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웠고, 시야는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형광등 불빛인지 햇빛인지 알 수 없는 빛줄기가 정면으로 퍼졌다. 金旼炡은 뭔가를 확인하듯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촬영장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공간이 뒤바뀌니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예년보다 일찍 장마가 끝나면서 때 이른 폭염이 시작됐다. 연일 무더위가 지속되는 여름에는 보통 해 뜨기 전부터 배우들을 소집하고 새벽 특유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사라지자마자 카메라를 돌리지만, 오늘은 정오까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촬영이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누군가는 제작사 사무실에 전화를 돌려 스케줄 재조정을 논의했고, 또 누군가는 대기 중인 배우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러 분주히 오갔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영 좋지 않기는 했다. 요즘 金旼炡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가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끼니는 거르지 않았지만 걸핏하면 체해서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그래도 혜인이 보여주는 유튜브 쇼츠를 보며 웃었고, 한겸과 머리를 맞대고 스도쿠를 풀었다. 확실히 연기는 잘 하고 볼 일이었다.
회차를 늘려달라는 방송국의 요구로 인해 추가촬영 대본이 엊그제 나왔다. 방금 인쇄를 마쳐 뜨끈뜨끈한 원고를 전해 받은 FD는 부랴부랴 일정을 정리해서 매니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해당 회차의 배우들은 밤을 새워 대사를 외우고 바로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전제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막바지까지 모든 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결국 일이 터진 거였다. 기억나는 건 저기 멀리서 무전기를 들고 뭔가를 말하고 있는 탁 감독 뿐이었다. 그다음은 없다. 디렉을 기다리다가 의식을 잃은 건지, 연기를 이어가던 중에 몸이 휘청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컷 사인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다가, 순간적으로 시야가 뒤집히고 중심이 무너졌던 것 같다. 주변이 조금씩 또렷해지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대기실은 아니었다. 집도 물론 아니었고. 고개를 돌리던 金旼炡은 침대 옆에 있는 모니터를 발견했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병원에 실려 오게 될 거라고는 정말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촬영은 어떻게 됐을까. 줄줄이 밀릴 텐데. 혜인 언니도 놀랐겠지. 代表님한테 불려갔다는 얘기 들리면 이번에는 진짜 가만히 안 있어. 그 분도 양심이 있으면 이번에는 입 다물고 있어야지. 물론 그런 게 남아 있을 리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렸다. 하얀 가운 차림의 남자는 문간에 멈춰 서서 金旼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金旼炡은 그런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와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적당한 높이로 침대가 조정됐다.
"조교수 미만은 얼씬도 못하는 VIP 병실을 덕분에 와보네요. 정말 너무 안 감사드려요."
태연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속상함과 안도감이 적당히 뒤섞여 있었다. 남자는 구석에 있던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가운 주머니에서 펜을 빼 들며 의자에 앉은 남자가 얼굴에 라이트를 비추며 金旼炡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매는 제법 의사다워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지난주에 나온 화보보다 살이 더 빠졌어."
"드라마 촬영 중에는 원래 이랬거든요."
金旼炡이 대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손으로 만져봤다. 잡히는 거 하나 없이 밋밋해진 볼이 손끝으로도 느껴졌다. 요 며칠 사이에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몇 달 전부터 그랬던 것인지는 金旼炡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원래 이런 거랑 빈혈로 쓰러진 거는 많이 다르죠."
목소리에는 타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술도 일직선으로 굳어졌고, 그새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몸 상태가 어떤지는 저 쪽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요즘은 스케줄이 많아서 그런 거고, 이번 드라마 끝나면 몇 달은 쉴 수 있을 거라고. 남자는 일 좀 줄이라고 잔소리하며 작게 하품했다. 입을 가리는 손 너머로 눈가의 짙은 다크서클이 보였다. 손을 내리자 피로에 지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제도 당직이었어?"
"응, 오늘까지 당당."
"나한테 일 줄이라고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저야 한낱 대학병원 전공의 나부랭이지만, 金旼炡xi는 백상에서 인기상 받은 배우님이시잖아요."
"소파에서 눈 좀 붙이고 가든지."
"안 돼, 지금도 직원들 몰래 나온 거야."
