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오랜만에 예준의 꿈을 꿨다. 예준을 처음 만난 술자리였다. 이상하리만큼 눈이 마주치던 오래전 그날. 일말의 위화감도 없었다. 뒤엉킨 소음 속에서 노아는 오랫동안 예준을 바라봤다. 대각선에 자리한 예준은 취기 오른 얼굴로 노아를 주시하며 비스듬히 턱을 괬다. 그러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에 입술을 파묻는 모습까지 똑같이 되풀이됐다. 낯선 한노아에게 매료되었다던 그날의 남예준을. 노아는 한참이 지난 시점에 꿈에서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너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구나. 니가 말한 대로 너 정말 그랬구나. 예준은 별안간 얼굴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조용한 모양새로 벌어졌다. 그 말을 알아듣기 전, 비디오테이프가 뚝 끊어지듯 노아는 잠에서 깼다.


해가 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짚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좀 어이가 없었다. 전애인과 처음 만난 날의 꿈을 꾸다니. 예준과 헤어진 지 반년하고도 석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느즈막이 일어난 노아는 시리얼을 말아 먹다가, 침대를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옆으로 고개를 틀자, 열린 방문 안으로 침대 모서리가 보였다. 이 집에서 동거를 시작할 때쯤, 예준이 구매한 킹사이즈 침대였다. 해외 브랜드 상품이니 저렴한 가격은 아닐 것이었다. 영국 왕실에서 쓰던 매트리스 어쩌구 하면서 어지간히 생색도 냈다. 쿠션감이 좋아서 적당히 푹신하고. 소음도 없고. 니 돈 주고 산 것이니 나갈 때 가져가라 했지만, 예준이 사양했다. 솔직히 그냥 준다니까 완전 땡큐였는데 이제 와선 마음이 달라졌다.


지내보니 킹사이즈는 혼자 쓰기엔 좀 과했다. 무엇보다 침대만큼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도 없었다. 이따금 저 침대에서 다른 사람을 안을 때, 노아는 예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상한 저주처럼 유독 예준이 켕겼다. 예준이 산 침대에서 제삼자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기분이란. 정말이지 기묘했다.


역시 버리던가 팔아야겠다. 마음이 서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다각도로 침대를 찍어서 중고마켓에 올렸다. 프레임과 매트리스를 합친 가격치고는 꽤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루 만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대화를 걸자마자 십만 원 흥정을 요구하기에, 노아는 잠시 뺨을 긁다가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냈다. 십만 원 이득 내봤자 뭐하겠나 싶은 생각이었다. 처리가 목적이었으니 당연했다. 대신 빠른 시일 내에 가져가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일정을 조율해 약속을 잡고 대화가 종료됐다. 침대가 팔리고 나면 구매할 침대도 알아봤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슈퍼싱글 사이즈로. 영국 왕실에선 절대 거들떠보지 않을 국내 브랜드였다.


약속한 토요일 오후엔 사람이 찾아왔다. 구매자와 분해 업체 기사였다. 매트리스가 걷히고 프레임이 차근차근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뜻밖에 물건을 기사로부터 건네받았다. 눈에 익은 검은색 반지갑이었다. 올 초엔가 술에 취해 잃어버렸다던 예준의 지갑. 오래전 기념일에 노아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게 벽과 프레임 사이에 꼭 끼어 있었다고 했다. 지갑을 받아서 펼쳐 보니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현금 몇 장과 사용하던 카드 따위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평소 제 것이라면 좀처럼 잃어버리는 법이 없던 예준이었는데 정말 드문 일이었다. 예준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새 지갑을 사고, 쓰던 카드들과 신분증을 모조리 재발급받았다. 그리고 여름이 되기 전, 둘은 헤어졌다.


