문에 괴물이 되는 것이 맞다면, 황제는 처음부터 오스카를 쓰고 버릴 패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을지언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당최 사라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찝찝함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말이 안 된다.’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
렉시아의 추측이 맞다고 가정하면, 오스카가 그 마을에 찾아간 건 렉시아를 제거하고 용병 길드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는 말이 된다.
로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게의 추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렸다. 앞으로의 세력 구도를 뒤집어엎기위해 필요한 과정일지는 몰라도,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들과 꽤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최측근 하나를 완전히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그래야만 하는 변수가 있었다는 건데.
“…….”
느리게 돌아간 시선이 레리아나와 카시아를 향했다. 아마 변수는 자신들일 터였다. 더군다나 신이 내린 천벌에 휩쓸려 팔 하나를 잃기까지 했으니. 이 모든 이야기를 황제가 전해 들었다면 꼬리를 끊는 선택도 아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이단과 결탁해 사병을 키운 게 발각됐다는데……, 사실 누가 봐도 꼬리 자르기죠.”
복잡한 표정을 짓는 이들을 한 번 둘러본 렉시아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설명을 덧붙였다.
“덕분에 제국이 아주 뒤숭숭해요. 오스카를 잡아들이면서 그의 세력도 모조리 숙청당했는데, 죽은 사병들이 하나같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둥, 그 수가 백이 넘는다는 둥…….”
“…완벽한 헛소문은 아니군요.”
“맞아. 내가 봐도 그래.”
무언가를 짐작한 듯 대꾸하는 로한에 렉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의 모습을 하고 죽은 사병. 데인을 통해 습격을 감행한 용병들의 최후를 들었던 그였기에, 소문을 듣자마자 곧장 사건의 진위를 파악한 것이다.
아마 ‘괴물의 모습을 한 채 죽은 사람들’은 사실이었을 테지만, 그들이 ‘반역에 가담한 세력’이라는 것은 헛소문일 테다. 적당히 진실을 뒤섞어 놓는 것만으로도 소문이 배는 사실처럼 느껴지고는 했으니.
“문제는 이게 신전과도 연관점이 있다는 거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길, 괴물이 된 사람들은 모조리 ‘잘못된 신’을 믿고 그의 힘을 사용한 자들이라 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이 악신을 믿는 무리라는 거다.
“여태 사람들은 ‘악신’과의 접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어요. 망령이라는 존재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 신전의 손에 의해 처리되니 직접 위협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한 마디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느릿하게 말을 이은 렉시아가 옅은 온기가 남은 찻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어제부로 달라졌죠. 괴물이 되어 죽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이걸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도 여럿 있으니까.”
어렴풋하게만 느꼈던 ‘악신’에 대한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망령이 들끓는 대지와 붙어 있는 제국의 국경에서나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기어코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나 버렸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전’의 능력에 대한, 아주 조금의 불신. 작은 균열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가져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그러니 선수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제국 또한 신전이 하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하는 게 아니냐는 쪽으로 여론이 쏠리고 있어요.”
“하지만, 성력이나 마력이 없으면…….”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잖아.”
레리아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렉시아는 내뱉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기사가 망령을 상대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므로. 레리아나 역시 그 점을 알기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신의 힘이 있다면 망령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망령이 들끓는 대지에 발을 들이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힘이 없는 인간이 망령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러가 있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여러 명이 모여 망령을 상대한다면 승기를 쥘 수 있었다. 신관과는 달리 오염된 땅을 함부로 밟을 경우 몸이 망가지겠지만.
“황실과 신전 사이의 신경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겁니다.”
못 이기는 척 황제가 ‘이단 토벌’이라는 명목하에 사건 조사에 관여하게 된다면. 그 영향력을 시작으로 백이면 백, 신전의 움직임에도 간섭하고자 할 것이다.
“하.”
로한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잔혹하고, 또 거침없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을 텐데도 망설임 없이 최측근의 목숨을 포기하고, 자칫하면 제국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괴물’을 풀어 흐름이 자신에게 기울게 한 것만 봐도 그랬다.
“간부 둘이 더 죽었으니 구원교는 더 주춤할 테지만,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최근 황실의 동태가 이상합니다. 신전과의 이해관계 역시 복잡하고요.”
이어지는 대화를 고요히 듣고만 있었던 아르펠이었으나, 렉시아가 이어 내뱉을 말만큼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그는…….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당분간 신전에 합류해 황실을 견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묻겠지.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에선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으니.
하지만 아르펠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보단 로한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시선을 옮기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대답하는 대신 로한의 무릎을 짧게 토닥여 주었다. 착해라.
“그렇게 할게요.”
로한도 레리아나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목적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마무리될 낌새를 보였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이들을 향해, 렉시아가 말했다.
“이벨린한테도 소식 전해 줄게요.”
“궁에 갇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드문드문 소식을 듣고는 있으니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황실 쪽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카시아의 되물음에 웃음기 어린 답이 돌아갔다. 기묘한 말이었다. 희소식인지 아닌지 쉽사리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본인의 말이 굉장히 애매하다는 것을 인지하기는 했는지 렉시아의 표정이 어색했다. 그게 마치 더 확실해진다면 이야기해 주겠다는 당부처럼 느껴져서, 로한은 찝찝한 낯을 하면서도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당부의 말이 오갔다. 렉시아는 정확한 꿍꿍이를 모르니 조심하라 덧붙이며 굳이 그 말을 아르펠의 곁에 다가가 한 번 더 반복했다. 딱 붙어 선 로한과 아르펠을 번갈아 보는 눈이 순식간에 짓궂어졌다.
도무지 의도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적나라한 눈길에 아르펠이 인상을 찌푸렸다. 렉시아를 응시하는 눈 위로 미약한 짜증이 차올랐다. 그렇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다가도…… 능글맞게 휘어진 여우 같은 눈매를 보고 있자니.
“…너도.”
불쑥 그런 말이 입 밖으로 새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커다래지는 렉시아의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요.”
의외다 어떻다, 지겹도록 입에 담아댈 줄 알았던 렉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을 하는 데에서 그쳤다. 씨익 시원하게 웃는 얼굴이 홀가분해 보였다.
아르펠은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던 눈길을 거두는 것을 택했다. 이런 반응을 내보이는 것도, 너도 조심하라는 말을 흘린 것도 모두 답지 않은 행동임을 느끼고 있어서. 그래서 더욱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가요, 아르펠.”
“하하, 질투하니?”
“…….”
그새 사이에 끼어든 로한이 재촉한 탓도 있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놀리듯 입에 담아 기어이 살벌한 째림을 받은 렉시아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멀찍이서 손을 흔드는 게 어서 가라고 쫓아내는 것만 같았다.
종종 신전에 사람을 보내 자신의 안부를 전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쓸데없는 말은 덤이었다. 그 경쾌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아르펠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 짜증 나는 놈이다.
딸랑거리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함께 걸어가던 로한이 문득 몸을 멈춰 세웠고, 따라 자리에 선 아르펠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이미 문을 열고 나간 탓일까. 스치듯 시야에 들어온 찻집 안이 유독 한적해 보였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나한테?”
계속 배웅하는 중이었던 건지, 렉시아는 애매하게 손을 든 채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의아함이 한껏 드러났건만 로한은 곧장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말을 고르듯 얼굴 위로 고민의 기색이 내려앉았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나서야.
“혹시, 황실이 신을 믿은 적이 있습니까?”
렉시아를 향해 예상치 못한 물음을 불쑥 꺼내 들었다.
149
다그닥, 다그닥.
규칙적으로 들리는 말굽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살짝 열어둔 작은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머리카락을 느슨히 헤집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로한은 렉시아와의 만남을 마무리하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황실이 신을 믿은 적이 있습니까?’
렉시아는 그 물음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그런 반응을 내보인 듯했지.
이윽고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힌 렉시아였지만, 그가 곧바로 답을 하는 일은 없었다. 입을 열기보다는 의미 모를 눈으로 한참을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러한 물음을 던진 의중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로한이 그러한 물음을 던진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카시아에게 들었던 ‘신의 안배’. 정말로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맞다면, 황실이, 아니. 황제가 그 신의 안배를 쥐고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귀에 박힌 보랏빛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같은 신의 안배라면 그 또한 신에게 직접 하사받은 물건일진데, 황실은 신의 존재는 인정할지언정 그를 따르지 않는 곳이었으니.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역사가 있어 이 지경이 된 거라면 알아 두는 게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대체 황실이 가진 신의 안배는 무슨 힘을 가졌는지, 세계의 힘이 담겼다던 것이 어째서 황제의 악행을 순순히 따르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기록은 없어.’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입을 연 렉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퍽 단호한 대답이었지만, 다행히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이 남지 않은 시대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렉시아가 내놓은 건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자신은 아는 바가 없지만 대신관이라면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언을 곁들였다. 신과 가장 가까운 자인만큼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의 대화는 끝이 났고, 로한은 자신을 기다리는 아르펠과 함께 찻집을 나섰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르펠은 알아요?”
버릇처럼 아르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넌지시 물었다. 내내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앞뒤 문맥을 모조리 잘라 먹은 말이긴 했지만, 아르펠은 용케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해했다.
“기록이 남지 않은 시대 말이지.”
옅은 간지러움이 올라오는 손끝을 괜히 한 번 꼼지락거리며 되물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한을 앞에 두고, 아르펠은 오랜만에 원작 소설의 설정을 떠올려 보았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온전한 생명이 아닌 ‘검’인 아르펠에겐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원작’에 대한 것들을 야금야금 잊어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갈수록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 이제 남은 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커다란 줄기 정도가 다였다.
‘기록이 남지 않은 시대…….’
그런 마당에 로한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표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기록이 남지 않은 시대’에 대한 것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기억 속 흐릿하게 남아 있는 먼 과거의 파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잘 모르겠어.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라면…… 조금은 알고 있지만.”
“그것도 괜찮아요.”
로한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들을 생각이 만만해 보이는 그를 위해 아르펠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옛날에…… 이 세상에 망령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괴물’과 싸웠대.
이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크게 뜨인 로한의 눈을 응시하며 남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안 그래도 기억이 어렴풋한지라 불쑥 생각난 것들을 최대한 빠르게 말하려는 의도 또한 없지 않았다.
“로한. 망령이 언제부터 생겨난 건지 알아?”
“…악신이 나타난 후였던 걸로 기억해요.”
“맞아. 사람들이 망령을 악신의 흔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하지만… 악신이 나타나기 전에도 세상은 평화롭지 않았어.”
신이 타락하기 전, 사람의 적은 ‘괴물’이었다. 이것이 아르펠이 유일하게 떠올린 ‘아주 먼 과거’에 대한 기억의 편린이었다.
“네가 원하는 답이었을지 모르겠네.”
“이걸로도 충분해요.”
끝으로 갈수록 작아진 목소리에서 옅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지 못한 데에서 온 미련이었다.
아르펠의 본체인 ‘검’은 신의 권능을 빌어 이 세상에 탄생했다. 그 뒤로 수백,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원래라면, 로한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타락한 데다가 혼까지 뒤섞여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그로서는 이게 한계였다. 로한과 만난 시점부터 이 세상에 대한 것을 보고 배우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가르쳐 주지 못했을 테지.
“레리아나까지 있을 때 물어볼걸.”
진중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로한이 장난스러운 말을 흘렸다. 자신이 말한 것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던 아르펠은 때마침 그의 낯에 고이는 환한 미소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뒤늦게 맞은편 자리로 눈을 돌린 아르펠은 텅 빈 곳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게.”
이제 보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로한과 레리아나가 한 번 말다툼을 시작하면 마차 안이 시끌벅적해졌으니까. 잡힌 손을 내려다보는 와중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리아나와 카시아는 중간에 들른 마을에서 방향을 틀었다. 로한이 렉시아의 제안을 듣고 마신전으로 향하고 있듯,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천신전에 가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에 마신전의 신관을 만나고 싶었다며 늘어놓은 목소리에는 미련이 담뿍 묻어났지만, 마차에서 멀어지는 발걸음만큼은 가볍고 단단해 보였다.
“신전에 돌아가면 뭐 하고 싶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는 완전히 풀어졌다. 아르펠은 어깨에 살며시 기대오는 로한을 피하지 않은 채 손을 움직였다. 쓰다듬듯 동그란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사르륵 훑어 주고…….
그러다 옅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들.”
신전을 떠나며 설렜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신전으로 돌아가며 해 보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로한의 낯에 은은히 서린 것이 그리움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아서일까,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새롭게 느껴지고 말았다.
***
그때까지는, 제법 평화로운 귀환길을 생각했었다.
“하…….”
로한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 안에 배인 투명한 감정이 여태까지 한 고생을 증명하는 듯했다.
<피곤해?>
“아뇨, 그것보단…….”
조금, 아니. 많이 짜증 나서요.
검으로 모습을 바꾼 채 로한의 손안에 잡혀 있던 아르펠이 입을 다물었다. 기분을 풀라며 다독여 주고는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를 위로해 줄 손이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눈을 돌렸다.
로한의 손에 의해 가볍게 정리된 복면을 쓴 괴인들이 앞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방금 전, 마차 앞에 달려들어 갑작스러운 습격을 감행한 이들이었다.
대놓고 뛰어든 주제에 실력은 평범했다.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는 정도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로한이 이러한 분노를 표출하는 게 뜬금없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이것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이 딱 다섯 번째였다. 지겨울 정도로 뻔한 공격을 하면서 가는 길목을 자꾸만 가로막아대니, 서서히 신경줄이 닳아갈 수밖에.
거기다 그를 불쾌하게 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끄윽…….”
“손 안 치워?”
이들이 자꾸만, 아르펠을 노리고 있다는 것.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남자 하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검을 붙잡고자 하는 적나라한 움직임에 로한이 이를 악물었다.
서늘한 살의가 서린 눈이 바닥을 나뒹구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대로 검을 틀어쥔 로한은 망설임 없이 남자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한순간에 꺼진 생명의 빛과 함께, 공중에 머물고 있던 손 역시 땅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로한.>
그렇게 모든 사람의 숨을 꺼뜨렸는데도 로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굳은 낯을 풀 수 없었다는 게 정확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작은 떨림을 자아낼 지경이 되어서야,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펠이 그를 불러세웠다.
다섯 번째 습격은 끝났다. 주위에 남은 인기척이 없는 것까지 꼼꼼히 확인한 아르펠은 곧장 모습을 바꾸었다.
짧은 빛에 둘러싸임과 동시에 사람으로 되돌아온 아르펠이 로한의 맞은편에 섰다. 흔들리는 시선을 붙잡을 겸, 창백한 볼 가까이 손을 뻗어 톡톡 두드려 주었다.
로한의 눈동자에 맴도는 떨림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잦아들었다. 볼에 번지는 서늘한 온기가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주기라도 한 것처럼.
“지켜줘서 고마워.”
서서히 초조함이 가시는 낯을 마주한 채로 아르펠이 속삭였다. 별다른 미사여구 하나 없는 단조로운 말이었지만, 로한은 그것만으로도 어느 때보다 안심하는 듯했다. 아르펠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건넨 것이었다.
잠시 후 아르펠과 로한이 탄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본 로한은 지금까지 습격해 왔던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뛰어난 것 하나 없는 실력, 발악하는 듯한 태도…… 아르펠을 노리는 듯한 움직임까지. 죽은 이들의 품을 뒤져보았지만 이미 본인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단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로한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소속을 추측할 수 있었다.
‘구원교…….’
죽을 걸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행동 하며 광기 어린 눈빛까지. 그러한 태도는 여태 여러 구원교의 지부를 부숴나가면서 수도 없이 마주친 것들이었다.
궁지에 몰린 만큼 이판사판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조용히 입술을 짓씹으며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혔다. 덩달아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 아르펠에게 더 이상의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150
그 뒤로 신전에 도착하기까지 두어 번의 습격이 더 이어졌다. 그쯤 되니 로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놈들의 마지막 발악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은 형편없어졌지만, 대신 점점 더 필사적으로 굴었다. 의도는 언제나 그렇듯 투명했다. 끝의 끝까지 아르펠을 노리려는 이들은 그렇게, 로한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아르펠을 빼앗으려 안간힘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아르펠’을 위기의 돌파구로 삼으려는 것만큼은 명확했다. 다시금 그 사실을 상기한 로한의 낯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침잠한 금빛 눈 위로 선명한 불쾌함이 넘실거렸다.
그런 반응이 신경 쓰인 건지 달래 주는 아르펠의 손길이 기꺼워, 얼마 가지 않아 굳은 표정이 스르르 풀리기는 했지만.
“가자, 로한.”
마침내 마차가 신전의 앞에 멈춰 섰을 때, 아르펠은 로한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신전을 떠났을 적과 별다를 것 없는 하얀 손이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로한은 그 손을 홀린 듯 붙잡았다. 우습게도 이 순간, 신전에 다시 돌아왔다는 게 강하게 실감이 났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마차에서 내렸지만 둘의 손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맞잡은 두 손은 서로를 끈끈히 붙잡았다.
“……하나도 안 변했네요.”
과거와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은 신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근심 걱정이 말끔히 날아갔다.
신의 힘이 닿은 이곳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바뀌는 일이 없을 것이다. 로한은 그 사실에 편안함을 느꼈다. 마검인 아르펠은 물론이고 그와 계약해 20살의 외형으로 고정되어 버린 자신 역시 비슷한 처지였으므로.
그래서였을까. 그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안쪽이 한가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퍼지는 왁자지껄한 소음에 당황스러워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허어억……!”
“저분이 로한 님이지? 맞지?”
“세상에,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신이시여.”
아르펠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멈칫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말소리가 귀를 타고 들려왔다.
누군가는 감동을 참지 못하고 탄성을 흘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느냐고 주변 사람을 붙잡아 물었고, 누군가는 눈부신 외관에 매료됐다. 또 다른 누군가는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두 손을 맞잡고 신을 부르짖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광기의 현장이었다. 신전의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인파에, 그런 그들이 내뿜는 기세까지. 로한이 급히 몸을 움직여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반면 아르펠은 관찰에 가까운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 보았다. 로한을 따라 뒤로 슬쩍 물러나면서도 담담한 빛을 띠는 눈은 연신 그들을 살폈다.
‘변했네.’
아르펠이 가볍게 평했다.
과거, 신전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신관들은 로한을 아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내보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의 로한은 그들에게 ‘보호해야 할 존재’에 가까웠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신전을 떠난 후 로한은 많은 구원교의 지부를 반파시켰고, 하마터면 참극으로 번질 뻔한 사건들을 무사히 마무리를 지었다. 셋이나 되는 간부를 직접 꺾기까지 했다.
신을 믿고 따르는 신관들로서는 그 행동이 고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로한은 지금, 신관들에게 영웅 취급을 받는 중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수도 없이 많은 시선이 로한에게 닿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으나,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로한의 반응만큼은 꽤 귀여웠으니까. 눈이 자꾸만 그를 향해 돌아갔다.
“로한 님!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저, 저 기억하십니까?”
그때, 득실득실한 인파 사이를 비집고 나온 남성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거구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 반짝거리는 눈을 한 이였다.
커다란 목청에 로한의 눈길 또한 그에게로 향했다. 난데없는 질문 때문인지 그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얼굴과 몸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음.”
작게 침음이 흐른다. 이내 로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름 모를 남자는 식물이 시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축 처졌다. 그럼에도 곰을 연상시키는 큰 몸이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만난 적 있어?”
“글쎄요, 잘…….”
아르펠이 넌지시 던진 질문에 로한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모른다는 눈치였다. 그에 아르펠의 입꼬리가 비죽 위로 솟았다.
로한과 다르게 그는 눈앞의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베모스 마을에 있던 신전에서 만난 신관. 로한을 동경하기라도 했던 건지, 보이는 족족 지나칠 정도의 관심과 호감을 표해 아르펠의 인내심을 긁어내렸던 이이기도 했다.
기억, 못 한단 말이지. 그 말에 우습게도 기분이 들뜨고 말았다.
로한 또한 저처럼 관심 없는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가 저 남자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당시 저 신관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무심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르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아르펠에 로한이 멍하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연신 끔뻑이는 두 눈에 의아함이 한가득 서린 채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싱그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르펠에겐 남자가 누군지 설명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므로, 그의 시선은 미련 없이 눈앞의 신관에게서 떨어져나왔다. 이는 아르펠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온 신경이 쏠려 버린 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베모스 마을에서 만난 신관, 할리온은 잔뜩 실망만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잠깐 지나갈게요.”
한동안 아르펠만 응시하고 있던 로한이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신전 앞에 늘어선 이들을 헤쳐 지나가기 위함이었다.
아르펠의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알고 싶다, 더 캐묻고 싶지만 여긴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라는 단순한 생각이 이어진 결과였다. 그것이 생소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던 로한을 기어코 움직이게 했다.
다행히 신관들은 웅성거릴지언정 로한의 말을 잘 들어주었고, 그렇게 둘은 순조롭게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로한 님!”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의 외침만 아니었더라면, 쭉 그랬을 것이다.
“혹시 검 한 번만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기실, 이는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요청이었다. 신에게 축복받은 이를 상징하는 것이 마검과 성검이다. 로한의 영웅담에 목을 맸던 사람들이라면 ‘로한이 마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문제는, 로한이 자신의 검인 아르펠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과 더불어…… 직전까지 몰아친 구원교의 습격으로 상당히 예민해진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민망한 웃음을 짓고 있던 얼굴이 한순간 차게 굳었다.
“흡……!”
그 얼굴을 코앞에서 본 한 여성 신관이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서릿바람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은 서늘한 낯, 온화하던 금빛 눈에 서린 사나운 기세.
누군가 조금이라도 더 건든다면 금세 살의로 변모할 감정이 주변에 있는 이들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웅성거리던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자 고요한 침묵이 주변을 휘감았다.
딸꾹. 누군가의 애처로운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검을 보여 주면 안 되냐고 했던 그 신관이었다.
“로한.”
사방에 내려앉은 정적을 비집고 한 줄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갑자기 돌변해버린 로한을 코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르펠이었다.
톡톡, 가볍게 건드리는 손길과 나지막한 목소리에 로한의 눈빛이 차차 풀려갔다. 손을 만지작거리고 볼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는 손에는 스스럼이 없었다. 맞은편에 있던 신관 하나가 이를 목격하곤 힉, 하는 소리를 흘리기는 했지만, 하여튼.
“로한 님!”
로한이 완벽히 정신을 차린 것은 대뜸 등장한 오웬이 급하게 자신을 붙잡았을 때였다. 그제야 원래의 빛을 되찾은 눈이 머쓱한 기운을 풍겼다. 본인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검은 따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가져오긴 어려울 것 같아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보여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조곤조곤 사과하는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굳어 있던 분위기를 빠르게 녹였다. 비록 신관 하나는 불쌍하게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뒤 로한은 당장 자신을 따라오라는 기색을 폴폴 풍겨대는 오웬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가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처음의 부름 이후로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오웬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니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거죠. 최근에 거슬리는 일이 좀 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봐요.”
그가 넌지시 건넨 말은 앞쪽에 모여 있던 신관들의 변호였다. 머쓱하게 볼을 긁적인 로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어투에 안심하기도 잠시, 오웬은 ‘거슬리는 일’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아르펠을 살폈다.
“왜 그러시죠?”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빤한 시선을 눈치챈 아르펠이 오웬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시선을 마주쳤으나 아르펠의 단단한 눈에선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어색하게 말을 돌린 오웬은 그에게로 향하던 시선을 거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본능적으로 답을 찾으려 애쓰던 것도 잠시, 오웬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뚝 끊어냈다. 굳이 추측하자면 저건 별생각이 없는 눈일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려니 받아들인 그의 눈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151
굳이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웬의 뒤를 따라가는 둘은 그의 발걸음이 디오넬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사람이 빼곡하던 밖과는 다르게 신전 안은 한산했다. 안을 돌아다니던 신관들까지 모조리 바깥으로 쏟아져 나간 모양이었다. 그 탓일까, 오가던 말소리가 멎자 주변이 금세 고요해졌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다였다.
“일은 잘 마무리됐습니까?”
“예, 뭐…… 뒷수습만 하면 됐으니까요.”
그 애매한 정적을 끝낸 것은 로한이었다. 대뜸 본론을 꺼내 버리는 불친절한 물음이기는 했으나 오웬은 어렵지 않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피데스 후작령에 속해 있던 베모스 마을. 그 마을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잘 마무리했냐 물은 것이다. 로한과 아르펠이 마을을 떠나고 난 이후의 일을 떠올린 오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드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가 슬쩍 아르펠을 돌아보았다.
“…….”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길을 눈치챘음에도 아르펠이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가볍게 눈썹을 까딱이며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결국 떨떠름한 낯을 한 오웬이 먼저 운을 떼었다. 그간 계속 신경 쓰이던 부분이기도 했으므로.
“…그때, 후작가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왜 물어보셨던 겁니까?”
“아.”
아르펠은 한 박자 늦게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 속을 더듬어보듯 눈을 데구루루 굴리긴 했지만, 하여튼 그는 ‘후작가’에 관한 물음을 입에 담았던 과거를 빠르게 떠올렸다.
‘후작가에 무슨 일은 없습니까?’
분명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은데.
큰 이유는 없었다. 하필 잠들어 있는 동안 꾼 꿈이 그와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황실과 엮인 것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로한에 대한 걱정이 배는 컸던 것 같다. 오웬 역시 로한이 신경 쓰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의 집안이 황제 때문에 풍비박산되기라도 하면 로한이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직접 확인했을 뿐이다. 당시에는 당혹스러운 티를 내며 어설피 답을 한 오웬이었지만, 가늘어진 눈을 하고 다시금 그를 살피게 된 아르펠은 확신했다. 아무 일도 없었군.
“안 좋은 꿈을 꿨었습니다.”
무슨 꿈을 꿨는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간단히 답했다.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즉 소설 속에서 벌어진 사건인 이상 설명할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오웬은 눈 깜짝할 새에 얼빠진 낯이 되었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게 안 봐도 뻔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마검이라 감이 좋은 건가?’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펠이 ‘신의 권능’을 받은 검만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신과 연관점이 있다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꿈으로 조금이지만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다든가. 추론하는 과정은 하나 같이 틀렸지만 얼떨결에 사실과 비슷한 결론을 내고 만 그였다.
물론 오웬은 머릿속에서 부풀어가는 각종 추측을 입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약간의 찝찝함이 남았을 뿐이다. 만약 베모스 마을의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지 않고 더 커지기라도 했다면…… 오웬의 미간이 조용히 좁혀 들어갔다.
‘망령이 들끓는 대지’와 비슷한 기운을 풍겼던 그곳이 어떤 미래를 맞았을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면, 피데스 후작가는 황제의 문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전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수작을 부리는 그의 이면을 알고 있던 오웬이었기에 그 사실을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대신해 맨 처음 이 주제를 꺼내 들었던 로한에게 친절히 답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느냐고 물었었지.
“다친 사람은 꽤 있었습니다만, 신관들이 나선 덕분에 치료는 금방 끝났습니다. 전투로 무너진 곳이 많아 현재는 인력을 동원해 재건하는 중입니다. 그때까지만 그들에게 살 곳과 일거리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오웬이 그와 함께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들의 신앙의 경우, ‘잘못된 상식’만 바로잡는 선에서 끝내기로 했다고. 오랜 시간 동안 마을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린 것을 당장 뒤집어엎기에는 무리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보답으로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보답이요?”
“이왕이면 좀 크게 불러 보십시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입에 담고 있던 오웬이 둘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뜬금없이 보답을 운운하는 건 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한이 짐짓 당황한 얼굴을 했다. 물론 동요는 짧았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웃으며 답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집안의 누군가가 제발 한 번만 여쭤봐 달라며 애원을 해대서요. 예의상 말은 꺼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호한 거절이었으나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오웬은 미련 하나 없어 보였다. 로한이 거절할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르펠이야…… 로한의 의견이 곧 그의 의견이나 다름없을 테니 논외로 치고.
애원한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환히 보였다. 피데스 후작가에서 자신들을 맞아 주었던 리테란 피데스겠지. 그 정체를 눈 깜짝할 새에 추측한 로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리테란과 오웬,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한결같았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웬의 발걸음이 덜컥 멈춘 것은 그때였다. 로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익숙한 주변 광경을 살필 수 있었다.
신전에 머물 적에도 종종 들르고는 했던, 디오넬이 주로 쓰는 기도실. 밖을 지키고 있겠다는 듯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오웬을 뒤로하고, 로한은 아르펠과 함께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커다란 문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
“오랜만입니다. 두 분 다 잘 지내셨나요?”
나긋한 목소리 한 줄기가 인사를 건넸다. 이윽고 과거에 수도 없이 봐 왔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도실 안에 마련된 소박한 테이블 하나와 여러 개의 의자, 그 위에 놓인 찻잔까지.
곧 로한과 아르펠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세 사람 사이에 있는 짧지 않은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익숙한 행동이었다.
“네, 저희야 잘 지냈죠.”
로한이 부드러이 답했고,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 나누는 인사는 그렇게 물 흐르듯 지나갔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두 분이 겪었던 일들을 꼭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이미 듣지 않으셨나요?”
“하하,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직접 듣고 싶은걸요.”
용병 길드와 협업하고 있는 신관들에게서 수도 없이 둘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디오넬은 웃는 낯으로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물었다. 은근히 뻔뻔한 태도가 과거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결국 로한은 여태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렴 어떠할까. 말을 내뱉는 로한도, 그것을 들으며 이따금 추임새를 넣는 디오넬도,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 종종 찻잔을 기울이는 아르펠도 이 시간을 마다하지 않았다. 묘하게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현재 구원교가 아르펠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한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구원교와 황제, 그들을 둘러싼 음모. 디오넬의 미간에 간혹 주름이 생기는 것 또한 그래서였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니만큼 전해 듣지 못한 소식이었기에 디오넬의 반응은 더 격했다.
황실의 연회에서도 한 번 있었던 일이다. 구원교가 추구하는 ‘목표’와 아르펠 사이에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
“혹시 다 죽이신 건…….”
“아뇨, 네다섯 정도는 남겨 두었습니다.”
“다행이네요.”
흘끗, 로한이 아르펠을 향해 눈짓했다. 귀신같이 그 시선을 알아챈 아르펠은 그의 답을 대신하듯 디오넬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눈치껏 그 의미를 알아챈 디오넬은 느슨히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둘이 돌아가면 아르펠로부터 넘겨받은 이들을 심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한 상념이 멎은 것은 로한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그게 퍽 의외의 말이었던 탓도 있었다.
“……혹시, 황실이 신을 따른 적이 있습니까?”
이에 로한은 설명을 덧붙였다. 카시아와 나누었던 대화 중 수면 위로 오른 ‘신의 안배’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황실의 역사까지. 처음만 하더라도 당혹스러워 보이던 디오넬의 낯이 차차 진지해져 갔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가설이네요.”
“그럼….”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기록이 남은 게 없으니 저 또한 아는 바가 없고요. 이건…… 마신께 직접 대화를 청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요하면 이 기도실을 빌려주겠다는 말에 로한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아르펠은 디오넬에게 두던 눈을 홱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로한에게서 옅은 감정의 파편이 퐁퐁 솟아 나오고 있었다.
“……로한?”
그 감정의 정체를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을 뿐이지.
“아.”
부름에 답하듯 짧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기실 감정에 감응하지 않더라도 그의 상태는 곧잘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달싹이는 입술, 그리고 옅은 떨림을 자아내는 눈이 그것을 내비치고 있었으니.
로한은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디오넬 역시 그 이상을 눈치챘는지 걱정이 반쯤 섞인 의아함을 풍겼다. 양쪽에서 달라붙는 시선, 그리고 달래듯 도닥이는 아르펠의 손길을 인지하니…… 로한은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마신께선 왜, 아르펠을 구하지 않았나요?”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이의 투정을 닮은 말을 대뜸 던져 버린 것은.
152
조금의 원망, 의혹, 혼란…….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서로 뒤엉킨 감정들이 담뿍 묻어 나오는 한마디였다. 본인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아르펠이 멈칫하며 로한을 돌아보았다.
한편 디오넬이 어딘가 이상한 반응을 내비쳤다. 두 눈동자는 허를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잘게 떨렸으며, 이윽고 내뱉은 숨결은 올 게 왔다는 듯 묵직했다.
“오시는 길에 신관들을 만나 보셨습니까?”
“네. 만나긴…… 했죠.”
한 박자 늦게 운을 뗀 그가 로한을 향해 되물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가 싶다가도 주제의 연관성을 알기 어려운 물음이라 로한의 눈이 흐릿해졌다.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관들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 아연한 반응에 디오넬의 입꼬리가 옅게 휘었지만, 그의 말이 다른 곳으로 튀는 일은 없었다. 못다 한 말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럼 느끼셨겠군요. 그들 중 몇몇은 저희 쪽 신관이 아니라는 걸.”
신에게서 내려받은 힘, 성력과 마력. 그것은 본디 몸 안에 내재된 힘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면 서로 간에 인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로한은 일반 신관에 비해 배는 예민하게 상대의 힘을 느끼고는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받은 힘이 ‘축복’이라는 상위 개념이기 때문이고, 둘은…….
로한은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아르펠을 조용히 눈에 담았다. ‘아르펠’이라는 존재 자체가 두 번째 이유나 다름없었다. 성력에 취약한 데다 실제로 그 힘으로 인해 다쳤던 상황이 겹쳐지니 로한이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을 아느냐 물었던 이름 모를 신관에게서도 분명 성력이 느껴졌지. 로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디오넬이 마저 말을 이어 갔다.
“원래라면 이런 대대적인 교류를 하는 일도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정세를 바로잡을 방법이 필요했으니까요.”
……불안?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로한은 예상치 못한 표현에 미간을 좁혔다. 그런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디오넬이 말했다.
“천신께서 잠드셨습니다.”
“그게, 무슨…….”
신이 잠들었다. 실로 불길하기 그지없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덤덤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르펠조차 순간 제 귀를 의심하고 눈살을 찌푸렸을 정도로.
“이게, 제가 로한 님께 드릴 답이기도 합니다.”
답. 그 단어를 로한은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디오넬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것이 마신이 아르펠을 구하지 않은, 아니, 구하지 못한 이유였노라고.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로한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미처 끝을 맺지 못한 애매한 되물음이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잠들었다는 건.”
“말 그대로입니다. 깊은 잠에 빠지셔서 인간 세상을 살필 여력이 없으신 거죠. 이후의 이야기는…… 저 또한 마신께 전해 들은 것에 불과합니다만.”
디오넬이 가볍게 숨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어딘가 무겁고 두루뭉술한 이야기의 서두가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는 거대한 굴레가 있다고 하죠. 자연의 이치, 어겨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규칙, 뭐 그런 것들……. 마신께선 이러한 속박이 신에게도 통용된다 말씀하셨습니다. 천신은 이를 어겨 잠에 빠진 거라 하시더군요.”
속박, 규칙, 이치.
흔히들 사람들이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신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로한이 디오넬의 말에 혼란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마신과의 대화를 나누며 들었던 여러 정보 덕분일까.
이를테면, ‘무(無)의 의지’라던가……. 그 의미심장했던 단어를 떠올린 로한이 빠르게 납득했다.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래 신들에게는 일종의 기준점이 있어서, 그 기준에 맞는 일이어야만 세계에 직접 간섭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계가 허락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일이어서는 아니 된다, 천신께서 어긴 규율은 그것이었던 듯합니다.