남자는 눈을 한참 비비더니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문지르고, 왼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고, 주먹을 말아쥐어 목뒤를 두드렸다. 얼굴에는 피곤이 그늘처럼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제대로 밥은 먹고 다니나. 스트레칭을 마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요 선생님. 넌 환자고, 저는 의사예요."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金旼炡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넌지시 물어봤다.
"퇴원은 언제인데?"
"내일 검사 결과 나오는 거 보고."
"꼬박 하루 안 걸리는 거 다 알아."
金旼炡이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테이프로 고정된 바늘에서부터 링거 라인을 따라가듯 고개를 들었다. 수액이 떨어지는 속도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알면 이참에 좀 쉬다 가세요."
"그러기에는 제가 백상에서 인기상을 받은 배우라서요."
남자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검사 결과가 아주 나쁘게 나온 건 아닌 듯하다. 金旼炡은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어 연락을 확인했다. 화면이 켜지자 알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카톡, 문자, 부재중 전화. 그새 숫자들은 세 자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나 입원했다고 기사 떴어?"
"좀 됐을걸."
"代表님은 이런 거 안 막고 뭐 하는 거야."
"그 소속사랑 계약 올해까지였나? 끝나면 다른 곳 갈 거지?"
"비밀이야."
"그 분은 진짜 관상이 안 좋다니까."
"요즘 그렇게 사람을 얼굴로 평가하면 큰일 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해."
金旼炡도 푸스스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병실에는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EKG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있는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문을 열고 안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내서 뚜껑을 돌려 열었다.
"의사야, 도둑이야."
남자는 들은 척도 않고 한 병을 말끔히 비웠다. 다 마신 뒤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 쿠션을 끌어안았다.
"더워서 입맛 없다고 샐러드 같은 걸로 대충 때우지 말고 식단 제대로 해. 헤모글로빈이 부족하니까 산소 공급이 제대로 안 된 거야. 그래서 어지럼증 느끼는 거고. 다행히 그거 말고는 이상소견 없다고는 하던데…아무튼 철분제 처방 나갈 거니까 꼬박꼬박 챙겨 먹어. 밥도 잘 드시고요 좀. 이런 식으로 여妹妹 얼굴 보는 건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거든요. 매니저님 연락 받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金旼炡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컨디션 관리도 결국 본인 실력이었다. 지금은 건강보다도 주변을 번거롭게 했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드라마를 같이 찍는 배우들부터 현장 스태프, 매니저, 소속사 직원들까지. 저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스케줄이 꼬이고, 촬영이 밀리고, 누군가는 그 일정을 맞추느라 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 손등에 붙은 테이프를 만지작거리던 金旼炡이 쓰린 한숨을 삼켜냈다.
"알겠다니까요. 언젠가는 슬기로워질 김민준 선생님."
"민동."
"왜요?"
"바빠서 그런 거지"
문장 끝에 붙은 게 마침표인지 물음표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단정하는 건지 확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톤이었다. 金旼炡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새하얀 병원 이불의 촉감이 손끝에서 바스락거렸다. 소파에 누워 있던 남자는 이마에 있던 팔을 내리고 몸을 일으켜 金旼炡을 바라봤다. 눈동자에는 걱정과 의구심이 뒤섞여 있었다. 金旼炡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을 꾸며냈다. 이런 연기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방은 배우도, 감독도 아닌 일반인이었다.
"응, 그것 말고 별일 없어."
부디 그러길 바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를 올리기 위해 힘을 주었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자연스러울지는, 연기하는 본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민준이 나간 뒤 한참이 지나서야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부모님과 통화를 마치고 밀린 연락을 확인하던 金旼炡은 어렴풋한 인기척을 느끼고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인이었다.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녀가 말없이 金旼炡을 바라봤다. 이내 金旼炡도 핸드폰을 뒤집어두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미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서로 꺼내야 할 말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혜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미안…많이 놀랐지 언니."
"…응. 진짜 많이."
짧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병실 문을 열기까지 혜인이 얼마나 망설였을지, 또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버텼을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金旼炡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꼭 잡았다. 괜찮다고,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어떤 단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막연한 위로는 침묵보다 더 무책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일단 다른 배우들 씬 먼저 찍기로 했어."
"스케줄 또 꼬이겠네."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해도 돼."
"아니 그래도…다들 바쁠 텐데 괜히,"
"旼炡아."