노아는 주인 잃은 지갑을 쥔 채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그새 분해된 침대는 부지런히 현관 밖으로 옮겨졌다. 침대값을 이체받고 사람들을 보내고 나서야 홀로 식탁에 앉아 지갑을 구석구석 살폈다. 도장이 반 이상 찍힌 집 근처 카페 쿠폰, 일반 2명이 찍힌 심야 영화 영수증 티켓, 같이 갔던 한남동 레스토랑 명함, 시기가 다른 노아의 증명사진 세 장, 오래전 예준의 생일에 뺨을 맞대고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노아는 예준과 함께했던 증거들을 하나씩 헤아렸다. 우리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예준이 지갑을 잃어버리기 전, 같이 집 근처 카페에서 음료를 사 먹고, 나란히 심야 영화를 보고, 한남동에서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던 노아는 모두 제자리에 집어넣고 지갑을 닫았다. 두 손으로 뒷목을 감쌌다가, 고개를 젖히며 마른세수를 했다. 한숨이 크게 터졌다.


지갑 찾았어. 주소 찍어주면 택배로 보내줄게. 하루를 꼬박 고민한 문장이었다. 어렵게 보냈으나 이틀째 답장이 없었다. 나 차단당했구나. 차단은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조금 놀랐다. 차단할 만큼 최악이었나. 여러 생각이 난무하는 가운데 웃기게도 사흘째엔 톡이 읽혀 있었다.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진짜 뭐 하는 놈이지. 이 정도면 그냥 버리라는 뜻이려니. 퇴근길 지하철에서 노아는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화면을 닫았다. 집에 도착해서 냉수부터 받아 마시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보이스톡이었다. 노아는 물컵을 든 채 고민하다 수신 버튼을 눌렀다. 폰을 귀에 대고 어. 하자 예준의 목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려?
钱包找到了。把地址发我,给你快递寄去。这是纠结整整一天才发出的信息。艰难发出后却两天没收到回复。我被拉黑了啊。没想到会被拉黑,有点吃惊。已经糟糕到需要拉黑的地步了吗。各种念头纷乱交织时,可笑的是第三天显示消息已读。依然没有回复。这混蛋到底在搞什么。到这份上就是让我直接扔掉的意思吧。下班地铁上,诺亚苦笑着关闭屏幕。到家正接着凉水喝,手机突然响了。是语音通话。诺亚握着水杯犹豫片刻,按下接听键。把手机贴到耳边"喂"了一声,听筒里传来艺俊的声音:喂?喂?听得到吗?


“어. 잘 들려. 얘기해.”  "嗯,听得很清楚。你说。"

- 다행이다. 나 지금 해외야. 계속 답장 보냈는데 하나도 안 갔네.
-太好了。我现在在国外。一直给你回消息但一条都没发出去。

“해외? 어딘데.”  "国外?哪里。"

- 에콰도르. 남미 투어 중이거든. 숙소에 와이파이 잡히길래 걸었어. 톡으로 하면 중간에 끊길까 봐.
- 厄瓜多尔。我正在南美旅行呢。看到住处有 WiFi 就连上了。怕发消息中途会断。

“갑자기 웬 남미.”  “怎么突然跑去南美了。”

- 남미 가고 싶다고 했었잖아. 기억 안 나?
- 你不是说过想去南美吗。不记得了?

“안 나.”  “不记得。”

- 섭섭하네. 같이 가자고도 했었는데.
- 真让人失落啊。明明说过要一起去的。

“섭섭할 거 없어. 이젠 어제 일도 기억 안 나.”
“没什么好失落的。现在连昨天的事都记不清了。”

- 우리 헤어진 건 기억 나?
- 你还记得我们分手的事吗?


노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농담 같았는데 한 줌의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수화기 너머에서 예준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야 한노아. 끊은 거 아니지. 여보세요.
诺亚没有回答。明明是玩笑话却挤不出一丝笑意。沉默持续太久,听筒那端传来艺俊噗嗤的笑声。呀韩诺亚,你没挂断吧?喂?


“아무튼간에 니 지갑 찾았다고.”  “总之你的钱包找到了。”

- 아. 지갑. 근데 어떻게 찾았어?
- 啊。钱包。不过怎么找到的?

“침대 드니까 나오더라.”  “掀开床垫就出来了。”

- 대박이다. 그걸 들었어?  - 绝了。这你都能想到?

“어. 들어냈어. 팔았어.”  “嗯。听到了。卖掉了。”

- 팔았다고? 아니, 왜?  - 卖掉了?不是,为什么啊?