덧붙이는 목소리가 쌉싸름했다.
“매우 거창한 말처럼 들립니다만… 사실 ‘세계가 허락한 존재’라는 건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각종 동식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칭하는 말이지요.”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신이 세상에 개입할 수 없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분들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한다면…… ‘악신’. 그 한 가지일 겁니다. 억지로 손을 댄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네.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당시 세계는 속이 좁고 쪼잔하기 그지없다는 둥 여러 불평이 덩달아 붙어오기는 했으나, 디오넬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신이 이런 부분에서는 참 특이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으므로.
“기준이 참…… 별로네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디오넬을 대신해 로한이 중얼거렸다. 원망보다는 허탈함이 배로 느껴지는 어조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천신이 깊은 잠에 빠진 건 그가 ‘규칙’을 어긴 대가였다. 그리고, 그 ‘규칙’을 어긴 건…….
한 장면이 로한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거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뇌리에 선명히 파고들던 진언. 직후 뻥 뚫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벼락. 그곳을 중심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성력.
와중에 아르펠만은 교묘히 비켜나가던 그 압도적인 힘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일 게 분명했다.
그날의 일은 인간으로 인해 벌어졌다. 그것에 멋대로 개입해 버린 것도 모자라 인간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과거, 그 일에 마신께서 개입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는 끊이지 않는 망령과의 전쟁에서 판도를 뒤집을 중요한 열쇠가 될 존재이지요. 그런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잠이 들어 버린다면 아마…….”
차차 말이 사그라들다 끝내 모호하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로한은 생략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처 사라지지 않은 조그마한 원망이 마음 한구석을 들쑤시긴 했으나, 머리로는 마신의 선택을 이해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신이 ‘신’이었다 하더라도 비슷한 선택을 할 것 같아서.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이 잠시 아르펠을 향했다.
“하하…… 당사자가 아니니 마무리가 엉성하네요. 그래도, 직접 대화를 나눠 보신다면 더 자세한 설명을 들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신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시고요.”
“……네.”
길게 이어지던 대화가 마침내 매듭지어졌다. 대화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아르펠은 그 마지막 말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검은색 눈동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빤한 시선에 반응하듯 느린 답을 꺼내놓았다.
원래라면 딱히 상관없다고 대답할 셈이었다. ‘신이 어겨서는 안 되는 규칙’까지는 집중해 들었지만, 이야기의 초점이 자신으로 옮겨 온 순간부터 아르펠은 흥미를 잃었으므로.
그런데도 그가 본인의 생각을 꺼내 놓지 못한 것은, 옆을 지키고 있는 로한 때문이었다.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를 인지한 아르펠이 애써 튀어나오려던 말을 내리누른 것이다.
“그럼,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행히 선택은 옳은 듯했다.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전만큼 속상해 보이지는 않는 로한에 아르펠이 소리 없이 안도했다. 둘의 대화와는 영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그였다.
***
“여기도 되게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미묘하게 들뜬 기색이 어린 목소리에 아르펠이 느릿하게 답했다. 위아래로 끄덕이는 고개는 덤이었다.
무사히 계획을 끝마친 마친 로한과 아르펠은 앞으로 묵게 될 방에 들어선 상태였다. 신전에서 생활하는 동안 별일이 없다면 이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을 청하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하나도 안 변했네.”
사실 새롭게 느낄 것도 없었다. 로한이 ‘오랜만’이라고 표현했듯, 그들에게 주어진 방은 익숙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신전을 떠나기 전 항상 둘이서 함께 사용했던 그곳이었다. 드물게 아르펠의 입에서도 짧은 감상이 흘러나왔다. 깨끗하게 정돈된 이불보를 스치듯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로한은 그 모습을 고요히 응시하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가만히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가려진 입술 끝이 어찌할 새도 없이 위로 치솟았다. 저런 반응을 내비치는 아르펠은 여전히 새롭고, 또 귀여웠다.
몇 분 전, 웃는 낯으로 다시 둘을 맞이한 디오넬은 이렇게 말했었다.
‘방은 계속 함께 쓰시는 거죠?’
질문의 탈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확신이었다. 온화하게 휘어진 눈동자에 든 것은 애정뿐만이 아니었다. 다 큰 자식이라도 보는 것처럼 묘한 뿌듯함이 뒤섞여 있는 것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떨떠름하게 그렇노라 답한 것도 잠시였다. 로한은 얼마 안 가 그가 내어준 방을 보고 더없이 만족했다. 계속해서 둘의 방으로 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므로.
‘그럴 줄 알았어요.’
혼잣말인 것 같기도, 감탄사인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반응을 내비친 디오넬이었으나, 로한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렴, 디오넬은 그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찍 잘 거지?”
“……음.”
가만히 침대 위를 쓸어보던 아르펠이 문득 운을 떼었다.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단단한 음성이었다. 비록 몇 초도 되지 않아 풍랑이라도 맞은 듯 그의 두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헤어지기 전, 디오넬은 등을 돌리려는 로한과 아르펠에게 내일은 아침 일찍 ‘손님’이 찾아온다 전했다.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아 일찍 자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분명 로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끝이 축 처진 로한의 눈썹을 보고 아르펠이 당황했다. 은근히 서러워하는 것만 같은 반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153
“뽀뽀도 하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껴안고 침대 위도 뒹굴거리고 싶은데…….”
“…그건.”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로한은 작은 목소리로 하고 싶은 것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아르펠이 티 나게 눈을 떨며 머뭇거렸다. 물기 어린 눈을 마주하니 말문이 턱 막히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로한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아이 취급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로한의 애처로운 얼굴을 보고 고장 나버린 아르펠이 멋대로 시작한 오해나 다름없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애매하게 공중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는 손이 당혹스러운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안 되는데. 일찍 자야 내일 덜 피곤할 텐데. 가뜩이나 먼 길을 달려왔으니 푹 쉬어줘야…….
그러나 다음 순간, 로한이 입술을 그려 물며 눈을 내리깔자 아르펠의 뇌리에서 이어지던 상념이 뚝 끊겼다. 눈꺼풀 아래 그렁그렁 매달린 미련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에 그의 시선 또한 이리저리 요동쳤다.
“……한 시간만.”
결국 아르펠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두루뭉술한 허락이었다. 기어코 본능이 이성을 이겨 먹은 것이다.
동시에 로한의 낯에도 선연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배시시 머금은 웃음은 여전히 예뻤고, 귀여웠고,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워질 정도의 애정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에 담으니 아무렴 다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마저 들고 마는 것이다.
아르펠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번졌다. 저 얼굴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제 앞에 수없이 늘어선 세월을 감히 예측해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펠은 알아야 했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은 세 시간이 되기 쉽다는 것을.
***
“…안 졸려?”
“응, 괜찮아요.”
옆에 선 로한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지만 답은 한결같았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건 여전했다.
그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 둘에겐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던 곳을 긴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아와서 그런가.
로한은 유독 들떠 보였고, 그 기색은 그의 손길에도 잔뜩 묻어 나왔다. 처음엔 산뜻하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더 깊어지고, 또 진득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끈질긴 움직임에 휩쓸리고, 그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애정에 파묻혔다. 결국 어느 순간이 되어선 아르펠 역시 적극적으로 응했고, 그때부터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조용히 손을 든 아르펠이 입술을 문질렀다. 입을 맞추다가, 서로를 껴안고 침대에 누워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또 어느 순간엔 불이 붙어서 잡아먹을 듯 키스하고…….
무심코 그 과정을 세세하게 떠올린 그의 귀가 옅은 붉은빛을 띠었다. 그때의 감촉이 여전히 입술에 남은 것만 같았다. 쑥스러움일지 짙은 만족일지 모르는 감정이 기분을 술렁이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르펠의 신경을 앗아가는 것이 있었다.
“왜…….”
“네?”
“아니. 아니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더 생기있어진 것 같은 로한이었다. 이유를 찾지 못한 아르펠의 낯에 의문이 어렸다.
분명 딴짓을 한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평소보다 적게 잤을 텐데, 걱정했던 것치고 로한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반질반질하기만 한 우윳빛 피부를 빤히 응시하다 눈을 돌렸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그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니 아르펠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로한이 시들시들했다면, 지난밤에 말리기는커녕 홀라당 넘어가 버린 제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밖이 많이 소란스럽네요.”
“손님이 온다고 했으니까.”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시, 로한은 활짝 열린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은은히 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에 따라 흔들리는 수풀, 간혹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까지.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 광경에 희미한 웅성거림이 뒤섞였다.
“…….”
소음이 길어질수록 로한의 낯은 차츰차츰 굳어갔다. 그 위로 내려앉는 불쾌함을, 아르펠이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로한이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디오넬이 말하길, 오늘 신전에 방문한다던 손님은…….
“가지 말까?”
황실의 제1기사단장이었으니까.
오스카의 죽음으로 최측근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켰다. 제국에 최악의 위기가 불어닥친 것처럼 꾸미고 백성들을 부추긴 것이다. 황실과 신전 양측이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나날이 커져 갔다.
그 결과가 오늘 신전에 방문하는 기사단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으로 유지되는 신전은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황제를, 황실을 혐오하던 로한이었다. 기어코 신전 안에 제 세력을 밀어 넣은 황제가, 그를 따를 게 분명한 기사단장이 달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정말로 그런다면 로한의 평판이 떨어질 테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아니에요. 그래도 가야죠.”
하지만 로한은 고개를 저었다. 짧은 새에 담담해진 표정은 얼마 남지 않은 기사단장과의 만남을 그려보는 듯했다.
기특해라. 그의 볼에 닿아있던 아르펠의 손이 서서히 올라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을 때마다 한 올 한 올 예쁘게 반짝이는 것이 손가락 사이로 물결쳤다.
아르펠은 알지 못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어른스러운 표정에 와그작 금이 가버리라는 사실을.
***
“안녕하십니까. 라프온입니다.”
황실의 제1기사단장, 라프온 크룸. 그의 첫인사는 많은 신관들에게 괜찮은 인상을 남겼다.
“신관들은 일평생 신께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신전에 들어올 때 성을 버린다고들 하더군요. 비록 전 황실의 사람이지만,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여러분의 헌신적인 마음가짐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을 담은 말투, 신전의 문화를 이해하고 몸소 실천하는 태도까지. 그 때문일까, 뒷사정을 모르는 평신관들 중에는 라프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꽤 많았다.
신관들 중에는 귀족 역시 있었지만, 그 수는 극소수였다. 있다고 하더라도 작위가 낮은 귀족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했다. 제국의 정상에서 군림하는 고위 귀족들이 자신의 성과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신전에 틀어박힐 리 없었으므로.
오웬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였을 뿐이다. 그의 예전 신분을 알고 있는 자들이 공공연하게 괴짜 취급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때문에 신관들의 대부분은 평민이었고,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 일부 귀족들은 직급도 낮고 귀족도 아닌 평신관들을 무시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황제의 명을 받고 직접 찾아온 라프온은 그러지 않았다.
제1기사단장이라면 상당히 높은 고위 귀족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라프온은 스스럼없이 평신관들에게 고개를 숙였으며, 신전의 문화를 따랐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은 자신의 신분을 신경 쓰지 말아 달라며.
“생각보다 괜찮은 분인 것 같아.”
“그러니까. 저번에 고개 숙이시는 거 봤어? 난 그거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어. 안 말려주셨으면 땅에 머리를 박았을지도 몰라.”
“저런 분이라면 신전에 계속 계셔도 괜찮지 않을까?”
귀족, 그리고 황실에 대한 생각이 그다지 좋지 못하던 사람들도 차차 라프온이라는 사람에게 물들어갔다. 평신관들 사이의 여론이 한쪽으로 쏠렸다. 고위 신관들이 에둘러 너무 친밀하게 굴지 말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지경이 된 것이다.
평신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지만, 여느 사회가 그렇듯 신전 역시 고위 신관들보다 평신관들의 수가 배는 더 많았다. 평신관들은 신전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신전 내의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아는 존재였다.
“영악한 새끼.”
순식간에 신전은 라프온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로 돌아갔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웬은 드물게 욕까지 섞어가며 라프온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그간 황제가 부려왔던 더러운 술수를 알고 있는 소수의 신관만이 라프온을 경계할 따름이었다. 그마저도 협력을 위한 사절이라는 탈을 쓰고 찾아온 이였기에 티를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라프온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안녕하십니까, 로한 님. 아르펠 님.”
“예.”
“…….”
“볼 일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다름 아닌 로한이었다.
그들의 사이는 첫 만남부터 틀어졌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이명이 로한의 이름 앞에 붙은 이상, 그는 잠시나마 라프온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야만 했다. 그렇게 디오넬을 사이에 끼고 삼자대면을 하는가 싶었는데.
‘혹시 검은 가져오시지 않은 겁니까?’
티 나지 않게 로한을 위아래로 살핀 라프온은 대뜸 그런 말을 꺼낸 것이다. 로한은 미간을 구길 뻔한 것을 간신히 내리누르며 답했다.
‘제게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많을 수밖에 없지요. 무려 마신께서 내린 축복을 받으신 분 아닙니까. 저 역시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습니다.’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매끄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로한은 확신했다. 이놈은 뱀이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친절한 듯 굴지만 속은 간교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검의 행방을 꼬집어 물어놓고서 존경하고 있다며 포장하는 솜씨 또한 그러했다.
‘아, 혹시 그분은 안 계신가요?’
‘그분?’
‘예. 이래 봐도 제가 영웅담 같은 걸 좋아하는지라…… 로한 님의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소문으로 접했습니다. 항상 신관 하나와 같이 다니신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부끄럽지만, 소문이 진짜인지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검에 대한 화제를 매듭짓자마자 기어이 아르펠까지 이야기의 화제로 삼는 행동 또한 마찬가지였고. 조용히 말을 듣던 로한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 순간 눈치챘다. 이놈은, 아르펠이 자신의 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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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좋지 않던 라프온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닥까지 처박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티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부득불 아르펠에 대한 주제를 입에 담던 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당장만 해도 그랬다. 인사를 하면서도 자꾸만 한쪽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한두 번도 아니고, 나날이 반복되는 적나라한 행동에 로한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결국 지금에 와서는 라프온을 대놓고 경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날 선 살기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그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다.
“아르펠 님.”
로한은 웬만해선 아르펠과 붙어 다니려 했지만, 그게 온종일이 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둘이 떨어지는 시간이 잠깐이나마 존재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라프온은 그 틈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아르펠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고개를 돌렸다고 표현하기에도 애매한, 짧은 멈칫거림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이를 모르지 않은 라프온이 티 나지 않게 눈썹을 구겼다.
“웬일로 로한 님과 같이 계시지 않으시네요.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
끄덕. 대꾸는커녕 성의 없는 고갯짓만이 돌아왔다. 다시 한번 라프온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는다면 대개 왜 이 자리에 없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설명해 주기 마련이다. 말하기 곤란한 일이면 급한 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는 둥, 간단한 변명이라도 내뱉을 테지.
하지만 아르펠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에게 아무런 유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와 대화하기 싫으신가 보네요.”
꺼림칙하고 짜증이 솟구치는 것과 별개로, 저 무감정한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자존심에 금이 갔다. 빤히 아르펠을 바라보던 라프온이 기어이 직설적인 말을 입에 담은 것도 모두 다 그 때문이었다.
싫어하는 티라도 내면 모른다. 아르펠이 자신을 마주칠 때마다 가시를 세워대는 놈이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겠지. 하지만 아르펠에게선 그런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네.”
“……하하.”
지금만 해도 봐라.
아르펠은 딱히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가감 없이 내보였다. 이는,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번거로움. 그는 입을 열고 말을 고르는 과정 자체를 귀찮아 하고 있었다.
라프온은 한 가지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로한과 대놓고 대립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럴 때가 아니고서야 아르펠이 제게 뚜렷한 반응을 내보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좋게 말해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이었다. 라프온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옅은 허탈함이 배인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아르펠 님은, 참…….”
결국 라프온은 미처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번뜩이는 눈이 상대를 긁어내리겠다는 의지로 가득 찼다.
‘그는 인간이 아니야.’
머릿속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는 말했다.
“인간 같지 않으시군요.”
자신의 사감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감상까지 다분히 깃든 한마디였다. 이게 상대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자그마한 가시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라프온이 그 말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일주일 전, 갑작스러운 황제의 부름을 받았을 때였다. 하늘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야심한 시각, 비밀리에 내려진 명령에 따라 알현실로 향하고 있던 그는 생각했다.
이건 기회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오스카가 반역죄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황궁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다르게 말하면, 한 자리를 톡톡히 차지해낼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내, 경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마침내 황제를 마주했을 때 라프온은 희미한 이질감을 느꼈다.
황제는 평소와 같이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그 웃음이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워 보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이유 모를 긴장감으로 심장이 꽉 조였다.
‘경청하겠습니다.’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를 시작으로 황제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마치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같았으나, 그 내용은 아니었다.
여태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거대한 정보가 라프온의 뇌리에 쏟아져 내렸다. 어렵사리 그 정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누군가는 황제의 행적을 잔인하다 폄하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일을 행해 온 황제에게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여태 그를 따라왔던 이들 중 일부는 사무치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몰랐다.
그러나, 라프온은.
‘아아…….’
감명을 받았다.
황제의 행보에 평가를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사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휩쓸어, 벅차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으므로.
황제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 그의 옆에 서 있어도 적합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명확한 신분 하나 없는데도 황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 같잖게 굴었던 놈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혔다.
이제는 정말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라프온은 황제의 옆을 차지했고, 황실에서 그 다음가는 권력을 얻었다.
비록 내키지 않아 했던 신전에 직접 걸음을 해야 하긴 했지만…… 이것 또한 명령의 일환이었으니 군말없이 따랐다. 미리 전해 들었던 계획대로 행동하자 신전 내에서의 일은 우스울 정도로 쉽게 풀렸다.
이는 라프온에게 여러 감상을 안겨다 주었다. 규모가 크고 힘이 강하면 뭐하는가. 우스울 정도로 잘 휘둘리고, 정치와 동떨어져 있는데. 폐하께서 하셨던 말은 무엇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감상 하나를 꼽아보자면…….
“그렇군요.”
눈앞에 있는 아르펠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이 아닌 마검. 황제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듣고 있던 라프온조차 순간 멈칫할 정도의 이야기였다.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감히 황제의 말을 불신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다만, 의심의 여지 없이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펠을 처음 보았을 때 혼란을 느끼기는 했다.
‘저게 검이라고?’
사람으로 변하는 검이라니. 그 어떤 것보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라프온은 아르펠이 ‘검’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게 끝입니까?”
“…? 예.”
무덤덤한 보라색 눈동자 위로 뭘 더 말해야 하는 거냐는 의문이 묻어났다.
라프온은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무감정한 존재였다. 이를 깨닫고 나니 아르펠을 볼 때마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괴리감이 느껴지고는 했다.
본인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부분을 은연중에 꼬집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본인에게조차 별 관심이 없는 듯한 일관적인 태도가 우습지도 않았다.
아마, 그가 ‘감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일 것이다.
로한. 그 짜증 나는 이름을 천천히 입안에서 굴려본 라프온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빌어먹게도 거슬리는 놈이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입꼬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
“로한 님과 같이 다니시는 신관 분 말입니다.”
“아, 아르펠 님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분.”
그날 이후로 라프온은 제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진 평신관들을 위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으러 다녔다. 한 사람에 대한 정보만 캐물으면 속내가 너무 적나라하니, 다른 가벼운 이야깃거리도 섞어서.
“친해지고 싶은데 낯을 많이 가리시는 것 같아서요.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법이 없더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던 갈색 머리의 여신관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귓가를 웅웅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라프온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풀어야 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는 이 상황을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쯧, 경박하기는.’
황제 폐하의 명령만 아니었더라면 천한 신분의 놈들과 어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불쑥 치고 올라오는 거북함을 애써 내리눌렀다.
정보를 캐내거나 신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등, 그들과의 친분이 아주 나쁜 결과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므로.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가차 없이 치워버릴 이들이었다.
“저희도 처음엔 엄청 어려워했거든요.”
“…그럼 지금은?”
“지금은…… 어렵다기보단 다들 인정한 분위기예요.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라고요. 당장 가까워지려 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다가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라프온 님은 무척이나 친절하시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아르펠 님도 마음을 여실 거예요.”
신관이 조잘조잘 말을 이어나갔다. 쓸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라프온이 정말로 아르펠과 친해지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여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실 아르펠 님도 알고 보면 되게 착하신 분이거든요.”
“……착하다고요?”
“네! 꽤 유명한 일화도 여러 개 있어요. 새로 들어온 신관들은 모르지만, 오래전 두 분이 신전에서 머물 때 있었던 신관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얘기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 감정 없는 금속 덩어리가 착하다고?
그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해 무심코 되묻고 만 라프온이 뒤늦게 여인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그녀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신나게 말을 이어가기만 했다.
그녀는 그 ‘일화’라는 것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괜찮은 정보일까 싶어 집중하던 라프온의 낯이 시시때때로 서늘해졌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예…… 그렇네요. 의외로 참, 친절하시군요.”
애써 호응하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신랄한 욕을 쏟아냈다. 멍청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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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긴 시간을 관찰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라프온은 ‘아르펠’이라는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것의 모든 행동의 원인에는 로한이 있었다. 이는 여신관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로한이 없었더라면 도움을 주기는커녕 조금의 관심도 내비치지 않은 채 지나갔겠지.
자신을 마주 보는 내내 지었던, 그 빌어먹을 무표정으로.
“……혹시.”
“네?”
그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한 가지 충동이 라프온을 부추겼다. 아르펠도 꽤 좋은 사람이라며 미담을 들려주었던 여신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정체를, 진실을 알면 어떻게 되려나. 믿지 않으려 할까, 배신감을 느낄까, 그 존재를 혐오할까. 그녀가 내어줄 답이 궁금했으나 애써 참아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웃는 얼굴로 대화를 끊어낸 라프온은 아리송해 보이는 여신관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안돼. 안되지.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몇 번이고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주먹을 꽉 쥐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쓸데없는 짓은 벌이지 말라고. 넌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그리 경고해왔던 단호한 목소리를, 라프온은 기억하고 있었다.
***
한편, 라프온이 아르펠에게서 떨어져 나간 직후. 약속이라도 한 듯 그즈음에 아르펠의 곁으로 되돌아온 로한이 빤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멀뚱멀뚱하기만 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없었던 동안의 일을 알 수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묻어나는 것이라고는 자신을 반기는 기색이 다였던 아르펠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의중을 가늠하기를 포기한 로한은 마음속에서 들끓는 의문을 직접 입에 담아보기로 했다.
“라프온, 만났어요?”
“응.”
“하…….”
일렁이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질문에 망설임 하나 없는 답이 돌아왔다. 잠시 멈칫한 로한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태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거슬렸다. 아르펠의 정체를 짐작하고 그에 대한 것을 캐보려는 듯 시시때때로 접근하는 놈도, 아르펠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도.
그가 라프온을 길바닥의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고, 불안한 건 불안한 거였다.
“앞으로는 혼자 두고 안 갈게요.”
“정말?”
“네. 약속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지난 며칠간 이어졌던 일이 드디어 끝에 다다랐으니까.
안 그런 척하던 아르펠도 그 호언장담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자꾸만 빈 시간에 찾아오는 라프온이 귀찮았던 건지, 저가 없어 외로움을 느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한은 후자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생각은 자유로운 거니까.
“네가 없는 게 싫어서 그래.”
“……티 났어요?”
“조금?”
속이라도 읽은 듯 이유를 밝히는 아르펠만 아니었더라면, 혼자만의 생각의 나래를 펼쳐 나갔을 것이다. 아르펠에 닿기 전 우뚝 멈춘 손이 짧게 당황을 표했다.
감정이라도 새어나갔나. 추측되는 바가 없지는 않아 작게 헛기침하고 볼을 긁적였다. 민망함이 한가득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르펠의 손을 다시 붙잡은 로한이 부드럽게 그를 이끌었다. 약한 힘에도 순순히 로한의 손길에 따라 걸음을 옮긴 아르펠은, 이윽고 그가 조곤조곤 내뱉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오웬이 그러더라고요. 그 사람, 욕심이 꽤 많다고. 아르펠도 알고 있었죠?”
“응. 보였으니까.”
누군가가 품은 부정적인 감정. 그것은 아르펠의 눈에 곧잘 읽히고는 했다. 긍정, 부정을 따지지 않고 감응할 수 있던 로한과는 다르게 전자는 그 감정이 부정에 국한되어 있었고, 강렬해야 한다는 조건이 껴있긴 했지만…….
라프온의 감정은 이를 모두 만족하여 아르펠에게 닿았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살갑게 웃는 자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탐욕스럽다는 것을.
“황실에서도 유명했대요. 오스카와 악연이 깊었나 봐요. 눈앞에서 깔보고, 모욕을 주고, 험담하고…… 음, 조금 일방적인가. 황제의 눈에 들고 싶었는데 그 자리를 신분이 불명확한 놈이 차지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겠죠.”
“음.”
“평소 행실에 문제가 많아 평판도 좋지 않더라고요. 그동안 신전 측에서 뒤를 캐봤다는데, 보니까 잡고 흔들 수 있는 게 제법 있어요. 이걸 폭로하면 라프온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신전에서 내쫓을 수는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내쫓기로 했어?”
아르펠은 줄줄이 이어지는 로한의 말에 이따금 짧게 소리를 내며 반응해 주었다. 그가 말문을 연 것은 로한의 마지막 말, 신전에서 내쫓을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이 들렸을 때였다.
그런 아르펠을 보며 로한이 쓰게 웃었다.
“아니요.”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그들이 끊어내야 할 것은 황제의 세력이었지, 라프온이라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간 신전에서 모은 정보를 동원해 라프온을 쫓아내봤자 얼마 가지 않아 황제를 등에 업은 또 다른 누군가가 신전을 방문할 것이다. 뻔했다. 아직 제국은 망령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백성들은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결정했어요. 라프온을 이곳에 붙잡아 놓고 감시하기로. 어떤 성향일지 모를 미지의 인물보단 욕망이 투명한 놈이 낫다는 거겠죠.”
대신…… 그다음, 로한이 답지 않게 말을 늘였다. 미묘하게 구겨지는 미간 사이가 유난히 불퉁해 보였다.
“…허튼짓을 함부로 못 할, 한다 하더라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해요.”
“너?”
“아뇨, 우리.”
너, 라는 물음에 단호하게 우리라고 답하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로한의 얼굴은 죽을상이었다. 안 그래도 라프온을 혐오하다시피 했으니 앞으로 긴 시간 동안 붙어있어야 한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
잠시 입술을 뻐끔거린 아르펠은 직접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손을 뻗어 로한의 등을 토닥이기를 택했다.
이 소식을 직접 들고 온 걸 봐선 저 결정 사항에 로한의 의사 또한 들어간 듯했으니, 이제 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로한은 등을 쓸어내리는 아르펠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고개를 비비적거릴지언정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황제와의 대립이 하루빨리 끝난다면 좋으련만. 순순히 손을 내어준 아르펠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 우려했던 것도 같다.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난날을 되짚어보면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로한은 깔끔히 제 역할을 수행해냈다.
“다들 많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라프온 님, 축하드려요!”
“하하……. 감사합니다. 조언해 주신 덕분이죠.”
라프온이 대놓고 거슬림을 표현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름 모를 여신관과 라프온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호의가 선명한 말에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물며 그가 품은 감정은 살의였다. 그 모든 것이, 라프온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주었다.
“아르펠 님도 너무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이군요.”
와중에 로한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던 신관이 제게도 오랜만이라며 말을 걸어오는 것에 담백하게 답했다. 누구인지 모를 낯선 얼굴이었지만 감정이 쏙 빠진 어투 덕분에 티가 나지 않았다.
짤막한 인사를 나눈 여신관이 멀어지기가 무섭게 라프온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따라오실 작정이십니까?”
“음, 글쎄요.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멀었고…… 마침 날도 좋고 바람도 좋으니, 괜찮으시다면 차나 한잔 같이 마시는 건 어떠세요?”
“저도 꼭 함께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요?”
“게일 신관님과 따로 약속했답니다. 그분이 하는 일을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아, 그분.”
그분이라면 아까 제가 만나서 따로 말씀드렸죠. 흔쾌히 상관없다고 허락해 주시던데요?
쉽게 말하면 멋대로 약속을 취소해버렸다는 소리였다. 순순히 그 사실을 토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로한의 낯은 태연하기만 했다. 순간 라프온의 입가에 서려 있던 웃음이 짧게 흔들렸다. 이를 악물기라도 한 건지, 입꼬리 끝이 기이하게 말렸다.
“로한 님, 그건…….”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격했다. 숨기지 못한 분노가 그 위를 적시고 있었다. 굳이 감정의 파편을 읽어내려 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의외로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언성이라도 높이는가 싶었던 라프온이 입을 딱 다물어버린 것이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한들 눈이 멀지는 않은 모양이지. 주위를 맴돌고 있는 평신관들을 그 또한 뒤늦게 인지한 듯했다.
평신관들 사이의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하던 제 꾀에 그대로 넘어간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저야 영광이지요.”
결국 라프온의 입에서는 마지못한 허락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찌푸려지는 것을 애써 막고 있는지, 종종 떨리는 그의 미간을 응시한 로한이 보란 듯이 미소지었다.
일방적으로 경계하고, 일방적으로 떠보는 관계는 막을 내린 지 오래였다. 무감정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핀 아르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라프온 역시 눈치챈 표정의 변화였다.
“…하하.”
짧은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동시에 라프온의 주위를 맴돌던 살의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 감정의 대상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르펠이었으나, 그는 자연스레 그것을 넘겨버렸다.
아르펠의 안에서 라프온이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놈이라고 정의된 지 오래였으므로.
156
하루, 이틀. 로한은 꾸준히 라프온을 따라다니며 친목을 빙자한 감시를 이어갔고, 아르펠은 그런 로한의 곁을 지켰다. 그러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간 눈에 띄지 않았던 진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
여느 때와 같던 어느 날, 아르펠은 기도실 문간에 기댄 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꼴에 신에게 기도라도 하는 듯, 미묘하게 움츠러든 라프온의 등을 눈에 담으면서.
그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난 뒤에야 아르펠은 제 생각을 확신할 수 있었다. 커다란 체구 주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감정의 파편. 보기만 해도 우중충한 기운을 풍기는 그것은 라프온의 ‘불안’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하루하루 기세를 불리고, 더 선명해져 간다. 이를 마저 확인한 날 저녁, 아르펠은 로한을 붙잡고 이 사실을 전해 주었다.
“불안해하고 있어.”
“불안……?”
이내 로한이 상념에 빠진 눈을 했다. 지난날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모양이었다.
아마 떠오르는 게 제법 많을 것이다. 처음만 하더라도 거부감을 내비쳤던 로한은 나중에 가서는 슬슬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라프온을 따라다녔으니까.
얼마나 그 일에 진심이었으면, 황실과 신전 사이에 얽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로한과 라프온을 절친한 친구로 여기기까지 했다. 장본인들은 모두 기함할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조만간 일을 낼 수도 있겠네요.”
곰곰이 생각하던 로한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찾아온 이가 신전에 눌러앉아 시간만 죽이고 있을 리는 없다. 평신관들을 이리저리 주무르려 하고는 있었지만, 황실의 제1 기사단장까지 오른 이를 써먹기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짙었다.
그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는 여전히 라프온의 몫으로 남아있을 테고, 그는…… 보다시피, 온종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로한 탓에 이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란 극에 몰리면 없었던 용기도 불쑥 생겨나는 존재였다. 라프온 역시 그랬다. 아르펠이 음침하게 번들거리던 그의 눈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갈 틈을 찾지 못한다면, 그 틈을 직접 만들면 된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
두 사람의 예측은 얼마 안 가 사실이 되었다.
“급보입니다!”
잔잔한 신전의 분위기는 혼란스러운 제국의 정세와는 영 동떨어져 있었다. 정치에 좀처럼 관여하지 않는 신전 특유의 동향 탓이 컸다.
급히 달려온 신관 하나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전한 충격적인 소식만 아니었다면, 그날 역시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날이었을 것이다.
“괴, 괴물이. 괴물이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괴물? 괴물이라고 했습니까, 지금?”
“예. 두 눈으로 똑똑히, 똑똑히 봤습니다. 황실에서 대대로 숙청했던 것들과 똑같이 생긴 괴물들이, 수십 마리나……!”
더듬더듬 말을 잇는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흔들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다시금 상상하는 듯 안 그래도 안색이 좋지 않던 신관의 얼굴이 완전히 파랗게 질렸다.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혈흔이 유독 선명했다.
“……당장 전투가 가능한 신관들을 모아주십시오. 최대한 빠르게 민간인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저 역시 함께 가겠습니다. 목적지는….”
이토르 마을입니다.
잠자코 신관의 이야기를 듣던 디오넬이 한껏 굳은 낯으로 말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자리를 지키던 신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갈 거지?”
“응, 가야죠.”
로한과 아르펠 역시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대화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짧은 문답 후 두 사람 역시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헐레벌떡 몸을 움직이는 이들의 뒤를 따라서.
빠르게 걸음을 딛는 와중에도 아르펠은 꽤 익숙하게 느껴지는 마을의 이름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되새겼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이토르 마을은, 신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가만히 그것을 셈해보기도 잠시, 이어지던 상념을 뚝 끊어냈다.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이제 와서 그것을 따져볼 시간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가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한다. 아르펠은 기꺼이 그것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게 로한이 바라는 바였으므로.
“아르펠.”
짧은 부름을 끝으로 로한의 손에는 새까만 검 한 자루가 쥐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검신을 퍽 애정 어린 눈길로 응시하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새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로한 님, 안 가십니까?”
“…가야죠.”
가만히 서 있는 로한을 의아하게 여긴 한 평신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고 나서야 그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관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신전은 썰물이라도 빠진 것처럼 휑했다. 그곳을 등지고, 로한 역시 바깥을 향했다.
목적지는…….
***
비전투 인원만이 남아 휑해진 신전의 안, 그곳을 소리 없이 가로지르는 이가 있었다.
“드디어…….”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기지 못한 금속음이 묻어났다. 몸을 꼼꼼히 감싸고 있는 갑옷, 그리고 한쪽 손에 쥐어진 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음이었다.
유독 힘이 들어간 듯한 손 때문일까. 비스듬한 각도를 유지하는 검날이 유독 날카롭게 번뜩이는 듯했다.
검의 주인, 라프온은 웃었다.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오웬은 가지 않았다고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까지 쏙 빼놓은 상태는 아니었다. 흥분감이 목까지 차올랐다 한들, 제 눈에 띄는 행동으로 이 계획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자각만큼은 남아있었다.
근처에 있는 마을을 괴물들이 습격했다는 소식이 들린 이후 전투를 할 수 있는 신관들이 대다수 빠져나갔다. 이는 대신관인 디오넬과 가장 거슬리는 존재나 다름없던 로한, 아르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웬은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경계심을 치켜세웠으나……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비전투 인원인데다가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쓸모없는 경계는 피로를 키우는 법이었다. 라프온은 그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치워냈다.
‘빠르게 움직인다.’
