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사방이 푸르스름한 꼭두새벽에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집을 나서며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오늘은 반드시 헤어지자고. 더는 미뤄둘 수 없었다. 재고 따질 것도,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눈 꽉 감고 한 번 저지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깜이 되는 사람에게나 허락 됐다. 그런 의미에서 金旼炡은 남들보다 운이 좋았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단지 사랑만 져버리면 되는 거였다. 

현관문이 닫히는 동시에 손안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연달아 날아온 문자는 5분 후에 도착하니 시간 맞춰 내려오라는 내용이었다. 金旼炡은 알겠다고 짧게 답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차 안에서 대화는 간간이 이어졌다. 홍혜인이 스케줄에 대해 이것저것을 설명하면, 金旼炡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대로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덧붙이는 식이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분주한 출근길이 지나갔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金旼炡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각자의 일상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누군가와 헤어져야 하는 사람이 저 중에 또 있을까 싶기도 했다.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金旼炡은 샵에서 메이크업 받는 내내 핸드폰으로 저녁 약속 장소를 찾았다. 아까 봤던 곳은 디너 코스가 너무 짧아서, 지금 보는 곳은 메뉴 구성이 너무 단조로워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헤어를 담당하는 室长님은 어제 시상식 스타일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 일간지에서 선정한 레드카펫 베스트 드레서에 3년 연속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소식도 그녀로부터 전해 들었다. 소속사 바꿔도 샵은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에는 대답 대신 작게 웃어 보였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도 담담함을 잃지 않기 위해 공을 들였다. 대사를 외우고, 감정을 이끌어내고,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고, 대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기계적으로 수행했다. 탁 감독은 따로 코멘트 할 게 없다며 엄지를 치켜세웠고, 몇몇 스태프와 매니저들은 박희은 작가가 오디션도 안 보고 여주로 뽑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수군거렸다. 정작 본인은 무엇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모니터링만 수십 번 반복했는데, 스태프들에게는 그 모습조차 배우의 몰입감으로 비추어졌다.

점심에는 대기실에서 혜인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밥알 하나하나가 모래알처럼 느껴졌지만 억지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혜인을 걱정시키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오후 촬영까지 버텨야 했으니까. 마치 대본에 적힌 지문에 따라 움직이듯 반찬 몇 개를 집어먹고 쌀밥을 헤집었다. 혜인이 어제 회식 끝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잤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했다. 역시나 거짓말이었다. 金旼炡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오늘 할 말을 계속 연습했다. 우리 여기까지 할래요. 그 짧은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떤 톤으로 말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오후 촬영도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됐다. NG가 거의 나지 않아 원래 계획보다 일찍 스케줄이 끝났다. 감독은 이대로만 가면 나중에 추가 촬영을 따로 잡을 필요는 없겠다며 꽤 흡족해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며 金旼炡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적어도 일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것에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드라마에 걸려 있는 투자금이 얼마인데 사랑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재차 마음을 가다듬었다. 식당까지 데려다주면 되냐는 혜인에게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랑 만나냐는 질문에는 아는 언니라고 대충 둘러댔다. 홍혜인은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들었다. 시상식 뒤풀이가 자정 넘어서야 끝난 만큼 그녀 역시 적잖이 피곤해 보였다. 金旼炡은 택시를 타고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요즘 따라 재계약에 대해 물어보는 기자가 부쩍 늘었다는 혜인의 말이 떠올라 조용히 뒷좌석에 올랐다.

퇴근 시간 직전의 도로는 다소 복잡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연인과 만나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족과 저녁을 먹으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헤어지러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순간마저 세상과 동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소 서글펐다. 시작만큼이나 끝도 평범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예외로 남아야 하는 관계였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金旼炡은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刘知珉이 던지는 질문들에 하나씩 성실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표정이 굳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당연히 음식 맛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동작을 의식적으로 반복했을 뿐이었다. 속이 더부룩한 건지 아니면 뒤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오 代表에게 연락해서 일주일만 더 시간을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망설이다 보면 어느덧 테이블에는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재차 다짐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게 맞아. 그게 서로를 위한 최선이야. 여기서 더 미루면 나는 절대 이 사람을 놓지 못할 거야. 욕심은 끝없이 깊어질 거고, 그 위로 거듭해서 변명을 덧대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반드시 헤어져야 해. 金旼炡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에 오른 후에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촬영이 끝나면 어떻게 지낼 거냐 묻는 刘知珉에게 당분간은 차기작을 고르며 쉴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전혀 계획이 없었지만 일단 에둘러 대답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근처라고 안내했을 때 金旼炡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화면에는 아무런 알람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뭐라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정리될 것 같았다. 刘知珉이 짐 챙기는 걸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때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분명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잠시 후, 아파트 후문 근처에 차가 멈춰 섰다. 비상등 깜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刘知珉이 도착했다고 말했지만 金旼炡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찰칵하고 안전벨트 풀리는 소리가 차 안에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金旼炡은 천천히 숨을 고른 뒤에 간신히 刘知珉을 불렀다.