“별 걸 다 묻네. 남이사. 집을 팔든 침대를 팔든.”
“管得真宽。别人家的事。卖房子还是卖床关你什么事。”

- 와. 말하는 거 봐. 진짜 나빠.
- 哇。听听这说的。真够坏的。

“틀린 말 아니잖아.”  “这话又没说错。”

- 그게 문제야. 맞는 말을 해서 문제라니까. 너는.
“——问题就在这儿。正因为你说得对,所以才成问题。你啊。”


예준의 말끝에 순진한 웃음이 섞였다. 그건 예준이 전부터 자주 하던 말이었다. 너는 매번 맞는 말을 해서 문제야. 가끔은 날 좀 기만해주면 좋겠어. 예준이 그런 투정을 할 때면 노아도 웃고 말았다. 남예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절대적이라 확신하던 때였다. 그럼 노아는 예준을 꽉 끌어안고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난 틀린 말은 안 해. 그래서 아주 결백하게 너를 사랑해.
话音未落,艺俊的笑声里掺着几分天真。这是他常挂在嘴边的话——你总是把话说得太对才成问题,偶尔骗骗我也好啊。每当艺俊这样撒娇时,诺亚也总会笑出声来。那时她坚信不疑,南艺俊爱她这件事绝对真实。于是诺亚就会紧紧抱住他,用清白的口吻说:我可不说假话,所以才能光明正大地爱你。


“지갑 택배로 보내줄게. 어디로 보낼지만 말해줘.”
“钱包我会快递给你。告诉我要寄到哪里就行。”

- 나 한국 들어갈 때까지만 가지고 있어 주면 안 돼?
- 能帮我保管到我回韩国的时候吗?

“그게 언젠데.”  “那是什么时候。”

- 한 달 뒤?  - 一个月后?

“한 달? 회사는 어쩌고.”  “一个月?公司那边怎么办。”

- 관뒀어.  - 关掉吧。

“니 미쳤냐.”  “你疯了吗。”

- 오랜만에 한노아한테 미쳤냐는 소리 들으니까 새롭네.
- 好久没听到有人问我疯没疯,还挺新鲜的。


노아는 예준이 퇴사한 이유를 어림짐작했다. 예준은 커피를 좋아했고, 줄곧 카페를 차리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노아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이제 예준이 어떤 삶을 살든 자신과 무관했다. 예준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그러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아픈 데는 없지? 예준의 음성이 너무 다정해서 노아는 조금 인상을 썼다. 없어. 노아가 단답하자, 예준이 혼잣말처럼 작게 대꾸했다.
诺亚大致猜到了艺俊辞职的原因。因为他喜欢咖啡,一直梦想开家咖啡馆。但诺亚假装不知情。如今艺俊过怎样的生活都与她无关了。艺俊似乎察觉到气氛,尴尬地干笑两声,随后低声问道:没有哪里不舒服吧?那声音温柔得让诺亚微微蹙眉。没有。听到诺亚简短的回应,艺俊像自言自语般轻声答道。


- 다행이다.  - 幸好。


넌 어떤데. 반사작용처럼 되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노아는 서둘러 전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마음이 복잡했다. 온통 예준에 관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노아는 오랫동안 예준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예준이 모든 짐을 정리하고 이 집을 나가던 날, 그가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프지 말고 몸 챙겨. 노아는 그게 남예준 식의 작별 인사라는 걸 알았다. 나 없이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는 인사. 그래 그럴게. 노아의 대답을 끝으로 예준은 집을 떠났다. 자그마치 육 년의 연애가 그렇게 끝이 났다.
你呢。本想条件反射般地反问,又作罢了。现在似乎不是闲聊的时候。诺亚匆忙结束了通话。挂断电话后,心情依然复杂难平。满脑子都是关于艺俊的思绪。诺亚长久地想着艺俊。忽然间,她想起艺俊收拾所有行李离开这栋房子那天,他对她说的那句话。别生病,照顾好自己。诺亚知道那就是南艺俊式的告别。没有我的日子里也要健康平安的告别。嗯,我会的。以诺亚的回答为终点,艺俊离开了家。整整六年的恋情就这样画上了句号。