그러니 앞으로 그가 해야 할 행동은 하나였다. 미리 전달받았던 대로 계획을 이행하는 것. 점차 속도를 높인 걸음이 신전의 담장을 넘어 그 뒤로 쭉 이어져 있는 울창한 숲을 향했다.
스쳐 지나간 나무가 셀 수 없이 많아질 무렵, 라프온은 마침내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곳에 도달했다.
신전의 숲이 끝나가는 경계 지점, 노란색의 천이 묶여 있는 나무 한 그루. 그것이 눈에 보이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걸음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 밟힌 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읍…… 읍!”
동시에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바스락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에 거칠게 몸부림을 치는 듯한 소리가 덧입혀졌다. 하나같이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 같은 애달픈 소음이었다.
나무에 완전히 가까워졌을 무렵, 라프온은 밑동에 단단히 묶여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다 헤지고 때가 탄 신관복, 지저분한 몰골, 며칠을 굶었는지 홀쭉해진 볼까지. 누가 봐도 다른 사람에 의해 붙잡혀 강제로 묶여 있는 꼴이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라프온을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듯했다. 흐리멍덩했던 눈에 빠르게 빛이 돌아오며 안 그래도 심했던 몸부림이 한층 더 격해졌다.
라프온은 그 꼴을 두 눈에 담으며,
“…하하!”
웃었다.
즐거움이 한껏 묻어나는 웃음소리였다. 커다란 웃음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 웅웅 울렸다.
꼼짝없이 묶여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웃고 있는 눈앞의 기사가 자신을 도와줄 이가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그의 손에서 흔들리고 있는 날카로운 검 역시 한몫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데…….”
“……읍! 읍!”
“지금은 못하겠어. 아쉬워라.”
힘겹게 웃음을 그친 라프온이 짧게 중얼거렸다. 소름끼치는 광경에 눈앞의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그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망할 애송이 자식과 금속 덩어리 놈에게 당한 것들을 이놈에게 풀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뿐.
“목숨은 단번에 끊어주마. 폐하께서 내리신 자비에 감사해라.”
“끄읍……!”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라프온의 검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오러 하나 감겨있지 않은 칼날이었지만 저항도 못 하는 이의 숨통을 끊는 것은 충분했다.
생존 욕구 하나는 투철한 놈인지, 무력하게 묶여 있던 놈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를 향해 보란 듯이 비웃어준 라프온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내리꽂으려는 듯 팔 근육이 꿈틀거리는 순간.
“……!”
챙!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깔끔한 직선을 그리며 남자의 목을 그으려 했던 검이 새까만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었다. 라프온은 한 박자 늦게 그것이 검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마주한 순간, 그것이 검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극강의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 힘이 실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놈이, 왜.”
제게로 달려드는 기척을 느껴 빠르게 오러를 덧씌우지 못했다면 검은 완전히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어렵사리 대처했는데도 불구하고 검의 끝에 잘게 금이 가 있었으니 뻔한 결과였다.
눈 깜짝할 새에 살기가 들어찬 라프온의 눈이 죽일 듯 상대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미소를 짓고 있는 로한이, 그곳에 있었다.
157
분명 나가는 걸 확인했는데, 어떻게?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온 거지?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잡아다 죽일 것 같은 살벌한 눈과는 다르게, 로한은 라프온이 쉼 없이 솟아나는 의문의 구렁텅이에 빠졌음을 짐작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어쩌면 비웃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는 남자가 우습기 그지없어서.
“많이 급했나 보네요. 내내 따라왔는데 눈치도 못 채시고.”
짧게 흘러나오는 감상이 조롱이나 마찬가지임을, 라프온은 제법 빠르게 알아차렸다. 꽉 다무는 잇새로 뿌득하는 살벌한 소리가 새어 나온 것도 같았다.
퍽 한심한 태도였다. 로한은 그런 평가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러하지 않은가. 부러 틈을 내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냉큼 목적지로 달려오는 것도 모자라,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까지 말이다.
그야말로 오만과 자만의 끝을 달리는 인물이었다. 상대의 눈 위에 서린 채 꺼질 줄을 모르는 아집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 사람, 우리 측 신관 같은데…… 이곳에 묶어둔 이유가 뭐지?”
“그걸 내가 잘도 말하겠군.”
“그럼 그쪽을 쓰러뜨린 후 직접 물어봐야겠네.”
“하, 하하하!”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거죽을 집어던진 라프온은 형식적으로나마 해왔던 존댓말마저 그만뒀다. 더불어 짧게 경고하는 상대를 우습게 여기기까지. 찝찝할 정도로 태연한 반응에 로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전도 참 우습군. 신관 하나 살리자고 네놈을 내게로 보내다니. 그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는가?”
“…….”
“역시 폐하께서 한 말씀이 옳았다. 신전은 그분이 일구어낸 제국에서 사라져야 할 해악이야. 이토록 위선적인 결정이라니……!”
전투를 코앞에 둔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연설이라도 시작할 것만 같은 기세였다. 말없이 그 꼴을 눈에 담던 로한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묘하게 흐르던 긴장의 끈이 뚝 끊어져 버렸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뭐?”
“알아볼 거면 잘 알아보지 그랬어.”
로한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내뱉은 말에는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기까지 했다.
라프온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마을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보낸 수가 수이니만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구하러 간 신관들까지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다고.
로한이 검, 그러니까, ‘아르펠’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군가가 죽든 말든 개의치 않는 놈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제아무리 관심이 한쪽에 치우쳤다 한들, 남의 목숨을 함부로 생각하는 놈은 아니다. 라프온이 본 로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무슨…….”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고.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죽을 일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뒤늦게 혼란에 빠진 라프온을 보며 로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검을 들어 라프온에게 겨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신전의 내부에만 집중한 게 네 패착이다.”
이어진 목소리는 지지부진한 신경전을 마무리 짓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
한 신관이 가져온 급보에 수많은 신관이 이토르 마을로 향했을 때, 디오넬 역시 그 틈에 섞여 있었다. 마력으로 강화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자신들과는 정 반대편으로 향한 로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무사하세요.’
사건의 소식이 들려온 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감춘 라프온. 기실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일 것은 대부분의 고위신관들이 짐작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마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을 마주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는 라프온을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로한은 그 역할을 수행하러 떠났다.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서. 어찌 보면 그것은 두터운 신뢰나 다름없었다.
디오넬은 그의 믿음에 보답해 주고 싶었다. 동시에 황제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통감했다. 그는 사람이 아닌 ‘제국’을 최우선으로 했다. 본인이 원하는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백성 몇십 정도야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놈이었다.
그게 그놈이 생각하는 질서였고,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의 초석이었다.
‘역시, 안돼.’
제국은 바뀌어야 했다. 황제를 끌어내려야 했다. 다시금 디오넬의 마음에 강한 신념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대신관님! 여기입니다!”
“출발하기 전 고지했던 대로 조를 나누세요. 진입조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뒤는…… 맡기겠습니다.”
“네!”
얼마 안 가 그들은 소음의 진원지에 도달했다. 무언가가 달려가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비명…… 그러한 것들이 마음을 초조하게 달군다. 애써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디오넬은 뒤를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마주한 건, 괴물이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기형적인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몇몇은 여러 생물을 엮어놓은 것처럼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어어어, 목이 망가진 듯 단어라고 할 수 없는 음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부상자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도록!”
디오넬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단숨에 괴물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명령을 들은 신관들은 곧장 자리에서 흩어졌다. 동시에 디오넬의 손 위로 새까만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검과 같은 기다란 형태를 한 것이 불길처럼 일렁이기도 잠시, 코앞까지 다다른 괴물 무리를 향해 그것을 휘두르자 단숨에 일대가 터져나갔다.
공격을 정면에서 받은 괴물들이 단숨에 절명했다. 앞쪽에 있는 것들은 완전히 타버려 재가 되었으며, 몇몇은 두 동강이 나 바닥을 기기도 했다. 타닥타닥, 잔불처럼 남은 마력이 그들을 태우고 있었다.
“망령…… 은 아닌가.”
그런 이들을 보는 디오넬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기이한 생김새에 망령으로 인해 탄생한 무언가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구원교의 ‘간부’라는 존재들을 마주한 이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이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하나 이들은 아니었다. 아니…… 완전히 아니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망령의 천적은 신의 힘, 마력과 성력이다. 만약 그것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점이 있었다면 이렇게 애매하게 살아남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다.
“부상자 확보했습니다!”
멀리서 그런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린 디오넬은 발을 들어 땅을 기어 다니는 반 토막 난 괴물을 지그시 밟았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 머리를 가볍게 흔든 디오넬이 전의 외침이 들린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마을로 이동하던 도중 알려두었던 대로 인원을 셋으로 나눠 체계적으로 움직인 탓이었다.
한쪽은 사람을 구조하고, 다른 한쪽은 구조한 이들을 치료하며, 또 다른 한쪽은 진지를 보호한다. 긴 시간 동안 손발을 맞춰온 이들은 큰 문제 없이 본인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것 참, 오랜만입니다.”
“…렉시아 님?”
신전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활약 역시 있었다.
디오넬은 제 앞에 다가온 듬직한 인영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낯에 숨기지 못한 의아함이 한가득 묻어났다.
“다른 분이 오실 줄 알았는데, 직접 오셨군요.”
“하하. 사정이 있었거든요.”
하나 그의 등장을 뜬금없게 여기지는 않았다. 제3의 세력이 등장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이토르 마을에 닥친 습격은 단 하나의 목숨도 희생시키지 않았다. 신전이 빠르게 대처한 덕도 있었지만, 미리 마을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용병들이 적이 들이치자마자 곧장 사람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신전은 라프온이 내부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바깥에 사건을 터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곧장 습격을 감행할 만한 유력한 장소를 골라냈다. 이후 용병 길드에 협력을 요청해 해당 장소마다 용병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결과는 더없이 좋았다. 사망자 하나 내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렉시아에게서도 선명한 안도의 숨결이 새어나왔다.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요.”
다만 디오넬은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아리송한 낯이었다. 도움 요청에 흔쾌히 답한 것도 렉시아의 뜻이겠지만, 그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으므로.
“황실의 눈을 피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만.”
“음…… 그거 말이죠.”
짧은 물음에는 추궁보단 걱정의 기색이 한껏 스며들어 있었다. 잠시 고뇌하던 렉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최근 들어 감시망이 떨어져 나갔거든요.”
디오넬이 눈을 크게 떴다. 이는 또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구조와 치료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렉시아는 서늘하게 낯을 굳힌 채 말을 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주변의 소음이 말끔히 사라진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아무래도 황제가, 다른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이는 추측이자 직감이었다. 그리고, 확신이기도 했다. 번뜩이는 눈을 바라본 디오넬이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는데도, 불길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158
로한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유려한 곡선을 그린 검날이 라프온의 가슴팍을 갈랐다. 하나 공중으로 튀어 오른 것은 검에 의해 잘린 천 조각뿐이지, 핏방울이 아니었다. 마력을 품은 검이 움직이는 순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라프온이 급히 몸을 뒤로 물린 것이다.
“비겁하게 기습을……!”
“우리가 그런 걸 따질 사이던가.”
라프온은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자마자 이를 드러냈다. 살기가 아른거리는 표정에 로한이 웃었다.
곱게 휘어진 눈이 말하고 있었다. 친절히 안내해줄 사이가 아닐뿐더러, 사실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고.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말이다.
이에 라프온이 입술을 짓씹었다. 적나라하게 구겨진 표정에서 그제야 초조함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비틀어 쥐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해졌다.
“한 번 보여봐, 당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실력과….”
“…….”
“네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겁먹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유순하고 간질거리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이는,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이어지던 기묘한 신경전을 끝내는 신호가 되어 주었다.
타다닷. 한 줄기 달음박질 소리가 침묵이 찾아온 숲을 가로질렀다. 천천히 눈을 끔뻑인 로한이 제 앞에 펼쳐진 상황을 인지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선 처리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뒤쪽의 신관을 살피는 게 그를 죽을 틈을 찾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 설마 도망칠 각을 재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 진짜…….”
구제 불능이네.
잇새로 신랄한 평가가 흘러내렸다.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린 로한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정신을 잃은 건지, 나무 밑동에 꼼짝없이 묶여있던 신관은 눈을 꼭 감은 채 얕은 숨을 쌕쌕 내뱉고 있었다.
로한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빠르게 알아차린 아르펠이 덧붙였다.
<근처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상태가 좋진 않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크게 악화될 리는 없으니 이 자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야.>
“…응, 고마워요.”
그 말을 들은 로한이 곧장 검을 고쳐 쥐었다. 바닥을 가볍게 박차는가 싶던 몸이 눈 깜짝할 새에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제치고 뻗어나갔다.
***
몸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멀게나마 느끼며, 아르펠은 점차 멀어지는 기척을 다시 한번 가늠했다. 연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인간의 안위를 꼼꼼히 살피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로한의 우려를 읽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냅다 도망친 라프온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은 충분히 되었으나 그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혼자 남게 될 남자를 걱정한 것이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 덤으로 남자의 상태까지 살핀 아르펠이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로한은 그 뒤로도 마음을 쉽사리 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르펠은 그런 로한의 모습이 더없이 좋았다. 적에게는 한없이 냉혹하게 굴면서, 조금이라도 눈에 든 사람이 곤란해하는 꼴은 쉽게 넘기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예쁘네.>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새어 나온 본심에 로한이 되물었다. 그것을 자연스레 넘기며 아르펠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인간이 아닌 검의 모습을 하고 있어 로한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웃었다.
미욱하게 굴어도 상관없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지라도, 상관없었다. 저가 바로잡아주면 될 일이니까.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조한 아르펠에게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로한이 뜀박질의 속도를 높였다. 쫓기로 한 순간부터 숲에 넓게 퍼뜨려놓은 기간이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므로.
챙!
찰나, 옆에서 치고 들어온 검이 그를 노렸다.
“젠장……!”
어렵지 않게 검날을 옆으로 비틀어 공격을 막아낸 로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덤으로 가벼운 말 한마디까지 얹어주었다.
“방금 그건 꽤 괜찮았어.”
“개자식이……! 깔보는 것도 적당히 해라!”
“진심이었는데.”
로한이 쓰게 웃었다. 기척을 완벽히 숨기려 애쓰지 않았다지만 라프온은 그것을 눈치챈 것도 모자라 울창한 숲속에 숨어 기습을 노리기까지 했다. 나쁘지 않은 실력과 판단이었다.
그러니 잘만 고민했더라면 직전의 상황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나 그가 선택한 건 도망이었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라프온이 곧장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묵직한 검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빠르게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검날을 피해낸 로한이 그대로 몸을 빠르게 돌려 라프온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크윽!”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몸을 내어준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었다. 직접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번들거리는 눈에 그런 말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비겁하고 추잡하다고. 어째서 검을 쥐고도 그런 방식으로 싸우느냐고.
로한이 코웃음 쳤다.
“최근 제국이 평화롭긴 했지…….”
날이 갈수록 기승인 망령들만 본다면 ‘평화롭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망령이 아닌, 국제정세만 따지고 본다면…… 제국이 전쟁을 치르지 않은 지는 꽤 되었다. 기사들이 평화에 찌들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추잡하다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로한은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높은 잠재력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언정 온실 속에서 자라난 화초에 불과하다고.
“당신보다 오스카가 낫네.”
그래서 웃는 낯으로, 라프온의 역린을 건드렸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 멈칫한 라프온이 그대로 이를 악물었다. 몰아치는 검격이 한층 더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오스카! 오스카! 빌어먹을 오스카!! 감히 그놈의 이름을 내 앞에서!”
푸른 눈동자에 일순 붉은 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나하나 살기로 가득 찬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로한은 그 모든 검을 침착하게 받아쳤다. 공격할 틈을 잡지 못한 것처럼 오직 방어만 고집하는 그의 모습에 라프온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멋대로 도발하더니 꼴이 우습군. 아까 그 기세는 어디로 갔나!”
하하하! 호탕한 것 같기도, 방정맞은 것 같기도 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핏! 동시에 궤도가 비틀린 검날이 로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볼에 미세한 상처를 내었다. 동그랗게 맺힌 핏방울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이대로 네놈을 죽이고 가면 폐하께서도 날 치하하시겠지. 덕분에 내 평생의 염원도 이루게 되었구나! 미리 감사하마!”
쐐액, 오러를 담은 검이 목을 노리며 살벌한 소음을 냈다. 그것을 강하게 쳐낸 로한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밀려났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라프온은 그 모습을 보며 보란 듯이 비웃었다.
그러나 로한은 그런 라프온을 코앞에서 마주하고도 일련의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침착하다 못해 평소보다 배는 가라앉은 듯한 눈빛이 싸늘하게 그를 지켜보았다. 이질적이고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인상을 확 찌푸린 라프온이 중얼거렸다.
“쯧, 인간이 아닌 것과 어울리니 저 모양이지.”
“그러는 당신은.”
“뭐?”
로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남아있던 조금의 표정마저 지워낸 눈이 라프온을 응시했다. 저를 가치 없는 무언가로 바라보던 아르펠이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적어도 라프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멍청하면, 내가 놀아주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걸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직후 내뱉은 로한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검을 놀리면서도 머리는 차근차근 그 말을 이해해나갔다. 첫 번째로 깨달은 것은 그가 저를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은…….
“……크아악!”
로한이, 단 한 번도 권능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신의 선물. 신의 축복. 신의 힘, 그 자체로 불리우는 것. 일순 바닥에서 새까만 그림자 가시들이 솟구쳤다.
간신히 몸을 비틀고, 피하지 못하는 것들은 검으로 쳐내며 버텼다. 버텼다고 생각했다. 멈추는가 싶던 가시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자신을 노리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쏟아지는 공격을 힘겹게 피해 중심이 무너진 몸이, 그것을 다시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방에서 뻗어온 것들이 손과 발을 꿰뚫었다.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이 저절로 쏟아져나왔다.
“이제 이해가 가?”
“끄윽, 큽.”
“너보다 오스카가 낫다고 한 이유.”
딱, 그 말을 내뱉으며 로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라프온의 몸을 파고들었던 가시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까스로 그것들에게서 벗어난 라프온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와중에도 그의 눈은 열등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꼴을 바라보며 로한은 생각했다. 이런 놈을 제 옆자리에 세워둘 생각을 한 황제도 참 이해할 수 없다고.
그리고, 감히 제 앞에서 아르펠을 거들먹거린 놈에게 지옥을 보여 주겠다고 말이다. 높게 뻗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새까맣게 일렁였다.
***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네요.”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놈에게 알려줄 리가.>
라프온과의 전투는 식상하게 끝이 났다. 애초에 그림자가 가득한 숲속에서 그가 로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그림자의 공세에, 처음엔 어떻게든 버티려 하던 라프온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그가 쓰러진 자리엔 타오르던 오러의 불씨만이 남았다.
다만 빠르게 승기를 잡았음에도 로한의 표정은 탐탁지 못했다.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황제의 옆을 차지했다고 큰소리로 떵떵거릴 땐 언제고 정작 알고 있는 정보가 몇 없다니.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주겠답시고 시간을 들여 공세를 퍼부었던 노력은 헛수고가 된 셈이었다.
“그럼 그 신관한테 물어봐야 하나.”
라프온이 내뱉은 정보는 황제가 그에게 내린 명령, 단 하나뿐이었다.
신전에 방문해 그들 사이의 분위기를 흩트려놓고, 때가 되면 미리 알려준 장소에 찾아가 확보해 놓은 신관 하나를 죽일 것.
문제는 왜 죽여야 하는지,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 하나 알지 못한다는 점인데.
이쯤 되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제1기사단장으로서 신전에 방문한 라프온 또한, 결국 황제의 버리는 패에 불과했다는 것을.
159
로한이 쓰게 웃음 지었다. 사람을 도구처럼 대하는 것에 열을 올려야 하나, 그도 아니면 버릴 것들은 기가 막히게 버리는 그 인재 파악 능력에 감탄을 해야 하나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흠씬 두들겨 맞아 의식을 잃은 라프온의 몰골을 볼수록 그러한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황실의 제1 기사단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초라한 꼴이었다.
아르펠이 그림자 안에서 꺼내 준 밧줄로 놈의 몸을 꽁꽁 묶은 로한은 그를 짐짝 다루듯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도달한 곳은 당연하게도, 라프온과 처음으로 대치했던 커다란 나무의 앞이었다.
“……아직 안 깨어났네.”
곧장 신관의 안위부터 확인한 로한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뜨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였다. 가만히 몸을 숙여 신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순 손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른 어두운 빛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거칠던 숨결이 조금이지만 편안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일단은 이 정도만으로도 괜찮겠지. 응급처치를 무사히 끝낸 로한이 손을 떼었다. 동시에 그의 뜻을 눈치챈 아르펠이 곧장 몸을 바꾸었다. 새로이 생긴 손으로 방금 전까지 로한이 쥐고 있던 밧줄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아르펠.”
“응?”
“더러우니까 그거 잡지 말아요.”
만류하지만 않았더라면 계속 잡고 있었겠지. 얼렁뚱땅 라프온을 묶고 있는 밧줄을 넘기고 만 아르펠이 멀뚱히 두 눈을 깜빡였다.
“대신 이 사람 좀 부축해 줄래요? 보니까 당분간 정신 못 차릴 것 같아서.”
“…그래도 라프온을 내가.”
“씁.”
“……알았어.”
라프온 대신 신관을 넘겨받는 일련의 상황이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물 흘러가듯 지나간 상황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르펠이 작게 항의했으나 로한은 완강했다. 죄질이 나쁜 놈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맡겠다는 포부가 엿보였다.
씁, 하는 소리가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지만……. 로한이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을 짐작한 아르펠은 순순히 신관을 등에 업어야 했다.
돌덩이와 나무에 부딪히든 말든 상관치 않고 라프온을 끌고 가는 그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정말 많이 컸고, 그만큼 믿음직스러워졌다고. 로한이 들었다면 잔뜩 들떠 배시시 웃었을 만한 생각이었다.
물론 아르펠은 이를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보다 발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무사히 둘을 신전에 데려가야 하는 것은 둘째치고, 이토르 마을에서의 일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는지 빠르게 확인해 보아야 했으므로.
해놓은 조치가 있으니 무사히 해결되었을 테지만 말이다.
“으으윽…….”
죽 이어져 가던 생각이 뚝 끊긴 것은 그때였다. 어렴풋이 들리는 날 것의 신음이 로한과 아르펠의 주의를 단숨에 끌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끄윽… 콜록. 여긴……?”
소음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아르펠의 등이었다. 정확히는, 정신을 잃은 채 그에게 업혀있던 신관. 그로부터 비롯된 소리였다.
흔들리는 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의식을 끌어 올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짠 남자가 콜록거렸다. 마른기침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내렸다.
서로를 돌아본 로한과 아르펠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달리는 속도를 늦추었다. 그게 도움이 된 것일까,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숨결을 깔끔히 정돈한 남자가 아르펠의 옷을 꽉 쥐었다. 유약한 손아귀 아래에서 옷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구, 국경이… 위험합니다.”
“…국경?”
뒤이어 남자가 내놓은 말은,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한 부류의 것이었다. 아르펠은 그를 받치고 있던 손을 움찔 떨었고, 로한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남자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망령의 땅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망령이 들끓는 대지. 악몽이나 다름없는 그곳이, 제국의 국경을 넘어 점점 세를 불리고 있다고.
***
톡, 톡. 고요한 집무실 안, 무언가를 들었다 놓는 듯한 규칙적인 소음만이 그 안을 울렸다. 넓은 창 바깥에서 쏟아지는 눈 부신 햇살, 그것을 등진 미하일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검은 말을 집어 움직였다.
“확실히, 그는 실력이 나쁘지 않지.”
혼잣말하듯 단조로운 어조였다. 하나 맞은편에서 하얀 말을 집어 움직인 손은 그 목소리를 듣는 이가 있다는 것을 대신 증명해 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하일은 보란 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나머지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욕심이 많단다. 하물며 오만하기까지 하지. 그런 것들은 언젠간 일을 그르치게 될 거야.”
“…….”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그걸 적당히 이용하다 버리는 거지.”
온화한 낯과는 어울리지 않는 냉혹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미하엘의 얼굴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조금 전 말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는 것처럼, 그렇게.
“안 그러니, 루시엘?”
내내 혼잣말처럼 이어지던 분위기가 마침내 깨졌다. 그에 미하일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루시엘의 손이 옅게나마 떨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를 구하는 듯한 목소리였으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제야 만족한 건지 미소를 한층 더 짙게 만들어 보인 미하일이 마저 운을 떼었다.
“네가 이끌게 될 제국에 그건 해악이나 다름없는 존재란다. 너도 주의하렴. 완벽한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배제해야 할 놈들이야.”
“…그렇군요.”
“그래도 꽤 다행이지 않니. 라프온 같은 부류는 권력욕이 지나치지. 권력, 돈, 사랑…… 그러한 욕망이 투명한 놈들은 특히나 이용하기 쉬우니 말이다. 가장 위험한 건… 그래.”
툭, 미하일이 다시금 말을 움직였다. 시시각각 왕의 머리를 노려오는 움직임에 루시엘의 낯이 단번에 굳었다.
“욕심이 많은데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몸을 숨기는 것들. 그런 것들을 주의해야 한단다. 기억해두면 좋겠구나, 루시엘.”
몇 번 더 공방이 오가기도 잠시, 판은 금방 끝이 났다. 미하일의 말이 기어이 왕을 잡은 것이다. 하아. 나직하게 숨을 내쉰 루시엘이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졌습니다.”
“전보다는 더 늘었구나.”
가벼운 칭찬이 이어졌다. 손끝을 움찔 떤 루시엘이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빈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하일, 자신의 아버지는, 제국의 황제는 정말로 잘 해낸 것이 아니라면 칭찬을 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쯤은. 속이 혼란스러운 것과 별개로 은은한 만족감이 흘러나왔다.
그러한 개인적인 기분과는 별개로 루시엘은 착실하게 몸을 일으켰다. 약속한 시간이 끝이 났으니 이만 물러가기 위함이었다. 황제의 업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늦은 오후, 그의 집무실에 찾아와 가볍게 체스를 두는 것은 둘 사이에 정해진 암묵적인 약속이었으므로.
그러나 루시엘은 얼마 안 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루시엘, 잠시만 기다려보렴.”
아직 용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신을 부르는 한 줄기 목소리로 인해.
이런 일은 거의 없었기에 자연스레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내려앉았다. 그런 루시엘을 보며 미하일은 태연히 웃어 보이기만 했다. 지금의 상황이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 모순적이게도, 루시엘은 그런 제 아비를 바라보며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단다.”
“……보여주시고 싶은 것이라면.”
“이제는 때가 되었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렴풋한 확신을 가진 혼잣말이 뒤를 따를 뿐. 그리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미하일이 먼저 발을 옮겼다. 따라오라는 것처럼 느릿한 발걸음에 루시엘이 뒤늦게 그를 향해 움직였다.
그 뒤로 둘 사이에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미하일은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갔고, 루시엘은 그런 황제를 뒤따랐다. 주위에 사람을 물리기라도 했는지 넓은 황실의 복도가 오늘따라 황량해 보였다.
미하일이 향한 곳은 알현실이었다. 커다란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익숙한 황좌였다. 루시엘에게는 항상 무엇보다 크게 느껴지던 존재이기도 했다.
“폐하. 여긴…….”
“거의 다 왔단다.”
둘의 발걸음이 황좌의 뒤쪽으로 향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한 곳에 비밀스러운 틈이 하나 나 있었다.
상상치도 못한 공간이 생겼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애써 속으로 삼켜낸 루시엘은 마침내, 황제가 자신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건…….”
“아름답지 않니?”
“…네.”
아름답습니다. 그가 가까스로 답을 내뱉었다.
성인 남자의 손 하나가 겨우 들어갈 것 같은 작은 함에서 푸른 빛의 보검이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조금의 흠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 세밀하게 세공된 것은 마치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황실 대대로 전해 내려져 오는 단검이지. 이 존재를 아는 자들은 역대 황제들밖에 없단다. 네가 무사히 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이 검은 네 것이 될 거야.”
“…폐하, 그 말씀은.”
“말 그대로지.”
루시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무사히 황제가 된다면, 이지 이 보검의 존재를 알려준 순간부터 다음 대 황제가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하나 루시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기뻐해야 하거늘,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인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부글부글 끓어댔다. 결국 그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야 했다.
“……감사합니다.”
앞쪽에 따라붙은 자그마한 망설임이, 꼭 감격해 마지않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160
황제, 미하일은 그에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곱게 휘어진 입꼬리 끝에 더없는 만족감이 고여 있었다. 그는 순종하듯 눈을 내리뜬 루시엘을 향해 조곤조곤 말을 읊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의 것을 닮아 있었다.
“이건 오래전, 한 신이 황실에 내려준 선물이란다.”
“…….”
“‘신의 안배’라고… 한 번쯤은 들어봤을지도 모르겠구나.”
루시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 아비가, 이 나라의 황제가 이런 주제로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오래전, 그래… 이 세상에 ‘악신’이 존재하기 전. 대륙에는 수없이 많은 ‘괴물’들이 존재했다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인류의 주적은 그들이었다. 꽤 흥미롭지 않느냐.”
“기록이 남지 않은 시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표현이 있었지.”
기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황제가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시 인간에겐 성력과 마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오러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지. 이를 안쓰럽게 여긴 무명의 신이 한 남자에게 괴물에게 맞설 힘을 내려주었어.”
그게, 우리의 선조란다. 가볍게 말을 끊어낸 미하일에게서 은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신이 내린 보검은 괴물을 조종하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인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괴물은 완전히 모습을 감췄지.”
괴물이 사라졌으니 보검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하나 ‘신의 안배’라는 명칭이 불러오는 파장은 커다란 법. 자꾸만 그것을 탐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선조는 결단을 내렸다.
바로, 검을 황궁의 깊은 곳에 봉인하는 것.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에 봉인된 검은 그로부터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잠이 들어 있었다.
“또다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선조는 자신의 후손만이 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단서를 남겨놓았다. 이게 대대로 제국의 황제가 된 자들이 알게 된 진실이란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지만, 하나의 역사로 이해하면 편했다.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모르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분이 들떴을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 뒤로 황실은 무명의 신을 섬겼다. 그래, 지금의 신전이 마신과 천신을 따르고 그들의 종을 자처하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지금의 황실은 따르는 신이 없지 않습니까.”
“그 무명의 신에게 문제가 없었더라면, 계속 그랬겠지.”
조용히 손을 뻗은 미하일이 푸르게 빛을 발하는 보검을 톡톡 건드렸다. 통통 튀는 소리가 귓가에 눅진히 내려앉았다.
“그 신은 타락했단다.”
“……악신입니까?”
“그래. 퍽 수치스러운 일이지. 모시던 신이 타락하고 이름을 잃었다. 하물며 악이 되어 인류를 적대하기까지 했지. 다행히 마신과 천신이 합세해 악신을 봉인하기는 했으나,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단다.”
결국 황제는 과거의 기록을 모조리 지워버리기로 했다.
역사란 본디 기록으로 남는 법, 당시를 기록했던 모든 자료를 불태워버리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자는 죽였다. 그것이 몇 번이고 대를 타고 이어지니, 수백 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대대로 진실을 알고 있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루시엘, 정말로 우스운 게 하나 남아있어.”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낯을 해 보인 황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서 들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말이다.
“악신이 가진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괴물. 괴물이란다. 이 검에 휩쓸려, 대륙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미지의 생물. 우습지 않니? 자신이 힘을 들여 멸한 존재를 품고 떨어지다니.”
미하일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언뜻 듣기엔 산뜻하기 그지없는 음이었으나, 조금만 집중해서 들어본다면 비웃음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다.
루시엘 역시 그랬다. 충격적인 진실은 물론이고 과거를 읊으며 통쾌해하는 제 아비의 모습까지.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뇌를 뿌옇게 만들었다.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이는 것에 황제가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루시엘, 잘 들으렴. 이 검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다름없단다.”
“…….”
“망령? 그것들은 악신의 찌꺼기지 않니. 결국 그들의 뿌리에는 괴물이 있다. 한낱 찌꺼기들은 ‘신의 안배’에 저항할 수 없어. 구원교의 간부, 그 징그러운 것들 또한 마찬가지지.”
신의 힘을 갈망하지 않아도, 신전의 존재에 목매지 않아도…… 우리의 제국은 우뚝 설 수 있단다. 안 그렇니?
루시엘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야기의 끝에 뒤따라온 짧은 물음은 여전히 그에게 동의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것이 제 아비의 시험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동시에 수없이 많은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구원교와 손을 잡던 제 아버지, 신에게 축복받았다던 로한을 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르펠까지 죽이려 하던 손속, 누명을 쓰고 죽은 오스카.
그리고, 황성의 앞에 내걸린 끔찍한 ‘괴물’들.
결국 루시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황제가 제게 검을 보여주었을 때처럼 목소리를 쥐어짜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그리고 그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루시엘의 마음 역시 한쪽으로 기울었다.
***
“이거 큰일이군요.”
망령이 땅이 점점 커지고 있다.
라프온에게 죽을 뻔한 신관이 가져온 소식은 그 어떤 것보다 충격적이었다. 이토르 마을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신전으로 돌아온 디오넬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낯을 창백하게 물들일 만큼.
신전의 움직임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신관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람이 북적북적했음에도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한은 파견 인원을 정하는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평소 자신은 관여하지 않는 일일뿐더러, 국경을 향하는 인원에 본인이 포함될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시선만큼은 한쪽에 치우쳐 있었다. 아르펠을 향해, 아니, 그의 옆에 뜬금없이 끼어 앉아 있는 렉시아를 향해서.
“그쪽이 왜 여기 있습니까?”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너무 박한 거 아냐?”
“역할은 끝났잖아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과 경쾌하게 답하는 투, 모두가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표정, 그리고 한껏 소리를 낮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한없이 가벼운 놈이라고 폄하할 만한 모습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더 몰아붙일 수가 없었는지, 로한이 입을 꾹 다물고 신경질적으로 눈을 흘겼다. 아르펠은 그런 로한을 달래주듯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뻔뻔하게 제 옆자리를 차지한 렉시아에게로 신경이 쏠렸다. 그에게서 또렷한 감정이 새어 나왔다.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변해가는 눈앞의 상황에 말이다.
‘무슨 속셈일까.’
아르펠은 문득 상념에 빠졌다.
디오넬이 이토르 마을에서 돌아왔을 무렵, 로한과 아르펠은 그 뒤를 따르는 렉시아를 보고 멈칫했다. 근처 마을에서 주둔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는 했다만 그가 직접 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둘의 반응을 지켜본 렉시아는 감시가 많이 느슨해졌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 황제가 다른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국경에서 일이 터졌다. 황제가 구원교와 손을 잡고 수없이 많은 사건의 배후에 서 있던 이상 그의 개입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럼 곧장 출발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사이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갑작스레 손을 들고 발언한 렉시아만 아니었더라면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잠시 렉시아를 돌아본 디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를 이용해 황실을 들쑤실 생각입니다. 오웬 신관님 좀 빌려주십시오.”
“……네?”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이는 디오넬 역시 마찬가지였다. 빠르게 말해달라 요청한 건 본인이긴 했지만, 저런 엄청난 이야기를 앞뒤 다 잘라먹고 내뱉을 줄이야. 간신히 멀어져가는 정신줄을 붙잡은 그가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게, 무슨…….”