金旼炡은 그제야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다정한 한마디가 유난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미안함, 걱정, 다그침, 그리고 차마 하지 못한 말들까지 겹겹이 얹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넘긴 순간들 중에,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적이 하나도 없었다는 걸 이제는 서서히 인정해야 됐다.
입 안에서 몇 번을 맴돈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말도,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도 지금은 전부 핑계처럼 들릴 것 같았다. 손가락을 괜히 맞잡았다 풀기를 반복하며 金旼炡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혜인은 여전히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金旼炡은 괜히 다리를 모으고 다시 손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혜인의 아랫입술은 갈라져 있고 눈가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민준씨 다녀갔어? 검사 결과는 나왔고?"
"빈혈기 약간 있대. 헤모글로빈이 적어서 산소가 원활하게…아무튼 큰 이상은 없다고 했어."
"金旼炡 진짜……밉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짙은 애정이 넘실거렸다. 슬리퍼 물어 뜯다 걸려서 혼나는 강아지처럼 눈치를 살피던 金旼炡도 그제야 작게 웃었다. 조만간 나도 네 옆에 같이 누워 있겠어. 홍혜인이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金旼炡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으로 이불을 매만졌다.
"회사에서는…뭐래?"
"뭐라고 할 게 뭐가 있겠어. 당분간 스케줄 안 잡을 테니까 회복에 전념을 다하라는…아무래도 박 室长 조인트라도 까고 왔어야 했지?"
하루 종일 바짝 긴장해 있던 몸에서 그제야 힘이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촬영장에서 일이 터지고 정신없이 보낸 건 반나절 남짓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꼬박 일주일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혜인이 어깨를 주무르며 목을 한 바퀴 돌리고 다시 旼炡을 쳐다봤다. 병원복이 헐렁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더 말라 보였다. 본인 아픈 건 나중 일이고, 주변에 폐를 끼쳤다는 것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속상해할 金旼炡이었기에 홍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말은 없었어요? 代表님이라든가 이사님이라든가 한 마디씩 보탰을 거 아냐."
"오 代表는 사무실에 없었고, 최 이사는 뭐…지금 빨리 병문안 가자면서 설치다가 평소에 좀 잘하시라고 쿠사리 먹었지."
"누구한테?"
"나한테."
그 말에 金旼炡이 슬며시 웃었다. 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넘겼지만, 사실 그녀 역시 한 소리 제대로 들었던 건 맞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배우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는 이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현장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매니저에게 그 화살이 돌아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혜인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기에 딱히 억울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미안. 요즘 많이 힘들었지. "
"정말 괜찮다니까요."
"거짓말."
"안 거짓말."
"金旼炡, 언니 바보 아니거든."
金旼炡은 입술을 한 번 꼭 다물었다가 이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평소 같으면 농담으로라도 얼버무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혜인이 조금 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金旼炡을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병실이라는 공간에서는 도망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일 때문에 힘든 거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
"드라마 촬영 중에는 다른 스케줄 잡지 말라고, 차기작까지 휴가 길게 달라고 회사에 얘기할 수 있다고 旼炡아."
"……"
"참는다고 능사가 아니야. 이것 봐. 결국 쓰러지기까지 했잖아."
링거 바늘 주변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 그런 요구를 하면 결국 혜인이 곤란해질 게 뻔했고, 자신 때문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밤낮없이 이어진 드라마 촬영으로 피로가 쌓인 것도 사실이었으나, 일상을 버겁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고. 대답하지 못하고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리는 金旼炡을 지켜보던 홍혜인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매니저는 뒀다 뭐할 거냐고요 배우님."
"진짜 조금 어지러웠던 거라니까…"
"그래쪄요 우리 겨울이?"
분위기를 바꿔보겠다고 혀 짧은 소리를 낸 건데 다소 질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혜인을 흘겨보며 고개를 저은 金旼炡은 웃음을 꾹 참으려는 듯 입매가 어설프게 올라가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서로의 긴장을 푸는 게 두 사람에게는 가장 익숙한 위로였다. 홍혜인은 金旼炡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퇴원할 때까지는 드라마고 회사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제발 너만 생각하면서 푹 쉬어. 나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언니도 바로 퇴근해서 집으로 가. 알겠지?"
"몰라요. 오늘까지는 미워 너."
"아 빨리 약속하고 가."