적도의 연인  赤道恋人




돌이켜 보면 무탈한 연애였다. 스물여섯 겨울부터 서른셋 봄까지. 육 년을 사귀고 이 년 반을 한집에 붙어 지냈다. 크게 싸운 적은 손에 꼽았고, 감정이 상했다 한들 오래가지 않았다. 냉전이 길어봤자 하루 이틀. 심각하게 언성을 높인다거나 한 적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예준과 한노아가 헤어져야만 했던 결정적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연애라는 게 반드시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만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관계는 와해될 수도, 자멸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연료를 모조리 소모한 우주선처럼. 새카만 우주를 무기력하게 부유할 뿐 원점인 지구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이별을 말하느냐는 사실 무의미에 가까웠다. 사랑은 별개의 얘기였다. 핑계 같지만 정말 그랬다.
回首这段恋情,可谓波澜不惊。从二十六岁的隆冬到三十三岁的初春。相恋六年,同居两年半。十指可数的几次争执,即便伤了感情也转瞬即逝。冷战最长不过一两日,从未有过面红耳赤的争吵。细究起来,南艺俊与韩诺亚之间并不存在非分手不可的决定性理由。但爱情这回事,本就不需要确凿的理由才能画上句点。我们终于走到了极限——仅此一点便已足够。关系可以崩塌,也可以自毁。就像燃料耗尽的宇宙飞船,只能在漆黑的太空无力漂浮,再也无法返回原点地球。所以谁先说出分手其实近乎无意义。爱与不爱,原是两回事。这话听着像借口,却千真万确。


우리의 연애가 실패했다고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어졌다 만나길 두 번 정도 반복하고 시작된 동거였다. 사실 뭐든 감당하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노아는 예준이 제 지인들에게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해도, 결혼을 독촉하는 예준의 부모님 목소리가 공교롭게 수화기 너머 제 귀까지 들리게 되어도 괜찮았다. 육 년을 사귀면서 흔한 반지 하나 맞추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남예준이 남자를 사귀어 본 건 한노아가 처음이었으니까. 정상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예준은 한결같은 사람이었고, 한결같은 사랑을 줬다. 노아는 예준의 성정을 미워한 적은 있어도, 예준의 사랑까지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承认我们的恋爱失败花了很长时间。分手后复合两次才开始同居。其实只要愿意承受,什么都能承受。即使诺亚被艺俊向熟人介绍为朋友,即使艺俊父母催婚的声音恰好透过话筒传入耳中,她都觉得没关系。交往六年连对戒都没买过也没关系。甚至觉得这是理所当然的。因为南艺俊是韩诺亚的初恋。毕竟有些人就是难以跳出常规框架。艺俊始终如一,给予的爱也始终如一。诺亚或许讨厌过艺俊的性格,但从未怀疑过他的爱。


파고들면 아주 복잡한 상황인 걸 피차 알고 있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들추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예준은 결코 자기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일 따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를 차리게 되는 일도, 자신의 오랜 연인을 주변에 고백하는 일도, 자신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게 되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노아는 예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준의 모든 부분을 이해한다는 건 아니었다. 이해는 다른 영역이었고, 누군가의 전부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예준을 이해하는 일은 줄곧 어려웠다. 하지만 예준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도 단순했다.
彼此心知肚明,深究起来会非常复杂。既然是无法解决的问题,不如不去触碰。艺俊绝不会做出令父母失望的事。过去如此,将来亦然。所以辞去体面工作开咖啡厅这种事,向周围人坦白自己有个同性恋人的事,条理清晰地解释自己为何不结婚的事,都不会发生。诺亚比谁都了解艺俊。但这并不意味着理解他的全部。理解是另一回事,她认为完全理解一个人是不可能的。理解艺俊向来困难。但爱艺俊却简单至极。


사귀는 동안 예준은 노아의 허락하에 딱 두 번의 소개팅을 나갔다. 모두 예준의 부모님이 주선한 자리였다. 내가 허락해준다니까.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순 없잖아. 노아가 예준을 설득했다.
交往期间,艺俊在诺亚允许下只相过两次亲。都是他父母安排的。既然我允许了。总不能一直逃避吧。诺亚这样说服艺俊。