“지금 급하지 않나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말씀드린 것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찌 됐든 신전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당당한 목소리는 실패 따위는 상정하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목소리만큼은 퍽 신뢰가 갔으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신관이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용이 내용이지 않은가.
하나 렉시아의 말이 맞았다. 제아무리 무모한 것 같은 제안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그에 대해 자세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을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잠시 입술을 짓씹다 고개를 주억인 디오넬이 오웬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따르겠습니다.”
오웬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회의의 끝을 알렸다. 곧이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급하게 떠나기 시작했다. 로한과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녀오십시오.”
비록 로한은 뒤를 돌아보며 퍽 불안한 눈을 했지만, 렉시아는 여느 때처럼 뻔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많은 신관이 파도처럼 쓸려나간 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오웬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그쪽 집안 힘 좀 빌려봅시다.”
“……예?”
난데없는 말에 오웬이 미간을 찌푸렸다. 렉시아는 입꼬리를 가볍게 휘어 보이며 생각했다. 틈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다고.
161
로한과 아르펠은 국경으로 이동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여러명의 신관들이 다 함께 움직이는 대대적인 이동이니만큼, 단출한 짐만 챙기고 다녔던 얼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본격적이었다.
다그닥거리는 말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퍽 상념에 빠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이는 아르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르펠? 신경 쓰이는 게 있는 거예요?”
“……아니, 그냥.”
제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로한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이 배어있는 목소리가 아르펠을 붙잡았다. 느리게 고개를 저은 그는 상대가 안심할 수 있는 주제를 가져오기로 했다.
“렉시아가 했던 말 때문에. 어쩌면 이벨린하고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황태자 얘기를 꺼낸 건 뜬금없었잖아.”
“…그렇네요.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실의 감시 때문에 반쯤 은둔생활을 했던 사람이, 황태자의 상태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니.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는 이벨린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한은 빠르게 납득했다.
하나 납득한 것과 별개로 찝찝함은 남아있었다. 조금 전 보였던 아르펠의 표정은 보다 깊은 고민을 하는 모양새였다. 이렇게 명쾌한 답이 내려지는 게 아니라.
그런 로한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아르펠이 꺼내놓은 답은 그의 신경을 돌리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아르펠은 직감했다.
‘결말…….’
이야기의 결말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검이 되고 난지 시간이 꽤 지나 소설의 줄거리는 두서없는 기억이 전부였지만, 결말이 머지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아르펠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무엇 하나 확신하지 못했다. 소설과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더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당장 자신의 존재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나.
“괜찮을 거예요.”
그 순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로한이 대뜸 손을 붙잡았다. 마주 잡은 손만큼이나 덧붙인 목소리 역시 따뜻했다.
아르펠은 그에게 속을 읽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로한이 자신의 생각을 읽어냈을 리 만무했지만, 괜찮을 거라는 속삭임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며 저를 다독이는 것만 같아서.
정말로 속내를 들키더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아르펠은 대답을 대신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 위에서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미성을 배경음 삼고,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글의 마지막을 되새겼다. 두루뭉술하기 그지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망령의 땅에서 무언가를 찾아 부숴야 했다.
***
디오넬은 오늘따라 휑한 신전 안을 돌아보았다. 뒤이어 시선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어둑해진 두 눈에 숨기지 못한 불안이 묻어났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쉬니 그나마 기분이 환기되는 듯했다.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인 디오넬이 한쪽으로 시선을 흘겼다.
“끄으윽…….”
“크흐. 흐하학…!”
누군가는 고통에 신음하고, 누군가는 미쳐버려 웃음을 흘린다. 영 어울리지 않는 두 소리가 한데 얽혀 귀를 괴롭혀댔다. 그나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바닥까지 처박히는 건 금방이었다.
이내 디오넬의 눈에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혐오였다. 한편으로는 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이곳을 지켜주세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무슨 감정을 머금고 있었나. 디오넬은 그 정체를 모르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앳되기 그지없던 음성은 훨씬 더 단단해진 채, 제게 신뢰를 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대뜸 아르펠을 공격했던 첫 만남으로 인해 저를 믿지 못하던 작은 아이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으므로.
그러니… 그 믿음에 보답해야겠지. 숨을 가볍게 갈무리하며 다짐했다.
라프온을 필두로 한 기사들은 모조리 신전의 지하에 구금되었다. 그들을 심문할 자도, 감시할 자도 필요했으며, 사람이 부족해진 신전을 지킬 자도 필요했다. 그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이 디오넬이었다.
물론 황실에서 다시 사람을 보낼 확률은 낮았다.
“라프온.”
“감히 날, 이런 취급을……! 폐하께서 가만히 계실 거라고 생각하나! 이건 황실에 대한 모욕이다!”
눈앞의 이 남자가 대차게 계획을 말아먹은 순간부터, 그것은 불가능한 명제가 되었다. 라프온은 황제의 뜻에 따라 신전에 왔다. 그런 그가 신전의 안위를 위협하는 짓을 벌였다는 건, 이 또한 황제의 의지라 볼 수 있을 터.
디오넬의 최선은 당장 황실에 따지고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국경지대가 위태로운 지금, 대부분의 인력이 빠져나간 신전이 황실과 대립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적어도 이번 일이 무사히 마무리된다면…….
“크아악!”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이놈들과 함께, 모조리 처리해버려도 되겠지. 마력으로 구현한 칼날이 단숨에 라프온의 손등을 뚫고 지나갔다. 곧장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에 디오넬이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온화하기만 했던 눈에 새까만 분노가 일렁였다. 몇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쌓인 감정이었다.
“황제는 널 버렸어, 라프온.”
“…그럴 리가, 없다.”
“아, 현실 부정이었나.”
“그럴 리가…….”
여기도 망가진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필사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려 애쓰는 것을 보며 디오넬이 간단히 평했다.
그가 지하 감옥을 빠져나간 것은 라프온 외의 다른 죄수들까지 모두 살피고 난 후였다. 심문은 계속해서 진행해야 했으니 상처 치료도 어느 정도 겸비하면서. 제발 그냥 죽여달라고 하는 놈도 있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심문은 역시 그에게 맡겨야겠어.’
지나칠 정도로 로한을 동경하던 신관 하나. 분명, 이름이 할리온이었나……. 가만히 정보를 되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황제는.’
왜 라프온을 이곳에 보냈을까.
처음만 하더라도 고위 신관을 제외한 대부분이 그에게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갔다. 아마 로한이 그에게 붙어 감시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라프온의 눈에는 언제나 짙은 욕망이 담겨 있었다. 불쾌감을 절로 일게 하는 눈이었다. 과분할 정도로 욕심이 많고,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만하며, 높은 지위 때문인지 오만함은 하늘을 찔렀다.
‘황제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 모든 것이 신전을 위협하기 위함이었다면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만큼 중요한 계획일 텐데, 하필 그런 일을 이런 놈에게 맡긴다고.
의문을 느낀 순간부터 찝찝함이 점차 부풀어 올랐다. 무언가가 자꾸만 거슬렸다.
***
중앙신전에서 국경지대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망령의 땅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것이 신전의 의무였던 만큼,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인력 수급이 원활하도록 멀지 않은 위치에 신전을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일행들 사이에선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공기 또한 점차 무거워지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지가 검게 썩어있었다. 마침내 ‘망령이 들끓는 대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벌써……?”
누군가가 그리 중얼거렸다.
땅을 밟은 적이 있는 몇몇은 ‘망령의 땅이 넓어졌다’라는 소식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뿐이고,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간간이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환경이 변덕스러웠고, 또 불쾌한 곳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땅의 색이 뒤바뀌고 난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옹기종기 모여있는 막사를 발견했다. 직후 정 가운데에 있던 막사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그들을 반겼다.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은 창백했고, 눈 그늘은 턱에 닿을 기세였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낯이었으나 눈빛만큼은 희망을 찾은 듯 반짝거렸다. 로한은 무서운 기세로 제 앞에 다가오는 남자에 티 나지 않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부담스러웠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이렇게 빨리 와주실 줄은 몰랐는데……!”
바삐 새로운 막사를 짓고 있던 신관 몇몇이 덩달아 환호를 날렸다. 분위기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나 아르펠은 그들의 솔직한 심정을 쉽게 알아차렸다.
‘절망인가…….’
절망하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다. 웃고 있는 얼굴 너머로 가려진 감정이었다. 잔뜩 들뜬 기세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눈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참, 제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로한입니다.”
“로한 님이야 귀가 닳도록 들어서 이미 알고 있지요. 아, 그런데 혹시…….”
살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다니엘은 슬쩍 로한의 뒤를 살폈다. 정확히는 뒤따라 들어서는 신관들의 행렬 뒤쪽을 바라보는 듯했다.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최근에 제국에 뒤숭숭하지 않습니까. 수도와 먼 국경이긴 하지만 이래 봬도 여러 소식을 꿰고 있거든요. 황실 측에서 신전에 기사단을 파견했다는 말을 들어서… 혹시나 기사들과 같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로한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르펠도, 근처에 있던 다른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전의 지하 감옥에 갇힌 기사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황실이라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서 기사들은 짐 덩어리나 다름없습니다. 망령의 기운이 워낙 짙어서 땅에 발을 들이기만 해도 몸이 무거워진다고들 하니…. 시간이 지나면 몸이 무거워지는 것에서 그치겠습니까? 따로 정화까지 해줘야 해서 신관들의 일만 이중으로 늘어나는…… 음?”
그런 기색을 모를 리가 있나. 죽 말을 이어나가던 다니엘이 눈을 크게 뜨며 앞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자세한 말은 들어가서 나누도록 하죠.”
“아, 그렇네요. 앞으로의 일정 역시 안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뒤따랐으나, 로한의 대답은 완강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다니엘은 급하게 말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162
다니엘은 로한과 아르펠을 넓은 막사 안으로 안내했다. 물론 다른 고위 신관들도 대동한 채였다. 평소 전략 회의를 하며 쓰던 곳인지, 열댓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도 충분할 만큼 크기가 넓었다.
“여기, 이 부분이 새로 늘어난 망령의 땅입니다.”
“……생각보다 크군요.”
“망령의 수는 어떻습니까?”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서… 아마 지원이 없었다면 머지않아 방어선이 무너졌겠지요.”
그는 커다란 지도 하나를 펼쳐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짚어가며 이어간 설명은 제법 이해하기 쉬워서, 아르펠 역시 늘어난 땅의 정보를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신관들 사이의 이야기는 쭉 이어졌다. 아르펠은 그들의 틈 사이에 껴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간간이 옆에 앉아있는 로한에게 시선을 주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로한은 조용히 제 손을 잡아주고는 했다.
‘…손을 잡아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물론 아르펠이 그 손길을 마다하는 일은 없었다. 눅눅하게 내려앉은 공기로 인한 불쾌함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으므로.
“이 현상의 원인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주기적으로 구역을 나누어 망령을 제거하는 것과, 이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
이윽고 다니엘은 몇몇 고위 신관을 필두로 인원을 분배했다. 일정을 짜는 것 역시 제법 순조롭게 이어졌다.
서로 간에 말이 잘 통하니 사기도 함께 올라갔다.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현상을 눈앞에 마주했으나, 그것마저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겨날 만큼.
***
하나 그들의 조사는 큰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신관들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망령의 기운과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공기 중을 맴돌고 있었다.
아르펠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면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마치 주변에 뿌연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로한 님, 아르펠 님!”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은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는 또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제 역할을 다했다. 일행이 도착하기 전부터 조사대를 이끌고 있던 이유가 있겠지. 로한 역시 아르펠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니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상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 다들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몇몇 분들은 의식을 차리시기도 했고요. 시간 괜찮을 때 한 번 들러주십시오. 다들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지라.”
하하. 로한이 민망하게 웃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다니엘은 능숙하게 화제를 틀었다. 아르펠과 로한을 번갈아 돌아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다분하게 묻어나왔다.
“두 분은 늘 함께 다니시는군요?”
그래, 이런 것. 세세하게 행동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또한 그것을 노리고 한 행동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다니엘을 응시했던 아르펠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보니 그냥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야 저희는…….”
“혹시 두 분 사이가…?”
로한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말머리를 채간 다니엘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물었다. 마치 상대를 떠보는 듯한 행동이었다.
은근한 물음이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토로하라고 종용하는 것도 같았다. 그 투명한 의도에 로한이 덜컥 몸을 굳히기도 잠시, 달싹이기만 하던 입술을 열고 마침내 운을 띄웠다.
“아르펠이 제 애인이에요.”
“허억.”
기묘한 추임새가 따라붙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뚜렷한 애정이 깃들었다. 양 볼에는 홍조가 어리고, 길게 뻗은 눈을 곱게 휘어 웃어 보이는 얼굴은 수줍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를 맞은편에 서 있는 다니엘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아르펠만은 반응이 조금 달랐다. 매번 나른하게 뜨고 있던 눈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커다래지고, 웬만하면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거센 풍랑을 맞은 듯 흔들렸다. 허억, 하는 소리를 내뱉자마자 그러한 꼴의 아르펠을 발견한 다니엘이 입을 다물었다.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감동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당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이의 솔직한 면을 발견하는 건 제법 색다른 경험이기도 해서, 다니엘은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지않아 답을 찾은 탓도 있었다.
저 사람도 감동하는구나. 그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호탕하게 웃어 보인 다니엘은 문득 떠오르는 의구심 하나를 순진하게 입에 담았다.
“그럼 그, 아르펠 님의 목에 있는 건……?”
품이 넓은 로브로 가리고 있기는 했다만, 간혹가다 한두 번 안쪽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크게 움직이다 보면 로브의 안이 드러나기도 했으므로.
다니엘은 기묘한 줄의 정체를 매번 궁금해하고 있었다.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면서 굳이 지금에 와서야 그 질문을 던진 것은, 로한이 순순히 서로의 관계를 밝힌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건.”
그러나 로한은 전과 달리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그간 이런 질문을 받지 못한지 오래되어 당황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다니엘의 얼굴이 ‘목줄’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은 말간 표정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망설이는 수밖에.
아르펠은 그런 로한을 대신해 답을 쥐여주었다.
“목줄입니다. 제 취향이라 채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네?”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아르펠은 다니엘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식의 선을 배려하지 않았다. 변명하느라, 혹은 오해를 받느라 진을 뺄 로한을 배려했을 뿐이지. 그럴 바엔 그냥 깔끔히 제가 요구한 것으로 하고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니엘은 그 자리에서 무어라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한참을 입술만 달싹였다. 거세게 흔들리는 눈이 그가 겪고 있는 혼란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하, 하하. 그, 그렇군요. 그럴 수 있죠.”
뒤늦게 내뱉은 말은 누가 봐도 납득하지 못한 자의 반응이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는 뒷덜미를 새빨갛게 붉힌 채 급하게 모습을 감췄다. 아르펠은 그런 상대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동요 한 점 없는 고요한 눈이었다.
다만 옆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은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바르르 떨리고 말았다. 지나치게 눈을 반짝이고 있는 로한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한?”
“그런 줄 몰랐어요….”
“뭐, 뭐가.”
얼마나 그 모습이 눈부셨으면, 아르펠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어느새 붙잡힌 손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려 보았다.
“취향이 그런 줄 몰랐어요.”
“……응?”
“아르펠이 좋으면 저는 다 괜찮아요. 제가 다 해줄게요.”
꼼지락거리던 손이 뚝 멈췄다. 무심코 멍청하게 되물었으나 로한은 완강했다. 그제야 아르펠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이상한 오해가 쌓였음을 직감했다. 로한의 손을 꽉 맞잡은 아르펠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아냐. 네가 좋을 대로 해…….”
하나 해명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마주한 시선이 황금을 곱게 갈아 넣기라도 한 듯 지나치게 눈부셨다. 조금씩, 그에게서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어느 면에서 즐거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펠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해하는 것 같으니 굳이 들쑤셔서 실망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아르펠은 가슴 언저리에 남은 걸리적거리는 무언가를, 그렇게 넘겨버렸다.
그게 ‘불안’이었다는 건 먼 후일에나 깨달은 사실이었다.
***
조사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그럼에도 전환점은 존재했다. 며칠 전 도착한 마신전의 일행을 뒤따라, 이번에는 천신전에서 많은 신관들이 파견된 것이다. 그중에는 레리아나와 카시아 또한 있었다.
“로한! 아르펠!”
“안녕하십니까.”
레리아나는 둘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반갑게 손을 흔들어댔으며, 카시아는 무뚝뚝한 인사를 건네왔다. 눈에 익을 정도로 많이 본 광경들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말도 마. 천신전은 지금 분위기가 별로 안 좋단 말이야. 그걸 수습하느라 대신관께서…….”
툴툴거리던 레리아나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았다. 그러다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뚝 끊긴다. 아르펠은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우울함을 풀풀 풍겨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감상은 그의 것만이 아니었나 보다.
“레리아나 님.”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했어!”
“무슨 생각 말입니까?”
“…천신께서 잠드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때문에 최근 들어 천신전의 분위기가 꽤 혼란스럽습니다. 레리아나 님은 그게 모두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예나 지금이나 자책하는 건 습관이신가 봅니다.”
“알았어, 안 할게! 그러니까 그만!”
알 만했다. 로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레리아나를 바라보았고, 아르펠은……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본 것뿐이었으나, 정작 시선을 받은 장본인은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레리아나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던 참이었다.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그들의 사이를 대뜸 파고들었다.
“두 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네?”
다니엘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한 웃음을 띤 그는 순식간에 레리아나와 카시아를 데리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사라져버리자 로한은 멀뚱멀뚱하게 눈만 깜빡여댔다.
“일이 많이 급한가 봐.”
“하긴, 그렇겠네요.”
로한과 아르펠은 그런 다니엘의 행동을 무던히 넘겼다. 얼떨결에 대화도 끊기고 끌려오기까지 한 레리아나는 아니었지만.
“대체 왜 이러는…….”
“하하. 두 분이 함께 있도록 두지요.”
뾰족한 말을 뱉어내던 그녀는 옆을 돌아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의 눈빛이 어쩐지 흐릿했다. 함께 있도록 두자는 목소리에는 아련함마저 배어있었다.
결국 레리아나는 황당하게 로한과 아르펠이 있던 방향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냐며.
163
죽음의 기운이 땅에 녹아들고, 그로 인해 생명이 썩어들며, 망령이 끊임없이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곳.
그로 인해 ‘망령이 들끓는 대지’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그 끔찍한 명성에 비해 이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그리 참혹한 편이 아니었다.
망령은 이지가 없는 존재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탐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라나지만 이를 뒷받침할 지능이 부족했다.
최근 들어 발생한 부상자 역시 망령의 수가 갑작스레 증가한 것이 원인이 되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자는 급감했다. 대부분의 망령들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신관들 사이에서 당연한 명제로 여겨졌다. 로한과 아르펠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그 상식을 뒤엎을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할당된 구역을 돌아보던 중 옆 구역의 하늘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붉은색. 잿빛 하늘 위를 물들인 선명한 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구조 요청.’
이를 알아차리자마자 로한은 곧장 몸을 움직였다. 마침 근처에 있던 덕분에 가장 먼저 신호탄이 터진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주한 건, 지옥도 그 자체였다.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크아아악!”
“젠장! 아까부터 끝도 없이…!”
한쪽에 부상자들이 몰려있었다. 하나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부상을 입지 않은 신관들, 혹은 부상을 입었으나 운신이 가능한 신관들이 그 주변을 보호하듯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검푸른 파도가 몰아쳤다.
<로한!>
“알고 있어요!”
아르펠의 외침에 로한이 곧장 땅을 딛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내 검푸른 물결 한복판에 검격이 한 줄기 섬광처럼 꽂혔다. 끼에엑! 검에서 피어오른 거대한 마력이 단숨에 몇십의 망령을 집어삼켰다.
“지원이다! 지원이 왔다!”
“로한 님이 오셨어!”
“아, 드디어……!”
전장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마력의 폭풍은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로한의 등장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사람의 안도를 불러일으켰다.
위태로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안정되었으나, 그렇다고 한들 지옥도나 다름없던 광경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십이나 되는 신관들이 다쳤다. 과연 저들 중 죽은 사람은 없을까. 착잡함에 표정을 굳힌 로한이 가까이에 있던 신관을 향해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그건… 나중에,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앞을 보십시오!”
그러나 둘의 대화가 성사되는 일은 없었다. 다시금 사방에서 몰려오는 망령들 때문이었다.
이를 악문 로한이 근처에 성력을 쓰는 신관이 있는지 확인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기를 한참, 그는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꼈어?>
“…네.”
그건 로한에게 맞춰 간간이 힘을 쓰던 아르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본 로한이 답했다.
“이놈들,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상식이라 믿고 있던 것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었다. 로한이 합류하며 침착해진 일행이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 다른 신관들까지 신호탄을 보고 합류해 그들을 도왔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악이었다. 부상자 사십에 사망자 열, 한 번의 조사로 입은 피해로 따지자면 역대급에 속했다.
“수고했어.”
“아냐. 네가 더 고생했지. 아르펠도 고생 많았어요.”
부상을 입고 본부로 옮겨진 이들 중에는 중상을 입은 자들도 있었으나, 소식을 듣고 곧장 돌아온 레리아나 덕분에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작 치료를 하고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미묘했지만 말이다.
아르펠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짐작했다. 죽은 열 사람 때문이겠지.
모두를 살렸으나 모순적이게도 모두를 살리지 못했다. ‘치유’의 권능을 가진 레리아나는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을 되살릴 힘이 없었으므로.
카시아는 그런 레리아나를 토닥여 주었다. 투박한 위로였다.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그게 사실입니까?”
대화의 공백을 메꾸듯 카시아가 다른 화제로 말문을 열었다. 대뜸 내뱉은 말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질문의 의미를 눈치챘다.
“네. 기습을 한 것도 모자라 부상자를 먼저 노렸답니다. 그래서 사망자도 생긴 모양이에요. 제가 합류했을 때도…… 제가 있는 쪽을 자꾸만 피해 갔고요.”
“망령이 똑똑해진 거야, 설마?”
“그거야 나도 모르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로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구겨진 미간 사이로 한껏 불쾌함이 묻어났다. 부상자들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물론이고 자신이 합류한 직후 목격한 것들까지, 하나같이 찝찝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조직적이다’라는 판단을 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저가 오른쪽에 있으면 왼쪽을 노리고, 왼쪽에 있으면 오른쪽을 노린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영악했어.”
아르펠 또한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레리아나가 단숨에 심각한 낯을 했다. 아르펠까지 저럴 정도면…….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아르펠은 주위를 둘러봤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러나 부상자가 어느 정도 정리된 만큼, 곧 있으면 다니엘이 신관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시작할 것이다. 로한 역시 그 안에 포함되겠지.
그 안에 전해줘야 했다. 조용히 로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르펠?”
“말할 게 있는데.”
로한 뿐만 아니라 레리아나와 카시아의 시선까지 아르펠에게 몰렸다. 잠시 세 사람을 돌아본 그가 이어 말했다.
“아마 지능은 없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지능이 있으면 감정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저것들에게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레리아나의 물음에 답한 아르펠의 말은 그런 확신을 담고 있었다.
망령이 감정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원색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랬다면 같은 힘을 가지고 있던 아르펠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게선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그럼, 망령을 조종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세 사람은 모두 아르펠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카시아 역시 나름의 배려를 발휘해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괜찮네요, 그거.”
로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게 카시아의 발언은 몇 분 뒤, 회의의 주요 안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
다음날, 막사를 나서는 탐사대의 낯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망령, 그리고 회의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새로운 존재까지. 갑작스레 뒤바뀐 상황은 여러모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신관들은 ‘망령을 조종하는 존재’가 터무니없다고 주장했으나, 대부분은 이를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 여겼다. 망령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공격해온 것부터가 이미 상식을 깨부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로한이 이끄는 탐사대에 신관 A가 있었다.
“후우우…….”
그는 사뭇 비장한 얼굴로 조사대에 합류했다. 사망자 열 명이라는 소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곳이 까딱하면 목숨이 달아날 수 있는 전장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실감했고,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신관 A는 조금 더 안심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게, ‘로한’이지 않은가!
마신의 축복을 받은 것도 모자라 구원교의 천적으로 불리던 그 사람이다. 어린 나이서부터 구원교의 지부란 지부는 모조리 박살 내고, 두 명의 간부까지 처리한 로한의 이야기는 그에게 영웅전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탐사가 시작되고, 멀리서 훔쳐본 로한의 모습도 신관 A가 꿈에 그리며 동경하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와…….”
“마력 봐.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혼자서 다 하셔도 되겠는데.”
여기저기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신관 A의 목소리도 하나쯤 섞여 있었을 것이다. 물론 동경하는 분께 밉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열심히 마력을 움직이며 제게 달려드는 몇 안 되는 망령을 처리해나갔다.
탐사는 원활했다. 전해 들었던 ‘망령을 조종하는 존재’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누구 하나 다치는 사람 없이 쭉쭉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신관 A는 문득 의구심을 느꼈다.
‘……그 신관이 없는데?’
로한 님을 볼 때면 항상 곁에 있던 검은 머리의 신관.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친해 보였기에 존재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탐사가 시작된 이후로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한 듯했다.
신관 A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없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자연히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뒤쪽 행렬에 속해있던 그는 우연히 썩은 나무 위에 늘어져 있는 거미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미줄?”
이내 신관 A가 반색했다. 이건 쓸 만한 발견이었다.
망령의 땅에는 생명체도, 생명체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곳에 거미줄이라니? 자신이 동경하는 이에게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단숨에 기분이 들뜨고 말았다.
실실 웃은 그가 거미줄을 손으로 톡 건드렸다. 가볍게 흔들린 거미줄이 툭 끊겼다.
“생각보다 약하네.”
딱히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끊어지다니. 뭐, 강도야 별 상관없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긴 신관 A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일행은 저 앞쪽으로 멀어진 상태였다. 일단 위치를 기억한 다음 합류하고 말씀드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읍!”
갑자기 무언가가 발목을 감쌌다. 눈 깜짝할 새에 몸을 타고 올라온 것은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떨리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신관 A는 제 몸을 꽁꽁 감고 있는 것이 하얀 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미줄. 거미줄이었다.
164
거미줄에 돌돌 감긴 몸이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 순간 신관 A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아. 이렇게 죽는 건가?’
죽음을 각오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될 줄은 몰랐다. 칭찬에 눈이 멀어 한눈을 팔다 죽다니!
하나 이제 와서 후회한다 한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치처럼 겉을 에워싸고 있는 거미줄의 틈으로 몸을 꿈틀거리며, 최선을 다해 숨구멍을 찾아 공기를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끌려가던 몸이 점점 속도를 줄였다. 그러다…… 어디에, 매달린 건가? 묘하게 몸이 아래로 치우쳤다.
‘젠장…….’
기분이 끝도 없이 우울해졌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도 같았다.
성력을 일으켜봐도, 손톱을 세워 긁어봐도, 발을 움직여 강하게 걷어차 봐도 거미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만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더 이상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잠들어서, 얌전히 ‘양분’이 되도록…….
콰아아앙!
커다란 굉음이 깊은 늪 아래로 잠식되던 의식을 단번에 일깨웠다. 파드득 몸을 떤 신관 A가 진저리를 쳤다. 방금 무슨 생각을?!
“허억!”
“…아직 의식을 잃지 않으셨군요. 잘 버텨주셨습니다.”
동시에 세상이 갈라졌다. 아니, 눈앞을 가득 메꾸고 있는 ‘거미줄’이 깔끔히 두 동강이 난 것이다.
신관 A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정면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마력이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웠으므로.
로한. 그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존재가, 제게 손을 내밀고 있…… 손을?
“혹시 일어날 수 없으신 겁니까?”
“아, 아뇨!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살포시 웃어 보인 로한이 손을 거둬갔다. 이런. 신관 A가 속으로 절규했다. 여기선 못 일어나겠다고 했어야지……!
“그럼,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제게 말입니까?”
“예. 보시다시피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 말이 현실감을 훅 불어넣었다.
신관 A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새까맣게 썩어들어간 숲, 그 사이에 온통 거미줄이 처져 있었다. 거기까진,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나 거미줄에 매달린 수십 개의 동그란 고치들은…… 신관 A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직전까지 비슷한 처지였으므로, 모를 리가 없었다.
저 고치들은 모조리 사람이었다. 미지의 존재에게 붙잡혀 이곳까지 끌려온 죄 없는 사람들.
몇몇 고치는 이미 깨져있었다. 그러나 의식을 차린 사람은 없었다. 힘없이 땅 위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을 바라본 그의 낯이 한층 창백해졌다.
신관 A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로한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죽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곧 있으면 숲의 주인이 찾아올 겁니다. 전 그전까지 최대한 많은 고치를 깰 생각입니다. 신관님은 풀려난 사람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십시오.”
로한의 설명을 들을수록 신관 A의 얼굴은 차분해져 갔다. 이어 말이 끝을 맺었을 때, 그는 사뭇 비장한 기색을 띤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자, 나만이 도울 수 있는 일이다.
이윽고, 로한의 검이 움직였다.
***
로한의 말대로 곧 ‘숲의 주인’이 돌아왔다. 깨진 고치에서 사람을 구출해 곧장 안전한 구역으로 옮기기를 반복하던 신관 A는 거대한 크기의 ‘거미’를 보고 넋을 놓아야만 했다.
아니…… 저걸 ‘거미’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거미의 특징과 맞게 다리는 8개였고 몸통은 크게 2개이긴 했다.
하나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눈은 붉게 빛났고, 두 발로 걸어 다녔다. 심지어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다리를 손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죽인…… 다. 죽, 여!」
끔찍한 외형에 동요하기도 잠시, 그것이 말을 내뱉는 순간 신관 A는 깨달았다.
괴물 같은 외형, 지독한 망령의 기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하나같이 익숙한 특징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건, 구원교의 간부다.
사방으로 뻗친 거미줄이 로한을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칼날의 형태로 뭉쳐진 마력은 눈 깜짝할 새에 거미줄을 베어냈다.
로한의 검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눈부신 속도로 나아간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거미의 몸통에까지 상처를 내었다. 푸른 피가 쏟아져 내림과 동시에 기괴한 비명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끼야아아아악!!!」
신관 A가 귀를 막았다. 여성의, 아이의, 노인의 울음소리를 한데 모은 것만 같은 음이었다. 갈라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소름 끼치기 그지없었다.
「……죽여, 죽여! 아이야, 저것을, 저것의 목을, 내게……!」
절규하다시피 지르던 비명을 멈춘 거미는 토막 난 말을 더듬더듬 내뱉었다. 신관 A는 거기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생각보다 더 멍청하고, 단순한데…….
물론 생각만 열심히 했을 뿐, 그는 열심히 로한이 부탁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신관 A가 숨을 골랐다.
그 순간이었다.
“……어?”
땅이 흔들린다. 공기가 떨리는 것만 같았다. 착각인가?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신관 A는 제 앞에 나타난 작은 그림자 하나를 바라보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숲의 주인이 찾아오기 전, 로한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명심해 주세요. 만약 제가 이 신호를 보내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행동을 멈추고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든 좋습니다.’
숨자.
그 진지한 목소리를 기억해낸 신관 A는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그가 고른 장소는 몸 하나는 거뜬히 숨길만 한 작은 구덩이였다. 그 아래로 내려가 숨을 죽인 신관 A는 머리만 살짝 내밀어 바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헉……!”
저도 모르게 숨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망령이 몰려오고 있었다. 수십, 백, 아니, 수백……? 몇 마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한 수였다.
“젠장!”
그리고 그중 몇 마리는 당연하게도, 신관 A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당연히 망령들이 자신을 공격하리라 생각했다. 구덩이에 몸을 숨겼다고는 하지만 바로 근처에 있다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급히 힘을 끌어올리면서도 생각했다. 저걸 다 상대할 수 있을까?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로한 님이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직접 경고까지 해주셨는데, 괜히 이상한 장소를 골라서…….
하지만 이는 하등 쓸모없는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망령들은 신관 A의 코앞에 있으면서도 관심이 없다는 듯 그에게서 등을 돌려 가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태도였다.
‘왜? 왜 공격을 안 하지?’
아니, 애초에 어디로 가는 거지?
그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신관 A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설마. 차곡차곡 쌓이던 불안감은 너머의 광경을 눈에 담자마자 펑 터져버리고 말았다.
“로한 님!!!”
저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단언컨대, 그는 제 인생에서 이토록 끔찍한 것을 목도한 적이 없었다.
먹구름이 가득 찬 잿빛 하늘 아래, 무서운 기세로 불어난 검푸른 파도가 한 곳으로 내리쳤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재앙에 대항할 수 없다고들 하던가? 말 그대로였다. 그것은 폭풍우와도 같았으며, 홍수와도 같았고, 쓰나미와도 같았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짐승의 아가리가 생을 앗아가기 위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뒤에서 거미가 히죽, 입을 찢어 웃었다. 더없이 끔찍한 형상에 온몸이 무력해졌다.
그리고.
“……어어억!”
정말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카시아가 말한 가설이 맞았네요.”
“그러게.”
몸을 가볍게 털어낸 로한이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숲은 휑하기만 했다. 직전까지 수백의 망령이 존재했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득이 꽤 많은 싸움이었다. ‘망령을 조종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증명됐고, 간부 하나까지 덤으로 처리했으니까.
아르펠의 시선이 바닥에 툭 떨어진 가면에 닿았다.
굳이 신경 쓰이는 걸 꼽자면.
“…조금 쉽지 않았어?”
생각보다 전투가 싱겁게 마무리됐다는 점일 테다.
거미의 외관을 한 구원교의 간부. 그것의 습성은 익히 알려진 거미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거미줄로 먹잇감을 낚고, 그것을 돌돌 묶어놓으며, 먹기 좋은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인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움직였기에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간부는 기다렸다는 듯 수백에 가까운 망령을 한꺼번에 꺼내 들어 로한을 공격했다.
그에 로한은 제 모든 힘을 폭발하듯 터뜨렸다. 마력은 순식간에 일대를 집어삼켰고, 수백의 망령은 그대로 녹아 모습을 감췄다. 아르펠은 짧은 시간이나마 힘이 빠진 로한을 보호하기 위해 권능을 일으켰으나…….
‘……죽었는데?’
간부는 그 폭발에 휩쓸려 죽어 있었다.
생각보다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로한이 찝찝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고개를 저어 기분을 마저 털어낸 그가 가지고 있던 신호탄을 터뜨렸다. 곧 있으면 지원 인력들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전까지, 아직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을 마저 구해내야 했다.
아르펠 또한 로한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가 신관 A가 숨어들은 구덩이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
널브러진 인영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펠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들썩이는 가슴팍, 감긴 눈가에 번갈아 시선이 닿았다.
“깨어난 거, 알고 있습니다.”
“흐헉.”
기절한 척을 실패한 신관 A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꼴이 영락없이 찔리는 구석이 있는 어린아이를 닮아있었다.
물론 그가 찔리든 말든, 아르펠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굳이 이 남자를 깨운 것은 구조 활동을 도우라는 의미였지, 대화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신관 A는 그럴 마음이 없었던 듯했다.
“그…….”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등을 돌리려 하던 아르펠이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독촉 하나 담겨있지 않은 덤덤한 눈길 덕분일까, 신관 A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낼 수 있었다.