"알겠어.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해."
새끼 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꾹 누른 뒤에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이는 金旼炡이었다. 홍혜인은 뒤따라 웃어 보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겸이가 안부 대신 전해달래. 金旼炡은 같이 오지 그랬냐며 대꾸하고서 이불을 살짝 걷어냈지만, 이내 홍혜인에게 저지 당하고 정자세로 침대에 앉았다. 팔다리는 안 다쳤어요 매니저님. 배웅은 충분히 할 수 있다구요. 그 의견 역시 가볍게 묵살 당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극성이라서요. 홍혜인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들었다. 병실 문 앞까지 걸어가다 말고 한 번 더 돌아본 그녀는, 괜히 한 마디 덧붙이듯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기만 해. 알았지? 이번만큼은 지켜질 약속이길 바라며,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병실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저녁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고, 벽걸이 TV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느릿하게 화면을 전환하고 있었다. 金旼炡은 한 손에 리모컨을 쥔 채 베개에 기대고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동음이 울린 건 그때였다. 베개 옆에 놓아둔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며 이름 하나를 띄웠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망설임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기사 때문일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받지 않으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旼炡아, 괜찮아?
들려온 목소리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숨소리마다 묘한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헤어진 지 꽤 된 상대와 통화를 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어떤 톤으로 말해야 할지 정태준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높았고, 말끝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마 기사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을 텐데, 막상 연결되고 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金旼炡은 그런 정태준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도 비슷한 기분이었으니까.
- 많이 아픈 거야? 병원에서는 뭐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지금은 좀 어때?
대답을 미루자 상대방은 다급하게 질문을 쏟아냈다. 짧은 시간 안에 줄줄이 쏟아낸 말이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이 아직도 미묘하게 아팠다. 정태준의 잇단 질문들이 진심 어린 걱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 남자친구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묘하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고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金旼炡은 기운이 빠진 듯 숨을 들이쉬고는 병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응. 그냥… 빈혈기 있었는데, 더위까지 겹쳐서 그랬던 거야.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잠깐이었고, 검사상 큰 이상은 없대. 내일쯤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
- 진짜야? 다행이다. 나는 무슨 큰일 난 줄 알고…기사 보고 너무 놀랐어.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긴 정적이 스피커 너머로도 미적지근하게 흘렀다. 金旼炡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별달리 할 말도 없으니 이대로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끊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스피커에서 다시 정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혹시 회사랑은 얘기해봤어?
"어떤 얘기?"
- 우리…헤어진 거."
金旼炡은 천장을 바라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한참 잊고 지냈었다. 관계의 마침표를 찍은 그날 이후, 그와 관련된 일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하고 미뤄뒀던 현실과 갑작스레 마주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고른 말은 늘 그렇듯 무난하고 차분한 문장이었다.
"응. 代表님한테는 말씀드렸고, 아마 홍보팀에서 내부적으로 정리하고 있을 거야."
- 드라마 첫 방송 날짜 잡혔다고 들었거든. 제작발표회도 있을 거고, 홍보도 많이 돌아야 할 테니까…기사 타이밍은 조금 늦춰도 되지 않을까 해서. 중반부 지나고 나서나, 아니면 종방 이후로.
대답이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감정이 식어 연인과 헤어진 것과, 그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특히 드라마 방영 중이라면 시청률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제작진과 다른 출연진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 태준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헤어진 일로 괜한 구설에 오르거나 불필요한 시선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먼저 얘기를 꺼냈을 것이었다.
"아마 우리 쪽도 오빠네 회사랑 조율하고 있을 거야."
- 하긴…그렇겠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金旼炡은 핸드폰을 귀에서 조금 떨어뜨려 화면을 확인해봤다. 통화 시간이 의미 없이 길어지고 있을 뿐, 스피커 너머로는 정태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마 그도 뭔가 말하려다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金旼炡은 병원복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이런 상황이 서로에게 편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전화를 끊기에는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스피커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촬영 얼마 안 남았는데 건강 관리 잘 하고.
"…응, 고마워"
- 잘 지내. 드라마 챙겨볼게.
"오빠도 잘 지내."
이내 전화가 끊겼다. 화면이 꺼지며 병실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金旼炡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짧은 한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이상했다. 이미 끝난 정태준과는 이렇게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데, 정작 진심으로 마음을 두었던 사람으로부터는 소식 하나 전해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정리되지만, 어떤 감정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쪽을 무겁게 짓눌렀다.