소개팅을 마치고 돌아오면 예준은 당연한 수순처럼 노아를 안았다. 행위가 다소 급하게 이어져도 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도 않았다. 그런 순간의 예준은 꼭 화가 난 사람처럼 고요했고, 집요했다. 이제 그런 거 허락해주지 마. 예준이 낮게 말했다. 꼭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방금까지 무너뜨릴 것처럼 뱃속을 헤집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버림받은 애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랬다. 노아는 가파른 숨을 고르다가 제 위의 예준을 쳐다봤다. 뱃가죽이 명치까지 축축했는데 예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을 덧대어 왔다. 노아는 제 목덜미를 파고드는 예준의 어깨를 양 팔로 감싸 안았다. 나도 인내심이 깊진 않아.
相亲回来时,艺俊总会理所当然地抱住诺亚。即便动作有些急躁,诺亚也从不作声。什么都不问。这种时刻的艺俊总像生气般沉默而执着。以后别允许这种事了。艺俊低声说。脸上带着受伤的表情。明明刚才还像要捣碎五脏六腑般激烈,转眼又露出被遗弃小狗似的眼神。诺亚平复着急促的呼吸,望向压在上方的艺俊。小腹已经湿到心窝,艺俊却不管不顾地贴上来。诺亚用双臂环住他埋在自己颈窝的肩膀。我的耐心也不够深。


그들은 머지않아 과연 우리의 연애가 서로를 분명히 이해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과정인 건지, 아니면 불편한 상황에 면역이 생겨서 정체된 상태로 무뎌지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시기에 직면했다.
他们很快面临了一个困惑的时期:不确定这段恋情究竟是彼此理解不断深化的过程,还是因为对不适状况产生了免疫力而停滞钝化。






회사에 출근해서 피씨를 켜고 앉으니 카톡이 왔다. 예준이었다. 수신된 내용은 못 위에 계란이 세워진 사진 한 장. 모서리엔 브이를 한 예준의 손이 빼꼼 나와 있었는데 피부가 그을려 있었다. 남미는 뜨겁구나. 한국은 한강이 얼고 있는데. 그러다 한발 늦게 떠오른 말풍선 하나. ‘정말 기억 안 나?’ 노아는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모니터 속의 계란을 응시했다. 그러다 어렴풋이 기억났다. 불분명한 시점 속에서 예준이 두서없이 제게 했던 말들이. 그러니까 그게 언제더라.
到公司打开电脑坐下时,收到了 KakaoTalk 消息。是艺俊发来的。内容是一张立在钉子上的鸡蛋照片。角落露出艺俊比着 V 字的手,皮肤晒得黝黑。南美真热啊。韩国汉江都结冰了。随后又慢半拍地冒出一条消息气泡。"真的想不起来吗?"诺亚把手放在键盘上,盯着屏幕里的鸡蛋。隐约间想起来了。在模糊的时间碎片中,艺俊曾对自己说过些零碎的话。那是什么时候的事来着。


다큐에서 봤는데 에콰도르에서 못 위에 계란을 세우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대. 거기가 세상의 중심이라서. 에콰도르가 적도라는 뜻이거든.
纪录片里说在厄瓜多尔把鸡蛋立在钉子上,鸡蛋不会倒向任何一边。因为那里是世界的中心。厄瓜多尔就是赤道的意思啊。


나란히 누워도 비좁지 않았던 침대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누워 나눴던 대화였다. 모로 누운 노아의 굽은 등으로 예준이 가슴팍을 붙인 채 나긋나긋했던 말이었다. 온통 남미에 대한 얘기였는데 노아는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기분으로 예준이 하는 말에 응. 응. 하는 대답만 했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노아에게 남미는 관심 밖의 세상이었다.
那是两人紧贴着躺在原本并排躺也不觉拥挤的床上时的对话。侧卧的诺亚弓着背,艺俊把胸口贴上来柔声说的话。全是关于南美的内容,诺亚当时困得随时会睡着,只"嗯、嗯"地应着。对特别怕热的诺亚来说,南美本是个毫无兴趣的世界。