“혹시, 로한 님의 검이, 그, 아르펠 님……?”
“봤군요.”
“히이익!”
“……?”
마력의 폭풍에 휩쓸려 못 봤을 줄 알았는데. 드문드문 이어진 물음에 솔직한 감상을 내뱉은 것뿐이었건만, 어째 심상치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 공포에 질린 듯 창백한 낯을 바라보며 아르펠이 고개를 기울였다.
신관 A가 머릿속으로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죽어줘야겠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아르펠이었다.
165
분주하게 움직이는 신관들 덕에 상황은 제법 빠르게 수습되었다. 로한은 그사이에 섞여들어 손을 거들었다. 아르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신관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그런고로, 로한과 아르펠의 대화가 다시 이어진 것은 소란이 얼추 마무리된 이후의 일이었다. 불퉁한 기색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목소리에 아르펠이 고개를 돌렸다.
“신관?”
“사람들 찾아오기 전에 얘기하던 신관이요.”
“아.”
그 사람. 잔뜩 겁에 질려선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던 이름 모를 신관의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아르펠은 느리게 시선을 굴려 다시금 로한의 낯을 살폈다. 가늘게 뜬 눈동자에는 옅은 불만이 묻어있고, 삐죽이는 입술 끝이 묘하게 서운해 보였다.
“검이었던 걸 들켜서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 그 외엔 별거 없었고.”
상대가 기절한 척을 하고,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말을 아꼈다. 도리어 그 신관은 로한을 따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간간이 시야의 구석에 비쳤던, 눈에 거슬릴 정도의 반짝이는 눈빛을 떠올린 아르펠은 가만히 웃어 보이기를 택했다. 어찌 됐든 이러한 사소한 질투를 받는 일은, 그에게 퍽 기꺼운 일이었으므로.
“…그래요?”
로한 역시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그는 ‘비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망령의 땅에 발을 들인 이상, 또 낯선 이들 사이에 뒤엉켜 생활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아르펠과 마검의 연관성은 완전히 배제하기가 어려웠다. 아르펠이 있을 때는 검이 없을 테고, 검이 있을 때는 아르펠이 없을 테니까.
언젠가는 이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 로한과 아르펠은 망령의 땅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이야기를 나눠두었다. 피치 못하는 상황이면 이를 밝히자고.
그러니 비밀을 알게 된 신관의 입이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둘에게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알려진다 하더라도 이미 각오해둔 일이 조금 더 일찍 눈앞에 닥치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이왕이면 입이 무거운 쪽이 더 좋을 테지만 말이다.
거짓말처럼 눈매가 누그러진 로한에 아르펠은 습관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을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살짝 내리는 것에 가슴 안쪽이 따뜻해졌다.
마음 같아선 입이라도 맞추고 싶지만…… 아르펠은 불쑥 솟아오르는 욕심을 내리눌렀다. 간부와 치른 전투의 흔적이 생생한 이곳에서 하기엔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그래.”
그러니 돌려줄 답은 이것뿐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
“간부들이 망령을 조종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거미의 모습을 한 구원교의 간부. 로한은 그와 싸우면서 두 눈으로 직접 여러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간부의 말 한마디에 망령이 움직인 것이라든가.
혹은 그 간부의 눈 또한, 불길하기 그지없는 붉은색이었다든가.
이전에도 그랬듯, 로한은 그것에서 낯선 신의 흔적을 읽었다. 여태껏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음성 하나를 떠올리는 건 덤이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신의 안배는 두 개다. 하나는 네가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뭐. 네 예상이 맞을걸?>
처음 신전에 도착했을 적, 로한과 아르펠은 디오넬과 대화를 나눈 후 마신을 마주했다. 방금 떠올린 말 또한 그때 들었던 것 중 하나였다.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당시의 로한은 대놓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제아무리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신이라 하더라도 ‘신의 안배’라는 이름값만큼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이 황제라니.
하지만 마신은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며 단언했다. 지나치게 확신이 어린 말이었다. 걱정할 일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 따지고 싶었지만 그는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알면서도 부러 말하지 않는 것이 뻔했다. 하나 로한은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는 한편, 차마 그것을 마신에게 토해낼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아르펠과 닮은 빌어먹을 저놈의 얼굴 때문이었다.
<야, 그놈이 내 얼굴을 닮은 거라니까? 대체 몇 번을… 어쭈, 무시해?>
이어 귀를 맴도는 과거의 목소리를 과감히 무시했다. 덕분에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로한은 다시 눈앞에 집중할 수 있었다.
로한의 손에 의해 죽은 간부 하나, 그리고 다른 구역에서 발견된 또 다른 간부의 흔적.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두 가지 주제 때문인지, 회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군요.”
레리아나가 내뱉은 말은 추측에 불과했으나, 가능성이 높았다. 다니엘 역시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이 지역에서 구원교의 간부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망령의 움직임, 땅의 변화…… 시기가 괜히 맞물릴 일은 없겠지요.”
“확실히, 간부 하나가 토벌되고, 또 다른 간부의 흔적이 발견된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사안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야 합니다. 남은 셋의 간부가 모두 이곳에 숨어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투로 부상을 입은 자들이 많습니다! 운이 좋아 아무도 죽지 않았을 뿐이지, 조금만 시기를 놓쳤다면 사상자가 무수히 많이 발생했을 겁니다. 전력 차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토벌에 나섰다간 분명 전력 피해가…….”
시끄러운 음성이 여러 번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레리아나는 퍽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던지자마자 여기저기서 말이 달라붙고, 자기네들끼리 신경전을 시작해버렸으니까.
아르펠은 무관심한 낯으로 그들을 관찰하고만 있었다. 와중, ‘당장 토벌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다’라는 주장을 열렬히 내세우는 신관에게 조금 더 시선이 길게 닿았다 떨어졌다.
이목구비를 응시했지만 딱히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저 기운만큼은…….
“아.”
“왜요?”
“…아니.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기운만큼은, 새어 나오는 감정만큼은 익숙했다. 유독 불안이 잘 느껴지는 신관이었지. 중년 남성의 얼굴에 흐릿한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그에 로한 역시 아르펠이 시선을 주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만 하다는 듯 뒤따른 탄식은 덤이었다.
“유명한 편이죠.”
“유명해?”
“네. 저희 신전에서도 유독 보수적으로 구는 자라. 최근 들어 부상자가 늘었던 게 꽤 불안했나 보네요.”
로한은 다른 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아르펠의 귀에 속닥거렸다.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게 된 아르펠은 고맙다며 그의 허벅지를 토닥여 주었다.
“……끝이 없군요.”
근처에 앉아있던 카시아가 중얼거렸다. 아르펠은 로한에게 손길을 내어주면서도 그녀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양측 모두 ‘간부를 토벌해야 한다’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문제는 토벌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한쪽은 최대한 많이 대비해야 한다, 다른 한쪽은 최대한 빠르게 시작해야 한다며 맞붙으니 좀처럼 타협이 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잠자코 말을 듣고만 있던 레리아나가 불쑥 손을 든 것은 그때였다.
“저기…….”
성녀라는 이명이 있는지라 자그마한 한마디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잠시나마 몸을 움찔 떨었던 레리아나는 빠르게 표정을 정돈하곤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저랑 로한이랑 반반씩 나눠서 하면 안 되나요?”
귀찮은데, 라는 말이 생략돼있는 것 같은 건 과연 기분 탓일까. 이윽고 막사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
결론적으로 보면 레리아나의 의견은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했다.
로한과 레리아나의 지휘, 고위 신관의 적절한 배치, 넉넉한 전력은 멍청한 간부를 적당히 상대하기에도,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수많은 망령에도 대처하기에도 적당했던 것이다.
“날개를 먼저 공격하십시오!”
로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마력과 성력이 뒤섞인 구체들이 하늘 위로 쏘아져 펄럭이는 날개를 꿰뚫었다.
거대한 날개, 몸을 둘러싼 비늘, 세로로 찢어진 동공, 머리 위에 돋아날 날카로운 뿔, 거대한 골격까지.
토벌을 진행한 후 그들이 마주한 것은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여겼던 ‘드래곤’이었다. 아니, 흔히들 생각하는 압도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으니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은 무리일까.
인간과 드래곤을 반쯤 섞어놓아 기괴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눈앞에 등장한 구원교의 간부라는 건 그 누구도 의심치 않은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쉽잖아!”
“뚫어라! 최대한 많은 공격을 쏟아부어! 땅에 떨어뜨려야 한다!”
“방어선을 구축해라! 망령에게 밀리지 마!”
여기저기 고함이 오고 갔다. 생각보다 원활히 진행되는 토벌에 신이 난 목소리도 있었고, 공격을 서둘러 하라며 재촉하는 목소리도, 근처로 다가온 망령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쿠웅!
얼마 안 가 하늘에 있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묵직한 소음이 일었다. 발바닥으로 거대한 진동이 전해졌다. 칼날 위로 마력을 두른 채 땅을 박차는 로한을 필두로, 사방에서 쏟아진 공격이 간부의 몸을 노렸다.
커다란 몸체는 이를 피하지 못했다. 끼에에엑!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것만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지고, 놈의 숨이 끊겼다.
“…….”
여느 때처럼 간부의 몸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땅 위로 툭 떨어져 반으로 토막 난 가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마주해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기운이 그로부터 새어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로한 님!”
“맞습니다!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고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네. 다들 휴식하십시오. 잠시 후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예의상 답하며, 로한은 직전에 마주한 눈을 떠올렸다. 불길하게 빛나는 그 붉은색의 눈동자를.
“아르펠.”
<응.>
곁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물러났을 때, 로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전과 다르게 가라앉아있는 음성이었다. 한결같은 담담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너무 쉬웠어요, 이번에도. 이상할 정도로.
그에 로한이 느리게 답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166
망령의 땅 어딘가에 숨어있는 간부를 토벌하기 위해선 그들을 찾아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긴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모든 게 썩어들어간 대지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계속해서 사방을 둘러보고, 집중해 살펴야 했으니 누군가는 눈의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기야 할 테지만.
간부 하나도 무사히 토벌했겠다, 로한의 뒤를 따르는 이들의 사기는 한껏 고취되어 있었다. 그것을 소리 내 떠드는 이들은 없었지만 상기된 얼굴과 반짝이는 눈만 봐도 어렵지 않게 파악이 가능했다. 그런 그들을 맨 앞에서 이끌던 로한은…….
<아직도 신경 쓰여?>
“네, 조금.”
제 손으로 간부를 꺾었을 때 느꼈던 기묘한 찝찝함을 계속해서 곱씹는 중이었다. 허리에 찬 검이 웅웅 떨렸다. 얼굴이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로한을 위해 간간이 말을 거는 아르펠 탓이었다.
붉은 눈의 간부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신의 기척. 과거에는 이것에 대해 무지했지만, 신전에 들렀을 적 마신과 대화를 나눈 로한은 그 현상이 또 다른 ‘신의 안배’로부터 비롯된 현상임을 알았다.
그렇게 조종당하는 놈들은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본능이 강해지는 듯했다. 그들은 전략이라는 것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고는 했으니까. 당연하게도, 이는 간부들의 전력을 크게 깎아 먹는 요소가 되었다.
과거, 베모스 마을에 있을 적 부딪혔던 간부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마을의 특이한 문화, 고립된 위치, 민간인의 목숨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자 했던 이가 바로 그였으므로.
하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근의 전투는 너무 수월했다.
만약 이게 노린 것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는데도.
아르펠이 그런 로한의 불안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로한을 다독였다.
<걱정 마. 아직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들이 이곳에 무언갈 숨겼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답하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아르펠의 속은 잔뜩 복잡해져 있었다.
구원교가 ‘무언가’를 이곳에 숨겼다는 걸 안다. 그가 읽은 소설에는 그렇게 적혀져 있었으니까. 아르펠은 망령의 땅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를 확신했고, 유의미한 단서를 발견한다면 로한에게 이를 정리해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졌다. 황제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일까? 자꾸만 없던 일이 생겨나고, 모르는 것이 튀어나왔다. 이제 그 또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침묵하는 와중에도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로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근차근 말해줄 수 있는 때를 기다리겠다는 듯.
“…로한? 네가 왜 여기 있어?”
“레리아나? 네가 거기서 왜…….”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이들을 맞닥뜨렸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기척에 긴장하고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만남이 당황스럽게 느껴진 건 로한 측만이 아닌 듯했다. 맞은편, 그러니까 레리아나의 뒤를 따르고 있던 신관들 또한 이 갑작스러운 마주침을 당황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주춤거리는 몸, 웅성거리는 소음에 그러한 기색이 다분히 묻어났다.
남은 하나의 간부를 추적하며 온 것이었으나 정반대 편에서 일행이 나타났다. 이 흔적을 계속해서 따라가도 ‘간부’는 나타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디서 온 거야?”
“세 번째 구역 쪽.”
“여기서 정 반대편인데…… 하나는 토벌했지? 다른 간부는 발견한 적 없고?”
“없어. 네 쪽은…….”
“우리도. 그래서 남은 하나 좀 잡아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따라온 건데.”
당연하게도 추적은 중단되었다. 적당히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들을 뒤로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모인 로한과 레리아나는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출발한 위치는 끝과 끝. 완전히 반대편이다. 그곳에서 각자 간부를 하나씩 토벌했고, 남은 하나를 찾기 위해 주변을 수색하던 중 흔적을 발견해 그것을 뒤따라왔다…… 가 그간의 과정인데.
“…너무 똑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서로의 이야기가 닮아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순간, 가슴 언저리에 남아있던 찝찝함이 몸집을 크게 불렸다.
“레리아나 님.”
그 불안에 불을 지핀 것은 카시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건넨 말이었다.
“흔적이 끊겼답니다.”
“……끊겼다고? 여기서?”
“네. 로한 님이 거쳐 오셨다던 경로를 제외한다면요. 애초에 이 주변에 저희가 찾는 간부는 없었던 듯합니다.”
“잠깐, 그 말은.”
조곤조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은 레리아나의 얼굴이 금세 희게 질렸다. 검의 모습을 유지한 채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르펠이 중얼거렸다.
<유인당한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예상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였다. 고의적으로 흔적을 남기고 탐사대를 한 곳으로 유인하는 것.
“……하지만 이곳에는.”
“그래,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잖아. 우리를 유인했다고 쳐. 하지만 뭣 하러?”
나직한 로한의 중얼거림에 레리아나가 이어 말을 덧붙였다. 그 물음만큼은 카시아 또한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고민에 빠진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르펠.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요?”
<…기다려봐.>
일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서일까, 로한은 아르펠을 조심스레 붙잡고는 ‘특별한 것’이 없냐며 물었다. 약간의 공백 후 대답한 아르펠은 그의 말대로 곧장 기감을 퍼뜨렸다. 넓게 퍼져나간 희미한 마력이 쭉 뻗은 대지와 그 아래 파묻힌 썩은 토양을 더듬어 나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아르펠은 저도 모르게 흘려보냈던 마력을 거둬들이고 말았다. 검을 차고 있는 로한도,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레리아나와 카시아도 눈치챈 눈에 띄는 변화였다.
“방금 마력이 훅 들어가지 않았어? 아르펠, 이상한 거라도 있는 거예요?”
“저리 가. 들리지도 않으면서 뭘.”
“말은 나도 걸 수 있잖아! 대답은 네가 대신해주면 되고.”
“레리아나 님. 잠시만요. 뭔가 이상합니다.”
부르르. 말이 없는 검신이 떨렸다. 레리아나를 향한 시선을 거둬들인 로한이 곧장 아르펠의 상태를 살폈다. 풀어진 낯에 균열이 가고, 그 위로 초조함이 덧발라졌다.
“아르펠.”
<…….>
“…아르펠? 대답해봐요. 아르펠!”
“왜 그래! 아르펠이 대답을 안 해? 뭐 잘못된 거야?”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다급해졌다. 뒤를 따른 레리아나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검으로 변한 아르펠의 말을 들을 수는 없지만, 일그러진 로한의 얼굴만으로도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이상해.>
다행히 얼마 안 가 아르펠의 음성이 뇌리를 울렸다. 그것만으로도 꽉 조여들었던 심장이 풀어지고, 가파라진 숨이 가라앉는 듯했다. 로한의 표정을 지표 삼은 레리아나는 그의 낯이 빠르게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안 돼. 로한,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마.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 머리가… 머리가 아파. 기분이, 이상해. 불쾌해.>
하지만 그건 잠깐에 불과했다. 이어지는 아르펠의 말을 들은 로한이 종잇장처럼 표정을 구겨버렸으므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로한이 등을 돌렸다.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르펠이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처음이, 아니었다.
로한은 반사적으로 떠오른 어느 날의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로한, 왜 그러는데? 어딜 가려고!”
뒤에서 붙잡는 레리아나만 없었더라면 곧바로 걸음을 떼었을 것이다. 초조함, 불안함, 두려움…… 그러한 감정이 한가득 서려 있는 여린 낯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눈치챘다. 아르펠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르펠이 아파해. 이곳이 이상하대. 먼저 갈 테니까 너도 다른 사람들 데리고 물러나. 카시아 신관, 당신도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리……!”
하지만 남길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다였다. 급히 말을 내뱉은 로한은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몸을 돌려 둘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정확히는, 아르펠이 말하는 ‘이상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뒤에서 뭐라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로한은 한 번 나아간 발을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앞을 향해 디디던 걸음이 눈 깜짝할 새에 빨라졌다.
“아르펠.”
<…….>
“대답해요, 아르펠.”
<응.>
“조금만 참아요, 제가… 제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응. 고마워.>
짧은 대화가 몇 번이고 이어졌다. 주로 말을 거는 쪽은 로한이었다. 아르펠이 다시 정신을 잃기라도 할까 봐, 악몽 같았던 나날이 또다시 재현되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잔뜩 안달이 난 채로.
아르펠은 그럴 때마다 작은 목소리로라도 로한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럴 때면 끊임없이 치솟는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듯했다.
그러니 저절로 긴장이 느슨해졌다. 그래.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르펠이 다시 이상 증세를 보일 일도 없을 테니까.
“안돼.”
“…무슨, 말이에요?”
“난…… 여기서 못 나가.”
하나 그 바람은 머지않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순순히 로한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아르펠이 한순간 모습을 바꾸었다. 대뜸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것에 당황한 로한이 다시 그를 이끌려 하기도 잠시, 아르펠은 제게 내밀어진 로한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었다.
“무언가가 날 붙잡고 있어.”
이윽고 들려온 말에 로한이 직감했다. 아, 이미 잘못될 대로 잘못됐구나. 처음부터 이 땅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됐구나.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167
로한의 손은 아르펠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에 멈춰 섰다. 아르펠은 그에게서 짙은 죄악감을 읽었다. 제 앞에 들이닥친 일이,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아르펠은 그를 다독여주려 했다. 띵하게 아파 오던 머리도 괜찮아졌고, 자꾸만 불규칙적으로 일렁이던 마력도 사그라들었다.
하나 로한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히힉. 히히힉. 기이한 웃음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아르펠이 손을 멈춤과 동시에 로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눈가와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기세가 풀풀 흘러나왔다.
주변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은 없는 듯했지만…… 드륵. 드르륵. 딱딱한 무언가가 땅을 긁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히히히힉. 웃음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앞쪽? 아니, 아래. 소음의 근원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한 로한이 시선을 내렸다.
「히힉. 힉. 아르페, 엘.」
“……아르펠. 움직일 수 있어요? 내 뒤로 와요.”
그것은 가면이었다. 반토막이 난 가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 그것은 몇 번이고 소름끼치는 음성을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목을 긁는 듯한 웃음 뒤에 익숙한 이름이 붙었다. 로한이 곧장 아르펠을 제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르페엘. 아르, 펠. 이리 와. 히힉. 이리로 와.」
“…….”
「힉. 히히힉. 나와 하나가 되자아, 아르페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가면이 지껄이는 말을 잠자코 들어보던 로한은 ‘나와 하나가 되자’ 대목에 들어선 순간 더 이상 참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반토막 나 있던 가면은 그의 발길질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바스러졌고, 차차 부서져 내리며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가면의 형체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익숙한 붉은 빛의 연기였다.
그제야 로한의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이지만 풀렸다. 직접 말을 걸어온 순간부터 가면의 정체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구원교 간부의 것이겠지.
가면은 간부의 상징이다. 다수의 간부를 상대해 본 로한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간부가 죽으면 가면엔 금이 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안배에 당한 놈들에게선 붉은빛의 연기도 함께 새어 나오고는 했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방금 저 가면의 주인은 완전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 하나였다.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았다. 이 근처에 간부는 없었다. 그러니 당장 아르펠을 위협할 존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떠올리고만 로한이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여전히 아르펠에게서 등을 진 채로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이었다.
“미안해요.”
“로한.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미안해요…….”
나지막한 사과가 흘러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로한이 천천히 지난날을 되짚었다. 수많은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빨리 와주실 줄은 몰랐는데……!’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당시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말이 이제서야 거슬리기 시작했다.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간부의 흔적을 따라가다 유인을 당했고, 그렇게 발을 들인 망령의 땅 깊은 곳에서 아르펠은 두통을 호소했다. 그를 데리고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굴러온 것인지 모를 간부의 가면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높은 확률로 그들은, 아르펠을 노리는 거겠지. ‘왜’라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이동할 때, 이상할 정도로 악착같이 달려들던 구원교의 습격자들이 생각났다. 다시 되새겨보면 그들의 의도는 투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아르펠을 노리고 있었다.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듯.
어쩌면 아르펠이 ‘망령이 들끓는 대지’에 발을 들이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조용히 헛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네놈을 죽이고 가면 폐하께서도 날 치하하시겠지. 덕분에 내 평생의 염원도 이루게 되었구나!’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네요.’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놈에게 알려줄 리가.’
‘구, 국경이… 위험합니다.’
‘그럼 곧장 출발을…….’
누군가의 강렬한 외침, 그리고 짧게 나눈 대화가 뒤이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조각난 기억이 얽히고설켜, 마침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제야 알겠다. 머리를 잘만 굴리는 듯하던 황제가 굳이 멍청한 부하를 골라 신전에 보낸 이유, 그리고 ‘급보’를 전하러 온 신관을 곧장 처리하지 않은 이유를. 처음부터 급보를 막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개입했다고 여긴 신전 측에서 사건을 보다 심각하게 여기고, 빠르게 ‘최대 전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을 밟은 순간부터 그들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한. 숨 쉬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가던 생각이 뚝 끊겼다. 서늘하고도 따스한, 모순적인 감각이 등 뒤에 내려앉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린 로한은 뒤늦게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르펠은 그런 로한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숨을 몰아서 쉬느라 들썩이는 몸을 살며시 토닥이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등에 얼굴을 기댄 탓에 소리가 막히고 웅웅 울렸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따라서 호흡을 가다듬으라고 한 적도 없었거늘, 로한은 본능적으로 아르펠의 숨소리를 따라 호흡을 해나가고 있었다. 불안정했던 숨결이 한층 가라 앉았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네가 곁에 있어 주니까…… 괜찮을 거야.”
아르펠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하는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우습게도,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조용히 입술을 짓씹은 로한은 아르펠의 손을 풀고 몸을 돌렸다.
정말로 아픈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손은 빨랐다. 가볍게 몸을 훑어보고, 이마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했다. 아르펠은 입을 다물고 로한의 손길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겉모습만 인간 행색을 하고 있을 뿐인 자신에게 별 소용 없는 행동임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베모스 마을에서의 일. 기억해?”
그를 대신해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로한이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때 숲속에 구원교에서 실험하던 장치가 묻혀있다고 했지. ‘염원’이었나. 그 숲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했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조여드는 불쾌한 감각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제 안의 힘을 멋대로 빼앗아 가는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비슷한 선상에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마 내가 이 근처를 벗어날 수 없는 것도 그 장치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그것만 찾으면…….”
“……로한 님! 어디 계십니까, 로한 님!”
덤덤한 눈으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던 와중에 다급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로한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아르펠이 홱 고개를 돌렸고…….
“허억, 헉, 로한님! 여기, 여기 계셨군요! 어서, 어서 오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꼴이 엉망인 신관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여간 급하게 달려온 것이 아닌 듯 숨은 거칠었으며 옷은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달달 떠는 낯에 식은땀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로한이 아르펠을 붙잡았다. 내려다보는 눈이 유난히 필사적이었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약속해요. 금방 올게요. 그러니까 여기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알겠죠?”
“……알았어. 다치지 말고 돌아와.”
잠시 침묵을 하긴 했으나 로한은 대답을 종용하듯 아르펠의 팔을 흔들었다. 결국 순순히 긍정의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멀어지는 로한의 뒷모습을 배웅해야만 했다.
“아.”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짧게 탄식했다. 주먹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걱정…… 걱정인가. 아르펠은 제 속마음을 빠르게 납득했다. 로한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저 곁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 곁에 머물며, 그를 지켜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루어지지 못할 바람이었다.
‘방해만 되겠지.’
이 꼴로 찾아간다 하더라도 로한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도리어 방해가 된다면 모를까.
로한은 그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니 어렵지 않게 미래를 알 수 있었다. 다시 발을 들였다간 아까와 같은 상황에 처하고 말 테다.
그래서 참았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로한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삐죽삐죽 튀어 나가는 충동을 애써 다스렸다. 이곳에, 가만히.
아르펠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로한이 천천히 숨을 내쉬기를 반복하며 불안한 속을 다독였다. 아르펠을 두고 왔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직 멀었습니까!”
“거의, 거의 다 왔습니다! 아, 저, 저기. 저쪽입니다. 보이십니까?”
앞장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던 신관이 비명처럼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저 앞쪽을 가리킨다. 그 손짓을 따라 로한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신관이 가리키는 것을 마주하기도 전에 몸을 타고 올라온 섬찟한 기운만 아니었더라면. 덜컥 숨을 멈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한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전에 마주쳤던 간부들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간부를 상대하는 이는 레리아나였다. 그녀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따라 성력이 찬란하게 빛을 흩뿌려댔다. 상대의 힘이 생각보다 강한 것인지 막상막하로 붙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밀리는 낌새는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만 합류한다면 저 간부는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테다. 이 신관이 급하게 저를 찾아온 이유도 그것인 듯했다. 아는데, 다 알고 있는데…… 로한이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가슴이 술렁였다. 커다랗게 뜬 두 눈이 끊임없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 심장박동이, 내뱉는 숨결이 귓가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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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과 성력이 뒤엉킨 틈바구니에서, 로한은 달려드는 간부의 가슴 한가운데에 검을 박아넣었다.
「끄륵, 끅. 끼에에엑!」
동시에 기묘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이 턱 막혀 발버둥치는 짐승의 소리를 닮은 것은 귀에 눅진하게 달라붙어 불쾌함을 남겼다.
고통이 적나라한 비명이었으나 검을 도로 뽑아 뒤로 물러난 로한의 낯은 어딘가 시원찮아 보였다. 흩뿌려지는 피를 눈대중으로 확인한 그가 혀를 찼다.
‘얕았다.’
제대로 박아넣었으나, 하필이면 손에 익지 않은 검을 사용한 게 문제가 되었다. 질이 좋은 검이긴 했으나 ‘마검’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므로.
로한이 뒤쪽으로 크게 도약했다. 그와 함께 바닥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크륵. 발이……?!」
땅이 가볍게 출렁였다. 눈 깜짝할 새에 물렁물렁해진 바닥은 녀석의 발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그는 늪에 빠지기라도 한 듯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간부의 몸을 꽁꽁 묶어 고정했다. 놈은 순식간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한 자리에 묶여버렸다.
간부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은 극도로 짧았다. 그를 구속한 그림자는 그새 찢길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없었더라면, 녀석은 본인이 가진 압도적인 힘으로 어렵지 않게 그림자 늪을 벗어났을 것이다.
“공격해!”
누군가가 외쳤다.
하지만 신관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신관의 외침 이후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에게서 일제히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력과 성력에 감응해 썩은 땅이 영롱한 빛깔로 물들고, 포물선을 그리며 내리꽂힌 힘은 마치 유성 같았다. 강한 바람과 함께 인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 틈새를 박차고 뛰어드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레리아나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거대한 성검이 눈부신 빛을 발했다. 이윽고 레리아나가 검을 횡으로 그었다.
칼날에 고여있던 방대한 양의 성력이 단번에 쏘아져 나갔다. 땅에 깊은 홈을 만들며 무서운 속도로 앞을 향해 치고 나가던 것은 그대로 간부의 몸을 덮쳤고…….
“후, 맞춰서 다행이다.”
전투는 금방 정리되었다.
레리아나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놈은 그대로 뻗었다. 여태까지 봐왔던 간부들의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금이 가는 가면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저 확인해. 근처에서 가면이 깨지고도 살아남은 간부를 봤어.”
“뭐?! 그런 놈도 있었단 말야? 아니, 잠깐. 그래서 아르펠은? 아르펠은 어떻게 된 건데? 설마 두고 왔어?”
“……하나씩만 물어봐.”
등을 돌리려 하는 레리아나를 로한이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증언에 놀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그의 손에 들린 낯선 검을 보고 후다닥 질문을 쏟아내긴 했지만.
로한은 떨떠름한 낯으로 레리아나를 가로막았으나, 흔들리는 시선에 옅은 불안이 묻어나는 것만큼은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머지않아 이를 눈치챈 레리아나가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설마 두고 왔어? 진짜로?”
“상황이 급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아르펠도 상태가 괜찮아졌고. 저게 죽었는지 확인만 하고 곧바로 돌아갈 거야.”
로한이 쓰러진 간부를 향해 고갯짓했다. 이변이 발생한 건 그때였다.
“…허억!”
어디선가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충격을 받은 듯, 혹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두 분, 뒤에……!”
불쑥 튀어나온 카시아가 로한과 레리아나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그 손길에 이끌려 크게 물러난 둘이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동시에 레리아나가 탄식했다. 떨리는 음성에 미약한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본능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무언가를 눈앞에 마주하면 이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혹은 살고자 하는 욕망.
이는 로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달싹이는 입술에 당혹스러움과 혼란이 가득했다.
원래라면 죽은 간부의 몸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어야 했다. 금이 간 가면 또한 그러했고. 로한은 그것을 끝까지 확인하고 발길을 돌릴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천천히 몸을 접어 나가는 것처럼 간부의 몸이 차차 일그러지며 작아졌다.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머뭇거리며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던 신관 하나가 중얼거렸다.
“구슬……?”
그래. 몇 번이고 구겨지고 접히길 반복하던 간부의 몸은 마침내 검푸르고 거대한, 매끄러운 구체가 되었다. 허공에 떠오른 것으로부터 불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내 구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니, 떨어진 게 아닌 사라진 것이었다. 마치 땅속에 흡수되기라도 한 것처럼.
“……!”
그리고 그 느낌은, 단순한 기분 탓에서 그치지 않았다.
땅의 색이 조금 더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로한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다들 힘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십시오! 지금 당장!”
뒤쪽을 지키고 있던 다니엘이 크게 소리쳤다. 그 또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낀 듯했다.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재빨리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을 맴돌던 망령의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것이 어떠한 신호라도 된 듯했다. 땅에서 솟구친 검푸른 연기가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다.
대항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방대한 기운, 날카로운 바람, 망령의 기운이 뭉쳐 거대하게 만들어낸 회오리. 로한은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로, 로한 님?! 어디 가십니까! 로한 님!”
급히 몸을 돌린 로한은 곧장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미처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컥컥대는 이들을 살피고 있던 다니엘은 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도 모자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사라지는 로한의 뒷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그가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로한은 그의 동료를 찾으러 간 것뿐입니다. 금방 돌아올 거예요.”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해봤자 저걸 지켜보는 것뿐이죠. 다행히 더 이상 커질 것 같지는 않으니…… 한발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파악하는 게 좋겠어요. 지원도 요청하고요.”
그러다 보면, 로한도 아르펠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레리아나가 뒷말을 삼켰다.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다니엘을 도와 쓰러진 신관들을 추슬렀다. 회오리가 더는 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계속 남아있는 건 위험했다. 이동하는 신관들을 따라 몸을 옮겼다. 등 뒤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소름 끼쳤다.
***
아르펠은 로한과 약속한 장소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이 느껴지는 마력의 흔적을 보면 몇몇 망령을 손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르펠!”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인영에 로한이 반색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하나 얼굴에 고였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르펠?”
“헉, 허억.”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놀라 아르펠에게 다가간 로한은 그제야 그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덜덜 떤다.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로, 한. 로한…….”
손이 어깨에 닿자마자 아르펠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들었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이 벌겠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선명했다.
멍청히 이름을 중얼거린 그가 단숨에 로한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깨에 기대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숨을 헐떡였다. 이따금 새어 나오는 옅은 신음은 마치 흐느낌 같았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일까. 아르펠의 몸은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리려 했다. 애써 그를 추스른 로한이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아르펠. 정신 차려봐요, 응?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힘겹게 낸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느리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줄 테니까.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제발.”
그러나 떨림이 완전히 가시는 일은 없었다. 로한의 음성은 여전히 볼품없이 흔들렸다.
이를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는 창백해진 손끝으로 연신 아르펠의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쓸어내려 줄 뿐이었다. 그 손길은 도리어 처절하기까지 했다.
“이상, 이상해. 뭔가 잘못됐어. 내가,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돌아가야 해. 자꾸 힘이, 힘이 들어와서.”
“힘? 그게 무슨…… 아르펠. 아르펠? 눈 감지 마요. 잠들면 안…!”
아르펠은 로한의 품에 매달려 더듬더듬 말을 뱉어냈다. 대부분이 횡설수설이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아르펠의 말을 들어주었다. 갈라지는 음성이 뚝 끊기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급히 확인한 아르펠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색색 내쉬는 숨결이 오늘따라 위태롭게 느껴졌다.
알고 있었다. 아르펠은 검이다. 사람처럼 호흡이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숨을 쉬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도…… 그의 호흡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 순간부터 세상이 멈춘 듯했다. 숨이 가빠졌다.
하나 다음 순간.
“……!”
로한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아르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 주위에 반투명한 검은색의 장막이 처져 있었다.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몸의 떨림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아르펠.”
로한이 나지막하게 아르펠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 부름에 답하듯, 감겨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지기 시작했다.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서야 크게 숨을 터뜨렸다.
“몸은…….”
“…괜찮아졌어. 뭐한 거야?”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간신히 질문을 주워 담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던 아르펠이 곧장 답을 쥐여주었다.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평온했다.
하. 로한의 잇새로 작달막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자긴 딱히 한 게 없다고 대답해 주어야 하는데, 당장은 시끄럽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르펠은 얼떨결에 그의 등을 도닥이기 시작했다.
<꼴값들 떤다.>
한 줄기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기 전까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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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머릿속에 대고 직접 말하는 것만 같은 기묘한 음성. 몇 번 경험해본 전적이 있던 둘은 그것이 마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아르펠은 곧바로 손을 거두었으나 로한은 아니었다. 아르펠의 무사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몇 번 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을 하기를 반복한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호오. 바로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새 철들었어?>
“더 일찍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왜 토를 안 다나 싶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냐? 일하다가 급하게 달려왔다고. 고맙다고 기도를 올리지는 못할망정.>
처음만 하더라도 순수한 감사 인사였던 것에 사족이 붙었다. 마신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찰 뿐이었다.