검사님도 기사를 봤을까. 차라리 모르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金旼炡은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홉 시였다. 그녀는 리모컨을 집어 들어 무심히 채널을 돌렸다. 뉴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들이 차례로 지나갔지만, 어떤 장면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하루가 유독 길었다. 촬영장에서 쓰러진 순간부터, 병원에 실려 온 일, 민준이 다녀간 일, 혜인이 와 준 일, 그리고 방금 전 태준과의 통화까지 하나하나가 또렷했지만 어딘가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金旼炡은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퇴원할 것이다. 이제 다시 카메라 앞에 서고, 사람들을 만나고, 웃어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런데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
홍혜인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가겠다는 그녀를 金旼炡은 유난이 너무 심하다며 한사코 거절하고 겨우겨우 차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뒤로한 채 각자의 공간으로 향했다. 金旼炡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야만 혜인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金旼炡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링거 바늘을 뽑고 남은 자국이 옅은 멍으로 번져 있었다. 그 자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보다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아직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피부는 이미 아물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흔적은 어딘지 모르게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무력했던 며칠이 고스란히 각인된 듯했다. 층수 표시등이 하나씩 올라가는 것을 보며 金旼炡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金旼炡은 천천히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고, 복도를 따라 몇 걸음 걷다 현관문 앞에 놓인 낯선 상자를 발견했다. 최근에 쿠팡이나 컬리에서 무언가를 주문한 기억은 없었다. 누가 집으로 택배를 보낼 만한 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金旼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며칠동안 다소 정신없이 보냈던 만큼 뭔가를 사놓고도 깜빡했을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일단 상자를 확인해보자 싶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상자를 들었다. 먼저 송장을 살펴봤다. 받는 이에는 본인의 이름이, 그리고 보내는 이에는.
이름은 지나치게 익숙했고, 주소 또한 金旼炡은 익히 알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에 조금씩 짐을 정리했었는데,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이 있던 모양이었다. 金旼炡은 쓴 웃음을 지으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숫자는 정확히 입력됐다. 집 안은 적막했다. 조명이 켜진 복도를 지나 거실에 다다른 그녀는 테이블 위에 상자를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그리고 소파 대신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金旼炡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언제 보냈을까. 이틀 전에 집을 나섰을 때만 하더라도 분명히 없었는데. 기사를 보고 생각난 김에 정리한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시기가 겹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추측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번이고 손을 뻗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상자를 끌어당겼다. 테이프를 뜯는 움직임도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을 다루듯 신중하게 상자를 열었다. 날개를 젖혔다.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건 이미 촬영을 끝낸 회차의 대본집이었다. 金旼炡은 익숙한 표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다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손에 익은 감촉, 글씨체, 여기저기에 남은 메모 흔적들. 모두 낯설지 않았다. 함께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맞고, 각자의 하루를 정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파에 누워 대본을 읽고 있으면 刘知珉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말없이 저를 안아주곤 했다. 그 기억들이 마치 페이지마다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金旼炡은 대본을 한 손에 들고 휙휙 넘겼다. 손끝에서 촤르륵,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 한 페이지가 유난히 활짝 펼쳐졌고, 그 사이에 무언가가 끼워져 있었다.
金旼炡은 숨을 가다듬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네 칸으로 나누어진 사진 속에 刘知珉이 있었다.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있는 걸 보면 언젠가의 평일에 찍은 듯했다. 처음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던 刘知珉은 컷이 넘어갈수록 점점 긴장을 풀더니, 마지막 컷에선 살짝 웃고 있었다. 인생네컷은 정말 한 번 해본 말이었다. 刘知珉이 귀찮다며 거절해도 그러려니 하며 넘기고 별달리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런데 왜 이걸 지금에서야 받을 수 있는 걸까.
서프라이즈로 주려다가 본인도 깜빡했을 거면서. 이걸 이 안에 넣어뒀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대로 보내지 않았을 거면서. 떨리는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사진을 바라보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프레임을 따라 쓰다듬었다. 무의식중에 刘知珉의 얼굴을 따라가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눈물이 뚝, 하고 대본 위로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고 애써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물방울 자국이 대본 위로 잇따라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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