같이 남미에 가자. 적도에 가서 계란도 세우고.
一起去南美吧。到赤道去竖鸡蛋。

응.  嗯。

우리 거기서도 사랑하자.  我们在那里也要相爱。


대답을 못 하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노아는 턱을 괸 채 예준이 보내온 사진을 본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못 위에 우뚝 서 있는 계란을. 노아는 오랜 생각을 마치고 타이핑했다. 기억 안 나. 짧게 완성된 네 글자가 그대로 전송됐다. 그리고 한참 뒤, 오전 회의 들어갈 준비를 하던 중 노아는 예준의 답장을 받았다.
似乎没能回答就睡着了。诺亚托着下巴看艺俊发来的照片——那颗不偏不倚稳稳立在钉子上的鸡蛋。诺亚思忖良久后开始打字:不记得了。简短的四个字就这样发送了出去。过了许久,正当诺亚准备参加上午的会议时,收到了艺俊的回复。


[진짜 나쁘다]  [真是坏透了]


글쎄. 내가 나쁜 건가.  唉。或许坏的人是我吧。






헤어지기 일 년 전엔 예준의 여동생인 예진의 결혼식이 있었다. 둘은 결혼식에 함께 참석했다. 예준의 부모님은 노아를 아들과 한집에 사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지만, 예진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예진과 셋이 식사하는 자리가 많진 않았지만, 예진은 처음부터 거부감 없이 노아를 대했다. 결혼식에 노아를 초대한 이유도 노아가 예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에서 노아는 예준의 곁을 맴돌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예준의 친한 친구로 소개되었다. 간단한 인사 말고는 집안의 맏아들 노릇을 하는 예준을 멀찍이 지켜보는 게 일이었다. 예준이도 얼른 장가가야지. 친척 어른들의 오지랖에도 예준은 넉살 좋게 웃으며 아직 생각이 없단 말만 되풀이했다.


여느 결혼식이 그러하듯 분주하고 산란했다. 일가의 친척과 지인들이 한데 모여 웃고 떠들고 부부가 될 두 사람을 마음껏 축하했다. 노아는 마련된 하객석에 이방인처럼 앉아 모든 장면을 관망했다. 축복 속에서 가족이 된다는 건 저런 거구나. 평생 경험하지 못할 일이었다. 곧이어 가족들의 사진 촬영이 있었고, 사회를 보던 예준도 가족들 곁에 섰다. 예준은 양복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노아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노아도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노아는 관객처럼 단상의 예준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잘못 없이 헤어질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사랑과는 무관하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타지에서의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교통체증으로 도로가 정체되었고, 밖은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노아는 조수석에서 줄곧 창밖만 내다봤다. 예준은 운전하며 종종 노아를 살폈지만 구태여 기분을 묻거나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노아는 방으로 들어가서 자켓을 벗고 타이를 풀었다. 캄캄한 방으로 따라 들어온 예준이 노아의 뒤통수를 보다가 사과했다. 피곤했지. 미안. 그냥 나 혼자 다녀올 걸 그랬다. 노아는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예준은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 노아는 목을 숙인 채 이마를 문지르다가 찬찬히 예준을 돌아봤다. 미안해? 뭐가. 한번 얘기해봐. 나한테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예준이 착잡한 얼굴을 하더니 가까이 걸어왔다. 미안해. 그냥 다. 노아는 비참한 기분으로 손에 쥐고 있던 타이를 예준에게 던졌다. 던져진 타이가 예준의 어깨를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노아의 팔을 붙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러지 마. 내가 다 잘못했어. 노아는 예준에게 안겨 사과를 듣다가 종국에는 표정을 뭉갰다.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눈을 감고 예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혀끝까지 나온 말들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나는 예준아. 죄 없는 니 사과를 듣는 게 지겹고 불행해.






예준이 다시 연락해온 건 열흘만의 일이었다. 예준은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 칠레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한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노아는 사람이 빼곡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칠레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예준을 상상했다. 예준이 산티아고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텍스트로 짧은 대화를 나눴다. 무려 열세 시간의 시차를 사이에 두고 뒤바뀐 밤낮을 거슬러. 예준이 물었고 노아가 답을 했다.