괜히 한 번 눈을 굴린 로한이 다시 한번 아르펠의 상태를 살폈다. 옅은 보호막에 둘러싸여 움직이는 그는 꽤 멀쩡해 보였다. 직전까지 고통에 허덕였던 이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역시 신의 힘인가.’
입안이 씁쓸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로한 역시 제 마력을 끌어올려 아르펠을 보호해 보려 갖은 애를 써보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뿐.
하나 로한은 쌉싸름한 기분을 빠르게 걷어냈다. 방법이 어찌 됐든 아르펠의 상태는 좋아졌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르펠은 둘의 대화가 멎을 때쯤 말문을 열었다. 담담한 감사 인사였다. 더불어 뒤쪽에 무언가가 붙은.
그래. 지금 그는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는 별개로, 이 또한 신이 해서는 안 되는 ‘개입’ 중 하나임을 직감한 것이다.
“이렇게 개입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 안 되는데.>
“……안 된다고요?”
마신은 이어진 아르펠의 물음에 황당할 정도로 단조롭게 대답했다. 인상을 찡그린 건 로한뿐이었다. 찌푸려진 눈매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걸 왜 저렇게 태평히 말하느냐고. 애써 한숨을 삼켰다.
“그러다 천신처럼 잠이 들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상관없어. 대가야 나중에 치러도 되니까. 해봤자 어림잡아 몇십 년 정도 잠이 드는 것뿐일 거다. 내게는 찰나와 다름없는 시간이지.>
이어지는 목소리가 천연덕스러웠다. 분명 얼굴을 마주 보고 있지 않은데도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듯했다. 로한은 뻔뻔히 어깨를 으쓱이며 주절거리는 마신의 매끄러운 낯을 떠올렸다.
<거기다……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아니거든, 이거.>
“…그게 무슨.”
덧붙이는 말에 로한이 흠칫했다. 나란히 앉아있던 아르펠 역시 조금이지만 미간을 좁혔다.
신의 개입. 그것이 허용되는 건 같은 ‘신’에 한해서였다. 그러니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라는 말인즉…….
<저건 ‘강림’의 징조다.>
악신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
황제와의 대화 이후 루시엘은 홀로 방에 칩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황제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
그게 오히려 더 꺼림칙하다는 걸 알까.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린 루시엘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속이 복잡했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게 옳은 일일까. 제 아버지의 집착에 가까운 사상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가 신전을 미워하게 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으므로. 루시엘은 자연스럽게 황제의 사상에 감화됐다.
하나 루시엘에게 이는 하나의 ‘이론’이었다. 황태자로서, 더 나아가 황제로서 알아야 할 교양을 공부하는 것처럼. 그 또한 그에게는 공부나 다름없었다.
우연히 마주친 이에게 무심코 마음을 주고, 그가 제 아버지에 의해 나락에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는 루시엘의 현실감을 일깨웠다. 그 순간부터 믿어 의심치 않던 ‘사상’의 모든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루시엘은 이를 무시하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한 번 생긴 균열이 말끔히 메꿔지는 일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수록, 황제와 대화를 나눌수록 의구심은 마음속 한구석에서 차차 부피를 키워나갔다.
“이벨린…….”
루시엘이 입술을 달싹여 익숙한 이름을 입안에 머금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이벨린이 부럽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 속이 일렁였다.
그리고 얼마 전, 황제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그 위화감은, 꺼림칙함은, 균열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고민에 일상생활이 무너져내릴 만큼.
“루시엘!!”
그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몸을 굳히기도 잠시, 느리게 고개를 돌린 루시엘은 노크 한번 없이 당당히 제 방에 발을 들인 동생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랗게 뜬 시선에 은근한 추궁이 서렸다.
당연하게도 이벨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보란 듯 걸어와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을 뿐.
“……여긴 웬일이지? 다음에 찾아올 때는 미리 언질을 남겨놓도록 해라. 노크도 없이 멋대로 방에 들어오지도 말고. …잠깐. 설마 궁을 몰래 빠져나온 건가? 기사들을 제치고?”
“다 방법이 있지. 그나저나, 질문이든 잔소리든 한쪽만 하지 그래? 뭐에 대답해야 되는지 모르겠잖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에 레리아나가 뚱하게 대답했다. 이대로 가다간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것을 직감한 그녀는 손을 들어 책상 위를 쾅, 내리쳤다.
“무슨 짓…….”
“잘 들어, 오라버니.”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흔들리는 녹색 눈이 빌어먹게도 잘 보였다.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
“정말 마지막이야. 그러니 잘 생각하고 결정해. 오늘을 떠올렸을 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에 불과했지만,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이벨린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 그녀는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편에 설 건지, 혹은 그 반대편에 설 건지 선택하라며.
“……생각할.”
루시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성을 배신하고 본능이 몸을 부추긴 결과였다.
“생각할 시간을 줘.”
그에 몸을 가까이 댔던 이벨린이 멀어졌다. 그녀는 못마땅한 낯을 하고 있었으나, 더 부추길 마음은 없는 듯했다. 느리게 주억이는 고개가 이벨린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하루야. 그 이상은 못 줘.”
“……짧군.”
“더 주지 못하는 거야.”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더 주지 못한다, 그 말을 남긴 이벨린은 곧장 몸을 일으켜 등을 돌렸다. 용건은 이게 끝이라고 깔끔히 선을 그은 것이다.
이윽고 방을 나서는 동생의 뒷모습을, 루시엘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라앉은 눈빛에 여러 감정이 뒤엉켜 묻어났다. 머리가 아팠다.
***
하루. 여태껏 정리하지 못한 고민을 마무리 짓기엔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거기에 이벨린의 마지막 말은…….
‘더 주지 못하는 거야.’
그녀가, 그들이 계획한 무언가가 코앞에 다다른 느낌을 주어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러니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
몇 분, 아니. 몇 시간일까?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던 루시엘은 결국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이 무겁지도 않았고, 졸리지도 않았다. 아마 여기서 더 애써봤자 잠이 올 리는 없겠지.
정원을 산책하면 그나마 좀 나아질까. 느리게 숨을 내뱉은 그가 몸을 움직였다. 얇은 겉옷을 하나 걸치고 방을 나섰다. 웬만하면 가벼운 차림새로 밖을 나가지 않는 그로서는 꽤 색다른 경험이었다.
“……?”
그저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얼마 안 가 마주친 존재에 루시엘은 이 모든 것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미야옹.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음이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루시엘은 복도를 맴도는 조그만 존재를 발견했다.
몸집이 작은 고양이었다. 가뜩이나 털 색이 까매서, 어둠이 내려앉은 황성의 복도에서 눈에 띄기가 어려운. 루시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쩌다 실수로 들어온 고양이인 걸까? 그러나 다음 순간, 고양이와 눈을 마주친 그는 생각했다.
‘따라가야 한다.’
저걸 따라가야 했다.
까만 고양이의 눈은 퍽 신비로웠다. 옅은 달빛이 드리운 공간에서 그것의 눈동자는 영롱하게 빛났다. 한쪽은 보라색, 다른 한쪽은 금색인 눈이 꽤 어여뻤다.
느릿느릿 걸어가다 멈춰 뒤를 돌아본다. 무심코 따라가면 다시 그 행동을 반복했다. 무사히 따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행동이었다. 사람도 아닌 고양이가 어떻게 그런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루시엘은 그 점을 자각하고도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자꾸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기이한 빛을 머금은 고양이의 눈에 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그렇게 몇 분을 움직였을까.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작은 존재를 뒤쫓아가던 루시엘은 거짓말처럼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에 정신이 깨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동시에 탄식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그간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이 없는 곳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시엘의 눈앞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늘어서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황성의 지하였다.
170
평생을 황성에서 머물러온 저조차도 알지 못하는, 지하의 비밀스러운 공간. 루시엘은 그 낯선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느릿한 발소리가 고요함을 파고들었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얼마나 깊은 곳으로 들어온 걸까. 손으로 짚은 벽이 서늘했다. 시야도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빛이라곤 간간이 벽면에 자리해 있는 자그마한 등불 정도가 다였다. 앞장서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마저 어느샌가 놓쳐버린 뒤였다.
“…….”
어둡고, 좁고, 낯설다. 불안감을 자극하는 요소만이 가득한 곳에서 루시엘은 규칙적으로 숨을 골랐다.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먀아옹.
그러다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계단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곧 이 지하 공간의 비밀을 알 수 있게 되리라고.
“…여기 있었군.”
그의 예상대로 얼마 안 가 계단은 끝이 났고, 넓은 공동이 드러났다. 고양이는 그 앞쪽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색이 다른 눈동자는 여전히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루시엘은 조용히 손을 뻗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작고 신비로운 존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양이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올린 그는 이내 마음이 향하는 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주변을 둘러볼 차례였다.
***
안을 살펴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루시엘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무언가를 ‘실험’했던 곳이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각종 기구들 하며, 정리된 서류들을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정확히 무엇을 위한 연구이며, 무엇을 목표로 한 실험인지 알 수 없었다.
우후죽순한 문자의 나열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그 무렵이었다. 내내 몸을 웅크리고만 있던 고양이가 느릿느릿 일어나 실험실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 이봐!”
까만 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솜방망이가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밀어 떨어뜨렸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던 루시엘이 급하게 손을 뻗었다. 각종 플라스크를 비롯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은 산산조각이 나는 신세를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누군가 소리를 듣고 찾아온다면. 깊은 지하이긴 했지만,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비밀스러운 공간은 루시엘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를 악문 그가 조용히 작은 생명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고양이의 움직임은 당당하다 못해 도도했다. 이내 분홍색 젤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서류 하나를 정확히 짚었다.
루시엘은 한숨을 쉬면서도 그것을 확인했다. 제아무리 행동이 얄밉더라도 그를 이곳까지 이끌어준 존재는 다름 아닌 저 고양이였으니.
“이건…….”
실험 보고서로 보이는 것 앞쪽에 흐릿하게 날짜가 적혀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0년 전. 꽤 오래된 기록이었다.
자연스레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피실험자에 대한 것이 상세하게 적힌 부분이었다.
[피실험자 | 마검(이하 아르펠). 그림자의 권능을 가진 것으로 추측 중.]
아. 루시엘이 짧게 탄식했다. 지나치게 익숙한 이름이 그곳에 자리해 있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멋대로 널뛰는 이성을 제대로 부여잡지도 못한 채 다음 장을 확인했다. 다음 장, 또 다음 장…… 그렇게 루시엘은 ‘아르펠’에 관한 실험기록을 홀린 것처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실험은 실패했다.]
끔찍하고 장황한 기록이었으나 끝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다. 실험의 실패를 알리는 딱 한 문장이 시야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마검의 타락은 성공적이었으나 외부의 ‘망령’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치명적. 강림을 위해서는 ‘감응’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함을 파악. 더 이상의 연구는 불필요. 결과물을 황실에 넘기기로 결정.]
[의문점. ‘감응’을 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할까?]
마지막 장의 아래쪽에는 누군가가 휘갈긴 글이 남아 있었다. 불쑥 떠오른 것을 적은 듯 끄적여 놓은 흔적까지도. 루시엘은 숨을 멈춘 채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쓸어내렸다.
“하…… 하하.”
헛웃음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에도 무덤덤하던, 끝까지 감정 한 톨 내비쳐주지 않던 보랏빛 시선이 떠올랐다. 곁에 있는 이에게는 한없이 따뜻해지던 눈빛 또한.
루시엘이 짧게 자조했다. 자신은 애초부터 그런 걸 바랄 처지가 아니었다. 아르펠은 피해자였고, 자신은 가해자의 가족…… 아니. 긴 시간 동안 제 아버지가 행해온 것들을 방관하고 모른 척했으니 저 또한 가해자나 다름없었으므로.
아르펠이 사람이 아닌 ‘마검’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놀라웠다. 하나 루시엘은 그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글로 남은 실험기록들이, 이를 당한 게 아르펠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렸다. 침을 삼키는 목이 까끌까끌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끔찍한 기분을 애써 삼키고 차근차근 기록된 것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궁을 덮치려 했다던 괴물들, 그들을 만들어낸 장소 또한 이곳임을.
구역질이 일었다.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피실험자 | 오스카 외 45인]
보고서는 ‘오스카’의 실험이 특히나 설명적이었다며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었지 않나. 미간을 찌푸릴 무렵, 루시엘은 그 아래 달린 추신을 발견했다. 상당히 최근에 적은 듯한 모양새였다.
[천신의 개입으로 폐기]
빤히 그 글귀를 응시하던 루시엘이 작게 탄식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신 겁니까.
황제가 신전을 혐오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에게 직접적으로 반하는 일이라니. 그러한 짓을 황궁의 아래에서 벌이고 있다니. 믿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 뒤로 루시엘은 미친 사람처럼 실험실 안을 뒤집어엎었다.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연구 기록들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 강박적이기까지 한 행동을 멈춰 세운 건 작은 앞발이었다.
“아.”
그제야 루시엘은 자신이 고양이의 존재를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느리게 시선을 내려 고양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두 눈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녀석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시엘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내팽개치고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갔다.
실험 기구로 어지러운 공간을 거치고, 피비린내가 가득한 공간까지 거쳤다.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고 도착한 곳은 처음 발을 디뎠던 공동보다 배는 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고양이의 앞발이 종이 한 장을 스윽 밀어준다. 루시엘은 이제 의구심조차 느끼지 않고 그가 건네준 것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마검(이하 아르펠)의 존재를 이용해 악신 강림을 위한 단계에 돌입. 실패 예상. ‘신의 안배’를 이용해 상황을 주도할 것.]
익숙한 글씨체였다. 종이를 쥐고 있는 루시엘의 손이 덜덜 떨렸다. 다른 한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게워낼 것만 같았다.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또 충격적이었지만…… 무얼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날 왜 이곳으로 데려온 거냐.”
내게 왜 이것들을 보여줬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침잠한 눈이 금방이라도 어둠에 녹아들 것만 같은 유약한 생명체를 응시했다.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제 꼴이 우습다는 건 알고 있었음에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을 묻는군. 아비의 잘못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고양이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가뜩이나 충격에 너덜너덜해져 있던 머리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루시엘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제 앞에 엎드려 있는 고양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이런 지하 공간까지의 길을 안내해주고, 읽어야 할 자료들을 선별해주는 신비로운 고양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말까지 하는 건…… 아니. 가능한가? 여태까지의 행동을 하나하나 되짚어볼수록 확신이 일었다.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눈앞에 짧은 글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천신의 개입으로 폐기’라는 글귀가. 루시엘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신입니까?”
그래. 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신이라면…… 이 비현실적인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긴장감에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고양이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느리게 끔뻑였다. 이내 그것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렇다고 하면 어쩔 건데.>
“…….”
생각한 것보다 말투가 불량스러웠다. 짧게나마 인지 부조화가 일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부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가…… 무얼 해야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수습할 생각은 있어서 다행이군.>
“……여태껏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고자 했던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입니다만, 이게 잘못됐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루시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듯한 느낌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루시엘을 보며 고양이는, 아니, ‘마신’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가 이곳에 직접 발을 들인 이유이기도 했다.
<때로는 혈연만이 끊어낼 수 있는 족쇄도 있는 법이다.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군요.”
돌아온 답은 명쾌하면서도 잔인했다. 루시엘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혈연만이 끊을 수 있는 족쇄. 그 말을 듣자마자 한 가지 해결책이 떠올랐다.
<여기서 나가는 건 알아서 해라. 난 바쁘니까.>
그 말이 끝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고양이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코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존재에, 루시엘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아, 그 고양이가 정말 신이었구나. 신을 마주한 것치고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말이다.
171
그날 밤, 루시엘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길잡이 역할을 해주던 이의 증발, 일대에 포진한 경비병들의 존재 때문에 노심초사하기는 했지만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지나온 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하나같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처음 이 길을 밟을 때는 고양이에게 홀려 주변도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지.
퍽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일이었다. 루시엘은 자신을 이끈 존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오, 잠을 제대로 설쳤나 본데.”
“이게 누구 때문인데.”
“맞아, 사실 그러길 바라고 한 말이긴 했어. 다행히 효과는 있었던 것 같네.”
다음 날, 루시엘은 아침이 밝자마자 이벨린의 궁을 찾았다. 경비병들의 눈을 적당히 피하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벨린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반겼다. 루시엘의 눈 밑에 서린 시꺼먼 그늘을 발견했을 때는 짧게 감탄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너야말로 날 기다린 것 같군. 경비병들 사이에 틈을 만들어둔 건 이벨린, 네 짓인 것 같은데.”
“들켰네.”
이번에도 정신을 못 차리면 정말로 머리를 한 대 갈기려고 했는데. 이벨린이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제국의 황태자에게 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경한 말이었다.
하나 루시엘은 한숨만 쉴 뿐 이벨린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벨린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발걸음으로 궁 안을 가로질렀다. 루시엘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통통 튀는 소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궁의 구석진 곳에 있는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
“왔냐.”
“오셨군요.”
벌컥 열리는 문과 함께 낯선 목소리 둘이 그들을 반겼다. 루시엘은 멍청히 눈을 끔뻑이며 안에 자리한 인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직접 면대면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이들이다. 한쪽은 용병 길드장, 그리고 다른 한쪽은…… 귀족들 사이에서 괴짜라는 소문이 자자한 오웬. 고위귀족이면서도 성을 버리고 신관이 된 남자였다.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상대가 고개를 꾸벅였다. 루시엘은 무난히 그 인사를 받았다. 한순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
“생각을 바꾼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어색한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렉시아였다. 그림 같은 미소를 머금고 한 질문이었으나 루시엘은 그의 눈에 은은한 경계가 담겨있음을 눈치챘다.
경계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루시엘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 중 하나였을 테니.
그가 담담히 답했다.
“외면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을 뿐이다.”
루시엘의 답에 눈에 띄는 반응을 하는 이는 없었다. 오웬만이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듯 기묘한 눈을 해 보였을 뿐.
루시엘은 제 태도의 모순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간 꿋꿋하게 외면해왔으면서, 마음이 쏠리는 사람 하나 때문에 태도를 뒤집다니. 피해를 입은 또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이기적이라 매도했을 만한 생각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러한 모순점을 꼽는 이는 없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저희는 황실을 뒤집어엎을 겁니다. 이 자리에 오셨다는 건 이를 짐작하고 계셨다는 건데…….”
그리 판단한 렉시아가 또렷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듯 한없이 이성적인 눈이 루시엘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명심하세요. 이건 반역입니다.”
뒤따라 들려온 한마디가 그의 현실감을 일깨웠다. 알량한 마음가짐으로는 힘을 보태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루시엘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하나 그마저도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
강림의 징조. 그 말이 가져온 파급력은 크디컸다. 로한은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을 애써 풀어내야 했다.
신의 강림. 입에 담는 것만으로는 쉽사리 그 무게를 예측할 수 없는 단어였다.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우뚝 굳어있던 아르펠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정말로 ‘악신’이 강림하고 있는 과정이라면 신관들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신의 말대로 ‘신의 개입’이 필요했다.
하나 곧장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방법’이 필요할 터. 아르펠은 그렇게 생각했고, 이는 로한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마신이 태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강림을 미룰 방법은 있지만 막을 방법은 없다.>
“그게, 무슨…… 강림을 지켜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지금?”
한없이 가벼웠으나 그 탓에 잔인할 정도로 단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로한이 이를 악물었다.
<‘망령’이 무어라 생각하지?>
뜬금없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마신은 그 물음에 스스로 답을 내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망령은 악신이 남기고 간 흔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야. 망령은 악신 강림의 ‘기폭제’다. 일정한 면적 내에 기준치 이상의 망령의 힘이 밀집되어 있으면 강림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짧게 뜸을 들였다. 내뱉을 말을 고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신은 강림하지 않아. 강림의 ‘그릇’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
로한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불안이 목구멍에 가득 차 숨을 틀어막는다.
<망령의 힘에 감응할 줄 알며, 동시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 하지만 이것뿐이라면 미친 종교 놈들도 충분히 조건을 만족할 수 있었겠지.>
마신이 짧게 조소했다. 필요한 건 그것만이 아니라는 듯.
<‘그릇’은 신의 힘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야 한다. 그래, 이를테면…… 신의 권능을 품고 있는 존재라던가.>
“……하.”
그가 가리키는 존재는 명명백백했다. 로한은 차마 옆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마신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악신의 강림에 필요한 ‘그릇’이, 다름 아닌 아르펠이라고. 순식간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망령의 힘에 감응할 수 있고, 살아있으며, 또 신의 권능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존재. 그제야 둥둥 떠다니던 엇나간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로한이 다급히 아르펠의 손을 붙잡았다.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것이 제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된다는 듯. 필사적이면서도 처절한 태도에 아르펠의 눈이 떨렸다. 로한에게서 온갖 절망이 쏟아져 나왔다.
“막을, 방법은…….”
정말. 정말 없나요?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무언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던 아르펠의 말이 끝도 없이 맴도는 중이었다. 아아. 로한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아르펠은 이미 ‘그릇’으로 선택된 것이다. 유인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간부의 흔적을 따라가기만 했던 제 잘못 때문에. 하필이면 망령의 힘이 모이는 곳에 발을 들여서.
미룰 수만 있을 뿐 막을 방법은 없다. 마신에게서 이미 그 말을 들었음에도, 로한은 매달리듯 같은 질문을 또다시 입에 담아야 했다.
<솔직히 말해줄까.>
그때였다. 마신의 목소리가 다시금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 음성에 미약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딱 하나, 방법이 있다.>
“…! 알려주세요. 무슨 방법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하나의 방법.
그 말은 로한에게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르펠을 끌어안고 속삭이듯 애원했다. 제 목소리가 신께 닿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신은 그의 바람을 배신했다.
<‘그릇’을 부수는 것.>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로한은 곧장 반응하지도 못하고 한참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완성되지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닮은 토막 난 음성이었다.
<강림이 시작된 이상 방법은 그것뿐이야. 동시에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지. 이 땅에 남은 망령의 힘을 단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건 물론, 내가 개입할 여지도 있다.>
“…그만.”
<먼저 ‘세계’와의 계약을 어긴 악신을 이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할 수도 있겠군. 그렇게 된다면 제국은 망령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말 그대로 모두가 바라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거지.>
“……그만!”
끝내 로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없이 숨을 헐떡였다. 익숙한 손이 진정하라는 듯 등을 두드려주고 있음에도 그랬다. 내뱉는 숨결에 증오와 살의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아르펠이 죽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그만 없다면 이 세계가 완벽해질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아서. 로한은 제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아르펠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원해라.>
“…….”
<아르펠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네 곁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너와 그의 계약이 끊어지지 않도록 소망해. 내게, 이 ‘세계’에게 빌어라. 그를 살려달라고.>
마신이 느릿하게 속삭였다. 투박한 위로이자 유일한 해결책을 입에 담으며.
<그럼, 네게 깃든 안배가 네 목소리를 들어줄 거다.>
이 세계가 바라는 건 ‘결(結)’이 아니니.
172
로한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세계의 결, 신의 안배, 소망. 드문드문 귀에 걸린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려주겠다는 듯 그때만큼은 뇌리에 파고들던 목소리가 잠잠했다. 망령의 힘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땅 위에서, 로한은 몇 번이고 느리게 심호흡을 반복해야만 했다. 텁텁한 공기가 입 안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결국, 아르펠이…….”
힘겹게 나아간 목소리가 뚝 끊겼다. 숨이 턱 막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강림을 막고, 아르펠 또한 무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하나 모순적이게도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한 번, 아르펠이 부서져야 했다.
끔찍한 가정이었다. 세계가 조각조각 부서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르펠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기를,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기를 온 힘을 다해 바라라는 말이었다. 이 어찌나 잔인한 요구인가.
주먹 쥔 손이 떨렸다. 그리고 아르펠은, 새하얗게 질린 로한의 손을 붙잡았다.
“하겠습니다.”
“아르펠!”
“할 수 있어요.”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아릿한 감각에 아르펠은 자유롭던 다른 한 손을 들어 로한의 손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름의 위로였다.
“알고 있잖아, 로한.”
“…….”
“이 방법밖에 없어.”
사실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안 그래도 가라앉아있던 로한의 낯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피가 비쳐 있는 입술이 유난히 시야에 끈덕지게 남았다.
짧은 정적 끝에 로한이 입을 열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 끝이 덜덜 떨렸다.
“……안 무서워요?”
맞잡은 손은 필사적이었고, 일렁이는 시선은 두려움이 절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려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르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었다. 입술에 맺힌 핏방울을 스치듯 걷어냈다. 이어 볼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는 애정이 다분히 묻어있었다.
본질이 검인 아르펠에게 ‘부서진다’라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무서울 수밖에 없을 텐데. 두려울 수밖에 없을 텐데. 시야에 비치는 그의 낯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평소와 같은 그 미형의 얼굴을, 로한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글쎄.”
“…죽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차분해요? 잘못하면,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아르펠은 그대로…… 다시는 눈을 못 뜰지도 모르는데.”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주섬주섬 늘어놓는 걱정에 돌아온 것은 어색한 되물음이었다. 끔뻑이는 보랏빛 눈은 그런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불변의 진리라는 것처럼.
“하하…….”
로한은 끝내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제야 아르펠이 제게 가지고 있는 맹목적이기까지 한 신뢰가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요. 해봐요.”
결국 아르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는 수밖에 없다. 널뛰는 감정을 애써 다스렸다. 최악의 미래가 머릿속에 한가득 차올랐으나 최선을 다해 그 가정을 외면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로한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만약, 실패하면…….’
그래서 아르펠이 죽는다면. 내 곁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끔찍하기 그지없는 미래를 그린 로한이 속으로 되뇌었다.
같이 사라지면, 죽으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별에 허덕이고, 갈기갈기 찢긴 것만 같은 심장을 얼기설기 붙여놓을 필요도 없겠지. 그리 생각하니 순식간에 머리가 차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작게 키득거리는 마신의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로한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제시한 선택지가 모조리 극단적이었던 탓인지, 미처 숨기지 못한 원망이 서려 있는 몸짓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라. 그 정도면 병이라고. 내가 괜히 이런 방법을 제안한 줄 아냐?>
이전의 진중한 분위기는 쏙 빠져있는 목소리였다. 한없이 경박한 태도에 로한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들었다.
그러나 속에 쌓인 불평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이 세상에서 너만큼 쟤를 신경 쓰는 놈이 또 어디 있다고.>
담백한 어조와 뒤이어 들리는 혀를 차는 소리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굴어서. 그 태도가 조금, 아주 조금은 만족스러워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무사히 성공한다면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혹 실패한다 하더라도…… 같이 죽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할 만큼 차올랐던 불안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잔잔해졌다. 로한은 조용히 아르펠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아르펠!”
망령의 힘이 회오리치는 중심과 그다지 멀지 않은 숲의 외곽,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레리아나는 막사 안에 들어서는 로한을 보고 화색을 지었다. 정확히는 그와 함께 나란히 들어온 아르펠을 본 것이었지만.
“몸은 괜찮아요?! 아까 분명 상태가 이상하다고, 로한이……!”
“괜…….”
“다친 곳은 없어요? 제가 당장 치료를, 아니, 성력은 안 됐지 참. 로한! 네가 치료해, 당장!”
“…레리,”
“아니지. 로한이라면 분명 발견하자마자 치료를 했을 테니까…….”
“레리아나!”
쉴 틈 없이 쏟아져나오는 말에 휩쓸린 건 금방이었다. 레리아나의 중얼거림에 두 번이나 말이 끊기고 만 아르펠은 얼떨떨하게 눈만 끔뻑였다.
결국 보다 못한 로한이 나서 그녀의 이름을 외치고 나서야 심란하기 그지없던 분위기가 정돈될 수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레리아나가 민망한 낯을 해 보였다. 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대중으로나마 아르펠의 몸이 멀쩡한지 살피느라 정신이 팔렸던 탓이다.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정말.”
“응. 고마워.”
짧은 인사말이 오고 갔다. 벌게진 얼굴로 어색히 웃어 보이는 레리아나는 덤이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한이 물었다.
“분위기는 어때?”
“……보다시피, 아주 절망적이지.”
화제의 전환은 자연스러웠으나 훈훈했던 분위기만큼은 지켜내지 못했다. 씁쓸히 입꼬리를 올린 레리아나가 막사 너머를 향해 고갯짓했다.
“다니엘 신관이 다른 신관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어. 제때 몸을 보호하지 못해서 회오리에 휩쓸린 신관들이 제법 많았거든.”
“치료는 마무리했고?”
“그래. 그런데 공기 중에 있는 망령의 힘이 너무 짙어서…… 오랜 시간 버티지 못하는 신관도 있는 모양이야. 안 좋은 소식이지. 전력이 크게 줄었거든.”
“그들이 망령의 땅 밖으로 빠르게 나갈 수 있도록 조처를 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카시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뜩이나 미지의 현상이 코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하늘을 시꺼멓게 물들인 불길한 기운은 이 변화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사안임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원래 있던 인원으로도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전력까지 크게 줄어버리다니. 제아무리 지원군을 요청했다고는 하지만…… 카시아의 낯에 자조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온통 어두운 것들뿐이었다.
“그거 말입니다만. 아무래도 남은 전력은 크게 상관없을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 현상을 해결하고, 이 땅에 있는 망령까지 모조리 지워버릴 방법을.”
그러니…… 다니엘 신관 좀 불러와 주시겠습니까?
의문을 표하는 둘을 뒤로하고, 로한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머뭇거리던 카시아가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그를 불러오기 위함인 듯했다.
“…다 생각이 있는 거지?”
홀로 남은 레리아나가 중얼거렸다. 흔들리는 눈에 옅은 불안이 맺혀있었다. 로한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납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다니엘까지 무사히 막사에 들어왔을 때.
“앞으로 제가 해 드릴 이야기는, 저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퍽 단호하기까지 한 신신당부를 시작으로 마신과의 대화를 읊어주었다. 크게 굴곡이 없는 담백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걸 듣는 이들은 달랐다. 로한의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낯이 새하얘지던 레리아나는 끝내 입술을 세게 짓씹고 물어야만 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목소리에 불신과 원망이 그득그득 들어찼다.
“……제정신이야, 너?”
“응. 제정신이야.”
“하…….”
허탈한 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다른 둘의 사정 역시 별다를 바 없었다. 카시아는 충격에 굳어있었고, 다니엘은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가뜩이나 아르펠이 ‘마검’이라는 새로운 소식까지 접한 그는 다른 둘에 비해 배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미친 거야. 넌 미쳤어. 어떻게 네가, 네가 아르펠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레리아나. 내가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
와중에도 아르펠은 조금의 원망도, 하물며 걱정도 없어 보이는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딱 평소와 같은 태도에 레리아나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입술을 말아 물고, 낯이 슬프게 일그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미안해.”
끝내 그녀는 로한을 향해 사과를 내뱉었다. 무심코 내뱉은, 그를 탓하는 말에 대한 사과였다.
아르펠이 원해서 자진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레리아나가 알고 있는 로한은 아르펠을 그런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않을 테니까. 그를 향하는 감정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었으니까.
그러니 지금도, 그는 필시 지옥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레리아나는 감히 장담했다.
173
앞으로 나아갈수록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날카로워졌다. 마력을 둘러 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금방이라도 피부가 베일 것만 같은 기세였다.
로한은 그 사나운 폭풍우를 뚫고 걸어갔다. 하나 담담한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발자국에는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나오고 있었다. 불안이 턱 끝까지 (차올라) 찰랑거렸다.
“괜찮아?”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레리아나와 카시아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었다. 로한의 근처에서 걸음을 재촉하던 레리아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괜찮아.”
“……그래?”
로한이 담백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냐는 물음이 자신의 상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퍽 중의적인 물음이었다. 아마 레리아나는,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 따위의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약속한 상황이 목전에 다다랐는데도 누군가의 희생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태도가 눈에 밟혔다.
로한은 버릇처럼 손을 뻗어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날을 쓸었다. 손끝에 짙은 마력이 느껴졌다. 마신이 아직 아르펠에게서 거두지 않은 가호였다.
우웅, 검신이 짧게 떨렸다. 짧은 떨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로한은 아르펠이 자신을 다독여주고 있는 것 같다 느꼈다. 이어지는 말 또한 그랬다.
<괜찮아.>
제 뇌리에만 파고들 게 분명한 한마디는 그가 레리아나에게 건네주었던 답과는 달리 선명한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로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윽…….”
그렇게 몇 분 더 접근을 강행했을까, 뒤쪽에서 흐릿한 신음이 들려왔다. 지나치게 존재감이 뚜렷한 망령의 힘이 회오리치는 곳, 그곳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다 보니 심한 압박감이 느껴진 것이다. 볼을 스치는 바람도 한층 거세져 있었다.
<중앙에 접근하면 네게 내린 가호를 거둬갈 거다.>
마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로한은 그 음성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불온한 감각을 남겼다.
<기억해라. 기회는 한 번이다. 때가 되면 내가 너에게 신호를 주마. 그때 맞춰서…….>
“알고 있어요.”
“어?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이어지는 설명을 억지로 끊어냈다. 이미 한 번 들었던 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난데없는 혼잣말을 들은 셈이었던 레리아나가 뒤늦게 물었지만, 로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관련된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므로.
“정지!”
뒤쪽에서 신관들의 이동을 지휘하고 있던 다니엘이 멈췄다. 이내 그의 손짓에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행렬이 망령의 힘이 치솟는 곳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의구심을 느끼는 이들은 있었다.
“저…… 다니엘 신관님. 이게 정말 맞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데, 혹시나 예상치 못한 피해라도 발생한다면.”
“아뇨. 작전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그저 로한 님이 주시는 신호에 맞추어 온 힘을 다해 공격만 해주시면 됩니다.”
“저 회오리 쪽으로 말입니까?”
못 미더운 낯을 하고 있던 신관 하나가 또 다른 물음을 건넸다. 그로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도출해낼 만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이 없애고자 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는 검푸른 회오리였으므로.
그러나 다니엘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씁쓸함이 한껏 배인 낯을 한 그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것도 아닙니다.”
“예? 그럼 어느 방향으로…….”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당장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착잡한 시선이 옅은 갈색빛의 머리칼을 가진 이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몇 시간 전의 기억이 다니엘의 머릿속을 들쑤셨다.
‘무슨, 그런…… 전 못합니다. 못해요!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로한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내뱉었던 제 말까지도.
이게 더없이 잔인한, 미친 짓이라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로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이 말을 하는 내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저보다 더 격하게 반응하며 거부했던 레리아나가 끝내 짧은 사과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로한 님은 모든 각오를 마친 거구나. 저렇게, 심장이 찢어지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운 낯을 하고서도.
‘……알겠습니다.’
결국 제게 주어진 선택지는 애초부터 하나였던 셈이다. 희생의 장본인이 될 이가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명령을 수행하러 멀어지는 신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앞에서 솟구치는, 가히 압도적이기까지 한 망령의 힘이 배는 잘 느껴졌다.
로한의 말대로였다. 저걸 막을 방법은 없다. 이렇게 멀리서나마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의식적으로 절망을 느낄 정도이지 않은가.
누군가가 나서, 희생하지 않는 한.
“……죄송합니다.”
이내 다니엘은 입술을 달싹이며 짧게 용서를 빌었다. 말을 건넨 대상에게는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오늘 그들은, 아르펠을 죽일 것이다.