작은 목소리였어도 떨림은 없었다. 이내 옆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입술을 달싹이는 金旼炡은 조수석 바닥만 바라봤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서 다행이었다. 지금 표정이 어떤지는 金旼炡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대로 계속 앉아 있다가는 머지않아 울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됐다. 두 눈을 질끈 감은 金旼炡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우리 여기까지 할래요. 며칠 전부터 준비했던 문장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刘知珉이 뭐라고 대답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상관없었다.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으니까.

刘知珉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는 라디오 소리와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刘知珉이 날씨 얘기를 시작했다. 주말에 비가 올 거라고, 올해는 장마가 길 거라고. 金旼炡은 그런 刘知珉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슴이 조여왔다. 서서히 실감 났다. 이것이 저희의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다. 

차체의 잠금이 풀렸다. 金旼炡은 조수석 손잡이를 잡았다. 차에서 내린 후 문을 닫으려다 주춤거렸다. 마지막으로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국 金旼炡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문을 닫았다. 刘知珉이 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파트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연기는 별거 아니었다. 정말 너무 쉬웠다. 진심은 속으로 삼켰다. 이 또한 익숙했다. 늘 해오던 일이었다. 주차장을 지나 아파트 출입구로 향하는 동안 앞만 쳐다봤다. 뒤를 돌아보면 다시 차로 뛰어가서 제가 했던 말을 전부 취소하고 刘知珉을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하는 것이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헤어져야 했다.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옆에 있어서는 안 됐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서야 金旼炡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맞아. 잘한 거야.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벽에 기댔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임벨과 함께 문이 열렸다. 겨우 발을 떼고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열 발자국 남짓한 거리가 유독 멀게만 느껴졌던 날이었다. 金旼炡은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 키패드를 눌렀다. 첫 번째 숫자를 입력한 순간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누가 볼세라 재빨리 눈가를 닦아냈다. 

왜 우는지 저 조차도 알지 못했다. 내가 선택한 일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입술을 꽉 깨물며 숨을 가다듬고 다시 키패드를 누르려고 했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서 숫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金旼炡은 고개를 들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주먹을 세게 움켜쥐어도 호흡은 조금씩 거칠어졌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마지막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인사였다. 마치 내일이면, 아니 꼭 내일이 아니라도 며칠 뒤에 다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어볼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고,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보며 서로를 꼭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만나기는커녕 다시는 연락 할 수도 없다. 접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견딜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참아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새하얀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깨도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내 숨겨왔던 감정들이 끝끝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언제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파트 주변을 순찰하던 경비원에게 여기에 차를 대시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려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에 기어를 D로 옮겼다. 그다음에는익숙한 주차장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어찌저찌 운전해서 서초동까지 무사히 온 것 같은데 페이지가 뜯겨나간 책처럼 중간이 텅 비어 있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필름이 끊길 수 있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너무 피곤해서 정신이 없었던 거라고 하기에는 최근 들어 야근했던 날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요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시동을 끄고 멍하니 앞만 쳐다봤다. 앞 유리에 차갑게 반사되는 형광등 불빛도, 멀리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도 전부 다른 세상의 것들처럼 느껴졌다. 刘知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텅 비어 있는 좌석은 어쩐지 낯설기만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저 자리에 金旼炡이 앉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여기까지. 그 단어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조수석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시트를 쓸어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차가운 인조가죽의 감촉만이 손바닥에 전해질 뿐이었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던 金旼炡이 아직까지 선명하기만 했다. 머리카락에 가리어진 얼굴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도, 조수석을 나와 문을 닫던 모습도, 출입구로 길게 뻗은 그림자도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기까지. 그게 金旼炡이 정한 선인 듯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어째서 지금인지, 왜 그만해야 하는지 따질 것도 없었다. 刘知珉은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끝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시작한 관계였다. 언젠가는 마주해야만 했던 순간이었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刘知珉은 역시나 생각이 너무 짧았다. 부담을 덜어주지 못할 망정 대단히 선심 쓰듯 부채감까지 떠넘겼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하면 뭘 어쩌겠다고. 金旼炡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느라 몇 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게 뻔했다. 자신은 그런 분위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刘知珉은 안경을 벗어 대시보드 위에 대충 던져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여러모로 한심스럽기만 했다. 평소와는 분명 달랐을 텐데, 한 번쯤은 감정을 드러냈을 텐데.

한참동안 운전석에 앉아 있던 刘知珉은 겨우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버튼을 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도착을 알리는 차임벨도 금방 울려 퍼졌다. 현관문 앞에 서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차례로 입력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집까지 오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러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두 쌍의 슬리퍼였다. 刘知珉은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신발을 벗었다. 기분이 묘했다. 오랜 꿈에서 비로소 깨어난 것 같았다.  