[우리 혹시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어?]


[아니.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


각자 나름대로 불행했잖아. 노아의 대답 이후 예준은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새로 산 슈퍼싱글 침대에서 노아는 또 한 번 예준의 꿈을 꿨다. 지난번과 같은 꿈이었다. 예준을 처음 만난 술자리. 이상하리만큼 눈이 마주치던 오래전 그날. 뒤엉킨 소음 속에서 노아는 오랫동안 예준을 바라봤고, 대각선에 자리한 예준은 취기 오른 얼굴로 노아를 주시하며 비스듬히 턱을 괬다. 그러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에 입술을 파묻는 모습까지 똑같이 되풀이됐다. 낯선 한노아에게 매료되었다던 그날의 남예준을. 예준은 별안간 얼굴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조용한 모양새로 벌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알아보지 못한 채 노아는 잠에서 깼다.


일요일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노아는 티비를 틀어놓고 시리얼을 말았다. 티비에선 뉴스가 한창이었다. 브라질 리우 번화가에서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사건으로 모두 열두 명이 숨지고, 그중 다섯 명은 한국인 관광객으로 밝혀졌습니다. 앵커가 차분하게 보도를 전했다. 노아는 시리얼을 뒤적이다 티비를 바라봤다. 아수라장이 된 현지의 사건 현장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었다. 노아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일어나서 핸드폰을 찾았다. 일정대로라면 예준은 리우였다. 리우에서의 여행을 끝으로 인천으로 돌아올 예정이랬다. 먼저 보이스톡을 걸었지만 받질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텍스트를 적어 보냈다. 별일 없지? 연락 해줘.


밤이 되도록 예준은 답이 없었다. 노아는 고민하다 예진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예진은 예준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둘이 같이 지내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예진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다시 만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노아는 아니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예진은 뜻밖에 얘기를 꺼냈다. 그건 노아가 모르는 예준의 이야기였다. 노아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예진이 해주는 얘기를 들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다가 끝끝내 표정이 흐트러졌다. 듣는 게 버거워 잠시 귀에서 수화기를 떼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예진이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기다렸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가족에게 연락이 가는 게 당연할 테니. 소식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노아는 틈만 나면 예준을 생각했다. 폭양에 그을린 남예준을.


노아는 그날을 떠올린다. 이별을 직감하고 있던 시기, 예준이 만취 상태로 새벽에 귀가했던 그날을. 주량을 넘겨온 적은 거의 없었는데 드문 일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노아가 예준을 부축해서 간신히 침대에 눕혔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엎어진 예준의 겉옷을 벗겨주다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노아는 예준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돌아 눕혔다. 예준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헤어지기 무서워. 예준이 작게 뱉은 말을 이번엔 알아들었다. 노아는 예준이 우는 얼굴을 보다가 일어났다. 방문을 닫고 나와서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고 예준에게 줄 얼음물을 준비했다. 얼음이 담긴 머그잔에 물을 붓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노아는 오랫동안 싱크대를 붙잡고 선 채로 숨죽여 흐느꼈다. 손등 피부가 미어져 시퍼런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다음 날, 예준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지난밤도, 지갑의 행방도. 그리고 노아는 예준과 헤어졌다.






며칠 뒤 퇴근길엔 함박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집 공동현관에 도착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노아는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다가 옆에서 예준을 봤다. 하릴없이 주변을 서성이던 예준은 뒤늦게 노아를 보더니 웃었다. 노아는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예진이었다. 노아는 예준을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네, 예준이 왔네요. 저한테. 말하는 동안 예준이 노아에게 걸어왔다. 노아는 예진의 전화를 짧게 마무리했다. 밖에서 오래 기다렸는지 예준의 귀 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예진이가 너한테 가보라고 하길래.”

“니 왜 연락은 하다 말아?”

“중간에 핸드폰을 잃어버렸어. 원래 오자마자 연락하려고 했는데.”

“바보야? 뭘 그렇게 자꾸 잃어버려.”