***
때가 되었다.
다니엘에게 모든 인원을 작전대로 배치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한이 느리게 숨을 골랐다. 검을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이 들어갔다.
“……약속, 해줘요. 내 곁에 돌아오겠다고.”
<그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할게.>
로한은 몇 번이고 그 말을 읊조렸다. 겁에 질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서도, 두려움에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하물며 그 ‘약속’은 아르펠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그의 생존 여부는 결국 제 손에 달려있다. 아르펠이 살기를, 곁에 돌아오기를 열렬히 소망해야 한다고 했나.
마신은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했다. 너만큼 아르펠의 생환을 바라고, 그를 원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신의 호언장담이 있었음에도 로한은 불안에 떨었다. 이곳으로 걸음 하는 매 순간 아르펠이 돌아오지 못하는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본능적인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끔찍했다. 기어코 아르펠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는 작전을 세운 것도, 제 손으로 그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어야 한다는 사실도.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손이 덜덜 떨렸다.
“하.”
느리게 숨을 골랐다. 일그러진 낯을 한 로한이 헛웃음을 닮은, 토막 난 숨결을 내뱉었다. 몇 번이고 이 상황을 반복하더라도 결국 같은 선택을 하고 말 자신이 우습기 그지없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는다면 아르펠은 꼼짝없이 강림의 그릇으로 사용될 것이다. 말이 그릇이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이쪽이 훨씬 나았다.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지만.
대신 로한은, 제 속을 휘젓는 모든 절망을 모으고 모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르펠이 죽으면…….”
<…로한?>
“저도 따라 죽을게요.”
영원히 함께해요, 우리.
살벌한 내용과 달리 어조는 한없이 담백했다. 로한은 최선을 다해 활짝 핀 웃음을 머금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르펠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미소에 신경이 팔리고 말았다. 눈앞에 처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이윽고, 아르펠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로한은 검을 쥐고 있는 손을 몸 뒤로 크게 젖혔다. 주변에 포진해 있던 고위 신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이따 봐요, 아르펠.”
그 말을 끝으로, 로한이 손에 힘을 뺀 채로 젖혔던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새까만 검이 빠른 속도로 공중을 날았다.
동시에, 로한의 낯에 고여있던 화사한 미소에 균열이 갔다. 차곡차곡 쌓이는 감정을 차마 버틸 수가 없어서. 아르펠이 곁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가면이 깨어진 셈이었다.
“로, 로한 님?! 이게 무슨!”
“무슨 짓입니까! 검을 저 안으로 던지다뇨!”
“시, 신께서 내린 마검이……!”
“로한 님!”
순식간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나같이 이번 작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몇몇은 검이 ‘아르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마신전의 고위 신관들은 신전 내에 있는 첩자를 밝힐 때 아르펠이 마검으로 변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워낙 인상적인 장면이었던 터라 그때의 장면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뇌리에 선명히 남은 채였다.
그들만큼은 언성을 높이며 소리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든 로한의 얼굴이 몹시도 서글퍼 보였으므로.
웅성거리는 소음이 차차 번져나갔다. 로한이 검을 던지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한 이들은 옆에서 들은 이야기에 경악해 함께 목소리를 높이기 바빴다.
“그만!!!”
그 순간, 입을 다물고 있던 레리아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성력을 담은 목소리가 파동처럼 주위에 번져나갔다. 입 모아 떠들고 있던 이들이 거짓말처럼 말을 멈췄다. 그 음성에 서려 있던 은은한 압박감 탓이었다.
“그도 생각이 있어 한 행동입니다. 이게 ‘작전’이었어요.”
“하지만……!”
“못 미덥다 할지라도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우시면 직접 저 안으로 들어가 주워오시지요. 아무도 당신을 붙잡지 않을 테니.”
입을 꾹 다문 로한을 대신해 레리아나가 신랄한 말을 뱉어냈다. 반박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이에게는 싸늘한 시선까지 보내며. 마지막까지 불만을 온몸으로 표해내던 신관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쭈그러드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
“괜찮을 거야.”
정리된 상황을 눈대중으로 살피던 레리아나가 속삭였다. 반쯤 죽은 눈을 하고 있는 로한을 향해서였다. 어설피 건넨 위로에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낯에 쓰디쓴 미소가 자리 잡았다. 직전의 위로는 과연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레리아나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잘근 깨문 입술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래. 어쩌면 이건…… 저 자신을 향한 다독임일지도 모르겠다.
174
망령의 힘이 뭉치고 뭉쳐 만들어낸 거대한 회오리 속. 그 한 가운데에 떨어진 아르펠은 어느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내 그의 눈이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
태풍의 눈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회오리의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물론, 그만큼 망령의 기운이 짙어지긴 했지만…… 가만히 손을 주먹 쥐어본 아르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여들고 숨이 막히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던 전과 다르게. 변화의 원인은 뻔했다.
<긴장되지는 않냐.>
“…글쎄요. 별생각 없습니다.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것 정도.”
<저놈도 그렇지만 너도 참 별종이야. 한결같구만, 한결같아.>
마신의 목소리가 왱왱 머릿속을 맴돌았다. 투덜거림인지 책망인지 모를 음성이었다. 아르펠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플 거다.>
“알고 있습니다.”
<진짜 많이 아플 거라니까?>
“알아요.”
<죽고 싶을지도 모르지.>
“아뇨.”
그럴 일 없습니다.
몇 번 더 말이 덧붙었다. 그는 대부분 가볍게 대답을 내놓았으나, 마지막 말만큼은 아니었다. 단호히 끊어내는 것도 모자라 완강히 고개를 저어대기까지 했다. 마신이 내놓은 가정이 있어서는 안 될 미래라도 되는 듯.
“제가 죽으면 로한은 혼자 남습니다. 거기다…….”
아르펠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이곳에 발을 들이기 직전, 로한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
‘아르펠이 죽으면…….’
‘…로한?’
‘저도 따라 죽을게요.’
담담히 죽음을 이야기하던 목소리. 찰나에 불과했지만, 아르펠은 그런 로한에게서 또렷한 진심을 느꼈다. 동시에 머릿속에 최악의 미래가 그려졌다.
저가 죽고, 절망한 로한이 따라 목숨을 끊는. 결코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결말이었다. 아르펠이 지긋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니 죽어서는 안 된다. 아르펠은 로한이 죽는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너희 둘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그냥 서로 물고 빨면서 평생 살라지.>
“감사합니다.”
<…….>
마신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펠은 어쩐지 그가 짜증을 내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왜지. 덕담에 착실하게 감사 인사까지 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끔찍한 상상으로 인해 가라앉았던 기분이 마신과의 대화로 인해 풀렸으니까. 아르펠로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곧 내가 네게 두른 보호막을 거둘 거다. 그때부터 네게 모든 힘이 달려들겠지. 이 땅을 물들인 것도, 땅 아래 묻혀있는 것도, 널 가두고 있는 거대한 회오리도, 전부. 아마 전보다 수백 배는 더할 통증을 느끼겠지.>
“괜찮습니다.”
<하여간……. 아무튼 그 힘을 거부하려 들지 마라. 최대한 많은 힘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강림’이 시작될 테니까.>
아르펠이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죽였다. 마신이 했던 말대로, 제게 남아있던 가호가 금방 사라질까 그랬던 것인데. 의외로 마신은 바로 힘을 거두지 않았다. 아르펠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왜…….”
<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이었다. 마신은 끝이 난 줄 안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전과는 다른,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내가 조금만 네게 신경 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
<후회되는구나. 그 당시에는 내가 내린 결정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했거늘.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 널 택했다면 난 아주 오랜 시간 잠들어있었을 테니까. 로한에게 축복을 내리지도, 이리 강림을 방해하지도 못했을 테지. 하지만…….>
“…….”
<미련이 남는구나. 조금 더 괜찮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그리고 미련. 혹자는 전지전능한 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 말할 테지만, 아르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르펠은 신의 권능을 일부 이어받은 마검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그는,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도 했다. 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괜찮습니다. 단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으니까.”
아르펠이 담담히 읊었다. 기실 모순이 있는 말이었다. 로한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였다. 상대가 신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이끌어 내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원망을 느낄 리가.
하지만 아르펠은 확신했다. 만약 저가 처음부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할지라도 자신은 마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히려 동정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감사합니다. 로한과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백이면 백, 감사해하지 않을까. 30년 전의 그 날, 마신이 아르펠을 택했더라면 그는 구원교의 실험체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황궁에 넘어가지도, 황제의 눈에 띄지도, 로한의 집 앞에 버려지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로한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아 만났다 한들 지금과 같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아르펠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와 마주할 수 있게 된 건 실험 중 전생의 영혼이 섞여 들어온 덕이므로.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신이 그런 선택을 내렸기에, 지금의 자신은 존재할 수 있다. 퍽 철학적인 생각이었지만 아르펠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마신이 말을 이은 건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죽 이어진 음성의 사이사이에 옅은 헛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잡소리는 그만해야겠다. 눈이나 감아라.>
“네.”
<천이라도 하나 주워서 입에 물고 있던지. 이 꽉 악무느라 이빨 나갈라.>
“……?”
아르펠은 화제를 확 틀어버리는 마신을 능숙하게 대했다. 과거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꼭 한두 번씩 겪고는 한 일이었으니까. 하나 다음 말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신은 검이다. 신의 권능을 이어받아 부러지지 않는 마검.
그런데 이빨이 나간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럴듯하게 들렸다. 주섬주섬 그림자를 끌어올린 아르펠이 그 속에서 언제 넣어놓은 지 모를 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댄 찰나, 마신이 버럭 외쳤다.
<그걸 하란다고 하냐?!>
“하지만…….”
<하! 마검은 내 역작이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그런 검이 고작 이 악무는 걸로 부러질 리가 있나!>
“…그런가요.”
<말을 말아야지. 눈이나 감아라, 어서!>
먼저 속이려 들 때는 언제고 다시 눈을 감으라 재촉한다. 그러나 아르펠은 순순히 눈을 감기만 할 뿐, 그 점을 꼬집고 들지 않았다. 이상할 것 없었다. 마신은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숨을 들이켜. 길게.>
“네.”
<다음, 천천히 내쉬고.>
“…….”
<이제 정말로 거둘 거다. 그러니…… 건투를 빌마. 네가 원하는 결과를 거머쥐었으면 좋겠구나.>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형태는 무사히 살아남아 로한의 곁에 돌아가는 것. 그게 아르펠이 원하는 결말이었으므로.
***
내내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마신의 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세상이 검푸르게 물들었다. 두 눈을 꾹 감고 있는데도 그게 느껴졌다. 동시에 사방에서 들리는 망령의 비명으로 귀가 먹먹해졌다. 더없이 기괴한 변화였다.
하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검푸른 세상도, 먹먹한 귀도 여전했으나 아르펠은 더 이상 그 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온몸에 쏟아져 들어오는 불길한 기운이, 생명을 탐하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앗아간 탓이었다.
“윽……!”
몸이 망령의 힘으로 물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웅크려 땅을 뒹굴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로한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필사적으로 아르펠을 막아 세웠다.
우습게도 그 순간 아르펠은 마신의 말을 이해했다.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말 그대로였다. 아르펠은 통증에 취약했다. 역설적인 말이었다. 마검인 그는 본디 통증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온몸이 찢어지고, 혈관에 날카로운 돌이 굴러다니는 것도 같았다. 살점 하나하나가 찢어지는 듯했다. 그만큼 끔찍한 통증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마. 그만해.
아르펠이 속으로 외쳤다.
제 것이되 제 것이 아닌 욕구가 자꾸만 그를 부추겼다.
생명을 탐해라. 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라. 그들의 피를 내게 바쳐라. 그리고…… 나를 받아들여라. 이질적인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아르펠은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거부하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다.
‘그 힘을 거부하려 들지 마라.’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통증이 몰아쳤으나 마신의 당부만큼은 선명히 기억이 났다. 버텨야 했다. 더, 더 끌어모아야만 했다. 그래야 로한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아…….”
비틀대던 아르펠이 조용히 탄식했다. 얼굴을 감싸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로한.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로한.”
한 번 더.
“로한…….”
다시 한번.
<로, 한…….>
목을 감싸 쥐었다. 목에서 튀어나오는 소리가 조금씩 변해갔다. 머릿속을 끊임없이 파고드는 속삭임처럼.
양손으로 몸을 끌어안았다. 안돼. 안돼. 이대로 가선 안 된다. 이를 꾹 악물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버텼다.
현혹되지 마. 그것의 말을 들어서는 안 돼. 맑은 목소리가 간간이 뇌리를 울린다.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로한. 로한. 로, 한?>
아팠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이러다 그의 이름을 잊을지도 몰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잊고 싶지 않았다.
<로…….>
아. 뭐였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펠이 숨을 헐떡였다. 이유 모를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끝내줘…….>
그가 중얼거렸다. 무얼 향해서 하는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입에 담았다. 그게 제 곁에 유일하게 남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순간.
<아.>
아르펠이 탄식했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머리 위를 맴돌았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175
사방에 불길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푸르게 물든 땅을 밟고, 텁텁하기 그지없는 공기를 마시며 그 자리에 서 있던 모두가 초조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누군가는 연신 심호흡을 하고, 또 누군가는 사정없이 입술을 짓씹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꾹 눌렀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뜻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로한 또한 그러했다. 사정없이 깨문 입술은 진작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한쪽에는 피가 굳어 있었고, 다른 쪽은 채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심장이 뛰었고, 턱 끝까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차올라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망령의 기운을 보고, 그들이 내지르는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한순간 대기가 일렁였다. 마력을, 성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눈앞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게 무슨……!”
누군가가 소리쳤다.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망령의 회오리가 걷혔다. 아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게 정확했다. 공기 중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망령의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차 숨을 쉬기 편해지는 감각이 낯설었다. 로한이 울 듯이 낯을 일그러뜨렸다. 숨통이 더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모순적인 일이었다. 정작 주변을 둘러싼 공기는 빠르게 맑아지고 있는데.
주위에 산개해있던 검푸른 기운이 한 점으로 모여드는 광경은 기이했으며, 또 경이로웠다. 이름 모를 신관 하나가 탄식을 터뜨렸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죠, 대체? 왜 망령이…….”
“이, 이러면 좋은 일 아닌가? 더 이상 죽치고 경계하고 있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희망은 싹을 틔웠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망령들의 회오리가 사라질 거라는, 두려움에 떨며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퍽 낙관적인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몸집을 불렸다. 회오리가 차차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음을 인지한 탓이었다.
“땅을 봐! 색이…!”
“색이 돌아오고 있어…….”
땅은 느리지만 확실히 제 빛깔을 찾아갔고, 새까맣게 썩은 나무는 부서져 모습을 감추었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모두가 바라마지 않을 거라 감히 확신할 수 있는 모습이다.
“……신의 축복.”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 압도적일 만큼 경이로운 광경은 신의 축복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현실적인 현상을 눈앞에 마주한 모두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나 로한은, 지금의 상황이 더없이 끔찍했다. 사라진 망령의 기운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아니까. 모두가 감탄하며 지켜보고 있는 이 광경이, 신의 축복 따위가 아닌 악신의 강림으로 인해 비롯된 일임을 알고 있으니까.
‘아르펠.’
그 이름을 천천히 되뇌어 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몇 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곁에 와주기를 강하게 염원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일은 아르펠의 손에, 또 제 손에 달려있었으니까. 하나 그럼에도, 입안이 씁쓸해지고 말아서.
그런 반응을 주변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레리아나와 카시아가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
로한을 신경 쓰는 것은 다니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다니엘 님. 이제 그만 지켜봐도 되는 것 아닙니까? 회오리가 알아서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왜인진 모르겠지만, 땅에 있던 망령의 기운도 빠지고 있고…….”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신관 하나가 물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저런 낙관적인 생각만 하고 있단 말인가.
“아뇨,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끝까지.”
그러나 다니엘은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갈라진 목소리로 일관된 말을 내뱉었을 뿐이다.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것인지 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어?”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누군가가 의문이 가득 찬 소리를 토해냈다. 모두의 시선이 홀린 듯 한 곳을 향했다.
회오리가 걷히며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끗해진 땅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의 인영 또한, 그랬다.
아니. 저것이 사람인가?
다니엘에게 철없는 질문을 내뱉었던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기실 저 멀리 나타난 인영은 그에게 퍽 익숙한 이 중 하나였다.
항상 로한 님의 곁을 지키고 있는 과묵한 신관. 분명…… 이름이 아르펠이었나. 워낙 모습이 자주 보이다 보니 혼자서만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던 남자였다.
왜 그 사람이 저기 있지? 의문이 툭 튀어나왔다. 애초에 로한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신관은 알고 있었다. 그가 망령의 폭풍 속에 집어 던진 것은 마검이지, 사람이 아니었음을.
그러나 신관은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를 마주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던 찰나.
――!
그에게서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므로.
“끄어억……!”
동시에 누군가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다시금 쏟아져 내리는 지독한 망령의 기운에 휩쓸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를 눈치챈 다니엘이 혀를 찼다.
무슨 일이 있든 절대로 경계를 풀지 말고 몸을 보호하고 있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거늘.
“자리를 지켜라! 신호를 기다려! 최대한 버티는 거다!!”
강한 힘이 담긴 목소리가 주위를 장악했다. 그 음성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아, 저것은 적이구나.
망령의 힘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하늘이 검게 물들지도, 땅이 썩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느꼈다. 이 힘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까딱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
살아남기 위해선, 힘을 합쳐야 했다.
시작은 뇌리를 울리는 기이한 음성이었다. 뭉개진 소리는 어떠한 단어도 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하늘을 향해 거대한 마력이 쏘아진 것은 그때였다. 파란 하늘 위를 수놓는 새까만 선은 그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의 시선을 앗아갔다. 이윽고 다니엘이 외쳤다.
“지금!”
그것은 신호였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직 부화하지 못한 재앙을 공격하라는 신호. 그 뜻을 알아챈 신관들은 있는 힘껏 손끝에 힘을 모으고, 하늘 높이 쏘았다.
어둡고 밝은 빛들이 일시에 창공을 가로질렀다. 둥글게 원을 그린 빛줄기는 마치 별 같았다. 몸에 남은 힘을 박박 긁어모아 마력을 쏘아 날렸던 신관 하나가 다분히 감성적인 생각을 머금었다.
공중으로 치솟아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빛은 일시에 한 사람, 아니, ‘무언가’에게 닿았다.
콰아아앙――!
굉음이 일었다. 땅이 크게 흔들리고 대기가 울었다. 그것에 힘입은 바람이 날카롭게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정하게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칼바람에 휩쓸려 엉망진창이 되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풀렸다.
“윽…!”
시야를 어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애써 정리한 신관이 일순 행동을 멈추었다.
‘방금…….’
뭔가 깨지는 소리 같은 게, 들리지 않았나? 그녀가 미간을 좁히고 몇 초 전을 되짚기 시작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단번에 몰아친 거대한 힘으로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이 몰려오긴 했으나, 신관은 분명히 들었다.
파장창, 하는…… 단단한 금속 같은 게 깨지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하나 그녀의 상념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굉음이 멎고, 땅의 흔들림 또한 차차 가라앉는 순간 무언가가 드높은 창공 위로 솟구쳤으니까.
“아…….”
누군가가 탄식했다. 아니, 절망인가? 그만큼 ‘무언가’는 끔찍했다.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순한 망령의 힘이 그것으로부터 피어올라서, 끔찍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 ■■ ■ ■■■, ■■■ ■ ■■■!>
그것이 비명을 질렀다. 다만 그 기괴한 소리는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했다. 발음이 뭉개진 것도 아니었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알 수 없는 존재의 말을, 이 세계가 거부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주저앉고, 누군가는 몸을 덜덜 떨며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볼 무렵. 하늘이 열렸다.
“……!”
새까맣게 벌어진 틈 너머로 거대한 손이 내려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듯한 하해와 같은 마력이 그들을 덮쳤다.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압도적인 힘은,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깨끗한 마력의 주인은 정해져 있다고. 애초부터 답은 하나였다.
“신이시여…….”
꽉 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불길한 존재가 신의 손아귀에 붙잡힐 때까지. 그것이 하늘에 난 균열 속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말이다.
손이 거두어진 균열은 차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다시 푸른빛으로 차올랐다.
이윽고, 작게 난 금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 틈으로 한 줄기 음성이 흘러내렸다. 말 그대로 머릿속을 파고드는 울림이었다.
<살릴 수 있을 거다, 너라면.>
의미 모를 말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은 채 감동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던 신관 하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하늘의 균열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여름 밤의 꿈만 같은 상황에 신관은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무심코 발견했다. 창공이 말끔한 푸른 빛으로 물든 직후,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는 로한의 모습을.
176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기억하는 건 얼마 없었다.
저를 붙잡은 레리아나의 손, 머릿속에 흘러들어온, 때가 되었다던 마신의 목소리, 하늘을 물들인 수많은 성력과 마력의 향연, 깨진 공간 너머로 내려오던 거대한 무언가.
더듬더듬 지난 일을 되짚는 건 잠깐이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끄떡하지 않는 몸이건만 이상하게 숨이 찼다.
“아르펠……!”
모든 신관들의 힘이 쏟아진, 망령의 힘이 모여들던 중심.
사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온 힘을 끌어모아 달리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몇 초도 되지 않아 도착할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다가가도 다가가도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울컥, 가슴 속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토록 멀게 느껴지던 곳에 마침내 다다랐을 무렵 로한은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발끝에 힘이 빠지고, 귀는 먹먹해지고, 또 눈앞은 흐려졌다.
턱턱 막히는 숨에 목을 강하게 긁었다. 기어코 목에 긴 상처가 나고, 피 묻은 살점이 손톱 사이에 낄 때까지, 계속.
“아르, 펠….”
다시 한번 목소리를 쥐어짰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하, 하. 로한이 토막 난 웃음소리를 흘렸다. 허망한 시선이 풀이 무성한 땅 위에 닿았다. 가슴 속에 큰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한 발짝, 두 발짝. 유난히 꽃이 많이 피어있는 곳을 향해 로한이 천천히 다가갔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바람이 그 주위를 가볍게 흐트려놓았다. 흔들리는 꽃과 풀 사이로, 새까만 무언가가 보였다.
“아아…….”
로한이 짧게 탄식했다.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작달막한 음성이 수많은 감정이 서렸다. 절망, 실의, 체념, 자조, 설움, 비애…… 갖가지 부정적인 것들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댔다.
그가 느리게 무릎을 꿇었다. 무성한 풀의 한 가운데, 정확히는 그 안쪽에 조각난 채 깨져있는 제 하나뿐인 검을 향해.
‘아르펠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네 곁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너와 그의 계약이 끊어지지 않도록 소망해. 내게, 이 세계에게 빌어라. 그를 살려달라고.’
흐릿한 목소리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에게, 그리고 이 세계에게 빌어라. 선명히 남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깨진 검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주변을 어루만지던 로한이 천천히 제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줘. 아르펠을 빼앗아가지 말아줘. 내 세계를, 내 전부를 돌려줘. 로한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중얼거렸다.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마치 꿈결을 걷는 듯 몽롱했다.
이내 그는 제 귀에 박혀있던 보랏빛 귀걸이를 잡아 뜯듯이 빼내었다. 억지로 빼낸 탓에 상처라도 난 건지 귓불을 타고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피 묻은 귀걸이를 꼭 쥔 로한이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았다.
“제발…….”
꾹 다문 잇새로 옅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늘게 떨리는 음성만큼이나 맞잡은 손 역시 덜덜 떨렸다.
투둑. 툭. 손 틈 사이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개중에는 피범벅이 된 손끝 때문에 붉게 물든 것 역시 있었다.
투명하고 붉은 물방울은 풀을 적시고, 꽃잎을 적시며, 또 조각난 검을 적셨다. 아래로 떨어지는 제 눈물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로한이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 아르펠이 보고 싶었다.
또 지키지 못했다. 그를 잃기 직전에 와서는 다른 존재에 기대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기까지 했다.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라앉은 눈동자에 비참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비참하지만, 그렇게 해서 아르펠을 살릴 수 있다면…… 신과 세계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 해도 상관없었다.
무릎을 꿇든, 애원하든, 매달리든, 설사 모욕적인 일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로한은 그 줄을 꽉 붙들고 놔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애초부터 저울질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로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다시 한번 당겨 물었다. 마른 핏자국 위로 또다시 얇은 핏줄기가 그려진다. 주룩주룩, 끊임없이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가, 정확히는 정중앙에 박혀있던 보석이 깨졌다.
***
오웬이 흠칫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나 시선만큼은 아득했다. 단순히 바깥을 보는 게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기묘한 눈이었다.
“신관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방금…….”
이윽고 그 변화를 눈치챈 렉시아가 이유를 물었지만, 오웬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나 눈에 서린 복잡한 감정만큼은 지워내지 못했다.
“그런가요. 잠시 숨이라도 돌리시겠습니까? 계획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속이 복잡하면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그 점을 렉시아 또한 모르지 않았다.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피해드릴까 묻는 언행은 능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웬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이 갈팡질팡했으나, 이내 그는 또다시 고개를 휘저었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정말로 끝이 다가온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하하, 생각보다 감성적이시네요. 그래도 그런 명언이 있잖습니까.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 전 이쪽에 걸어보고 싶네요.”
“그쪽이야말로 퍽 감성적이시군요.”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어이없음이 한가득 서린 시선이 렉시아를 향했다. 이어서 내뱉은 숨결은 헛웃음을 닮아있었다.
용병 길드장이라는 렉시아를 만나고, 그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어본 결과 오웬은 그가 자신의 정반대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마디로 맞는 것이 거의 없는 사이라는 뜻이다.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사이가 아니었더라면, 그 일이 제국의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협업을 때려치웠을 것이다. 오웬은 감히 장담했다.
매사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이 진지해야 할 때는 진지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렉시아는 그런 것이 없었다.
시종일관 능글맞고, 장난스럽게 굴며, 말이든 행동이든 지나치게 가볍다. 열 받는 건, 그럼에도 그의 일 처리 능력 하나만큼은 봐줄 만하다는 것이었다.
맞는 부분을 찾기가 힘들었고, 솔직히 말하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웬이 아닌 척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쓰는 렉시아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적어도 곁의 사람을 신경 쓸 줄 아는 이였다. 그가 마음속에 있던 렉시아의 위치를 조금, 아주 조금 위로 올려주었다. 적어도 용병 길드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복잡한 심경이 나아졌다.
방금 전, 몸을 스치고 지나갔던 기묘한 파동을 떠올렸다. 망령과 마력을 뒤섞은 듯한,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운. 오웬의 눈빛이 다시 한번 가라앉았다.
‘……아르펠.’
항상 로한의 곁을 지키던 마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쑥 불안함이 치솟아 올랐으나 그건 잠깐에 불과했다. 아르펠의 곁에는 로한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잘못될 일은 없다. 로한이 그러한 선택을 할 리는 없었으므로.
불안 다음으로 느낀 것은 하나의 직감이었다. 길었던 황실과 신전 간의 싸움이 마침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렉시아의 표현을 빌려 ‘황실을 뒤집어엎을 계획’을 코앞에 두고 있던 터라 기분이 더욱 이상해지고 말았다.
그게 다였다. 요동치는 마음을 익숙하게 가라앉힌 오웬이 제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살펴보러 갈 생각인데, 어떻게. 저랑 같이 가실래요?”
“……그러죠.”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샌가 그의 머릿속에는 직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고민이 깨끗하게 지워진 채였다. 그래. 집중할 곳은 따로 있지 않은가. 오웬의 낯이 한껏 비장해졌다.
***
얇게 쳐놓은 커튼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이 시끌벅적한 회의장 안을 덥혔다. 루시엘은 그 광경을 익숙하게 바라보았다.
안건 하나를 내놓으면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이 승냥이 떼들처럼 몰려들고, 서로를 물어뜯는다. 황제는, 제 아버지는 항상 그 신경전을 말없이 응시하고는 했다. 그러다 결론이 나는 듯하면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
그럴듯한 이유를 함께 대고는 하지만, 루시엘은 잘 알고 있었다. 논리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제 아버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으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런 감상을 느끼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겠지. 오늘 역시 비슷하게 흘러갈 거라며, 이 회의장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그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하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루시엘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콰과광―!
동시에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발음이 회의장 안을 웅웅 울렸다. 유리가 깨지고, 거센 바람에 휩쓸려 커튼이 휘날린다. 땅이 무서울 정도로 흔들렸다.
“아아악!”
“끅, 누, 눈이……!”
“이게 대체 무슨!”
깨진 유리 조각이 몸에 박힌 이는 비명을 질렀고, 그중에는 눈에 상처를 입고 주저앉은 이도 있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황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새 유리 조각에 긁혔는지 볼에 선명한 상처가 나 있음에도 그랬다.
“……무슨.”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엘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은 바람에 피가 흘러내리는 볼을 문지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다른 곳은 이제야 휘날림을 멈춘 커튼의 앞이었다. 붉은 천을 확 걷어내니, 깨진 창 너머의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치솟는 불길, 까만 연기, 은은히 들리는 비명……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더 이상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
-캬아아악!
어디선가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177
어떠한 전조도 없이 울려 퍼진, 귀를 찢는 듯한 폭음. 그 뒤를 우르릉, 하는 소음이 뒤따랐다. 통째로 폭발한 궁 하나가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그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지경인데, 충격적인 상황은 거기서 멎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들썩이더니 그 안에서 사람이 기어 나왔다.
아니, 저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으… 으으……!”
사람의 체격을 하고 있되 사람이 아닌 것. 여러 생명체가 뒤엉켜 사람의 형상을 하고만 있을 뿐인 존재였다. 심약한 누군가가 그 끔찍한 광경에 몸을 덜덜 떨며 신음을 흘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나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에게 익숙함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퍽 불쾌한 일이었으나, 그만큼 인상적인 일이었기에 머릿속에서 지워내기는 쉽지 않았다.
“폐하. 저, 저것들은 얼마 전 궁을 습격했다던 그 ‘괴물’이 아닙니까?”
혼란스러운 와중, 한 귀족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물었다. 잔뜩 흔들리는 눈 하며 떨리는 몸이 그가 겁을 집어먹었음을 대신 보여주었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황제에게 대뜸 말을 걸 용기가 생긴 듯했다.
아무도 그 귀족을 말리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저것은 몇 주 전, 황궁 앞의 광장에 걸렸던 괴물과 똑 닮아있었다. 여러 생명체의 신체 부위를 엉성하게 꿰매놓은 것만 같은 외형이 흡사했다.
황실에서는 괴물이 반역자가 키워낸 사병이라 말했다. 본래 인간이었으나 악신의 영향을 받아 몸이 뒤틀린 것이라고, 분명 그렇게 덧붙였더랬다.
괴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광장에 걸린 괴물은 본보기로 내세운 존재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수백에 가까운 괴물의 시체가 황궁의 뒤편에 있는 산에서 불태워지고, 땅 아래 묻혔다.
당시 그 일을 목격한 귀족은 적었으나, 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야기가 퍼지며 많은 귀족들이 그 날의 일을 끔찍한 악몽처럼 기억하고는 했다.
“……그래. 그렇다.”
“하지만 그날 반역자들은 모조리 숙청했다고… 설마 잔당이 남아있었던 겁니까?”
“그런 모양이지.”
“그럼 당장 기사단을 움직여야……!”
주위가 금세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반역자, 오스카가 부리던 괴물. 그들은 황제를 노렸고, 황제는 지금 이곳에 있다. 무엇이 목표가 될지 명확해진 상황이다.
혹자는 황제를 지켜야 한다며 아우성을 쳤고, 혹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짓눌려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자리를 피할 낌새를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도망갈 생각이 만만한 듯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가만히 앉아 깨진 창 너머의 광경을 눈에 담기만 하고 있었다. 회의장을 벗어날 생각이 아예 없는 듯했다. 별관 쪽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훤히 보임에도 그랬다.
“폐하!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기어이 나온 독촉에도 황제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안건을 이야기할 때와 별다를 것 없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고요한 낯이었다.
그가 보인 변화라고는 딱 하나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기다란 책상 아래, 손바닥에 상처가 날 만큼 강하게 쥔 주먹. 기어이 새어 나온 핏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폐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 빨리 이곳을 나가야……!”
“나, 난 나가겠어!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매달리며 설득을 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황제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지독한 두려움이 눈앞을 가로막아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황제가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탓도 있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됐다. 충신이라고 할 만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조금이라도 동요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가장 앞장서 도망을 치고자 한 귀족이 회의장의 문을 벌컥 열려고 한순간, 굳게 잠겨있는 문에 오히려 그가 튕겨 나간 것이다.
“억……!”
눈 깜짝할 새에 바닥을 나뒹굴게 된 남자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눈에 띄는 반응에 뒤따라가던 귀족 하나가 급히 회의장의 문에 달라붙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무, 문이 잠겼다니! 이게 무슨!”
“게 아무도 없느냐! 문이 잠겼다! 아무도 없냔 말이다!”
곧장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문을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너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모두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회의장에는 여러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만큼 그 주위에 호위 인력이 빽빽하게 깔렸다. 회의장 바로 앞에도 서너 명의 기사가 보초를 서고는 했다. 그러니 원래라면, 안쪽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가 문을 여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에 띄는 반응 하나 없었다. 목소리 한 번 들리는 법이 없고, 흔한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이럴 리는…….”
문을 두드리던 귀족 하나는 결국 제풀에 지쳐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바깥에 기사는커녕,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 하나 지나다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처음 소동이 난 순간부터 기사들이 회의장 안에 진입하는 것이 맞았다. 하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회의장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 순간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을 지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가정에 귀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장. 갇혔군.”
또 다른 목소리가 현실을 인정했다. 문은 잠겼고, 회의장은 지상층이 아니었다. 창문을 통해서라면 바깥에 나갈 수 있기는 했지만 뛰어내린다면 다리 하나 정도는 쉽게 부러질 것이다. 머리로 잘못 떨어졌다간 죽을 수도 있겠지.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것인지, 곧장 창을 향해 달려나가는 이는 없었다. 이윽고 회의장 내에 정적이 차올랐다.
그렇게 모두가 반강제적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와중, 황제는 홀로 상념에 빠져 있었다.
‘……왜.’
왜 이렇게 됐지?
이런 일은 그의 계획에 없었다. 이런, 별관이 무너지고 그 사이로 괴물이 튀어나오는 일 따위, 생겨서는 안 됐단 말이다.
더군다나 별관은 지하 연구실이 있는 곳이었다. 건물의 잔해를 해치고 나오는 괴물들의 출처 또한 그곳일 것이다.
눈에 핏발이 섰다. 그 장소가 탄로가 나지는 않았다는 점에 안도해야 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피범벅이 되어버린 손을 느릿하게 편 황제가 눈을 감고 두어 번 숨을 골랐다.
“하… 하하.”
그러나 마지막엔 기어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입술 옆으로 번진 피가 순식간에 기괴한 꼴을 만들어냈다.
‘어떤 놈이, 감히.’
황궁에서, 내 영역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반기를 든단 말인가. 번뜩이는 눈이 회의장 안에 있는 귀족들의 면면을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 그리고 입에 묻은 피를 본 귀족들이 알게 모르게 기겁하는 것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이내 황제는 평소와 다른 점 하나를 눈치챘다. 재상. 피데스 후작. 로엔티오 피데스…… 급한 일이 있어도 언제나 회의에 꼬박꼬박 참여하고는 했던 그 거슬리는 남자가, 오늘은 자리에 없었다.