거실로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액자, 시계, 테이블, 텔레비전, 책장.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다. 刘知珉은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내리고 앉아 창밖을 쳐다봤다. 밤이 제법 깊어 사방이 깜깜했다. 저기 멀리 다른 건물의 불빛들만이 어둠 속에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인데도 뭐가 이렇게 적응이 안 되나 싶었다. 당장 어제도 일찍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혼자 저녁을 시켜 먹고, 늦게까지 이 자리에서 텔레비전을 봤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해 할 이유가 없다.

한숨을 길게 내뱉은 刘知珉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혹시 몰라 혀도 깨물어봤다. 아팠다. 이곳이 현실이라는 뜻이었다.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나갔다. 집이 너무 조용했다. 텔레비전이라도 켜둘까 싶어서 소파 쿠션 사이를 더듬어봤지만 리모컨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내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金旼炡이 자꾸 떠올랐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 모습이 당분간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 것 같았다. 실은 허튼 미련일지라도 아주아주 오래도록 남아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刘知珉은 눈을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었다. 이제 정말 씻고 침대에 누워야 했다. 그런데도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그냥 이 자리에 아침까지 앉아 있고 싶었다. 움직이기 싫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내일 하루 쯤은 해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했다.









부장실에 도착한 형사1부 검사들은 수첩과 파일을 꺼내놓고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오전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긴 테이블 위에 사각형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출입문 근처 앉은 양혜솔이 주변을 둘러보며 동료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다시 한번 수첩을 확인했다. 그 안에 빼곡히 적힌 메모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봤다. 테이블 끝 창가 쪽 의자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는데도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혜솔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카톡과 문자에 이어 부재중 전화까지 살펴봤지만 그 이름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검사들도 하나둘 빈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작은 목소리로 대검 간다고 이제 아주 눈에 뵈는 것도 없냐며 중얼거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깨를 으쓱하고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문을 열고 부장이 들어온 것은 정각 10분 후였다. 모든 검사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는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을 한 명씩 훑어본 뒤에 테이블 맨 앞쪽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러다 주인 없는 의자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부장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미간이 찌푸려졌고, 입술은 약간 굳어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경직됐다. 다른 검사들은 숨소리까지 참아내며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뭐야. 유 프로 오늘 출근 안 했대?"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은근한 못마땅함이 담겨 있었다. 혜솔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뇨, 그런 소리는곧 올 것 같습니다. 아침에 급한 일이 있었나 봅니다."

  "전화해봐."


그는 명령조로 짧게 말하고 커피를 홀짝였다. 혜솔은 재빨리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연락처에서 知珉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몇 직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혜솔을 올려다봤다. 한참 후에야 스피커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선배. 


  "회의 시작했어. 그래. 빨리 들어와."


혜솔은 제 할 말만 하고 곧장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어뒀다. 바로 앞이라고 합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부장은 알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에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검사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일단 최 프로 얘기부터 듣자고."


주간회의는 각자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들의 진행 상황을 순서대로 보고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최 검사가 목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사이버 명예훼손 사건의 기소를 결정했고, 다음 주 화요일 공판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부장이 피고인의 항소 가능성을 묻자, 그녀는 준비해온 자료를 건네며 변호사가 1심에서 선고받기 위해 합의 의사를 타진해 왔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때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刘知珉은 테이블 상석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고 비어 있는 의자로 걸어갔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 약속은 지킵시다."


간결하면서도 뼈가 실린 한 마디였다. 刘知珉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서 느릿하게 수첩을 펼쳤다. 부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모양인지, 계속 보고하라는 듯 최 검사 맞은 편에 앉은 남자에게 손을 휘적였다. 반면 큰소리 나기를 내심 기대었던 직원들은 고까운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성한대학교 개인정보 유출 건은 현재 교육부 감사와 맞물려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학 측에서도 자체 조사에 착수했고, 결과는 내주 안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정치적 이슈로 번질 소지는 없냐는 질문에 남자는 현재로서는 단순 보안 시스템 미비로 보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교육부 감사 결과를 지켜보며 수사 방향을 조율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다음은 친족 간 명예훼손 분쟁 건이었다. 재산 상속 문제와 얽혀 있어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이 동시에 진행 중이고, 현재 조정 위원회에서 합의 중재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부장은 가족 분쟁은 되도록 재판 없이 해결하는 게 좋겠다며 변호사에게 적극적으로 합의를 권유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검사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 유포 건에 대해 보고했다. 기술적 분석이 복잡해서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고, 결과 나오기까지 2주 정도 더 소요될 예정이라고 했다. 피해자 중에 미성년자도 존재한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부장은 미성년자 관련 건은 최우선으로 처리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혜솔은 동기의 보고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옆을 힐끔거렸다. 얼핏 보기에는 지난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냥 회의 시간을 깜빡한 건가. 양혜솔이 수첩 끄트머리에 물음표를 그렸다. 