“그러게…. 뭐가 자꾸 없어진다.”


이상하게 중요한 것만 사라지네. 예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노아는 예준을 가만히 쳐다보다 못내 눈썹을 찌푸렸다. 눈앞에 예준이 있는 걸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됐다. 한숨을 크게 몰아쉬자 입김이 나왔다. 노아는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예준은 그제야 가까이 와서 노아를 안았다. 나 많이 걱정했어? 미안해. 한국 오면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진짜 미안해. 노아야 미안해.


노아는 예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목이 막혀 말해내지 못했다. 얼마 전 예진으로부터 듣게 된 예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남미로 떠나기 전,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자신의 퇴사 사실을 통보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이유를 털어놨다고 했다. 저랑 같이 살던 친구, 그냥 친구 아니에요. 제가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실망하셨으면 죄송해요. 근데 어쩔 수 없어요. 저도 제 인생 살아야죠.


예준은 노아를 품에 안고 그날을 떠올린다. 이별을 직감하고 있던 시기에 자신이 만취 상태로 귀가했던 그날을. 닫힌 방문 밖에서 노아가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듣다가 바지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예준은 처참한 기분으로 벽과 닿아있는 침대 틈새에 자신의 지갑을 깊숙이 끼워 넣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예준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면서,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지난밤도, 지갑의 행방도. 그리고 예준은 노아와 헤어졌다.


날이 추웠다. 둘은 같이 집으로 올라왔다. 노아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예준은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센서 등이 켜졌고, 둘은 문이 닫히기 전에 입을 맞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벌어진 두 입술이 엇갈리듯 빈틈을 메우며 맞물렸다. 예준이 노아의 뺨을 감싸며 아랫입술을 감쳐물자 노아가 예준의 목을 껴안았다. 적막한 실내에서 센서 등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모든 슬픔은 과정일 뿐이었나.


누운 몸 위로 덮이는 예준을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섹스가 처음도 아니면서 노아는 아팠다. 예준을 받아들이는 게, 처음처럼 아팠다. 애태우는 기교도, 외설의 요구도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온전히 서로에게 욕정 했다. 서로의 벗은 몸은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노아는 가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울지 않았다. 표정이 흐트러질 것 같으면 유일한 방편처럼 예준에게 입을 맞추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입술을 깨물면서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작게 낼 뿐이었다. 예준은 그런 노아를 보며 애가 닳아 어쩔 줄을 몰랐다.


“니가 없는 동안 나는 아주 엉망이었어.”


연인은 사이즈가 좁아진 침대에서 마주 누워 살을 맞대고 있었다. 예준이 나지막이 뱉은 말에 노아는 예준의 눈감은 얼굴을 만져보던 손을 멈췄다. 예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노아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표정에선 슬픔이 읽혔다. 예준은 아직도 자신이 한노아의 기분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단 사실에 놀랐다.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예준이 부탁하듯 말했다. 노아는 전보다 그을린 예준의 뺨을 어루만지며 엷게 웃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적도는 어땠어?”

“적도는 날씨가 좋았고.”

“어.”

“나는 한노아를 사랑했지.”


예준이 답했다. 세상의 중심에서도 한노아를 사랑했노라고. 예준은 누운 몸을 당겨서 노아에게 이마를 붙였다. 사랑해. 아주아주 많이 사랑해. 계속 말해도 모자랄 만큼. 예준이 작게 속삭였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노아만이 들을 수 있는 고백이었다. 노아는 꿈에서 봤던 예준의 입모양을 이제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해. 예준의 말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노아는 대답 대신 예준의 입술 위로 가만히 입술을 갖다 댔다.


“이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마.”

“이젠 절대 안 잃어버려.”


우리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다시 또 만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우리는 분명 다시 또 서로에게 실망하게 되겠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이해는 어렵고 사랑은 쉬우니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현재처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우리 다시, 모든 걸 감수해서라도 이 어리석은 사랑을 지켜보자고.


“널 사랑해. 아주 결백하게.”


연인은 다시, 사랑을 맹세한다. 남미의 폭양보다 맹렬하게. 이곳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