“…피데스 후작. 그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 있나?”
“피, 피데스 후작이라면 어제 후작령으로 내려간 것으로 압니다.”
“확인은?”
“그 부분은 저도 잘…….”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 확실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오스카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나. 답지 않게 가졌던 짧은 미련은 빠르게 흘려보냈다.
‘설마 그놈이 반역을?’
별관을 무너뜨리고, 황제와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있는 회의장을 고립시켰다. 명백히 반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하필이면 지하 연구실을 숨겨 놓았던 별관이다. 많고 많은 궁 중 그곳을 골랐다는 건 지하에 감춰진 비밀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일 터.
그러나 황제는 조용히 가설을 부인했다. 피데스 후작이라면 이렇게 갑작스레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끈에 묶여있는 그라면 더더욱.
거기다 황제는 끊임없이 피데스 후작을 살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반역을 일으켰고, 오랜 시간 일을 계획했다면 그 수상한 동태를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피데스 후작은 아니다. 깔끔한 결론이었지만, 진범은 다시 한번 미궁에 빠졌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몄단 말인가.
“잠시 진정해 주십시오.”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루시엘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때마침 그 누구 하나 입을 뻥긋하지 않고 있던 때라,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퍽 부담스러울 법한 상황에서도 루시엘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의 동요도 없는 고요한 시선은, 언젠가 이러한 일이 올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심코 든 생각에 황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불길한 가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호, 혹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 겁니까!”
“아뇨. 이곳을 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망발이오! 당장 방법을 생각해내도 모자랄 상황이건만!”
“하지만 저것들이 이곳을 공격할 일도 없을 겁니다.”
회의장 안을 가득 물들인 웅성거림이 기묘한 확신이 어린 한마디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의미를 묻는 수십의 눈동자가 루시엘을 향했다.
그는 그것에 답을 해주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바깥을 가리켰다. 그제야 귀족들이 밖의 상황을 재차 살피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누군가가 탄식을 흘렸다. 그만큼 눈앞에 도래한 상황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달려오던 괴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넘어지고, 쓰러지다…… 결국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햇빛에 녹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178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이 늘어갔다. 목전에 다가왔던 죽음의 위협이 가셨음을 깨달은 것이다. 가히 기적이라고까지 칭할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루시엘은 이것이 기적이 아님을 알았다.
‘이런 말은 없었는데.’
괴물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말 따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본래라면 기사단이 저들을 제압하거나 오웬이 가세하는 방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나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루시엘이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피를 흘리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여기서, 약속한 일을 끝까지 마무리 짓기만 하면 될 터.
“조금만 더 버티면 기사단이 올 겁니다. 당장 나갈 방법은 없지만 그때가 되면 회의장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누구 하나 죽는 일 없이, 무사히.”
천천히 내뱉는 말을 따라 회의장 내의 분위기도 함께 좌지우지되었다. 안도의 기색이 내려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피며 천천히 안을 둘러보기도 잠시, 마침내 루시엘의 시선이 제 뒤쪽에 있는 황제에게로 닿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어두운 녹빛 눈동자가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말해보거라.”
“몇 주 전의 일로 궁의 경계가 강해졌는데도 저런 대담한 일을 벌인 자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번 습격이 실패로 끝이 났으니, 또다시 같은 일을 벌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궁을 봉쇄하고 최대한 빠르게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루시엘은 막힘없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동시에 몇몇 귀족들의 낯이 허옇게 물들었다. 봉쇄라니. 그 말인즉 궁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것 아닌가? 그들의 시선이 초조한 빛을 띠고 황제에게 닿았다.
“…황태자의 말이 맞다. 사안이 심각한 만큼 빠르게 배후를 찾아야겠지.”
“또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이지?”
“조사단을 꾸릴 것이라면, 그 안에 저를 포함해 주십시오.”
“불허하마.”
답이 지나치게 단호했다. 루시엘의 미간이 짧게 떨렸다.
“폐하.”
“그들의 목적이 제국의 황제라면 내 아들이자 제국의 황태자인 너 또한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지. 네가 다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는구나.”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잠깐의 실랑이가 오고 갔으나 황제는 생각보다 더 고집이 셌다. 결국 루시엘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스르르 옆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겁에 질린 몇몇 귀족들을 향해서였다.
“그대들 또한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길 바랍니다. 폐하의 옥체에 해를 끼치려 한 불순 종자들을 붙잡기 위한 일이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니면,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겁에 질려 몸을 내빼시진 않겠지요.
뒷말을 잇진 않았으나, 루시엘이 생략한 말이 대략 그런 뜻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회의장에서 나간다면 곧장 궁에서 달아날 생각이 만만했던 이들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혹자는 곧장 협력하겠다며 외치고, 혹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협력을 약속했다. 모두에게서 같은 답을 얻어낸 루시엘은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황궁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계획한 대로였다.
***
황제가 단언한 대로 조사는 빠르게 이어졌다. 기사단을 풀어 황궁 내를 대대적으로 수색하게 했으며, 그것은 무너진 별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맡은 게 제2기사단이었다. 제1기사단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가장 중요한 곳을 그들이 맡게 된 것이다. 그만큼 그들을 이끄는 제2기사단장, 브루노 테일러가 가지는 책임감은 막중했다.
최대한 꼼꼼히 주위를 수색하고, 황제 폐하께 해를 끼치려 한 죽여 마땅한 놈들의 단서를 하나라도 찾는다. 그가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하며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몇 분 뒤, 이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지고 만다.
“개인적인 볼 일 때문에 내 궁에 상주하고 있던 신관이다. 이번 일에 망령이 관련됐을 확률이 높으니 이 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 쉽게 단서를 찾아낼 수 있겠지.”
신관 하나를 데리고 대뜸 무너진 별관 앞에 발을 들인 황태자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신관의 얼굴은 익숙했다. 직위가 높은 만큼 테일러는 고위 귀족들의 면면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게 황궁에 발길을 끊은 귀족일지라도 말이다.
그런고로 피데스 후작가의 사남이자, 고위 귀족이면서도 성을 버리고 신전에 들어간 별종. 오웬 피데스의 얼굴 역시 알고 있었다. 눈앞의 신관이 바로 그자라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지? 그대라면 철저하게 이 주변을 조사하고 싶을 텐데. 망령이 깊이 관계되어 있다면 일반인의 시야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단서들이 꽤 있을 거다. 그걸 놓치길 바라는 건가?”
“그건…….”
테일러의 낯이 빠르게 곤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황태자의 말대로 신관을 조사대에 합류시키고 싶었다. 하나 황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제2기사단의 힘으로만 별관을 조사하길 원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신관이지 않나. 그 사실이 테일러의 마음을 갈팡질팡하게 했다. 결국 잠시간 고민하던 그가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신관의 도움을 받는다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리겠지요. 하지만 갑작스러운 합류인 만큼 폐하께 이 일을 보고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신관님이 함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아니. 굳이 보고하러 가지 않아도 괜찮네.”
“누구…… 피, 피데스 후작?”
당장이라도 달려가 보고할 기세가 만만해 보이던 테일러는 갑작스레 끼어드는 목소리에 삐끗했다. 고개를 홱 돌리자마자 보인 건 예상외의 얼굴이었다. 입을 몇 번이고 뻐끔거리던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부, 분명 후작령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마차를 돌렸지. 그런 일이 생겼으니 신하 된 도리로서 곁을 지켜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렇군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아닐세. 그것보다…… 지나가다 이야기를 언뜻 들었네만. 황제 폐하께 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나?”
“아, 네. 맞습니다.”
“그 보고, 내가 대신해주지. 한시가 바쁜 와중에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되지. 폐하께서도 충분히 이해해주실 걸세.”
눈 깜짝할 새에 설득된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빠르게 조사를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제안한 것이 피데스 후작, 제국의 하나뿐인 재상이라는 점도 그의 마음이 기우는 데에 톡톡히 한몫을 한 셈이었다.
피데스 후작은 말을 전해주겠다며 금세 자리를 떴다. 몸을 돌리기 직전 오웬과 눈이 마주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나, 그것을 눈치챈 건 바로 옆에 있던 루시엘 뿐이었다.
***
예기치 못한 두 사람이 합류하긴 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조사가 제법 원활하게 흘러갔다는 뜻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합류하신다고요?’
한 사람이 생각보다 더 큰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시선을 옆으로 흘린 루시엘이 제 근처에 붙어있는 제2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세펜 리누스를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코웃음을 쳤다. 아까부터 아닌 척 곁만 맴도는 게, 의도가 너무 투명하지 않나. 그러나 루시엘은 그것을 꼬집기보단 모른 척 넘기기를 택했다. 굳이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때, 내내 말이 없던 오웬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곳에서 말입니까? 하지만 눈에 띄는 건 없어 보이는데…….”
“아뇨. 그쪽이 아닙니다. 제가 말한 건 아래입니다. 앞으로 다섯 걸음쯤.”
확신이 어린 말이었다. 그에 단원들이 급히 건물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무너진 외벽 조각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몇 분, 마침내 안쪽으로 용케 형태를 갖추고 있는 지하 계단이 모습을 보였다.
“이건……!”
“경첩에 그리 녹이 슬지 않았습니다. 최근까지 이 지하통로를 이용한 사람이 있던 모양이군요.”
“젠장, 이렇게 지척에 숨어들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던 건가.”
곁을 살핀 이들이 한마디씩 던지자 금세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손 하나가 불쑥 위로 솟아올랐다.
“다 같이 안에 진입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수색조에게서 수상한 인물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없으니, 그놈은 분명 이 안에 숨어있을 겁니다. 이상한 짓거리를 꾸미기 전에 빠르게 포획해야만 합니다.”
리누스였다. 침착한 목소리로 건넨 제안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심이 눈앞을 흐리기라도 했는지 기사단장인 테일러까지 수긍하려 하길래, 루시엘이 급하게 그 앞을 막아섰다.
“아니. 이 소식을 궁에 먼저 알리는 게 우선이다.”
“그렇지만…….”
“또한 지원을 기다려야겠지. 저 안에 괴물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다 놈이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차피 지하는 고립되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건물 잔해는 방금 치웠으니 이 앞만 지킨다면 놈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또 다른 탈출구가 있었다면 진작 탈출했겠지. 그러니 소식을 알리고 지원을 기다린다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지나치게 고조된 분위기를 끌어내릴 수가 있었다. 하나둘 정신을 차린 이들이 직전의 주장이 상당히 무모했음을 자각했다. 몇몇은 민망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부기사단장, 리누스는…….
‘젠장.’
그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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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그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지하를 발견하지 않게 하되, 혹시나 지하를 발견하는 일이 생긴다면 기사단을 지하에 몰아넣고 입구를 무너뜨려라. 그게 황제가 요구한 것이었다. 일을 무사히 처리한다면 제1기사단장의 직위를 쥐여주겠다는 말에 혹해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세펜? 어디 불편한 곳 있나?”
“…아뇨. 괜찮습니다.”
와중에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테일러가 불편한 곳을 물어왔다.
곰같이 단순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그런 주제에 충성심은 쓸데없이 드높았다. 진심으로 황제를 선망하는 듯한 그 태도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글쎄. 황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올곧은 사람일까? 정말로 그랬다면 제게 이런 긴밀한 접촉을 해올 리 없었다. 테일러와 다르게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던 리누스는 그런 황제의 뒷면에 크게 휘둘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주먹으로 테일러의 얼굴을 한 대 갈기는 상상을 하며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기사단을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은 하지 않았다. 리누스는 제 이익만큼이나 자신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므로.
***
별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지하통로. 이에 대한 소식은 렉시아와 시종으로 숨어든 데인, 그리고 믿을 만한 심복을 통해 퍼뜨린 이벨린 덕분에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황궁 곳곳으로 퍼졌다.
황제가 이를 전해 들은 것은 알현실에서 한 귀족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매끈하던 얼굴이 단숨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폐, 폐하! 하지만……!”
“난 그대가 때와 상황을 가릴 줄 아는 현명한 이라고 믿고 싶네, 백작.”
“……새겨듣겠습니다.”
황제는 곧장 눈앞에 있는 귀족부터 치웠다. 넌지시 궁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건네보고 있던 남자는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꽁무니를 빼고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알짱거리던 귀족이 빠져나가니 알현실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기억을 되짚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시종이 다급히 전해주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쓸모없는 것. 맡긴 일도 제대로 못 하는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맡기신 일을 무사히 수행하겠노라고 장담했던 뺀질거리는 기사의 얼굴이었다. 욕심만큼이나 잔꾀가 많은 놈이라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아니었던 듯했다.
아니. 객관적으로 평하자면 그 기사의 탓이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꼽자면…… 멋대로 그곳에 걸음 한 루시엘이겠지. 루시엘과 오웬 피데스, 그리고 로엔티오 피데스. 세 사람의 존재가 자신이 계획한 것을 망쳐 놓았다.
하나 신경 쓰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제 귀에 들어온 소문만 해도 그랬다. 그 주목도가 남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퍼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는 것처럼.
“…….”
그 아이인가. 어느 순간부터 제게 거리를 두던 딸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밀랍처럼 굳어있던 입꼬리 끝을 느리게 매만졌다.
자꾸만 수면 위로 올라오려는 거슬림을 지긋이 내리누른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게 생겼다.
***
궁에 끔찍한 소문이 퍼진 건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 ‘괴물’이 만들어진 게 별관의 지하라고 하던데.”
“으, 소름 끼쳐!”
사람이 서너 명 이상 모인 곳에서는 신분을 불문하고 그 이야기를 시끄럽게 떠들고는 했다. 내용도 가지각색이었다.
별관 아래에 파묻힌 게 사실 비밀리에 만들어진 연구실이었다는 것, ‘괴물’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는 것, 그것도 모자라 신의 피조물인 마검을 빼돌려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다는 것…….
퍼진 소문은 그게 다였지만, 원래 소문이란 건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수록 내용이 부풀려지는 법이다. 이번 소문 또한 그랬다. 정확히는, 그 위에 한 가지 의문이 더해졌다.
“폐하께서…… 그걸 모르셨을까?”
황궁의 아래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궁에서 일정 기간 일해본 사람이라면 황제가 궁의 관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의문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게 황궁을 끔찍하게 아끼던 황제 폐하게 과연 그것을 몰랐을까, 라는.
거기에 황제가 평소 별관으로 가는 일이 잦았다는 출처 모를 목격담이 더해졌다. 그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자들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 또한 생겨났다.
‘황제가 구원교와 손을 잡고 이 일을 꾸민 게 아닐까?’
앞뒤 관계가 명백하지 않은 결론이었으나 본래 소문에 논리는 필요 없었다.
한없이 자극적인 소문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그 크기를 부풀려갔다. 수도의 거리에도 이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황궁은 그 정도가 심각했다.
“그러게, 내가 봤다니까!”
단순히 유언비어에서 그친 거리와는 다르게, 궁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으며 사실적이었다. 귀족 중 하나가 피데스 후작을 찾아갔다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불에 타다 만 연구지들을 보았다고 증언한 탓이었다.
혹자는 소문을 믿었으며, 혹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치를 떨었다. 방식도, 결론도 제각각이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신분의 고저, 그리고 개개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의심의 씨앗을 골고루 뿌려놓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씨앗을 뿌려놓으면 언젠가는 싹을 틔우기 마련이니.
***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괜찮을 거다. 네 눈으로 본 걸 믿도록.”
루시엘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테일러를 향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또한 마음이 복잡한 건 사실이었다. 점 찍어두었던 때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곧, 정말로…… 그토록 바라마지 않고 있었던 끝이 찾아오는 것이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루시엘은 심복이 전해 온 소식을 듣고 급히 궁을 나섰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시점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기다란 복도를 물들인 핏자국, 잘려서 굴러다니는 목들, 발끝으로 흐른 핏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이게, 왜…….”
왜 이렇게 됐지?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깨를 덥석 잡는 손길만 아니었더라면 한동안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을 테다.
“정신 차리십쇼.”
한동안 얼굴을 잘 보지 못했던 렉시아가 그곳에 있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니 들쑥날쑥했던 감정이 따라서 갈무리되는 것만 같았다.
“렉시아.”
“괴한들이 궁을 습격했습니다. 귀족 중 몇몇은 이미 죽었어요. 누군 죽이고, 누군 죽이지 않는 것을 보면 목표로 정해둔 이들이 이미 있던 모양인데…… 하여튼. 당신은 이야기됐던 것처럼 알현실로 가세요.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아직 저기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다른 기사 놈들도 도움은 될 겁니다.”
“…그러도록 하지. 뒤를 맡기마. 그리고, 이벨린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잘 지켰을 테니까. 손끝 하나 안 다치게 해드리죠.”
“……그래. 고맙다.”
렉시아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평소라면 표정을 굳히거나 외면했을 루시엘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므로. 온전히 시선을 마주하고 말을 내뱉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루시엘은 렉시아의 말대로 곧장 자신과 결탁한 기사단을 데리고 알현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제 아버지가 굳건히 버티고 있는 그곳으로.
마주친 괴한을 죽이고, 귀족 몇을 보호해 넘겼다. 그럴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의미 모를 감정이 자꾸만 크기를 키웠다. 그것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에야 루시엘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난 그 사람에게 실망했구나.
마침내 알현실 앞에 다다랐을 때도 그랬다.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한 곳에 홀로 남아 자신을 반기는 황제를 마주할 때 또한 그랬다.
기이한 태도였다. 어쩌면 황제가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황좌에 앉아있는 제 아비를 말없이 응시하던 루시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무엇을?”
황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느슨히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지금의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는 듯했다.
“귀족의 머리를 베어오라 시킨 것? 구원교와 손을 잡은 것? 간부의 피를 써 괴물을 만들어낸 것? 신의 피조물을 빼돌린 것? 신에게 꼬리가 밟힌 충신에게 누명을 씌워 가차 없이 죽인 것? 그것도 아니면…… 마신을 깨우고자 한 것을 말하는 건가.”
자신의 죄를 죽 읊는 목소리에는 한 줌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었다.
제2기사단장을 비롯하여 루시엘을 따르기로 한 이들은 하나같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알고 있던 루시엘과 다르게 그들은 하나같이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이야기였으므로.
와중에 루시엘은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눈앞의 황제를 살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도 조금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 태연한 낯이 계속해서 두 눈에 담겼다.
“제가 말한 건 그게 아닙니다.”
황제가 나열한 것 또한 이유를 알고 싶기는 했으나, 자신이 물은 건 그게 아니었다. 미간을 좁힌 루시엘이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왜 이런 허무한 끝을 맞으시는 겁니까.”
그래. 루시엘은 그게 궁금했다.
황제가 벌인 악행은 셀 수 없이 많다. 상상치도 못했던 제 아비의 뒷면을 깨닫고 한참을 혼란스러워했을 정도로.
그러나 지금의 황제는 괴한들을 움직여 일부 귀족을 공격한 것 외에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알현실을 지키는 이 하나 두지 않았고, 기사단의 진군을 막지도 않았다. 물밑에 벌어지는 일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루시엘은 그런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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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했던 게 실패한 걸 알았을 뿐이란다.”
답은 생각보다 더 간결했다. 황제가 품에서 반토막 난 검을 꺼내 들지만 않았더라면, 루시엘은 그 성의 없는 답에 못마땅함을 느꼈을 것이다.
색이 바래 깨진 검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익숙한 모양새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머지않아 그것이 일전에 보았던 ‘신의 안배’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게 망가진 걸 보았을 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직감했지. 그래서 네게 황위를 넘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부모를 죽이고 피 묻은 황좌에 앉은 황제로 기록되는 것보단, 미친 황제로부터 제국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더 아름답지 않겠느냐.”
“…아버지.”
“언젠간 너도 내게 감사함을 느낄 거란다. 내가 죽이라고 지시한 놈들은 하나같이 네 앞길에 방해될 쓸모없는 놈들뿐이니까.”
말문이 막혔다. 루시엘의 곁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시엘의 기분은 조금 더 복잡했다. 황제가 늘어놓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목소리에 원망이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아서. 그게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루시엘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일렁이는 감정을 닮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어째서, 그렇게 태연하십니까.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당신의 적입니다. 곧 내가 당신의 목을 베어버릴 거란 말입니다.”
항상 멀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였다. 그를 볼 때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내가 언젠가 그 자리에 서서, 당신과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당시에는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답을 내리고는 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평생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멀게 느껴졌던 사람의 더 멀어졌다. 루시엘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내 염원은 남아있을 테니까. 언젠가는 너도 내 생각을 이해하게 될 거란다.”
“…….”
“너 또한 내가 꿈꾸는 제국을 꿈꾸게 될 것이야. 내가 한 짓이 잘못된 행동이란 걸 알고, 끝내 그런 날 죽이게 될 너지만…… 결국 넌 내 아들이다. 나와 같은 피가 흐른단 말이다.”
“…….”
“아들아. 넌 나를 아주, 많이… 닮았단다.”
루시엘이 입을 다물었다. 녹빛 눈동자가 침잠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핏줄을 타고 염원이 흘러가면 이 또한 괜찮은 방법이 아니더냐.”
그 순간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던 루시엘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뇨. 난 당신과 다릅니다.”
동시에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뜻이 명확한 신호에 주춤하던 기사들이 곧장 황제에게 다가가 그를 제압했다. 순식간에 황좌에서 끌어내려져 무릎을 꿇게 된 미하일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사이에, 루시엘은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처음부터 절 죽일 마음이 없으셨던 거 압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내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걸 알고 있으니까.”
루시엘은 황제가, 미하일 렌제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리더라도 절 모는 사람의 목을 물어뜯고 함께 떨어질 사람. 그게 제 아버지였다.
그러나 황제는 조금의 반격도 하지 않고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이 그의 가족이기 때문에. 그는 늘 ‘가족’이라는 틀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으니까.
혈육. 그 빌어먹을 관계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었다. 자신의 염원은 피를 타고 이어져갈 거라는 말을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었다.
그 순간, 어슴푸레하기만 했던 생각이 뚜렷해졌다. 루시엘은 그 의지를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입에 담았다.
“난 당신과 다르게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을 거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
“또한… 황좌에 욕심이 있는 사람 또한 아니지요.”
“…뭐라고?”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내 피를 후대에 전해주는 것으로 후환을 남기게 된다면…… 황제가 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다음 대 황제는 이벨린이 될 겁니다.”
“아니. 아니다. 그 아이는 황제가 될 자질이……!”
“그만.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제 당신이 간섭할 자격은 없습니다.”
미하일의 목을 겨눈 검이 움직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루시엘이 덤덤히 덧붙였다.
“내게 더 이상 아버지는 없으니까.”
검이 휘둘러졌다.
***
황제가 죽었다.
이 소식은 제국에 커다란 혼란을 몰고 왔다. 이벨린은 그간 황제가 벌인 악행을 알리고, 피해를 입은 유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이번 일로 많은 귀족이 죽었지만 일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목이 잘린 이들이 하나같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무거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난 탓이었다.
죄를 저지른 귀족, 그들을 죽인 괴한, 그리고…… 모든 일을 사주한 황제까지. 그들의 시신이 황궁 앞의 광장에 나란히 걸렸다.
누군가는 죄인이 죽었다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제 두 눈을 의심했으며, 누군가는 화를 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오래전 실종된 가족의 죽음을 뒤늦게서야 알게 된 이들의 슬픔이었다.
그러나 이 혼란 또한 언젠가는 가라앉을 것이다. 이벨린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란이 끊이질 않는 광장 부근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정말 떠나게?”
“그래.”
이벨린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황태자, 아니. 이제는 황태자 직위를 내려놓은 루시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 치의 동요도 없는 것이 담백한 진심인 듯했다.
이내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오라버니도 알잖아. 그거 다 헛소리야.”
“알지. 하지만 조금은…….”
“조금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안개에 휩싸인 듯 묘한 표정을 하던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이 목 안쪽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죽기 전 남긴 말들이 대부분 헛소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맞는 말은 있었다.
‘넌 날 닮았다, 였나.’
루시엘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라고 부인하며 그의 목을 베긴 했지만, 그는 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몇 번이고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 내려졌다. 정말로 아버지의 말대로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자꾸만 가슴 깊은 곳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이것이었다. 황태자의 직위를 내려놓고 황궁을 떠나는 것. 이벨린은 상당히 못마땅한 듯했지만, 그는 제 뜻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루시엘의 고집에 항복을 선언했다. 배웅해야 할 날짜를 전해 듣고 난 뒤에는 한참을 불만스러운 기색을 풍겨댔다. 그러는 와중에도 툭 튀어나온 의문은 숨기지 않는 것이 그녀다웠다.
“오라버니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신전을 미워했는지 알아?”
“글쎄…….”
루시엘이 천천히 과거를 되짚었다. 어렴풋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릴 적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가족을 잃었다고.”
“……가족을?”
“그래. 하지만 네가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다. 내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지만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걸 보면,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친 비극일 테니까.”
그럼 이벨린, 난 이만 가보마.
루시엘이 손을 들어 이벨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하지 않은 행동이어서인지 손길이 퍽 어색했다. 놀란 이벨린이 눈을 크게 뜨고 끔뻑이자 그의 손이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스르르 피하는 시선이 마치 지금의 상황을 민망해하는 듯했다.
결국 루시엘은 도망치듯 이벨린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방금 누가 왔다 갔습니까?”
“아, 오웬 신관.”
민망함을 숨기지 못한 건 이벨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멍을 때리다 또 다른 사람의 등장에 간신히 정신을 갈무리할 수 있었던 그녀가 빠르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오웬은 그 번잡스러운 광경을 기묘한 눈을 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신전에 다녀오려 합니다.”
“한동안 궁에 남아있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루아침에 황제가 숙청되고 그간 가려왔던 진실이 드러난 만큼 황궁의 분위기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음 대의 황권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바로잡아 주어야 했는데, 이때 손을 거들어 주겠다고 한 것이 피데스 후작이었다.
다만 손이 부족한 건 여전했다. 오웬은 제 아버지의 부탁 아닌 부탁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손을 거들기로 약속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전에 가겠다니.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이벨린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큰일이 생긴 모양이더군요. 상태만 확인하고 곧바로 돌아오려 합니다.”
“큰일이요?”
“예. 정확히는 아르펠에게.”
오웬이 평소답지 않게 말을 늘여가며 답하자 그녀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아르펠을 언급하는 순간에는 더더욱.
한참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벨린에게 아르펠은 고마운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쪽이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런 그에게 큰일이라니. 오웬이 직접 ‘큰일’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일의 경중을 따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침 국경에서의 승전보를 들은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기분이 더욱 침잠했다.
그런 이벨린의 상태를 본 오웬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얼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이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이벨린은 걱정하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아지는 기분과 반대로 의문은 더더욱 선명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큰일이라는 게 대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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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큰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정확히는, 딱 일주일 전으로.
로한이 소원을 비는 것과 동시에 ‘신의 안배’가 깨졌다. 당시의 그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황궁에 있던 또 다른 신의 안배 또한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의 안배를 더 소모해서라도 깨진 마검의 시간을 되감는 것. 그게 이 세계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직후 ‘마검’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깨진 흔적조차 남지 않고, 말끔하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주워들었던 로한은 한 가지 이변을 느꼈다.
아르펠에게서 느껴지던 망령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평소 그것을 숨겨주었던 성물이 바닥에 뚝 떨어져 있음에도 그랬다. 다만 어째서, 라는 의문을 가질 새는 없었다.
“…아르펠?”
답이 없었다. 또다시 시작되는 것만 같은 악몽에 로한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강한 불안이 그를 휩쓸었다.
아. 아아. 그가 넋을 놓고 탄식했다. 내가 잘못해서.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서 아르펠을 잃었나?
끝없이 이어져가던 자책을 막은 것은 머릿속에 찾아든 마신의 울림이었다.
<신전…… 신전에….>
말이 뚝뚝 끊긴 탓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신전’이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명확히 들렸다. 그 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한은 아르펠을 든 채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붙잡는 손길도 단호하게 뿌리치고서.
신전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엉망이었다. 그리 짧지 않은 거리였으니 당연했다. 급히 그를 맞이한 디오넬은 로한을 위해 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도실을 내어주어야만 했다.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온 사람처럼 행동하던 로한은 그제야 눈에 빛을 되찾았다. 그가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신실한 사제가 경건한 기도를 올리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아르펠…….”
돌아와 줘요. 부탁할게요. 제발. 죽지 말아줘. 보고 싶어.
이름과 더불어 툭툭 끊긴, 진한 감정이 담긴 말들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로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르펠이 다시 제게 돌아와 주기를 바라면서.
몇 분을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몇 시간이었나? 아니면 며칠? 한참을 자세를 바꾸지 않은 탓에 몸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한은 굳건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릎에 무게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 생경한 감각을 느끼며 그는 탄식했고, 울컥했으며, 또 환희했다. 꾹 닫혀있던 눈꺼풀이 떨리며 황금을 갈아 솔솔 뿌려놓은 듯 찬란히 반짝이는 눈동자를 드러냈다.
“로한.”
눈앞에 보이는 아르펠이 손을 뻗었다. 미미하게 눈을 휘어 미소지어 보이는 낯이 더없이 익숙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리던, 그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말했잖아. 널 믿었다고.”
날 살려줘서 고마워.
감동을 자아내는 말이었고, 또 재회였다. 다시 아르펠이 돌아온다면 해주고팠던 수많은 말들이 속에서 들끓는다. 그러나 로한은 그중 한마디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지나치게 벅차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고들 하던가. 그 이유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곧장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제 무릎에 걸터앉아있는 아르펠이 상당히 낯선 모습을 하고 있던 탓이 컸다. 흔들리는 눈망울이 무엇을 먼저 입에 담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로한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손…….”
뒤늦게 내뱉은 말이 고작 ‘손’이었다. 그러나 아르펠은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챈 듯했다.
무심코 시선을 내린 아르펠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그맣다. 작달막하다. 조막만 하다. 그러한 표현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 보송보송 솜털이 올라 있는 고운 아이의 손이었다.
“어……?”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입밖으로 멍청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급히 손으로 몸을 더듬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볼도, 몸도 평소보다 작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이런, 이런 말은 없었는데.”
아르펠이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빠르게 남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당시에는 개의치 않고 넘겼던 마신의 말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네 영혼과 결합해 있던 것을 불쑥 뽑아낸 것과 다름없으니 한동안은 조금, 음…… 곤란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이게 그 ‘곤란한 상황’인가? 아르펠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려니 넘긴 것이 상상치도 못한, 상상하고 싶지도 않던 결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로한은 강한 내적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아르펠을 보니 그것이 점점 더 세를 부풀려갔다. 조용히 손을 들어 마른세수하기를 반복했다.
버텨줘서, 돌아와 줘서, 날 믿어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하자고, 사랑한다고…… 그런 말도 해줘야 하는데. 외면하지 못하는 충동 하나가 자꾸만 치솟기를 반복했다.
“로한? 왜 그래?”
그 내적 갈등은 얼마 가지 않아 깔끔하게 끝이 났다. 이상해 보이는 로한의 상태가 걱정됐는지, 어쩔 줄을 모르다가도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아르펠 때문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로한이 덥석 아르펠의 몸을 끌어안았다. 동글동글하고 커다란 눈이 놀란 것을 숨기지 못하고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몸을 끌어안고 앓듯이 속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귀여워…….”
우뚝 굳은 몸을 끌어안고 온갖 주접을 다 떨었다. 아이의 볼이 봉숭아빛으로 물들었음에도 멈추지 못했다.
로한이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늘어놓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르펠은 보답하듯 정신을 잃고 있을 때 마신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몸이 금방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덤이었다. 로한은 조금, 아주 조금 아쉬워했다.
그들을 둘러싼 소용돌이는 멎지 않은 채였다. 황제가 사라져야만, 그를 죽여야만 모든 싸움이 끝이 난다. 둘 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한은 이 순간 숨김없이 기뻐했고, 아르펠은 그런 로한의 반응을 만족스러워했다. 둘에게는 조금 이른 해피엔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로한. 있잖아.”
황궁의 상태를 살펴봐야 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존재감을 피력했으나 아르펠은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됐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죽었다 살아나서일까. 마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힘들어하는 로한의 모습을 지켜봐서일까. 자꾸만 가슴 속에 무언가가 울컥울컥 차오르고, 의미 모를 충동이 그 위에 불을 지폈다.
“응, 아르펠. 말해도 돼요.”
아르펠이 단번에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와중에도 로한은 한결같았다. 말랑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찌르고 조물딱거리기를 반복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뒤늦게 휩쓸린 바람에 마음을 털어놓는 내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으면서. 그 탓에 눈도 볼도 모조리 발긋하게 물들어버린 주제에, 말랑거리는 볼살에 눈독을 들이는 건 여전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우스운 꼴이라 평할 수 있겠으나, 아르펠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홀린 것처럼 로한의 얼굴을 눈에 담기만 했다. 귀엽다. 저도 모르는 새에 그런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쩌면 그것이 용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멍하니 로한을 바라보던 아르펠이 마침내 짤막한 말을 덧붙였다.
“좋아해.”
“……!”
“사랑해.”
언젠가 로한에게 들었던 말들이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무슨 답을 건네주었더라. 흐릿하지만 하나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사랑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한 로한의 말이.
지금이라면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닌, 애정이 아닌 다른 것일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주한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르펠은 그런 로한의 반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더없이 행복해하고, 또 전율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한번 확신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이건 그를 향한 사랑이 분명하다는.
“아,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치사해서요.”
그러나 로한은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흘러들어오는 감정이 선명한 아쉬움임을 깨달은 아르펠이 멈칫했다. 잘못 말했나? 조금 더 로맨틱한 상황에서 말했어야 했나. 하나둘씩 고민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 로한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모습으로 말하면 어떡해요. 뽀뽀도 못 하고, 키스도 못 하고…….”
“왜? 해도 되는데.”
“내가 안 돼요.”
평소답지 않은 정색까지 곁들인 완강한 반응이었다. 아르펠이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미련이 한 움큼 느껴져 괜히 한 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로한이 기뻐하는 것 같아 좋았는데, 이제는 몸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최대한 빨리.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로한님! 괜찮으시…… 로한님?”
기도실의 문을 열어젖힌 이는 다름 아닌 디오넬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걱정이라도 된 걸까. 그의 낯에도 목소리만큼이나 다급한 기색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초췌한 낯으로도 활짝 웃음꽃을 피운 로한과 그의 품에 고이 안겨있는 아이 하나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것도, 누군가를 아주 많이 닮아있는.
“……아르펠님?”
한참이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디오넬이 마침내 결론을 내었다. 흔들리는 음성이 퍽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의 빤한 시선을 받던 아르펠이 흘끗 로한을 돌아보았다. 내내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것인지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이 곧장 시야에 담겼다. 아르펠은 디오넬에게 답을 주는 대신 로한의 눈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택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게 아쉽지만, 미련도 남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예쁘게 다듬어져 마침내 어울리는 이름을 찾아낸 감정이 오색빛깔로 빛나는 것만 같았다.
몸이 돌아오면 다시 로한에게 말해줘야지.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너와 함께해서 행복하다고. 머지않은 미래를 그린 아르펠이 눈을 마주하고 있는 이를 따라 하듯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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