이어서 혜솔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결재판을 챙겨 부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료를 꺼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후에,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혜솔이 맡은 사건은 사이버 스토킹이었는데, 피해자가 연예인이다 보니 확인되지 않는 소문에 기반한 추측성 보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해자는 여러 개의 가짜 계정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협박과 스토킹을 해왔고, 현재는 사이버 수사팀의 IP 추적으로 신원 특정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언론 대응은 어떻게 하고 있지?"

  "피해자 측 변호사와 협의해서 수사 진행 상황은 최소한으로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래, 기자 새끼들한테 괜한 정보 새어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거야. 자칫 잘못하면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부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혜솔의 보고가 끝이 났으니 다음 사람이 이어서 발표를 하면 되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이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펜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큼. 그럼에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부장의 얼굴에 서서히 짜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양혜솔이 刘知珉의 팔을 건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정신 좀 차리지. 맞은 편에 있던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혀를 찼다. 刘知珉은 그제야 부장을 쳐다봤다.


 "남부발전 임원이 직급, 급여, 상벌 기록 등의 직원 정보를 외부로 반출한 사건입니다. 내부망 로그기록을 분석해서 피의자 특정하고 조사 진행할 예정입니다."

  "소환은 언제쯤 할 건데."

  "일단은 다음 주 중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언제. 정확한 날짜 나왔어?"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딱히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회의 들어오기 전에 예상하고 미리 대답을 준비했을 법한 수준인데, 오늘은 어째 수첩에 대충 적힌 메모들을 그대로 읽기만 했다.


  "죄송합니다. 확인해서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인데."

  "그것도 확인 중입니다."


혜솔은 제가 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입술을 축였다. 이건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지적받을 만한 태도였다. 월요일 오전부터 털리고 시작하면 더욱 파이팅 넘치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어서 저러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무성의함이었다. 일정한 박자로 책상을 두드리는 부장도 잔소리하기에는 입이 쓰니 실소만 내뱉고 마는 것일 테다. 그의 눈길이 테이블 반대편 끝자리로 닿았다. 형사 1부 막내 검사가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시작하겠습니다.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지만 나름 차분하게 본인의 사건을 보고했다. 그런데도 부장은 마치 누구 보란 듯이 연신 까다로운 질문만 퍼부었다.


  "증거 수집은 어떻게 진행했나."

  "메신저 대화 내용과 이메일을 캡처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캡처만? 원본 데이터는 확보했어?"

  "그아직 원본까지는"

  "피의자가 증거 인멸할 가능성은 고려 안 해? 회사 서버에서 데이터 삭제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대비해서 뭘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봐."


남자가 더듬거리며 대답하려고 했지만 부장의 매서운 시선에 조금씩 말이 꼬였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또박또박하던 목소리도 점차 가늘어져 갔다. 회사 측에 증거 보전 요청서를 발송했다는 대답에 부장이 강제성이 있냐고 되물었으나, 그는 이번에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법원에 증거보전 명령 신청을검토하고 있습니다"

  "이거 저번 주에 배당 받은 사건 아냐? 며칠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검토 단계야."

  "그게"

  "기본도 안 되어 있어. 자료 제대로 만들어서 점심시간 전까지 다시 보고해."


회의 준비를 덜 한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에 대한 대우는 무척 달랐다. 다른 직원 역시 그 차이를 느꼈지만 입 밖으로 불만을 내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부장이 수첩을 덮으며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인사 얼마 안 남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이번에 방 빼야 하는 사람들은 사건 처리에 차질 없도록 미리미리 정리해둬. 괜히 질질 끌면서 깔고 앉고 있다가 다음 담당자한테 떠넘기지 말고."

  "알겠습니다."

  "특理事항 없으면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그 말에 직원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부장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업무수첩을 챙겨 들고 기수 순서대로 부장실을 빠져나갔다. 양혜솔도 테이블을 벗어나려다 멈칫하고 刘知珉을 쳐다봤다. 혹시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부장에게 타이밍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 검사는 잠깐 나 좀 보고 가."


혜솔은 할 수 없이 다른 검사들을 따라 걸음을 옮겨야 했다. 혼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노파심이 들어 문이 닫히기 전에 고개를 빼서 안을 살펴봤으나, 의자에 가려져 부장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복도를 걸어가던 혜솔이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봤다. 이따가 점심 먹으면서 물어볼까 아니면 기다렸다가 같이 갈까.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출근 전날 과음하는 스타일은 더더욱 아니었고. 양혜솔은 짧게 고민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월요일이니 그런 거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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